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14,685자)
한강 인도교 폭파와 한강선 방어 — 다리는 끊어졌고 사람은 남았다
1950 · 네오
1950년 6월 27일 오후, 서울 용산, 육군본부(현 전쟁기념관 부근).
육군 공병을 총괄하는 공병감 최창식(29) 대령은 하루에 두 번 서울을 떠났다가 두 번 돌아왔다. 아침에 육군본부는 시흥(현 서울 금천구)으로 내려갔다. 국군을 돕는 미 군사고문단에는 알리지도 않은 철수였다. 고문단 참모장 라이트 대령이 시흥까지 따라와 총참모장 채병덕(34) 소장을 붙들었다. 도쿄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전방지휘소를 꾸려 보내고, 미군 비행기가 한국 하늘에 들어온다는 소식이었다. 채병덕은 차를 돌렸다. 저녁 여섯 시, 육군본부는 다시 용산에 있었다1.
그 사이에 한강 다리 일은 반쯤 끝나 있었다. 오후 내내 공병학교 작업조가 사람과 차가 건너는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의 교각 사이를 오르내렸다2. 전쟁 전에 이 다리에서 폭파 실습을 해 본 황원회 중위가 조를 이끌었다3. 폭약 상자가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는 동안 다리 밑으로 흙빛 강물이 흘렀다.
아침 회의에서 최창식은 폭파 계획을 보고했다. 처음 정한 시각은 오후 네 시였다3. 육군본부가 다리를 건너 시흥에 닿은 뒤 끊는다는 순서였다. 이틀 전 임진강 다리는 폭파하려다 실패했고, 북한군 전차는 그 다리로 내려왔다. 채병덕은 공병감을 보며 이번에도 실패하면 총살이라고 못 박았다고 전해진다4.
이제 육군본부가 강 북쪽으로 돌아왔으니, 다리는 끊을 시각을 잃었다. 최창식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강로(현 한강대로)를 메운 사람들이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머리에 보따리를 인 여자들, 아이 손을 잡은 남자들, 소달구지 위에 솥과 이불을 얹은 집안 하나가 군용 트럭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날 낮 북한 비행기가 항복하라는 전단을 시내에 뿌렸고, 사람들은 그 종이를 밟고 걸었다1.
*
27일 밤, 서울역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큰길.
라디오에서 대통령의 목소리가 나왔다. 유엔이 우리를 돕기로 했으니 국민은 안심하라는 말이었다. 길가 가게의 라디오 앞에 선 사람들 가운데 몇은 고개를 끄덕였고, 몇은 그대로 보따리를 고쳐 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 목소리가 어디서 녹음되었는지 길 위의 사람들은 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새벽 특별열차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에 있었다5.
밤이 깊을수록 행렬은 굵어졌다. 서울역에서 용산까지 사람과 차가 이어졌고, 다리로 가는 큰길은 여덟 줄이 다 찼다. 군용 트럭, 포를 끄는 차, 걸어가는 병사 대열, 짐을 진 피란민이 한데 섞였다. 경적이 울려도 앞이 비지 않았다. 아이 하나가 엄마 치맛자락을 놓쳤다가 다시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신문사 하나는 그 시각까지 불을 켜 두고 있었다. 서울신문 사옥에는 사장과 편집국장을 비롯해 스무 명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서울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그날 오후에만 호외를 다섯 번 찍은 사람들이었다6.
*
28일 자정 무렵, 육군본부 작전실.
미 고문관 피터 스콧 중령은 작전국 장교들이 벽의 지도를 한 장씩 떼어 접는 것을 보았다. 압정이 빠진 자리에는 구멍만 남았다. 서울 외곽 방어선이 뚫렸다는 보고가 잇달아 들어오는 중이었다. 밤 열한 시쯤에는 북한군 전차 한 대가 보병 한 소대를 데리고 창덕궁 후원까지 들어왔다. 경찰이 그 전차를 부수고 보병을 흩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작전실 사람들 귀에 남은 것은 ‘시내’라는 말이었다. 스콧은 채병덕에게 다가갔다1.
“본부를 옮기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안 했소.”
