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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16,929자)

후크 고지 전투 — 마지막 밤은 오지 않았다

1950 · 네오

후크 고지 전투, 1953년 5월 28일~29일 — 사미천이 임진강으로 드는 골짜기 입구의 후크 고지와 둘레 진지(121고지·소시지 능선·146고지, 앞쪽 전초 로슨·바르샤바), 중공군 제46군 제133사단의 공격 방향과 베티 그레이블 쪽에서 온 마지막 돌격, 영국 웰링턴 공작 연대 1대대 예비중대의 역습, 같은 밤 서쪽 네바다 전초의 터키 여단.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3년 5월 18일 새벽, 후크 고지(현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북쪽, 군사분계선 가까운 곳) — 북쪽에서 내려오는 내 사미천이 임진강에 닿기 전 지나는 골짜기 입구, 그 입구를 내려다보는 초승달 모양 능선.

존 스택풀(19) 소위는 밤새 비탈에 철조망을 쳤다1. 벨파스트에서 나 샌드허스트 사관학교를 거친 그가 이 달 중순부터 맡은 것은 대대의 돌격공병소대였다2. 쇠말뚝을 박는 망치 소리가 날 때마다 소대원들은 손을 멈추고 북쪽 어둠을 살폈다.

영국 웰링턴 공작 연대 1대대, 병사들끼리 「듀크스」라고 부르는 대대는 닷새 전 밤 이 능선에 올라와 스코틀랜드 연대 블랙 워치와 자리를 바꾸었다3. 후크는 사미천 골짜기의 문이었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그 끝에 서울이 있었다3. 갈고리처럼 휜 꼭대기 왼쪽 뒤로 121고지가 붙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소시지라고 부르는 길쭉한 능선이 이어졌다. 그 앞 비탈 아래에 전초 로슨과 바르샤바가 엎드려 있었다4. 한 듀크스 장교는 훗날 이 능선을 칭기즈 칸이 한반도로 들어오던 옛길 한가운데 툭 튀어나온 아픈 엄지손가락이라고 불렀다. 그 손가락 하나가 엄청나게 넓은 땅을 내려다보았다5. 1952년 10월에는 미 제1해병사단이 이 능선을 중공군에게 잃었다가 되찾았고, 그 싸움에서 해병 여든둘이 전사하고 삼백여든여섯이 다쳤다4. 중국 쪽 기록은 그때 제40군 제357연대의 세 중대가 진지를 차지했다고 적었다6. 11월 18일 밤에는 블랙 워치가 이곳을 지켰다. 그 밤 듀크스의 기관총들은 이천오백 야드 떨어진 건너편 고지에서 열한 시간 동안 오만 발 넘게 사미천 골짜기를 가로질러 쏘아 블랙 워치를 거들었다4. 이번에는 듀크스가 능선 위에 있었다. 블랙 워치는 5월 초 이곳에서 다시 공격을 받아 열두 명이 전사하고 일흔세 명이 다치고 스무 명이 사라진 채 내려갔다7. 교대한 듀크스 곁에는 제1왕립전차연대 C대대의 센추리온 전차 두 개 소대가 붙었다8.

밤마다 건너편 산에서 중국군 확성기가 영어로 떠들었다. 듀크스는 이 능선에서 곧 쫓겨난다는 말이었다8.

“저 친구들은 우리 대대 이름을 정확히 아네.”

“일주일에 일 파운드 육십이 펜스 받는 사람들 이름까지 외워 주는 데는 저기밖에 없어.”

대대 병사의 넷에 셋은 나라가 불러서 온 징집병이었고, 그들이 받는 돈이 꼭 그만큼이었다5. 한국에 온 영국군 육만 명 가운데 많은 수가 그런 징집병이었다9.

전날 밤 열한 시쯤, 후크로 이어지는 앞쪽 비탈 줄기들에서 사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아군 포탄이 그쪽으로 날아갔다. 새벽 두 시 반쯤 소리가 잦아들었고, 오십 야드도 못 나간 듀크스의 정찰대가 중공군 정찰대와 맞부딪쳐 양쪽에서 사람이 쓰러졌다8. 그리고 아침, 중국군 하나가 철조망 쪽으로 넘어왔다. 그는 큰 공격이 곧 닥친다고 했다3. 그 말이 상급 부대로 올라가자 제29여단장 더글러스 켄드루(40) 준장은 듀크스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진지와 방어 계획을 이미 손에 익힌 부대였다3. 켄드루는 1935년 잉글랜드 럭비 대표팀 주장을 지낸 사람이었다10. 철조망은 한 겹씩 늘어났고, 땅굴은 깊어졌고, 지뢰가 묻혔다3. 스택풀은 뒤에 다쳐 서울로 후송되었다1. 그는 한국에서 세운 공으로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2.

