6화(5,229자) · 기훈 · 구월 스무닷새

두 번째 사람

빌린 날들의 지도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내 까닭은 스물한 살 겨울 밭두렁 끝에 서 있던 오리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한다.

구월 스무닷새 밤, 나는 걸음터 멍석 가운데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단이가 있었고, 곰보 할멈이 관솔불을 봤다. 그 전 사흘 동안 나는 멍석에서 아무것도 줄이지 못했다. 일곱 해 동안 빌린 백일곱 날 가운데 까닭이 떠오르는 것은 한 줌뿐이었고, 나머지는 안개였다.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는데 왜 했는지가 안 떠올랐다. 그런 날을 말하면 안 준다. 둘러대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첫날 밤 나는 오리나무 얘기를 꺼내려다 입을 닫았다. 둘째 날 밤에는 스물세 살 여름 얘기를 하다가 그만두었는데, 비 오는 날 장에 못 간 것 말고 그다음 날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말하려는 순간 목이 콱 막혔다. 셋째 날 밤에는 아예 멍석에 앉지 않고 마당 가장자리를 혼자 걸었다. 걷는 건 쉽다. 여섯 해 동안 한 일이다. 말하는 건 여섯 해 동안 안 한 일이다.

단이는 그런 나를 사흘 동안 내버려 두었다. 나흘째 저녁 죽을 뜨다가 구만득 들으라고 크게 말했다. 기훈이는 짐은 백 근을 지면서 입은 한 근을 못 든다고. 구만득이 그 말이 웃긴지 한참 웃다가, 제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멈췄다.

그날 저녁 단이가 먼저 말했다.

“까닭 모르는 날 말고, 제일 창피한 날부터 하시오. 창피한 건 거짓말로 못 해.”

그래서 오리나무부터 말했다.

*

스물한 살 겨울, 나는 아랫마을 황 생원 밭두렁에 선 오리나무를 베었다. 주인이 있는 나무인 줄 알았다. 장작으로 패서 주막거리에 팔았고 엽전 여덟 닢을 받았다. 저녁에 황 생원이 우리 집 사립문에 와서 물었다. 나는 안 베었다고 했다. 생원은 한참 내 얼굴을 보다가 돌아갔다. 그날 해 질 녘 나는 돌 셋에 올라갔다.

두 번째 날, 나는 오리나무를 베지 않았다. 대신 황 생원네 마당에 가서 장작을 패 주고 저녁을 얻어먹었다. 생원은 나를 착한 총각이라고 했다. 그 뒤로 생원은 죽을 때까지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 사람이 아는 나는 두 번째 날의 나뿐이다. 나무를 베고 안 베었다고 한 나는, 이 세상에 나 하나만 안다.

말을 하면서 나는 멍석 짚을 쥐었다. 짚이 손바닥에서 버석거렸다. 관솔불이 한쪽으로 쏠려 타면서 송진 냄새가 코를 찔렀고, 둘러앉은 사람들 숨소리가 그 불 소리에 섞여 들렸다. 다들 기운 몸이라 둘러앉은 동그라미가 반듯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이지러진 동그라미 한가운데서 나는 스물한 살 겨울의 나를 꺼내 놓았다.

그다음은 스물네 살 봄이었다. 남의 논에 모를 심어 주고 품삯을 받으러 갔더니 주인이 사흘 더 기다리라고 했다. 첫 번째 날 나는 그 집 마당에서 소리를 질렀다. 주인 멱살을 잡았다. 그 집 큰애가 마루 끝에 서서 그걸 봤다. 해 질 녘에 나는 돌 셋에 올라갔다. 두 번째 날에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그 집 마당에 하루 종일 서 있었다. 저녁에 주인이 삯을 내주면서 사람이 왜 이러느냐고 했다. 큰애가 물 한 바가지를 떠다 주었다. 나는 그 물을 마셨다. 그 애한테 나는 물 떠다 준 아저씨다. 멱살 잡은 아저씨가 아니다.

스물여섯 살 겨울에는 주막에서 내 걸음을 흉내 내던 사내를 쳤다. 두 번째 날에는 그 사내한테 술을 샀다. 사내는 이듬해 장에서 나를 보고 반갑다고 손을 흔들었다.

셋을 말하고 나서 나는 한참 멍석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알았다. 알았다기보다, 입에서 먼저 나왔다.

