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524자)

깔끔하게

리딩방 고수가 우리 팀장이었다 · 문채겸

“⁠자⁠, 귀 열고⁠.⁠”

근호의 목소리가 지하 2층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물속 같지 않았다⁠. 마른 목소리였다⁠. 주차장 천장의 환풍기가 웅웅 돌았고⁠, 근호의 목소리가 환풍기 소리 위로 올라갔다⁠.

“⁠흠⁠, 흠⁠.⁠”

두 번째 기침이 반 박자 늦었다⁠. 나는 숨을 참았다⁠.

“⁠두루제동 품질팀장 맹근호입니다⁠. 나이는 마흔아홉⁠. 「⁠팔부능선⁠」이 저입니다⁠. 석 달 전까지는 저였습니다⁠. 지금 여러분 방에서 말하는 목소리는 제 목소리를 본뜬 인공지능입니다⁠. 오늘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방송도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표서걸의 볼펜이 멈췄다⁠. 표서걸이 한 발 다가왔다⁠. 주찬이 근호 앞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주찬은 키가 작았다⁠. 표서걸의 가슴께에 주찬의 정수리가 닿았다⁠. 캡을 벗은 정수리였다⁠.

“⁠변 과장님⁠.⁠” 표서걸이 낮게 말했다⁠. “⁠2억⁠.⁠”

“⁠압니다⁠.⁠” 주찬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진심이었다⁠.

“⁠솔채전지⁠, 사지 마십시오⁠.⁠” 근호가 이어 말했다⁠. “⁠2분 먼저 타신 평생 회원님들⁠, 지금 꼭대기에 계십니다⁠. 아홉 시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그 위에 올라가는 겁니다⁠. 솔채전지는 거래가 적은 종목입니다⁠. 뫼빛파트너스가 석 달 동안 남의 이름 계좌 여러 개로 서로 사고팔아 값을 계단처럼 올렸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사는 물량을 받아서 그 계좌들이 한꺼번에 팝니다⁠. 열 시에 내리라는 신호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표서걸이 주찬의 어깨를 밀었다⁠. 주찬이 비틀거렸다⁠. 나는 조수석에서 내려 주찬의 등을 받쳤다⁠. 둘이 서니 표서걸의 손이 근호에게 닿지 않았다⁠.

바로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내렸다⁠.

*

맨 앞은 반장이었다⁠. 김밥 봉지를 들고 있었다⁠. 뒤로 물류센터 사람들⁠, 다음으로 탁 대리와 휘람⁠, 고 차장⁠, 구매팀⁠, 생산관리팀⁠, 설계팀⁠. 엘리베이터가 한 번에 다 싣지 못해 계단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또 나왔다⁠. 주차장이 발소리로 찼다⁠.

근호가 사람들을 보았다⁠. 휴대전화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여러분 회비는 제 이름 계좌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신분증 사본과 도장을 넘겼습니다⁠. 저는 지금 경찰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원금 보장⁠, 연 300%⁠, 손실 보전⁠, 다 거짓말입니다⁠. 제가 처음 방을 열 때 한 말도 거짓말이었습니다⁠.⁠”

근호가 숨을 쉬었다⁠. 길게 들이마시고 짧게 내쉬었다⁠. 아침 회의에서 팔 년 동안 듣던 숨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작게 말했다⁠. “⁠팀장님 숨이네⁠.⁠”

“⁠뫼빛파트너스는 금융감독원 홈페이지 「⁠제도권 금융회사 조회⁠」에 없습니다⁠. 유사투자자문업 신고를 했다는 회사라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종목을 찍어 주면 불법입니다⁠. 방에서 받으라던 「⁠뫼빛 트레이딩⁠」 앱⁠, 공식 앱 장터에 없는 앱입니다⁠. 지우십시오⁠. 지우기 전에 입금 내역이랑 대화 화면은 캡처해 두십시오⁠. 1332⁠, 112⁠. 방이 오늘 밤 터지고 새 이름으로 다시 열려도 따라가지 마십시오⁠. 피해 보신 분들끼리 모여 고소하는 방이 있습니다⁠.⁠”

