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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15,570자)

B-29 북한 폭격 — 도시는 밤에도 불탔다

1950 · 네오

B-29 북한 폭격, 1950년 7월~1952년 9월 — 오키나와 가데나와 일본 요코타의 폭격기 기지, 흥남·원산(1950.7~8 공장·정유시설), 나진(1950.8.12 레이더 폭격), 강계·신의주(1950.11 소이탄), 평양(1951.1 소이탄, 1952.7.11 공중압박 첫날), 남시 비행장(1951.10.23), 곽산 철교(1952.6.10), 신의주 동양경금속 공장(1952.7.30), 수풍 발전소(1952.9.12), 강계·만포의 토굴 마을(1951.5 조사단), 압록강 건너 안둥. 주민이 산과 농촌으로 흩어진 원산·남

1950년 7월 중순, 원산.

정유공장 쪽 하늘이 연기로 흐렸다. 노동자 하나가 지붕이 날아간 공장 마당에서 출근부를 들고 섰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밤마다 짐을 지고 산으로, 농촌 친척 집으로 빠져나갔다1. 북한 경찰인 내무서원 몇은 공습을 피해 안전지대로 모여든 시민들을 윽박질러 내쫓았다2.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보따리를 싸 놓고 있었다.

“교회로 가자. 목사님이 그러시더라. 미국 사람들은 예배당엔 폭탄을 안 떨군다고.”

“어머니, 미국 비행기가 그 높은 데서 십자가가 보이겠어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보따리 매듭을 한 번 더 조였다. 장터에서는 먹을거리 값이 두 배, 세 배로 뛰었다1. 장사꾼들은 물건을 내놓지 않았다. 7월 6일에 B-29 아홉 대가 원산 정유공장과 흥남(현 함흥시 흥남구역) 화학공장을 쳤고, 그 뒤로 원산 하늘에는 8일, 11일, 13일, 14일 비행기가 왔다3.

*

1950년 7월 17일, 평양, 소련대사관.

대사관 직원 V. 페투호프는 모스크바로 보낼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7월 7일 자 북한 신문 「민주조선」이 펼쳐져 있었다. 평양 전구공장 노동자 안성원의 말이 실려 있었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행복과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페투호프는 그 문장을 보고서에 옮겨 적고 다음 줄로 넘어갔다1.

“폭격당한 도시(평양, 원산, 남포, 함흥)의 주민들이 산이나 농촌으로 대거 떠나기 시작했다. 공습 첫날들, 남포와 원산의 몇몇 기업에는 노동자의 30~40퍼센트만 남았다.”

그는 펜을 멈추었다가 한 줄을 덧붙였다. 며칠 뒤에는 많은 노동자가 공장으로 돌아왔다1. 북한 노동당 기록은 같은 무렵 원산 자동차공장 출근율을 11.5퍼센트, 남포 제련소 출근율을 21퍼센트로 적었다2. 대사관의 숫자와 당의 숫자가 같지 않았다.

*

1950년 7월 말,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 천막촌, 미 공군 제22폭격전대.

천막 안은 한낮의 열기로 끓었다. 조종사 데이비드 C. 존스(29) 대위는 야전침대 위에 표적 서류철을 펼쳐 놓았다4. 흥남 조선질소화약 공장. 항공사진 옆에 공장 배치도가 붙어 있었다. 배치도의 선은 이 공장을 지은 일본 회사들이 그어 준 것이었다5. 일본은 다섯 해 전까지 이 땅의 공장 주인이었고, 이제는 그 공장을 부술 사람들에게 설계도를 건넸다.

“레이더로도 찍을 수 있겠습니까?”

레이더 담당이 사진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B-29 한 대에는 열한 명이 탔다5. 조종석 쪽 칸에 다섯, 폭탄창 뒤 칸에 무전병과 기총수들, 꼬리에 하나. 무전병은 전파방해 장비까지 맡았는데, 방해 장비 앞에 따로 의자가 없었다.

“제 자리는 화학 변기 뚜껑입니다. 적 레이더를 찾을 때마다 거기 앉습니다.”

“그럼 자네가 우리 비행기에서 제일 편한 자리군.”

천막에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가라앉자 정비 이야기가 나왔다. 열이 잘 빠지지 않는 엔진 덮개 때문에 B-29 엔진은 높이 오르는 동안 과열되어 멈추기 일쑤였고, 엔진 하나가 버티는 시간은 400시간 안팎이었다5. 이 비행기는 일본 도시들을 태우던 전쟁에서 막 돌아온 기종이었다. 그때는 「초장거리 중폭격기」였지만 이제는 중형 폭격기로 불렸다5. 다섯 해 사이에 하늘은 제트기의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배치도는 일본 회사가 그려 준 거고, 비행기는 지난 전쟁에서 온 거고.”

