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627자)

소수점 아래를 내린 사람은 회장님이었다

레벨 반씩 나눈 S급 이혼 부부헌터 · 남이랑

4월 24일 토요일 오전 열 시⁠, 둑길 끝 벤치 앞에서 태호가 시우의 가방을 현주에게 건넸다⁠. 가방에는 물통과 『⁠균열 도감⁠』과 갈아입을 양말이 들어 있다고 했다⁠. 주말은 엄마와 지내는 날이었다⁠. 조정이 끝나기 전까지 하정임이 임시로 정해 준 날이었다⁠.

태호는 등산 조끼 대신 협회 로고가 찍힌 하늘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가슴팍에 「⁠결계에도 숫자를⁠」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거 뭐야⁠?⁠”

“⁠협회 홍보 영상⁠. 오늘 오후에 여의도에서 찍어⁠.⁠”

“⁠회장님 영상 또⁠?⁠”

“⁠법 통과되면 결계사들 다 숫자 받아⁠.⁠” 태호는 조끼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나 하나 받자고 하는 거 아니야⁠.⁠”

시우가 두 사람 사이에서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아빠도 같이 가면 안 돼⁠? 엄마한테 보여 줄 거 있는데 아빠도 봐야 돼⁠.⁠”

“⁠저녁에 볼게⁠. 사진 찍어 놔⁠.⁠”

태호는 시우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둑길을 올라갔다⁠. 현주는 태호 등에 박힌 「⁠결계에도 숫자를⁠」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시우가 벤치에 도감을 펼쳤다⁠.

*

『⁠균열 도감⁠』은 시우가 여덟 살 생일에 받은 책이었다⁠. 모서리마다 테이프로 붙인 자국이 있었고⁠, 책장 사이사이에 메모지가 비죽비죽 나와 있었다⁠. 시우는 노란 메모지가 붙은 곳을 펼쳤다⁠.

「⁠쌍문 균열 — 안에 문이 두 개 있는 균열⁠. 2019년 미국 네바다 사막에서 처음 확인했다⁠. 그곳 부부 헌터가 같은 결계 안에서 두 문을 동시에 쳐서 닫았다⁠. 두 문은 S급만 칠 수 있다⁠. 그보다 낮으면 문이 튕겨 낸다⁠.⁠」

“⁠엄마⁠, 이거 봐⁠.⁠” 시우는 태블릿을 도감 옆에 세웠다⁠. 토요일 중계에서 멈춰 둔 장면이었다⁠. 금빛 공동 결계가 올라간 순간⁠, 보랏빛 하늘 저 안쪽에 점 두 개가 반짝였다⁠. 하나는 금빛⁠, 하나는 보랏빛이었다⁠. “⁠공동 결계 올라갈 때만 보여⁠. 평소엔 안 보여⁠. 내가 이백 장 넘게 멈춰서 봤어⁠.⁠”

“⁠이백 장⁠?⁠”

“⁠학원 끝나고 매일 했어⁠.⁠” 시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엄마가 국회에서 마이크 꺼졌을 때도 했어⁠.⁠”

현주는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키웠다⁠. 점 두 개는 둑길에서 보는 보랏빛 금처럼 천천히 커졌다 작아졌다⁠. 숨을 쉬듯이⁠.

“⁠두 문 다 S급만 칠 수 있대⁠.⁠” 시우가 도감을 짚었다⁠. “⁠엄마가 칠십구 되면 못 쳐⁠.⁠”

강바람이 도감 책장을 넘기려 했다⁠. 현주는 손바닥으로 책장을 눌렀다⁠.

“⁠그래서 반올림 물어본 거야⁠?⁠”

“⁠응⁠. 팔십이면 칠 수 있으니까⁠.⁠” 시우는 엄마 얼굴을 보았다⁠. “⁠엄마⁠, 회장님은 이거 알아⁠?⁠”

현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휴대전화에 문자가 들어왔다⁠. 진성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안쪽 자리입니다⁠」⁠.