휘람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녹음이 아니었다⁠. 휘람은 VIP방 입력창의 마이크 단추를 누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두루제동 품질팀 사원 나휘람인데요⁠. 지금 팀장님 바로 앞이에요⁠. 진짜 팀장님이에요⁠. 숨 쉬는 거 보여요⁠. 저 VIP 회비 99만 원 냈고요⁠, 790은 안 냈어요⁠. 다들 사지 마세요⁠.⁠”

탁 대리가 따라 했다⁠. 「⁠팔부능선 4호방⁠」에 탁 대리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빌라를 산 대리였다⁠. “⁠구매팀 탁입니다⁠. 저 석 달 동안 벌었습니다⁠. 오늘은 안 삽니다⁠.⁠” 고 차장이 엎어 두었던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고 차장의 목소리가 「⁠팔부능선 실전반⁠」에 올라갔다⁠. “⁠품질팀 고 차장입니다⁠. 3주 전에 오 과장 녹음을 편집본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반장은 휴대전화 대신 김밥을 들고 근호 옆으로 갔다⁠. 휘람이 반장을 찍어 동영상으로 올렸다⁠. 반장이 카메라에 대고 김밥을 흔들었다⁠. “⁠물류센터 반장입니다⁠. 저는 벌써 신고했습니다⁠. 1332⁠, 112⁠, 은행 지급정지⁠. 세 개 다 했어요⁠. 어렵지 않아요⁠.⁠”

소휘의 문자가 왔다⁠. 「⁠맘방에 올렸어⁠. 반장 어머님이 다른 방 둘에 또 올렸대⁠.⁠」 한 사람이 두 방에⁠, 두 사람이 네 방에⁠. 소휘의 계산이 지하 2층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마흔 개 방마다 처음 보는 이름의 목소리가 하나씩 올라왔다⁠. 바람 소리가 섞인 목소리⁠, 숨이 고르지 않은 목소리⁠, 울먹이는 목소리⁠.

주찬의 노트북 화면에서 다른 방들은 여전히 같은 합성 목소리를 내보내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솔채전지⁠. 깔끔하게⁠.⁠」 기침 두 번이 자로 잰 간격으로 울렸다⁠. 합성 목소리 아래로 사람들의 음성 메시지가 줄줄이 달렸다⁠. 「⁠방금 진짜 들었어요⁠.⁠」 「⁠숨소리 없잖아요⁠, 이건⁠.⁠」

주찬이 노트북 자판에 다시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떨리지 않았다⁠. 주찬은 휘람이 찍은 동영상⁠, 김밥 든 반장 옆에 근호가 함께 나온 동영상을 마흔 개 방 공지 자리에 하나씩 고정했다⁠. 방장 권한이었다⁠. 표서걸이 넘겨준 권한이었다⁠. 공지 자리마다 근호의 얼굴이 떴다⁠. 금니가 보이고⁠, 넥타이가 보이고⁠, 숨 쉴 때마다 어깨가 오르내렸다⁠.

“⁠관리자 권한 주신 거⁠, 잘 쓰고 있습니다⁠.⁠” 주찬이 표서걸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컸다⁠. 주찬이 나를 돌아보았다⁠. “⁠야⁠, 동기야⁠. 이거 원래 큰 목소리로 해야 되는 말이지⁠.⁠”

*

아홉 시 사 분⁠. 주찬이 휴대전화 증권 앱을 내밀었다⁠. 솔채전지 그래프가 2분 동안 위로 솟았다가 아홉 시에 한 번 더 뛰고⁠, 아홉 시 일 분부터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이 아니었다⁠. 미끄럼틀이었다⁠.

“⁠팔려는 물량은 쏟아지는데 사는 사람이 없어⁠.⁠” 주찬이 말했다⁠. “⁠방에서 사 줘야 할 사람들이 지금 다 여기 얘기를 듣고 있어⁠.⁠”

표서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표서걸이 받았다⁠. 저쪽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실장이었다⁠. “⁠대표님⁠, 안 받아요⁠. 아무도 안 받아요⁠.⁠”

표서걸이 볼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볼펜이 콘크리트를 굴러 근호의 구두 앞에서 멈췄다⁠. 근호가 볼펜을 내려다보았다⁠. 집어 들지 않았다⁠.

