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26자) · 뿌리가 뜬다
열일곱 번째
궤도에서 온 편지 · 서지오
종자는 냉동고 C칸에 있었다. 수신 017 다음 날 온 짧은 답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C칸 맨 안쪽, 은박 봉투. 콩입니다. 발아율은 모릅니다.」
C칸은 성에가 두껍게 껴서 문이 반만 열렸다. 팔을 어깨까지 넣고 손끝으로 더듬자 바삭한 은박이 만져졌다. 꺼낸 봉투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십사 년 전 봄. 봉투를 흔들면 안에서 작은 것들이 부딪쳤다. 마른 콩은 무중력에서도 소리를 낸다. 봉투 안쪽 벽에 부딪혀 사락, 사락.
배지 벽돌은 물에 불려야 했다. 배양조 하나에 물을 채우고 벽돌을 담가 두면 여섯 시간쯤 걸려 흙이 된다. 물을 너무 빨리 부으면 벽돌 겉만 풀려 진흙 막이 생기고 속은 마른 채로 남는다. 그래서 주사기로 조금씩 넣었다. 주사기 하나에 오십 밀리리터, 스무 번이면 일 리터다. 나는 스무 번을 세면서 넣었고, 세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는 일은 그래서 좋다.
송신 018. 발신 시각 06:40.
보고합니다.
1. 3구역 온실 정상 가동. 2. 배양조 여섯 중 넷에 물을 채웠습니다. 나머지 둘은 급수관이 삭았습니다. 교체 부품 없습니다. 3. 여쭙겠습니다. 십사 년 전이면 이 정거장 이 년 차입니다. 기록에는 그때 인원이 스물둘이었다고 나옵니다. 4. 몇 번째셨습니까.
이상입니다.
수신 018. 수신 시각 06:54.
1. 열일곱 번째입니다. 명단은 탑승 순서라, 늦게 간 사람이 뒤에 섭니다. 2. 급수관은 삭는 게 맞습니다. 십사 년이면 삭습니다. 3. 왼쪽 끝 둘은 두고 나머지 넷만 쓰십시오. 4. 물은 하루 이 리터씩만 주십시오. 더 주면 뿌리가 뜹니다. 5. 이건 도면에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주 통로 벽에는 역대 상주자 휘장이 붙어 있다. 천에 수놓은 동그란 휘장이 탑승 순서대로 스물두 개, 그 뒤로 드문드문 이어져 내 것까지 온다. 나는 날마다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세었다. 열일곱 번째 휘장은 실밥이 조금 풀려 있었고, 이름 자리에는 영문 이니셜 두 글자만 수놓여 있었다. S. R. 나는 풀린 실밥을 손톱으로 눌러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실밥은 금방 다시 일어섰다.
뿌리가 뜬다는 말은 교범에도 지상 농업 자료에도 없었다. 무중력에서는 물이 아래로 빠지지 않고 뿌리 둘레에 공처럼 뭉친다. 뭉친 물 속에서 뿌리는 숨을 못 쉬고 배지에서 들려 올라온다. 들린 뿌리는 하얗게 떠서 흔들린다. 나는 그 설명을 그 사람의 다음 문장에서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먼저 만들었다. 「뜬다」라는 한 단어가 그만큼을 데려왔다.
그다음 송신에는 답이 오지 않았다.
십사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나는 통신계 진단을 다시 돌렸다. 정상이었다. 한 번 더 돌렸다. 정상이었다. 세 번째를 돌리려다가 손을 멈췄다. 진단이 정상이면 문제는 통신계가 아니다. 교범 십이 장이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 밥을 먹었다. 정거장 밥은 봉지에 든 죽이다. 뜨거운 물을 주사하고 사 분을 주물러서 빨대로 먹는다. 봉지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소고기 버섯죽」「닭고기 야채죽」「단호박죽」. 이름은 달라도 맛은 대개 봉지 맛이다. 나는 그날 단호박죽을 먹으면서 통신 담당이 두고 간 책을 다시 폈다. 두 번은 이미 읽었다. 세 번째는 아껴 두기로 했었다. 아껴 둔 것을 꺼내는 날이 이런 날인 줄은 몰랐다. 첫 장을 넘기고, 둘째 장을 넘기고, 셋째 장에서 같은 줄을 네 번 읽었다. 글자가 머리에 붙지 않았다. 책을 덮고 창가로 갔다. 지구가 들어왔다가 나갔다. 나는 세지 않으려고 했다. 세 번째 바퀴쯤에서 이미 세고 있었다.
