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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16,848자)

해리 전초 전투 — 여덟 번째 밤

1950 · 네오

해리 전초 전투, 1953년 6월 10일~18일 — 철원 동쪽 김화 계곡의 해리 전초, 북쪽의 별고지, 남서쪽의 미 제3사단 주저항선, 서북쪽의 잭슨 고지, 남쪽의 이길리 마을. 중공군 제74사단의 공격 방향(북동·북·북서)과 동쪽 골짜기의 견제 전차대. 밤마다 바뀐 수비 중대 — 10일 미 제15연대 K중대, 11일 B중대와 제5연대전투단 B중대, 12일 제5연대전투단 A중대와 제15연대 L중대, 13일 제5연대전투단 C중대, 14일 G중대, 15일 A중대, 16~18일 그리스 대대 P중대.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3년 6월 10일 수요일 저녁, 강원도 철원(현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동쪽, 김화(현 철원군 김화읍과 북한 강원도 김화군) 쪽으로 열린 골짜기의 작은 봉우리 해리 전초(현 철원군 북쪽 비무장지대 안).

미 제3사단 제15보병연대 K중대장 마틴 마클리 대위는 그날 아침 공격이 곧 온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중대원들을 모아 그대로 전했고, 탄약과 전화선과 최후 방어 사격 좌표를 하나씩 다시 맞추게 했다1.

“오늘 밤이다. 별고지에서 내려온다.”

해리는 해발 사백 미터가 채 안 되는 봉우리였다. 북쪽으로 삼백 미터쯤 떨어진 더 큰 산을 중공군이 쥐고 있었고, 미군은 그 산을 별고지라고 불렀다. 미군 주저항선은 남서쪽으로 사백 미터쯤 뒤에 있었다1. 전초가 주저항선보다 높아서 탄약 상자와 물통은 개울을 따라 난 보급로로 지고 올라가야 했고, 그 길은 낮 내내 별고지에서 내려다보였다. 꼭대기를 한 바퀴 두른 교통호와 엄체호에 보병 백오십 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 해리를 내주면 김화 계곡을 내려다보는 눈을 중공군에게 넘기게 되고, 미 제8군은 다음 방어선까지 십 킬로미터쯤 물러나야 한다는 계산이 사단에 있었다1.

6월 첫 주의 공중 정찰은 별고지 뒤에서 중공군 제74사단의 연대들이 모이는 것을 잡았다. 공격 전 나흘 동안 해리에 떨어진 중공군 포탄은 낮 동안에만 하루 이백칠십오 발에서 육백칠십 발로 늘었다1.

해가 지자 별고지 쪽에서 포성이 한꺼번에 터졌다. 첫 포격으로만 이만 발이 넘는 포탄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2. 켄터키 출신 도널드 멘컨 상병이 포탄 파편에 맞고 쓰러졌고, 그 뒤로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3. 중공군은 철조망을 넘어 교통호로 들어왔다. K중대가 엄체호로 들어가자 마클리는 자기 진지 위로 포를 불렀다. 땅에 닿기 전에 공중에서 터지는 근접신관 포탄이 교통호 위의 중공군을 쓸었다1.

“우리 머리 위에 떨어뜨려도 됩니까?”

포병 관측반의 물음에 마클리가 송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우리는 엄체호 안에 있다. 위에 서 있는 건 다 저쪽이다. 쏴라.”

엄체호 지붕의 통나무와 모래주머니 위로 파편이 쏟아지는 소리가 우박처럼 들렸다. 포성이 잠깐 끊길 때마다 교통호에서 중공군의 호루라기 소리와 고함이 다시 올라왔다.

올라 마이즈(19) 하사는 그 밤 포탄과 수류탄 폭풍에 세 번 나가떨어졌고, 세 번 다시 일어났다. 포탄이 쏟아지는 비탈 아래 청음초에서 병사 하나가 다쳤다는 말이 들어오자, 그는 위생병 하나와 함께 철조망 쪽으로 기어 나가 그 병사를 끌고 돌아왔다. 그 뒤 교통호에 남은 몇 사람을 이끌고 엄체호를 하나씩 되찾았고, 빼앗긴 기관총 진지를 되찾으며 중공군 열 명을 쓰러뜨렸다. 무전병이 쓰러진 뒤에는 무전기를 직접 잡고 적의 접근로에 포를 불렀다4.

새벽에 중공군이 물러갔을 때 다치지 않은 미군은 열두 명쯤이었다1. 마클리는 나중에 그 밤을 이렇게 셈했다.

“다 합쳐서, 증강된 중공군 한 개 연대, 삼천육백 명쯤이 우리를 죽이려고 올라왔습니다.”

제3대대장 러셀 에이커스 중령은 예비대를 긁어모아 올려 보냈고, 전차 한 개 소대와 보병 한 개 소대를 전초 동쪽 골짜기로 내보내 중공군의 발길을 포병 사격 구역 쪽으로 돌렸다1. 다음 날 밤 K중대가 있던 자리에는 다른 중대가 올라갔다.