*

정오의 망원시장은 사람으로 꽉 찼다⁠. 생선 가게 앞에는 「⁠마포 메기 모양 어묵⁠」이 쌓여 있었고⁠, 떡집 유리문에는 「⁠균열 떡 · 보라색 쑥떡⁠」 종이가 붙어 있었다⁠. 시우가 메기 어묵을 사 달라고 했다⁠. 현주는 한 개를 사서 시우 손에 쥐여 주었다⁠.

칼국수집은 시장 안쪽 골목 끝에 있었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지난 토요일 중계 영상이 다시 나오고 있었다⁠. 사장이 국자를 든 채 현주를 알아보았다⁠.

“⁠아이고⁠, 헌터님⁠! 국회 잘 봤어요⁠. 마이크 꺼질 때 내가 다 속상하더라⁠.⁠” 사장은 시우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헌터님⁠, 하나만⁠. 저 균열 안 닫히는 거 맞죠⁠? 마포 균열 생기고 손님이 세 배예요⁠. 메기 구경 온 사람들이 칼국수 먹고 가⁠. 저거 닫히면 우리 시장 다시 조용해져⁠.⁠”

“⁠닫히면 메기도 안 나와요⁠.⁠”

“⁠메기가 무서운 건 헌터님 일이고⁠, 손님 없는 건 내 일이지⁠.⁠” 사장은 웃으며 국자를 흔들었다⁠. “⁠농담이에요⁠. 반은⁠.⁠”

안쪽 자리에서 진성이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손을 들었다⁠. 칼국수 한 그릇이 앞에 놓여 있었는데 한 젓가락도 대지 않은 채였다⁠. 면이 국물을 다 먹고 불어 있었다⁠. 진성은 시우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영상⁠, 끝까지 봤어요⁠. 이백 장 멈춘 거⁠.⁠”

“⁠어떻게 아세요⁠?⁠”

“⁠네가 협회 게시판에 올렸잖아⁠. 제목이 「⁠마포 문 두 개임 진짜임⁠」⁠.⁠”

시우의 귀가 빨개졌다⁠. 진성은 가방에서 두꺼운 서류 묶음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표지에 협회 로고와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대외비 · 마포 균열 정밀 분석 보고서 · 2024년 4월⁠」

현주는 표지를 넘겼다⁠. 첫 장의 굵은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구조 — 쌍문형⁠. 금빛 문 하나⁠, 보랏빛 문 하나⁠」

「⁠닫는 조건 — 공동 결계 안에서 LV⁠.80 이상 두 사람이 두 문을 같은 숨에 칠 것⁠. 국내에서 조건을 갖춘 사람 — 기현주·변태호 부부 한 쌍⁠」

「⁠닫을 경우 — 서울 마석 공급 삼분의 일 감소⁠. 지하철 두 노선 대체 전력 필요⁠. 협회 연구 예산 감소⁠」

「⁠닫지 않을 경우 — 세 해를 넘기면 새끼 균열 우려⁠. A급 아홉 안팎⁠」

마지막 줄은 다른 글씨체로 덧붙여져 있었다⁠.

「⁠조치 — 해당 부부 마포 동반 배정 금지⁠. 회장 지시⁠」

현주는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짚은 채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국자 부딪는 소리⁠, 텔레비전의 중계 소리⁠, 옆자리 손님들이 메기 어묵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한꺼번에 멀어졌다⁠.

세 해였다⁠. 현주가 기지 컨테이너에서 자고⁠, 태호가 망원동 아파트에서 시우를 재운 세 해⁠. 공개 수업 알림장이 조끼 안쪽 주머니에서만 지나가고⁠, 설날을 기지에서 쇠고⁠, 마지막 설에 태호가 이혼 이야기를 꺼낸 세 해⁠. 시우 때문이라고 들었던 세 해였다⁠.

“⁠이것도 보셔야 합니다⁠.⁠”

진성이 노트북을 돌려 놓았다⁠. 화면에 레벨 이전기의 설정 창이 열려 있었다⁠. 진성이 맨 아래 줄을 가리켰다⁠.

「⁠소수점 처리 — 기현주⁠: 내림 / 변태호⁠: 올림 · 설정자⁠: 회장⁠」

시우가 메기 어묵을 든 채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내림이면 칠십구⁠.⁠”

“⁠올림이면 백일이고요⁠.⁠” 진성이 말했다⁠. “⁠합은 똑같이 백팔십입니다⁠. 아무도 손해 안 보는 것처럼 보이죠⁠. 두 분 중 한 분이 문을 못 치게 되는 것만 빼면요⁠.⁠”

*

현주는 보고서를 덮었다⁠. 손이 떨려서 표지가 한 번 미끄러졌다⁠.

