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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13,324자)

오산 죽미령 전투 — 첫 전선이 무너지다

1950 · 네오

오산 죽미령 전투, 1950년 7월 5일 — 수원~오산 국도와 경부선 철길, 죽미령 능선의 스미스 부대 보병 진지(B·C중대, 75밀리 무반동총 2정, 4.2인치 박격포 2문), 진지 뒤 1.8킬로미터쯤의 제52포병대대 A포대(105밀리 곡사포 4문)와 앞으로 낸 대전차용 곡사포 1문, 북한군 제107전차연대 T-34 33대의 남하(07시~10시 15분), 북한군 제4사단 제16·18연대 보병 종대와 양 옆 포위(11시 45분~), 스미스 부대의 철수(14시 30분, 철길 서쪽 능선 → 오산 북쪽 → 동쪽 흙길 → 밤 안성), 서정

1950년 6월 30일 밤, 일본 규슈 구마모토, 미군 병영 캠프 우드.

미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장 찰스 스미스(34) 중령은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들었다1. 전날 밤을 비상 대기로 꼬박 새운 터라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들었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 때 아내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스티븐스 대령님 전화예요.”

수화기 너머에서 제21보병연대장 리처드 스티븐스 대령이 짧게 말했다.

“일이 터졌네. 옷 입고 지휘소로 오게.”

스미스는 수화기를 든 채 잠깐 서 있었다. 아홉 해 전 하와이 스코필드 병영에서도 이렇게 불려 나갔다. 그날은 일본군 비행기가 진주만을 때린 일요일이었고, 스미스는 중대 하나를 끌고 바버스 포인트 해안으로 달려가 참호를 팠다. 이번에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새벽 세 시, 제1대대 B중대와 C중대가 트럭에 올랐다1. 장대비 속을 120킬로미터 달려 후쿠오카의 이타즈케 공군기지(현 후쿠오카공항)에 닿자,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활주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1. 딘은 비에 젖은 스미스의 손을 잡았다.

“부산에 내리면 대전으로 가게. 북한군을 부산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먼 데서 막고 싶네. 큰길을 할 수 있는 한 북쪽에서 막게. 더 줄 정보가 없어 미안하네. 내가 가진 게 그게 전부야. 행운을 비네.”

병사들은 한 사람에 소총탄 120발과 이틀 치 깡통 전투식량을 받았다1. 대부분 스무 살이 안 된 얼굴이었다2. 여섯에 하나꼴로만 전쟁을 겪어 보았고, 나머지는 총소리를 사격장에서만 들어 본 사람들이었다1.

*

7월 1일~2일, 부산과 대전.

수송기는 여섯 대뿐이었다. 처음 두 대는 부산 비행장이 안개에 덮여 내리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스미스는 열 번째 비행에서야 오후에 땅을 밟았다1. 부산 거리에는 태극기와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역에서는 악대가 요란하게 배웅했다. 밤새 기차를 타고 대전에 닿은 스미스를 미 극동군 전방지휘소를 이끄는 존 처치 준장이 지도 앞으로 불렀다.

“저 위에서 조그만 일이 좀 있네. 전차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을 사람 몇이면 돼. 국군 옆에 서서 기운이나 북돋아 주게.”

스미스는 그 「조그만 일」의 자리를 제 눈으로 보러 지프를 몰았다. 130킬로미터의 흙길은 남쪽으로 내려오는 국군 패잔병과 피란민으로 메워져 있었다. 오산 북쪽 5킬로미터쯤에서 국도가 낮은 고개를 넘었다. 고개 양옆으로 야트막한 능선이 길을 가로질렀고,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서자 북쪽 수원까지 13킬로미터 길과 철길이 거의 다 내려다보였다1. 마을 사람들은 그 고개를 죽미령(현 오산시 유엔군 초전기념관 자리)이라고 불렀다.

능선 위로 날개에 붉은 별을 그린 전투기 편대가 지나갔다. 조종사들은 고개 위의 미군 몇 명을 보지 못했다.

*

7월 5일 자정 넘어, 평택에서 오산으로 가는 국도.