*

1953년 5월 하순, 중국인민지원군 제46군 지휘소 — 임진강 북쪽, 영연방 제1사단과 터키 여단을 마주한 군단 사령부.

군장 샤오취안푸(34)는 지난해 8월 지원군 제46군의 군장이 되어 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는 열네 살 때 홍군 유격대에 들어간 사람이었다11. 중국 쪽 기록은 그의 군이 정전 때까지 미 해병대와 영연방 사단, 터키 여단 같은 외국 부대 아홉과 백오십 번 넘게 부딪쳤다고 적는다11.

제46군은 지난해 10월 말 제42군에게서 방어선을 넘겨받았다11. 5월 13일, 지원군은 전선 전체에서 여름 반격을 시작했다. 중국 쪽 문서가 적은 목표는 넷이었다. 적을 없애고, 회담에 힘을 보태고, 경험을 얻고, 진지를 고친다12. 4월에 마오쩌둥(57)은 지원군 사령관 대리 덩화(40)에게 이렇게 일렀다12.

“싸우기만 하고 회담은 상관하지 마라.”

판문점(현 파주시 진서면)의 천막에서는 포로 문제가 마지막 고비를 넘고 있었다. 중국 쪽 기록은 여름 반격의 첫 단계에서 유엔군 사천백서른세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사로잡았고, 지원군도 천육백여덟 명을 잃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미국이 5월 25일 중국과 북한의 안을 거의 받아들였다고 적었다12. 서명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능선 하나가 휴전선이 지나갈 자리를 바꿀 수 있었다.

제46군은 처음에 제133사단으로 후크와 그 둘레의 진지 다섯 곳을 한꺼번에 칠 생각이었다. 중국 쪽 지도는 그 능선을 아래 마을 이름을 따서 평촌 남산이라고 불렀다13. 그러다 제399연대 6중대의 전투조장 하나가 진지를 빠져나가 적에게 넘어갔다13. 공격 계획을 아는 사람이 넘어간 셈이었다. 군은 계획을 줄였다. 강화된 중대 하나로 평촌 남산의 진지 한 곳만 떠보고, 서쪽 터키 여단의 네바다 전초들은 배속된 제120사단이 치기로 했다13. 제120사단은 시간이 모자라 3월 28일 그 전초들을 칠 때 쓴 계획을 조금 고쳐 다시 쓰기로 했다13.

지원군 포병은 5월 19일부터 날마다 그 능선에 포탄을 떨어뜨렸다. 중국 쪽 기록은 그 포탄을 구천 발쯤으로 적었다14. 영국 쪽 일지는 5월 10일부터 28일까지 그 포격과 박격포에 대대 병사 쉰 명쯤이 쓰러졌다고 적었다8.

*

1953년 5월 19일부터 27일까지, 후크 고지와 그 앞 골짜기.

19일 밤 중공군이 처음으로 진지를 건드리고 물러갔다. 대대는 그것을 힘을 실은 정찰로 보았다. 다음 날 밤에는 앞쪽 전초 바르샤바에 공격이 왔다가 날이 밝기 전에 걷혔다8. 블랙 워치가 이웃 고지로 돌아와 킹스 연대와 자리를 바꾸었다8.

듀크스의 전투 정찰대는 밤마다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들은 건너편 산자락의 동굴들에 중공군이 들어 있는 것을 찾아냈다. 대대는 맞은편에 적어도 한 개 대대, 어쩌면 두 개 대대가 더 있다고 셈했다. 셋이나 다섯이 하나를 상대해야 하는 셈이었다8.

26일, 대대는 121고지와 후크의 소대들을 맞바꾸었다. 철조망은 계속 늘어났다. 27일, 중공군 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8.

“오늘 밤일까요?”

“어제도 그 소리 했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맞을 확률이 더 높죠.”

*

1953년 5월 28일 아침 열 시 십오 분, 후크 고지 — D중대 참호.

