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15,719자)
한국전쟁 항공전 — 하늘을 차지한 자들
1950 · 네오
1950년 6월 27일 정오 무렵, 김포 상공 3,000미터.
윌리엄 허드슨 중위는 서른여덟 시간 가운데 열다섯 시간을 조종석에서 보냈다1. 일본 후쿠오카의 미 공군 이타즈케 기지(현 후쿠오카공항) 동료 하나가 그렇게 셈해 주었고, 허드슨은 셈을 듣고 나서 더 피곤해졌다. 그가 모는 F-82는 프로펠러 전투기 무스탕 두 대의 동체를 날개 하나로 이어 붙인 비행기였다. 왼쪽 동체에 허드슨이, 오른쪽 동체에 레이더를 맡은 칼 프레이저 중위가 앉았다2. 두 사람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으면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래 김포 비행장(현 김포국제공항) 활주로에는 날개에 별을 단 수송기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무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C-54들이었다. 트랩 앞에는 가방을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대사관 직원, 선교사, 고문단 가족, 아이를 안은 여자. 서울 북쪽에서는 아침부터 포성이 끊이지 않았다.
“북쪽, 열한 시 방향. 다섯 대.”
프레이저의 목소리가 헤드폰을 긁었다. 허드슨은 고개를 돌렸다. 한강 너머에서 작은 점 다섯 개가 고도를 낮추며 김포 쪽으로 미끄러져 왔다3. 동체에 붉은 별을 그린 북한 공군의 프로펠러기였다. 수송기들은 아직 땅 위에 있었다.
편대장 제임스 리틀 소령이 먼저 쏘았다1. 허드슨은 기수를 틀어 한 대의 꼬리에 붙었다. 상대는 왼쪽으로 꺾었고 허드슨도 따라 꺾었다. 두 동체가 한꺼번에 기울며 어깨가 좌석에 짓눌렸다. 기관총 여섯 정이 한 번에 울었다. 상대 비행기의 꼬리날개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조종사가 날개 위로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카메라!”
허드슨이 외쳤다. 프레이저는 무릎에 얹어 둔 35밀리 사진기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셔터가 반쯤 걸렸다가 철컥 하고 넘어갔다. 고장 난 사진기였다4.
“찍었나?”
“찍긴 찍었는데, 현상해 보면 구름 사진일 겁니다.”
몇 분 사이에 허드슨, 리틀, 찰스 모런 중위가 한 대씩 떨어뜨렸다1. 남은 두 대는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날 오후 같은 하늘에 소련제 공격기 Il-10 여덟 대가 다시 왔고, 이번에는 제35전투폭격비행대대의 F-80 제트기 네 대가 네 대를 떨어뜨렸다1. 그날 밤 자정 무렵 공수 철수가 끝났을 때 748명이 일본 땅을 밟았다1. 수송기는 한 대도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한국전쟁의 첫 공중전 승리를 거두었느냐를 두고 조종사들의 증언은 엇갈렸다. 미 제5공군은 1953년에야 증언을 다시 맞춰 보고 허드슨의 이름을 공식 기록에 올렸다1. 프레이저의 흐린 사진은 그 뒤로도 오래 남았다.
*
1950년 7월 3일 오후, 평택과 수원 사이 상공, 호주 공군 제77비행대대.
루 스펜스(33) 중령은 아래 도로를 오래 내려다보았다5. 일본 이와쿠니에서 날아온 F-51 무스탕 편대에 떨어진 표적은 평택과 수원 사이 도로와 철길을 오가는 북한군 수송대였다. 그런데 아래 행렬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6.
“관제소, 표적 재확인 바란다. 아군일 가능성이 있다.”
잡음 뒤에 대답이 돌아왔다6. 표적 맞다. 공격하라.
스펜스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기수를 내렸다. 기관총이 길과 철길을 훑었다. 행렬 위의 사람들이 흩어졌다.
며칠 뒤 대대는 그 행렬이 국군과 미군이었다는 보고를 받았다7. 그날 오후 평택과 수원 사이 도로에서 국군 제17연대가 비행기의 기관총 사격인 기총소사와 폭격을 맞았다. 연대장을 포함해 사상자가 스물다섯 명이었다는 보고가 미국 정보기관 문서에 남았다8. 극동공군 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60) 중장은 공개 성명으로 호주 대대에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6. 대대 조종사 하나는 뒷날 그 일을 「끔찍한 경험」이라고만 적었다7.
