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60자)

이사회의 가방

중고 명품 감정사 · 채이안

4월 13일 화요일 오후 두 시 사십 분⁠, 13층 이사회 회의실 앞 복도에서 수련은 쇼핑백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서 있었다⁠. 하나에 갈색 루나⁠, 하나에 검은 루나가 들어 있었다⁠. 지난 토요일 모란에 가서 엄마의 상자에서 꺼내 온 가방이었다⁠. 엄마는 테이프를 뜯는 딸의 손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계단을 내려가는 등에 대고 한마디만 했다⁠.

“⁠엄마 이름 나오믄 나오는 거제⁠. 니 이름은 안 나오게 혀⁠.⁠”

조끼 안주머니에는 지난 금요일 구로의 피혁 시험 연구소에서 온 결과지가 접혀 있었다⁠. 「⁠시료 뒷면 투명막 — 시아노아크릴레이트 계열 순간접착제 검출⁠」⁠. 선배가 결과지 아래에 손글씨로 한 줄을 보태 놓았다⁠. 「⁠수련아⁠, 이거 문구점 순간접착제랑 같은 계열이야⁠. 아르벨이 이걸 쓸 리가 없지⁠.⁠」

휴대전화가 떨렸다⁠. 소람이었다⁠. 「⁠선배 화이팅⁠. 이사님들 앞에서는 ‘⁠아가씨 어디서 오셨어요⁠’ 하지 마세요⁠. 가방한테만 하세요⁠.⁠」 수련은 답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쇼핑백 손잡이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가방 둘의 무게는 합쳐서 1⁠.7킬로그램이 안 됐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로 손가락이 자꾸 저렸다⁠.

*

회의실은 길쭉했고⁠, 창 너머로 한강이 은박지처럼 반짝였다⁠. 탁자 둘레에 일곱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맨 끝의 엄도식⁠, 재무를 맡은 사내이사⁠, 투자사에서 온 이사⁠, 사외이사 셋⁠, 그리고 수련을 부른 감사위원⁠. 감사위원은 예순 넘은 여자였고⁠, 돋보기안경을 목에 걸고 있었다⁠.

“⁠지수련 선임⁠, 시작하세요⁠. 십오 분 드립니다⁠.⁠”

수련은 쇼핑백에서 루나 두 개를 꺼내 탁자 한가운데 나란히 올렸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일곱 사람의 눈이 가방 둘에 모였다⁠. 사외이사 하나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만져 보셔도 됩니다⁠. 장갑 드릴게요⁠.⁠”

수련은 흰 면장갑 일곱 켤레를 탁자 위에 돌렸다⁠. 일곱 사람이 장갑을 끼는 동안 회의실에 비닐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투자사 이사가 장갑 낀 손을 들어 보며 웃었다⁠.

“⁠이사회에서 장갑 끼는 건 처음이네요⁠.⁠”

수련은 휴대전화를 회의실 화면에 연결하고⁠, 갈색 가방의 안감에 댔다⁠. 화면에 「⁠LN30-2503-71946⁠」이 떴다⁠. 검은 가방에 댔다⁠. 같은 번호가 아래에 한 줄 더 떴다⁠.

“⁠아르벨은 칩 하나에 가방 하나입니다⁠. 이 두 가방과⁠, 지난달 가품으로 신고된 루나⁠, 지난달 31일 교차 감정에서 돌려보낸 루나가 같은 번호를 쓰고 있습니다⁠. 넷 다 도원상사 물건입니다⁠.⁠”

다음 화면에 결과지를 띄웠다⁠.

