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30자)

여덟 시 오십구 분

리딩방 고수가 우리 팀장이었다 · 문채겸

8월 5일 목요일 새벽 다섯 시 반⁠, 독산동 빌라 부엌에서 김밥 써는 소리가 났다⁠. 칼이 도마에 닿을 때마다 탁⁠, 탁⁠, 일정한 박자였다⁠. 소휘가 김밥을 썰고 있었다⁠. 식탁 위에 김밥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몇 줄이야⁠?⁠”

“⁠스무 줄⁠.⁠” 소휘가 칼을 멈추지 않았다⁠. “⁠물류센터 반장님네 열둘⁠, 휘람 씨⁠, 당신⁠, 그리고 혹시 몰라서 여섯 줄 더⁠. 그래서 얼마⁠? 한 줄에 열 조각이면 이백 조각⁠.⁠”

“⁠이백 조각을 누가 다 먹어⁠.⁠”

“⁠사람은 긴장하면 먹어⁠. 학원 시험 날 애들이 그래⁠.⁠” 소휘가 김밥 끝 조각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단무지가 아삭했다⁠. “⁠끝 조각은 당신 거야⁠. 우리 집에서 제일 맛있는 조각은 늘 꽁다리야⁠.⁠”

단미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잠옷에 김 가루가 붙어 있었다⁠. “⁠아빠 오늘도 반만 가⁠?⁠”

“⁠오늘은 다 가⁠.⁠”

“⁠다 가면 언제 와⁠?⁠”

“⁠아홉 시 반⁠.⁠”

단미가 손가락을 폈다⁠. 아홉⁠, 그리고 반을 손가락으로 어떻게 나타내는지 몰라 새끼손가락을 반쯤 접었다⁠. “⁠이만큼만 가⁠.⁠” 단미가 접은 새끼손가락을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반쯤 접힌 손가락끼리 약속이 걸리기는 처음이었다⁠.

*

일곱 시 반⁠, 본사 1층 로비⁠. 경비 아저씨가 출입문 앞에서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오 과장님⁠. 근호 형님 라테가 끊겨서요⁠. 오늘은 제가 사 왔어요⁠.⁠” 경비 아저씨가 바닐라 라테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컵이 따뜻했다⁠. “⁠출입 카드 없으시죠⁠. 저는 오늘 눈이 침침해요⁠.⁠”

일곱 시 사십 분⁠, 휴대전화 다섯 대가 내 가방 안에서 동시에 울었다⁠. 휘람의 공기계들이었다⁠. 마흔 개 방의 마지막 아침 방송이었다⁠. 물속 같은 목소리⁠, 자로 잰 기침⁠.

“⁠자⁠, 귀 열고⁠. 흠⁠, 흠⁠. 오늘입니다⁠. 아홉 시 정각⁠. 총알 다 꺼내 두세요⁠. 비상금⁠, 적금⁠, 마이너스 통장⁠. 오늘 하루만 저를 믿으세요⁠. 내일부터는 이자 걱정 끝납니다⁠. 깔끔하게⁠.⁠”

휘람이 VIP방 화면을 들고 로비로 뛰어 들어왔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달려온 숨이었다⁠.

“⁠과장님⁠, VIP 공지 떴어요⁠. ‘⁠평생 회원님은 8시 58분⁠, 일반 회원보다 2분 먼저 종목을 받으십니다⁠. 먼저 타십시오⁠.⁠’⁠” 휘람이 숨을 골랐다⁠. “⁠평생 회원이 어제 하루 새 백 명 넘게 늘었대요⁠. 790만 원 할인 때문에⁠.⁠”

“⁠먼저 탄다는 건 먼저 꼭대기에 올라간다는 거야⁠.⁠” 내가 말했다⁠. “⁠2분 먼저 산 사람들이 값을 끌어올려 놓으면⁠, 아홉 시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위에서 사⁠. 790만 원을 내고 제일 먼저 꼭대기를 만들어 주는 거야⁠.⁠”

휘람이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저 그 790 안 냈어요⁠. 과장님 말 듣고⁠. 근데 저 말고 다 냈어요⁠.⁠”

*

여덟 시 십 분⁠, 5층 사무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키보드 소리가 없었다⁠. 책상마다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쥐고 앉아 있었다⁠. 품질팀⁠, 구매팀⁠, 생산관리팀⁠, 유리벽 너머 설계팀까지⁠. 화면 불빛이 얼굴 아래를 초록으로 비췄다⁠. 증권 앱의 그래프 색이었다⁠.

