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127자) · 12월 22일

십사조 이항

반송된 편지 · 유하람

규정집은 휴게실 자판기 위 선반에 있었다. 파란 바인더. 십이 년 동안 아무도 내린 적 없는 물건. 전날 새벽 여섯 시 반에 강 선배가 커피 두 잔을 뽑고 나서 턱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십사조. 이항.”

그 말만 하고 그 사람은 커피를 마셨다. 선우는 바인더를 내렸다. 먼지가 손바닥에 묻었다. 십사조는 열일곱 쪽에 있었다. 일항은 삼 년 폐기. 이항은 그 아래 세 줄. 폐기 전 수취인 확인 조치를 하고 그 기록을 첨부한다.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 사유를 적는다. 세 줄이었다. 그는 그것을 세 번 읽었다. 읽고 나서 강 선배를 봤다.

“이거 아셨어요.”

“삼십 년 동안 그 세 줄 밑에서 살았는데 모르겠냐.”

“그럼 왜 안 쓰셨어요.”

“쓰려면 시도를 해야지. 나는 시도를 안 했잖아. 꽂아 두기만 했지. 너는 했고.”

그 사람은 빈 컵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한 번에.

십이월 이십이일 화요일 열 시 십 분. 선우는 퇴근하지 않고 삼 층으로 올라갔다. 센터장실은 회의실 옆이었다. 문에 이름표. 한성국.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센터장. 그는 노크를 두 번 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사 초쯤 걸렸다. 그 사 초 동안 그는 조끼 안주머니를 눌렀다. 공책 스무 장, 편지 한 장, 빈 봉투 하나. 그리고 오늘 새로 넣은 것. 공책 뒷장을 복사한 종이 넉 장. 백사십삼 개 이름.

센터장은 책상 뒤에 있었다. 창을 등지고. 이 방에도 창이 있었다. 이 건물에 창이 셋이라는 것을 선우는 이 달에 알았다. 십이 년 동안 하나인 줄 알았다.

“퇴근 시간 지났습니다.”

“압니다.”

“앉으세요.”

책상 앞에 의자가 하나 있었다. 선우는 앉았다. 앉으니 센터장 책상 위가 보였다. 태블릿, 종이 몇 장, 그리고 액자 하나. 액자는 뒤집혀 있었다. 사진이 책상 쪽을 보게. 그것을 보고 선우는 시선을 거뒀다. 남의 것을 안 본다. 십이 년 규칙.

방은 회의실보다 작았다. 책장 하나, 책상 하나, 의자 둘. 책장에 서류철이 색깔별로 꽂혀 있었고 색이 안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해진 것을 정해진 대로 두는 사람의 방이었다. 벽에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임명장. 한강우편집중국장. 날짜가 사 년 전이었다. 그 옆이 비어 있었다. 못 자국만. 무언가 걸려 있다가 내려간 자리.

“봉인 해제 얘기라면 저한테 권한 없습니다.”

“봉인 얘기가 아닙니다.”

선우는 종이 넉 장을 꺼내 책상에 놓았다. 복사한 것. 백사십삼 줄.

“받은 사람 명단입니다. 이름, 날짜, 받은 곳. 사무관님이 남기라고 하신 겁니다.”

센터장은 그것을 봤다. 넘기지 않고 첫 장만.

“이걸 왜 저한테.”

“규정 십사조 이항이요.”

센터장 얼굴이 조금 움직였다. 아는 얼굴이었다.

“폐기 전 수취인 확인 조치. 배달 시도 기록이 있어야 폐기 결재가 납니다. 이 선반 사백열두 통은 배달 시도 기록이 없습니다. 삼십 년 전 주소라 시도 불가로 처리하신 거죠. 그런데 백사십삼 건이 시도됐고 전달됐습니다. 시도 불가가 아니라는 기록입니다. 그러면 남은 이백육십팔 통도 시도 불가로 처리할 근거가 없습니다.”

“……”

“폐기 결재 다시 올라가야 합니다. 시도 기록 붙여서요. 아니면 시도를 하든지요.”

센터장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넉 장을 책상 모서리에 맞춰 정리했다. 그러고는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창밖에서 강이 빛나고 있었다. 이 방 창은 회의실보다 컸다.