스미스는 그사이 평택과 안성에 나눠 두었던 중대들을 다시 모았다.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온 제52포병대대 A포대가 105밀리 곡사포 여섯 문을 끌고 합류했다. 대대장 밀러 페리 중령이 직접 포를 데려왔다. 보병 406명에 포병 134명, 합해서 540명이었다1.

트럭은 한국인에게서 끌어모은 것들이었다. 차가 북쪽으로 간다는 것을 알자 한국인 운전사들은 하나둘 내려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미군 병사들이 운전석에 올랐다. 불을 끄고 피란민 사이를 비집는 동안 19킬로미터 길에 두 시간 반이 걸렸다.

다리마다 국군 공병이 폭약을 달고 있었다. 딘 사단장의 명령을 들고 온 사단 포병 지휘관 대리 조지 바스 준장이 지프에서 내려 공병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다리를 써야 하니 폭파하지 말라. 공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바스는 다시 말했다. 공병은 다시 끄덕였다. 세 번째에 바스는 말을 그만두고 다이너마이트 상자를 두 팔로 안아 강물에 던졌다1.

짐칸에서 그 모습을 본 병사 하나가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한국말은 몰라도 저건 알아듣겠지.”

새벽 세 시, 부대가 죽미령에 닿았다1.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보병은 국도 동쪽 능선을 따라 1.6킬로미터에 걸쳐 흩어져 몸을 숨길 구덩이인 호를 팠다. B중대 소대 하나가 국도 서쪽 둔덕을 맡았고, C중대는 동쪽 철길 쪽 끝을 남쪽으로 꺾어 옆구리를 막았다. 뒤로 화염을 뿜어 반동을 지우는 75밀리 무반동총 두 정이 국도와 철길을 하나씩 겨누었다2.

페리는 능선 1.8킬로미터 뒤, 국도 서쪽 논가 초가 몇 채 옆에 곡사포 네 문을 앉혔다. 지프 두 대가 앞뒤로 매달려 포를 끌었다. 다섯 번째 포는 포대와 보병 사이 길가에 따로 세웠다. 포대에는 포탄이 1,200발쯤 있었는데, 그 가운데 철판을 녹여 뚫는 대전차고폭탄은 여섯 발이었다3. 일본 사세보 항에서 대대가 긁어모은 것이 열여덟 발이었고, A포대 몫이 여섯 발이었다1. 여섯 발은 모두 길가의 다섯 번째 포로 갔다. 그 포의 분대장은 허먼 크리치필드 상병이었다4.

포대 쪽 병사 하나가 보병에게 물었다. 전차가 보병을 뚫고 여기까지 오면 어쩌느냐고. 보병이 웃었다.

“걱정 마. 거기까지 갈 일은 없을 거야.”

포대에는 한국군 장교도 한 사람 있었다. 육사 4기 윤승국 대위였다5. 미군 연락장교로 붙은 그는 스미스 부대에 배속된 단 한 명의 한국 군인이었다6. 그는 비에 젖은 지도를 접어 품에 넣고 수원 쪽 하늘을 오래 보았다.

*

7월 5일 아침 일곱 시, 죽미령 보병 진지.

깡통 식량으로 아침을 먹은 뒤였다. 빗발 사이로 수원 쪽 길에 무엇인가 움직였다. 반 시간 뒤에는 그것이 전차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길게 뻗은 85밀리 포신, 둥근 포탑, 넓은 궤도. 소련이 만들어 북한에 넘긴 T-34 여덟 대가 종대로 내려오고 있었다4.

능선 호 안에서 필립 데이는 전차를 하나씩 세다가 그만두었다. 뒷날 그는 그 순간 머릿속에 든 생각을 이렇게 털어놓았다7.

“맙소사, 내가 대체 무슨 일에 뛰어든 거지?”

여덟 시 십육 분, 포대 2번 포가 첫 두 발을 쏘았다3. 한국전쟁에서 미 지상군이 쏜 첫 포탄이었다1. 3.7킬로미터 밖의 전차 사이에서 흙기둥이 솟았다. 관측장교가 사거리를 고치자 포탄이 전차 바로 옆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차는 흙기둥 사이를 그대로 지나왔다.