박격포탄이 먼저 떨어지고 곡사포탄이 뒤를 이었다8. 병사들은 땅굴로 들어가 귀를 막았다. 땅굴 기둥에서 흙이 부슬부슬 떨어졌다. 대대에는 영연방 사단에 배속된 한국인 병사들이 섞여 있었다. 포격이 멎은 틈에 영국 병사 하나가 한국인 병사에게 담배를 건넸고, 두 사람은 같은 성냥불에 머리를 맞댔다7.

“이거 다 끝나면 서울 가서 맥주.”

“맥주, 오케이. 돈은 당신.”

다섯 시 사십오 분부터 한 시간 동안 무거운 포탄이 이백 발 넘게 진지에 떨어졌다7. 저녁 여섯 시, 능선 앞 고정 정찰조가 엎드려 있던 전초 로슨에 박격포탄이 쏟아졌다8. 로슨의 병사들은 흙을 뒤집어쓴 채 무전기에 대고 숫자를 불렀다. 같은 시각 중국군의 무선 교신이 갑자기 늘었고, 여단 정보반이 그것을 잡았다. 켄드루에게 오늘 밤 공격이 온다는 보고가 올라갔다8.

“포병에 알려. 방어 사격 목표 전부 다시 확인하라고.”

여단 지휘소의 지도 위에서 후크 앞 골짜기의 사격 목표 번호들이 하나하나 짚였다. 포탄과 전차포와 기관총이 미리 정해 둔 땅을 덮는 방어 사격 계획이었다. 대대는 그 계획을 닷새 넘게 손질해 왔다3.

건너편 골짜기에서 나팔이 울렸다5. 일곱 시 오십 분, 삼 분 동안 포탄이 능선을 덮었다. 일곱 시 오십삼 분, 포격이 멎자마자 중공군이 후크로 달려 올라왔다. 이 분 만에 그들은 앞쪽 참호에 닿았다8. 그날 밤 지원군은 그 능선에 포탄 만 천 발을 쏟았다7.

“전원 사격 위치로!”

땅에 반쯤 묻혀 있던 센추리온 전차 두 대가 이십 파운드 포를 쏘다가 둘 다 포탄을 맞았다5. 브라우닝 기관총 한 정이 직격탄에 날아가 사수 다섯이 전사하고 셋이 다쳤다. 옆 기관총이 그 자리를 이어 쏘았다5. 무전기가 하나둘 부서졌다. 대대는 여단과 말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되었다5. 중공군은 D중대 진지 안으로 들어왔고, 땅굴 입구마다 폭약 가방을 던져 넣었다3.

샌드허스트를 막 나온 젊은 소대장 하나가 피를 흘리며 중대장의 엄폐호로 굴러 들어왔다. 눈 한쪽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진지를 더는 지킬 수 없다고 보고했다5. 중대장이 잘라 말했다.

“헛소리. 돌아가!”

소대장은 돌아갔다.

중국 쪽 기록은 같은 시각을 다르게 적었다. 제133사단 제399연대의 두 중대가 화포 일흔여섯 문의 지원을 받아 세 갈래로 평촌 남산에 올랐다. 두 시간 남짓 싸운 끝에 진지를 차지했고, 지키던 4중대를 모두 없앴다는 기록이었다14. 제46군 지휘소에는 진지를 차지했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계획을 줄인 공격이었고, 군은 그것을 성공으로 적었다14.

*

같은 밤, 후크 고지 땅굴.

지원중대장 루이스 커쇼 소령은 지난 전쟁 대부분을 아이슬란드 같은 먼 기지에서 보냈다5. 그날 밤 그는 땅굴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중공군과 마주쳤다. 몇 걸음 앞에서 중공군 하나가 수류탄을 던졌다. 파편이 다리와 엉덩이에 박혔고, 철모가 벗겨지고 스텐 기관단총이 손에서 튀어 나갔다5.

그는 옆 참호로 기어 들어갔다. 거기에 다친 한국인 병사 넷이 누워 있었다5. 커쇼는 군화 끈을 풀어 피가 흐르는 다리를 동여맸다. 한국인 병사들은 신음을 참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신이 자꾸 흐려졌다. 그는 다시 총을 잡았고, 중공군이 땅굴 입구를 폭파할 때까지 쏘았다5.