나흘 뒤인 7월 7일, 삼척 앞 동해안 철길을 공격하던 그레이엄 스트라우트(29) 소령의 무스탕이 땅에 꽂혔다9. 호주 공군이 한국에서 잃은 첫 조종사였다. 스펜스는 9월 9일 경북 안강(현 경주시 안강읍) 부근에서 낮은 구름 아래로 급강하했다가 기수를 끝내 들어 올리지 못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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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4일 저녁, 대구 비행장(현 대구국제공항).
장성환(30) 중령은 활주로 끝에 서서 남쪽 하늘이 아니라 북쪽 하늘을 보았다. 아침에 나간 무스탕들이 돌아올 방향이었다.
열흘 전만 해도 대한민국 공군에는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다11. 개전하던 날 국군 조종사들은 T-6 훈련기와 L형 연락기를 몰고 나갔다. 연락기에는 폭탄걸이가 없어서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폭탄을 품에 안고 있다가 표적 위에서 손으로 던졌다12. 6월 26일, 조종사 열 명이 일본 이타즈케 기지로 건너갔다13. 미군은 F-51 열 대를 내주었다. 비가 오고 정비가 밀려서 훈련은 나흘뿐이었다. 한 사람이 실제로 몰아 본 시간은 이십 분에서 삼십 분이었다13.
“이십 분이면 뭘 배웁니까?”
이타즈케에서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비행단장 이근석 대령이 대답했다.
“이륙은 배웠잖나. 나머지는 가서 배운다.”
7월 2일, 열 대가 한국과 일본 사이 바다 현해탄을 건너 대구에 내렸다13. 7월 3일 첫 출격에서 장성환은 노량진(현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부근의 북한군 전차와 차량을 쏘고 돌아왔다. 7월 4일 아침, 이근석은 편대를 이끌고 시흥(현 서울 금천구·안양시 일대)과 안양 쪽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전차를 치러 나갔다14.
해가 기울 무렵 무스탕들이 하나씩 돌아왔다. 장성환은 내려앉는 기체마다 꼬리 번호를 읽었다. 한 대가 모자랐다. 먼저 내린 조종사가 철모를 벗지도 않은 채 그에게 걸어왔다.
“단장님이 안양 상공에서 맞으셨습니다. 대공포였습니다.”
“그래서?”
“불붙은 채로 내려가셨습니다. 전차 쪽으로.”
장성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활주로 위로 프로펠러 바람이 지나가고, 정비병들이 돌아온 기체에 사다리를 걸었다. 그는 비행기를 세워 두는 주기장의 빈 한 칸을 오래 바라보다가 정비 일지를 받아 들고 내일 뜰 수 있는 기체 수를 셌다.
국방부는 이근석이 대공포에 맞은 기체로 적 전차에 돌진해 전사했다고 기록했다15. 함께 비행단을 꾸린 미 공군 고문 딘 헤스 소령은 회고록에서 다른 장면을 남겼다. 저공으로 급강하한 기체가 다시 오르지 못하고 떨어졌고, 그토록 능숙한 조종사가 그렇게 희생되었다고 그는 적었다16. 1951년 9월, 이근석은 공군 최초로 가장 높은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준장으로 추서되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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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7일, 신의주 남쪽 상공, 미 공군 제4전투요격비행단 제336대대.
브루스 힌턴(31) 중령은 일부러 느리게 날았다. 11월부터 압록강 위에 날개를 뒤로 젖힌 소련제 제트기 미그가 나타났다. 미그는 직선 날개의 F-80을 보면 강을 건너와 덤볐고, 낡은 미군 제트기들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힌턴의 새 제트기 F-86 세이버 네 대는 그날 F-80의 고도와 F-80의 속도로 날았다. 무전 호출부호도 F-80 편대의 것을 빌렸다17.
“미끼치고는 비싼 미끼군요.”
2번기가 무전으로 말했다. 힌턴은 대답 대신 북쪽을 보았다. 압록강 쪽에서 은빛 점 네 개가 내려오고 있었다. 미그 편대가 F-80 편대라고 믿고 다가오는 거리였다.
“스로틀 끝까지. 지금.”
세이버 네 대가 한꺼번에 속도를 올렸다. 미그 조종사들이 상대를 알아챈 것은 거리가 이미 좁혀진 뒤였다. 힌턴은 한 대의 꼬리에 붙어 기관총을 길게 쏘았다. 미그의 동체에서 불이 번졌다. 불덩이가 된 미그가 구름 아래로 떨어졌다. 세이버가 미그를 떨어뜨린 첫 기록이었다17. 그날부터 압록강 남쪽 하늘에서는 같은 속도로 나는 제트기끼리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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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12일 오전, 압록강 건너 중국 도시 안둥(현 랴오닝성 단둥)의 비행장, 소련 제324전투비행사단 지휘소.
