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004자) · 12월 18일 새벽

빈 봉투

반송된 편지 · 유하람

봉인 뒤로 사흘 동안 선우는 열두 장을 썼다. 쓴 것이 아니라 시작했다. 반지하 방 책상 위에 공책 종이 열두 장이 있었고, 열두 장 다 첫 줄이 같았다. 도경에게. 그다음 줄이 없었다. 첫날 밤에 넉 장, 둘째 날 다섯 장, 셋째 날 석 장. 줄어드는 것이 나아지는 것인지 그는 몰랐다.

열두 장은 책상 위에 포개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면 다시 첫 장부터라는 것을 알았다. 열두 장 무게. 종이 열두 장은 봉투 하나보다 무겁다. 그런데 안에 든 것이 없어서 들면 가벼웠다. 그 차이를 손이 알았다.

그 사흘 동안 분류실은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것은 컨베이어가 안 돈다는 말이 아니다. 기계는 돌았다. 사람이 안 돌았다. 정문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어졌다. 오 주임은 달걀을 다시 먹기 시작했고 하루에 여덟 개까지 갔다. 은비는 사진을 다 지웠고 지운 자리에 이름을 적었다. 휴대폰 메모에 백사십삼 개. 선우는 강 선배 공책 뒷장에 그것을 옮겨 적었다. 볼펜으로. 이름, 날짜, 받은 곳. 앞장은 삼십 년 치 다른 글씨였고 뒷장은 사흘 치 자기 글씨였다. 두 글씨가 한 공책에 있는 것을 그는 밤마다 봤다. 자기 글씨가 앞장 글씨를 닮아 가고 있었다. 획 끝이 조금 올라갔다.

붉은 테이프는 그대로였다. 야간조 여덟 사람은 그 앞을 하루 이백 번씩 지나갔다. 아무도 안 봤다. 보면 손이 갈 것 같아서 안 보는 것이다. 강 선배만 봤다. 한 걸음 뒤에서, 새벽 두 시 반송함 정리를 마치고, 매일 삼 분씩.

십이월 십팔일 금요일 새벽 여섯 시 십오 분. 은비가 컨베이어 반대편에서 손짓을 했다. 손이 아니라 팔 전체로. 은비는 급하면 팔로 말한다.

“선우 씨. 뒷문에 누가 왔어요. 선우 씨 찾아요.”

“누가요.”

“여자분이요. 코트 입고. 군산에서 왔대요.”

선우 손이 멈췄다. 이달에 세 번째 멈추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손이 멈추는 것으로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안다.

“경비실에서 못 들어온대서 제가 뒷문 열어 줬어요. 지금 뒷계단에 있어요. 추울 텐데.”

“……”

“빨리요. 오 주임님한테는 화장실 갔다고 할게요. 십오 분요.”

선우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갔다. 복도, 뒷문, 계단. 뒷문을 여니 찬 공기가 얼굴에 왔다. 어두웠다. 동쪽이 아직 회색이 되기 전이었다. 계단 셋째 단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코트, 목도리, 무릎에 가방. 한쪽 발에 무게를 두고 앉는 사람은 없는데 그 사람은 앉아서도 그랬다.

“여기서 첫차가 보인다며.”

도경이 말했다. 돌아보지 않고.

“…여섯 시 사십 분이요.”

“이십오 분 남았네. 앉아.”

선우는 앉았다. 한 단 위에. 군산 스탠드와 반대였다. 시멘트가 얼어 있었다. 이번에는 찬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수 왔어. 파견 교육. 서울에서 이틀. 어제 끝났고 오늘 내려가. 그래서 이 시간에 온 거야. 낮에 오면 네가 없으니까.”

“……”

“출국 날짜 나왔어. 이월 삼일.”

도경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봉투였다. 새것. 흰색. 우체국에서 파는 제일 싼 규격 봉투. 아무것도 안 쓰여 있었다. 그 사람은 그것을 선우한테 내밀지 않고 두 사람 사이 계단 위에 놓았다. 시멘트 위에 흰 종이.

“이번엔 봉투 있어.”

