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02자) · 지운 문장들
십사 분
궤도에서 온 편지 · 서지오
고흥 관제센터 이층 야간 관제실은 형광등 한 줄이 나가 있다. 넉 달째다. 시설과에 세 번 말했고, 세 번 다 다음 주라는 답이 왔다. 서린은 네 번째로 말하지 않았다. 그 줄 아래 자리가 화면에 빛이 덜 비쳐서 글자가 잘 보였다. 고장이 자리를 하나 만들어 준 셈이었다.
책상에는 전자 로그 말고 종이 로그가 한 권 더 있다. 규정에는 없다. 서린은 수신 시각과 송신 시각을 손으로 한 번 더 적는다. 손으로 적으면 십사 분이 조금 빨리 간다. 볼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 한 줄 끝날 때마다 손목을 드는 동작, 그런 것들이 시간을 조금씩 갉아 먹는다.
종이 로그는 열한 권째다. 앞의 열 권은 사물함 맨 아래 칸에 세워 두었다. 표지는 전부 같은 회색 스프링 노트이고, 등에 매직으로 기간이 적혀 있다. 첫 권은 관제에 들어온 해 여름에 시작했다. 그때는 교신이 하루 서른 건이 넘었고 정거장 사람들 이름이 한 쪽에 다 안 들어갔다. 지금 노트는 한 쪽에 하루가 들어간다. 줄이 남는다. 남는 줄에 서린은 날씨를 적는다. 고흥 날씨가 아니라 정거장이 지나간 하늘의 날씨다. 궤도역학팀 시간표를 보면 그 시각에 정거장 아래가 어디인지 나오고, 기상청 자료를 보면 거기가 흐린지 맑은지 나온다. 둘을 맞춰 보는 데 하루 십 분이 걸린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다. 남는 줄이 아까웠다.
야간 근무는 밤 열한 시에 시작한다. 서린은 열 시 사십 분에 온다. 주차장에서 이층 창을 올려다보면 관제실 불빛 가운데 한 줄만 어둡다. 그 어두운 줄을 보면 오늘 자리가 있다는 걸 안다. 계단을 오르면서 가방 속 노트 모서리가 허벅지를 찌른다. 스프링이 벌어진 곳이다. 고치지 않았다.
새벽 세 시 조금 넘어 교대자 민재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
“선배, 하나 드세요.”
“괜찮아.”
“그럼 제가 두 잔 다 마실게요.”
민재는 정말로 두 잔을 다 마셨다. 한 잔은 오른손에, 한 잔은 왼손에 들고 번갈아 한 모금씩. 그는 그렇게 마시면 커피가 두 배로 오래간다고 믿었다. 서린은 그 믿음을 고쳐 주지 않았다. 야간 관제실에 사람이 둘 있고 그중 하나가 양손에 컵을 들고 있으면, 새벽 세 시가 조금 덜 새벽 세 시가 된다.
화면에 신호가 떴다.
송신 034. 발신 시각 03:08.
1. 잠이 안 옵니다. 2. 여기서는 잠이 안 오면 할 일이 없습니다. 창밖을 보는 것 말고는요. 3. 관제님은 지금 근무 중이십니까, 아니면 이 신호를 아침에 보십니까. 4. 어느 쪽이든 답은 십사 분 뒤에 옵니다. 5. 저는 그 십사 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보고합니다」가 없었다. 첫 줄이 1번이었다. 서린은 그걸 알아본 자기 눈이 조금 싫었다. 이 사람의 보고서를 쉰 통 넘게 받으면서, 어느새 첫 줄의 모양으로 그날 그 사람의 몸 상태를 읽고 있었다.
답장 창을 열었다. 「근무 중입니다.」 여기까지는 쉬웠다. 그다음 줄을 썼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가 지웠다. 민재가 컵을 내려놓고 곁눈질로 화면을 봤다가, 아무것도 안 본 척 천장을 봤다.
수신 034. 수신 시각 03:22.