이반 코제두프(30) 대령은 무전기 앞에 앉아 있었다. 독일과 싸운 전쟁에서 적기 예순두 대를 떨어뜨린 사람이었고, 연합군 조종사 가운데 그보다 많이 떨어뜨린 사람은 없었다18. 그런 그가 이 전쟁에서는 비행기에 오를 수 없었다. 모스크바가 그를 땅에 묶어 두었다19. 사단 조종사들은 한국전쟁에 들어온 중국군인 인민지원군의 군복을 입었고, 기체에는 중국군과 북한군 표지를 달았다19. 자기들이 이곳에 없다는 것이 이들의 첫째 임무였다.
“적 대형 폭격기 편대, 신의주 방향. 수십 대.”
압록강 철교를 노린 대형 폭격기 B-29 편대였다. 연대장 예브게니 페펠랴예프(32) 중령의 미그들이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무전기에서 잡음 섞인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처음 몇 마디는 서툰 한국어였다. 조종사들은 러시아 글자인 키릴 문자로 한국어 구령을 적은 판을 무릎에 붙이고 다녔다19. 왼쪽, 오른쪽, 공격, 엄호.
“…왼쪼… 왼쪽…, 아, 젠장, 뒤에 붙었어! 뒤에!”
세 번째 구령부터는 러시아어였다. 지휘소의 참모 하나가 수화기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사단장 동지, 저 구령판은 어떻게 할까요?”
코제두프는 무전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속 900킬로미터로 돌면서 판 읽을 수 있는 놈한테 상을 주게.”
그 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첫 전투들을 치르고 나서 지킬 수 없다는 판정이 나왔다19.
그날 미그 편대는 B-29 열 대를 떨어뜨렸다고 보고했고 잃은 미그는 없다고 했다20. 미국 측 기록에는 B-29 세 대가 격추되고 여러 대가 부서졌다고 남았다. 어느 쪽 숫자를 믿든 미 극동공군은 그 뒤 석 달 가까이 압록강 쪽으로 대형 폭격 편대를 보내지 않았다. 10월 23일 평안북도 남시(현 평안북도 염주군)의 비행장을 치러 간 B-29 아홉 대 가운데 여섯 대가 돌아오지 못하자 B-29는 그 뒤로 낮에 북한 하늘에 뜨지 못했다21. 열한 달 동안 그들은 밤에만 날았다22.
신의주에서 수풍댐, 자강도 희천, 청천강 하구를 잇는 삼각형. 미군 조종사들은 그곳을 미그 앨리라고 불렀다1. 미그는 압록강 북쪽 비행장에서 떠올라 강을 건너왔다가 불리하면 강 북쪽으로 돌아갔다. 유엔군 조종사는 만주(현 중국 동북 지방) 하늘로 쫓아 들어갈 수 없었다. 미군은 압록강 5킬로미터 남쪽에 금을 긋고 그 너머로는 특별 허가 없이 날지 못하게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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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9월 27일, 북한 철길 상공, 남아프리카 공군 제2비행대대.
데니스 어프(20) 중위의 무스탕은 둥근 날개 표지 한가운데 뛰어오르는 스프링복 영양을 그렸다. 대대는 미 공군 제18전투폭격비행단의 네 대대 가운데 하나였고, 진해 비행장(현 창원시 진해구)에서 떠서 북한의 철길을 끊었다23. 미군은 그 작전에 「교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프는 철길을 따라 저공으로 내려갔다. 둑 양쪽에서 대공포가 불을 뿜었다. 기체가 덜컹 흔들렸다. 계기판 냉각수 온도 바늘이 오르기 시작했다. 엔진 덮개 틈으로 흰 김이 새어 나왔다24.
“냉각수가 샌다. 남쪽으로 간다.”
남쪽까지는 멀었다. 엔진이 기침을 하더니 멈췄다. 어프는 조종석 덮개 캐노피를 젖히고 뛰어내렸다. 그가 다시 남쪽 땅을 밟은 것은 스물세 달 뒤, 포로 교환으로 돌아온 1953년 9월이었다25. 남아공 대대는 전쟁 동안 무스탕 아흔네 대 가운데 일흔네 대를 잃었다23.