“선우 씨가 규정을 읽었네요.”

“읽었습니다. 십이 년 만에요.”

“십사조 이항은 저도 압니다. 그래서 시도 불가로 올렸습니다. 삼십 년 전 주소를 어느 배달원이 갑니까. 그 판단은 국장 재량입니다.”

“재량이면 바꿀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있죠. 안 바꾸는 겁니다.”

센터장은 그렇게 말하고 뒤집힌 액자를 손으로 한 번 만졌다. 뒤집지 않았다. 만지기만 했다.

“오 년 전에 저는 지방 우체국장이었습니다. 작은 데요. 직원 열넷. 거기 반송 담당이 하나 있었는데 사람이 참 좋았어요. 선우 씨 같았어요. 남의 편지를 사람으로 봤어요. 어느 날 반송된 편지를 들고 발신인이 찾아왔어요. 남편이었어요. 아내한테 보낸 편지가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왔다고. 아내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울었어요. 그 직원이 그 사람을 봤어요. 얼굴을. 그리고 우편 전입 기록을 찾아서 새 주소를 알려 줬어요. 규정 위반이죠. 근데 얼굴을 봤으니까요.”

선우는 듣고 있었다. 손이 무릎 위에 있었다.

“아내는 도망친 거였어요. 남편한테서. 새 주소는 쉼터 근처였고요. 남편이 거길 찾아갔어요. 그 뒤는 말 안 하겠습니다. 아내는 병원에 두 달 있었어요. 남편은 구속됐고요. 직원은 해임됐고, 저는 감봉 육 개월에 국장 자리에서 내려왔어요. 개인정보 유출 관리 책임. 그게 제 기록입니다. 지난번에 기록이 뭔지 안다고 한 게 그겁니다.”

“……”

“그 직원이 나쁜 사람이었나요. 아니요. 제일 좋은 사람이었어요. 좋은 사람이 얼굴을 보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얼굴을 안 봅니다. 사무관도 그렇게 말했죠. 그 사람은 저보다 먼저 그걸 안 사람이고요. 선우 씨. 백사십삼 명이 다 박순례 할머니 같은 분이었나요. 서초 분도 있었죠. 서초 분은 편지를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겁니다. 삼십 년 만에 온 편지가 그 사람한테 뭘 했는지 선우 씨는 모릅니다. 문 닫고 나서요.”

선우는 서초 십일 층 복도를 생각했다. 세게 닫지 않은 문. 마음이 없는 것처럼 닫은 문. 그 뒤에서 그 사람이 뭘 했는지 그는 몰랐다. 그것을 모른 채로 여기까지 왔다.

“……”

“선우 씨가 문 앞에서 봉투를 들고 서 있었던 그 시간에, 저는 그 직원이 전입 기록을 찾던 손을 봅니다. 같은 손이에요. 좋은 손이요. 좋은 손이 제일 위험합니다.”

선우는 자기 손을 봤다. 무릎 위에. 하루에 이천 통을 만지는 손. 그 손이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박하면 그 직원을 반박하는 것이 돼서 그는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백사십삼 명은 받았습니다.”

“네. 받았죠. 그래서 제가 지금 선우 씨를 못 자릅니다. 백사십삼 명이 있어서요.”

센터장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종이 한 장. 붉은 관인. 선우한테 밀었다.

“징계 결과입니다. 어제 왔어요. 강태만 선생 감봉 삼 개월. 정년이 열흘 남았으니 실제로는 한 달치도 안 됩니다. 선우 씨는 경고. 기록에 남습니다. 오 주임 이하 야간조는 주의. 이게 사무관이 올린 겁니다. 사무관이 대상자를 둘로 적었는데 본부에서 강 선생 하나로 줄이려고 했어요. 사무관이 안 줄였습니다. 선우 씨가 제가요, 라고 했다고. 그 말을 기록에서 뺄 수 없다고.”

선우는 종이를 봤다. 경고. 자기 이름 옆에. 십이 년 동안 자기 이름이 어디에 적힌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출근부 말고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무거워야 하는데 무겁지 않았다. 자기 것이라서였다.

“그리고 이백육십팔 통.”

센터장이 말했다.