“무반동총, 기다려. 640미터 안에 들어오면 쏜다.”

스미스의 명령이 호에서 호로 건너갔다. 전차들은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흩어지지도 않았다. 국군의 작은 지연 진지쯤으로 여기는 몸짓이었다. 640미터에 들자 무반동총 두 정이 불을 뿜었다1. 포탄이 포탑에 맞았다. 전차는 85밀리 포와 기관총을 쏘며 고갯길을 올라왔다.

B중대 올리 코너 소위는 국도 동쪽 도랑에 엎드려 있었다8. 손에는 어깨에 메고 쏘는 2.36인치 로켓 발사관, 바주카가 들려 있었다. 전차의 궤도가 도랑 가장자리 흙을 무너뜨리며 지나갔다. 코너는 14미터 거리에서 장갑이 가장 얇은 전차 꽁무니를 노렸다. 한 발을 쏘고 장전수가 다음 로켓을 밀어 넣으면 또 쏘았다. 그는 그렇게 스물두 발을 쏘았다1. 로켓은 철판에 부딪혀 불꽃만 튀겼다.

앞선 두 대를 멈춘 것은 크리치필드의 포였다. 고개를 막 넘어선 전차 두 대가 대전차고폭탄을 맞고 길가로 비켜섰다. 한 대에서 불길이 올랐다. 포탑 뚜껑이 열리고 두 사람이 두 손을 들고 나왔다. 세 번째 사람은 따발총을 들고 나왔다. 그는 땅에 발이 닿자마자 가장 가까운 기관총 진지에 총구를 돌렸다. 기관총 부사수가 쓰러졌다. 미군 총탄이 세 사람을 모두 쓰러뜨렸다1.

부사수의 이름은 남지 않았다. 한국 땅에서 전사한 첫 미군 지상군 병사였을 그 사람의 이름을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끝내 찾지 못했다1.

여섯 발은 금방 바닥났다. 그 뒤로 날아간 고폭탄은 전차 앞판에서 튕겨 나갔다. 세 번째 전차가 고개를 넘으며 길가의 포를 부쉈고 크리치필드의 포반원 하나가 다쳤다.

*

같은 시각, 죽미령 남쪽 비탈, 북한군 제107전차연대의 T-34 한 대.

전차 안은 쇠 냄새와 기름 냄새, 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다섯 사람이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해치는 모두 닫혀 있었다. 전차장이 들여다보는 잠망경 유리에 빗물이 줄을 그었고, 그 좁은 틈으로는 고갯마루와 길 양옆의 풀숲밖에 보이지 않았다.

“앞에 두 대 섰다. 불났다.”

전차장이 말했다. 조종수는 대답 대신 기어를 바꾸었다. 연대가 받은 명령은 오산으로, 평택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길가 구덩이에서 누가 쏘든 멈출 까닭이 없었다. 철판에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둔탁한 망치질 같은 소리였다. 포수가 포탑을 돌리며 물었다.

“어디서 쏩니까?”

“모른다. 그냥 지나간다.”

전차는 쏘면서 지나갔다. 겨누어 쏘지 않았다. 고개 아래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들은 몰랐다. 길 서쪽 논가에 곡사포가 있다는 것도, 그 포를 쏘는 사람들이 미군이라는 것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온 뒤로 그들 앞에 선 것은 늘 국군이었다. 전차 갑판에는 보병 몇이 엎드려 매달려 있었다. 포탄 하나가 가까이 터지자 그 가운데 하나가 빗물에 미끄러지듯 길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전차는 서지 않았다.

*

7월 5일 아침 아홉 시~열 시 십오 분, 제52포병대대 A포대 진지.

첫 무리의 전차들이 보병 진지와 포대 사이의 전화선을 궤도로 끊어 놓았다. 무전기는 비에 젖어 지직거리기만 했다3. 지프에 단 무전기 하나만 겨우 살아 있었다. 관측장교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어왔다. 전차가 보병을 뚫었다. 대비하라.