그날 밤 어프가 끊으려던 철길 위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일했다. 낮에 폭탄이 떨어진 자리마다 횃불이 켜졌다. 철도병과 동원된 주민들이 흙을 지고 와서 구덩이를 메우고, 숨겨 둔 침목과 레일을 끌고 나왔다. 끊긴 철로는 여섯 시간이면 다시 이어졌다26. 다리는 이틀에서 나흘이 걸렸다. 다음 날 아침 정찰기가 찍은 사진 속에서 철길은 멀쩡했다. 북한은 철길을 지키려고 대공포를 철도변으로 옮겼다. 1952년 6월에는 북한 대공포의 절반이 철길 옆에 있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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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2월 1일 오전, 평안남도 순천 상공, 호주 공군 제77비행대대.
호주 대대는 무스탕을 내려놓고 영국제 쌍발 제트기 글로스터 미티어를 받았다. 날개가 곧게 뻗은 비행기였다. 8월 29일 처음 미그와 맞붙은 날, 미티어 여덟 대 가운데 한 대가 떨어졌다. 조종사 로널드 거스리 준위는 탈출해 포로가 되었다27.
그날 순천 상공에 나간 미티어는 열네 대였다. 편대 끝자리의 조종사 하나가 북쪽을 보다가 숨을 멈췄다. 하늘 한쪽이 은빛 점으로 덮여 있었다. 오십 대 가까운 미그였다28.
“브레이크! 브레이크! 오른쪽으로 꺾어!”
미그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듯 내려와 쏘고 다시 솟구쳤다. 미티어는 미그만큼 높이 오르지 못했고 미그만큼 빨리 돌지 못했다. 어니스트 아밋 상사의 미티어가 연기를 끌며 사라졌다. 밴스 드러먼드 중사와 브루스 톰슨 중사의 기체도 떨어졌다. 두 사람은 낙하산으로 내려와 포로가 되었고, 아밋은 돌아오지 않았다28.
대대는 그날 미그 한 대를 떨어뜨렸다고 보고했다. 미티어가 거둔 첫 공중전 승리였다. 소련 측은 미티어 아홉 대를 떨어뜨렸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쪽 기록은 미그가 모두 돌아왔다고 적었다28. 이튿날부터 호주 대대는 미그 앨리 소탕 임무에서 빠졌다7. 미티어는 그 뒤 비행장을 지키고 땅 위의 표적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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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월 15일 아침, 강릉 비행장(현 강릉 공군기지), 국군 공군 제1전투비행단.
김신(28) 대령은 지도에 그려진 승호리(현 평양시 승호구역) 철교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평양 동쪽에서 대동강 지류를 건너는 철교였다. 유엔 공군이 500번 넘게 출격하고도 끊지 못한 다리였다29.
사흘 전 1월 12일 오전, 김두만 대위의 F-51 다섯 대가 그 다리로 갔다. 미 공군 교범대로 높은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렸다. 폭탄은 강물에 떨어졌다. 오후에 윤응렬 대위의 세 대가 다시 갔다. 결과는 같았다29.
“높이 떠서 떨어뜨리면 바람이 다 가져갑니다.”
윤응렬이 말했다. 김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람이 못 가져가는 높이로 내려간다.”
“대공포가 다리 양쪽에 있습니다.”
“알아. 그래서 빨리 내려갔다 빨리 올라온다.”
1편대는 옥만호가, 2편대는 윤응렬이 이끌었다29. 여섯 대가 산등성이를 타고 낮게 날아 다리 앞에서 기수를 들었다가 내리꽂았다. 다리 교각이 조종석 유리를 가득 채울 때 폭탄이 떨어졌다. 무스탕들이 다리 위를 스쳐 지나가자 등 뒤에서 물기둥과 흙기둥이 함께 솟았다. 돌아와 받아 본 정찰 사진에는 철교 가운데 교각과 교각 사이 경간 두 개가 강물 속에 내려앉아 있었다29.
그 승리로 전쟁의 판이 바뀌지는 않았다. 미 공군의 공식 전사는 철도 차단이 내건 목표, 곧 적이 큰 공세를 오래 끌지 못하게 하는 일은 이루었지만 공산군 전선을 북쪽으로 물러나게 하지는 못했다고 적었다1. 밤과 궂은 날씨에 움직이는 표적을 찾아낼 장비가 없었고, 상대는 부지런했으며 쓸 보급량을 스스로 줄였다1. 「교살」은 이름만큼 목을 조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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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10일, 평안북도 박천 상공, 중국 인민지원군 공군 제4사단.
