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12,976자)
대한해협 해전 — 부산 앞바다의 검은 배
1950 · 네오
1949년 여름, 해군 기지가 있는 경남 진해(현 창원시 진해구).
봉급날 저녁, 수병 식당 앞에 탁자 하나가 놓였다. 탁자 위에는 장부와 깡통이 있었다. 장부 맨 위에는 「함정건조 각출위원회」라고 적혀 있었다. 장교는 봉급의 10퍼센트, 고참 계급인 병조장은 7퍼센트, 하사관과 수병은 5퍼센트. 그 비율이 장부 첫 장에 또박또박 박혀 있었다1.
전병익(21)은 봉투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 깡통에 넣었다. 충청북도 음성에서 올라와 2년 전 여름 신병 8기로 입대한 수병이었다2. 뒤에 줄을 선 동기가 그의 어깨 너머로 깡통을 들여다보았다.
“그걸로 배 어디를 사냐?”
“닻줄 한 뼘은 되겠지.”
“그럼 나는 못 한 개다.”
동기가 자기 몫을 넣으며 투덜거렸고, 줄 뒤쪽에서 누가 「못이 빠지면 배가 샌다」고 받아쳤다. 웃음이 줄을 따라 번졌다. 그해 해군에는 전투함이 한 척도 없었다. 가진 배는 기뢰를 치우려고 만든 작은 소해정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배로는 북쪽 배가 해안으로 다가와도 쫓아가 싸울 수가 없었다.
같은 무렵, 해군 장교 부인들은 손원일(41) 해군참모총장의 부인 홍은혜를 따라 바자회를 열고 수예품을 팔았다3. 삯바느질을 맡아 온 부인도 있었다. 그 돈이 장병들의 봉급 몇 퍼센트와 합쳐졌고, 모금은 해군 바깥으로 번졌다. 넉 달 만에 1만 5천 달러가 모였다1. 이승만(75) 대통령이 정부 돈 4만 5천 달러를 보탰다4.
*
1949년 10월, 미국 뉴욕.
손원일이 이끄는 구매단이 부두에서 올려다본 배는 칠이 벗겨진 낡은 배였다. 2차대전 때 잠수함을 쫓으려고 만든 구잠함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뉴욕주 해양대학 실습선으로 쓰이고 있었다5. 배수량 450톤. 정원은 일흔셋이었다1. 값은 1만 8천 달러였다1. 남은 돈으로는 나중에 같은 꼴의 배 세 척을 더 사게 된다1.
10월 17일에 계약서가 오갔다6. 미 의회가 판매를 승인하는 데 석 달이 걸렸다5. 12월 26일, 맨해튼 부두에서 그 배의 꼬리인 고물에 태극기가 올랐다. 이름은 백두산, 선체 번호는 701이었다1.
배는 파나마 운하를 지나 태평양으로 나왔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3인치 포 한 문을 갑판 앞쪽에 얹었고, 사흘 동안 그 포로 연습을 했다5. 괌에서 포탄을 실었다5. 백 발이었다4.
호놀룰루 앞바다의 연습은 서툴렀다. 장전수는 포탄을 안고 약실 앞에서 머뭇거렸고, 사수는 포신이 다 돌기도 전에 발사 손잡이에 손을 댔다. 포탄 한 발 값이 얼마인지 승조원들은 다 알았다. 봉급에서 떼어 낸 돈으로 산 배였다. 연습탄을 한 발 쏠 때마다 누군가는 그 돈을 셈했다. 사흘째가 되자 동작이 겨우 맞아 들어갔다. 포구가 불을 뿜고 탄피가 갑판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에 승조원들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1950년 4월 10일, 백두산함은 진해에 들어왔다. 승조원들은 한 달 동안 갑판을 망치로 두드려 녹을 털어 내고 방부 페인트를 덧칠했다. 전병익은 3인치 포의 장전수가 되었다. 포탄을 품에 안아 약실에 밀어 넣는 자리였다. 배에 실린 포탄은 연습 사격을 하고 나면 줄어들었고, 다시 채울 곳은 없었다.
*
1950년 6월 12일, 진해에서 부산으로 가는 바다.