탁 대리가 나를 보고 일어났다⁠. “⁠과장님⁠, 여기 오시면 안 돼요⁠. 사장님이⁠…⁠…⁠.⁠”

사장이 복도 끝에서 걸어왔다⁠. 반소매 셔츠 주머니에 골프 티 두 개가 꽂혀 있었다⁠. 사장은 웃고 있었다⁠.

“⁠오 과장⁠, 화성 공기가 안 맞았나 봐⁠.⁠”

“⁠사장님⁠, 아홉 시에 사장님은 파는 쪽에 계십니다⁠. 여기 백 명은 사는 쪽에 있고요⁠.⁠” 나는 사무실 전체에 들리게 말했다⁠. 몇몇이 고개를 들었다⁠.

“⁠회사 일에 개인 투자 얘기는 하지 말자⁠.⁠” 사장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이 무거웠다⁠. “⁠경비 불러야 해⁠?⁠”

“⁠경비 아저씨는 오늘 눈이 침침하시답니다⁠.⁠”

사장의 손이 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바로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남자들이었다⁠. 맨 앞에 반장이 김밥 봉지를 들고 있었다⁠.

“⁠본사 과장님⁠! 여덟 시라며⁠! 버스가 막혀서⁠!⁠” 반장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휴대전화를 쥔 본사 사람들과 김밥 봉지를 든 물류센터 사람들이 서로를 보았다⁠. 반장이 사장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했다⁠. “⁠사장님⁠, 물류센터 열두 명 견학 왔습니다⁠. 브레이크 패드가 어디서 나오나 보러⁠.⁠”

사장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사무실 어디선가 웃음이 터졌다⁠. 긴장한 사람들의 웃음이었다⁠. 소휘의 말이 맞았다⁠. 사람은 긴장하면 웃고⁠, 먹는다⁠. 반장이 김밥 봉지를 탁 대리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홉 시에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내려와 주십시오⁠. 팀장님이 거기 계십니다⁠. 오 분이면 됩니다⁠. 사기 전에 오 분만 쓰십시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탁 대리가 휴대전화 화면을 보았다가 나를 보았다⁠. 탁 대리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춰 있었다⁠.

휘람이 의자를 끌어다 놓고 올라갔다⁠. 칸막이 위로 휘람의 상반신이 솟았다⁠. 휘람이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여러분⁠, 아홉 시에 지하 2층이요⁠! 오 분이요⁠! 저 구독자 천 명이에요⁠, 거짓말 안 해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누군가 말했다⁠.

“⁠천 명 앞에서 거짓말하면 구독 취소 당해요⁠. 그러니까 저 지금 진짜 말하는 거예요⁠.⁠” 휘람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얼굴이 빨갰다⁠. 고 차장이 팔짱을 낀 채 휘람을 보았다⁠. 3주 전 회의실에서 내 녹음을 편집본이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고 차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책상에 엎었다⁠. 탁⁠, 하는 소리가 사무실에 크게 울렸다⁠.

반장이 김밥 한 줄을 봉지째 고 차장 책상에 올려놓았다⁠. “⁠차장님⁠, 긴장하면 먹는 거랍니다⁠. 과장님 사모님 말씀이에요⁠.⁠” 고 차장이 김밥을 내려다보다가 한 조각을 집었다⁠. 씹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퍼졌다⁠. 옆자리 사람이 손을 뻗었고⁠, 건너편 자리 사람도 손을 뻗었다⁠. 김밥 봉지가 책상에서 책상으로 건너갔다⁠. 나는 김밥 씹는 소리를 대답으로 들었다⁠.