얼마 뒤 채병덕은 작전실에 없었다. 작전국장 장창국(26)이 뒷날 남긴 말로는, 채병덕은 서울에 남겠다고 버텼는데 참모들이 그를 지프에 태워 강 남쪽으로 보냈다. 그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참모부장 김백일(33)이 되었다1.
고문관 세드베리 소령이 김백일을 붙들고 있었다. 고문단과 채병덕 사이에는 북한군 전차가 육군본부 앞길에 닿기 전까지는 다리를 끊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다. 시내에는 아직 국군 병력과 트럭과 대포가 가득했다.
“저 사람들이 건너기 전에는 안 됩니다.”
김백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책상에는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가 쌓여 있었고, 다리를 남겨 두면 그 전차가 강을 건너 남쪽의 모든 것을 깔아뭉갤 판이었다. 그는 뒤이어 뛰어 들어온 고문단 부참모장 그린우드 중령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국방차관이 한 시 반에 다리를 끊으라고 명령했고, 지금 당장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
문이 다시 열렸다. 제2사단장 이형근(30)이었다. 그의 사단 병력과 장비가 아직 시내에 있었다. 이형근은 김백일 앞에 서서 사단이 강을 건널 때까지만 미뤄 달라고 했다1. 목소리가 갈라졌다. 작전실 안의 누구도 지도를 다시 펴지 않았다.
김백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장창국을 돌아보았다.
“강으로 가서 폭파를 멈추게 하게.”
*
28일 두 시 무렵, 한강로.
장창국의 지프는 걸어가는 사람보다 느렸다. 운전병이 경적을 누르면 앞사람이 한 걸음 비켰고, 그 자리를 옆 사람이 다시 메웠다. 트럭 짐칸에 앉은 병사들이 졸린 얼굴로 지프를 내려다보았다. 다리 북쪽 끝에는 경찰 파출소가 하나 있었다. 거기서라면 강 남쪽의 폭파조에 연락이 닿을지도 몰랐다2.
다리까지 150야드, 140미터쯤 남았을 때 남쪽 하늘이 주황색으로 밝아졌다. 소리는 빛보다 조금 늦게 왔다. 땅이 울리고 지프 앞유리가 떨렸다. 뒷날 장창국은 그 빛과 함께 인도교와 철교 셋이 한꺼번에 끊어졌다고 말했다1.
한강 가운데 섬 중지도(현 노들섬)의 파출소까지 갔다가 헌병에게 막혔다는 증언도 있다4. 어느 쪽이든 그는 늦었다.
*
같은 시각, 한강 인도교 위.
미국 잡지 『타임』의 기자 프랭크 기브니(26)는 지프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미국 신문 『뉴욕 타임스』의 버튼 크레인, 뒷자리에는 시카고 신문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키스 비치(37)가 있었다. 지프는 병사를 가득 태운 트럭 뒤에 끼어 꼼짝도 못 했다1. 다리 세 차선이 차와 사람으로 차 있었다.
몇 분 전에 이 다리를 먼저 건넌 미군 고문관 둘이 있었다. 해즐릿 대령과 하우스만 대위였다. 하우스만은 건너고 칠 분 뒤에, 해즐릿은 오 분 뒤에 폭음을 들었다고 했다. 하우스만은 그 시각을 두 시 십오 분으로 기억했다1.
한국 쪽 기록은 시각을 다르게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한 국내 기록 다수는 28일 새벽 두 시 삼십 분께라고 쓴다2.
기브니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아무 경고도 없이 하늘이 거대한 주황빛 불꽃으로 밝아졌다. 바로 우리 앞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지프가 들려 15피트를 뒤로 날아갔다.”
앞의 트럭에 탄 병사들은 모두 죽었다7. 트럭이 불탔고, 그 불빛과 이따금 켜지는 전조등만이 다리 위를 비추었다. 기브니는 그 광경이 종말처럼 끔찍했다고 썼다8. 다리 위에는 죽은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이 널려 있었다. 군인도 있었고 민간인도 있었다. 크레인과 기브니의 얼굴에서는 유리 조각에 베인 자리마다 피가 흘렀다.
다친 한국 사람들이 미국 기자들에게 다가왔다. 누군가 자기 상처를 가리키며 서툰 영어로 말했다.
“병원, 데려가 줘요. 병원.”
기자들은 피가 흐르는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남쪽 두 칸이 강으로 떨어진 다리는 그 뒤로 사람을 건네지 못했다.