이승만이 배를 지휘하는 높은 자리인 함교 옆에 서서 앞갑판의 3인치 포를 내려다보았다. 포수들은 대통령 앞에서 모의 사격을 했다5. 탄은 넣지 않고 장전과 조준과 격발 동작만 되풀이했다. 포신이 바다 쪽으로 돌았다가 멈추고, 장전수가 빈 손으로 약실을 두드리고, 사수가 발사 손잡이를 당겼다.
“우리 수군이 대견하군. 믿음직해.”
노인의 말이 함교까지 들렸다5.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 최영섭(22) 소위는 그 말을 듣고 허리를 더 곧게 폈다. 강원도 평강(현 북한 강원도 평강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광복 뒤 남쪽으로 내려와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3기로 졸업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장교였다.
그 뒤 열흘 남짓, 백두산함은 부산과 동해안 항구 묵호(현 동해시), 인천·군산·목포의 해군 경비부를 차례로 돌았다. 6월 24일 밤 열한 시 반, 배는 진해 부두에 다시 묶였다5. 승조원 일부가 외출증을 받아 뭍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
1950년 6월 25일 오전, 진해 해군통제부.
서울에서 들어온 전보는 짧았다.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했고, 묵호와 그 북쪽 바닷가 옥계(현 강릉시 옥계면) 쪽에 북한군이 배로 상륙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6. 진해통제부사령관 김성삼 대령이 백두산함에 출동을 명령했다7. 동해로 올라가 묵호 근해의 상륙을 막으라는 임무였다8.
함장 최용남 중령은 그해 4월 백두산함 함장으로 부임했다9. 1946년 5월에 지금의 소위인 참위로 임관해 진해 기지교육대 교관과 신병교육대장을 지낸 사람이었다9. 정오 무렵 승조원들이 부두에 모였다4. 외출 나간 수병들을 찾으러 사람이 시내로 뛰었다.
김창학(21)은 조타실로 올라가 키를 쥐었다. 경기도 평택 팽성면 노양리(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에서 태어나 1948년 6월 신병 10기로 입대한 조타수였다10. 키를 돌리면 사백오십 톤짜리 배가 그만큼 고개를 틀었다. 전병익과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오후 세 시, 백두산함이 진해를 나섰다5. 소해정 구월산정(YMS-512)이 뒤따라 나왔고, 고성정(YMS-518)은 보급을 마치느라 늦게 출항했다8.
“동해 묵호까지 몇 시간인가?”
“밤새 달려야 합니다.”
최용남은 항해사의 대답에 고개만 끄덕였다.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고 바람이 세졌다. 빗방울이 함교 유리에 비스듬히 그어졌다. 파도가 뱃머리를 들었다 놓을 때마다 앞갑판에 물보라가 덮쳤고, 포 덮개 위로 바닷물이 흘러내렸다. 쌍안경으로 보아도 수평선이 흐렸다. 여섯 시 반 무렵 오륙도(현 부산 남구)가 왼쪽으로 지나갔다. 부산항의 불빛이 뱃전 너머에서 하나둘 켜졌다. 그 항구 앞바다에 포를 단 배는 이 배 한 척뿐이었다.
*
25일 저녁 여덟 시 십이 분, 울산 앞바다.
오른쪽 뱃전에서 망을 보던 견시 조병호가 쌍안경을 눈에서 떼지 않은 채 소리쳤다5.
“우현 45도, 수평선 검은 연기 보임!”
당직사관 최영섭이 쌍안경을 들었다. 회색 하늘과 회색 바다가 맞닿은 금 위에 검은 줄기 하나가 서 있었다. 줄기는 바람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누워 있었다. 연기가 북쪽으로 눕는다면 배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동해 쪽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배였다.
최영섭은 함장실로 갔다.
“함장님, 우현에 정체 모를 연기입니다. 남하 중입니다. 확인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최용남이 함교로 올라와 직접 연기를 보았다. 명령받은 곳은 묵호였다. 연기는 묵호와 반대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최용남은 쌍안경을 내렸다.
“침로 변경. 저 연기로 간다.”
김창학이 키를 돌렸다. 뱃머리가 연기 쪽으로 돌아섰고, 백두산함은 시속 28킬로미터쯤인 15노트로 속력을 올렸다4. 뒤따르던 구월산정에는 예정대로 북상하라는 신호가 갔다.
*
25일 밤 아홉 시 반, 같은 바다.