장지후이(23)는 앞에서 F-86 두 대가 MiG-15 편대를 파고드는 것을 보았다. 앞선 세이버가 미그 한 대를 불태우고 곧바로 다음 미그를 쫓았다. 장지후이는 그 세이버의 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사격 버튼을 누르자 미그의 기관포들이 한꺼번에 울었다. 세이버가 기울며 산 쪽으로 떨어졌다.
몇 분 뒤 장지후이의 미그도 맞았다. 그는 낙하산을 펴고 눈 덮인 산비탈로 내려왔다.
엿새 뒤, 조사단이 박천군 청룡면 삼광리(현 북한 평안북도 박천군) 산골짜기에서 세이버 잔해를 찾았다30. 장지후이가 내려앉은 자리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30. 잔해 곁에 조종사의 시신이 있었다. 신분증에는 조지 데이비스 2세(30) 소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데이비스는 적기를 다섯 대 넘게 떨어뜨린 미 공군 제4전투요격비행단의 에이스였다. 미국 기록은 그가 신의주와 압록강 부근에서 떨어졌다고 적었다31. 그날 전폭기 F-84 편대를 노리는 미그 열두 대에 뛰어들어 두 대를 떨어뜨리고 세 번째를 쫓다가 격추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일한 미군 에이스였고 사후에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았다31. 중국은 장지후이에게 1급 전투영웅 칭호를 주었다30. 장지후이의 미그에는 사격 장면을 찍는 필름이 없었다32. 40년쯤 지나 공개된 러시아 쪽 기록에는 같은 날 데이비스를 떨어뜨렸다고 보고한 소련 조종사의 이름이 따로 있었다32. 하늘에서 한 사람이 전사했고, 그 죽음을 자기 것이라고 적은 보고서는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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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5월 14일 아침, 평양 북쪽 덕산 저수지 상공, 미 공군 정찰기.
사진 판독병은 전날 오후의 사진과 오늘 아침의 사진을 나란히 놓았다. 전날 오후 F-84 쉰아홉 대가 네 차례에 걸쳐 덕산 저수지 둑에 폭탄을 떨어뜨렸다33. 폭 2,400피트, 700미터가 넘는 둑이었다33. 공격이 끝났을 때 둑은 버티고 있었다.
오늘 아침 사진에는 둑이 없었다. 밤사이 터진 물이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 철도 다리 다섯 개와 남북을 잇는 큰길 3킬로미터 남짓, 순안 비행장(현 순안국제비행장)을 덮었다33. 사흘 뒤 F-84들은 자산 저수지 둑으로 갔다34.
극동공군 사령관 웨일랜드는 뒷날 두 댐을 무너뜨린 일이 공산군을 휴전 회담에 진지하게 나서게 했다고 평했다34. 물에 잠긴 논에서 그해 모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수는 어느 기록에도 정확히 남지 않았다. 닷새 뒤인 5월 18일, 조지프 매코널(28) 대위가 하루에 미그 세 대를 떨어뜨려 열여섯 대를 채웠다35. 미군 제트기 조종사 가운데 가장 많은 수였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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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낮, 압록강 가 고을 중강진(현 자강도 중강군) 부근 상공.
랠프 파 대위의 F-86은 호위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33. 그날 밤 열 시에 휴전이 발효된다는 것을 조종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37. 제5공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압박을 늦추지 말라고 지시했다33.
아래 구름 사이로 프로펠러 두 개짜리 수송기 하나가 보였다. Il-12였다. 파는 한 번 길게 쏘았다. 수송기가 산 쪽으로 기울었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공중전이었다33. 소련은 그 비행기가 중국 랴오둥반도 끝 항구 뤼순(현 다롄시 뤼순커우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자국 수송기였고 스물한 명이 죽었다고 항의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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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강릉 비행장, 국군 공군 F-51 조종사 이배선.
이배선은 그날 이른 아침 아흔 번째 출격을 했다39. 고성 북쪽 351고지에 매달린 국군 보병을 엄호하는 임무였다. 아흔한 번째 출격의 표적은 몇 달 전 동료가 대공포에 맞아 숨진 곳 근처였다. 그는 그 산을 지나며 고도를 조금 낮췄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흔두 번째로 떴다39. 착륙하고 엔진을 끄자 정비병이 날개 위로 올라와 말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랍니다.”
“오늘만?”
“아뇨. 전부요.”
밤 아홉 시 반이 조금 넘어 미 제3폭격비행단의 폭격기 B-26 한 대가 휴전 발효 이십사 분 전에 이 전쟁의 마지막 폭탄을 떨어뜨렸다33. 그리고 밤 열 시가 되었다.