존스가 서류철을 덮었다.

“새것은 우리뿐이로군.”

7월 30일, B-29 마흔일곱 대가 그 공장 위로 날았다3. 레이더로 떨어뜨린 폭탄도 있었고, 눈으로 겨눈 폭탄도 있었다5.

*

1950년 8월, 폭격에 끊긴 송전선과 변전소.

지배인 장홍남은 근처 농민 3,000명쯤을 불러 모았다. 낮이고 밤이고 손을 놓지 않았다. 한 달 넘게 걸리던 변압기 수리가 엿새 만에 끝났다고 「로동신문」은 적었다2.

*

1950년 8월 12일, 일본 요코타 기지, 극동공군 폭격사령부.

그날 아침 사령관 에멧 오도널(44) 소장은 B-29 쉰 대 남짓을 나진(현 라선시 라진구역)으로 보냈다6. 나진은 기름 저장고와 열차를 나누고 잇는 철도 조차장이 있는 항구였고, 소련 국경에서 17마일 떨어져 있었다. 길을 조금만 잘못 들어도 폭격기는 소련 하늘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날 나진 위에는 구름이 덮여 있었고, 폭격기들은 레이더로 폭탄을 떨어뜨렸다. 보고서에는 550톤이 떨어졌고 결과는 관측하지 못했다고 적혔다7. 사진을 확인해 보니 폭탄 대부분은 표적을 벗어나 들판에서 터졌다5.

참모가 워싱턴의 항의를 들고 왔다.

“워싱턴에서는 나진을 육안 폭격으로만 치라고 미리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 전문은 받은 적이 없네.”

워싱턴이 보냈다는 경고는 끝내 오도널의 책상에 닿지 않았다5.

같은 날 워싱턴에서는 국무부 차관보 H. 프리먼 매슈스가 메모를 썼다. 소련 국경에 이렇게 가까운 폭격이 국경에서 멀찍이 떨어지라는 대통령 지시에 맞느냐는 물음이었다7.

오도널은 전쟁 전 미국의 장거리 폭격기 부대인 전략공군사령부의 폭격 계획서를 들고 일본에 왔다. 계획서에는 공업 도시를 불을 지르는 폭탄인 소이탄으로 태우는 안이 먼저 적혀 있었다5. 그 무렵 미군 최고 지휘 기구인 합동참모본부는 소이탄을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 국제 여론이 나빠질 위험이 너무 크다는 판단이었다5. 9월 1일, 합동참모본부는 나진 공격을 아예 금지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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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8일, 신의주 상공.

폭탄창 문이 열리자 찬 바람이 기체 안으로 몰아쳤다. 폭격수 하나가 조준기에 눈을 붙였다. 아래로 압록강이 보였고, 강 건너 안둥(현 랴오닝성 단둥) 비행장의 활주로가 보였다. 활주로 위에서 은빛 제트기들이 느긋하게 굴러가고 있었다5. 미그였다.

“강 건너는 절대 안 된다. 다리는 우리 쪽 끝만 친다.”

브리핑에서 들은 말이 헤드폰 속에서 다시 울렸다. 11월 초, 폭격사령부에 소이탄을 쓰라는 명령이 내려왔다5. 11월 5일에 B-29 스물한 대가 자강도 강계에 소이탄 170톤을 떨어뜨렸고, 사령부는 시 중심부의 65퍼센트가 없어졌다고 평가했다3.

이날은 B-29 일흔 대가 신의주 시가지에 소이탄 약 580톤을 떨어뜨렸다3. 다른 편대는 압록강 다리를 겨누었다. 불길이 시가지를 덮었다. 사령부는 표적 지역의 60퍼센트를 태웠다고 집계했다. 다리 두 개는 서 있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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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9일, 압록강 부근 상공, 제91전략정찰대대 RB-29.

꼬리 기총석의 해리 J. 러빈 상병은 사진 정찰기의 맨 뒤에 웅크리고 있었다. 정찰기에는 폭탄 대신 카메라가 실렸다. 뒤쪽 하늘에서 작은 점 하나가 빠르게 커졌다. 날개를 뒤로 젖힌 제트기였다.

“여섯 시 방향, 미그!”