어둠이 내릴 무렵 연기 아래에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체를 시커멓게 칠한 증기선이었다. 백두산함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돛대에 국기가 없었고 뱃머리에 배 이름을 적은 선명도 없었다6.
신호수가 발광 신호등의 덮개를 여닫았다. 국적은? 어디서 출항했나? 어디로 가나? 불빛이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6. 검은 배는 오히려 속력을 올리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신호수는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깃발로도 물었고 불빛으로도 물었다. 그 불빛이 오가는 동안 백두산함은 검은 배와 거리를 좁혔다. 해군본부로 상황을 알리는 전문이 나갔다.
함교에서 말이 갈렸다.
“먼저 쏘시지요. 저건 대답할 생각이 없는 배입니다.”
“국기가 없다고 다 적선인가? 피란 가는 배일 수도 있고 밀수선일 수도 있다. 우리가 먼저 쏴서 민간인을 죽이면 그건 누가 책임지나?”
“그럼 저게 부산 부두에 사람을 내릴 때까지 따라만 갑니까?”
최용남은 두 장교의 말을 다 듣고 나서도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거리를 더 좁히라고 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가서 보고, 본부의 명령을 받고 쏜다. 그사이 검은 배가 무엇을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밤 열 시를 넘기면서 백두산함은 배를 세우라는 정선 신호를 보냈다6. 서치라이트가 검은 배의 옆구리를 훑었다. 최영섭은 쌍안경 속에서 그 배의 갑판을 보았다.
갑판이 사람으로 차 있었다. 사람들은 총을 메고 있었다. 수병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 싸우는 육전대의 군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중갑판 뒤쪽에 중기관총 두 정이 걸려 있었다8. 뱃머리 쪽에는 천으로 덮어 놓은 포 같은 덩어리가 보였다6.
“몇 명쯤으로 보이나?”
최용남이 물었다. 장교들이 저마다 숫자를 댔다. 보이는 것만 오백 명이 넘었다4. 선실 안까지 치면 칠팔백은 될 거라는 말도 나왔다. 최용남은 그 배가 부산에 무장 병력을 내리려고 내려오는 북한 배라고 판단했다. 그는 해군본부에 1,000톤급 수송선이며, 600명가량이 타고 상륙을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8.
부산까지는 몇 시간 거리였다. 그날 밤 부산항은 거의 무방비였다. 그 배를 막을 군함은 이 배 말고 없었다. 수백 명이 밤중에 부두에 올라서면 부산이 뒤에서부터 무너질 판이었다.
*
25일 밤 열한 시 사십 분, 백두산함 사관실.
장교 여덟 명이 좁은 사관실에 모였다5. 해군본부의 회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관실 탁자 위에는 컵 여덟 개가 놓였고, 당번병이 주전자를 들고 왔다. 주전자에 든 것은 찬물이었다.
“술은 없나?”
누가 물었다.
“함장님이 승선하실 때 압수하셨습니다.”
당번병의 대답에 사관실이 잠깐 웃었다. 최용남은 웃지 않고 컵을 들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
여덟 개의 컵이 부딪쳤다. 최영섭은 찬물을 단숨에 마셨다.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물이 차가웠다. 그는 해사 동기 김종식과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정을 넘긴 0시 10분, 통신실에서 전문이 올라왔다5.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은 해군본부의 명령이었다. 적 공산군 함정으로 판단되면 격침하라8.
*
6월 26일 0시 30분, 대한해협.
“사격 개시!”
백두산함은 검은 배의 왼쪽 뒤편, 3마일 거리에 있었다5. 첫 탄이 포구를 떠났다. 포가 뒤로 튀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이 전병익이 다음 포탄을 품에 안고 약실로 밀어 넣었다. 약실 뚜껑이 닫히는 소리와 사수의 발사 소리가 거의 겹쳤다.
검은 배도 응사했다. 갑판 뒤쪽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뱃머리에서 포탄이 날아왔다. 백두산함은 18노트로 속력을 올리며 거리를 2.7킬로미터 남짓인 3,000야드로 좁혔다4. 이십 분 동안 포격전이 이어졌다5. 포탄 상자가 빠르게 비었다. 최영섭은 포술 기록판에 숫자를 적어 나갔다. 서른 발. 배에 실린 백 발 가운데 벌써 서른 발이 나갔다5. 그러나 3,000야드에서 쏜 탄은 검은 배의 옆구리에 물기둥만 세웠다. 명중탄은 많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탄이 먼저 떨어집니다.”