“다들 우리가 누군지 알면 놈들이 돌아갈 줄 알았다.”

뒷날 포병 하나는 그날 아침의 공기를 그렇게 기억했다.

전차들은 포대 460미터 앞 작은 언덕 뒤에서 잠깐 멈췄다1. 그러고는 한 대씩 해치를 닫고 길을 내달렸다. 105밀리 곡사포가 140미터, 270미터 거리에서 쏘았다. 포탄은 전차를 흔들어 놓기만 하고 튕겨 나갔다. 어떤 전차는 포신을 길 반대편으로 돌린 채 지나갔다. 한 대가 포대로 들어오는 오솔길 어귀에서 멈칫했다. 포병들은 숨을 멈추었다. 전차는 길을 벗어나지 않고 다시 오산 쪽으로 굴러갔다.

포병 하사관 에드윈 에버솔은 바주카를 메고 논으로 뛰어나갔다. 첫 로켓이 포탑에 맞고 튕겨 나갔다. 뒷날 그는 그 순간 전차가 전함만 해 보였다고 말했다. 전차의 85밀리 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에버솔 옆의 전봇대를 꺾었다. 논 배수로에 몸을 던진 에버솔의 등 위로 전봇대가 넘어졌다가 둑에 걸렸다1. 그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기어 나왔다. 그사이 곡사포탄 하나가 세 번째 전차의 궤도를 끊었다1.

페리는 통역을 데리고 멈춘 전차로 다가갔다. 논두렁에 몸을 낮추고 통역이 소리쳤다.

“나와라! 손 들고 나오면 쏘지 않는다!”

전차는 대답하지 않았다. 페리가 손을 들어 포대 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곡사포 세 발이 전차에 맞았다. 해치가 열리고 두 사람이 뛰어나와 길 밑 배수 굴로 뛰어들었다. 페리가 분대 하나를 보냈다. 총소리가 몇 번 나고 그쳤다. 그 사이 날아온 총알이 페리의 오른 다리를 뚫었다9. 위생병이 뒤로 데려가려 하자 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음 전차들을 맞을 준비를 시켰다.

십 분 뒤 두 번째 무리가 왔다. 이번에는 한 대씩, 두세 대씩, 간격도 없이 줄줄이 왔다. 포반원 몇이 포를 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장교들이 직접 포탄을 끌어다 장전했고, 고참 하사관들이 방아끈을 당겼다. 페리와 드웨인 스콧 중위가 포 사이를 오가며 병사들의 이름을 불렀다1. 달아났던 병사들이 하나둘 포 옆으로 돌아왔다.

전차 포탄에 포대 옆 집 한 채가 불탔다. 불은 그 옆에 쌓아 둔 포탄 300발로 옮겨붙었고, 포탄이 줄줄이 터지기 시작했다1. 열 시 십오 분, 마지막 전차가 포대 앞을 지나 오산 쪽으로 사라졌다1. 33대 가운데 부서지거나 멈춘 것이 네 대, 다치고도 오산까지 굴러간 것이 세 대였다10.

*

7월 5일 오전 열한 시 사십오 분, 죽미령 보병 진지.

비는 오전 내내 그치지 않았다. 전차가 지나간 뒤 한 시간쯤 고개는 조용했다. 병사들은 호를 더 깊이 팠다. 그러다 스미스의 쌍안경에 수원 쪽 길이 다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전차 석 대를 앞세운 트럭 행렬이었다. 트럭 뒤로는 걸어오는 보병이 몇 킬로미터나 이어졌다. 스미스가 어림한 행렬의 길이는 10킬로미터쯤이었다. 북한군 제4사단 제16연대와 제18연대였다1.

선두가 900미터 앞에 왔을 때 스미스가 명령했다. 뒷날 그는 그 순간을 두고 있는 것을 다 퍼부었다고 말했다. 박격포탄이 트럭 사이에 떨어지고 12.7밀리 기관총이 행렬을 쓸었다. 트럭이 불길에 싸였다. 사람들이 공중으로 튀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길가 도랑으로 뛰어내렸다. 북한군 보병 천 명쯤이 트럭에서 내려 좌우로 퍼졌다1.