“나는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어서 빌렸소.”

둘러앉은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원래 날의 나는 남의 나무를 베고 안 베었다 하는 사람이오. 멱살 잡는 사람이고, 주먹 쓰는 사람이오. 빌린 날의 나는 장작 패 주는 사람이고, 마당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고, 술 사는 사람이오. 사람들은 빌린 날의 나만 아오. 나는 그 사람이 좋았소. 그 사람이 되려고 원래 날의 나를 지웠소. 하루씩, 하루씩.”

단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할멈은 관솔불을 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말을 했다.

“초사흘도 그랬소. 경구를 친 나를 지우려고 빌렸소.”

말이 끝나자 왼쪽 옆구리에서 무언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갔다. 짐을 내려놓는 게 아니었다. 오래 짊어진 지게 멜빵이 한꺼번에 끊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단이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받쳤다. 단이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한꺼번에 몇이나 나간 거요, 이 사람아.”

이튿날 새벽에 세어 보니 서른넷이었다. 남은 것은 일흔셋. 여섯 해 전 정월 이래 처음으로, 나는 작대기 없이 사립문까지 걸었다.

사립문 밖 개울가에서 나는 한참 서 있었다. 동이 트면서 산등성이 너머에서 빛이 비스듬히 넘어와 개울물 위에 내 그림자를 눕혔다. 여섯 해 동안 그림자는 늘 왼쪽으로 쓰러진 사람 모양이었다. 그날 새벽 물 위의 그림자는 비스듬히 서 있었다. 아직 곧지는 않았다. 그래도 서 있었다. 물살이 그림자를 흔들어 놓을 때마다 나는 그게 도로 쓰러질까 봐 숨을 참았다.

곰보 할멈이 뒤에서 짚신 끄는 소리를 내며 왔다. 할멈은 개울물에 비친 내 그림자를 내려다보더니, 제 그림자를 그 옆에 나란히 세웠다. 할멈은 오른쪽, 나는 왼쪽. 둘이 서로 반대로 기운 그림자가 물 위에서 지붕 모양을 만들었다.

“초가 한 채 지었네.”

할멈이 이 빠진 입으로 웃었다. 나도 웃었다. 소리 내서 웃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났다.

*

그날 한낮에 경례가 왔다.

경례 혼자가 아니었다. 문경 현아 엄 형방이 붉은 전립을 쓴 사령 둘을 앞세우고 사립문으로 들어왔고, 그 뒤에 마치석이 나귀를 타고 따라왔다. 경례는 형방 곁에 서 있었다. 앞치마가 아니라 흰 무명 상복을 입고 있었다. 삼우를 지낸 지 스무날이 넘었는데도 그 옷을 벗지 않았다.

마당을 돌던 사람들이 멈췄다. 멍석을 개던 단이가 허리를 폈다.

“저 사람이에요.”

경례가 나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저 사람이 우리 오라비를 쳤어요. 초사흘에. 자기 입으로 말했어요. 쌍봉댁 마방에서, 이 아주머니한테요. 나는 부엌 봉당에서 다 들었어요.”

경례는 한 번 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객주 어른이 오라비 외상을 없던 걸로 해 준다고 했어요. 관아에 가서 들은 대로만 말하면. 그래서 온 거 아니에요. 외상 같은 거 원래 없었어요. 그냥, 스무날 동안 잠을 못 자서 왔어요.”

마치석이 나귀 위에서 헛웃음을 쳤다. 엄 형방이 부채를 펴며 나를 봤다.

“오작인이 뺨 멍이 주먹 자리라 했었지. 네가 그랬느냐?”

마당이 조용했다. 도는 발소리가 멈춰 있어서 영강 물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경례를 봤다. 경례도 나를 봤다. 그 애 눈 밑이 검게 꺼져 있었다. 스무날 동안 그 말을 안고 잠을 못 잤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들은 사람한테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이미 그 날이 그 애 안에 있다.

“쳤소.”

그 한 마디가 마당에 떨어지자 멍석 둘레에 섰던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누가 아이고, 하고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몸을 짚어 봤다. 한 푼도 안 줄었다. 이미 들은 사람 앞에서 같은 말을 한 번 더 했으니 줄 리가 없다. 그래도 그 말을 안 했으면, 나는 경례 앞에서 다시 원래 날의 내가 됐을 것이다.