*
28일 새벽, 한강 북쪽 강둑.
미 군사고문단 사람들은 동쪽 다리로 차를 몰았다가 그 다리도 끊어졌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날이 밝을 무렵 강 상류 쪽에 나룻배가 다닌다는 보고가 왔다. 그때 육군본부 참모 이치업 중령이 나타나 배를 구해 주겠다고 나섰다1.
강가는 아수라장이었다. 병사들과 부대장들이 뱃사공에게 총을 겨누며 배를 대라고 고함쳤다. 피란민들은 물에 반쯤 잠긴 채 뱃전을 붙잡았다. 이치업도 같은 방법을 썼다. 그는 사공이 입은 셔츠 자락에 총알 한 발을 뚫어 배를 댔다. 고문단이 다 건너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1. 마지막 배가 떠날 때 상류 쪽에 북한군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고, 전차 포성은 눈에 띄게 가까워져 있었다.
강물을 걸어서 건너는 병사도 있었고, 얼기설기 엮은 뗏목에 매달린 병사도 있었다. 총을 버린 사람도 많았다. 대포와 트럭은 강 북쪽에 남았다9.
서울신문 사람들이 사옥을 나선 것은 두 시 반이었다. 그들이 다리 쪽으로 걸어갔을 때 인도교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6. 그날 오후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이 시내를 차지했다. 남산에서는 중대 하나가 하루 종일 버티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쓰러졌다고 전한다1. 신문사 사람 가운데 여덟이 그 뒤 죽거나 북으로 끌려갔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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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두 시, 시흥, 보병학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52) 소장이 학교 운동장에 들어섰을 때, 운동장에는 군복이 반쯤 젖은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육군본부는 그날 아침 수원 농업시험장(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으로 옮겨 갔고, 채병덕은 정오에 김홍일을 불러 한강 남쪽을 맡겼다10. 김홍일은 중국 땅에서 일본군과 싸운 광복군 출신이었다.
명령은 단순했다. 어느 부대 소속이든, 보병이든 공병이든 헌병이든 묻지 않는다. 오백 명이 모이면 ‘혼성 제○대대’라는 이름을 붙여 곧장 노량진(현 동작구 노량진동)으로 보낸다11. 운동장 한쪽에서 참모 하나가 장부에 이름을 적고, 다른 참모가 인원을 셌다.
“소속?”
“공병입니다. 다리 쪽에 있다가 왔습니다.”
“오늘부터 보병이다. 저쪽 줄.”
병사들이 강을 건너온 길은 제각각이었다. 의정부 쪽에서 밀려난 병력은 광나루(현 광진구 광장동)와 뚝섬(현 성동구 성수동), 한남동과 서빙고 나루(현 용산구 서빙고동)에서 돛 없는 작은 거룻배와 목선을 얻어 탔고, 문산(현 파주시 문산읍) 쪽에서 내려온 병력은 행주 나루(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로 건넜다. 마포와 행주로 건넌 사람들은 대개 시흥으로 왔다. 수원에서도 고문관들과 국군 장교들이 그날 하루 장교 1,000명과 병사 8,000명을 모아 임시 부대로 묶었고, 채병덕은 그들을 다시 한강으로 올려 보냈다1.
김홍일은 지휘관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12.
“앞으로 사흘, 한강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다.”
제7사단장 유재흥(29), 수도사단장 이종찬(34), 제2사단장 임선하가 각각 혼성 사단을 맡았다11. 사단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연대 하나에도 못 미치는 병력이었다. 연대마다 박격포가 두세 문, 기관총이 대여섯 정이었다. 그들이 지킬 강둑은 서쪽 안양천에서 동쪽 광진교까지 24킬로미터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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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아침, 노량진 강둑.
유재흥이 강을 등지고 선 병력을 세었을 때, 제7사단에 남은 것은 1,200명쯤과 기관총 네 정이었다1. 병사들은 강둑 흙을 파서 참호를 만들었다13. 강 건너 용산 쪽에서 이따금 포탄이 날아와 모래톱에 박혔다. 참호 하나에서 병사 둘이 끊어진 인도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쪽 두 칸이 물속에 처박힌 다리는 강 한복판에서 허리가 꺾인 짐승 같았다.