1. 근무 중입니다. 야간 관제는 저 혼자입니다. 2. 교대자가 하나 더 있는데 지금 커피를 두 잔째 마시고 있어서 셈에 안 넣었습니다. 3. 십사 분 동안 저도 아무것도 못 합니다. 정확히는 합니다. 다음에 쓸 말을 씁니다. 쓰고 지웁니다. 4. 지금까지 여섯 번 지웠습니다.
이상입니다.
“저 셈에 안 넣으셨어요?”
민재가 화면을 가리켰다.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재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세 번째 커피를 타러 나갔다.
송신 035. 발신 시각 03:31.
0. 지금 지구가 지나갑니다. 오늘 아홉 번째입니다. 0-1. 대륙 쪽이 보입니다. 불빛이 있는 데가 있고 없는 데가 있습니다.
1. 지운 것을 보내 주시면 안 됩니까. 2. 요청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3. 규정상 송신 기록은 지운 것까지 서버에 남습니다. 저는 열람 권한이 없습니다. 관제님은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서린은 그 서버를 알았다. 오른쪽 모니터 아래 서랍 같은 메뉴가 하나 있고, 거기 들어가면 지운 문장들이 회색으로 줄지어 있다. 날짜와 분까지. 그녀가 지난 두 달 동안 이 사람에게 쓰다 만 문장이 백 줄 가까이 거기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그 창으로 보이는 게 궁금합니다」였고, 가장 최근 것은 방금 지운 「저도 잠이 안 옵니다」였다.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은 다시 읽기가 민망했다. 「단호박죽은 드시지 마십시오. 제가 있을 때도 그게 제일 맛없었습니다.」 「목소리가 궁금합니다.」 이건 두 번 지웠다. 「오늘 고흥은 바람이 셉니다. 바람이 세면 관제실 창문이 웁니다. 지금 울고 있습니다. 창문이요.」 이건 보내려다가 마지막 두 글자 때문에 지웠다. 서린은 메뉴를 닫았다. 닫으면서, 이 서버가 정거장과 같은 날 꺼진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폐쇄 일정표 맨 아래 줄에 적혀 있었다. 「관련 교신 기록 서버 운영 종료.」 그 줄도 그녀가 넣은 것이었다.
수신 035. 수신 시각 03:45.
1. 권한은 있습니다. 보내지는 않겠습니다. 2. 지운 문장은 제가 아직 감당 못 하는 문장입니다. 3. 보내면 십사 분 뒤에 답이 옵니다. 그 십사 분을 제가 못 견딥니다.
이상입니다.
보내 놓고 서린은 의자를 뒤로 밀었다. 바퀴가 바닥 이음매에 걸려 덜컥 멈췄다. 나간 형광등 줄이 천장에 검게 붙어 있었다.
열이틀 전 결재 회의에서도 천장을 봤다. 대전 우주청 삼층 회의실이었다. 운영국장 권도형은 서류를 넘기지 않고 말했다. 그는 서류를 다 외워 오는 사람이었다. 한 해 이백억 원, 그 돈이면 지상 관측소 네 곳을 새로 짓는다고 했다. 협의체 권고를 두 번 미루면 다음 발사 허가에 걸린다고 했다. 그리고 한 사람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걸 수는 없다고 했다. 말투는 차분했다. 틀린 말도 없었다. 서린은 결재판을 받아 셋째 칸에 이름을 썼다. 볼펜이 한 번 헛나가서 획 끝이 조금 올라갔다. 그 헛나간 획을 그녀는 아직 기억한다.
송신 036. 발신 시각 03:54.
0. 십사 분을 재 봤습니다. 팔백사십 초입니다. 0-1. 그동안 창가에 있었습니다. 지구가 반 바퀴 지나갔습니다. 0-2. 십사 분은 지구 반쪽입니다.