*

1953년 6월 11일 목요일 밤, 해리 전초 뒤쪽 교통호의 엄체호.

B중대의 찰스 존슨(18) 일병은 스무 발 탄창을 꽂는 브라우닝 자동소총을 들고 있었다. 뉴욕주 밀브룩의 육 남매 가운데 셋째였고, 집에서는 ‘버디’라고 불렸다. 고등학교에서 미식축구와 야구, 농구를 했고 트럼펫을 불며 성가대에서 노래했다. 졸업반 때 옮겨 간 포킵시의 알링턴 고등학교에서는 학급 부회장과 농구부 공동 주장을 맡았고, 1951년 가을 한 학기 동안 워싱턴의 하워드 대학에서 미식축구를 했다. 1952년에 징집되었을 때 누이 제럴딘은 군악대에 지원하라고 졸랐다5.

“다른 집 어머니 아들들이 싸워야 한다면, 나도 똑같이 해야지.”

같은 엄체호에는 고등학교 동창 돈 딩기 이병이 있었다5.

그날 밤 포격은 거의 밤새 이어졌다. 중공군 보병은 제 편 포탄 사이로 기어들어 와 전초 뒤쪽 교통호를 차지했고, 제5연대전투단 B중대가 올라와 B중대를 거들었다1. 존슨의 엄체호에 포탄이 곧장 떨어졌다. 그다음에는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두 번 다 다친 존슨은 자기보다 더 다친 병사들에게 붕대를 감았고, 딩기를 끌어 안전한 쪽으로 옮겼다5.

“버디, 너 피 나.”

“너는 더 나. 가만있어.”

그는 다친 병사 하나를 더 끌어 튼튼한 엄체호로 옮겼고, 교통호에서 맞닥뜨린 중공군 여럿과 맨손으로 붙었다. 총과 탄약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다친 동료들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엄체호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그는 적과 부상자들 사이로 나가 섰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적을 막겠다고 그는 말했다5.

새벽 다섯 시 사십오 분쯤 중공군은 공격을 거두었다1. 존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막아 선 엄체호 안에서는 열 명 가까운 병사가 살아 나왔다5.

*

1953년 6월 12일 금요일 저녁 여섯 시 반, 해리 전초 앞 철조망 지대.

제10공병대대 B중대의 어니 크레이머는 분대장 애즈베리 콜에게 철모와 카빈 소총을 빌려 쓰고 장갑차에서 내렸다. 해리 앞에 대인지뢰를 세 겹으로 묻을 자원자를 구한다는 말에 그는 늘 그랬듯 손을 들었다. B중대와 C중대에서 모인 공병이 열세 명이었다. 지뢰 상자는 한국인 노무자 열 명 남짓이 져 날랐다. 크레이머의 기억으로는 서른여섯에서 쉰 살 사이의 사내들이었다6.

장갑차를 기다리며 크레이머는 옆 사람에게 지난겨울 이야기를 했다.

“그리스 놈들 알지? 다리 고치러 갔다가 만났는데, 트럭 짐칸에 사우나를 차려 놨더라고. 연통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어.”

“그래서?”

“삼십 분 찌고 나니까 하나가 수류탄 두 발 들고 뛰어가서 강 얼음에 구멍을 냈어. 다 같이 뛰어들었지. 내 평생 최고의 사우나였어.”

“수류탄으로 냉탕을 만들었다고?”

“점심은 더 대단해. 한 사람에 통닭 반 마리, 갓 구운 빵 두 덩이, 생야채에 커피. 그 친구들은 왕처럼 먹어.”

지뢰를 다 묻기 전에 북서쪽과 북쪽, 북동쪽에서 소총탄이 날아왔다. 공병들은 전초로 물러났고, 데리러 올 장갑차는 더 들어오지 못했다. 그날 밤 공병들은 보병으로 싸우게 되었다6.

그날 해리를 맡은 중대는 제5연대전투단 A중대와 제15연대 L중대였다. A중대장 제임스 에번스 중위는 그 밤 지휘 엄체호에 공병대대의 중령 하나가 불쑥 들어와 공병이 뭘 도울 수 있겠느냐고 묻던 것을 기억했다6. 밤 열 시에 포격이 시작되었고, 교통호에 잠깐 들어온 중공군은 밀려났고, 싸움은 열 시 사십칠 분에 멎었다. 크레이머는 남쪽 교통호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교통호 가장자리에 나타난 중공군 셋을 보았다. 셋은 고무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하나는 총 대신 짧은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가 시계를 본 것은 열한 시 조금 전이었다6. 두 시 팔 분, 중공군은 북쪽과 북동쪽, 북서쪽 세 방향에서 다시 올라왔다1.

A중대 부중대장 델버트 톨런 중위는 전초 맨 아래 의무 엄체호에 남은 중대원들을 모아 두고 있었다. 위에서 상황이 위급하다는 말이 내려오자 그는 사람들을 공격조로 나눠 교통호를 따라 올라갔다7. 북쪽 비탈 교통호에서 맞붙은 싸움은 네 시 오십 분에 끝났다. 동쪽 골짜기에서는 제64전차대대의 전차 한 개 소대가 다시 견제에 나섰다1.