북한군은 정면으로 오지 않았다. 국도 동쪽 손가락 능선에 기관총을 걸고, 나머지는 양옆으로 돌았다. 열두 시 반, 국도 서쪽 높은 봉우리에 북한군이 올라섰다. 그 아래 둔덕의 B중대 소대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스미스는 그 소대를 길 동쪽으로 불러들였다. 부대대장 플로이드 마틴 소령이 남은 탄약을 지휘소 뒤 움푹한 곳으로 모았다1. 오른쪽 언덕들에서 북한군 기관총이 울리기 시작했다.

중화기 보병 도일 밀스(17) 일병이 도로를 내려다보는 언덕에서 전사했다11. 텍사스 브라운우드에서 쌍둥이 형제와 함께 입대한 지 여섯 달째였다. 미성년이던 형제의 입대 서류에는 의붓아버지가 서명을 해 주었다11.

*

7월 5일 오후 두 시 반, 죽미령.

양옆이 막혀 가고 있었다. 앞에는 끝이 안 보이는 북한군 예비대가 서 있었고, 뒤에는 이미 전차 서른 대 남짓이 내려가 있었다. 소총탄은 거의 떨어졌다. 무전은 끊겼고, 2킬로미터 가까이 뒤에 있는 포대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비 때문에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스미스가 중대장들을 불렀다.

“지금 안 나가면 아무도 못 나간다. 철길 서쪽 능선으로 내려간다. C중대 먼저, 그다음 의무대, 대대본부, 마지막이 B중대다.”

한 부대가 내려가는 동안 다음 부대가 엄호하는 철수였다. 무반동총도 박격포도 기관총도 두고 갔다3. 병사들 손에는 소총과 탄창 두세 개만 남았다. 죽은 사람들은 데려갈 수 없었다. 들것에 누운 중상자 스물다섯에서 서른 명도 데려갈 수 없었다1.

의무대의 하사관 하나가 들것 옆에 주저앉았다. 누가 그를 부르자 그는 손만 저었다. 그는 붕대 상자를 무릎 사이에 끌어다 놓고 다음 들것으로 기어갔다. 그가 누구였는지는 지금도 기록에 없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그 이름을 밝히지 못했다고 따로 적었다1.

철수는 곧 총탄 속을 달리는 길이 되었다. 가까운 둔덕에서 북한군 기관총 하나가 내려가는 병사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연대 야구팀의 주장이자 투수였던 레이먼드 애덤스 중위가 수류탄 핀을 뽑았다. 37미터를 날아간 수류탄이 기관총 진지 한가운데 떨어졌고, 기관총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1. 옆에서 엎드려 있던 병사가 고개를 들었다.

“중위님, 그건 스트라이크입니다.”

“말할 힘 있으면 뛰어.”

B중대 제2소대에는 철수 명령이 닿지 않았다. 중대 지휘소에 다녀온 전령이 소대장 칼 버나드 소위 앞에 숨을 몰아쉬며 엎드렸다.

“아무도 없습니다. 지휘소가 비었습니다. 우리 소대만 남았습니다.”

버나드는 제 눈으로 지휘소를 확인했다. 빈 호 바닥에 빗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소대원을 모아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1.

*

같은 시각, 오산 북쪽 논, 제52포병대대 A포대.

스미스는 철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논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꺾었다. 포대는 이미 전차에 짓밟혔을 것이고 포병들도 거의 죽거나 다쳤으리라 생각했다. 논두렁에서 전화선을 새로 깔던 페리의 작업조와 마주쳤다. 함께 포대에 뛰어들었을 때 스미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곡사포 네 문이 모두 멀쩡히 서 있었다. 다친 사람은 페리와 병사 하나뿐이었다1.

“철수한다.”

포병들은 포를 겨누는 조준경과 포탄을 물고 닫는 쇠뭉치인 폐쇄기를 뽑아 들고 트럭으로 갔다1. 포는 쏠 수 없는 쇳덩이가 되어 논가에 남았다. 오산 북쪽 민가 사이에 숨겨 둔 트럭들은 거의 그대로였다.