최영섭이 함교로 소리쳐 올렸다. 최용남은 검은 배 쪽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천 야드까지 붙는다. 함교하고 기관실을 노려라.”
가까이 붙으면 이쪽 포탄도 잘 맞고 저쪽 포탄도 잘 맞는다. 배에 탄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았다. 김창학이 키를 돌렸다. 백두산함이 검은 배의 옆구리를 향해 파고들었다.
1,000야드에서 쏜 포탄이 검은 배의 함교에 꽂혔다5. 불꽃이 일었고 함교 지붕이 날아갔다. 다음 탄에 돛대가 꺾였다. 기관실 쪽에서 증기가 하얗게 솟았다. 검은 배의 속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배의 기관총과 포는 쉬지 않았다. 갑판 위의 사람들이 소총까지 쏘아 댔다. 탄알이 백두산함의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렸다.
*
26일 새벽 한 시 십 분, 백두산함 조타실.
거리는 300야드까지 좁혀져 있었다5. 검은 배의 갑판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얼굴이 서치라이트 불빛 속에서 하나하나 보일 만큼 가까웠다.
그때 적탄 하나가 조타실을 꿰뚫었다5. 철판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조타실 안을 휘저었다. 김창학이 앞으로 꺾였다. 배를 맞은 파편이 그의 몸을 키 손잡이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두 손이 아직 키를 쥐고 있었다.
“조타수!”
누가 외쳤다. 김창학은 대답 대신 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뱃머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함교에서 내려오는 침로 명령은 그대로 그의 손으로 들어갔다.
거의 같은 순간, 또 한 발이 3인치 포 둘레의 갑판에 떨어졌다. 전병익은 포탄을 안고 있었다. 파편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2. 그는 포탄을 놓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주포에 명령을 전하던 전화수 김춘배가 다리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4. 옆에 있던 수병이 전병익의 팔에서 포탄을 받아 약실에 밀어 넣었다. 포는 다시 불을 뿜었다.
전병익은 갑판에 등을 기댄 채 포가 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이 갑판 위의 빈 탄피 하나를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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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새벽 한 시 반 무렵, 같은 바다.
검은 배가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꺾인 돛대가 물에 닿았고, 함교가 있던 자리에서 검붉은 연기가 솟았다. 늦게 도착한 고성정이 뒤쪽에서 포를 보탰다8.
배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왼쪽으로 누우며 가라앉았다4. 연기와 증기가 한꺼번에 바다 위로 퍼졌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서치라이트가 그 자리를 비추었을 때 바다 위에는 기름띠가 번지고 있었다.
“격침!”
함교에서 소리가 내려왔다. 갑판에서 누가 만세를 불렀고, 만세는 금세 그쳤다. 포 옆에 쓰러진 사람들이 있었다.
*
26일 새벽, 백두산함 수병 식당.
군의관 김인현 중위가 수병 식당의 식탁을 수술대로 썼다4. 식탁 위에 김창학이 누웠고, 그 옆 식탁에 전병익이 누웠다. 전등 하나가 배가 흔들릴 때마다 흔들렸다. 김인현은 피 묻은 손으로 파편을 하나씩 꺼냈다. 김창학의 배 속은 터져 있었다. 전병익의 가슴에 박힌 쇳조각은 깊었다.
최영섭이 식당 문 앞에 섰다. 전병익이 눈을 떴다. 그는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가 작아 최영섭은 몸을 숙였다.
“대… 한민국….”
전병익은 그 말을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6월 26일, 그는 그 배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2. 스물한 번째 생일을 이틀 지난 날이었다11.
백두산함은 그 뒤로 네 시간 동안 침몰 해역을 돌며 수색했다4. 서치라이트가 물 위를 쓸었다. 떠오른 것은 기름과 옷가지와 부서진 나무 조각이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건져 올린 사람이 있었다는 한국 쪽 기록은 없다. 날이 밝자 배는 부상자를 뭍에 내리려고 뱃머리를 돌렸다.
김창학은 이틀을 더 버텼다. 6월 28일, 그도 숨을 거두었다10. 키를 놓지 않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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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아침, 부산.