그 밤 해리에 오른 공병 열세 명 가운데 넷이 전사하고 아홉이 다쳤다6. 크레이머가 빌린 철모와 카빈은 둘 다 부서졌다. 그는 콜 분대장이 그 사실을 알았는지 수십 년 동안 궁금해했고, 끝내 그를 찾지 못했다6.

*

1953년 6월 15일 월요일 저녁, 평강(현 북한 강원도 평강군) 남쪽, 한탄강 북쪽 기슭의 중국인민지원군 제24군 진지.

제24군은 1952년 9월 제70·72·74사단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그해 12월 오성산과 상감령 쪽 진지를 넘겨받았다8. 해리를 친 것은 제74사단이었다.

지원군의 기록은 그 닷새를 다르게 적는다. 6월 10일 제221연대가 포병의 엄호를 받으며 381고지 동북쪽 이름 없는 고지를 지키던 미 제3사단 제15연대 한 개 중대를 공격해 ‘남김없이 섬멸했다’. 미군이 여러 차례 되치고 올라왔으나 모두 물리쳤다. 싸움은 닷새 밤낮 이어졌고, 제221연대는 미군 천팔백여 명을 섬멸한 뒤 15일 저녁 스스로 진지에서 빠졌다. 지원군 사상자는 칠백팔십여 명이었다9.

그날 저녁 연대 진지에 중조 연합사령부의 명령이 내려왔다9.

“6월 16일부터 일률적으로 적을 향한 주동적 공격을 멈춘다. 그러나 적이 우리에게 걸어오는 어떤 공격에도 단호히 타격을 준다.”

전령이 명령문을 읽는 동안 대피호 입구에 앉은 병사 하나가 고무 운동화 밑창을 철사로 꿰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럼 내일부터는 저쪽이 올 때만 쏘는 겁니까?”

“올 때만.”

같은 날 신화사 기자는 전선의 다른 얼굴을 보냈다. 평강군과 철원군의 지원군 부대가 4월 초부터 주민들의 봄갈이를 거들었다는 기사였다. 병사들은 논밭의 포탄 구덩이를 메우고, 미군 비행기가 뿌린 자탄을 걷어 내고, 진지를 파던 연장으로 흙을 갈아엎었다. 상감령 전선의 한 부대에서는 칠백여 명이 평강군 하송관리 농민들과 백 미터 넘는 물길을 뚫었다10.

*

1953년 6월 16일 화요일 아침, 해리 전초로 오르는 보급로 입구.

그리스 원정군 대대 제3중대, 미군 서류에서 P중대로 불린 중대의 분대장 대리 요르고스 파고메노스(21)는 그리스 크레타섬의 산골 마을 아이도노호리온에서 여덟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열세 살 때는 크레타를 점령한 독일군 밑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11. 대대장은 쿠마나코스 대령, 중대장은 스칼차스 대위였다11.

13일 밤에는 제5연대전투단 C중대, 14일 밤에는 G중대, 15일 밤에는 A중대가 차례로 해리에 올랐다. 14일 밤 중공군은 다시 뒤쪽 교통호까지 들어왔고, 15일 밤은 조용했다. 16일 아침 연대장은 사상자가 쌓인 미군 대대들을 쉬게 하려고 그리스 대대를 해리 구역에 넣었다1. 그리스 병사들은 미군이 지키던 해리가 밤마다 불꽃에 휩싸이는 것을 진지에서 지켜보았고, 그 봉우리를 ‘하로스’라고 불렀다. 죽은 이를 저승으로 건네주는 뱃사공 카론을 오늘날 그리스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었다12.

출발 전에 스칼차스는 중대를 모았다11.

“해리에는 엄폐물도 교통호도 없다. 포격에 다 깎여 나갔다. 도착하는 대로 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는다. 우리는 그 자리를 지킨다.”

“대위님, 교통호가 없으면 뭘 지킵니까?”

“네가 지금부터 파는 것.”

올라가 보니 스칼차스의 말 그대로였다. 미군과 교대하고 삽을 꽂자 흙 속에서 시신이 나왔다. 파고메노스는 사람이 빽빽이 묻힌 묘지를 파헤치는 것 같았다고 적었다. 함께 일하던 한국인 작업대가 나오는 시신을 날라 갔다. 모두 중공군이었다. 죽은 사람 냄새가 흙에 배어 어디에서나 올라왔다11. 낮에는 제10공병대대 B중대가 와서 함께 일했고, 해가 지면 내려갔다1.

북쪽 비탈은 별고지에서 훤히 보여서 낮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박격포탄에 사상자가 났다. 어두워진 뒤에야 북쪽 교통호를 파고, 요르고스 그리고라키스가 맡은 기관총 진지를 북쪽 비탈에 앉혔다11. 전초에 오른 그리스 병사는 네 개 소대 백 명이 채 안 되었다. 제4소대 대부분은 사백 미터 뒤 주저항선에서 지원 사격을 맡았고, 그중 셋이 전초 바로 뒤 오솔길 옆에 81밀리 박격포를 걸었다12.