“⁠지난달 31일 교차 감정 때 가방에서 떨어진 가죽 조각을 분석했습니다⁠. 순간접착제가 나왔습니다⁠. 아르벨은 루나 안감에 접착제를 쓰지 않습니다⁠.⁠”

마지막 화면에는 2월 8일의 감정 영상을 띄웠다⁠. 화면 속의 수련이 재채기를 하고⁠, 코를 풀고⁠,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신고된 루나는 제가 통과시켰습니다⁠. 제 번호 0417이 카드에 찍혀 있습니다⁠. 코감기로 냄새를 못 맡은 날이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감사위원이 돋보기안경을 코에 걸었다⁠. 재무 이사가 볼펜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수련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요청을 말했다⁠.

“⁠도원상사 물량 판매를 멈추고⁠, 지금까지 팔린 도원상사 루나를 전부 거둬 다시 감정하고⁠, 아르벨 본사에 칩 번호 조회를 공식으로 요청해 주십시오⁠.⁠”

*

“⁠좋은 발표였어요⁠.⁠”

엄도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손뼉은 치지 않았다⁠.

“⁠세 가지만 여쭤볼게요⁠. 첫째⁠, 이 가방 두 개는 어디서 났죠⁠?⁠”

“⁠도원상사가 위탁한 가게에서 가져왔습니다⁠.⁠”

“⁠그 가게 이름이요⁠.⁠”

“⁠미순빈티지입니다⁠.⁠”

“⁠대표는요⁠?⁠”

“⁠곽미순⁠. 제 어머니입니다⁠.⁠”

이사 둘이 고개를 들었다⁠. 감사위원만 이미 아는 얼굴이었다⁠. 도식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둘째⁠, 가죽 조각이요⁠. 그 조각이 그 가방에서 나왔다는 걸 누가 증명하죠⁠? 바른감정 소장이 바닥에서 주워 수련 씨에게 줬다고 들었어요⁠. 봉투에 봉인도 없고⁠, 주운 시각 기록도 없어요⁠. 법원이라면 증거로 안 받아요⁠.⁠”

“⁠교차 감정 영상에 떨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떨어지는 장면은 있죠⁠. 주운 조각이 같은 조각이라는 장면은 없고요⁠.⁠”

수련은 되받을 말을 찾지 못했다⁠. 감사위원이 메모지에 무언가를 썼다⁠.

“⁠셋째⁠. 수련 씨가 출처가 어머님 가게라는 걸 안 게 3월 15일이에요⁠. 감사위원께 메일을 보낸 게 3월 31일이고요⁠. 보름 동안 회사에 말하지 않았어요⁠. 그사이 어머님 가게는 도원상사 가방을 한 개 더 팔았어요⁠. 미용실 원장님한테 팔백에⁠.⁠”

수련의 장갑 낀 손이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도식이 미용실 원장까지 알고 있었다⁠.

“⁠수련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라도 어머님 일이면 그랬을 거예요⁠. 다만 이해충돌이에요⁠. 감정사의 가족이 판정 대상의 출처예요⁠. 수련 씨의 판정은 지금 중립이 아니에요⁠.⁠”

도식이 재무 이사에게 눈짓을 했다⁠. 재무 이사가 화면을 바꾸었다⁠. 표 하나가 떴다⁠.

“⁠도원상사가 거래액의 18퍼센트예요⁠. 판매를 멈추면 이번 분기 거래액이 꺾이고⁠, 5월 상장 예비심사 청구는 가을로 밀려요⁠. 가을이면 시장이 닫힐 수도 있고요⁠. 직원 백이십 명의 스톡옵션이 그 표에 들어 있어요⁠. 저는 의심이 1퍼센트든 10퍼센트든⁠, 본사 조회 결과가 나오기 전에 백이십 명의 일을 세울 수 없어요⁠.⁠”

투자사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수련에게 물었다⁠.

“⁠지 선임님도 스톡옵션 있으시죠⁠?⁠”

“⁠삼천 주 있습니다⁠.⁠”

“⁠상장되면 그게 얼마인지 아세요⁠?⁠”

“⁠모릅니다⁠. 계산해 본 적이 없어서요⁠.⁠”

투자사 이사가 웃었다⁠. 비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동물을 본 사람의 웃음이었다⁠.