부산 사람들은 밤사이 앞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시장은 문을 열었고 부두에서는 짐꾼들이 짐을 날랐다. 서울 쪽 소식은 라디오로 띄엄띄엄 들어오고 있었다.
그날부터 부산항은 이 전쟁의 문이 되었다. 닷새 뒤인 7월 1일 미군 첫 부대가 부산에 내렸다5. 그 뒤로 부산항에는 병력과 탄약과 식량을 실은 배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해 여름 낙동강에서 버틴 군대는 거의 모든 것을 그 항구로 받았다.
검은 배에 누가 탔는지, 그 배가 어디서 왔는지는 지금도 기록이 갈린다. 한국 해군은 600명가량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탄 1,000톤급 무장 수송선이라고 기록했다8. 그 숫자는 그날 밤 백두산함 장교들이 쌍안경으로 갑판을 보고 어림한 것이었다. 북한은 그 배에 대해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그날 새벽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사람들의 이름은 어느 쪽 기록에도 없다.
*
2009년 11월 11일 오전 열한 시, 서울 관훈동.
해군의 첫 이름인 해방병단의 결단식 터에서 해군 창설 64주년 기념식이 열렸다2. 노인 하나가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그날 밤 백두산함 당직사관이던 최영섭이었다. 여든한 살이 되어 있었다. 그 옆에 전병익의 여동생, 일흔한 살 전광월이 앉아 있었다2.
전투에서 공을 세운 군인에게 주는 을지무공훈장이 전병익에게는 1952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12. 해군은 유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그 훈장을 전하지 못했다2. 최영섭은 여러 길로 수소문한 끝에 그해 9월 전광월을 찾아냈다2. 쉰아홉 해 동안 그녀가 아는 것은 오빠가 전쟁 중에 전사했다는 사실 하나였다.
단상에서 해군이 훈장과 수여 증명서를 그녀의 손에 건넸다2. 최영섭은 자리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날 밤 수병 식당 문 앞에서 몸을 숙여 들은 목소리가 아직 귀에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 쉰아홉 해가 걸렸다. 전광월은 훈장 상자를 받아 들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오빠를 기억해 준 해군과 정부에 감사합니다.”
이듬해 6월, 부산 중앙공원의 대한해협 전승비 곁에 두 사람의 흉상이 섰다11. 장전수 전병익과 조타수 김창학이었다. 2013년에는 미사일을 단 유도탄고속함 김창학함의 진수식이 열렸고, 그 자리에 김창학의 누이, 여든두 살 김임순이 앉아 있었다13. 해군은 뒤이어 만든 고속함 한 척에 전병익의 이름을 붙였다.
그날 백두산함에 탔던 승조원은 일흔여섯 명이었다. 정전 60주년이 되던 2013년에 살아 있는 사람은 스무 명이었고, 2015년 여름에는 열네 명이 남았다5. 최영섭은 그 열네 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2021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14.
백두산함은 1959년에 퇴역했다5. 돛대 하나가 진해 해군사관학교 교정에 남았다5. 1949년 여름 봉급날, 수병 식당 앞 깡통에 들어간 지폐들이 그 돛대를 세웠다. 전병익이 넣은 몇 장도 그 안에 있었다.