16일 밤 중공군은 오지 않았다. 그리스 병사들은 그 하룻밤을 고스란히 삽질에 썼다. 17일 낮에도 박격포탄은 끊이지 않았고, 해가 지자 그들은 다시 손을 서둘렀다11.

파고메노스 옆에서 흙을 퍼 올리던 병사가 손을 멈추고 별고지 쪽을 보았다.

“저쪽도 지금 파고 있겠지?”

“저쪽은 우리보다 삽이 많아.”

*

1953년 6월 17일 수요일 저녁 일곱 시 십삼 분, 판문점(현 경기도 파주시와 북한 개성시 사이 공동경비구역).

쌍방 참모장교들이 지도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레 동안 날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군사분계선 긋기가 그날 끝났다. 신화사 특파기자 우민은 지난 며칠 판문점 회의실의 불빛이 캄캄한 전선을 밝혔다고 적었다. 회의실 뒤에서는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큰 건물의 터를 파고 있었다. 길가의 작은 집 네 채를 헐어 정전협정 서명식 자리를 닦는 중이었다13.

18일로 넘어가는 그 밤, 남쪽의 포로수용소들에서는 이승만 정부가 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포로들을 철조망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14.

*

1953년 6월 17일 수요일 밤 열한 시, 해리 전초 북쪽 비탈.

밤 열한 시와 자정 사이, 별고지 쪽에서 포탄이 쏟아졌다. 파수병들이 비탈을 빠르게 올라오는 중공군을 보았다. 박격포탄이 전화선을 모두 끊어서 분대장들과 장교들 사이에 연락이 닿지 않았다. 파고메노스는 그 밤 눈에 보이는 것밖에 알 수 없었고, 스칼차스의 말만 붙들고 있었다고 적었다11. 분대장 대리인 그가 옆 분대에 무엇을 묻고 싶어도 교통호를 따라 기어가 직접 묻는 수밖에 없었다. 엄체호 지붕에 박격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흙이 목덜미로 쏟아졌다.

중공군은 북동쪽과 북서쪽에서 동시에 올라왔다1. 그리스 중대는 물러서지 않고 다가가 교통호 안에서 맞붙었다. 그리고라키스의 기관총이 북쪽 비탈을 긁었다11. 첫 물결이 밀려 나갔다15. 전초 뒤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이 작은 낙하산에 매달려 내려오며 비탈을 하얗게 비췄다11.

“또 온다! 북쪽!”

새벽 두 시 사십 분, 중공군은 다시 북쪽에서 올라왔다. 세 시 십삼 분에 그들은 북쪽 비탈 교통호에 들어섰다1. 그리스 병사들은 소총 개머리판과 대검과 야전삽으로 교통호를 한 칸씩 되찾았다. 대대는 N중대를 올려 보냈다. 미 제15연대 중전차중대의 전차 한 개 소대와 그리스 보병 한 개 소대가 전초 동쪽 골짜기로 나가 중공군의 길목을 포병 사격 구역 쪽으로 몰았다1.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장은 그 밤을 이렇게 적었다15.

“P중대는 물러서기를 거부하고 다가가, 격렬한 백병전으로 많은 적을 몰아냈다. 적은 다시 모여 곧장 두 번째로 공격했고 다시 아군 교통호를 차지했다. 그리스군은 곧바로 잇달아 역습했다. 두 시간의 근접전 끝에 적은 다시 패주했고 아군 진지는 되찾아졌다.”

네 시 이 분, 중공군은 교통호에서 밀려 나갔다. 그 공격을 받치느라 중공군이 쏜 포탄은 이만 이천 발이었다1. 미 육군 전사는 18일의 공격을 두 개 대대 규모로 적었고14, 한국 국가보훈부는 그리스 대대가 다섯 시간 싸움에서 적 오백 명을 쓰러뜨렸다고 적었다16. 파고메노스의 기억에 싸움은 세 시간쯤 이어졌고, 세 시가 지나서야 조용해지기 시작했다11.

*

1953년 6월 18일 목요일 아침, 해리 전초.

날이 밝자 그리스 병사들은 죽은 동료들 곁에 무릎을 꿇었다. 인식표 두 개 가운데 하나를 죽은 이의 입에 물렸다. 옛 그리스 사람들은 장례 때 죽은 이의 입에 뱃사공 카론에게 낼 동전 한 닢을 넣었다. 해리에서는 동전 대신 인식표였다12.

여드레 동안 중공군은 81밀리 이상 포탄을 팔만 팔천팔백십 발 쏘았고, 유엔군의 박격포와 대포와 전차는 삼십육만 팔천백팔십오 발을 쏘았다1. 미 제3사단은 중공군 사상자를 사천이백 명 넘게 셈했다14. 중국 쪽 자료는 제74사단과 제24군의 다른 두 사단이 5월 27일부터 6월 23일까지 입은 사상자를 모두 합쳐 이천삼십팔 명으로 적었다1.