다른 땅굴에서는 워커 상병의 분대가 입구를 막고 버텼다. 워커는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손전등 불빛에 연발로 쏘았다. 비명이 나고, 조용해지고, 입구에서 폭약이 터졌다. 땅굴은 무덤처럼 닫혔다5. 흙먼지 속에서 숨이 막혔다. 병사들은 천식 환자처럼 헐떡이며 바닥에 엎드렸다5. 천장 틈으로 포탄 터지는 진동이 내려왔다. 그것이 중공군 포탄인지 영국군 포탄인지 굴 안에서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손으로 더듬어 무너진 입구의 흙을 긁었다. 손톱 밑으로 젖은 흙이 들어왔다. 밖에서 서툰 영어가 들렸다.

“네 친구들, 어디?”

두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스미스 일병이 대답했다.

“여기 없어. 이 굴엔 아무도 없어.”

굴 안에서 숨을 죽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물이 반 병 있었다. 그는 한 시간에 한 번씩 돌아가며 한 모금씩만 핥게 했다5.

커쇼의 굴에서는 소령이 소리를 질렀다5.

“듀크스는 안 죽는다. 버텨!”

*

1953년 5월 28일 밤 여덟 시 이십오 분부터 29일 새벽까지, 후크 둘레 능선.

여덟 시 이십오 분, 후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 더 많아졌다. 여덟 시 사십오 분, 새 중공군 무리가 앞쪽 전초 바르샤바를 거쳐 올라와 첫 공격의 살아남은 병사들과 합쳤다8. 바르샤바는 후크 앞 오백 야드 아래의 전초였다15.

듀크스는 후크 위에 영국군 포탄을 불러들였다. 땅굴에 갇힌 아군 머리 위였다. 사단 포병과 미 제1군단 포병은 그 싸움 동안 크고 작은 포탄 삼만 칠천팔백십팔 발을 쏘았고, 미군 로켓포대가 로켓 삼백스물다섯 발을 더했다7. 제1왕립전차연대 C대대의 센추리온들은 포탄 오백네 발과 기관총탄 이만 이천오백 발을 쏘았다7. 미군 곡사포 한 문은 이 분마다 조명탄을 띄웠고, 그 일을 일곱 시간 동안 멈추지 않았다8.

후크 왼쪽 뒤의 121고지로는 중공군 두 중대가 올라왔다. 철조망까지 닿은 사람은 여섯이었다8. 146고지로 가던 대대는 영국 킹스 연대가 기다리는 앞에서 포탄에 거의 다 쓰러졌다. 영국군은 그 일을 나중에야 알았다8. 듀크스의 오른쪽을 친 네 번째 공격도 킹스 연대 1대대가 포병의 도움을 받아 막았다7.

같은 밤 서쪽 네바다 전초에서는 터키 여단이 중공군 제120사단 제358연대의 두 중대와 싸우고 있었다13.

밤 열두 시 반, 마지막 공격이 북쪽 능선 베티 그레이블 쪽에서 왔다. 미국 영화배우 이름을 붙인 그 능선에서 중공군 아흔 명쯤이 로슨으로 달려 내려왔다. 포탄과 박격포, 기관총이 그들을 한꺼번에 덮었다. 다음 날 아침 철조망에 걸린 시신이 서른쯤이었다8.

듀크스는 밤 열한 시 사십오 분에 역습할 계획이었다. 계획은 바뀌었다. 무너진 옛 참호를 따라 한 칸씩 되짚어 올라가기로 했다8. 예비중대가 나섰다3. 마이클 캠벨러머턴(17)과 그의 단짝 데이비드 길버트스미스가 두 소대를 하나씩 이끌었다16. 키가 백구십삼 센티미터인 캠벨러머턴은 대대 럭비팀 선수였다5.

“럭비랑 똑같아. 한 칸씩 밀고 올라간다.”

“럭비 상대는 수류탄을 안 던지잖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던져.”

포탄에 꼭대기의 모양이 바뀌어 있었다. 무너진 흙과 엉킨 철조망 사이로 소대는 참호 한 칸, 땅굴 입구 하나씩을 되찾았다5. 그 밤 분대 진지를 끈질기게 지킨 코너 일병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해 8월 14일 영국 관보는 그의 이름을 전사자 전공 표창 명단에 올렸다3.

새벽 세 시 반, 대대는 후크에 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3. 대대장 번버리 중령은 그날 대대 일지에 그 밤의 보고서를 붙였다7.

*

1953년 5월 29일 아침부터 정오까지, 후크 고지.