답은 열네 시간 뒤에 왔다. 그 사이에 나는 콩을 심었다. 한 배양조에 여섯 알씩, 손가락 한 마디 깊이로. 콩이 배지에서 튀어나와 떠다니지 않게 한 알 넣을 때마다 엄지로 흙을 덮어 눌렀다. 스물네 알이었다.
송신 019. 발신 시각 09:15.
보고합니다.
0. 어제 회신이 열네 시간 늦었습니다. 0-1. 관제 규정상 지연 사유를 확인해야 하지만 확인하지 않겠습니다. 0-2. 이건 규정 위반입니다. 0-3. 위반 사유는 제가 알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1. 물을 하루 이 리터로 맞췄습니다. 2. 뿌리가 뜬다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지상 자료에는 없는 말입니다. 3. 관제님. 4. 이 줄은 보고가 아닙니다. 이번에도 지우려다가 안 지웠습니다.
이상입니다.
0번 항목을 만든 건 그날이 처음이다. 1번 앞에 무엇을 놓을 자리가 필요했다. 적어 놓고 보니 0-3까지 있었다. 보고서가 앞으로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수신 019. 수신 시각 09:29.
1. 지우지 마십시오. 2. 저도 십사 년 전에 그랬습니다. 보고서에 보고 아닌 것을 한 줄씩 넣었습니다. 3. 관제에서 지적이 왔습니다. 세 번 지적받고 그만뒀습니다. 4. 지금은 제가 관제입니다. 5. 지적하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세 번이라는 숫자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한 번 지적받으면 실수다. 두 번이면 버릇이다. 세 번째에 그만뒀다는 건, 두 번째까지는 알면서 계속 썼다는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이 받았을 지적문을 머릿속으로 써 보았다. 「보고서 양식 준수 바람. 비업무 문장 삭제 요망.」 두 번째는 조금 더 딱딱했을 것이다. 「재차 지적함.」 세 번째는 아마 한 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한 줄을 읽고 그만뒀다. 나는 쓰다 만 지적문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 그 한 줄을 쓸 수 있는 자리에 그 사람이 앉아 있고, 쓰지 않겠다고 한다.
넷째 배양조에서 싹이 안 나면 어떻게 되느냐고, 그날 저녁 나는 묻지 않았다. 대신 흙 위에 손바닥을 얹어 보았다. 흙은 미지근했다. 안에서 무언가 하고 있는 온도였다.
싹은 엿새째에 났다.
아침 점검을 마치고 3구역에 갔을 때, 2번 배양조의 흙이 한 군데 들려 있었다. 누가 안에서 손가락으로 민 것처럼 둥글게 금이 가 있었고, 그 금 사이로 연두색 고리 하나가 보였다. 콩 싹은 머리를 숙인 채로 올라온다. 목이 먼저 나오고 머리는 나중에 흙을 끌고 나온다. 나는 그걸 처음 봤다. 볼 줄 몰라서, 처음에는 곰팡이인 줄 알았다. 조명을 가까이 대고 한참 들여다본 뒤에야 고리 끝에 붙은 떡잎 두 장이 보였다.
나는 교범대로 조명과 거리를 재고, 온도계를 배양조 옆에 붙이고, 습도를 적었다. 섭씨 이십삼 도, 습도 육십팔. 적어 놓고 보니 그 숫자들은 싹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싹은 숫자보다 작았다. 손톱 반만 한 떡잎이 송풍기 바람에 아주 조금씩 떨렸고, 떨릴 때마다 조명을 받는 면이 바뀌어서 연두색이 한 번은 노랗게, 한 번은 푸르게 보였다. 흙에서는 첫날보다 진한 냄새가 났다. 묵은 먼지 냄새가 빠지고 물 먹은 흙냄새만 남아 있었다. 나는 코를 배양조 뚜껑 틈에 대고 숨을 오래 들이마셨다. 이 년 이 개월 동안 이 정거장에서 자란 것은 내 손톱과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날 나는 3구역에서 두 시간을 있었다. 할 일은 삼십 분이면 끝났다.
