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35자)

송출실

리딩방 고수가 우리 팀장이었다 · 문채겸

8월 4일 수요일 아침 일곱 시⁠, 화성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근호의 문자를 받았다⁠. 법원 앞에서 검은 세단에 오른 뒤 첫 연락이었다⁠.

「⁠오늘 오후 세 시⁠, 역삼동 17층⁠. 표 대표가 너도 모셔 오란다⁠.⁠」

모셔 오란다⁠. 표서걸의 말투가 근호의 문자에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나는 반장에게 오후 반차를 냈다⁠. 반장은 이유를 묻지 않고 지게차 열쇠를 흔들며 말했다⁠. “⁠본사 과장님⁠, 반차가 일주일에 두 번이면 그건 반 회사원이야⁠.⁠”

반장은 지게차에 오르다 말고 돌아왔다⁠. “⁠내일 아침에 우리 열두 명⁠, 본사 가도 돼⁠? 우리도 그 방에 있었잖아⁠. 근호 형님 목소리는 우리가 제일 잘 알아⁠. 노래방에서 「⁠돌아가는 삼각지⁠」를 몇 번을 들었는데⁠.⁠”

“⁠물류센터는요⁠?⁠”

“⁠하루 비우면 어때⁠. 브레이크 패드는 하루 늦게 가도 브레이크야⁠.⁠” 반장이 지게차 시동을 걸었다⁠. 후진 경고음이 삐⁠, 삐 울렸다⁠. 반장은 경고음 너머로 소리쳤다⁠. “⁠여덟 시까지 갈게⁠! 버스 대절했어⁠, 벌써⁠!⁠”

*

오후 세 시⁠, 17층 유리문을 지나 회의실 앞을 지나쳤다⁠. 실장이 나를 복도 끝 안쪽 방으로 데려갔다⁠. 문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실장이 출입 카드를 대자 문이 안으로 열렸다⁠.

소리가 먼저 왔다⁠. 휴대전화 진동이 겹쳐서 내는 웅웅거림⁠, 충전기 마흔 개에서 나는 아주 가는 전기 울음⁠, 노트북 팬 소리⁠. 벽 한 면을 따라 철제 선반이 세 층으로 놓여 있었고⁠, 선반마다 휴대전화가 칸칸이 꽂혀 있었다⁠. 휴대전화 뒤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대구 식구방⁠」⁠, 「⁠반찬값 연구소⁠」⁠, 「⁠은퇴자 연금방⁠」 휘람이 우리 집 거실에서 붙인 스티커와 같은 이름이었다⁠. 다른 점은 이쪽 이름표가 인쇄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방 안쪽 구석에 공중전화 부스만 한 유리 부스가 있었다⁠. 안에 마이크 한 대가 놓여 있었고⁠, 근호가 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있었다⁠. 근호는 유리 너머로 나를 보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표서걸이 창가 책상에서 일어났다⁠. 볼펜 끝으로 책상을 세 번 두드렸다⁠. 똑⁠, 똑⁠, 똑⁠.

“⁠오 과장님⁠, 어서 오십시오⁠. 여기가 선생님 목소리가 사는 집입니다⁠.⁠”

실장이 노트북 앞에 앉아 글자를 쳤다⁠. 「⁠은퇴자 연금방 여러분⁠, 내일 아침 아홉 시입니다⁠.⁠」 실장이 단추 하나를 누르자 선반의 휴대전화 하나에서 근호의 목소리가 실장이 친 문장을 그대로 읽었다⁠. 물속처럼 낮은 목소리⁠, 헛기침 두 번⁠, 자로 잰 간격⁠. 글자를 치고 나서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숨 한 번 쉴 틈도 없었다⁠. 근호의 목소리는 이 방에서 글자를 소리로 바꾸는 일을 했다⁠. 숨은 들어 있지 않았다⁠.