강릉 비행장 활주로에는 무스탕들이 날개를 맞대고 서 있었다. 그날 밤 시동을 거는 기체는 하나도 없었다. 정비병 몇이 담배를 나눠 피우며 북쪽 산을 보았다. 산 너머에서 포성이 들리지 않았다. 사흘 전에도, 열흘 전에도, 석 달 전에도 들리던 소리였다.
한국전쟁 3년 동안 유엔군 항공기는 104만 번 넘게 떴다1. 세이버 조종사들은 미그 792대를 떨어뜨렸고 세이버는 78대를 잃었다고 보고했다1. 뒷날 소련 측 기록과 맞춰 본 연구자들은 실제 비율을 그보다 훨씬 좁게 잡았다. 소련 제64전투비행군단은 1,000대 넘게 떨어뜨렸다고 주장했고 335대를 잃었다고 적었다40. 중국 인민지원군 공군은 330대를 떨어뜨렸다고 발표했다41. 대한민국 공군의 F-51은 휴전까지 8,267번 유효 출격을 했다11. 열 대로 시작한 공군이었다.
이근석이 대구를 떠난 지 3년 23일째 되는 밤이었다.
사료 출처
1. Robert F. Futrell,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개정판(미 공군 역사실, 1983), 12–13·66·438·510·689–695·700–703쪽, https://www.govinfo.gov/content/pkg/GOVPUB-D301-PURL-gpo93546/pdf/GOVPUB-D301-PURL-gpo93546.pdf (자료모음 문서/AS01 원본 PDF) — 1950.6.27 이타즈케 출발, 정오 무렵 Yak 다섯 대·3,000미터(10,000피트), 허드슨·리틀·모런 각 1대, 1953년 제5공군이 허드슨을 첫 승리로 공식 확정, 오후 Il-10 여덟 대 중 네 대를 F-80C가 격추, 자정 직전까지 748명 공수, 조종사 한 명이 서른여덟 시간 중 열다섯 시간 비행(12–13쪽), 남아공 F-51 사진(66쪽), 철도 차단 구역 지도(438쪽), 미그 작전 구역 지도(510쪽), 총 출격 1,040,708회, 압록강 남쪽 3마일의 「인공 반칙선」, 세이버 조종사 미그 792대 격추 주장, 공대공 손실 139대 중 세이버 78대(689–695쪽), 철도 차단이 「교살」이라는 이름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와 그 이유(700–703쪽). 2. AFHistory.org, 「June 27, 1950」 — 허드슨·프레이저, Yak-11. 3.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Kimpo Airfield」 — F-82 다섯 대, 정오 무렵, 오후 F-80 격추자 Schillereff·Wayne·Dewald. 4. 미 국립공군박물관, 「First Aerial Victories」 — 프레이저의 고장 난 사진기(검색 요약). 5.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스펜스 항목 — 루 스펜스의 생애(1917년생). 6. 영문 위키백과, 「No. 77 Squadron RAAF」 — 스펜스의 의심, 관제의 표적 확인, 스트레이트마이어 성명. 7. 호주 전쟁기념관(AWM), 제77비행대대 부대사, https://www.awm.gov.au/unit/U59415/ — 7.2 첫 출격, 7.3 평택–수원 오폭과 「끔찍한 경험」, 대대 책임 없음, 1951.12.2부터 소탕 임무 제외. 8. 미 CIA, 1950년 보고, https://www.cia.gov/readingroom/node/1576779 — 7.3 14시 40분~15시 평택–수원 도로 공격, 국군 제17연대 사상자 25명, 연대장 포함. 9. 호주 전쟁기념관(AWM), 인물 기록 P10318122 — 스트라우트 1950.7.7 전사, 삼척 동해안 철도 공격. 10. 호주 공군(RAAF), 「Commanding Officer No. 77 Squadron killed in action」 — 스펜스의 전사. 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군」(E0004236) — 개전 시 전투기 0대, 손으로 폭탄을 던진 지원, 1951.9.28 강릉 전진, 휴전까지 8,267회 유효출격. 12. 세계일보, 2025.4.4 — 연락기 뒷좌석에서 손으로 폭탄을 던진 방식. 13. 국방부, 보도자료(2010.7.1), korea.kr newsId 155566863 — 6.26 조종사 10명 이타즈케 파견, 훈련 4일·1인당 20~30분, 7.2 대구 도착, 7.3 첫 출격. 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근석」(E0043817) — 이근석 편대의 7.4 시흥·안양 방면 전차 공격. 15. 