“그래도 강이 우리 편이다. 저놈들 전차는 헤엄을 못 친다.”
“저도 못 칩니다.”
먼저 말한 병사가 상대를 돌아보았다.
“그럼 너는 여기 붙어 있으면 되겠다. 도망갈 길이 없으니.”
옆 참호에서 낮은 웃음이 번졌다. 사흘 만에 처음 듣는 웃음이라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웃음이 그치자 병사들은 다시 흙을 팠다. 삽이 모자라 철모로 흙을 퍼내는 병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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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오후, 영등포(현 영등포구), 맥주 공장(현 영등포공원) 언덕.
그날 아침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70) 원수의 비행기는 북한 전투기가 막 휩쓸고 간 수원 비행장(현 수원 공군기지)에 내렸다. 활주로 끝에는 불탄 수송기 한 대가 걸려 있었다. 이틀 전 수원에 전방지휘소를 차린 처치 준장이 숫자를 내놓았다. 오늘 아침 파악한 국군이 8,000명을 넘지 않았는데, 정오까지 8,000명이 더 모였고, 밤까지 또 8,000명을 기대한다고 했다. 다 모아도 2만 5천 명쯤이었다1. 맥아더는 한강을 직접 보겠다고 했다. 수원에서 올라오는 길 내내 피란민과 흩어진 병사들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영등포의 동양맥주 공장 언덕에 서자 강 건너 서울이 보였다14. 시내 곳곳에서 연기가 올랐고, 강 위의 끊어진 다리 너머로 북한군 포가 이따금 불을 뿜었다. 맥아더는 쌍안경을 내리고 언덕 아래 참호를 내려다보았다. 참호 안에는 병사 하나가 소총을 걸쳐 놓고 강을 지켜보고 있었다. 맥아더가 통역을 시켜 물었다. 이곳을 언제까지 지킬 생각이냐는 물음이었다.
병사는 맥아더를 올려다보았다. 철모 아래 얼굴에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병사가 대답했다.
“군인은 명령을 따릅니다. 상관이 물러나라고 할 때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통역이 그 말을 옮기는 동안 병사는 다시 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맥아더는 한동안 그 등을 내려다보다가 언덕을 내려갔다. 수원으로 돌아간 그는 처치 준장에게, 미 지상군을 곧바로 넣어야 하며 그날 밤 워싱턴에 그 권한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1. 그 병사의 이름은 어느 기록에도 남지 않았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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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새벽, 강 북쪽, 서빙고 나루.
북한군 제3사단 제8연대 병사들은 나룻가에 모은 나무배를 보고 있었다. 큰 배에는 2.5톤 트럭 한 대나 사람 스무 명에서 서른 명이 탔다1. 전날 밤부터 강 남쪽에 포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날이 밝자 전차포와 야포가 강둑을 두드렸고, 첫 배가 물을 밀고 나아갔다.
배에 못 탄 병사들은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허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턱으로 차올랐다. 총을 머리 위로 들고 헤엄치는 병사도 있었다. 강 남쪽 참호에서 소총이 터졌고, 물 위에 엎어진 몸이 하류로 떠내려갔다. 그래도 일부가 모래톱에 올라섰고, 강둑 몇 군데에서 국군을 밀어냈다.
처치 준장은 채병덕에게 물가에서 역습하라고 했다1. 국군은 나서지 못했다. 강 건너에서 북한군 포탄이 쏟아지는 동안 병사들은 강둑 위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만 그날 강을 건넌 북한군도 영등포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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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아침, 미국 워싱턴.
사흘 전인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성명을 냈다. 공산주의가 이제 독립 국가를 정복하려고 전복의 수단을 넘어 무력 침략과 전쟁까지 쓰고 있다는 말이 들어 있었다. 그 성명으로 미 공군과 해군이 먼저 움직였다21. 같은 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 83호로 회원국에게 대한민국을 도우라고 권고했다22.
6월 30일, 트루먼은 미 지상군을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한강 가에서 맥아더가 요청한 지상군에 대한 답이었다23. 25일 밤 미주리 집 복도의 전화가 울린 지 엿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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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새벽 네 시, 영등포.