해리를 지킨 쪽의 명단은 이렇게 남았다. 미 제15연대 전사 68명, 부상 343명, 실종 35명. 미군 부대에 섞여 싸운 한국 병사들, 카투사 전사 8명, 부상 51명, 실종 7명. 그리스 대대 전사 15명, 부상 36명, 실종 1명. 제5연대전투단 전사 13명, 부상 67명, 실종 1명. 제10공병대대 전사 5명, 부상 23명. 제39야전포병대대 전사 5명, 부상 13명1. 차례로 해리를 맡은 미군 네 개 중대와 그리스 한 개 중대가 함께 부대 표창을 받았다1. 제15연대 제3대대의 윌리엄 매클레넌 이병은 그 여드레를 이렇게 말했다12.

“철조망 근처에서 그 사람들이 서로 겹쳐 쓰러지는 게 보였어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쪽은 해리를 원했고, 끝내 못 가졌어요. 우리한테는 지키라고 했고, 우리는 지켰습니다.”

판문점의 정전협정은 그로부터 서른아흐레 뒤인 7월 27일에 서명되었다. 해리 봉우리는 지금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2.

첫날 밤 사라진 멘컨 상병은 하와이 국립태평양기념묘지에 신원 미상으로 묻혀 있었다. 유전자 감식으로 그를 찾아낸 것은 2022년 2월이었고, 그해 5월 그는 켄터키 화이츠버그의 묘지에 묻혔다3.

찰스 존슨에게는 2010년 9월 25일, 쉰일곱 해 만에 은성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1. 2025년 1월 3일,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그 훈장을 명예훈장으로 바꾸어 누이 후아니타 멘데스에게 건넸다17. 훈장 증서는 그가 열 명 가까운 병사의 목숨을 구했다고 적었다5. 그 열 명은 그날 새벽 엄체호 입구에서 소리를 들었다. 자동소총 소리였고, 한동안 끊기지 않았다.