미그는 23밀리와 37밀리 기관포를 단 전투기였다. 러빈은 다가오는 미그를 조준기 안에 붙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빛을 내며 날아가는 예광탄이 줄을 지어 날아갔다. 미그가 연기를 끌며 떨어져 나갔다. B-29 기총수가 제트기를 떨어뜨린 첫 기록이었다5. 그러나 정찰기도 크게 부서졌다. 일본까지 절뚝이며 돌아가 불시착하는 동안 승무원 다섯이 전사했다5. 그 뒤로 압록강 정찰은 제트 정찰기가 맡았다.

이튿날, 신의주 위쪽 의주를 치러 간 제307폭격전대의 B-29 한 대가 미그에 떨어졌다. 미그가 B-29를 떨어뜨린 첫 기록이었다3. 낙하산으로 내려간 승무원들은 포로가 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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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3일, 평양.

평양 사람들은 땅을 파고 들어가 살았다. 지난 11월에 정부는 「11월 말까지 적당한 곳에 토굴이나 움막을 지으라」고 지시했다2. 남은 벽돌과 탄 기둥을 끌어다 구덩이 위를 덮었다. 그날 B-29 예순 대 남짓이 평양에 소이탄 650톤을 떨어뜨렸다3. 같은 날 서울에서는 한국에 있던 미 지상군 주력인 미 제8군이 철수를 시작했다3. 남쪽 수도에서는 사람들이 피란 짐을 졌고, 북쪽 수도에는 불이 떨어졌다. 이틀 뒤, B-29 쉰아홉 대가 평양에 소이탄 672톤을 더 떨어뜨렸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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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16일, 신의주.

국제 여성 단체인 국제민주여성연맹의 조사단장 노라 로드(57)는 문화회관 옥상에서 신의주를 내려다보았다. 캐나다에서 온 평화운동가였다8. 서 있는 건물은 하나같이 금이 가 있었다. 그날 공습경보가 세 번 울렸다9.

북한의 시청 격인 시 인민위원회 사람이 숫자를 읽었다. 전쟁 전 주민 12만 6,000명. 11월 8일에 비행기 100대가 왔고, 집 1만 1,000여 채 가운데 6,800채가 탔으며, 5,000명 넘게 죽었다9. 큰 개신교 예배당 한 곳에서만 250명이 죽었다고 했다. 미군 기록에는 그날 B-29가 일흔 대였다3. 조사단은 시 인민위원회가 부른 숫자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9.

조사단 몇이 권문수의 움막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부부와 어린 세 아이가 사는 집이었다. 잠자는 칸은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였고, 부엌 칸이 따로 하나 있었다. 이웃들은 이 집을 부러워했다. 방이 넓었고, 이불이 한 채 있었다9.

며칠 뒤 평양에서 조사단은 무너진 여성동맹 건물 밑 토굴로 기어 내려갔다. 좁은 굴을 3미터 내려가자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짜리 방이 나왔다. 강복선의 가족 다섯이 거기 살았다9. 세 살배기와 여덟 달 된 아기도 있었다. 어른은 그 안에서 허리를 펴고 설 수 없었다.

조사단 일부는 북쪽 강계와 만포까지 올라갔다. 강계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처음에 예배당 안과 근처로 피했다는 말을 들었다. 미국 사람들이 예배당만은 남겨 둘 줄 알았다고 했다. 개신교 예배당 두 곳과 천주교 성당 한 곳이 모두 무너져 있었다9. 압록강 가 만포의 무너진 지하실에서 조사단은 열세 살쯤 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두 살배기를 포함한 어린 동생 둘을 돌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1950년 12월 7일 폭격 때 죽었고,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였다9. 지하실에는 불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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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0월 23일 오전, 남시 비행장(현 평안북도 염주군) 상공, 미 공군 제307폭격비행단.

토머스 L. 실즈 대위의 B-29는 셋째 편대 「찰리」의 선두였다10. 아침에 가데나에서 아홉 대가 떴다11. 하루 전 평안북도 태천의 비행장을 친 B-29 한 대가 미그에 맞아 떨어졌지만 승무원들은 낙하산으로 빠져나왔다. 같은 날 바다에 내려앉는 구조 비행정 두 대가 격추된 B-29의 승무원 열두 명을 모두 건졌다3. 출격 전 대기실에서 그 이야기가 돌았다.

“어제 그 친구들은 열두 명이 다 살아 돌아왔다더군.”

“바다까지만 가면 된다는 얘기지.” 남시는 미그 앨리 한가운데 새로 닦은 비행장이었다. 대공포가 먼저 터졌고, 이어 미그 떼가 호위 전투기들 사이로 쏟아졌다.

“3번 엔진 화재!”

기체가 크게 뒤집히듯 굴렀다. 실즈가 조종간을 끌어당겨 수평을 잡았다10. 폭격수 에밀 B. 골드벡 대위가 조준기에 다시 눈을 댔다. 폭탄이 떨어졌다. 날개 위 연료 탱크를 덮은 판이 뜯겨 나가 있었다.