북한군 제4사단 제5연대 제3대대가 서울 서남쪽에서 강을 건넜다1. 38선에서 서울까지 예비로 따라오기만 했던 연대였다. 대대는 강둑에 오르자마자 영등포로 밀고 들어왔다.
혼성수도사단장 이종찬은 지금의 우신초등학교 자리에 두었던 지휘소를 전날 동양맥주 공장으로 옮겨 놓고 있었다16. 학교 건물까지 포탄이 떨어지던 참이었다. 사단의 뼈대는 박태운 소령이 이끄는 제8연대 제3대대였다. 원래 편성인 건제를 그나마 지킨 대대였다16. 강둑 아래 여의도 비행장(현 여의도) 쪽은 제18연대가 막았다17. 제8연대와 제18연대는 7월 3일까지 강을 건너오는 북한군을 다섯 차례 물리쳤다고 전한다12. 비행장 둑에 엎드린 병사들은 배가 강 한가운데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쏘았다.
영등포는 공장 동네였다. 국군 병사들은 공장 담과 벽돌 창고를 엄폐물 삼아 북한군과 맞붙었다. 기계가 멈춘 공장 안에서 총알이 철제 기둥에 맞고 튀었다. 한 블록을 내주면 다음 블록에서 다시 막았다. 이틀 동안 그렇게 싸웠다. 북한군에게는 아직 전차가 없었다. 강을 건너올 다리가 없었다.
7월 3일, 북한군은 그 다리를 만들었다.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철교 하나를 고치고 위에 판자를 깔았다2. 아침 무렵 소련제 T-34 전차 네 대가 강 남쪽에 올라섰다1. 여덟 시쯤 영등포가 떨어졌다1. 김홍일은 열한 시에 사령부를 안양으로 물렸다10.
북한군 제4사단은 영등포에서 227명이 전사하고 1,822명이 다치고 107명이 사라졌다1. 미 육군 공식 전사는 이 싸움을 적어 넣으며, 국군이 전차 없는 적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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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오후, 수원 화성의 북문 장안문.
그 문 앞에서 공병들이 폭약을 풀고 있었다. 북한군 전차가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 가도(현 경수대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고, 공병감은 이 문을 무너뜨려 길을 막으라고 명령해 두었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최창식이었다10.
안양에서 물러나던 이종찬이 그 광경을 보고 차를 세웠다. 이종찬은 지금 이 문을 부숴도 싸움에는 큰 도움이 안 되고 겨레의 옛 자취만 없앤다며, 뒷날 그 비난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따졌다. 최창식은 명령을 거두었다10. 공병들은 문 대신 그 무렵 일본에서 비행기로 들여온 대전차 지뢰 스무 발을 동문 둘레에 묻었다. 그날 늦게 북한군 전차가 동문 앞에 나타났고, 국군은 수원을 내주었다.
한강 다리를 끊은 공병감은 엿새 뒤 문 하나를 살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8월 28일 그는 체포되었다5. 경북 군위(현 대구 군위군)에서 공병이 묻은 지뢰에 아군 쉰 명 남짓이 피해를 입은 일이 계기였고, 한강 다리의 책임이 거기에 얹혔다18. 9월, 계엄고등군법회의는 적 앞에서 맡은 일을 저버렸다는 죄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4. 9월 21일 부산 교외에서 총살이 집행되었다19. 다리를 끊으라고 명령했다는 채병덕은 그보다 앞선 7월 27일, 하동 전선에서 전사한 뒤였다.
누가 명령했는지는 끝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채병덕이라는 기록, 국방차관이라는 미군 고문관들의 판단, 김백일이라는 기록이 함께 남았다. 최창식의 고문관이던 미군 장교는 뒷날 채병덕의 미군 고문관이 명령했다고 증언했다5. 최창식의 부인 옥정애가 재심을 청구했다20. 1962년부터 열린 재심에서, 1964년 군법회의는 그가 윗사람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5.
6월 25일 아침 국군은 9만 8천 명이었다. 그달 말 육군본부가 한강 남쪽에서 찾아낸 병력은 2만 2천 명이었고, 며칠 뒤 동쪽 사단들과 낙오병이 더해져 5만 4천 명이 되었다. 나머지 4만 4천 명은 첫 한 주 사이에 죽거나 붙잡히거나 사라졌다1.