표서걸이 세단으로 걸어갔다⁠. 운전석 기사에게 손짓했다⁠. 세단이 경사로로 올라가다 멈췄다⁠. 경사로 입구를 버스 한 대가 가로로 막고 있었다⁠. 물류센터 사람들이 타고 온 전세 버스였다⁠. 버스 기사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

“⁠아이고⁠, 방향을 못 돌려서⁠! 큰 차가 지하 들어오면 이래요⁠! 반장님⁠, 김밥 하나만⁠!⁠”

반장이 김밥 한 줄을 들고 경사로를 올라갔다⁠.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경비 아저씨가 경사로 꼭대기에 나와 안경을 닦고 있었다⁠. 오늘 눈이 침침한 사람이었다⁠.

아홉 시 이십오 분⁠. 주찬의 휴대전화에 표서걸이 보내기로 한 상환 확인 문자는 오지 않았다⁠. 대신 저축은행의 이자 납부 안내 문자가 왔다⁠. 주찬이 화면을 보고 웃었다⁠. 처음 듣는 웃음이었다⁠. 진심일 때 주찬의 웃음도 작았다⁠.

아홉 시 반⁠. 경사로 위에서 사이렌이 한 번 짧게 울렸다⁠. 채석란이 버스 옆을 비집고 걸어 내려왔다⁠. 한 손에 아몬드 봉지를 들고 있었다⁠.

“⁠표서걸 씨⁠. 자본시장법 위반⁠, 시세조종 혐의로 체포합니다⁠.⁠” 채석란이 아몬드를 하나 씹었다⁠. “⁠역삼동 17층에도 지금 들어갔어요⁠. 휴대전화 마흔 대⁠, 실장님까지⁠. 매도 기록이 아홉 시부터 실시간으로 쌓였더라고요⁠. 고맙습니다⁠. 팔아 주셔서⁠.⁠”

표서걸이 수갑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표서걸이 볼펜 없이 말했다⁠. “⁠물량이 안 받았습니다⁠.⁠”

“⁠사람이요⁠.⁠” 채석란이 고쳐 말했다⁠. “⁠사람들이 안 받았어요⁠.⁠”

*

8월 중순⁠, 뉴스는 짧았다⁠. 리딩방 마흔 개를 돌리며 소형 종목 여러 개의 시세를 조종한 투자자문사 대표 구속⁠. 남의 이름 계좌 수십 개를 한 계좌에 수십만 원씩 주고 빌려⁠, 빌린 계좌들끼리 짜고 사고팔아 거래가 많은 척 값을 올린 혐의⁠. 회원들이 산 물량을 받아 팔아 치우는 수법⁠. 남긴 돈은 돈을 댄 전주와 세력⁠, 방을 돌린 사람이 몫을 갈라 가졌다⁠. 거래소가 이상 거래를 잡아 금융당국에 넘기고⁠, 계좌를 거슬러 올라가 주인들을 하나씩 찾아냈다고 했다⁠. 기자는 시세조종이 1년 이상의 징역에⁠, 남긴 이익의 몇 배까지 벌금을 무는 죄라고 덧붙였다⁠. 계좌를 빌려준 사람들도 처벌받는다고 했다⁠.

사장의 이름은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 투자조합 전주 한 명 입건⁠, 이라고만 나왔다⁠. 이튿날 사장실의 골프 퍼터가 치워졌고⁠, 일주일 뒤 사장이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 공동 고소 단톡방은 이백 명을 넘겼다⁠. 지급정지된 계좌에서 일부라도 돌려받을 길이 열렸다고 반장 어머님이 공지를 올렸다⁠. 공지 끝에 「⁠피해 회복은 시간이 걸립니다⁠. 서로 지치지 맙시다⁠.⁠」라고 적혀 있었다⁠.