“바로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기장님.”

“아직이다. 바다로 간다.”

바다에 떨어져야 구조대가 건질 수 있었다. 실즈는 불붙은 기체를 끌고 서해 쪽으로 날았다. 해안선을 넘어서자 그가 탈출 명령을 내렸다. 승무원들이 하나씩 해치로 몸을 던졌다. 마지막 사람이 뛰어내릴 때 실즈는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10. 그를 본 사람은 그 뒤로 없었다12.

열세 명 가운데 넷이 구조되었다13. 골드벡이 그 넷 가운데 하나였다13. 그날 남시에서 B-29 세 대가 떨어졌고 다섯 대가 부서졌다3. 그달 폭격사령부에서는 승무원 쉰다섯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5. 그 뒤 열한 달 동안 B-29는 낮에 북한 하늘에 뜨지 않았다3. 폭격기 배는 검게 칠해졌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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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봄, 밤, 평안남도 신안주(현 평안남도 안주시)와 평양 사이 철길.

해가 지자 철길 순찰원이 침목을 따라 걸었다. 낮에 끊긴 자리를 찾는 사람이었다. 패인 구덩이 앞에서 그가 손전등도 없이 쪼그려 앉았다.

“여기다. 흙 가져와.”

근처 마을 사람들이 삽과 광주리를 들고 나왔다. 아낙들이 흙을 이어 날라 구덩이를 메웠다. 어둠이 짙어지자 장비를 실은 군 수리반이 왔다. 침목을 갈고 레일을 박는 데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이 걸렸다. 열차는 자정에서 해 뜰 때까지만 그 길을 달렸다. 미 공군 정보 보고서는 이 일을 그렇게 적었다2. 낮에는 하늘이 북한 철길을 끊었고, 밤에는 사람들이 그 철길을 다시 이었다.

그해 1월 말부터 몇 주 동안 B-29와 B-26은 신안주에서 원산으로 넘어가는 철길이 골짜기를 지나는 와동(현 북한) 한 곳에 폭탄 1,000톤쯤을 쏟았다. 그 철길은 열이틀 동안 막혔고, 그 뒤 다시 뚫렸다5. 그 무렵 북한의 공장은 산속 굴로 들어갔고, 당 회의도 굴 안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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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6월 10일 밤, 평안북도 곽산 상공, 제19폭격전대.

달이 밝았다. 철교를 치러 간 B-29 편대가 곽산에 다가가자 땅에서 탐조등 기둥이 솟았다. 레이더가 이끄는 불빛이었다. 열한 대 가운데 열 대가 차례로 불빛에 걸렸다5. 기둥 하나가 폭격기 하나를 붙잡자 다른 기둥들이 같은 자리로 모였다. 불빛 한가운데에 걸린 기체는 대낮처럼 하얗게 드러났다.

“걸렸다! 불빛에 걸렸어!”

“흔들어! 빠져나가!”

어둠 속 어딘가에서 미그 열두 대쯤이 공중의 지휘기가 불러 주는 위치를 따라 다가왔다. 불빛에 걸린 B-29 하나가 기관포에 맞아 공중에서 터졌다. 또 하나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셋째는 구멍투성이가 되어 김포(현 김포국제공항)에 내려앉았다5. 그날 밤 편대의 어느 기체도 레이더를 속이는 은박을 싣지 않았다. 전파방해를 쓴 것은 맨 끝의 한 대뿐이었고, 그 한 대만 불빛에 걸리지 않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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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7월 11일, 평양 포도원 마을.

그날 극동공군은 하루에 1,329번 떴다3. 평양 안 서른 곳이 표적이었고, 북한 공업성 건물도 그 안에 있었다. 밤에는 B-29가 와서 유효 출격 일흔한 번 가운데 쉰 번 넘게 평양 보급지대를 쳤다3. 「로동신문」은 움막이 모여 있던 포도원 마을에서 움막도 사람도 사라졌다고 적었다2.

이틀 뒤부터 하늘에서 전단이 떨어졌다. 폭격할 도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움막 앞에서 전단을 주운 사람이 글자를 더듬어 읽었다.

“떠나라는데, 어디로 가라는 말은 없네.”

옆 움막에서 고개를 내민 이웃이 전단을 넘겨다보았다.

“이름 안 적힌 데로 가면 되지.”

“이름 안 적힌 데가 어디 남았나?”

두 사람은 한동안 전단만 내려다보았다. 전단을 접어 품에 넣은 사람은 움막 입구의 거적을 다시 내렸다.