국방일보, 2026.7.5 — 이근석 전사 경위, 7.4 시흥·안양 방면 전차 공격, 1951년 9월 태극무공훈장·준장 추서. 16. 주간경향, 2014.6.24 — 이근석 전사 장소 시흥 상공, 조작 실패설과 자폭설. 17. 미 국립공군박물관, 「North American F-86A Sabre」 — 1950.12.17, F-86 네 대가 F-80의 고도·속도·호출부호를 써서 미그 네 대를 유인, 한 대 격추(검색 요약). 18. 영문 위키백과, 「Ivan Kozhedub」 — 제2차 세계대전 62대, 연합군 최다, 제324전투비행사단장. 19. Steven Zaloga, 「The Russians in MiG Alley」, Air Force Magazine(1991.2) — 코제두프 출격 금지, 키릴 문자 한국어 구령판, 중국군 제복·표지. 20. 러시아어 위키백과, 「Чёрный четверг (1951)」 — 1951.4.12 소련 측 B-29 10대 주장, 미국 측 3대 격추. 21. Earl McGill, 「Black Tuesday Over Namsi」 — 1951.10.23 B-29 9대 중 6대 미귀환. 22. thekwe.org, 「Black Tuesday」 — 이후 B-29 야간 작전만. 23. 남아공 공군, 「Korea」, https://www.saairforce.co.za/the-airforce/history/saaf/korea — 미 제18전투폭격비행단 소속, 진해 K-10, 무스탕 94대 중 74대 손실. 24. Korean War Legacy Project, 데니스 어프 인터뷰 — 1951.9.27 대공포에 냉각수 누출·탈출. 25. 영문 위키백과, 「Denis Earp」 — 23개월 포로. 26. 영문 위키백과, 「Operation Strangle (Korean War)」(Futrell 471–474쪽 인용) — 1951년 12월 무렵 철로 여섯 시간, 다리 이틀~나흘 복구, 1952년 6월 대공포 절반 철도변 배치. 27. 호주 전쟁기념관(AWM), Wartime 86호 「Article five」, https://www.awm.gov.au/wartime/86/Article-five — 1951.8.29 미티어 여덟 대 중 한 대 손실, 거스리 포로. 28.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Sunchon (air)」 — 1951.12.1 미티어 14대 대 미그 최대 50대, 아밋·드러먼드·톰슨, 소련 측 9대 주장, 러시아 기록상 미그 전원 귀환. 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승호리철교폭파작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286 — 김신 대령, 500회 넘는 유엔 공군 출격 실패, 1.12 오전 김두만 편대 5대·오후 윤응렬 3대 실패, 1.15 2개 편대 6대가 중앙 경간 2개 절단. 편대 명단(1편대 옥만호, 2편대 윤응렬)은 검색 요약 단계. 30. 중국군망(81.cn), 「抗美援朝英烈谱丨一级英雄张积慧」, http://www.81.cn/yl_208589/9905997.html — 1952.2.10, 2.16·2.18 조사, 삼광리, 500미터, 1급 전투영웅. 31. 영문 위키백과, 「George Andrew Davis Jr.」 — 데이비스의 전사와 명예훈장. 32. Raymond Cheung, 「Who Shot Down Major Davis」, Aviation History(2017.3) — 필름 없음, 소련 조종사의 경쟁 주장. 33. Air & Space Forces Magazine, 「The Remembered War」(2003.7), https://www.airandspaceforces.com/article/0703korea/ — 5.13 덕산 댐 F-84 59대·네 차례, 폭 2,400피트, 철도 다리 다섯 개·주도로 2마일·순안 비행장, 7.27 정오 직후 파 대위의 Il-12 격추, 마지막 공중전, 발효 24분 전 B-26의 마지막 폭탄, 제5공군의 압박 지시. 34. 미 공군 제58특수작전비행단, 부대 역사, https://www.aetc.af.mil/About-Us/Fact-Sheets/Article/562064/58th-sow-history/ — 5.16 자산 댐, 웨일랜드의 평가. 35. 영문 위키백과, 「Joseph C. McConnell」 — 5.18 오전 두 대, 오후 한 대로 16대. 36. 미 국립공군박물관, 「Leading Jet Ace」 — 매코널, 미군 제트기 최다 격추. 37. 