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91자) · 차민 · 10월 2일
빨간 크레용 한 자루
긴 셈 · 남시우
만 19세 이상 이용가
아버지.
식용유로 문질렀습니다. 부엌에서 제일 싼 콩기름을 손가락에 한 방울 떨어뜨리고 손톱 밑을 문질렀더니 회색이 풀려 나왔습니다. 그다음 비누로 씻었습니다. 빠졌습니다. 십칠 년 동안 우리 집에서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손에서 한동안 고소한 냄새가 났습니다. 관리소 직원들이 오늘 누가 부침개 부쳤냐고 물었습니다.
편지는 화요일 밤에 남궁 주무관한테서 받았습니다. 관리소 앞 벤치에서 읽었습니다. 주무관은 옆에 앉아 휴대폰을 봤습니다. 제가 다 읽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 읽고 봉투에 도로 넣자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답장 쓰실 거죠, 금요일에 가지러 올게요, 하고. 저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이 편지는 금요일, 시월 이일에 씁니다.
표지훈 씨가 음성까지 갔다는 것을 저는 아버지 편지로 먼저 알았습니다. 그다음 날 관리소에서 다시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소장실에 와서 음성 이야기를 했습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복도까지 들렸습니다. 거기서도 쫓겨나게 생겼다고. 그러니 이제 벽만 남았다고.
이번 주에 저는 이웃을 만났습니다. 곰팡이 점검이라고 말하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거짓말은 아닙니다. 507호 북쪽 벽 아래에 정말 곰팡이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 때문에 두드린 건 아닙니다.
506호 고 영감님은 귀가 어둡습니다. 두 번 말해야 했습니다. 507호요, 하고 두 번 말하자 영감님이 아, 그 조용한 양반, 하셨습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었고 소리를 한 번도 안 냈는데, 밤이면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쥐인 줄 알았다고. 아홉 시 뉴스 끝나고 자리에 누우면 시작해서 영감님이 잠들 때까지 났다고.
“자장가 같았어. 쥐가 이렇게 부지런하면 쥐도 먹고살겠다 싶었지.”
그 사람이 누군지 아셨냐고 여쭸습니다. 영감님은 전단 봤다고 했습니다. 문에 붙은 것. 떼 줄까 하다가 말았다고. 남의 문에 붙은 걸 떼는 것도 남의 일에 끼는 거라서. 그러고는 한마디 더 했습니다. 떼 줄걸 그랬다고. 전단이 붙은 뒤로 사각사각 소리가 더 오래 났다고.
508호는 아기를 키우는 부부입니다. 부인이 나왔습니다. 507호 아저씨는 매일 새벽 여섯 시쯤 나갔다고 했습니다. 아기가 그 시간에 깨서 안다고. 문을 소리 안 나게 여셔서 한 번도 애가 운 적은 없다고. 한 번 고맙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고 했습니다. 전단 붙은 뒤라서.
부인 품에서 아기가 저를 빤히 봤습니다. 돌이 안 된 아기였습니다. 부인은 아기 손을 잡아 저한테 흔들어 보이며, 이 아저씨가 새벽마다 우리 안 깨운 아저씨 아들이야, 하고 말하려다 멈췄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부인은 알고 있었습니다. 복도에서 소문은 문틈보다 빠릅니다. 부인은 말을 바꿨습니다. 관리원 아저씨야, 하고.
여섯 시에 나가서 어디 가셨는지 저는 문구점에서 알았습니다.