7월 28일, 런던 상원에서 영국 국방장관 알렉산더(59)는 평양이 군 주둔 도시이자 병기창이라고 말했다14. 공격 전에 전단을 뿌려 주민에게 떠나라고 알렸다고 했다14. 미 공군 연표에는 표적 도시를 미리 적은 전단 계획이 7월 13일에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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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7월 30일 밤, 신의주 바깥, 동양경금속 공장 상공.

공장에서 압록강까지는 6킬로미터 남짓이었다3. 그날 밤 B-29 예순세 대가 그 공장 위로 날았다5. 폭격사령부 지휘관 와일리 D. 게이니 준장은 얇은 구름이 깔린 밤을 골랐다. 탐조등 불빛은 구름에 막혀 흐려졌고, 폭격기를 붙잡지 못했다. 폭격기들은 지상 전파 신호 두 줄이 만나는 자리에서 한꺼번에 폭탄을 놓았다. 전투기가 몇 번 덤볐지만 한 대도 떨어뜨리지 못했다. 다음 날 찍은 사진에서 공장의 90퍼센트가 사라져 있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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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9월 4일, 모스크바, 소련 정부가 있는 크렘린.

스탈린(72)이 물었다. 조선 인민의 기분은 어떠냐고. 김일성(38)은 좋다고 답했다15. 스탈린이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52)를 돌아보자 펑더화이도 좋다고 했다. 김일성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폭격만 빼면, 전체 형편은 좋습니다.”

김일성은 비행기를 쏘는 고사포가 모자란다고 했다. 고사포 다섯 개 연대를 청했지만 실제로는 열 개 연대가 필요하다고 했다15. 식량 이야기가 나오자 스탈린이 물었다.

“거기서는 밀도 먹소, 쌀만 먹소?”

“우리 인민은 밀가루를 좋아합니다.”

스탈린은 조선 인민이 전쟁에 지쳤지만 영웅적인 인민이라 불릴 만하다고 했다. 김일성은 공병과 통신 장비가 크게 모자라고, 자재가 없어 한 달 뒤면 122밀리 포탄 생산을 멈춰야 한다고 했다. 스탈린은 필요한 물자를 목록으로 내라고 했다15.

“목록은 다 만들어 왔습니다.”

스탈린은 조선에 비행사단을 세 개까지 꾸릴 물자를 대 주겠다고 했다. 김일성은 사람은 찾을 수 있다고 답했다15.

김일성은 운송 수단이 없다고, 자동차와 트랙터와 비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인민이 처한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면 정전 협정에 하루라도 빨리 서명하고 싶다고도 했다. 소련 측 기록관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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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9월 12일 밤, 수풍 발전소 상공.

B-29 승무원 하나가 폭탄창 옆에서 은박 띠 묶음을 해치 밖으로 밀어냈다. 폭격사령부가 처음 자기 손으로 뿌리는 레이더 교란용 은박이었다5. 발전소에 닿기 전, 경폭격기 B-26과 해군기가 낮게 내려가 탐조등을 쳤다. 서른 개쯤 가운데 여덟 개가 꺼졌다3. 동쪽 하늘에서는 B-29 네 대가 맴돌며 적 레이더에 전파를 퍼부었다3.

“탐조등, 열한 시 방향!”

남은 불빛 기둥들이 하늘을 더듬었다. 기둥 하나가 폭격기를 지나쳐 은박 뭉치에 매달렸다. 불빛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5. 승무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숨을 내쉬었다.

B-29 스물다섯 대가 발전기 건물에 2,000파운드 폭탄을 떨어뜨렸다3. 발전소는 다시 멈추었다. 미그 한 대가 제307폭격비행단의 B-29 한 대를 떨어뜨렸다3.

그 밤에도 압록강에서 평양까지, 도시마다 사람들은 땅 밑에 있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 불빛 기둥이 은박을 쫓는 동안 그들은 등잔을 끄고 다음 폭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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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5월 2일, 모스크바, 소련 각료회의 간부회.

결의안 한 장이 채택되었다. 소련 정부와 당 중앙위원회가 오도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미국이 세균무기를 썼다는 고발은 꾸며낸 것이었다는 내용이었다16.

그 고발은 북한이 먼저 꺼냈다. 외무상 박헌영은 1951년 5월 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전보를 보내 노획 문서와 천연두 환자 3,500명을 내세웠고, 이듬해 2월 22일에는 공식 성명을 냈다. 미군이 곤충과 병균을 뿌렸다는 주장이었다17. 소련의 결의는 1998년에야 세상에 공개되었다16. 그 문서의 진위와 고발의 진실을 두고 연구자들은 지금도 갈린다. 고발이 사실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있고, 문서를 손으로 베낀 사본이라 완전히 확인할 수는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16.

