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053자) · 노선도 뒷면

순번

마지막 칸 · 남시우

만 19세 이상 이용가

노선도는 좌석 옆 선반에 꽂혀 있는 무료 안내지다. 앞면에 역 아홉 개가 한 줄로 그려져 있고, 뒷면은 원래 비어 있다. 광고가 안 붙어서. 도민은 그 뒷면을 쓰고 있었다. 6호차 문 옆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대고. 볼펜이 두 자루였다. 파란 것이 먼저 나오다가 잉크가 끊기자 검은 것으로 바꿨다. 그래서 뒷면의 이름들은 위쪽 절반이 파랗고 아래쪽 절반이 검었다.

“뭐 쓰세요.”

“순번이요.”

그 사람은 고개도 안 들고 대답했다. 쓰는 동안 입술이 움직였다. 나처럼 속으로 세는 사람이었다. 다른 점은 그 사람은 세면서 순서를 매겼고, 나는 세기만 했다는 것.

새말을 지나고 일 분. 6호차 뒤쪽 연결문 유리가 벌써 뿌옜다. 7호차를 먹은 연기가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았다. 도민 말대로 연기는 불어난다. 불어난 것이 틈을 찾는 데 드는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도민이 볼펜 끝으로 유리를 가리켰다.

“이번엔 사 분 안 줄 거예요. 한 삼 분 오십. 넉넉하게 잡아서 사 분.”

“이백사십 초.”

“여기 저까지 스물여덟이에요. 저는 먼저 건너가서 끌 거니까 빼고, 스물일곱. 십 초씩이면 이백칠십. 셋이 모자라요.”

그 사람은 노선도를 뒤집어 내게 내밀었다. 파란 이름 넷이 맨 위에 있었다. 도민, 김 과장, 박 대리, 정우석. 그 아래로 검은 이름들. 6호차 사람들의 이름을 벌써 거의 다 받아 적어 두었다. 윤형태 부부, 이어폰 낀 학생 셋. 그리고 맨 아래, 한 덩어리로 묶여서, 느린 사람들. 강태오, 남궁하준, 문순례, 최보람, 엄 영감님, 아이, 이모.

“앞에 넷은 저하고 제 회사 사람들이에요. 셋은 3호차에서 불러서 5호차 문 앞에 세워 놨어요. 저쪽에서 끌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아까 해 봤잖아요. 끄는 사람이 있으면 십 초예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5호차 쪽 유리를 봤다. 넥타이 맨 남자 셋이 문 너머에 서 있었다. 3호차에서 영수증으로 싸우던 그 사람들. 제일 젊은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정우석이었다. 흔들다가 옆 사람한테 뒤통수를 맞았다.

“그다음은 빠른 사람. 젊고 다리 멀쩡한 사람. 그다음이 보통. 맨 끝이 느린 사람.”

“다친 사람이 맨 끝이네요.”

“네.”

그 사람은 망설이지 않았다.

“차장님, 계산해 보세요. 느린 사람이 앞에 있으면 문 앞에서 시간을 제일 많이 먹어요. 그러면 뒤에 선 사람 다섯이 못 건너요. 느린 사람을 뒤에 두면 못 건너는 게 한둘이에요. 다섯하고 한둘이에요. 저는 한둘을 고른 거예요.”

그 말도 맞았다. 느린 사람을 앞에 세우면 문을 넘는 사람의 수가 준다. 그건 산수였다. 나는 그 산수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명단은 문을 넘는 사람의 수를 제일 크게 만드는 명단이었다. 그리고 그 명단 맨 아래에서 못 넘는 한둘이 누구인지도 그 명단은 정확히 알려 주고 있었다. 등에 화상을 입은 택배 기사, 손에 물집이 부푼 대학생, 눈썹이 없는 요양보호사, 여든한 살 영감님, 아홉 살.

“이 한둘은 누가 정했어요.”

“계산이요.”

“계산은 제가 해도 같은 숫자가 나와요. 이름은 안 나와요. 이름은 도민 씨가 적으셨어요.”

그 사람이 나를 봤다. 처음으로 대답이 늦었다.