*

7월 5일 오후, 오산 남쪽 끝, 북한군 전차 석 대.

길모퉁이에 전차 석 대가 서 있었다. 전차병 몇이 철판에서 내려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1. 아침부터 고개를 둘 넘었고, 그 뒤로는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빗물이 담배 끝을 적셨다.

모퉁이를 돌아 차 한 대가 나타났다. 지붕 없는 차 앞자리에 철모를 쓴 사람 둘이 앉아 있었다. 전차병들이 고개를 돌렸고, 차 안의 두 사람도 그들을 보았다. 아무도 총을 들지 않았다. 차가 급히 방향을 틀었고, 뒤따르던 트럭들도 하나씩 돌아섰다. 전차병 하나가 담배를 입에서 떼고 멀어지는 트럭 꽁무니를 보았다. 그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맨 앞 차에는 스미스와 페리가 타고 있었다1. 행렬은 오산 북쪽 끝으로 되돌아가 동쪽으로 난 흙길로 들어섰다. 윤승국이 페리 옆에서 길을 짚었다9. 북한군 전차가 큰길로 내려갔으니 안성 쪽 샛길로 빠져야 했다.

얼마 안 가 논과 산비탈 여기저기에 보병들이 보였다. 군화를 논에 빠뜨려 맨발인 병사, 철모가 없는 병사, 웃옷을 벗어 던진 병사들이었다. 트럭이 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백 명쯤이 트럭에 기어올랐다1. 일본 점령군의 열여덟 살 정비병으로 이 부대에 끼어 왔던 웨인 리치는 뒷날 그날의 철수를 이렇게 말했다7.

“다 낙오병이었어요. 부대라고 할 만한 게 남아 있지 않았죠. 철수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요.”

행렬은 해가 진 뒤 안성에 닿았다3. 북한군은 쫓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비어 버린 죽미령에 올라가 미군이 버리고 간 물건을 주워 모았다.

*

7월 6일, 천안.

스미스가 머릿수를 세었다. 185명이었다. C중대장 리처드 대시머 대위가 65명을 데리고 들어와 250명이 되었다1. 보병만 150명쯤이 죽거나 다치거나 사라졌다. B중대가 가장 많이 잃었다.

이틀 뒤, 칼 버나드가 소대원 열두 명을 데리고 천안에 들어왔다. 오는 길에 북한군 검문선에 다섯 번 걸렸고, 천안에 닿은 것은 북한군보다 반 시간 앞서였다1. 몇몇은 서해안까지, 또 몇몇은 동해안까지 걸어갔다. 한 병사는 서해안에서 조각배를 얻어 타고 부산까지 내려왔다. 보병 진지에 나가 있던 포병 관측·연락·기관총·바주카조 열다섯 명은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다1.

같은 날 오후 네 시, 평택에서 북쪽으로 나간 미 제24사단 제34연대의 바주카조가 서정리(현 평택시 서정동) 철길 위의 북한군 전차와 마주쳤다. 기관총탄에 케네스 섀드릭 일병이 쓰러졌다1. 그는 뒷날 이 전쟁의 첫 미군 전사자로 잘못 알려졌다. 죽미령의 기관총 진지에서 먼저 쓰러진 부사수는 이름이 없어서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 무렵 북한군 제2군단 작전참모였던 이학구는 대령보다 한 계급 위인 총좌였다. 그는 뒷날 미국이 끼어들 줄은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고 털어놓았다1. 며칠 뒤 죽은 북한군 병사의 몸에서 나온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7월 5일. 차량과 미군 포로를 만났다. 미군 시체도 보았다. 부서진 우리 전차 네 대를 보았다. 오산 근처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군은 다시 셈했다. 전사 60명, 부상 21명, 포로 82명. 포로 가운데 32명은 수용소에서 돌아오지 못했다4. 고개를 지킨 시간은 여섯 시간 남짓이었다12.