사료 출처

1. 주북 소련대사관(작성 페투호프), 「군사작전 기간 조선의 정치 상황」(평양 1950.7.17 서명, 7.18 발송, 모스크바 8.11 접수, AVPRF f.0102 op.6 p.21 d.47, Gary Goldberg 영역), NKIDP 『New Evidence on the Korean War』 문서 24, PDF 67~68쪽(자료모음 B04) — 평양 6.29·7.4, 남포 7.7~8, 원산 7.8·11·13·14 공습, 네 도시 주민의 산·농촌 피신, 30~40퍼센트, 노동자 복귀, 개신교 목사들이 교회는 폭격당하지 않는다며 피신을 권함, 식료품 두세 배, 안성원 발언(「민주조선」 1950.7.7). 2. 김태우, 「Overturned Time and Space: Drastic Changes in the Daily Lives of North Koreans during the Korean War」, 『Asian Journal of Peacebuilding』 2권 2호(2014), 241~262쪽, https://ipus.snu.ac.kr/eng/wp-content/uploads/sites/2/2017/11/07_Taewoo-Kim_DOI.pdf — 원산 내무서원의 시민 축출, 원산 자동차공장 출근율 11.5퍼센트·남포 제련소 21퍼센트(노동당 1950 문서), 1950년 11월 토굴·움막 지시, 장홍남 지배인과 농민 약 3,000명·변압기 수리 엿새(「로동신문」 1950), 포도원 움막 소멸(「로동신문」 1952), 철길 야간 복구(극동공군 정보 보고 1952: 해 질 녘 시작, 여섯~여덟 시간, 자정부터 해 뜰 때까지 운행, 순찰원과 주민의 구덩이 메우기). 3. A. Timothy Warnock, 「The USAF in Korea: A Chronology, 1950–1953」(2000), https://www.govinfo.gov/content/pkg/GOVPUB-D301-PURL-gpo111118/pdf/GOVPUB-D301-PURL-gpo111118.pdf (자료모음 B02) — 1950.7.6(9대, 원산 정유공장·흥남 화학공장), 7.30(47대), 8.12(40대 이상 나진), 11.5(21대·170톤·중심부 65퍼센트), 11.8(70대·약 580톤), 11.10(미그의 첫 B-29 격추·승무원 포로), 1951.1.3(60대 이상·650톤, 서울 철수 시작), 1.5(59대·672톤), 10.22(SA-16 두 대가 B-29 승무원 12명 구조), 10.23(B-29 3대 격추·5대 손상), 1952.6.10/11(곽산, 제19폭격전대 8대 중 2대 상실·1대 크게 손상), 7.30/31(60대, 압록강에서 4마일, 손실 없음), 1952.7.11(1,329회 출격, 평양 30개 표적, 공업성), 7.11/12(B-29 유효 71회 중 50회 이상 평양 보급지대), 7.13(표적 도시를 적은 경고 전단 계획 시작), 9.12/13(25대 발전기 건물, B-26·해군기의 탐조등 약 30개 중 8개 제압, B-29 4대 전파방해, 1대 격추), 1952.9.19(열한 달 만의 첫 주간 중폭격). 4. 미 합동참모본부, 역대 의장 소개(jcs.mil)와 영문 위키백과 「David C. Jones」 — 데이비드 C. 존스(1921년생)의 경력. 5. Air Force History and Museums Program, 「Steadfast and Courageous: FEAF Bomber Command and the Air War in Korea, 1950–1953」(2000), 인쇄 6~10·15~18·22~24·40~46쪽, https://www.govinfo.gov/content/pkg/GOVPUB-D301-PURL-gpo91435/pdf/GOVPUB-D301-PURL-gpo91435.pdf (자료모음 특집_B29_북한폭격/원문 B01) — B-29의 엔진 과열, 「초장거리 중폭격기」에서 중형 폭격기로, 오도널과 전략공군사령부 계획서의 소이탄 안, 제22폭격전대의 가데나 천막촌, 데이비드 C. 