사료 출처

1. 영문 위키백과, 「Outpost Harry」(2026년 10월 열람) 본문과 각주(Villahermosa 2009, 286쪽; Hermes 1992, 469쪽; 胡光正·马善营 『中国人民志愿军序列』 1987, 205쪽; 생존자 협회 증언) — 해리의 높이(1,280피트)·별고지와의 거리(320야드)·주저항선과의 거리(425야드), 보급로와 교통호·150명 수용, 10킬로미터 후퇴 판단, 6월 1~8일 공중 정찰, 중공군 낮 포격 275→670발, 10일 아침 마클리의 브리핑과 발언(원문: All total, there was a reinforced PVA regiment of approximately 3,600 enemy trying to kill us), 근접신관 포격, 아침에 열두 명쯤만 성함, 에이커스의 예비대와 전차·보병 견제대, 날짜별 수비 중대와 시각(11일 05:45, 12일 22:00·22:47·02:08·04:50, 14일 01:25·03:45), 제64전차대대 견제, 16일 아침 그리스 대대 투입, 제10공병대대 B중대의 낮 작업, 18일 북동·북서 공격과 02:40·03:13·04:02, N중대 투입, 중전차중대 전차 소대와 그리스 보병 소대의 견제, 22,000발, 여드레 동안 중공군 88,810발·유엔군 368,185발, 부대별 사상자, 중국 측 2,038명(5.27~6.23, 제24군 세 사단), 다섯 개 중대 부대 표창, 존슨의 2010년 9월 25일 은성무공훈장 추서. 2. 「Last Stand in Korea: How Greek and American Troops Held Outpost Harry Against 13,000 Chinese Soldiers」, Military.com 2025.11.15, military.com/daily-news/investigations-and-features/2025/11/15/last-stand-korea-greek-and-american-troops-held-outpost-harry-against-13000-chinese-soldiers.html — 첫 포격 2만 발 이상, 7월 27일 정전, 해리가 오늘날 비무장지대 안에 있음. 3. 「Korean War soldier identified, to be interred in hometown」, Stars and Stripes 2022.5.4, stripes.com/veterans/2022-05-04/korean-war-soldier-identified,-to-be-interred-in-hometown-5890701.html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 발표 인용) — 도널드 L. 멘컨 상병(K중대, 켄터키 화이츠버그)이 6월 10일 포탄 파편에 다친 뒤 실종, 하와이 국립태평양기념묘지의 신원 미상 유해, 2022년 2월 유전자 감식으로 확인, 5월 14일 화이츠버그 그린 에이커스 묘지 안장. 4. 영문 위키백과, 「Ola L. Mize」(2026년 10월 열람)와 그가 옮긴 명예훈장 증서 — 1931년 8월 28일 앨라배마주 앨버트빌 출생, K중대, 위생병과 함께 청음초의 부상병 구조, 세 번 쓰러짐, 기관총 진지 탈환과 적 10명, 무전기로 포격 유도, 새벽 역습. 5. 미 육군, 「Medal of Honor: Private First Class Charles R. Johnson」, army.mil/medalofhonor/charlesjohnson/ — 1932년 8월 11일 뉴욕주 밀브룩 출생, 육 남매 가운데 셋째, 「버디」, 누이 제럴딘과 군악대 권유, 그의 대답(원문: If other mother's sons have to fight, I feel I need to do the same thing), 1952년 징집, B중대 브라우닝 자동소총 사수, 고교 동창 돈 딩기, 증서에 적힌 행적(엄체호 직격·수류탄 부상, 응급처치, 부상병을 끌어 옮김, 백병전, 무기와 탄약을 찾아 다시 나눔, 적과 부상자 사이에 섬, 최대 10명의 목숨을 구함). 고교 운동·트럼펫·성가대, 알링턴 고등학교의 학급 부회장과 농구부 공동 주장, 1951년 가을 하워드 대학 한 학기는 이 쪽을 옮긴 영문 위키백과 「Charles R. Johnson (soldier)」(2026년 10월 열람)에서 확인. 6. 어니 크레이머(Ernie Kramer) 회고, 해리 전초 생존자 협회(OPHSA) 웹페이지 「Ernie Kramer」, ophsa.org/Ernie_Kramer.htm (인터넷 아카이브 2021.5.12 저장본) — 제10공병대대 B중대, 분대장 애즈베리 콜과 빌린 철모·카빈, 공병 13명(장교 2·사병 11)의 지뢰 매설 자원, 지뢰를 나른 한국인 노무자(그의 표현으로 36~50세), 18시 30분 매설과 세 방향 소총 사격, 장갑차 철수 불가, A중대장 제임스 W. 에번스 중위가 기억한 지휘 엄체호의 공병 중령(원문: if there was anything he could do to help), 그리스 병사들의 트럭 사우나와 수류탄으로 깬 얼음, 그리스 취사반의 점심, 고무 운동화와 막대기를 든 중공군, 23시 조금 전의 시계, 대대 아침 보고서의 사상(사병 4명 전사, 장교 2명·사병 7명 부상), 콜을 끝내 찾지 못함. 7. 델버트 F. 톨런(Delbert F. Tolen) 소개, OPHSA 웹페이지 「Delbert F. Tolen」, ophsa.org/Del_Tolen/index.htm (인터넷 아카이브 2021.5.12 저장본) — 제5연대전투단 A중대 부중대장, 전초 아래 의무 엄체호의 역습 소대, 13일 새벽 공격조를 이끌고 교통호를 올라감. 8. 중국어 위키백과, 「中国人民解放军第二十四军」(2026년 10월 열람) — 1952년 9월 제70·72·74사단과 함께 참전, 제74사단은 1952년 8월 제25군에서 넘어옴, 1952년 12월 상감령 지구 배치, 1953년 7월 금성 전역. 9. 