“십사조 이항. 선우 씨 말이 맞습니다. 시도 기록이 있으니 시도 불가 처리는 못 합니다. 재량으로 바꾸겠습니다. 이십삼일부터 삼십일 아침까지, 근무 시간 안에서, 야간조가 수취인 확인 조치를 합니다. 확인된 건 배달하고, 확인 안 된 건 폐기 대상으로 남깁니다. 봉인은 사무관이 풀어야 하고 그건 제가 오늘 요청합니다. 반출은 오 주임 책임으로 하고 매일 저한테 기록 냅니다. 이건 제 재량이고 그 재량의 값은 제가 치릅니다.”

“……”

“왜 그런 얼굴입니까?”

“바꾸신다고요.”

“얼굴을 안 본다고 했지 종이를 안 본다고는 안 했습니다. 이 넉 장은 종이예요. 종이는 봅니다.”

센터장은 넉 장을 다시 집어서 자기 서류철에 넣었다. 뒤집힌 액자 옆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선우 씨 그 반송함에서 나온 편지. 강 선생이 십이 년 두었다는 거. 그건 선우 씨 겁니까?”

“…제 겁니다.”

“받았고요.”

“받았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그것도 배달 기록에 넣으세요. 백사십사.”

선우는 일어섰다. 문 앞에서 돌아섰다. 센터장은 이미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센터장님. 그 직원이요. 지금 뭐 합니까?”

센터장이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편지 씁니다. 저한테. 일 년에 두 번. 저는 답장 안 합니다. 얼굴을 안 보니까요.”

그 말에 뭐가 있었다. 선우는 그것을 들었고 이번에는 알았다. 답장을 안 하는 사람이 여기 하나 더 있었다. 그 사람은 규정 때문이라고 했다. 선우는 규정이 없었다. 그러니까 자기 쪽이 더 나쁜 것이었다.

복도로 나오니 은비가 없었다. 열 시 사십 분. 다들 갔다. 오 주임만 계단참에 서 있었다. 달걀 없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센터장이 보낸 것이었다. 반출 책임자 오병철. 그 사람은 화면을 선우한테 보여 줬다.

“책임자래.”

“네.”

“삼십 년 동안 책임자 한 번 안 해 봤는데. 야간 주임은 책임이 없어서 좋은 자리야.”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이백육십팔 통을 여드레에. 하루 서른셋. 걸어서. 오 킬로는 더 빠지겠네.”

오 주임은 그렇게 말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주머니에서 달걀을 꺼냈다. 까지 않고 도로 넣었다. 그 사람이 달걀을 도로 넣는 것을 선우는 처음 봤다. 그는 뒷계단으로 나갔다. 낮의 계단은 얼음이 녹아 젖어 있었다. 앉지 않았다. 서서 도로를 봤다. 첫차는 벌써 갔고 낮 버스가 지나갔다.

반지하에 돌아와서 그는 책상 앞에 앉았다. 열두 장. 빈 봉투. 그는 열세 번째 종이를 꺼냈다. 공책에서. 위쪽을 뜯었다. 서두르지 않고. 십이 년 전 도경이 뜯은 자국을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책상 위 열두 장을 그는 한 장씩 넘겨 봤다. 열두 번 같은 첫 줄. 글씨가 조금씩 달랐다. 첫 장은 눌러 썼고 열두 번째는 가볍게 썼다. 열두 번 쓰는 동안 힘이 빠진 것이다. 힘이 빠지면 글씨가 그 사람 글씨가 된다. 스물셋은 볼펜을 세게 눌렀고 서른다섯은 그러지 않는다.

첫 줄을 썼다. 도경에게, 가 아니었다.

도경아.

거기까지였다. 그다음 줄은 안 나왔다. 그런데 그것이 열두 장과 달랐다. 열두 장은 편지의 첫 줄이었고 이것은 부르는 말이었다. 부르면 대답이 온다. 답장이 아니라 대답. 그는 그 한 줄을 열두 장 위에 얹었다. 흰 봉투 아래에. 열세 장과 봉투 하나. 자고 일어나면 그것이 거기 있을 것이다. 봉인 해제 요청이 오늘 올라갔고, 내일부터 이백육십팔 통. 삼십일까지 여드레. 이월 삼일까지 마흔세 날. 그는 이번에는 셌다. 세도 하기 싫어지지 않았다.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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