존스, 승무원 열한 명과 세 칸, 전파방해 담당의 자리가 화학 변기 뚜껑(6~10쪽), 일본 회사의 도움으로 만든 흥남 표적 서류철, 7.30 흥남 47대 레이더·육안 병행, 합동참모본부의 소이탄 금지와 국제 여론 우려, 8.12 나진 약 50대·육안 폭격 지시 미수령·레이더 폭격·폭탄 대부분 들판, 9.1 나진 금지(15~18쪽), 11.9 RB-29 꼬리 기총수 러빈의 미그 격추와 일본 불시착·다섯 명 사망, 미그의 23·37밀리 기관포, 11월 소이탄 명령, 11.5 강계, 11.8 신의주 70대, 다리는 한국 쪽 끝만·압록강 넘지 말 것, 활주로를 구르는 미그를 본 승무원, 신의주 표적 지역 60퍼센트 소실과 다리 두 개 잔존(22~24쪽), 10.23 남시, 실즈 대위, 그달 55명 사망·실종(40~41쪽), 1952.6.10 곽산(열한 대 출격·열 대 탐조등 포착·미그 최대 열두 대와 공중 지휘기·한 대 폭발·한 대 실종·한 대 김포 비상착륙·은박 미적재·열한째만 전파방해), 1952.1.26부터 와동 약 1,000톤·12일 차단, 7.30 동양경금속 63대·게이니의 얇은 구름 활용·쇼란 폭격·90퍼센트 파괴, 야간 전환, 기체 아래 검은 도장, 9.12 폭격사령부의 첫 은박 투하와 은박을 쫓는 탐조등, 수풍 공격(42~46쪽). 6. 미 공군, 에멧 오도널 공식 약력(af.mil) — 극동공군 폭격사령관, 1906년생. 7. 미 국무부,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제7권 문서 421(1950.8.12),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d421 — 매슈스 메모와 각주의 550톤·악천후 레이더 폭격·결과 미관측. 8. 영문 위키백과, 「Nora Rodd」 — 캐나다 평화운동가, 1893년생. 9.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단, 「We Accuse!」(1951.5), https://archive.org/download/we-accuse/We%20Accuse%21_text.pdf — 5.16 신의주 방문과 경보 세 번, 시 인민위원회 진술 수치, 권문수 가족의 움막과 이불, 평양 강복선 가족의 토굴, 강계 기독교인들의 예배당 피신과 교회 파괴, 만포 지하실의 열세 살쯤 된 소년(어머니 1950.12.7 폭격 사망, 아버지 철도 노동자). 공산권 여성단체의 조사 보고서로, 수치는 북한 당국이 조사단에 말한 것이다. 보고서가 적은 저공 기총소사 주장 등은 본문에 쓰지 않았다. 10. Home of Heroes, 미 공군 은성무공훈장 공적문 「Thomas L. Shields」, https://homeofheroes.com/recipient/thomas-l-shields/ — 제370폭격대대, 셋째 편대 선두, 3번 엔진 화재와 기체 회전 수습, 승무원 구조를 위해 해안으로 비행, 「승무원이 뛰어내릴 때 조종석에 있는 모습이 마지막」. 11. b29s.thekwe.org, 「Black Tuesday」 — 남시 아홉 대 출격, 실즈의 「찰리 리드」. 12. 미 전쟁기념물위원회(ABMC), 한국전쟁 명예 명부 — 실즈 시신 미수습, 1953.12.31 사망 추정. 13. Aviation Safety Network, 사고 기록 85051 — B-29A 44-70151, 13명 중 4명 구조, 폭격수 골드벡 구조. 14. 영국 상원 의사록(Hansard), 「Korea」(1952.7.28), vol.178 cc297–302, https://api.parliament.uk/historic-hansard/lords/1952/jul/28/korea — 알렉산더 국방장관의 평양 공격 설명과 사전 전단 주장. 15. 「스탈린·김일성·펑더화이 회담 기록」(모스크바 1952.9.4), 『CWIHP Bulletin』 14/15 문서 8, 인쇄 378~379쪽(자료모음 B05) — 「폭격만 빼면」 발언, 고사포 요청, 밀가루, 목록, 운송 수단, 빠른 정전 희망. 16. Milton Leitenberg, 「New Russian Evidence on the Korean War Biological Warfare Allegations」·CWIHP Working Paper 78(Wilson Center, 2016); Kathryn Weathersby·Milton Leitenberg, CWIHP Bulletin 11(1998) — 1953.5.2 소련 각료회의 간부회 결의(고발은 「fictitious」였고 소련 정부가 오도되었다). 엔디콧·해거먼(1998)은 고발이 사실이라고 보며, 베리야 문서의 진위에도 논란이 있다. 17. 영문 위키백과, 「Allegations of biological warfare in the Korean War」(박헌영 외무상의 1951.5.8 유엔 안보리 전보와 1952.2.22 성명을 Endicott & Hagerman 1998, Knightley 2000 등을 인용해 적은 대목, 재인용) — 북한의 주장이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존스 1921년생(jcs.mil), 오도널 1906년생(af.mil, 영문 위키백과. generals.dk는 1905년), 노라 로드 1893년생(영문 위키백과), 알렉산더 1891년생, 스탈린 1878년생, 김일성 1912년생, 펑더화이 1898년생. 