1955년 7월 5일, 살아 돌아온 스미스 부대원들이 죽미령에 기념비를 쌓았다. 돌은 540개였다13. 그 가운데 하나는 들것 옆에 남은 의무 하사관의 몫이었다.

사료 출처

1.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미 육군 군사사센터, 1961), 제6장 「American Ground Forces Enter the Battle」 중 「Task Force Smith Goes to Korea」「Task Force Smith at Osan」, 제7장 첫머리,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6월 30일 밤 스티븐스의 전화, 딘·처치의 말, 병력 구성(보병 406명·포병 134명, 합 540명), 바스의 다이너마이트, 진지 배치, 포탄 1,200발과 대전차고폭탄 6발(사세보 18발), 08시 16분 첫 포격, 무반동총 700야드 사격, 코너 소위의 바주카 22발(15야드), 불탄 전차의 세 승무원과 이름 모를 기관총 부사수, 전차 33대 통과(09시)와 약 20명 사상, 포대 앞 전차 돌진, 에버솔과 전봇대, 페리의 항복 권고와 부상, 두 번째 무리와 스콧 중위, 포탄 300발 유폭, 10시 15분, 전과(파괴·정지 4대, 손상 3대), 11시 45분 보병 종대(제16·18연대), 12시 30분 B중대 소대 철수, 마틴 소령, 14시 30분 철수 순서, 버나드 소대, 중상자 25~30명과 이름 모를 의무 하사관, 애덤스 중위의 40야드 수류탄, 포대의 조준경·폐쇄기 회수, 오산 남쪽 전차 석 대와 담배, 동쪽 흙길과 낙오병 약 100명, 안성 도착, 7월 6일 천안 185명+65명, 버나드와 12명, 포병 미귀환(장교 5·사병 26), 북한군 손실 약 전사 42·부상 85, 노획 일기, 이학구 진술, 섀드릭 전사(7월 5일 16시 서정리). 2. Dynamics of Fire and Maneuver(FIRMA III) 최종보고서, 사례연구 11 「The Battle of Osan」(1969.8.15), thekwe.org — 진지 배치와 병사 평균 나이 스무 살 미만. 3. 양영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산전투」(2013 집필·2024.8.5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38313 — 08시 16분 첫 발, 11시쯤 제4사단 본격 공격, 무전 고장, 장비·화포 유기와 안성 철수, 대전차 포탄 6발, 150여 명 사망·26명 실종. 참고문헌 군사편찬연구소 『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2006), 국방군사연구소 『오산-대전전투』(1993). 4.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Osan」, en.wikipedia.org/wiki/Battle_of_Osan — 전후 재집계(전사 60·부상 21·포로 82, 포로 중 32명 사망), 크리치필드 상병이 앞쪽 곡사포 분대장, 전차 8대+25대+3대. 5. 박명호, 경기일보 「평택 주한미군기지 출입구에 첫 한국 군인 ‘성’ 딴 게이트 생긴다」(2020.6.21), kyeonggi.com/article/202006211129769 — 윤승국 육사 4기, 당시 대위, 연락장교로 포대 진지 배치, 철수작전. 6. Kim Gamel·Matthew Keeler, 성조지(Stars and Stripes)(2020.7.5) — 윤승국이 스미스 부대에 배속된 유일한 한국 군인. 7. AP, Deseret News 「U.S. vets honor those slain in first N. Korean attack」(2000.7.6) — 필립 데이·웨인 리치의 회고. 리치는 기사에 「열여덟 살 정비병」으로 나온다. 8. Military Times Hall of Valor, 올리 코너 소위 은성무공훈장(B중대, 1950.7.5, 1950.10.26 일반명령) — 검색 요약. 9. James Pocock, Military History 2006년 8월호 페리 인터뷰(historynet.com) — 전차병이 나오며 쏜 총에 오른 다리 부상, 「Captain Yoon」이 페리의 탈출로를 도움. 10. 경기일보(2024.6.27) — T-34 33대, 5천여 명. 11. 