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241자) · 기훈 · 구월 초아흐레
걸음터
빌린 날들의 지도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걸음터는 문경 읍내에서 남쪽으로 이십 리, 영강 물줄기가 한 번 크게 휘는 자리 안쪽에 있다. 초가가 서른 채쯤 되는데 집집마다 마당이 논배미만 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부잣집 마을인 줄 안다. 가까이 가면 마당마다 흙이 둥글게 패여 있고, 그 고랑이 모두 한쪽으로 돌아 나간 것이 보인다.
나는 경구 삼우를 지내고 구월 초아흐레에 단이를 따라 거기로 갔다. 가는 이십 리 동안 단이 앞에서 지운 날 다섯을 말했다. 스물두 살 여름 비 오던 날 장에 못 간 것을 무르려고 다시 산 날, 스물세 살 정월 이웃집 소 새끼 받느라 밤을 새우고 다시 산 날, 그런 것들이다. 큰 얘기는 하나도 없었다. 단이는 다 듣고 나서 하품을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백일곱이 됐다.
“다섯 개 중에 제일 재미없는 게 뭐였는지 아오?”
“뭐였소?”
“다 똑같이 재미없었소. 그런데 줄었지. 재미로 주는 게 아니라 참이라서 주는 거요.”
영강 나루를 건널 때 나는 경례 얘기를 꺼냈다. 삼우 날까지 그 애는 내 사발을 한 번도 당겨 놓지 않았다. 말도 안 걸었다. 나룻배가 물살에 한 번 크게 흔들리자 단이가 뱃전을 잡으며 말했다.
“그날 밤 부엌 봉당에 있었겠지. 마방하고 봉당은 벽 하나요. 댁이 친 걸 들었을 거요.”
“알면서 가만있었소?”
“내가 뭘 어쩌오. 댁이 한 말을 도로 넣어 주오? 들은 사람은 들은 거요. 그게 이 셈의 값이오. 말하면 가볍고, 들은 사람은 알고.”
사공이 삿대를 짚으며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기울어 뱃머리와 뱃꼬리에 앉아 있으니 배가 저절로 반듯했다. 사공이 그걸 보고 웃었다. 이 배는 두 분이 타시면 삿대가 필요 없겠소, 하고.
*
걸음터 한가운데 제일 큰 마당은 마치석의 것이다. 땅도 그의 것이고 집도 그의 것이고, 집집마다 사는 기운 사람들이 먹는 좁쌀도 그의 곳간에서 나온다. 우리가 사립문을 들어섰을 때 그 마당에서 서른일곱이 돌고 있었다.
여름 장마에 불어난 개울처럼 사람이 한 방향으로 흘렀다. 오른쪽으로 기운 사람, 왼쪽으로 기운 사람, 앞으로 고꾸라질 듯 기운 사람이 한 줄로 이어져 마당 가장자리를 해가 가는 쪽으로 돌았다. 발소리가 한데 모여 둥둥 울렸고, 마른 흙이 발목 높이로 일어 햇살 속에 노랗게 떠 있었다. 흙먼지에서 쇠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사람 땀이 오래 밴 흙에서 나는 냄새였다.
마당 복판에는 사내 하나가 장대를 들고 서 있었다. 마름 구만득이다. 마흔쯤 됐고 배가 나왔고, 기운 데 없이 똑바로 선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는 돌다가 멈춘 사람이 있으면 장대 끝으로 등을 슬쩍 밀었다. 때리지는 않고 밀기만 했다. 멈추면 넘어지니까 민다고 나중에 그가 말했다. 그 말은 반만 맞았다.
“단이 아주머니, 돌아오셨소? 어서 들어가 도시오. 해 지기 전에 한 바퀴라도 더 돌아야 저녁 죽을 드리오.”
“만득이 너, 셈은 좀 늘었냐? 서른일곱을 오늘은 몇으로 셌어?”
“서른…… 서른아홉이오.”
“둘은 어디서 났는데?”
구만득이 장대를 쥐고 마당을 다시 세기 시작했다. 한 바퀴 도는 사이에 사람이 계속 움직이니 셈이 맞을 리 없다. 단이가 코웃음을 쳤다.
“여기 규칙이 그렇소. 돌면 저녁에 좁쌀죽 한 사발. 안 돌면 없소. 객주 어른이 그렇게 정했소. 돌아야 안 넘어지고, 안 넘어져야 살고, 살려면 먹어야 하니까, 돌면 먹인다. 틀린 데가 없지?”