실즈, 골드벡, 러빈, 게이니, 매슈스, 페투호프, 안성원, 장홍남, 권문수, 강복선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야간 전환 — 7화는 남시 뒤 B-29가 전쟁 끝까지 밤에만 날았다고 적었으나, B02는 1952.9.19 함흥 남서쪽 공격을 「열한 달 만의 첫 주간 중폭격」으로 적어 본문은 「열한 달 동안」으로 썼다. 남시 — B01은 실즈의 기체를 「선두기」, 공적문과 thekwe는 「셋째 편대 선두」로 적어 뒤의 것을 따랐다. B-29 손실은 B02 3대 격추·5대 손상, 7화가 쓴 McGill 집계는 아홉 대 중 여섯 대 미귀환. 실즈 기체가 떨어진 바다는 남포 서쪽(ABMC 계열)과 진남포·인천 앞바다(ASN)로 갈린다. 나진 — B02는 40대 이상, B01은 약 50대. 신의주 11.8 — 미 공군 70대·580톤, 신의주 시 인민위원회는 비행기 100대·사망 5,000명 이상. 사망자 수는 미국 측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다. 공습 초기 출근율 — 소련대사관 30~40퍼센트, 노동당 문서 11.5퍼센트·21퍼센트(공장이 다르다). 평양 전단 — 알렉산더는 사전 전단을 말했고, B02는 표적 도시를 적은 새 전단 계획이 7.13에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수풍 9.12 — B02 25대, B01 29대. 곽산 6.10 — B01은 열한 대 출격·두 대 상실·한 대 김포 착륙, B02는 제19폭격전대 여덟 대·두 대 상실·한 대 크게 손상. 동양경금속 7.30 — B01 63대, B02 60대. 만포 소년 — 김태우(2014)는 이 아이들을 강계에서 만났고 아버지가 10월 7일 폭격에 죽었다고 적었으나, 보고서 원문은 만포, 어머니 사망(1950.12.7),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로 적어 원문을 따랐다. 강계 폭격일 — 미 공군 연표는 1950.11.5 B-29 소이탄, 조사단 보고서는 1950.12.12 대폭격과 1951년 2월 시한폭탄을 적었다(서로 다른 날의 공격일 수 있다). 고사포 — 김일성은 「연대」, 스탈린은 「10개 사단분 물자」라고 했다고 번역에 나와 편제 단위가 섞여 있다. 본문은 김일성의 요청만 「연대」로 적었다. [재구성] 한국어 이름 권문수·강복선·장홍남·안성원은 영문 번역의 로마자(Kwon Mun-Su, Kang Bok-Sen, Jang Hong Nam, An Seongwon)를 한글로 옮긴 것이라 한자와 실제 표기는 확인하지 못했다. 모든 대화(존스와 레이더 담당·무전병, 원산 노동자와 어머니, 오도널과 참모, 폭격수의 헤드폰 속 지시, 실즈와 승무원, 철길 순찰원, 전단을 주운 사람, 수풍 상공의 승무원)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재구성이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화는 소련 기록의 영역을 줄여 옮겼다. 존스가 흥남 서류철을 본 장면, 원산 노동자와 그 어머니, 신의주 상공의 폭격수, 평양 토굴 주민, 철길 마을 사람들, 포도원의 전단 장면, 수풍 상공에서 은박을 뿌린 승무원은 이름 없는 인물로 둔 소설적 재구성이다. 페투호프가 신문을 펼쳐 둔 모습, 실즈가 「바다로 간다」고 말한 장면, 노라 로드가 옥상에서 내려다본 모습도 재구성이다(옥상 전망은 보고서 사진 설명에 따름). 러빈의 「여섯 시 방향」 외침, 존스가 서류철을 덮으며 한 말, 남시 출격 전 대기실 대화, 곽산 상공의 외침, 포도원 이웃과의 대화도 재구성이다. 「동양경금속」은 영문 기록 Oriental Light Metals Company를 옮긴 이름으로, 당시 한국어·일본어 회사명은 확인하지 못했다. 스탈린과의 대화 중 「목록은 다 만들어 왔습니다」는 기록의 「This list is made」를 옮긴 것이다. 원산 정유공장 쪽 연기, 오도널과 참모의 대화 장면은 B01의 「경고 전문 미수령」 서술 위에 쓴 재구성이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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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 북한 폭격 — 도시는 밤에도 불탔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