첫 편지에 적은 붉은 금 일곱 개는 크레용이었습니다. 연필은 어디서나 팝니다. 빨간 크레용 한 자루는 굳이 사야 합니다. 이 동네에서 크레용을 낱개로 파는 데는 초등학교 앞 문구점 하나입니다. 문구점 안은 좁았습니다. 천장까지 쌓인 공책과 색종이, 계산대 앞 유리 진열장에 낱개 크레용이 색깔별로 꽂혀 있었습니다. 지우개 냄새와 크레용 기름 냄새가 섞여서, 들어서자마자 열 살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주인은 예순쯤 된 여자였습니다. 제가 빨간 크레용 하나 주세요, 하자 주인이 크레용을 꺼내다 말고 제 얼굴을 봤습니다. 오래 봤습니다. 그러고는 물었습니다. 혹시 그 아저씨 아들이에요, 하고. 저는 어느 아저씨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주인은 빨간 거 하나 사 간 아저씨, 눈이 똑같네, 했습니다. 그러고는 크레용 값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굳이 냈습니다. 천 원짜리를 내고 거스름돈 오백 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사셨을 겁니다. 저는 제 눈이 누구를 닮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주인은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빨간 크레용 한 자루만 사 가셨다고. 한 번. 그 뒤로는 사지 않고 자주 오셨다고. 오셔서 가게 앞 정류장에 서 계셨다고.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애들이 등교하는 시간에.
저는 그 정류장에 가서 앉아 봤습니다. 새벽 여섯 시. 거기서 4동이 보입니다. 오 층, 가운데 창. 어머니 집 안방입니다. 어머니는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창을 엽니다. 식당 나가기 전에 환기를 합니다. 삼십 년 된 습관입니다. 창이 열리고 어머니가 창틀에 이불을 한 번 턴 다음 닫습니다. 그게 여섯 시 삼십오 분쯤입니다. 그날 아침에도 그랬습니다. 저는 정류장에서 그걸 봤습니다. 아버지가 넉 달 동안 본 것을 한 번 봤습니다.
그다음은 여덟 시까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창은 닫혀 있고, 어머니는 일곱 시 사십 분에 1층 현관으로 나와 버스를 타러 반대쪽 정류장으로 갑니다. 이쪽 정류장에서는 뒷모습만 보입니다. 일곱 시 반부터 아이들이 지나갔습니다. 대여섯 명씩 무리로. 그중 한 아이가 정류장 의자에 앉은 저를 보고 멈췄습니다. 노란 가방을 멘 여자아이였습니다. 아저씨 누구 기다려요,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을 못 했습니다. 아이가 버스 안 타요, 하고 한 번 더 물었습니다. 안 탄다고 했더니 아이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친구들한테 뛰어갔습니다. 넉 달 동안 아버지한테도 누가 그렇게 물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두 시간 동안 버스 열한 대를 보냈습니다. 세지 않으려고 했는데 셌습니다. 열한 대.
그날 오후 관리소장이 저를 불렀습니다.
소장실은 관리소 안쪽에 있습니다. 창문 없는 방입니다. 에어컨을 틀면 냄새가 납니다. 필터를 몇 년 안 갈았는지 곰팡내가 섞인 바람이 나옵니다. 소장은 그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앉아 있었습니다. 책상에 서류가 두 장. 하나는 다음 입주자 계약서. 하나는 제 이름이 적힌 경위서 양식이었습니다.
“507호 다음 사람 다음 주 월요일, 십이일에 들어와. 휠체어 타는 할머니야. 벽지 새로 발라야 돼. 오늘 뜯어.”
“사흘만 주세요.”
“왜?”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장이 저를 봤습니다. 소장은 쉰여덟입니다. 이 단지에서 이십 년 있었습니다. 저를 뽑은 사람도 소장입니다. 십일 년 전 면접 때 저한테 물었습니다. 빈집 치우는 일 할 수 있겠냐고. 남이 죽어서 나간 집도 있다고. 저는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백마흔두 집을 치웠습니다. 한 번도 사흘 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차민 씨, 그 사람이 자네 아버지인 거 나도 알아.”
“…….”
“서류 보면 나와. 비상 연락처가 자네 어머니 번호야. 넉 달 전에 알았어. 그래서 자네한테 안 말했어. 자네가 그 방 앞을 하루 두 번씩 지나가는데 말할 수가 없더라고.”
소장이 에어컨을 껐습니다. 방이 조용해졌습니다.