사료 출처
1. 기독일보, 「6.25의 기적들 ⑧」, christiandaily.co.kr/news/107776 — 1949.6.1 함정건조 각출위원회, 장교 10%·병조장 7%·하사관과 수병 5%, 4개월 1만 5천 달러, 정부 4만 5천 달러, 1만 8천 달러 구매, 450톤·정원 73명, 12.26 명명, PC-702·703·704 추가 구매, 손원일·홍은혜. 2. 한국일보(2009.11.12), 「한국戰 순직 전병익 중사 여동생에 을지무공훈장 전달」 — 전병익 신병 8기 1947.7 입대, 포탄 장전수, 가슴에 적탄, 6.26 전사, 전사 당시 21세. 1952년 수여 결정 뒤 유족 연락 두절, 최영섭이 2009년 9월 여동생 전광월(당시 71)을 찾음, 11월 11일 오전 열한 시 관훈동 해방병단 결단식 터 해군 창설 64주년 기념식에서 해군이 대리 전달, 발언. 3. 뉴데일리(2015.7.28) — 홍은혜의 해군 부녀회 모금 주도. 4. 김문, 「[김문이 만난 사람] 백두산함 갑판사관 최영섭」, 서울신문(2013.6.19) — 모금 1만 5천 달러와 대통령 4만 5천 달러, 3인치 포탄 100발, 25일 정오 집합·오후 세 시 출항, 15노트 접근, 밤 열한 시경 무장 병력(500명 이상, 전체 700~800명 추정), 0시 30분 첫 탄·18노트, 20여 분 포격전, 좌현으로 기울며 침몰, 적탄 2발, 약 4시간 수색, 김창학·전병익·김춘배의 부상 부위, 군의관 김인현 중위의 함미 사병식당 수술, 최영섭 회고 속 김춘배(주포 전화수)·김인현(군의관). 5. 위클리공감, 「“해군 첫 전투함 백두산함, 동해 바다 수호신이었지”」(최영섭 인터뷰),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015.6.25), korea.kr newsId 148797081 — 미 의회 승인 석 달, 뉴욕주 해양대 실습선, 호놀룰루 포 장착·사흘 연습, 괌 포탄 적재, 6월 12일 이승만 승선, 6월 24일 밤 열한 시 반 진해 복귀, 25일 오전 열 시 출동 명령·오후 세 시 출항, 여덟 시 십 분경 우현 연기, 아홉 시 반 괴선박, 0시 10분 격침 명령, 그 30분 전 장교 8명 냉수 건배, 3마일·3,000야드·20여 분·30발, 1,000야드 접근, 한 시 십 분 300야드에서 조타실 관통탄, 한 시 반 격침, 승조원 76명·2013년 생존 20명·2015년 생존 14명, 7월 1일 미군 도착, 1959년 퇴역·돛대 등록문화재, 최영섭 회고 속 조병호(우현 견시)·김종식(해사 동기). 6. 장학근, 「배 33: 백두산함의 무용」, 서울신문(1993.6.5) — 1949.10.17 구입, 25일 오전 여섯 시 묵호·옥계 상륙 첩보, 정오 진해 출발, 국제 발광신호 무응답, 밤 열 시경 정선 신호, 국기 없음, 위장 포대, 0시 10분 격침 명령. 7. 위키백과, 「대한해협 해전」 정보상자 — 김성삼(진해통제부사령관). 8. 이상호, 「대한해협해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3 집필·2023.4.24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15235 — 25일 오전 진해통제부사령관의 동해 출동 명령, 구월산정(YMS-512)·고성정(YMS-518) 지휘, 오후 여덟 시경 연기 발견, 1,000톤급 수송함·600명 판단 보고, 국방부 장관의 「적 공산군 함정으로 판단되면 격침」 지시, 중기관총 2정·해군·육전대 복장, 고성정 후방 포격, 오전 한 시경 침몰. 참고문헌: 해군본부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201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2005). 9. 한국일보(2016.6.26), 「부산 침투 北수송선 격침한 대한해협전 승장」 — 최용남 1946.5.1 참위 임관, 기지교육대 교관·신병교육대장, 1950.4 함장 부임, 1965 해병대 소장 예편. 10. 최재성, 「김창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0010721) — 1929.1.29 평택군 팽성면 노양리 출생, 1948.6 신병 10기, 조타수, 복부 중상에도 키를 놓지 않음, 1950.6.28 사망, 1952.12.10 을지무공훈장. 11. 위키백과, 「전병익」 — 1929.6.24 충북 음성 출생(출처 월간조선 2010.1), 연합뉴스 2010.6.24 흉상 제막. 12. 국가보훈처, 「이달의 6·25전쟁영웅 — 백두산함(PC-701)」 발표, 경향신문(2021.5.31)·전북도민일보 보도 — 여덟 시 십이 분 발견, 0시 30분 포격 개시, 한 시 이십오 분 침몰, 전병익 이등병조·김창학 삼등병조 전사, 1계급 특진·을지무공훈장, 1988년 부산 중앙공원 대한해협 전승비. 13. 