새벽빛 아래 능선은 다른 산이 되어 있었다. 영국 쪽 기록은 중국군 포탄 만 발쯤이 꼭대기를 여섯 자 깊이의 고랑으로 갈아엎었다고 적었다4. 철조망마다 중공군 시신이 걸려 있었다5. 날이 밝자 구조대가 무너진 땅굴 입구를 파기 시작했다8. 커쇼의 굴이 열렸다. 피를 많이 흘린 소령은 아직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구조대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정신을 잃었다5.

“내가 맨 마지막으로 나간다. 그렇게 해.”

켄드루가 능선에 올라왔다. 그는 지난 전쟁에서 수훈장을 세 번 받은 사람이었고, 이 한국에서 네 번째를 받게 된다10. 그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5.

“세상에, 저 듀크스. 놀라웠다. 지난 전쟁 내내 저런 포격은 본 적이 없어. 그래도 그들은 후크를 지켰어. 그럴 줄 알았지.”

듀크스의 참호와 무기는 대부분 부서져 있었다. 병사들은 서 있는 채로 졸았다.

그는 대대를 곧바로 빼기로 했다. 정오, 영국 로열 퓨질리어스 1대대가 줄지어 능선을 올라왔다8. 그 대대 A중대의 장교 브라이언 웹스터는 지난밤 중공군이 후크를 뚫고 내려올 때를 대비해 뒤쪽 저지 진지에 들어가 있었다. 중공군 포탄은 그 뒤 보급로의 할리퀸 다리에도 떨어졌다. 그는 그 진지에서 영국군 포탄이 후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는 공병들이 부서진 진지를 손보는 것을 보며 다음 날 밤의 공격을 걱정했다17. 중공군이 후크 둘레로 다시 크게 몰려온 것은 7월이었다4. 듀크스가 이 능선의 마지막 밤이 되리라 여겼던 밤은 오지 않았다.

교대하러 올라온 퓨질리어 하나가 부서진 참호와 시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5.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흙투성이 듀크 하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별일 없었어. 손님 몇 배웅했을 뿐이야.”

대대 기록은 장교 셋과 병사 열일곱이 전사하고, 장교 둘과 병사 여든넷이 다치고, 스무 명이 사라졌다고 적었다. 사라진 사람 대부분은 포로가 되어 있었다3. 그들은 그 밤 중공군에게 끌려 북쪽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 가운데 열여섯은 두 달 뒤 정전이 된 다음에야 풀려나 돌아왔다8. 그 숫자 말고도 대대를 거든 포병 셋과 한국인 병사 하나가 전사했다7. 영국 쪽은 중공군이 이백오십 명쯤 전사하고 팔백 명쯤 다쳤다고 추정했다3. 중국 쪽 기록은 영국군 백육십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고 스물한 명을 사로잡았다고 적었다14. 두 군대가 모두 그 밤을 이긴 밤으로 적었다. 능선은 영국군 손에 남았다.

나흘 뒤 6월 2일, 영국 여왕의 대관식 날이었다. 사단 포병은 빨강·하양·파랑 연막탄을 중공군 진지에 쏘아 축포를 대신했다7.

*

1953년 초여름(날짜는 기록에 없다),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의 공업 도시 허더즈필드, 동네 몰드그린.

캐슬린 깁슨은 결혼한 지 한 해가 되었다18. 배 속의 아이는 여덟 달째였다. 그녀는 집에 앉아 아기 옷을 뜨고 있었다19.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경찰관 둘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먼저 이야기하겠다고 했고, 다음에는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가 그녀를 불러 들였다19.

남편 로이 깁슨은 징집병이었다. 그는 5월 후크 고지에서 중공군을 막다가 전사했다. 스물한 살이었다19.

뜨개바늘이 의자 위에 놓였다. 그녀는 울음을 삼켰다. 훗날 그녀는 그날을 이렇게 말했다19.

“아이를 가졌을 때는 무너질 수가 없어요. 아기가 있으니까.”

아들 로버트는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19. 나라에서 나오는 돈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일하러 나가라는 말을 들었고, 아직 젊으니 재혼하면 된다는 말도 들었다19. 네 해 뒤 그녀는 다시 결혼했다18. 딸 둘을 더 낳았고, 그 아이들을 키웠다18.

예순 해가 지나 여든둘이 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19.