다리 위에서 몇 사람이 죽었는지도 아무도 정확히 세지 못했다. 그날 서울에 있던 미군 장교들은 500명에서 800명으로 어림했다. 다리와 강북 쪽 둑길 위에 4,000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1. 강 북쪽에 남은 시민들은 그 뒤 석 달을 북한군 아래에서 살았다.
한강선은 엿새를 버텼다. 그 엿새 동안 흩어졌던 국군이 다시 대열을 지었고, 7월 1일 미군 첫 부대가 부산에 내렸다. 노량진과 영등포의 참호들은 비었다. 맥아더에게 대답한 병사가 그 참호를 언제 떠났는지, 살아서 떠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료 출처
1.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미 육군 군사사센터, 1961), 제3·5장, 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27일 육군본부의 시흥 철수와 18시 복귀, 북한 비행기의 전단, 스콧 중령이 본 지도 접기와 채병덕의 답, 세드베리·그린우드와 김백일(국방차관 1시 30분 명령), 장창국 증언(채병덕 지프 후송, 이형근 간청, 150야드 지점에서 폭파 목격), 폭파 시각 02시 15분(하우스만)·해즐릿 5분·하우스만 7분, 교량 위 차량·병력·피란민, 미군 장교 추정 사망 500~800명·교량 위 최대 4,000명, 크레인·기브니·비치의 지프, 고문단의 나룻배 도하와 이치업 중령, 남산 1개 중대, 98,000명 중 2만 2천 명만 파악·4만 4천 명 손실, 유재흥 1,200명·기관총 4정(29일 아침), 맥아더 6.29 수원 방문과 한강 시찰, 처치의 역습 지시, 북한군 제3사단 제8연대 6.30 서빙고 나루 도하(트럭 1대 또는 20~30명 실은 나무배), 제4사단 제5연대 제3대대 7.1 04시 도하, 7.3 철교 복구·전차 4대, 영등포 7.3 08시경 함락, 제4사단 손실 227·1,822·107명. 2. 김양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강교 폭파사건」, encykorea.aks.ac.kr/Article/E0060951 — 채병덕이 최창식에게 명령한 뒤 시흥으로 감, 공병학교 작업조 27일 오후 준비, 28일 02시 30분경 철교 3개·인도교 1개 폭파, 북쪽 파출소와 중지도의 공병 경계분대·헌병, 철교 하나가 덜 끊어져 북한군이 씀, 1962년 재심 무죄. 참고문헌 『한국전쟁사』1(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7). 3. 서울신문, 「새로 쓰는 한국현대사 33 — 한강 인도교 폭파」(1995.8.28) — 26일부터 검토, 처음 폭파 시각 27일 16시, 임진강교 폭파 실패, 공병학교 폭파교관 황원회·이창복 중위, 이승만의 27일 새벽 특별열차와 라디오 방송. 4. 조갑제, 뉴데일리 「61년 전 오늘」(2011.6.29) — 채병덕의 「실패하면 총살」, 『한국전쟁사』의 01시 45분 명령·02시 20분 실행, 장창국·정래혁이 중지도 파출소에서 헌병에게 막힘, 계엄고등군법회의 9월 사형·9월 21일 집행, 5·16 뒤 재심 무죄. 5. 이데일리, 「그해 오늘」(2024.6.28) — 이승만의 27일 새벽 특별열차와 라디오 방송, 최창식 8.28 체포·적전비행죄, 크로포드 소령 증언, 1962년 재심 시작·1964년 무죄. 6. 서울신문, 「북한군 밀려와도 끝까지 찍은 ‘호외’」(2024.1.16) — 27일 오후 4시까지 호외 다섯 번, 21시 스무 명 잔류, 2시 반에 나섰으나 다리가 끊어짐, 직원 여덟 명 사망·납북. 7. 로버트 네프, 코리아타임스 「Destruction of the Han River Bridge」(2018.6.30) — 프랭크 기브니의 기록 재인용(폭발과 지프, 앞 트럭 병사들의 죽음). 직접 인용은 의역했다. 8. 로버트 네프, 코리아타임스 「(83) Destruction of Han River Bridge」(2017.3) — 프랭크 기브니의 기록 재인용(다리 위의 광경, 유리에 베인 얼굴, 다친 한국인들). 