실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스물몇 살쯤 된 얼굴이었다⁠. “⁠과장님이 숨 얘기 하셨다면서요⁠. 다음 판부터는 숨소리도 넣으려고요⁠.⁠” 실장은 칭찬을 기다리는 신입 사원처럼 웃었다⁠.

*

표서걸은 책상 위 모니터를 나에게 돌렸다⁠. 그래프 하나가 떠 있었다⁠. 종목 이름이 그래프 위에 있었다⁠. 「⁠솔채전지⁠」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내일 아침 아홉 시까지 아무도 몰라야 할 이름이었다⁠. 표서걸은 솔채전지라는 이름을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보여 주었다⁠. 내가 알아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작은 회사입니다⁠. 건전지 부품 만들어요⁠. 하루에 이 주식을 사고파는 사람이 몇 안 됩니다⁠.⁠” 표서걸이 그래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넉 달 전부터 그래프는 아주 천천히⁠, 계단처럼 올라와 있었다⁠. “⁠사는 사람이 적은 데서는 우리 손이 크게 보입니다⁠. 우리끼리 주고받기만 해도 그림이 그려지죠⁠. 계단을 하나씩 올리면 밖에서 보는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뭔가 있구나⁠.⁠”

“⁠남의 이름 계좌로요⁠.⁠”

“⁠기사 보셨군요⁠.⁠” 표서걸이 웃었다⁠. 바람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그런데 우리끼리 주고받아서는 돈이 안 됩니다⁠. 그림만 남죠⁠. 돈은 밖에서 누가 사 줘야 생깁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필요했어요⁠. 석 달 동안 맞히는 목소리⁠. 마지막 날 아홉 시에 그 목소리가 지금이라고 하면⁠, 마흔 개 방에서 동시에 삽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넘기고요⁠.⁠” 표서걸이 그래프 맨 끝⁠, 아직 그려지지 않은 내일 자리를 볼펜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꼭대기입니다⁠. 회원님들이 꼭대기를 만들어 주시는 거죠⁠.⁠”

나는 그래프의 계단을 오래 보았다⁠. 낯익은 모양이었다⁠. 7월 8일 아침 내가 팔기 전에 넉 달 치 거래 내역에서 본 도톰로보틱스 그래프가 꼭 이렇게 생겼다⁠. 소식 하나 없는 날에 한 칸씩 오르는 계단⁠, 계단마다 붙은 짧은 거래량 막대⁠. 나는 넉 달 동안 계단을 밟고 올라가 매번 꼭대기 언저리에서 샀고⁠, 운 좋게 매번 다음 계단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누가 놓아 주었는지는 이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다음 계단이 없었다⁠.

“⁠꼭대기 다음은요⁠?⁠”

“⁠아래죠⁠.⁠” 표서걸은 대답을 고르지 않았다⁠. “⁠개미는 어차피 잃습니다⁠, 오 과장님⁠. 언젠가 어디선가⁠. 저는 그 시간표를 정할 뿐이에요⁠. 내일 아침 아홉 시부터 아홉 시 반⁠.⁠”

나는 선반의 휴대전화들을 보았다⁠. 이름표 하나하나에 방이 있었고⁠, 방마다 이백 명⁠, 삼백 명이 있었다⁠. 표서걸은 방 사람들을 ‘⁠회원님⁠’이라고 불렀다⁠. 회의실에서는 ‘⁠물량⁠’이라고 불렀다⁠. 듣는 사람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 바뀌지 않는 것은 시간표였다⁠.

표서걸이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두툼했다⁠.

“⁠오 과장님은 4천을 버셨죠⁠. 똑똑하게⁠. 여기 열 배가 있습니다⁠. 내일 아침 하루만 화성에 계세요⁠. 지게차 소리 들으시면서⁠.⁠”

나는 봉투를 보았다⁠. 손대지 않았다⁠. 봉투를 손대지 않는 데에 용기가 들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말해 둔다⁠. 무향실 녹음을 넘긴 뒤로 나는 이미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잃을 것이 줄어든 사람은 봉투 앞에서 손이 무겁지 않다⁠.