*

여덟 시 사십 분⁠, 지하 2층 주차장⁠. 근호가 늘 차를 대던 칸에 주찬의 낡은 경차가 세워져 있었다⁠. 운전석에 주찬이 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을 펼치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 마흔 개 방의 관리자 화면이 떠 있었다⁠. 나는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 주찬은 나를 막지 않았다⁠.

“⁠고객님은 원래 뒤에 타셔야 돼요⁠.⁠”

“⁠오늘은 앞에 탈게⁠.⁠”

주찬의 휴대전화가 거치대에서 떨었다⁠. 표서걸의 문자였다⁠. 「⁠변 과장님⁠, 09⁠:00 종목 공지 부탁드립니다⁠. 09⁠:25 상환 확인 문자 보내 드립니다⁠.⁠」

“⁠9시 25분⁠.⁠” 주찬이 읽었다⁠. “⁠아홉 시에 네 글자 치면 이십오 분 뒤에 2억이 없어져⁠.⁠”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옮겨 가는 거야⁠. 마흔 개 방 사람들 통장에서 네 통장으로⁠.⁠”

주찬이 핸들에 이마를 댔다⁠. 이니셜 캡의 챙이 핸들에 걸려 비뚤어졌다⁠.

“⁠동기야⁠, 너는 4천 들고 내렸잖아⁠. 너는 이 차에서 내릴 데가 있어⁠. 나는 없어⁠.⁠”

“⁠내릴 데는 내가 만들어 줄게⁠.⁠”

“⁠어떻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소휘의 통장에는 4천이 묶여 있었다⁠. 소휘의 4천이었고 내 4천이었다⁠. 넉 달 전에 나는 소휘에게 묻지 않고 1억 7천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먼저 물어야 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소휘에게 걸고 스피커를 켰다⁠. 주찬이 고개를 들었다⁠.

“⁠김밥 먹었어⁠?⁠” 소휘가 받자마자 물었다⁠.

“⁠아직⁠. 하나만 물어볼게⁠. 4천⁠, 주찬이 대출 갚는 데 써도 돼⁠?⁠”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냉장고 모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소휘의 목소리⁠.

“⁠그래서 얼마⁠? 2억에서 4천 빼면 1억 6천⁠. 그건 주찬 씨가 갚아야 돼⁠. 대리를 몇 년을 더 뛰어야 되는지 알아⁠?⁠”

“⁠알아⁠.⁠”

“⁠주찬 씨 거기 있지⁠?⁠” 소휘가 목소리를 높였다⁠. “⁠주찬 씨⁠, 들려요⁠? 4천 빌려 드릴게요⁠. 드리는 거 아니고 빌려 드리는 거예요⁠. 이자는 백설기 세 판⁠. 둘째 돌 때 제가 해 드린 거⁠, 이번엔 희서 씨가 해 오는 거예요⁠. 대신 오늘 아홉 시에 아무것도 올리지 마요⁠.⁠”

주찬이 입을 막았다⁠. 손바닥 사이로 숨이 새어 나왔다⁠. 전화가 끊겼다⁠. 주찬은 한참 앞 유리만 보다가 말했다⁠.

“⁠너희 집은 계산이 빨라⁠.⁠”

“⁠우리 집에서 숫자는 소휘가 정해⁠.⁠”

“⁠우리 집은 내가 혼자 정했어⁠. 그래서 이렇게 됐지⁠.⁠” 주찬이 캡을 벗어 무릎에 놓았다⁠. 정수리의 빈자리가 형광등 아래 드러났다⁠. 주찬은 다시 캡을 쓰지 않았다⁠.

거치대의 휴대전화가 한 번 더 떨었다⁠. 이번에는 채석란이었다⁠. 「⁠아홉 시 반⁠. 변함없음⁠. 먹을 거 챙기세요⁠.⁠」

*

여덟 시 오십 분⁠, 주차장 입구 경사로에서 타이어가 바닥 칠을 긁는 소리가 났다⁠. 끼이익⁠. 검은 세단 한 대가 천천히 내려와 주찬의 경차 앞에 멈췄다⁠. 뒷문이 열리고 표서걸이 내렸다⁠. 반대편 문에서 근호가 내렸다⁠.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회색 넥타이였다⁠.

