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6,033자)
선생님 이름으로
리딩방 고수가 우리 팀장이었다 · 문채겸
7월 23일 금요일 오후 한 시 반, 근호의 회색 세단 조수석에 내가 앉아 있었다. 근호가 아침에 전화해서 짧게 말했다. “역삼동 간다. 네 귀가 필요하다.” 화성에서 강남까지 반장이 지게차 대신 내 차를 몰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하고 버스를 탔다.
근호는 운전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국회 정무위원회가 불법 리딩방 처벌 법안을 다음 달 처리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근호가 라디오를 껐다. 차 안에 에어컨 바람 소리와 깜빡이 소리만 남았다. 똑딱, 똑딱. 근호의 손가락이 핸들 위에서 깜빡이 박자를 따라 두드렸다.
“팀장님, 오늘은 회의 때 한 번도 안 하셨답니다. 휘람 씨가 그러던데요.”
“뭘.”
“자, 귀 열고.”
근호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죽이 끽 소리를 냈다. “오늘은 열 귀가 없더라.”
*
뫼빛파트너스 회의실 탁자에 생수 세 병이 놓여 있었다. 표서걸은 이번에도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앉기 전에 볼펜 끝으로 탁자를 세 번 두드렸다. 똑, 똑, 똑.
“선생님, 아침 방송 들었습니다. 오늘은 목소리가 좀 잠기셨던데요.”
“표 대표.” 근호가 먼저 말했다. 높이도 박자도 회의실에서 클레임을 읽을 때와 같았다. “서른아홉 개 방 내 목소리 내려. 내 이름으로 된 계좌 닫아. 8월 5일 우리 식구는 빼.”
표서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다 듣고 나서 태블릿을 든 실장에게 손짓했다. 실장이 서류 봉투 하나를 탁자에 올렸다. 표서걸이 봉투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근호 앞에 나란히 놓았다.
「투자자문 업무 위탁 계약서 — 대표 강사 맹근호」 끝에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옆 장은 근호의 신분증 사본이었다. 사진 속 근호는 지금보다 머리숱이 많았다.
“선생님이 대표 강사로 계약하셨습니다. 방송도, 회비도, 방도 다 선생님 이름입니다. 저희는 뒤에서 돕는 회사고요.” 표서걸이 볼펜을 계약서 위에 눕혔다. “선생님이 빠지시겠다면 막지 않습니다. 대신 오늘 밤 마흔 개 방에 팔부능선이 누구인지 알려 드려야겠죠. 두루제동 품질팀장 맹근호. 회사 이름도, 함께하신 식구분들 이름도 같이 올라갑니다. 사장님 5억도요.”
“사장 얘기는 왜 나와.”
“사장님이 제 대학 후배라서요.” 표서걸이 웃었다. 바람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선생님을 저한테 처음 소개한 분이 사장님입니다. 모르셨어요?”
근호의 어깨가 내려갔다. 나는 근호의 숨소리를 들었다. 들이마시는 숨이 짧아지고 내쉬는 숨이 길어졌다. 근호가 무엇을 내려놓을 때 내는 숨이었다.
“오 과장님.” 표서걸이 나를 보았다. “귀가 좋으시다고요. 저희 회사에도 귀 좋은 사람이 하나 생겼습니다. 곧 인사드릴 겁니다.”
“사람을 물량이라고 부르십니까?”
표서걸은 대답을 고르지 않았다. “물량은 생각을 안 합니다. 생각은 선생님 같은 분들이 하시죠. 그래서 저는 선생님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생각하는 목소리요.”
근호가 계약서를 오래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8월 5일. 우리 식구 백 명은 내가 직접 뺀다. 열 시 말고 아홉 시 반. 내가 식구방에 직접 말한다. 그거 하나만 해 줘.”
“좋습니다, 선생님.” 표서걸이 볼펜을 집어 들었다. 똑, 똑, 똑. “선생님 식구는 선생님이 챙기세요.”
대답이 너무 빨랐다. 나는 브레이크 시험대에서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패드가 디스크에 닿기도 전에 멈췄다고 나오는 계기판 소리였다. 고장 난 센서가 내는 소리였다.
*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말했다.
“아홉 시 반 약속, 안 지킵니다.”
“알아.” 근호가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보았다. “그래도 해 볼 거다. 우리 식구는 내가 직접 말하면 빠져. 석 달 동안 내 말 들었으니까.”
“나머지 서른아홉 개 방은요? 연금방 어르신들은요?”
“그 사람들은 내 식구가 아니야.” 근호는 숫자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 과장, 나는 다 못 구해. 다 구하겠다고 하는 놈이 제일 위험한 놈이야. 나는 내 사람 백 명. 그거면 이십오 년 회사 다닌 보람은 있는 거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하 주차장의 더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근호가 먼저 내렸다. 나는 근호의 등을 보며 따라 걸었다. 근호의 계산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백 명을 구하려는 사람과 다 구하려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위험한지 나는 몰랐다.