「抗美援朝大事记:1953年1月—1953年6月」, 共产党员网(중국공산당 당원망) 2014.10.23, news.12371.cn/2014/10/23/ARTI1414067806317276.shtml — 6월 10일 「志愿军第24军221团在炮火支援下,向守备平康以南汉滩川北岸的381东北无名高地之“联合国军”美军第3师15团1个连发动进攻,全歼守军」, 닷새 밤낮·미군 1,800여 명 섬멸·15일 저녁 자진 철수·지원군 사상 780여 명, 6월 15일 중조연합사령부 명령(「从6月16日起,一律停止主动向敌人攻击,但对敌人向我发起的任何进攻,则应坚决地给以打击」, 본문에 우리말로 옮김). 10. 신화사 조선전선 6월 15일발 기사(지원군 부대의 봄갈이 지원, 제목은 따로 확인하지 못함), 『人民日报』 1953.6.18 1면, cn.govopendata.com/renminribao/1953/6/18/1/ — 철원·평강 지원군 부대의 봄갈이 지원(포탄 구덩이 메우기, 자탄 제거, 진지 연장으로 땅 갈기), 상감령 전선 한 부대 700여 명이 평강군 하송관리에 100미터 넘는 물길을 팜. 11. 요르고스(George) 파고메노스 기록, OPHSA 웹페이지 「George Pagomenos」, ophsa.org/George_Pagomenos.htm (인터넷 아카이브 2021.5.12 저장본, 그의 『한국전쟁 그리스 병사의 일기』 2004년 그리스어판의 요약) — 1929년 2월 8일 크레타섬 아이도노호리온 출생, 여덟 남매의 막내, 열세 살 때 독일군 강제 노역, 분대장 대리, 쿠마나코스 대령과 제3중대장 스칼차스 대위, 15일 밤 대기와 16일 아침 출발, 스칼차스의 훈시(교통호 없음·물러서지 말 것), 시신 속의 삽질과 한국인 작업대, 냄새, 낮에 북쪽 비탈 작업 불가와 박격포 사상, 그리고라키스의 기관총, 16일 밤 공격 없음, 17일 밤 11시~자정 공격 개시, 전화선 절단, 백병전과 두 번째 공격, 약 세 시간, 18일 세 시 넘어 잠잠해짐, 낙하산 조명탄. 12. 해리 전초 프로젝트(Outpost Harry Project, 설립자 마이크 파고메노스) 웹페이지 「About Us」「Parallels」「Documentary」, outpostharry.org (인터넷 아카이브 2026년 1~3월 저장본) — 미군이 지키던 해리가 밤에 공격받는 것을 본 그리스 병사들이 「하로스」라 부름, 16~18일 전초의 P중대 4개 소대 100명 미만(추정), 제4소대의 주저항선 지원 사격과 전초 뒤 81밀리 박격포 3명, 죽은 이의 입에 인식표 하나를 물림과 카론의 동전, 다큐멘터리 보도자료에 실린 제15연대 제3대대 윌리엄 매클레넌 이병의 말(원문: We could see them out there near the wire, falling right on top of each other. It just wasn't human. I guess they wanted Harry. But they didn't get it. They told us to hold it. We did.). 13. 吴敏, 「迹象表明划定军事分界线工作已经完成」(신화사 개성 6월 18일발), 『人民日报』 1953.6.19 1면, cn.govopendata.com/renminribao/1953/6/19/1/ — 참모장교들의 이레 동안의 지도 작업, 17일 오후 일곱 시 십삼 분까지 작업, 밤늦게 밝은 판문점 회의실 불빛, 회의실 뒤 큰 건물 터 파기, 길가 작은 집 네 채를 헐어 서명식 자리를 닦음. 14.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미 육군 군사사센터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총서, 1966·1992 재판) 제21장 「The Last Offensive」, koreanwaronline.com/history/TruceTent/ch21.htm — 6월 10일 중공군 제74사단의 해리 공격 시작(한 개 중대로 시작해 두 개 대대를 더함), 해리가 잭슨 고지 남동쪽 2.5마일, 11일 밤 한 개 연대 추정, 14일 소규모 탐색, 18일 두 개 대대 규모 공격, 제3사단이 추정한 아흐레 동안의 중공군 사상자 4,200명 이상(원문: had cost over 4,200 casualties during the nine-day period, 근거 U.S. IX Corps, Comd Rpt, Jun 53), 같은 18일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15. 영문 위키백과, 「Greek Expeditionary Force (Korea)」(2026년 10월 열람)에 실린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 원문 「Company P Greek Expeditionary Forces Battalion (Second Award)」 — 6월 17~18일 수랑리 부근, 북동·북서에서의 공격, 물러서기를 거부한 백병전, 두 번째 공격과 잇단 역습, 동쪽 견제대, 두 시간의 근접전(본문에 일부를 우리말로 옮김). 16. 국가보훈부(영문), 「Greece」 참전국 소개,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07 (자료모음 U14, 30화 출처와 같은 쪽 — 이 화에서는 1953년 대목) — 6월 17일(대대 배치 다음 날) 「Hill Harry(420미터)」에 대한 중공군 공격, 다섯 시간 싸움에서 적 500명 사살. 17. Joe Lacdan, 「Medal of Honor recipient shielded the wounded from harm」, Army News Service 2025.1.17, army.mil/article/282602 — 2025년 1월 3일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누이 후아니타 멘데스에게 명예훈장 전달.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찰스 R. 