미 국립문서보관소, Prologue 2003 여름호 — 휴전 서명 오전 열 시, 발효 밤 열 시. 38. 영문 위키백과, 「Ralph Parr」 — 소련 수송기, 21명 사망, 항의. 39. 공군발전협회 게시판, 이배선 회고(2022.7.28) — 7.27 아침 90회째 351고지 엄호, 91회째, 점심 뒤 92회째 마지막 출격. 40. 영문·러시아어 위키백과, 「64th Fighter Aviation Corps」 — 손실 335대, 1,250대 안팎 격추 주장. 41. 인민일보·중국공산당원망(12371.cn) — 중국 인민지원군 공군 330대 격추 주장.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스펜스 1917년생(ADB), 스트라우트 1921년생(AWM), 스트레이트마이어 1890년생(영문 위키백과), 장성환 1920년생·김신 1922년생(한국어 위키백과), 코제두프 1920년생(영문 위키백과), 페펠랴예프 1918년생(영문 위키백과), 장지후이 1927년생(영문 위키백과), 데이비스 1920년생(영문 위키백과), 어프 1930년생(영문 위키백과), 힌턴 1919년생(스미스소니언 Wall of Honor), 매코널 1922년생(영문 위키백과). 이근석은 1917년생이라는 서술이 위키백과에 있으나 출처 불분명 표시가 붙어 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연도가 없어 나이를 적지 않았다. 허드슨·프레이저·리틀·모런·파·거스리·아밋·드러먼드·톰슨·김두만·윤응렬·옥만호·이배선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데이비스가 떨어진 곳은 중국 측이 박천군 청룡면 삼광리, 미국 측이 신의주·압록강 부근으로 적어 본문 장면 첫 줄은 중국 측 조사 장소를 따랐다. 6.27 북한기 기종은 Yak-11(미 공군 역사 단체), Yak-9(김포 전투 서술), La-7(국립공군박물관 요약)로 갈리고 Futrell은 「Yak 전투기」라고만 썼다. 프레이저의 철자는 Fraser와 Fraiser 둘이다. 이근석의 전사는 국방부·국방일보·백과사전의 「피격 후 전차 돌진」과 딘 헤스 회고의 「급강하 뒤 상승 실패」로 갈린다. 1951.4.12 B-29 손실은 소련 공식 10대, 미국 측 3대 격추(러시아 연구자 일부는 6대). 1951.10.23 손실은 6대(McGill)와 개별 기체 기록상 5대. 데이비스 격추는 중국(장지후이)과 소련(미하일 아베린) 주장이 겹친다. 세이버 손실은 78대(Futrell)와 76대(Air & Space Forces Magazine). 미그 대 세이버 실제 비율은 2009년 RAND 검토 1.8대 1 등 연구마다 다르다(원문 미열람). 국군 공군 총 출격은 8,267회 유효출격(백과사전)과 8,495회(주간경향)로 갈려 백과사전 수치를 썼다. 승호리 1.15 출격은 6대(작전 항목)와 14회(공군 항목). 남아공 조종사 손실은 34명(남아공 공군)과 33명(위키백과). 호주 제77비행대대 조종사 전사는 40명(AWM)과 41명(위키백과). 덕산 댐에 쓸려 간 철도 다리는 다섯 개와 열 개로 갈려 다섯 개를 썼다. 댐 붕괴의 민간 피해 수치는 확인하지 못했다. 휴전 발효는 22시와 22시 1분. [재구성] 모든 대화(허드슨과 프레이저, 스펜스와 관제소, 이타즈케의 문답과 이근석의 대답, 장성환과 귀환 조종사, 코제두프와 참모, 무전 속 서툰 한국어 구령, 김신과 윤응렬, 어프의 무전, 이배선과 정비병, 힌턴 편대의 무전, 순천 상공 미티어 조종사의 외침)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프레이저의 사진기가 고장 났다는 것은 기록이고 셔터 소리와 농담은 재구성이다. 장성환이 7월 4일 저녁 대구 활주로에서 귀환기를 센 장면, 장지후이의 공중 기동 묘사, 철길 복구 현장의 횃불과 몸짓, 데이비스의 신분증, 어프가 피격된 장소(기록에는 무장정찰 중이라고만 있다), 강릉 비행장의 휴전 밤 풍경, 덕산 댐 사진 판독병의 시점은 기록에 없는 장면이다. 코제두프가 4월 12일 지휘소 무전기 앞에 있었다는 것은 그 전투에 사단을 이끌었다는 기록에 기댄 재구성이다. 승호리 공격의 고도와 기동은 「초저공침투공격」이라는 백과사전 서술을 장면으로 옮긴 것이다. [자료 충돌] 10-17 영상에 맞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밤에만」을 「열한 달 동안 밤에만」으로 고쳤다. 10화(1952.9.19 열한 달 만의 주간 중폭격)와 맞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