1.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하나를 지우지 않고 보내겠습니다. 2. 저는 폐쇄 결정 전에 이미 남기로 정했습니다. 설비 때문이라고 보고했습니다. 3. 설비는 까닭이 아닙니다. 4. 이 정거장에서 십사 년 전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의 보고서에 보고 아닌 문장이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서린은 4번을 읽고 손이 멈췄다. 커피를 타러 나갔던 민재가 문간에서 들어오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도로 나갔다. 복도 자판기 앞에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한참 났다. 민재는 필요 없는 음료를 두 개 더 뽑았다.
수신 036. 수신 시각 04:08.
1. … 2. 무슨 문장이었습니까.
이상입니다.
송신 037. 발신 시각 04:17.
1.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2. “오늘 지구가 열여섯 번 지나갔습니다. 열여섯 번 다 봤습니다. 이건 보고가 아닙니다.” 3. 저는 그 문장을 읽고 이 정거장에 지원했습니다. 사 년 전입니다. 4. 그 보고서에 이름은 지워져 있었습니다. 열일곱 번째 자리라는 것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서린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떼면 무언가가 넘칠 것 같았다. 십사 년 전 그 문장을 쓴 밤을 그녀는 기억했다. 정거장 이 년 차, 스물두 명이 다 자던 시간이었다. 그녀는 3구역에서 배양조 셋째 칸 배관을 잇다가 손을 씻으러 나왔고, 주 통로 창 앞에서 발이 멈췄다. 창밖으로 지구가 들어오고 있었다. 밤인 쪽이었고, 대륙 가장자리에 불빛이 가느다랗게 박혀 있었다. 손에서 배지 흙냄새가 났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그 바퀴를 끝까지 봤고, 다음 바퀴도 봤다.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뒤로 이백일 일 동안 열여섯 번을 다 봤다. 보고서 끝에 그 한 줄을 넣은 건 처음 본 날 밤이었다. 손을 안 씻은 채로 자판을 눌러서 자판 사이에 흙이 끼었다. 그 문장 때문에 받은 세 번째 지적문도 기억했다. 딱 한 줄이었다. 「반복 시 인사 기록 반영.」 그녀는 그 한 줄을 읽고 그만뒀다. 그만둔 문장이 서버 어딘가에 남아 있었고, 누군가 그걸 읽고 올라갔다.
답장 창을 열었다.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수신 037. 수신 시각 04:31.
1. 답장이 십사 분 늦어서 다행입니다. 2. 십사 분 동안 울었습니다. 3. 이건 보고가 아닙니다. 지우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민재가 음료 네 개를 품에 안고 들어와서, 아무 말 없이 그녀 책상에 하나를 놓고 갔다. 식혜였다. 새벽 네 시 반에 식혜라니. 서린은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달았다. 그 단맛 때문에 목이 풀렸다.
송신 038. 발신 시각 04:40.
1. 관제님. 십사 분이 좋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2. 말하고 나서 후회할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회해도 이미 갔습니다. 3. 그래서 후회를 안 하게 됩니다. 지상에서는 이렇게 못 합니다.
이상입니다.
서린은 종이 로그를 폈다. 수신 시각 04:54 칸을 미리 그어 놓고, 그 옆에 쓸 말을 먼저 손으로 적었다. 손으로 쓰니 지울 수가 없었다.
수신 038. 수신 시각 04:54.
1. 십사 년 전에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2. 그때는 지연이 십육 분이었습니다. 궤도가 조금 높았습니다. 3. 십사 년 동안 이 분이 줄었습니다. 4. 우리는 그만큼 가까워졌습니다.
이상입니다.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관제실 창은 동쪽으로 하나뿐이다. 서린은 식혜 캔을 창틀에 올려놓고, 하늘에서 아직 보이는 점 하나를 찾았다. 정거장은 새벽과 저녁에만 맨눈으로 보인다. 점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천천히 건너갔다. 그녀는 그것을 끝까지 봤다.
민재가 뒤에서 하품을 하며 물었다. “저거예요?”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창가로 와서 그녀 옆에 섰다가, 점이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지자 말했다. “생각보다 작네요.”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작다는 건 알았다. 그 작은 점 안에서 누가 지금 창에 이마를 대고 이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한 번이었다. 셈에 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