송신 020. 발신 시각 14:03.
보고합니다.
0. 오늘 3구역에서 두 시간을 보냈습니다. 0-1. 할 일은 삼십 분이면 끝났습니다. 0-2. 나머지 한 시간 반은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앉는다는 건 발을 걸쇠에 끼우는 겁니다. 0-3. 배양조 넷 중 셋에서 싹이 났습니다. 0-4. 사진을 찍었는데 전송 용량이 부족해 못 보냅니다. 말로 적겠습니다. 연두색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고, 떡잎이 두 장입니다.
1. 산소 순환계 정상. 예비 필터 열하나. 2. 오늘 지구가 열여섯 번 지나갔습니다. 궤도 주기가 구십 분이니 정상입니다. 3. 그런데 저는 그걸 매일 셉니다. 세는 까닭을 오늘 알았습니다. 4. 세지 않으면 하루가 안 끝납니다.
이상입니다.
수신 020. 수신 시각 14:17.
1. 저는 십사 년 전에 세지 않았습니다. 2. 대신 지구가 지나갈 때마다 창을 봤습니다. 열여섯 번 다 봤습니다. 3. 이백일 일 동안이었습니다. 4. 삼천이백십육 번입니다. 5. 이건 방금 계산했습니다. 계산기를 썼습니다. 6. 계산기는 교대자 것입니다. 교대자가 옆에서 왜 그걸 곱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혼자 웃으면 정거장이 조용하다는 건 알았지만, 웃음이 통로 끝까지 가서 3구역 송풍기 소리에 섞이는 건 처음 들었다. 그 사람 옆에 교대자가 있다. 계산기를 빌려주고 왜 곱하느냐고 묻는 사람. 나는 그 교대자에게 조금 고마웠다. 그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서.
송신 021. 발신 시각 20:41.
보고합니다.
0. 오늘 필터를 하나 더 뜯었습니다. 예비가 열하나에서 열이 됐습니다.
1. 오늘 폐쇄 일정 통보를 받았습니다. 2. 정거장은 백사십 일 뒤에 폐쇄됩니다. 3. 마지막 보급선은 백이십 일 뒤에 옵니다. 4. 그 배에 타면 돌아갑니다. 안 타면 못 돌아갑니다. 5. 이건 보고입니다.
이상입니다.
통보는 운영국장 명의였다. 본문은 세 쪽이었다. 첫 쪽은 정거장의 이력이었다. 착공, 첫 상주, 최다 인원 스물둘, 운영 축소, 상주 한 명. 둘째 쪽은 까닭이었다. 한 해 운영비 이백억 원, 국제 궤도 정리 협의체의 권고, 궤도에 남은 구조물이 파편이 될 확률. 확률은 소수점 아래 넷째 자리까지 적혀 있었다. 셋째 쪽이 일정이었다. 보급선 도착, 인원 철수, 전원 차단, 궤도 이탈. 인원 철수라는 말 옆에 괄호가 있었고 괄호 안에 「1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괄호를 보고 조금 웃었다. 1명을 철수라고 부르는 건 과하다. 한 사람은 그냥 내려가는 거다.
문서 끝에 결재란이 네 칸 있었고 네 칸이 다 차 있었다. 나는 결재란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 대신 3구역에 가서 싹 셋에 이 리터를 나눠 주었다. 넷째 배양조는 아직 조용했다.
수신 021. 수신 시각 20:55.
1. 알고 있습니다. 2. 그 일정을 짠 곳이 관제입니다. 3. 결재란 셋째 칸이 제 서명입니다. 4. 서명은 열이틀 전에 했습니다. 네 칸이 다 차는 데 열이틀이 걸렸습니다. 5. 서명하고 열네 시간 동안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송신 018 회신이 늦은 까닭입니다. 6. 죄송합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통보 문서를 다시 열었다. 셋째 칸의 서명은 획 끝이 조금 올라가 있었다.
1번 배양조의 1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