도경은 장갑을 안 끼고 있었다. 손이 빨갰다. 그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지 않고 무릎 위에 놓고 있었다. 봉투를 놓은 손을 도로 거두지 않은 것처럼. 목도리는 회색이었다. 십이 년 전에도 회색이었는지 선우는 기억하려다 그만뒀다. 기억나지 않는 것을 기억하려고 하면 기억나는 것까지 흔들린다.

“은비 씨가 안에 잠깐 보여 줬어. 문틈으로. 빨간 테이프 두른 거.”

“봉인이요. 이백육십팔 통. 삼십일일에 태워요.”

“그것도 네 편지 아니잖아.”

“……”

“네 편지는 어디 있어.”

선우는 조끼 위를 손으로 눌렀다. 안주머니. 한 장. 도경이 그 손을 봤다.

“그거 말고. 새 거.”

선우는 그것을 봤다. 빈 봉투는 무게가 없다. 없어야 하는데 계단 위에 놓인 그것이 방 안 열두 장보다 무거워 보였다.

“은비 씨가 얘기해 줬어. 뒷문 열어 주면서. 이달에 백사십삼 명한테 편지를 줬다며. 삼십 년 된 편지를. 걸어서. 연차도 냈다며. 십이 년 만에.”

“……”

“그 연차는 나 보러 온 거였고.”

“네.”

“그런데 나한테는 한 장도 안 줬어.”

도경이 돌아봤다. 아래에서 위로. 얼굴이 어두워서 눈만 보였다. 눈이 사람을 볼 때 안 피하는 것.

“넌 또 남의 편지 뒤에 숨어.”

그 말이 계단에 떨어졌다. 봉투 옆에.

“십이 년 전에 네 편지 뒤에 숨었잖아. 답장 안 해도 돼. 그 줄 뒤에. 지금은 백사십삼 명 편지 뒤에 숨어 있어. 그 사람들 편지 주는 동안은 네 편지 안 써도 되니까. 바쁘니까. 착한 일 하니까. 나는 알아. 너를 열두 줄로 아는 게 아니라 이렇게 알아.”

선우는 봉투를 봤다. 흰 것.

“쓰고 있어요.”

“거짓말.”

“열두 장이요. 집에. 첫 줄만 있어요. 도경에게. 그다음이 안 나와요.”

도경은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래 도로로 청소차가 지나갔다. 회전등이 계단 벽을 주황으로 한 번 쓸고 갔다.

“열두 장.”

도경은 그 숫자를 한 번 입 안에서 굴렸다. 열두 줄, 열두 장. 그 사람은 숫자가 같은 것을 알아챈 얼굴이었는데 말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열두 장 다 줘.”

“…첫 줄만 있는데요.”

“첫 줄만 있어도 네 글씨잖아. 열두 장이면 열두 번 시작한 거잖아. 나는 여섯 번 읽었어. 너는 열두 번 시작했어. 그거면 됐어. 그거 줘.”

선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열두 장은 반지하 책상 위에 있었다. 여기 없었다. 있어도 줄 수 있었을지 그는 몰랐다. 첫 줄만 있는 종이를 주는 것은 답을 안 하는 것과 같아서였다. 아니, 다른 것이었다. 다른데 그 다름을 그는 아직 손으로 몰랐다.

“……”

“또 그러네.”

이번에는 도경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선우야. 나 화 안 났어. 십이 년 전에도 화 안 났어. 여섯 번 읽고 화 안 났어. 화가 났으면 답장을 안 썼지. 화가 난 건 마지막 줄 하나야. 그거 하나 때문에 열한 줄이 다 아까웠어.”

여섯 시 삼십오 분. 은비가 말한 십오 분이 지나고 있었다. 선우는 그것을 알았는데 일어나지 않았다.

“이월 삼일.”

도경이 말했다.

“그 전에 뭐가 오면 손으로 받을게. 우체통에 넣지 마. 우체통에 넣으면 또 어디서 십이 년 멈출지 모르니까. 그리고 안 오면.”

“……”

“안 와도 돼. 그건 네가 쓴 줄이니까. 내가 지켜 줄게. 근데 그거 알아? 그 줄 지키는 거 되게 힘들어. 십이 년 해 봤는데.”