표서걸이 주찬의 운전석 창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창이 내려갔다⁠.

“⁠변 과장님⁠, 준비되셨죠⁠.⁠” 표서걸이 조수석의 나를 보고 웃었다⁠. “⁠오 과장님도 오셨군요⁠. 지게차 소리보다 이게 좋으셨나 봐요⁠.⁠”

“⁠아홉 시 반에 경찰이 옵니다⁠.⁠” 내가 말했다⁠.

“⁠압니다⁠.⁠” 표서걸은 놀라지 않았다⁠. “⁠그래서 아홉 시 반 전에 끝나는 시간표를 짰죠⁠. 경찰이 오면 여기 선생님이 계시고⁠, 선생님 목소리가 마흔 개 방에서 ‘⁠지금입니다⁠’를 말한 녹음이 있고⁠, 선생님 이름 계좌가 있습니다⁠. 저는 그 시각에 다른 데 있고요⁠. 변호사님이 여기 남아 선생님을 돌봐 드릴 겁니다⁠.⁠”

근호는 세단 옆에 서 있었다⁠. 표서걸의 말을 듣고도 얼굴이 움직이지 않았다⁠. 근호의 눈이 주차장 천장의 형광등을 따라갔다⁠. 세 칸 너머 시험실 문⁠, 시험실 안쪽의 무향실 문⁠. 근호의 숨이 길어졌다⁠. 무엇을 내려놓을 때 나는 숨이었다⁠. 아니면 무엇을 집어 들기 전의 숨이었다⁠. 나는 두 숨을 가르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문이 도로 닫혔다⁠.

여덟 시 오십팔 분⁠. 주찬의 노트북 화면 구석에서 VIP방 공지가 떴다⁠. 「⁠평생 회원님⁠, 종목은 솔채전지입니다⁠.⁠」 실장이 송출실에서 올린 것이었다⁠. 2분 먼저 타는 사람들이 타기 시작했다⁠. 주찬의 휴대전화 증권 앱에서 솔채전지 그래프가 한 번 크게 뛰었다⁠.

표서걸이 볼펜으로 경차 지붕을 세 번 두드렸다⁠. 똑⁠, 똑⁠, 똑⁠. 쇠 지붕이 울렸다⁠.

“⁠변 과장님⁠, 일 분 남았습니다⁠.⁠”

주찬이 노트북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나는 주찬의 손을 보지 않고 주찬의 숨을 들었다⁠. 들이마시는 숨이 짧았다⁠. 내쉬는 숨이 없었다⁠.

여덟 시 오십구 분⁠. 주찬이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대신 거치대의 휴대전화를 뽑았다⁠. 마흔 개 방에 음성 방송을 내보낼 수 있는 관리자 화면이 떠 있었다⁠. 주찬이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표서걸을 지나쳐 근호 앞으로 갔다⁠.

“⁠팀장님⁠.⁠” 주찬의 목소리가 작았다⁠. 진심이었다⁠. “⁠팀장님이 시작하신 판이에요⁠. 운전 끝까지 하세요⁠.⁠”

주찬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빨간 녹음 단추가 하나 떠 있었다⁠. 표서걸이 웃었다⁠. 근호가 녹음해 둔 ‘⁠지금입니다⁠’를 주찬이 근호 손으로 직접 틀게 하려는 줄 아는 얼굴이었다⁠.

근호가 휴대전화를 받았다⁠. 화면을 내려다보았다가 나를 한 번 보았다⁠. 근호는 녹음 단추를 누르고 휴대전화를 입 가까이 들었다⁠. 지하 주차장 형광등이 근호의 금니에서 한 번 반짝였다⁠.

“⁠자⁠, 귀 열고⁠.⁠”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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