“⁠계산해 보세요⁠. 오늘 밤에⁠. 그러면 대표님 말씀이 조금 다르게 들리실 거예요⁠.⁠”

사외이사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았다⁠. 수련은 탁자 위 가방 두 개를 보았다⁠. 가방은 말이 없었고⁠, 회의실의 숫자는 말이 많았다⁠.

*

십 분 쉬는 동안 사외이사 하나가 복도로 수련을 따라 나왔다⁠. 머리가 희끗한 남자였고⁠, 휴대전화 사진을 내밀었다⁠.

“⁠지 선임⁠, 하나만⁠. 우리 집사람이 작년에 리셀원에서 산 가방인데요⁠. 이것도 그거⁠, 그 칩⁠, 봐 줄 수 있어요⁠?⁠”

“⁠사진으로는 못 봐요⁠. 가방을 가져오셔야 해요⁠.⁠”

“⁠아니⁠, 만약에 이게 가품이면⁠.⁠”

사외이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두 배죠⁠? 구매가의 두 배⁠.⁠”

수련은 사외이사의 얼굴을 한참 보았다⁠. 사외이사는 진심이었다⁠. 진품이었으면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사님⁠, 그런 마음으로 가방을 보내시는 분이 한 달에 마흔 명이에요⁠.⁠”

“⁠아⁠, 그래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사외이사가 안심한 얼굴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복도 끝 창가에서 도식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 대표님⁠. 오늘 정리됩니다⁠.⁠」 도원상사였다⁠.

*

세 시 사십 분⁠, 감사위원이 결정을 읽었다⁠.

“⁠하나⁠, 아르벨 본사에 칩 번호 조회를 공식 요청한다⁠. 회신은 감사위원회가 받는다⁠. 둘⁠, 도원상사 물량은 판매를 계속하되⁠, 루나 30은 조회 회신 때까지 판매를 보류한다⁠. 셋⁠, 지수련 선임의 감정 업무는 이해충돌 조사가 끝날 때까지 정지한다⁠. 넷⁠, 상장 일정은 바꾸지 않는다⁠.⁠”

감사위원이 돋보기안경을 벗었다⁠.

“⁠지 선임⁠, 칩 조회는 지 선임 덕분에 하는 거예요⁠. 업무 정지는 지 선임을 지키려고 하는 거고요⁠. 둘 다 진심이에요⁠.⁠”

“⁠알겠습니다⁠.⁠”

수련은 장갑을 벗어 탁자 위에 놓았다⁠. 일곱 켤레의 장갑이 회의실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투자사 이사는 장갑을 낀 채로 휴대전화를 두드리다 화면이 안 눌려서 짜증을 냈다⁠.

*

엘리베이터에 도식이 먼저 타 있었다⁠. 문이 닫히자 둘만 남았다⁠. 층 숫자가 하나씩 내려갔다⁠.

“⁠업무 정지 동안 월급은 그대로 나가요⁠.⁠”

도식이 문을 보며 말했다⁠.

“⁠어머님 이자 내시라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25일이라면서요⁠.⁠”

“⁠그것까지 아세요⁠?⁠”

“⁠도원상사 대표가 말하더라고요⁠. 어머님이 이자 한 번도 안 밀리신 분이라고⁠. 지난달 처음 밀렸다고⁠.⁠”

수련은 도식의 옆얼굴을 보았다⁠. 도식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의 얼굴과 계산이 끝난 사람의 얼굴이 한 얼굴에 같이 있었다⁠.

“⁠대표님은 도원상사 대표랑 자주 통화하세요⁠?⁠”

“⁠거래액 18퍼센트예요⁠. 매일 하죠⁠.⁠”

“⁠가방이 가짜라는 거⁠, 대표님도 아시죠⁠.⁠”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췄다⁠. 아무도 타지 않았다⁠.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도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련 씨⁠, 저는 가방을 몰라요⁠. 감정사가 아니니까요⁠. 저는 숫자를 알아요⁠. 숫자는 아직 가짜라고 안 했어요⁠.⁠”

5층에서 도식이 내렸다⁠. 문이 닫히기 전에 도식이 한마디를 보탰다⁠.