“⁠제 4천도 이 그래프 어딘가에서 나왔겠죠⁠.⁠”

“⁠정확히는 도톰로보틱스 그래프에서요⁠.⁠” 표서걸이 봉투를 서랍에 도로 넣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거절하실 줄 알았어요⁠. 귀가 좋은 분들은 돈 소리를 잘 못 들으시더라고요⁠.⁠”

*

문이 열리고 주찬이 들어왔다⁠. 사원증 대신 뫼빛 출입 카드를 목에 걸고 있었다⁠. 주찬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동기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모셔 오래서⁠.⁠”

주찬은 표서걸을 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표서걸은 웃으며 주찬에게 노트북 하나를 건넸다⁠. “⁠변 과장님⁠, 내일 리허설 한 번만 해 보시죠⁠. 아홉 시 정각⁠, 종목 이름 하나⁠.⁠”

주찬이 노트북 앞에 앉았다⁠. 마흔 개 방의 관리자 화면이 차례로 떴다⁠. 주찬의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멈췄다⁠. 「⁠솔채전지⁠」 네 글자를 치지 않고⁠, 빈 입력 칸에서 커서가 깜빡였다⁠. 똑⁠, 똑⁠, 똑⁠. 표서걸의 볼펜 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주찬이 네 글자를 치고 바로 지웠다⁠.

“⁠리허설은 됐습니다⁠.⁠” 주찬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

유리 부스 안에서 실장이 근호에게 손짓했다⁠. 녹음이 시작됐다⁠. 부스 문이 조금 열려 있어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 귀 열고⁠.⁠”

맨목소리였다⁠. 변조가 없었다⁠. 금니 틈으로 바람이 샜다⁠. 흠⁠, 흠⁠. 두 번째 기침이 반 박자 늦었다⁠.

“⁠여러분⁠, 오늘입니다⁠. 아홉 시 정각⁠, 솔채전지⁠. 지금입니다⁠. 깔끔하게⁠.⁠”

실장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한 번에 됐다는 표시였다⁠. 표서걸이 내 옆에서 낮게 말했다⁠.

“⁠내일 아침엔 선생님 진짜 목소리로 나갑니다⁠. 마흔 개 방 전부⁠. 쥐가 합성했다는 말이 안 나오게⁠, 금니 바람까지요⁠. 오 과장님이 가르쳐 주셨죠⁠. 사람들은 숨으로 사람을 알아본다고⁠.⁠” 표서걸이 볼펜을 세 번 두드렸다⁠. “⁠그리고 이 녹음은 경찰한테도 아주 좋은 증거가 되겠죠⁠. 아홉 시에 사라고 한 사람⁠, 맹근호⁠.⁠”

“⁠팀장님이 왜 녹음합니까⁠?⁠”

“⁠선생님 식구분들 원금은 제가 나중에 보전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백 분 다⁠.⁠” 표서걸이 부스를 보았다⁠. 근호는 헤드폰을 벗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 아드님이 다음 달 전역이시더라고요⁠. 강원도에서⁠. 먼 길이죠⁠.⁠”

*

화장실 환풍구에는 넓은 은색 테이프가 두 겹 붙어 있었다⁠. 테이프 가장자리가 들떠서 환풍기가 돌 때마다 파르르 떨었다⁠. 근호가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근호는 물을 잠그지 않았다⁠. 물소리가 우리 말소리를 덮었다⁠.

