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78자)

공개 감정

중고 명품 감정사 · 채이안

5월 20일 목요일 오전 여덟 시⁠, 압구정역 앞 카페 구석 자리에서 방우경은 커피를 시키지 않고 물만 마시고 있었다⁠. 일주일 사이에 얼굴이 한 뼘은 빠져 있었다⁠. 가운을 벗은 우경은 손이 더 커 보였다⁠. 수련이 앞에 앉자 우경이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밀었다⁠.

“⁠본사 수선 품질팀에 있는 동료입니다⁠. 어젯밤에 왔어요⁠.⁠”

화면에 프랑스어 메일과 표 하나가 있었다⁠. 우경이 표를 손가락으로 키웠다⁠. 맨 윗줄 제목만 프랑스어였고⁠, 나머지는 번호였다⁠. 「⁠Rebut — 2025년 3월 제3공방 — 루나 30 — 칩 불량⁠」⁠.

“⁠르뷔⁠. 폐기품이라는 뜻입니다⁠. 2025년 3월⁠, 제3공방에서 칩을 넣는 기계가 한 달 동안 말썽을 부렸답니다⁠. 칩이 들어간 몸통 백십칠 개가 불량 판정을 받았고요⁠. 아르벨은 불량품을 고쳐 팔지 않습니다⁠. 폐기 업체에 넘겨서 갈아 버립니다⁠.⁠”

우경이 표를 내렸다⁠. LN30-2503-71946이 열한 번째 줄에 있었다⁠.

“⁠지 선임님이 모란에서 찍은 번호 다섯 개도 다 이 표에 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수련은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폐기품이 밖으로 나왔어요⁠.⁠”

“⁠예⁠. 가죽 몸통은 공방에서 장인이 박은 진짜입니다⁠. 땀 수⁠, 각인⁠, 징⁠, 칩까지 진짜고요⁠. 누군가 갈려야 할 몸통을 빼돌려서⁠, 칩 번호를 여러 개로 복사하고⁠, 안감을 새로 대서 마무리했습니다⁠. 안감 끝을 손바느질로 다 하면 시간이 걸리니 접착제로 한 번 눌러 놓고요⁠.⁠”

우경이 물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제가 맞았습니다⁠. 지 선임님도 맞았고요⁠. 몸통은 진짜였고⁠, 가방은 가짜였습니다⁠. 저는 몸통만 봤습니다⁠. 선임님은 가방을 봤고요⁠.⁠”

“⁠소장님 코가 틀린 게 아니에요⁠. 몸통이 진짜인 가방을 처음 보신 거예요⁠.⁠”

“⁠위로는 됩니다⁠. 매형이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는 위로가 안 되고요⁠.⁠”

우경이 표를 수련의 휴대전화로 보냈다⁠. 백십칠 줄이 한 번에 넘어왔다⁠. 수련은 표를 맨 아래까지 내려 보았다⁠. 번호 하나하나가 파리의 장인이 열여덟 시간씩 무릎에 대고 박은 몸통이었다⁠. 갈려야 할 몸통들이 갈리지 않고 모란의 진열장과 제주의 옷장까지 흘러왔다⁠. 수련은 화면을 끄고 식은 물잔을 우경 쪽으로 밀어 주었다⁠. 우경은 물을 마저 마시고서야 처음으로 허리를 폈다⁠.

*

오후 두 시⁠, 4층 감정실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감정대 여섯 개 위에 노란 압수품 상자가 하나씩 올라가 있었다⁠. 탁경춘과 경찰 둘⁠, 하명진과 아르벨 법무 담당 하나⁠, 감사위원과 이사 셋⁠, 엄도식과 변호사 둘⁠. 방우경은 벽 쪽 의자에 앉아 있었고⁠, 경춘이 참고인으로 부른 소람이 우경 옆에 있었다⁠. 소람은 오늘도 속눈썹을 붙이고 왔다⁠.

“⁠위에서 찍는 카메라가 있다길래요⁠.⁠”

수련은 1번 감정대 앞으로 갔다⁠. 사원증은 오늘 하루 출입 권한이 다시 켜져 있었다⁠. 장갑을 끼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소람이 서랍에서 꺼내 준 확대경이 감정대 위에 놓여 있었다⁠.

경춘이 감정실 한가운데에서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압수품을 여러분 앞에서 다시 보는 자리유⁠. 감정은 지수련 감정사님이 하고⁠, 아르벨 쪽이 같이 보고⁠, 이해충돌은 여러분이 눈으로 보시면 되유⁠. 질문은 손 들고 해 주셔유⁠. 저 귀가 한쪽이 안 좋아유⁠.⁠”

수련은 1번 상자에서 갈색 루나 하나를 꺼냈다⁠. 모란 진열장에서 나온 가방이었다⁠. 냄새를 맡았다⁠. 매니큐어 냄새⁠. 칩을 읽었다⁠. 「⁠LN30-2503-71946⁠」⁠. 회의실 화면 대신 감정실 벽 모니터에 번호가 떴다⁠.