직접 인용은 의역했다. 9. 천지일보, 「6.25전쟁 이야기」(newscj.com idxno=747154) — 한강교 조기 폭파. 10. 위키백과, 「한강 방어선 전투」, ko.wikipedia.org (국방부 전사 문장을 옮긴 것으로 보임) — 채병덕의 12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설치 명령, 김홍일 14시 보병학교 도착, 7.3 11시 사령부 안양 이전, 7.4 장안문 폭파 명령과 이종찬의 만류, 대전차 지뢰 20발. 장안문 일화는 다른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다. 11. 디지털동작문화대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grandculture.net/dongjak/toc/GC08200411 — 500명 단위 ‘혼성 제○대대’, 유재흥·이종찬·임선하의 혼성 사단, 안양천~광진교 24km, 연대당 박격포 2~3문·기관총 5~6정. 참고문헌 『한국전쟁』 상(국방군사연구소, 1995), 『6·25전쟁사』 3(군사편찬연구소, 2013). 12. 천지일보, 「6.25전쟁 이야기」 1부 8회(2020.7.3), newscj.com idxno=754588 — 김홍일의 「사흘」 발언, 제8·18연대의 여의도 방어. 13. 남정옥(군사편찬연구소), 국방일보 「다시 보는 6·25 〈91〉 유재흥 장군의 군 경력과 전투지휘」(2008.11.10) — 혼성제7사단의 동작동~대방동 방어. 14. 서울시 미디어허브, 「호국보훈의 달 맞아 돌아본 한강방어선 전투 이야기」, mediahub.seoul.go.kr/archives/2011365 — 맥아더의 한강 시찰과 참호 병사. 병사의 이름은 기록에 없다. 15. 국가보훈부 현충시설, 「맥아더 사령관 한강방어선 시찰지」 안내 — 맥아더 시찰과 참호 병사의 대답. 병사의 이름은 기록에 없다. 16. 위키백과, 「시흥-안양-수원 전투」, ko.wikipedia.org — 혼성수도사단 지휘소(우신국민학교 → 6.30 동양맥주 공장)와 박태운 소령의 제8연대 제3대대. 검색 결과 요약으로 확인했고 원전 쪽수는 보지 못했다. 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강선 방어전투」, encykorea.aks.ac.kr/Article/E0060954 — 6.28~7.3, 혼성수도사단·혼성제7사단, 영등포·노량진·흑석동·김포, 제18연대 여의도 비행장, 철교 복구 후 철수. 18. 위키백과, 「한강인도교 폭파」, ko.wikipedia.org — 군위 지뢰 사고와 최창식 체포 경위. 19. 위키백과, 「최창식 (군인)」, ko.wikipedia.org — 1921년생, 1942년 일본 육사 56기 공병, 1950.9.21 부산에서 총살. 20. 오마이뉴스, CNTN_CD=A0002362048 — 부인 옥정애의 재심 청구. 21. 해리 트루먼, 한국 사태에 관한 성명(1950.6.27) — 「공산주의는 이제 독립 국가를 정복하려고 전복의 수단을 넘어 무력 침략과 전쟁까지 쓰고 있다」, 공군·해군 투입 명령(『Public Papers of the Presidents: Harry S. Truman, 1950』; presidency.ucsb.edu 수록본). 인용 문구의 번역은 원문 확인이 더 필요하다. 22.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3호(S/RES/83, 1950.6.27), 유엔 디지털 도서관(digitallibrary.un.org) — 회원국이 대한민국에 무력 공격을 물리치고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라는 권고. 23. 미 국무부, FRUS 1950 vol. VII, 6월 30일 항목(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 및 해리 트루먼 도서관 「한국전쟁 연표」 — 6월 30일 트루먼의 지상군 투입 결정. 결정 시각과 승인 절차의 세부는 원자료로 확인이 더 필요하다.