“⁠녹음했다⁠.⁠” 근호가 말했다⁠. “⁠내일 아침에 저게 나간다⁠.⁠”

“⁠원금 보전 믿으십니까⁠?⁠”

“⁠안 믿어⁠.⁠” 근호가 손을 털었다⁠. 물방울이 거울에 튀었다⁠. “⁠안 믿는데⁠, 안 하면 내 아들이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무사히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게 문제지⁠. 표 대표는 아무것도 안 해⁠. 그런 말만 하지⁠. 그런 말만으로 사람이 녹음을 한다⁠.⁠”

“⁠내일 아침 어디 계십니까⁠?⁠”

“⁠표 대표가 회사 지하 주차장으로 데려간대⁠. 내가 시작한 판이 끝나는 걸 내 눈으로 보래⁠.⁠”

“⁠그럼 거기서 말씀하십시오⁠. 맨목소리로⁠, 얼굴 보이는 데서⁠. 회사 사람들이 내려옵니다⁠.⁠”

근호가 거울 속 나를 보았다⁠. 물은 계속 흘렀다⁠.

“⁠오 과장⁠, 내 목소리 이제 아무도 안 믿는다고 했지⁠.⁠”

“⁠목소리만으로는요⁠. 얼굴이랑 숨이랑 같이 있으면 믿습니다⁠. 단미가 그러더라고요⁠. 아빠가 ‘⁠단미야⁠’ 할 때 숨 쉬는 건 똑같다고⁠.⁠”

근호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화장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환풍구 테이프가 파르르 떠는 소리만 남았다⁠.

“⁠단미가 그랬냐⁠.⁠” 근호가 말했다⁠. 그뿐이었다⁠. 근호는 종이 수건을 뽑아 손을 닦고 나갔다⁠.

나는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다⁠. 17층에서 1층까지 엘리베이터는 이번에도 한 번 덜컹했다⁠. 줄이 감기는 소리에 쇳소리가 반 박자 섞였다⁠. 처음 이 건물에 온 날과 같은 소리였다⁠. 내가 들은 것은 같았고⁠, 듣는 내가 달라져 있었다⁠. 1층 로비 유리문 너머로 검은 세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뒷좌석 창문이 조금 내려가 있었고⁠, 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흠⁠. 한 번이었다⁠.

*

밤 열한 시⁠, 독산동 빌라 거실⁠. 소휘와 휘람이 바닥에 앉아 있었고⁠, 채석란이 스피커폰으로 들어와 있었다⁠. 채석란은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아몬드였다⁠.

“⁠아홉 시 반에 지하 2층 주차장으로 들어가요⁠. 송출실에는 같은 시각에 다른 팀이 들어가고요⁠.⁠” 채석란이 말했다⁠. “⁠그 전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 과장님이 지하 주차장에서 무슨 일을 하시든⁠, 경찰은 아홉 시 반 전에는 거기 없어요⁠.⁠”

“⁠알겠습니다⁠.⁠”

“⁠과장님⁠.⁠” 채석란이 씹기를 멈췄다⁠. “⁠공동 고소 단톡방이 오늘 백사십 명 됐어요⁠. 반장 어머님이 맘방에서 나온 엄마들까지 다 데리고 왔어요⁠. 내일 무슨 일이 생기든⁠, 그분들 기록은 남아요⁠. 그건 과장님이 한 일이에요⁠.⁠”

전화가 끊겼다⁠. 휘람이 휴대전화 다섯 대를 충전기에 꽂았다⁠. 소휘는 냉장고 문에 붙은 이삿짐 견적서를 한 장 떼어 뒷면에 무언가를 적었다⁠. 「⁠09⁠:00⁠」⁠, 「⁠09⁠:30⁠」⁠, 그리고 둘 사이에 화살표 하나⁠.

“⁠삼십 분이야⁠.⁠” 소휘가 말했다⁠. “⁠그래서 얼마⁠? 삼십 분이면 몇 명이 사⁠?⁠”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새벽 두 시⁠, 다들 잠든 거실에서 내 휴대전화가 한 번 떨었다⁠. 근호였다⁠.

「⁠귀 열고 있어라⁠.⁠」

깔끔하게⁠, 는 붙지 않았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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