뉴데일리(2013.4.24) — 김창학함 진수식에 김임순(당시 82) 참석, 「격침 뒤 사흘 만에 숨졌다」, 김창학함 명명. 14. 뉴시스(2021.7.8), NISX20210708_0001505607 — 최영섭 별세 2021.7.8. 뉴스토마토도 보도했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전병익 1929년생(위키백과, 한국일보 「전사 당시 21세」), 김창학 1929년생(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영섭 1928년생(서울신문 2013), 손원일 1909년생·이승만 1875년생(한국민족문화대백과). 최용남은 1923년생이라는 서술이 출처 없는 인공지능 위키 한 곳에만 있어 나이를 적지 않았다. 김성삼·홍은혜·조병호·김종식·김춘배·김인현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출동 명령 시각은 오전 여섯 시 첩보(1993), 오전 열 시(정책브리핑 2015), 열한 시(나무위키 계열), 정오 집합(서울신문 2013)으로 갈린다. 출항은 오후 세 시(2013·2015)와 정오(1993). 본문은 「오전」 명령·정오 집합·세 시 출항으로 적었다. 침몰 시각은 한 시경(백과), 한 시 이십오 분(보훈처), 한 시 반(최영섭 2015), 한 시 삼십팔 분(기독일보), 한 시 사십 분(위키백과 「전병익」), 세 시(장학근 1993)로 다르다. 본문은 「한 시 반 무렵」. 첫 포격을 백과는 「위협사격」, 최영섭은 사격 명령에 따른 첫 탄으로 적는다. [자료 충돌] 북한 측 탑승 병력: 한국 기록은 600명(함장 보고), 장교 추정은 500명 이상·전체 700~800명(최영섭), 함장 판단 1,000명 가까이(서울신문 2013). 600명은 당시 관측에 따른 추정이고 포로·생존자로 확인된 숫자가 아니다. 영문·한국어 위키백과는 탑승 부대를 제766독립보병연대(또는 945부대)로 적으나(Rottman, 『Korean War Order of Battle』 2001 인용) 원사료로 확인하지 못했다. 북한은 이 배의 존재와 손실을 공개한 적이 없다. 일부 인터넷 서술에는 그 배가 소련 선박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원자료를 찾지 못해 본문에 넣지 않았다. [자료 충돌] 교전 위치는 「부산 앞바다」(백과 정의), 「부산항과 울산 방어진 동쪽 3마일 해상」(서울신문 2013), 「부산에서 18마일」·「대마도 인근 침몰」(위키백과 영문·한국어)로 다르다. 백과 본문은 출동 방향을 묵호 근해로 적어 「부산 앞바다」와 위치가 어긋난다. 전황도의 발견점·침몰점은 추정. 전사·부상: 전사 2명은 일치, 부상은 1명(김춘배)~2명(위키백과)으로 갈린다. 전병익의 계급은 이등병조(보훈처)·일등병조(한국일보 2009), 사망일은 6.26(한국일보)인데 나무위키 계열은 사흘 뒤로 적는다. 김창학의 계급은 삼등병조(보훈처)·이등병조(나무위키). 승조원 수는 76명(정책브리핑)과 60명(나무위키). 아침 뒤 향한 곳은 포항(서울신문 2013)과 진해(나무위키)로 갈려 본문에 적지 않았다. [재구성] 함교에서 「먼저 쏘자」와 「민간선일 수도 있다」로 말이 갈린 장면(기록은 신호 무응답·함상 회의·본부 명령 대기까지만 전한다), 호놀룰루 연습의 서툰 동작, 1949년 모금 탁자와 전병익·동기의 농담, 부인회의 삯바느질 장면의 몸짓, 이승만 승선 때의 모의 사격 동작, 최용남과 항해사의 묵호 대화, 최영섭의 건의 문장, 함장의 「몇 명쯤으로 보이나?」·「천 야드까지 붙는다」 명령 문장, 사관실의 술 압수 농담, 최영섭과 김종식의 눈짓, 포술 기록판, 조타실에서 김창학이 키를 쥔 몸짓과 「조타수!」 외침, 수병이 전병익의 포탄을 받아 넣는 장면, 빈 탄피를 더듬는 손, 수병 식당의 전등·수술 장면 세부, 전병익의 마지막 말을 최영섭이 들은 장면, (정책브리핑 2015는 두 병사가 숨지기 전 「대한민국」을 외쳤다고만 적는다), 2009년 기념식의 자리 배치, 6월 26일 아침 부산 시장·부두 풍경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우현 45도, 수평선 검은 연기 보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 「우리 수군이 대견하군. 믿음직해」는 최영섭 회고에 따른 인용이다. 검은 배 승선자의 내면은 기록에 없어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