“⁠세 해 전 보고서네요⁠.⁠” 현주가 말했다⁠. “⁠실장님도 세 해 동안 아셨네요⁠.⁠”

진성은 피하지 않았다⁠. “⁠알았습니다⁠.⁠”

“⁠제가 세 해 동안 컨테이너에서 자는 거 보면서요⁠? 저희 남편이 시우 혼자 재우는 거 보면서요⁠?⁠”

“⁠네⁠.⁠” 진성은 젓가락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처음 한 해는 회장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 불이 먼저라고요⁠. 두 번째 해에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세 번째 해에 장치를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설정 창에 회장님이 직접 그 줄을 넣으셨어요⁠. 그때부터 잠을 못 잤습니다⁠.⁠”

“⁠잠 못 잔 걸로 세 해가 돌아와요⁠?⁠”

“⁠안 돌아옵니다⁠.⁠” 진성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래서 왔습니다⁠.⁠”

“⁠이걸 왜 저한테 줘요⁠? 공청회 때 주지⁠.⁠”

“⁠제가 만든 장치라서요⁠.⁠” 진성은 불은 칼국수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잡은 걸 같이 나누라고 만든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결계사였어요⁠. 레벨 서른둘로 은퇴하셨어요⁠. 짝이던 분은 칠십까지 가셨고요⁠. 아버지 손등에 숫자 한번 올려 드리고 싶어서 연구소에 들어갔습니다⁠.⁠” 진성이 고개를 들었다⁠. “⁠문 못 치게 하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그럼 공청회에서 말하세요⁠. 회장님 앞에서⁠.⁠”

“⁠그건 못 합니다⁠.⁠” 진성은 바로 대답했다⁠. “⁠대외비 유출이면 저 잘리고 고발당합니다⁠. 애가 둘이에요⁠. 큰애가 시우 또래고요⁠.⁠” 진성은 시우를 보았다⁠. “⁠보고서는 헌터님 보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보시고 고르시라고요⁠.⁠”

“⁠뭘 골라요⁠?⁠”

“⁠30일에 장치 앞에서 손을 넣으실지 말지요⁠.⁠” 진성은 모자를 다시 눌러썼다⁠. “⁠그리고 하나 더⁠. 지난주부터 마포 맥박이 빨라졌어요⁠. 협회 측정기로 재면 하루에 한 번씩 더 빨라집니다⁠. 보고서가 세 해 전에 짐작한 날짜가 맞을 것 같아요⁠.⁠”

진성은 칼국수값을 계산대에 놓고 나갔다⁠. 사장이 국자를 든 채 불은 칼국수를 내려다보다가 시우 앞으로 밀어 주었다⁠. 시우는 젓가락을 들고 엄마를 보았다⁠.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불은 면을 소리 내어 먹었다⁠. 배가 고팠던 얼굴이었다⁠.

*

오후 세 시⁠, 기지 출입석 앞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줄로 붐볐다⁠. 돌에 손을 얹으면 아무 글자도 안 뜬다는 것을 다들 알면서도 손을 얹고 웃었다⁠. 시우도 줄을 서서 차례가 오자 손바닥을 돌에 댔다⁠. 돌은 까맣게 가만히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떠⁠.⁠”

“⁠너는 헌터가 아니니까⁠.⁠”

“⁠엄마도 대 봐⁠.⁠”

현주가 시우 손 옆에 손바닥을 얹었다⁠. 「⁠LV⁠.99 · S급 · 출입 허가⁠」⁠. 시우가 재빨리 제 손을 엄마 손등 위에 포갰다⁠. 돌이 한 번 더 빛났다⁠. 「⁠보조 인원 1⁠」⁠. 줄 서 있던 관광객들이 와 하고 박수를 쳤다⁠.