단이는 그 말을 하며 마당으로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기운 몸으로 흐름에 섞이더니, 순식간에 서른여덟째가 됐다.
*
나는 한 바퀴를 따라 돌다가 멈췄다. 이상한 것이 보였다.
기운 쪽이 사람마다 다른데 도는 방향은 하나다. 해가 가는 쪽, 오른손 쪽으로 돈다. 왼쪽으로 기운 사람이 오른쪽으로 돌면 원심이 몸을 바깥으로 당겨 오히려 똑바로 세워 준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기운 사람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운 쪽으로 더 쏠린다. 그 사람들은 돌 때마다 안쪽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했고, 앞사람 어깨를 짚어서 겨우 버텼다. 서른일곱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열하나였다. 단이도 그중 하나였다.
마당 가장자리 방문이 열려 있었고, 거기 노인 하나가 누워 있었다. 단이가 한 바퀴를 돌고 나와 나를 그 방으로 데려갔다.
“이백서른 영감이오. 여기서 제일 많이 빌린 사람.”
영감은 일흔이라고 했다. 얼굴이 방바닥 쪽으로 반쯤 돌아가 있었다. 너무 기울어서 누워 있어야 편하다고 했다. 방 안에서 오래된 요 냄새와 쑥뜸 냄새가 났다.
“왜 다 한쪽으로만 도오?”
내가 묻자 영감이 눈을 떴다.
“처음 돈 사람이 그쪽이었소. 왼쪽으로 기운 사람이라 오른쪽으로 돌았지. 그 뒤로는 다 따라 돌았소. 스무 해째.”
“오른쪽으로 기운 사람은 반대로 돌아야 하오. 안 그러면 더 기우오.”
영감이 나를 오래 봤다.
“젊은이, 그걸 어떻게 아오?”
“나는 왼쪽인데, 여섯 해 걸으면서 알았소. 오른발이 먼저 나가면 몸이 왼쪽으로 쏟아지오. 기운 쪽을 먼저 디디면, 하루에 한 번은 똑바로 서지오. 한 번 서면 한나절은 안 넘어지고 걷소.”
영감이 천장을 향해 숨을 길게 뱉었다.
“스무 해 동안 아무도 그 말을 안 했소. 그건 빌리는 법이 아니라서 가르쳐도 제 날이 안 줄거든. 누가 공짜로 가르쳐 주겠소.”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스무 해 전에 새재 고갯마루에서 돌 셋을 처음 찾은 사람이 자기라고. 그걸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이 마치석이라고. 한 사람 가르치면 가르친 사람 날이 하나 준다는 것을, 마치석은 영감한테서 배우자마자 알아챘다고.
“그 사람은 스무 해 동안 백 넘게 가르쳤소. 가르친 만큼 제 날을 덜었지. 그래서 그 사람은 곧고, 배운 사람들은 여기 와서 도오. 나도 그 짓을 스물몇 번 했소. 몇인지는 안 세었소.”
“왜 안 세셨소?”
“세면 내가 한 짓을 세게 되오.”
영감은 거기서 말을 끊고 한참 숨을 골랐다. 그러다 나를 다시 봤다.
“젊은이는 누구한테 배웠소?”
“객주한테 배웠소. 여섯 해 전 정월에.”
“그럼 그 사람은 젊은이 덕에 하루를 덜었소. 젊은이는 그 사람 짐을 여섯 해 지고.”
영감의 입가가 조금 떨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셈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섯 해 전 정월, 객주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돌 셋까지 데려다준 것을 나는 친절이라고 여겼다. 그 친절 하나로 객주는 하루를 벌었다. 나는 백열둘을 졌다.
*
해가 서쪽 산등성이에 걸릴 즈음 나는 마당으로 나갔다. 흐름 가장자리에 서서, 오른쪽으로 기운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불러 세웠다. 열한 명 가운데 걸음을 멈춘 사람은 넷이었다. 나는 그 넷 앞에서 오른발을 먼저 딛고 서 보였다. 왼쪽으로 기운 몸이 오른발을 딛는 순간 쏟아지는 꼴을 일부러 보였다. 그다음에 왼발을 먼저 디뎠다. 무릎이 한 번 꺾였다가, 허리가 받치고, 목이 따라 올라와서, 딱 한 순간 똑바로 섰다.
넷 가운데 곰보 할멈이 따라 했다. 오른쪽으로 기운 할멈이 오른발을 먼저 디뎠다. 두 번 넘어지고 세 번째에 섰다. 할멈은 서 있는 제 발을 내려다보고, 흐름 밖에서 한 발짝을 더 뗐다. 넘어지지 않았다.