[사진] 국가기록원 6·25전쟁 주제관 「한강철교를 따라 한강을 건너는 북한군」(1950,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 [지도] 지명 좌표 © OpenStreetMap 기여자(ODbL), Photon 지오코더로 조회.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최창식 1921(위키백과, 코리아타임스 「29세」와 일치), 채병덕 1916, 장창국 1924, 김백일 1917, 이형근 1920, 김홍일 1898, 유재흥 1921, 이종찬 1916(이상 위키백과 한국어판), 맥아더 1880, 프랭크 기브니 1924, 키스 비치 1913(위키백과 영어판). 버튼 크레인, 라이트, 스콧, 세드베리, 그린우드, 해즐릿, 하우스만, 처치, 황원회, 이치업, 임선하, 박태운, 옥정애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않아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폭파 시각 — 02시 15분(하우스만·애플먼), 02시 20분(국방부 『한국전쟁사』, 조갑제 인용), 02시 28분(코리아타임스 칼럼), 02시 30분(백과사전·국내 보도 다수), 02시(서울신문 2024). [자료 충돌] 명령자 — 채병덕(백과사전, 『한국전쟁사』 01시 45분), 국방차관 장경근(애플먼, 김백일의 말), 김백일 01시 30분 명령(위키백과), 미군 고문관(크로포드 소령의 재심 증언). 채병덕은 생전에 명령을 부인했다(애플먼). [자료 충돌] 장창국이 멈춘 자리 — 다리 150야드 앞(애플먼, 장창국 본인 증언), 중지도 파출소에서 헌병에게 막힘(조갑제, 정래혁 동행). [자료 충돌] 사망자 — 500~800명(미군 장교 추정, 애플먼·국방부 공식 전사가 따름), 200~800명(영어 위키백과), 1,000여 명(서울신문 2000.6.21), 피란민 800여 명(서울시 인권현장 표지석).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는 종로경찰서 경찰관 77명이라는 서술이 위키백과에 있으나 원자료를 보지 못했다. 500~800명이란 수치 자체의 근거가 약하다는 주장(조선일보 박종인, 2024.6.8)과 민간인 희생이 거의 없었다는 주장(뉴데일리 2024.5.22 포럼)도 있다. 본문은 미군 장교 추정만 적었다. [자료 충돌] 재심 — 1962년 무죄(백과사전·코리아타임스), 1962년 재심 청구·1964년 무죄(이데일리·위키백과, 위키백과는 1964.10.23). 본문은 1962년 청구·1964년 무죄로 적었다. [자료 충돌] 최창식 선고와 집행 — 9월 21일 선고·당일 집행(오마이뉴스), 9월 선고·21일 집행(조갑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부산 도착은 7월 1일(애플먼·위키백과)과 7월 2일(천지일보)로 갈린다. [자료 충돌] 전차 도하 시각 — 7월 3일 04시경(천지일보), 오전 중 4대(애플먼). 한강선 방어 기간은 6.28~7.3(백과사전)과 6.28~7.4(다른 자료)로 갈린다. [자료 충돌] 이승만 방송 — 녹음 장소는 대전으로 대체로 일치하나 방송 시각은 27일 밤 10시설과 그 밖의 설이 갈려 본문에 시각을 적지 않았다. 문구도 자료마다 달라 「유엔이 돕기로 했으니 안심하라」는 뜻만 적었다. [재구성] 최창식이 창밖을 보는 장면, 보병학교의 「소속?」 문답, 김백일의 속생각, 하우스만의 기억을 시각으로 옮긴 문장, 황원회 작업조의 몸짓, 라디오 앞 사람들과 피란 행렬의 아이, 스콧·채병덕·세드베리·김백일·이형근의 대사 문장(내용은 애플먼), 장창국 지프의 모습, 기브니 일행의 자리 배치(앞자리 둘은 애플먼), 「병원」이라는 한국인의 말은 기브니 기록의 의역, 이치업 장면의 강가 묘사, 보병학교 운동장 장면, 노량진 참호 병사 둘의 농담 전부, 맥아더와 병사의 대화 문장과 몸짓(취지는 서울시·보훈부 안내문), 북한군 제8연대 병사들의 도하 장면, 영등포 공장 시가전 묘사, 여의도 둑의 사격 장면, 장안문 앞 이종찬의 말(위키백과 문장을 풀어 씀)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확인 못 함] 국가기록원 문서철에서 폭파 명령서·군법회의 기록 원문을 찾지 못했다. 임선하의 출생연도, 장안문 일화의 원전 쪽수, 서빙고 도하 북한군 측 기록(북한 전사)은 확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