“⁠나 보조 인원이다⁠.⁠”

“⁠들어가진 않아⁠.⁠”

“⁠알아⁠.⁠” 시우는 손을 떼지 않았다⁠. “⁠엄마⁠, 30일에 장치에 손 넣을 거야⁠?⁠”

현주는 돌 위의 숫자를 보았다⁠. 99와 1⁠. 시우의 손이 엄마 손등 위에서 따뜻했다⁠.

“⁠몰라⁠.⁠”

“⁠엄마가 몰라 하는 거 처음 들어⁠.⁠” 시우가 손을 뗐다⁠. 돌의 글자가 꺼졌다⁠. “⁠아빠한테는 내가 말할까⁠?⁠”

“⁠엄마가 할게⁠. 저녁에⁠.⁠”

*

저녁 일곱 시⁠, 망원동 아파트 주차장에 태호의 SUV가 들어왔다⁠. 태호는 하늘색 협회 조끼를 입은 채 내렸다⁠. 얼굴에 촬영용 분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시우가 먼저 뛰어가 아빠 허리를 붙잡았다⁠.

“⁠아빠⁠, 엄마가 보여 줄 거 있대⁠. 나도 봤어⁠. 진짜야⁠.⁠”

현주는 보고서를 차 보닛 위에 펼쳤다⁠. 주차장 형광등 아래에서 붉은 도장이 검게 보였다⁠. 태호가 첫 장을 읽었다⁠. 둘째 장을 읽었다⁠. 마지막 줄 앞에서 태호의 손가락이 멈췄다⁠.

“⁠동반 배정 금지⁠. 회장 지시⁠.⁠” 태호는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시우 때문이라고 했어⁠. 둘 다 S급 균열 들어가면 애는 누가 보냐고⁠.⁠”

“⁠우리 세 해 떨어져 산 거⁠, 시우 때문 아니었어⁠.⁠”

태호는 대답 대신 진성이 찍어 준 설정 창 사진을 보았다⁠. 사진을 확대하고⁠, 다시 확대하고⁠, 맨 아래 줄에서 멈췄다⁠.

“⁠변태호 올림⁠.⁠” 태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나 지금⁠…⁠… 회장님한테 반올림당한 거야⁠?⁠”

시우가 킥 웃었다가 입을 막았다⁠. 태호도 웃으려다 웃지 못했다⁠.

“⁠당신은 회장님 말 믿고 이혼하자고 했어⁠.⁠” 현주가 말했다⁠.

“⁠이혼은 내가 한 거야⁠. 회장님이 시킨 거 아니야⁠.⁠” 태호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배정은 회장님이 떼어 놨어⁠. 그건 이제 알겠어⁠. 근데 기지에서 아파트까지 걸어서 십 분이야⁠. 세 해 동안 당신이 그 십 분을 몇 번 걸었는지 세어 봐⁠.⁠”

“⁠컨테이너에서 대기해야 했어⁠. 알림 오면 바로 들어가야 하니까⁠.⁠”

“⁠알아⁠. 그래서 내가 시우 데리고 기지에 갔잖아⁠. 일요일마다⁠. 당신은 출입석 앞에서 김밥만 받고 들어갔어⁠.⁠” 태호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을 떼어 놓은 건 회장님이어도⁠, 안 돌아본 건 당신이야⁠.⁠”

현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우가 아빠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박였다⁠. 태호는 보닛 위 보고서를 끌어다 처음부터 다시 넘겼다⁠. 「⁠결계에도 숫자를⁠」이 박힌 조끼 가슴팍이 보고서 위로 숙여졌다⁠.

“⁠작년 겨울에 회장님이 나한테 그랬어⁠. 당신 열두 해는 내가 안다고⁠. 나도 마흔 해 뒤에 서 있었다고⁠.⁠” 태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말은 진짜였을 거야⁠. 그래서 더 모르겠어⁠.⁠”

현주는 보고서 맨 뒷장을 펼쳐 태호 앞에 놓았다⁠. 세 해 전 연구원이 손으로 그린 그래프 아래에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새끼 균열 예상 시기 — 2027년 5월 첫 주⁠」

태호가 고개를 들어 북서쪽 하늘을 보았다⁠. 주차장 지붕 너머로 보랏빛 금이 보였다⁠. 금은 지난주보다 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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