“그럼 차장님은 어떻게 할 건데요. 다친 사람 먼저 보내서 뒤에 다섯 남기실 거예요? 그 다섯은 누구예요? 그 다섯한테는 뭐라고 하실 건데요.”

6호차가 조용했다. 스물일곱 명이 우리 둘을 봤다. 명단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이름이 파란색인지 검은색인지,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다들 알고 있었다. 도민은 받아 적을 때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으니까. 맨 아래 덩어리에 묶인 문순례 씨가 이모 어깨너머로 명단을 봤다.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목을 주물렀다. 안경이 없어서 글씨는 못 읽었을 것이다. 자리는 읽었다.

“하나 더 여쭤볼게요.”

나는 명단을 보며 말했다.

“여기 제 이름이 없네요.”

“아, 그건.”

도민이 볼펜 뚜껑을 닫았다.

“승무원은 빼셔야죠.”

“왜요.”

“업무 중이시잖아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삼 초쯤 생각했다. 그리고 알았다.

“저를 세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입니다.”

그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더 말하지 않았다. 둘 다 맞았다. 차장은 명단에 없다. 구 년 동안 어느 명단에도 없었다. 승객 명단, 대피 명단, 부상자 명단. 차장은 세는 사람이지 세어지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게 싫었던 적이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노선도 뒷면 두 가지 색 이름들 사이에 내 이름이 없다는 것이 목에 걸렸다. 모래처럼.

“순번은 제가 부르겠습니다.”

나는 명단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돌려주세요.”

“다 건너면 돌려드릴게요.”

연결문 너머에서 문짝을 받치고 있던 김 과장이 유리에 입을 대고 소리쳤다. 두 겹 철판 너머로도 들렸다. 큰 목소리였다.

“차장님! 저 폐가 좀 안 좋아서요! 문 받치는 거 딴 사람 시키면 안 될까요!”

옆에서 박 대리가 소리쳤다.

“과장님 오늘 아침에도 흡연실에서 두 대 피우셨잖아요!”

“그러니까 폐가 안 좋다는 거지!”

아무도 웃지 않았는데 이어폰 낀 학생 하나가 코로 웃음을 터뜨렸다. 연기가 섞인 공기를 코로 뿜고는 기침을 했다. 기침을 하면서도 웃었다. 옆의 학생 둘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이 6호차에 번졌다. 번지는 게 연기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 틈에 불렀다.

“문 받칠 분 넷. 도민 씨 먼저 건너가서 박 대리님하고 저쪽을 받치세요. 이쪽은 윤형태 씨하고 노상윤 씨.”

“저는요?”

김 과장이 유리 너머에서 물었다.

“과장님은 폐가 안 좋으시니까 박 대리님 뒤에서 대리님 등을 받쳐 주세요. 무거운 거 안 드셔도 됩니다.”

과장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박 대리가 웃음을 참느라 볼이 부풀었다. 정우석은 대놓고 웃었다가 또 뒤통수를 맞았다.

양쪽에 둘씩. 끌고 받치는 손이 넷이 되자 발판 앞에서 멈출 틈이 아예 없어졌다. 사람이 발판에 발을 올리기도 전에 저쪽 손이 손목을 잡았고, 이쪽 손이 등을 밀었다. 나는 시계를 봤다. 구 초.

그리고 나는 순서를 불렀다. 도민의 명단을 버리지 않았다. 순서만 섞었다. 느린 사람 하나, 빠른 사람 둘. 느린 사람 하나, 빠른 사람 둘. 느린 사람이 문 앞에서 시간을 먹으면 뒤의 빠른 둘이 그 시간을 도로 벌었다. 아이는 빠른 사람으로 셌다. 아이가 제일 빨랐다. 발판 앞에서 한 번도 안 멈추고 틈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이모 손을 끌고 넘어갔다. 이모가 끌려갔다. 쇼핑백 하나가 이모 팔꿈치에 매달려 흔들렸다. 넘어간 아이는 5호차 쪽 문 옆에 서서 넘어오는 사람들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셌다. 나는 이쪽에서 세고 아이는 저쪽에서 셌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이 같은 것을 셌다. 끝났을 때 누구 숫자가 맞는지 대 보기로 한 것처럼.