“⁠이 번호는 2025년 3월 파리 제3공방에서 폐기 판정을 받은 루나 몸통의 번호입니다⁠.⁠”

명진의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수련은 경춘을 보았다⁠.

“⁠경위님⁠, 안감을 열어도 될까요⁠? 압수품이라서요⁠.⁠”

“⁠사진 찍고 하셔유⁠. 다 찍어유⁠.⁠”

경찰이 카메라를 맞추는 동안 이사들 사이에서 손 하나가 올라왔다⁠. 지난달 복도에서 아내의 가방을 물었던 사외이사였다⁠. 무릎 위에 쇼핑백 하나를 올려놓고 있었다⁠.

“⁠경위님⁠, 하는 김에 이것도 좀⁠. 집사람 건데요⁠. 작년에 리셀원에서⁠.⁠”

“⁠오늘은 압수품만 해유⁠, 이사님⁠.⁠”

“⁠두 배라서 그래요⁠. 아니⁠, 집사람이 걱정을 해서⁠.⁠”

감정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명진까지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사외이사가 쇼핑백을 의자 밑으로 밀어 넣었다⁠. 수련은 웃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지 않고 실뜯개를 집었다⁠.

경찰 하나가 카메라를 들었다⁠. 수련은 실뜯개를 들고 루나 바닥 모서리의 안감 끝으로 갔다⁠. 손바느질 땀 세 개를 뜯었다⁠.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감정실 안에서 또렷하게 들렸다⁠. 안감을 손톱으로 들어 올리자 순간접착제의 투명한 막이 찢어지며 가죽에서 떨어졌다⁠. 수련은 확대경을 댔다⁠.

몸통 가죽 안쪽⁠, 안감에 가려져 있던 자리에 지름 3밀리미터쯤 되는 동그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구멍 둘레가 깔끔했다⁠. 송곳이 아니라 펀치로 한 번에 뚫은 구멍이었다⁠.

“⁠팀장님⁠.⁠”

수련이 명진을 불렀다⁠.

“⁠아르벨 공방은 폐기할 몸통 안쪽에 구멍을 뚫죠⁠. 다시 못 쓰게요⁠. 피렌체 학교에서 아르벨 출신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폐기 타공⁠. 제가 기억하는 게 맞아요⁠?⁠”

감정실의 눈이 전부 명진에게 갔다⁠. 명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걸어 나와 감정대 위로 몸을 숙였다⁠. 확대경을 받아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오래 보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명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있었다⁠.

“⁠맞아요⁠.⁠”

명진이 휴대전화를 꺼내 영상 통화를 걸었다⁠. 화면에 파리 본사 사무실과 머리가 흰 남자가 떴다⁠. 명진이 프랑스어로 짧게 말하고 화면을 감정대 쪽으로 돌렸다⁠. 남자가 화면 너머로 구멍을 보았다⁠. 남자의 입에서 낮은 소리가 나왔다⁠. 명진이 통화를 끊지 않은 채 감정실 사람들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처음보다 낮았다⁠.

“⁠2025년에 폐기 업체 한 곳에서 물량이 빈다는 내부 보고가 있었어요⁠. 본사는 조사 중이라는 이유로 밖에 알리지 않았어요⁠. 저도 알았고요⁠. 리셀원을 먼저 고소한 건⁠, 저희 구멍을 남에게 먼저 묻는 일이었어요⁠.⁠”

명진이 확대경을 감정대 위에 내려놓았다⁠.

“⁠본사 폐기품이 밖으로 샜어요⁠. 아르벨이 인정합니다⁠.⁠”

*

엄도식이 손을 들었다⁠. 경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정리가 됐네요⁠.⁠”

도식이 앞으로 나왔다⁠. 오늘은 후드도 재킷도 아니고 검은 정장이었다⁠.

“⁠몸통은 아르벨 공방의 진짜예요⁠. 칩도 아르벨 칩이고요⁠. 아르벨이 폐기를 제대로 못 해서 진짜 몸통이 밖으로 나왔어요⁠. 바른감정이 진품이라고 본 것도 무리가 아니죠⁠. 업계 최고 소장님도 속았으니까요⁠. 리셀원은 아르벨의 관리 실패에 속은 피해자예요⁠.⁠”

도식이 감사위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셀원은 아르벨과 합의하고⁠, 구매자에게 두 배 보상하고⁠, 상장 일정을 가을로 다시 잡으면 됩니다⁠. 직원 백이십 명은 일을 계속하고요⁠.⁠”

이사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식의 말은 반이 맞았다⁠. 반이 맞는 말이 가장 이기기 어려웠다⁠.

수련이 장갑 낀 손으로 1번 상자 바닥에서 홀로그램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압수 목록 번호가 붙은 카드였다⁠. 「⁠리셀원 정품 인증 — BR-01⁠」⁠.

“⁠몸통은 아르벨이 잃어버렸어요⁠. 카드는 리셀원이 넘겼고요⁠.⁠”

수련이 카드를 감정대 위에 올렸다⁠.