브라운 카운티 역사협회, 「Doyle Mills and the Battle of Osan」 발표 자료(browncountyhistory.org) — 1933년 1월 17일생, 쌍둥이 형제 호이트, 1950년 1월 의붓아버지 서명으로 입대, 중화기 보병, 도로를 내려다보는 언덕에서 전사, 인천상륙 뒤 유해 수습. 12. 권산, 경기일보 「오산 ‘유엔군 초전기념관’」(2022.4.28) — 전사 56·포로 89, 6시간 15분. 13. 김동우, 시대일보(2025.2.22) — 1955년 7월 5일 생존자들이 쌓은 540개의 돌 기념비, 181명 사상.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찰스 스미스 1916년 5월 7일생(영문 위키백과 「Charles Bradford Smith」, Appleman은 「서른넷쯤」), 도일 밀스 1933년 1월 17일생(브라운 카운티 역사협회 자료). 페리는 2005년 10월 인터뷰 때 98세라 1906년이나 1907년생으로 갈려 적지 않았다. 윤승국은 2020년 7월 「95세」로만 나와 적지 않았다. 웨인 리치의 열여덟 살은 기사의 서술을 그대로 옮겼다. 북한군 제4사단장 이권무는 영문 위키백과가 1914년생, Appleman이 1950년 8월에 「마흔 살」로 적어 갈리므로 본문에 넣지 않았다. 나머지 인물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전차 수: Appleman 33대(보병 진지를 지난 전차), 영문 위키백과·일부 국내 보도 36대(뒤에 온 보병 종대 앞의 3대 포함). 사상자: Appleman 보병 약 150명 사상·실종(7월 6일 집계)과 포병 31명 실종(7월 7일), 백과사전 150여 명 사망·26명 실종, 유엔군 초전기념관 계열 보도 전사 56·포로 89, 시대일보 181명, 전후 재집계 전사 60·부상 21·포로 82. 대전차고폭탄: Appleman 6발, 페리 인터뷰는 사단이 준 것이 10발쯤이라고 기억했다. 페리의 부상: Appleman은 소총탄, 페리 본인은 전차에서 나온 승무원의 총이라고 했다. 남은 중상자: 영문 위키백과는 들것 위에서 사살된 채 발견되었고 의무병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고 적지만, 미 육군 기사(army.mil 2010.7.8 Todd Fogle)는 21연대 의무중대 에즈라 버크가 철수 명령 뒤 들것 환자 곁에 남았다가 살아 나왔다고 전한다. 본문은 Appleman의 이름 모를 의무 하사관만 적었다. 북한군 손실 42·127명 사상은 Appleman이 「추정」으로 적은 수다. [재구성] 모든 대화(스미스 부인의 말, 짐칸 병사의 농담, 보병과 포병의 문답은 기록에 남은 말을 다듬은 것, 무반동총 사격 지시와 철수 명령의 문장, 통역의 항복 권고 문장, 애덤스와 병사의 대화, 버나드 소대 전령의 말), T-34 내부 장면과 전차병들의 대화, 필립 데이가 전차를 세다 그만두는 몸짓, 바스가 세 번 말하고 상자를 던지는 순서(기록은 「말이 통하지 않자 던졌다」까지다), 오산 남쪽 전차병의 시선과 몸짓, 의무 하사관의 몸짓, 윤승국이 지도를 품는 몸짓과 흙길을 고른 장면(기록은 그가 페리 포대의 탈출을 도왔다는 것까지다), 페리가 데려간 통역이 누구였는지(기록에 이름 없음), 도일 밀스가 전사한 시각(기록은 「도로를 내려다보는 언덕」까지만 적는다), 기념비의 돌 하나가 의무 하사관의 몫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소설적 재구성이다. 필립 데이·스미스·에버솔·리치의 말은 뒷날 회고를 의역했다. 「T-34 전차병이 상대가 미군인 줄 몰랐다」는 Appleman의 추정(북한군이 미군 투입을 알았는지 알 수 없다, 전차 지휘관은 국군 지연 진지로 여겼을 수 있다)을 장면으로 옮긴 것이다.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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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죽미령 전투 — 첫 전선이 무너지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