강태오 씨. 하나. 학생 둘. 둘, 셋. 문순례 씨. 넷. 문순례 씨는 발판에서 발목이 꺾였다. 도민이 그 사람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들어 올렸다. 순례 씨가 아이고, 했다. 아이고가 끝나기 전에 5호차 바닥에 앉혀져 있었다.

엄 영감님 차례에서 영감님이 보자기를 먼저 건넸다.

“이거 먼저 넘기쇼. 병 깨지면 안 되니께.”

“영감님이 먼저 넘어가셔야죠.”

“나는 깨져도 되고.”

윤형태 씨가 저쪽에서 보자기를 받았다. 그 사람 손은 아직 기름이 번들거렸다. 보자기가 미끄러졌다. 받았다. 영감님이 넘어갔다.

스물. 스물넷. 스물일곱.

이쪽에서 문짝을 받치던 노상윤과 윤형태 씨가 넘어갔다. 기름 묻은 손이 마지막으로 문짝에서 떨어졌다. 나는 그 뒤에 넘어갔다. 문을 닫았다. 걸쇠, 레버. 세 번째였다. 세 시 오십사 분 삼십 초. 창밖으로 청운역이 하얗게 지나갔다. 무전은 청운 통과라고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관제, 갈매 상황 알려 주십시오.”

“갈매 승강장 통제 완료. 소방 펌프차 넷, 구급차 여섯 대기. 지상이라 연기 빠집니다.”

권혁수는 그 말을 할 때만 조금 빨랐다. 줄 수 있는 것이 생긴 사람처럼.

“반월은요.”

“반월 통과입니다.”

반월은 아직 두 역 뒤였다. 그 사람은 묻기도 전에 답을 정해 두고 있었다. 나는 그 대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원, 새말, 청운은 몰라도 반월은 환승역이다. 승강장이 두 층이고, 역무원이 제일 많고, 비상 계단도 제일 넓다. 서야 한다면 반월이었다. 그 사람은 반월에서도 안 세우겠다고, 반월에 닿기도 전에 말했다.

이백사십 초를 구로 나누면 스물여섯하고 조금. 도민이 5호차 바닥에 주저앉아 숫자를 중얼거리더니,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아니다. 이백육십이면 스물아홉이다. 한 정거장에 스물아홉.”

스물에서 스물여섯, 스물여섯에서 스물아홉. 문은 그대로인데 문을 넘는 사람은 늘었다. 넘는 사람이 는 게 아니라 넘기는 손이 늘었다.

5호차에 원래 있던 여덟 명이 우리를 봤다. 그 사람들은 연기를 아직 못 맡았다. 스물일곱 명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을 보고 무릎 위 가방을 끌어안았다. 5호차는 이제 서른아홉이었다. 원래 여덟, 3호차에서 온 넷, 넘어온 스물일곱. 누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누가 대답하기도 전에 김 과장이 말했다.

“불이요. 근데 괜찮아요. 우리 여기 순번 있어요.”

도민이 숫자를 다 중얼거리고 나서 휴대폰을 꺼냈다. 신호가 없었다. 그는 화면을 끄지 않고 사진첩을 열었다. 초음파 사진이었다. 흑백 부채꼴 안에 콩 같은 것 하나.

“와이프가 갈매역 앞 산부인과에 있어요. 오늘 이십 주 검진이라. 저 오면 같이 들어가기로 했는데.”

나는 그 사진을 봤다. 그 사람은 사진을 오래 보여 주지 않았다. 도로 넣었다.

“그래서 앞에 제 이름 쓴 거 아니에요.”

“아무 말 안 했어요.”

“하실 것 같아서요.”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 이름이 명단 맨 위에 있는 이유가 문을 받치기 위해서인지 갈매에 제일 먼저 닿기 위해서인지, 그 사람도 몰랐을 것이다. 둘 다였을 것이다. 사람은 이유 하나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주머니 속 노선도를 만졌다. 종이 모서리가 손가락 끝을 찔렀다. 나는 그 명단을 도민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도민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둘 다 그 명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5호차 뒤편 연결문 유리가, 방금 내가 닫은 문이, 벌써 흐려지기 시작했다.

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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