존슨 1932년생(5번 자료), 올라 L. 마이즈 1931년생(4번 자료), 요르고스 파고메노스 1929년생(11번 자료). 1953년 6월 당시 나이로는 존슨 20세, 마이즈 21세, 파고메노스 24세다. 마틴 마클리, 러셀 에이커스, 제임스 에번스, 윌리엄 매클레넌, 도널드 멘컨(1953년 실종 당시 21세로만 보도), 돈 딩기, 어니 크레이머, 애즈베리 콜, 델버트 톨런, 스칼차스, 쿠마나코스, 요르고스 그리고라키스, 우민, 후아니타 멘데스, 제럴딘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그리스 대대장 — 파고메노스는 「쿠마나코스 대령 밑에서 복무했다」고 적었고 영문 위키백과 「Outpost Harry」도 그리스 쪽 지휘관을 게오르기오스 쿠마나코스로 적었다. 그러나 「Greek Expeditionary Force (Korea)」 항목은 쿠마나코스를 1950년 12월 부산에 도착할 때의 중령으로 적었고, 검색 요약으로만 본 그리스 육군 누리집 글은 디오니시오스 아르부지스 중령이 예비대를 투입했다고 적었다(그리스 육군 누리집은 접속이 되지 않아 원문을 보지 못했다). 본문은 현장에 있던 파고메노스의 기록을 따랐다. [자료 충돌] 그리스 중대의 이름 — 미군 표창장과 미군 기록은 「P중대」, 파고메노스는 「제3중대」로 적었다. 같은 중대로 보고 본문에 둘 다 적었다. [자료 충돌] 그리스 중대의 싸움 시간 — 미군 표창장은 두 시간의 근접전, 파고메노스는 약 세 시간, 국가보훈부는 다섯 시간으로 적었다. 미군 기록의 시각은 자정 무렵 첫 공격, 02:40 두 번째 공격, 03:13 교통호 진입, 04:02 격퇴다. 국가보훈부의 「적 500명 사살」은 다른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고지 높이도 420미터(국가보훈부·위키백과 연표), 440고지(그리스 육군 누리집 검색 요약), 1,280피트(약 390미터, 위키백과 본문)로 다르다. [자료 충돌] 중국 쪽 기록과 미군 기록 — 공산당원망 대사기는 6월 10일 제221연대가 미 제15연대 한 개 중대를 「全歼」했고 닷새 밤낮 싸워 미군 1,800여 명을 섬멸한 뒤 15일 저녁 스스로 물러났다고 적었다. 미군 기록은 매일 아침 미군이 전초를 지켰고, 18일 새벽까지 공격이 이어졌다고 적었다. 대사기의 「평강 남쪽 한탄강 북쪽 기슭 381고지 동북쪽 무명고지」가 해리라는 것은 같은 날짜·같은 미군 연대·같은 중공군 연대 번호(미군 정찰 기록의 제221연대)로 미루어 본 것이고, 중국 쪽 문서에서 「哈利」라는 이름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중조연합사령부는 16일부터 주동적 공격을 멈추라고 명령했는데 미군·그리스 기록에는 17일 밤 공격이 있다. 이 공격을 중국 쪽이 어떻게 적었는지는 찾지 못했다. [자료 충돌] 사상자 — 중공군 사상자는 미 제3사단 추정 4,200명 이상(Hermes), 중국 측 「제74사단과 제24군 다른 두 사단, 5월 27일~6월 23일 합계 2,038명」(위키백과가 인용한 胡光正·马善营, 원서 미확인), 대사기의 제221연대 「780여 명」으로 크게 다르다. 미군 쪽 합계도 위키백과 정보란은 전사 102·부상 553·실종 44로 적어 본문의 부대별 합과 맞지 않는다. 본문은 부대별 수치를 적었다. 중공군 병력도 위키백과 정보란·다큐멘터리 보도자료의 「여드레 동안 1만 3천 명」과 정보 부서의 밤별 추정이 있다. [자료 충돌] 표창 받은 중대 — 위키백과는 K중대 등 다섯 개 중대(미군 넷·그리스 하나)로 적었고, Military.com은 미군 쪽을 「제15연대 K·B·A중대와 제65연대 F중대」로 적었다. 본문은 「미군 네 개 중대와 그리스 한 개 중대」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존슨의 출생지 — 미 육군은 뉴욕주 밀브룩, 영문 위키백과 정보란은 코네티컷주 섀런으로 적었다. 본문은 미 육군을 따랐다. [자료 충돌] 지뢰를 나른 한국인 — 크레이머는 이들을 「카투사」라고 부르면서 서른여섯에서 쉰 살의 징용된 비전투원이라고 적었다. 미군에 배속된 한국 병사(카투사)보다는 노무 부대인 한국근무단의 모습에 가까워 본문은 「한국인 노무자」로 적었다. [자료 충돌] 이승만의 포로 석방 날짜 — Hermes는 6월 18일, 공산당원망 대사기는 17일 밤(18일 새벽)으로 적었다. 본문은 「18일로 넘어가는 밤」으로 적었다. [재구성] 마클리의 「오늘 밤이다. 별고지에서 내려온다」, 「우리 머리 위에 떨어뜨려도 됩니까?」로 시작하는 포병 관측반과 마클리의 무전(마클리가 엄체호 안에서 근접신관 포격을 불렀다는 것은 기록), 엄체호 지붕 위 파편 소리와 호루라기(호루라기는 크레이머의 회고), 존슨과 딩기의 「버디, 너 피 나」로 시작하는 대화, 크레이머가 장갑차를 기다리며 한 사우나와 점심 이야기의 대화 형식(사우나·수류탄·점심 내용은 그의 회고), 「수류탄으로 냉탕을 만들었다고?」라는 말, 중공군 진지에서 명령문을 읽는 장면과 운동화를 꿰매던 병사의 대화, 스칼차스 훈시의 말투(내용은 파고메노스 기록)와 「네가 지금부터 파는 것」으로 끝나는 문답, 「저쪽도 지금 파고 있겠지?」로 시작하는 문답, 17일 밤 파고메노스가 교통호를 기어 다닌 몸짓과 목덜미로 쏟아진 흙, 「또 온다! 북쪽!」, 18일 아침 인식표를 물리는 장면의 몸짓(관행은 해리 전초 프로젝트 기록), 마지막 두 문장의 자동소총 소리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존슨이 엄체호를 나선 뒤의 일은 「치명상을 입을 때까지 싸웠다」는 것 말고는 기록에 없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5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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