“근데 이제 그게 문제가 아니야. 2동 동대표가 주민 청원 받고 있어. 3동 지원주택 지정 해제. 벌써 이백 명 넘었대. 구청으로 올라가면 이 동 전체가 감사 받아. 내 재계약도 그거로 평가받아. 그 벽이 남아 있으면 그 사람이 그걸 찍어서 청원서에 붙여. 살인자가 벽에 뭘 그렸다고. 그러면 끝이야. 자네 아버지 방이 3동 전체를 잡아먹어.”
“그 사람이 뜯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뜯으라는 거야.”
소장 말이 맞았습니다. 벽을 남겨 두면 표지훈 씨가 찍습니다. 뜯으면 증거가 없어집니다. 뭘 위한 증거인지 저도 모르지만. 저는 경위서를 봤습니다. 사유 칸이 비어 있었습니다. 소장이 볼펜을 내밀었습니다.
“오늘 안 뜯으면 이거 써. 업무 지시 불이행. 나도 이거 올리기 싫어.”
소장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습니다. 에어컨을 끈 방은 금방 더워졌습니다. 서류 두 장 위로 소장 손바닥 자국이 축축하게 남았습니다. 저는 볼펜을 받았습니다. 받고 나서 경위서 대신 계약서를 봤습니다. 다음 입주자. 휠체어 타는 할머니. 이름이 윤씨였습니다. 저는 그 이름에서 잠깐 멈췄습니다. 윤미숙은 아니었습니다. 윤정자. 여든하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무엇이 다행인지 몰라서 그 생각을 접었습니다.
“소장님, 사진만 찍게 해 주세요. 제가 찍겠습니다. 표지훈 씨 말고 제가요. 그리고 목요일에 뜯겠습니다. 수요일 밤에 도배 자재 받아 두고, 목요일 아침에 뜯고, 금요일에 바르고, 주말에 말리면 십이일 월요일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소장이 달력을 봤습니다. 날짜를 셌습니다. 입술로.
“왜 목요일이야.”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목요일이라는 말은 제 입에서 저절로 나왔습니다. 소장이 한참 저를 보다가 경위서를 서랍에 넣었습니다.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서랍에 넣었습니다.
그날 저녁 507호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동쪽 벽을 아홉 칸으로 나눠 아홉 장. 겹치는 데까지 열네 장. 손전등을 비스듬히 대고 붉은 것까지 나오게. 찍는 동안 연필 냄새가 났습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 났습니다. 그 사이에 곰팡이 냄새가 조금 올라왔습니다. 북쪽 벽 아래에서.
찍고 나서 현관을 나오는데 복도 끝에 표지훈 씨가 서 있었습니다. 난간에 기대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3동 복도는 금연입니다. 저는 그걸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담배를 든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보였습니다. 화면에 숫자가 떠 있었습니다. 청원 이백삼십칠 명.
“찍었어요?”
“찍었습니다.”
“나도 줘요.”
“안 됩니다.”
“왜요.”
저는 그 사람 앞에 섰습니다. 한 걸음 거리. 507호 현관에서처럼.
“제 아버지 벽이라서요.”
그 사람 담배에서 재가 떨어졌습니다. 난간 밖으로. 오 층 아래로. 그 사람은 저를 오래 봤습니다. 제 얼굴에서 뭘 찾는 것 같았습니다. 눈썹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그 사람 눈썹에서 표상근 씨를 봤다고 쓰셨으니까요.
“알았어요.”
그 사람은 그 말만 하고 계단으로 갔습니다. 담배꽁초를 난간에 비벼 끄고, 버리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그 사람이 내려간 뒤 저는 복도 난간에서 4동을 봤습니다. 오 층 가운데 창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퇴근했다는 뜻입니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대신 불이 꺼질 때까지 봤습니다. 열 시 사십 분에 꺼졌습니다. 아버지도 넉 달 동안 이 복도에서 저 창을 보셨을 겁니다. 507호 현관 바로 앞이니까요.
아버지. 목요일에 뜯겠다고 했습니다. 시월 팔일입니다. 그 전에 물음표에 답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모른다는 그것도.
차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