사령들이 포승을 꺼냈다. 단이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섰다.

“나리, 그건 지운 날이오. 그 사람이 친 건 첫 번째 날이오. 두 번째 날에는…….”

“첫 번째 날? 그건 또 뭐냐?”

엄 형방이 되물었다. 단이가 입을 벌린 채 멈췄다. 그걸 설명하려면 돌 셋과 빌림터와 걸음터 마당이 무엇인지 다 말해야 한다. 이 마당에 서 있는 서른 명이 왜 기울었는지도. 그 말이 관아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단이도 유곡역 행수의 말을 나한테서 전해 들었다. 단이의 턱이 굳었다.

나는 형방 소매를 봤다. 그 안에 노란 구슬이 들어 있을 것이다.

“나리, 경구 손에서 나온 구슬은 어찌 되었소?”

엄 형방이 제 소매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무언가 둥근 것이 천 밑에서 굴렀다.

“증물은 관아에서 알아서 한다. 죄인이 증물 걱정을 하느냐?”

나귀 위에서 마치석이 헛기침을 했다.

“나리, 이 사람이 원래 실없는 소리를 잘 하오. 동무 잃고 좀 이상해졌소. 쳤다는 건 쳤다는 거지. 사람이 벼랑에서 떨어지기 전에 누구한테 맞았으면, 맞아서 비틀거리다 떨어진 거 아니겠소?”

그러고는 나를 내려다봤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주막 마루에 앉아 있었소. 오가는 사람이 다 봤지.”

*

사령 하나가 내 두 손목을 앞으로 모아 묶었다. 포승이 손목 뼈를 파고들었다. 다른 사령이 등을 밀었다. 나는 왼발을 먼저 디뎠다. 일흔셋이라 한결 쉬웠다. 그래도 사령 눈에는 비딱하게 걷는 죄인이었다.

“똑바로 걸어라.”

“이게 똑바로 걷는 거요. 여섯 해 만에 제일 똑바르오.”

사령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뒤에서 단이가 따라오다 사령 하나의 전립을 주먹으로 쳐서 떨어뜨렸다. 모르고 그랬다고 했다. 네 푼 기운 사람이 모르고 칠 만한 높이가 아니었다.

사립문을 나설 때 나는 한 번 돌아봤다. 경례가 마당 가운데 혼자 서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었다. 걸음터 사람들이 그 애한테서 한 걸음씩 떨어져 서 있었다. 우리를 고발한 애가 아니라, 제 오라비 친 사람을 고발한 애인데도 그랬다. 경례는 그 한가운데서 흰 치마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서 있었다.

“경례야.”

사령이 등을 떠밀었지만 나는 한 번 더 불렀다.

“네가 잘한 거다.”

경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루로 가는 이십 리는 볕이 따가웠다. 추수 끝난 논에 볏가리가 줄지어 서 있었고, 논둑에서 메뚜기가 발 앞으로 튀었다. 묶인 손으로는 균형을 잡을 수 없어서, 나는 기운 쪽 먼저 딛기를 한 발 한 발 머릿속으로 불러 가며 걸었다. 왼발, 무릎, 허리, 목. 왼발, 무릎, 허리, 목. 사령 하나가 그걸 듣고 무슨 주문이냐고 물었다. 걷는 법이라고 했더니, 그 사령이 제 걸음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저도 모르게 왼발부터 내디뎠다. 그러다 다른 사령한테 뒤통수를 맞았다.

나는 걸으면서 셈을 했다. 경례는 들었다. 그래서 알았고, 알아서 왔다. 그 애를 원망할 까닭은 하나도 없었다. 말하면 가볍고, 들은 사람은 안다. 단이가 나룻배에서 한 말 그대로였다. 내가 가벼워진 서른넷의 값이 지금 내 손목을 묶고 있었다.

영강 나루까지 가는 길에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사령들이 그때마다 욕을 했다. 세 번째로 돌아봤을 때, 멀찍이 흰 옷 하나가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경례였다. 그 애는 두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사립문 곁에 내가 세워 두고 온 지게 작대기였다. 여섯 해 동안 내가 짚던 그 작대기를, 그 애는 짚지도 않고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우리 뒤를 따라 이십 리를 걸었다.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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