차에 오르기 전에 근호가 몸을 돌렸다. 지붕 너머로 나를 보았다.
“오 과장. 무향실 마이크, 문 닫히면 녹음되지. 네가 삼 년 전에 그렇게 해 놨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7월 7일 밤에도 돌았겠네. 내가 ‘내 목소리다’ 한 거.” 근호가 차 지붕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쇠가 텅 울렸다. “지워라. 표 대표가 그거 알면 나보다 너를 먼저 잡는다. 그거 들고 있으면 네가 위험해.”
“지웠습니다.”
나는 말했다. 지갑 안쪽 칸에 저장 장치가 들어 있었다. 근호를 걱정해서 한 거짓말이었는지, 저장 장치를 지키려고 한 거짓말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둘 다였을 것이다. 근호는 내 얼굴을 한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거짓말할 때 대답이 짧아.” 근호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근데 이번엔 믿어 줄게.”
*
금요일 밤 독산동 빌라 식탁에 계약서 초안이 놓였다. 새 전셋집은 시흥동 오래된 아파트 열여덟 평, 보증금 3억 4천이었다. 봄부터 소휘가 고르고 골라 둔 집이었다.
“내일 열한 시에 도장 찍어.” 소휘가 말했다. “예금 1억 7천에 내 통장 2억 1천. 3억 4천 내고 4천 남아. 남는 4천은 당신 손 안 닿는 데 묶을 거야. 당신 손 타기 전에 집부터 묶어.”
“토요일 오전에 주찬이 만나야 돼.”
“주찬 씨는 당신 집에 안 살아.” 소휘가 볼펜을 딸깍 눌렀다. “당신이 회사 백 명 구한다고 뛰어다니는 동안 잔금 날 지나면 우리 셋은 길에 나앉아. 그래서 얼마? 길에 나앉으면.”
“계산이 안 돼.”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거야.”
단미가 장난감 전화기를 들고 식탁 밑에서 나왔다. “여보세요, 아빠 회사죠? 아빠 오늘 엄마랑 집 사요.” 단미가 전화기를 내 귀에 댔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플라스틱 전화기가 동요 한 소절씩을 냈다. 나는 받는 시늉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빠 오늘 집 계약합니다.” 소휘가 처음으로 볼펜을 내려놓았다.
*
토요일 아침, 시흥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소휘가 스피커폰으로 주찬의 아내 희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아기 우는 소리와 함께 희서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소휘 씨? 웬일이에요, 아침부터.”
“백설기 틀 빌려 간 거 생각나서요. 이사 가기 전에 돌려 드리려고.” 소휘는 거짓말을 할 때 목소리가 반 음 높아졌다. 나는 처음 알았다. “주찬 씨는 요즘 바쁘죠?”
“말도 마요. 회사에서 야간 재고 조사를 석 달째 시킨대요. 밤 열한 시에 나가서 새벽 세 시에 들어와요. 회사가 사람을 그렇게 부려도 돼요?”
소휘가 나를 보았다. 나는 앞만 보고 운전했다. 깜빡이 소리가 똑딱, 똑딱 차 안을 채웠다.
“그러게요. 회사가 너무하네요.” 소휘가 말했다. 목소리가 이번에는 반 음 낮아졌다. 통화가 끝나자 소휘는 휴대전화를 무릎에 엎어 놓고 창밖을 보았다. 신호 두 개를 지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요일 열한 시, 시흥동 부동산 사무실. 공인중개사가 계약서를 읽는 동안 새 집주인이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예순을 넘긴 남자였다. 집주인은 도장을 꺼내다 말고 나를 보았다.
“보증금 혹시 주식에 넣으셨던 돈 아니죠? 요즘 젊은 분들 그런 경우가 많아서. 넣었다가 날리고 잔금 못 치르고.”
소휘가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소휘에게 넘겼다. 소휘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예금이에요. 남편이 숫자에 약해서 제가 관리해요.”
공인중개사가 계약서를 읽다가 끼어들었다. “사모님이 관리하시는 집이 제일 안전해요. 저희 남편도 숫자 약해요. 마트 영수증도 못 맞혀요.” 공인중개사와 소휘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 숫자 약한 집끼리의 연대가 부동산 사무실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나와 집주인만 연대 밖에 앉아 있었다.
“아, 잘하셨네.” 집주인이 도장을 찍었다. 인주가 종이에 눌리는 소리가 났다. “나도 요즘 아들놈이 알려 준 방에서 하나 하는데, 목소리 좋은 선생님이 있어요. 연금 통장 그냥 두면 안 된대.”