여섯 시 사십 분. 아래 도로에 버스가 들어왔다. 첫차. 앞 유리에 불이 켜져 있고 안에 사람이 셋쯤. 십이 년 동안 매일 본 차. 도경이 일어섰다. 가방을 메고, 목도리를 고쳤다.

“저거 타면 용산 가?”

“네. 이십 분이요.”

“그럼 저거 타.”

도경은 계단을 내려갔다. 봉투는 계단 위에 그대로 두고. 셋째 단에 흰 것 하나. 그 사람은 도로에서 손을 들었다. 버스가 섰다. 십이 년 동안 그 버스가 이 앞에서 서는 것을 선우는 처음 봤다. 정류장이 아니었다. 기사가 문을 열어 줬다. 도경이 탔다. 창가에 앉는 것이 보였다. 이쪽을 보지 않았다. 버스가 갔다.

선우는 봉투를 집었다. 빈 것. 두 손으로. 빈 봉투를 두 손으로 받는 사람은 없는데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러고는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자기 편지 옆, 강 선배 공책 옆. 한 장, 스무 장, 그리고 빈 것.

그는 계단에 잠깐 더 앉아 있었다. 버스가 간 도로는 비었고 동쪽이 회색에서 흰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셋째 단에 사람이 앉았던 자리가 다른 데보다 덜 얼어 있었다. 손을 대 보니 아직 조금 따뜻했다. 그는 그 자리에 손을 얹고 있다가 뗐다. 손바닥이 시멘트의 온도를 쟀다. 사람 하나가 이십오 분 앉았던 온도. 그것도 무게였다. 무게가 아닌데 손이 그렇게 쟀다.

뒷문을 여니 은비가 복도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십오 분이 아니라 이십오 분이었다.

“오 주임님이 화장실 오래 간다고 달걀 하나 남겨 놨어요.”

“……”

“선우 씨. 그분이 그 편지 분이죠. 십이 년.”

“네.”

“그런데 왜 그냥 보내요.”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비는 이번에는 그냥 가지 않았다. 팔짱을 풀고 선우 조끼 앞을 봤다. 명찰을. 그다음에 안주머니 자리를.

“선우 씨는 백사십삼 명한테는 두 손으로 줬어요. 제가 봤어요. 근데 자기 건 한 손으로도 못 주네요.”

그 말을 하고 은비는 갔다. 입이 빠른 사람은 가끔 정확하다. 이달에 두 번째였다.

여섯 시 오십 분. 강 선배가 자판기 앞에 있었다. 종이컵 둘. 선우는 받았다. 두 손으로. 그 사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뒷문에 누가 왔는지, 이십오 분 동안 어디 있었는지. 대신 커피를 반쯤 한 번에 마시고 벽을 보고 말했다.

“나는 삼십 년 동안 편지를 한 통도 안 썼다. 사백열두 통 지키면서. 남의 거 지키는 게 내 거 쓰는 거보다 쉬워서.”

“……”

“그게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야. 열세 날 남았거든.”

“선배님 첫 번째 편지요. 1994년 삼월.”

“말 안 한다니까.”

“……네.”

“근데 하나만. 그거 내가 쓴 거 아니야. 내 앞으로 온 거야. 나도 안 열어 봤어. 삼십 년. 열어 보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나오니까. 그래서 남의 것도 못 태웠어. 내 걸 못 열어 보는 놈이 남의 걸 태울 수는 없잖아.”

분류실로 돌아가니 컨베이어가 돌고 있었다. 붉은 테이프 안에 이백육십팔 통. 선우는 바구니를 옮겼다. 손이 느렸다. 느린 손으로 이천 통을 옮기면 아침 열 시가 늦게 온다. 그날은 열 시 십 분에 기계가 멈췄다.

집에 가서 그는 책상 위 열두 장을 봤다. 도경에게. 열두 번. 그는 열세 번째 종이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조끼에서 흰 봉투를 꺼내 열두 장 위에 얹었다. 빈 것을 맨 위에. 그러고 잤다. 자는 동안 그것들은 거기 있었다. 열두 장과 빈 봉투. 다음에 일어나면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열두 장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열두 장이냐 빈 봉투냐 가운데 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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