“⁠이 카드 오백 장이 판매자 창고에서 나왔어요⁠. 리셀원 정품 카드를 판매자 처남에게 맡긴 계약서에 대표님이 서명하셨어요⁠. 「⁠승인⁠. 결과만 맞으면 됨⁠.⁠」 3월 31일 아침에는 3차 판정자에게 감정 불가를 누르라고 문자를 보내셨고요⁠. 그날 감정 불가로 돌아간 가방이 다음 주에 다른 이름표를 달고 다시 들어왔어요⁠. 반송 기록에 있어요⁠.⁠”

도식이 수련을 보았다⁠. 표정이 흔들리지 않았다⁠.

“⁠카드를 맡긴 건 실수였어요⁠. 인정해요⁠. 하지만 가방을 만든 건 우리가 아니에요⁠.⁠”

“⁠가방을 만든 사람은 몰라요⁠. 가방을 진짜라고 한 사람은 리셀원이었어요⁠. 구매자들은 아르벨을 믿고 산 게 아니에요⁠. 카드를 믿고 샀어요⁠. 제주 고객님은 후기에 감정사님 덕분에 안심했다고 쓰셨어요⁠.⁠”

수련은 숨을 한 번 골랐다⁠.

“⁠그 카드에 찍힌 번호가 0417이었어요⁠. 제 번호요⁠. 저도 속았어요⁠. 2월에⁠. 그래서 압니다⁠. 속은 사람이 다음에 할 일은⁠, 다시는 안 속는 거예요⁠. 속은 척하는 게 아니라⁠.⁠”

감정실이 조용했다⁠. 소람이 벽 앞에서 조그맣게 박수를 치려다⁠, 경춘의 눈짓을 받고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감사위원이 돋보기안경을 벗어 손에 쥐었다⁠.

“⁠엄 대표⁠. 이사회는 오늘 저녁 임시 회의를 엽니다⁠. 그 전까지 대표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도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대 위의 카드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카드 위 홀로그램에 감정실 천장 조명이 작게 비쳤다⁠.

벽 앞 의자에서 방우경이 일어났다⁠. 경춘에게 고개를 숙였다⁠.

“⁠경위님⁠, 매형 일은 제가 따로 진술하겠습니다⁠. 카드를 누가 몇 시에 가져갔는지⁠, 감정실 출입 기록이랑 같이 맞춰 드리겠습니다⁠.⁠”

“⁠가족 일인디 괜찮으셔유⁠?⁠”

“⁠가족 일이라서 제가 해야 합니다⁠. 제 도장이 서른한 번 찍혀 있으니까요⁠.⁠”

우경이 다시 앉았다⁠. 큰 손을 무릎 위에 펴 놓았다⁠. 소람이 옆에서 생강차 티백 하나를 우경의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우경은 티백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가운 없는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

경춘이 손뼉을 한 번 쳤다⁠.

“⁠하나 남았슈⁠. 보존 요청한 물건⁠.⁠”

경찰 하나가 3층에서 회색 상자를 안고 올라왔다⁠. 상자 옆면에 「⁠일반 접수 — B-17⁠」이 붙어 있었다⁠. 경춘이 상자를 1번 감정대 옆에 내려놓았다⁠.

“⁠감정사님⁠, 이건 감정사님이 여셔유⁠. 압수품은 아니고 고객 위탁품이유⁠. 신청인이 감정사님 어머님이시고⁠.⁠”

수련은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안에 백화점 쇼핑백이 들어 있었다⁠. 3월 15일 유리문 밖에서 엄마의 손목에 매달려 있던 쇼핑백이었다⁠. 손잡이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엄마가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자리였다⁠.

쇼핑백 손잡이에 접수증이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접수일 3월 15일 15⁠:52 / 신청인 감정사 지수련 모친 / 물품 아르벨 루나 30 갈색 1점 / 신청 사유⁠」⁠. 사유 칸에 엄마의 글씨가 있었다⁠. 볼펜을 꾹꾹 눌러 쓴⁠, 받침이 큰 글씨였다⁠.

「⁠내 돈 주고 산 것⁠. 진짜인지 봐 주세요⁠. 우리 딸 바쁘니까 천천히 봐 주세요⁠.⁠」

소람이 벽 앞에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경춘이 접수증을 사진으로 찍었다⁠. 찍는 손이 조금 느렸다⁠.

수련은 쇼핑백에서 갈색 루나를 꺼냈다⁠.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이 삐져나왔다⁠. 「⁠영수증 — 도원상사 — 아르벨 루나 30 — 일금 일천일백만 원정 — 곽미순 귀하⁠」⁠. 엄마의 적금이었다⁠.

수련은 루나를 두 손으로 받쳐 1번 감정대 한가운데 올렸다⁠. 스탠드 불빛 아래 갈색 가죽이 둥글게 빛났다⁠. 좋은 가방은 감정대 위에서도 자세가 반듯했다⁠.

유리문 밖에서 그림자 하나가 멈췄다⁠. 수련은 고개를 들었다⁠. 짧은 뽀글 파마⁠, 꽃무늬 블라우스⁠, 회색 바지⁠. 엄마가 유리문 앞에 서 있었다⁠. 경춘이 불렀을 것이었다⁠. 엄마는 문을 밀지 않았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감정대 위에 놓인 제 가방을 유리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