그때 구만득의 장대가 할멈과 나 사이에 들어왔다.
“아니, 아니 되오. 도는 데서 빠지면 저녁 죽이 없소.”
“죽은 내가 사 주겠소.”
“그런 문제가 아니오. 객주 어른이…….”
“객주 어른이 뭐라 했는데?”
말굽 소리가 사립문 밖에서 들렸다. 마치석이 나귀를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뒤에 짐꾼 둘이 쌀가마를 지고 따랐다. 마당의 흐름이 느려졌다. 돌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쌀가마를 봤다.
“또 자네군.”
마치석은 나귀에서 내리지 않았다. 올려다보는 사람들 머리 위로 목소리를 흘렸다.
“이보게들, 저 사람 말 듣지 마시게. 도는 게 자네들 살 길이야. 멈추면 넘어지고, 넘어지면 못 일어나. 걸어서 나가면 누가 먹여 주나? 저 사람이? 저 사람은 제 몸 하나 못 세워서 작대기를 짚는 사람이야.”
“할멈이 방금 섰소. 객주 어른도 보셨소.”
“한 번 섰지. 내일은?”
마치석이 곰보 할멈을 내려다봤다. 할멈은 한 발을 든 채 멈춰 있었다. 쌀가마에서 흘러나온 쌀 냄새가 마당 흙냄새를 덮었다. 마치석이 목소리를 낮췄다. 나한테만 들리게.
“벼랑길은 미끄러워, 기훈이. 사람이 자꾸 떨어져.”
나는 대답 대신 왼발을 먼저 디뎠다. 무릎이 꺾였다가 허리가 받치는 그 짧은 틈에, 발바닥 밑 흙이 한 번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할멈 옆에 가 섰다. 나귀가 코를 불었고, 마당을 돌던 발소리가 하나둘 느려졌다.
“할멈, 개울까지만 갑시다. 발 씻으러.”
*
그날 걸음터 사립문을 제 발로 걸어 나간 사람은 둘이다. 곰보 할멈과, 앞으로 기운 명칠이라는 젊은 사내. 명칠은 할멈이 넘어질 때마다 붙잡아 주다가 저도 모르게 따라 나왔다. 둘은 사립문 밖 개울가까지 쉰 걸음을 걸었다. 할멈은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한참 울었다. 열한 해 만에 마당 밖 흙을 밟았다고 했다. 흙이 마당 흙보다 무르다고 했다. 할멈의 발가락 사이로 물이 휘돌며 빠져나갔다.
오른쪽으로 기운 열하나 가운데 방향을 바꾸라는 말에 끝내 고개를 저은 사람도 있었다. 쉰 넘은 사내였다.
“이십 년 돌던 쪽이오. 바꾸면 그 이십 년이 없어지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저녁 죽은 구만득이 날랐다. 가마솥 앞에 서서 도는 사람이 제 앞을 지날 때마다 사발 하나씩을 내밀었는데, 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받아야 해서 사발을 받는 손도 죽을 뜨는 손도 다 흔들렸다. 죽이 흙에 반은 흘렀다. 할멈과 명칠 몫은 없었다. 나는 쌍봉댁한테서 받아 온 주먹밥 셋을 꺼내 둘에게 하나씩 주고 하나를 반으로 갈랐다. 구만득이 가마솥 너머에서 그걸 보다가 제 사발에 뜬 죽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러고는 우리 쪽으로 슬금슬금 와서, 주먹밥 반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쌍봉댁 거요? 거기 소금 넣소, 안 넣소?”
단이가 흐름 속에서 소리쳤다.
“만득이 너는 셈도 못 하는 게 입맛은 있냐?”
해가 산등성이 뒤로 막 떨어질 때, 사립문 밖으로 등불 셋이 줄지어 들어왔다. 등불마다 붉은 실이 한 가닥씩 매여 있었다. 들고 온 사람들은 기운 데 없는 장정들이었고, 그중 가장 어린 녀석이 마당을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어이구, 오늘은 둘이 모자라네? 모자라면 식는다던데. 우리 행수 어른 지도에 여기가 첫째 못인데, 식으면 난 죽소.”
녀석은 그 말을 하면서도 싱글거렸다. 구만득이 녀석을 복남이라 불렀다. 복남은 마당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섰다. 해 떨어질 무렵 사람들이 도는 마당 한복판, 돌 셋도 선돌도 없는 흙바닥 위에서, 녀석이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하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