“작년에 다른 방에서 반 토막이 났는데, 거기서 ‘손실 보전방’을 따로 열어 줬어요. 가입비 오백 내면 잃은 걸 다음 종목으로 메꿔 준다고. 오백 냈죠. 그 방이 한 달 만에 없어지고, 이 방으로 옮겨 왔어요. 같은 선생님 목소리더라고.” 집주인이 웃었다. “그래도 이번엔 원금 보장이래.”
손실 보전방은 잃은 사람에게서 한 번 더 받는 방이다. 반 토막 난 사람은 무엇이든 붙잡는다. 붙잡는 손에 다시 회비를 쥐여 준다. 나는 집주인에게 말했다. “원금 보장이라는 말 나오면 그 방은 나오십시오. 잃은 돈 찾아 준다는 방도요. 입금 내역 남겨 두셨으면 1332에 신고하시고요.”
집주인이 나를 보았다. 계약하러 온 세입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소휘가 인주를 닦던 손을 멈췄다. 나는 집주인의 휴대전화 화면을 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집주인은 계약서를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8월 5일에 크게 한 번 간다던데.”
*
토요일 밤, 아니 일요일 새벽 한 시 반. 강남역 사거리 편의점 앞에 형광 조끼를 입은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대리기사들이 콜을 기다리는 자리였다. 접이식 킥보드가 편의점 벽에 줄지어 기대 있었고, 휴대전화 화면 불빛이 얼굴 아래에서 깜빡였다. 주찬은 기사들 가운데 컵라면을 들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옆의 나이 든 기사가 나를 보고 말했다. “손님은 저쪽에서 부르시면 돼요. 여기는 기사들만.”
“저 사람 동기입니다.”
“아, 변 기사 동기? 변 기사 성실해. 하루 다섯 콜은 꼭 채워.” 나이 든 기사가 컵라면 국물을 마셨다. “나도 옛날에 증권사 다녔어. 리딩방 같은 거 하지 마. 내가 이 조끼 입은 이유가 그거야.”
주찬이 일어나 편의점 모퉁이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서둘러 말했다. 계좌가 근호 이름이라는 것, 열 시 신호는 없다는 것, 아홉 시 반 약속도 표서걸의 빈말이라는 것.
주찬은 끝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알아. 팀장님이 어제 저녁에 다 말해 줬어. 너 무향실에서 휴대전화 마흔 대 깔아 놓은 것까지. 나 걱정돼서 말해 준 거래.”
“그럼 빠져.”
“표 대표가 어제 밤에 나를 따로 불렀어.” 주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진심이었다. “내 대출 2억, 8월 5일 아홉 시에 갚아 준대. 그날 아침 나는 아홉 시 반 전에 먼저 내리게 해 주고. 대신 네가 뭘 하는지 알려 달래. 네가 가진 녹음도.”
편의점 문이 열렸다 닫혔다. 딩동,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2억 갚아 준다는 말을 믿어?”
“안 믿어.” 주찬이 바로 대답했다. 주찬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석 달 전 실장에게서 온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변 과장님, 총알 부족하시면 제휴 저축은행 당일 대출 연결해 드립니다. 한도 조회만 하셔도 됩니다.」 메시지 아래에 주소 하나. 주찬의 2억 가운데 1억 5천은 이 주소에서 나왔다. 리딩방이 대출 창구까지 손에 쥐여 주는 것을 나는 동기의 휴대전화로 보았다.
주찬이 휴대전화를 거두며 말을 이었다. “근데 믿을 사람이 그거 하나야. 팀장님은 열 시 신호 믿다가 계약서에 도장 찍혀 있었고, 너는 혼자 팔았고. 표 대표는 적어도 나한테 돈 얘기를 숫자로 해. 아홉 시, 2억. 숫자로 말하는 사람은 숫자는 지켜.”
“숫자로 말하는 사람이 사람을 물량이라고 불러.”
“물량이어도 돼.” 주찬이 편의점 유리에 등을 기댔다. 유리가 낮게 울렸다. “희서랑 애들 둘 있는 물량이면 돼.”
“미안하다, 동기야.” 주찬이 이니셜 캡을 벗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정수리가 조금 비어 있었다. “나 표 대표 편이다. 네 화장실 녹음, 어제 팀장님한테 들은 거, 다 넘겼어.”
주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콜 배정 — 논현동 → 분당」 주찬은 캡을 다시 쓰고 킥보드를 펼쳤다. 모터가 가늘게 울더니 사거리 신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이 든 기사가 내 옆에 와서 컵라면 빈 그릇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동기 맞네.” 나이 든 기사가 말했다. “뒷모습이 손님이랑 똑같이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