주찬은 대출 2억 가운데 4천을 갚았다⁠. 소휘의 4천이었다⁠. 희서 씨가 백설기 세 판을 들고 왔고⁠, 소휘는 한 판을 이웃집에 돌렸다⁠. 주찬은 대리운전을 그만두지 않았다⁠. 캡도 다시 쓰지 않았다⁠.

근호는 불구속으로 기소됐다⁠. 회사에는 사직서를 냈다⁠.

*

근호가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 나는 근호를 무향실로 불렀다⁠. 문이 닫히자 측정 마이크의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근호가 빨간 불을 보았다⁠.

“⁠또 녹음하냐⁠.⁠”

“⁠삼 년 전 설정이라서요⁠. 못 끕니다⁠.⁠”

“⁠끄는 법 알면서⁠.⁠”

“⁠압니다⁠.⁠”

근호가 철망 바닥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어 무릎에 놓았다⁠. 쐐기 모양 흡음재가 우리 숨을 하나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근호의 심장 소리가 들릴 듯했다⁠. 들리는 것은 내 심장 소리였다⁠.

“⁠재판에서 증언할 거다⁠.⁠” 근호가 말했다⁠. “⁠표서걸 재판⁠. 내 목소리로⁠. 이번엔 변조 안 하고⁠.⁠”

“⁠변호사가 말렸을 텐데요⁠.⁠”

“⁠뫼빛 변호사는 끊었다⁠. 국선 변호사가 나보다 어리더라⁠. ‘⁠팀장님⁠’ 하길래 팀장 아니라고 했다⁠.⁠” 근호가 웃었다⁠. 흠⁠, 흠⁠. 두 번째가 반 박자 늦었다⁠. “⁠너 그날 하루 입 닫았지⁠. 팔고 나서⁠.⁠”

“⁠닫았습니다⁠.⁠”

“⁠나도 석 달을 닫았다⁠. 하루랑 석 달이랑 다르냐⁠.⁠”

“⁠다릅니다⁠. 하루 닫은 사람이 석 달 닫은 사람을 경찰에 넘겼으니까요⁠.⁠”

근호가 한참 나를 보았다⁠. 그리고 사원증을 목에서 벗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사진 속 근호는 지금보다 머리숱이 많았다⁠.

“⁠인사팀에 네가 갖다 줘⁠.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또 누구 만나기 싫다⁠.⁠” 근호가 몸을 일으켰다⁠. 문손잡이를 잡고 돌아보았다⁠. “⁠자⁠, 귀 열고⁠.⁠”

나는 기다렸다⁠. ‘⁠깔끔하게⁠’가 올 자리였다⁠. 근호는 말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바깥 시험실의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브레이크 시험대가 돌아가는 소리⁠, 환풍기 소리⁠, 누군가의 웃음소리⁠. 문이 닫히고⁠, 무향실에는 빨간 불과 나만 남았다⁠.

*

8월 27일⁠, 잔금 날⁠. 소휘는 은행에 먼저 갔고⁠, 나는 단미 손을 잡고 지하철을 탔다⁠. 새 동네로 가는 2호선이었다⁠. 단미가 내 오른쪽 귀의 이어폰을 가리켰다⁠.

“⁠아빠 귀에 뭐 들어⁠?⁠”

나는 이어폰을 빼서 단미의 왼쪽 귀에 꽂아 주었다⁠. 아무 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리딩방 앱은 지운 지 오래였다⁠. 이어폰에서는 동요 하나가 나오고 있었다⁠. 단미가 고른 노래였다⁠.

“⁠아빠는 뭐 들어⁠?⁠”

“⁠아빠는 이쪽 귀로 들어⁠.⁠”

전동차가 역으로 들어왔다⁠. 끼이익⁠. 바퀴와 레일 사이에서 브레이크가 길게 울었다⁠. 높은 소리였고⁠, 끝이 반 박자 떨렸다⁠. 패드가 조금 닳은 소리였다⁠. 나는 내일 출근해서 고 차장에게 보고할 말을 머릿속으로 적었다⁠. 단미가 이어폰 한 짝을 꽂은 채 내 무릎에 기대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박자가 조금씩 늦었다⁠. 나는 늦은 박자를 세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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