“⁠스톡옵션⁠, 계산해 보세요⁠.⁠”

*

4층에 내려왔을 때 사원증을 문에 대자 빨간불이 들어왔다⁠. 삐⁠, 짧은 소리가 났다⁠. 다시 댔다⁠. 또 빨간불이었다⁠. 「⁠출입 권한 없음⁠」⁠.

수련은 유리문 밖에 서 있었다⁠. 감정대 여섯⁠, 스탠드 불빛⁠, 벽의 상표법 액자가 유리 너머로 다 보였다⁠. 소람이 1번 감정대에서 고개를 들어 수련을 보았다⁠. 수련의 자리였다⁠. 소람이 일어나려 하다가 5번 감정대의 우경을 보고⁠, 그대로 앉았다⁠. 대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수련은 소람의 모은 두 손을 보다가⁠, 한 달 전 이 자리에 서 있던 엄마의 손을 떠올렸다⁠. 꽃무늬 블라우스 앞에 모은 두 손⁠, 쇼핑백 손잡이를 쥔 하얀 마디⁠. 이 자리에서는 안이 다 보였다⁠. 안에서 아무도 나와 주지 않는다는 것도 다 보였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사이 휴대전화가 떨렸다⁠. 소람이었다⁠. 「⁠선배 자리 제가 쓰래요⁠. 선배 확대경은 제 서랍에 넣어 둘게요⁠. 아무도 못 만지게 열쇠 잠가요⁠.⁠」 잠시 뒤 한 줄이 더 왔다⁠. 「⁠대표님이 우경 소장님 저울 칭찬했어요⁠. 저 저울 싫어요⁠.⁠」 수련은 계단참에 멈춰 답을 썼다⁠. 「⁠확대경 렌즈 닦을 때 입김 불지 마⁠. 얼룩 져⁠.⁠」 보내고 나서야⁠, 업무가 정지된 날에 렌즈 닦는 법을 가르치는 제가 우스웠다⁠.

*

1층 로비 소파에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짧게 자른 은빛 단발에 옷깃에는 작은 금빛 달 모양 브로치를 달았다⁠. 수련이 쇼핑백 두 개를 들고 지나가자 여자가 일어났다⁠.

“⁠지수련 씨죠⁠? 아르벨 코리아 브랜드 보호팀장 하명진입니다⁠.⁠”

명진이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 뒷면에 루나의 둥근 실루엣이 은박으로 찍혀 있었다⁠.

“⁠오늘 오후에 리셀원 감사위원회에서 칩 조회 요청이 왔어요⁠. 번호를 보고 파리에서 바로 전화가 왔고요⁠. 본사는 리셀원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로 했어요⁠. 상표권 침해와 손해배상⁠, 그리고 경찰 고소⁠. 중고 플랫폼이 정품 카드를 붙여 가짜를 팔면⁠,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길이 생기는 거예요⁠. 파리에서는 그걸 세탁이라고 불러요⁠. 블랑시망⁠. 빨래요⁠.⁠”

명진의 시선이 수련의 쇼핑백으로 내려갔다⁠. 쇼핑백 입구로 갈색 손잡이가 비죽 나와 있었다⁠.

“⁠그 가방들도 저희가 압수해야 할 물건이에요⁠. 오늘은 안 가져가요⁠. 대신 이야기 좀 하죠⁠. 다음 주 목요일⁠, 청담동 매장 뒤 사무실에서⁠.⁠”

명진은 돌아서다가 한 번 더 말했다⁠.

“⁠어머님 가게 이야기도요⁠. 모란⁠, 맞죠⁠?⁠”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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