“평생 따라다녀요. 잊히지 않아요. 그냥 안고 사는 법을 배우는 거죠.”

몰드그린의 크라이스트 교회에 로이 깁슨의 이름과 연대 이름을 새긴 나무 명판이 걸린 것은 2013년 11월 전몰자 추모일이었다18. 그날까지 그의 고향에는 그의 이름이 적힌 곳이 하나도 없었다18.

사료 출처

1. 영국 제국전쟁박물관(IWM) 구술 기록, 「Stacpoole, Alberic John (Oral History)」 소장번호 12498, iwm.org.uk/collections/item/object/80012230 (2026년 10월 열람, 목록 설명만 확인하고 녹음은 듣지 못함) — 1931년 벨파스트 태생, 1950년 샌드허스트 사관생도, 웰링턴 공작 연대 1대대 지원중대 장교로 후크 진지·1953년 5월 중공군 공격과 역습·철조망 공사, 부상과 1953년 6월 서울 후송, 무공십자훈장 수훈. 2. Independent Catholic News, 「Death of Ampleforth monk, Fr Alberic Stacpoole」(2012), indcatholicnews.com/news/21179 — 1931년 벨파스트에서 존 스택풀로 태어남, 1952년 웰링턴 공작 연대 1대대 입대, 1953년 5월 13~19일 돌격공병소대 지휘, 한국에서 부상, 무공십자훈장. 3. 웰링턴 공작 연대 연대협회, 「Korea and The Hook, 1953」, dwr.org.uk/history/regimental-battle-honours/korea-hook-1953/ (현재 사이트가 막혀 인터넷 아카이브 2019년 2월 26일 사본으로 읽음) — 5월 12/13일 블랙 워치 교대, 후크가 사미천 골짜기와 서울로 가는 길목, 17/18일 포격 시작과 18일 중국군 탈주병의 정보, 여단장이 진지를 아는 듀크스를 남기기로 함, 엄폐호 강화·철조망·지뢰·방어 사격 계획, 28/29일 D중대 진지 돌입과 폭약 가방, 대대 예비중대의 역습과 03시 30분 「적 없음」 선언, 코너 일병의 분대 진지 고수와 사후 전공 보고 표창(1953년 8월 14일 관보), 장교 3·병사 17 전사, 장교 2·병사 84 부상, 실종 20(대부분 포로), 중공군 추정 전사 250·부상 800, 포탄 3만 8천 발 넘게. 4. Al Hemingway, 「Fighting for the Hook」, 『Military Heritage』 2007년 2월호, Warfare History Network 게재(인터넷 아카이브 2024년 5월 22일 사본), warfarehistorynetwork.com/article/fighting-for-the-hook/ — 1952년 10월 미 해병대의 손실(전사 82·부상 386·실종 27), 11월 18일 블랙 워치 전투 때 듀크스 기관총의 11시간 5만 발 넘는 지원 사격(2,500야드 거리, 사미천 골짜기 건너), 후크·로슨·바르샤바·소시지·121·146고지 배치, 5월 29일 121고지 쪽에서 로슨으로 온 약 100명과 철조망의 시신 30구, 미군 곡사포의 2분 간격 조명탄 7시간, 중국군 포탄 1만 발이 꼭대기를 6피트 고랑으로 갈아엎음. 5. WarHistory.org, 「Commonwealth Division and the Hook」(2026년 10월 열람), warhistory.org/article/commonwealth-division-and-the-hook — 「sore thumb … Genghis Khan’s old route」(듀크스 장교), 징집병 넷에 셋·주급 1.62파운드, 나팔과 박격포, 센추리온 두 대 피격, 샌드허스트 출신 소대장의 「untenable」과 중대장의 「Balls … get back!」, 브라우닝 기관총(전사 5·부상 3), 무전기 파손, 커쇼 소령(아이슬란드 근무, 수류탄 부상, 철모·스텐 상실, 한국인 부상병 넷, 군화 끈 지혈, 「The Dukes don’t die … Stick it!」, 「See that I am the last out!」), 워커 상병 분대(손전등, 폭약 가방, 천식 환자처럼 숨 막힘, 「Where your friends?」, 스미스 일병의 거짓말, 물 반 병을 한 시간에 한 모금씩), 캠벨러머턴(6피트 4인치, 대대 럭비팀)의 역습, 무너진 꼭대기, 켄드루의 말(원문: My God, those Dukes! They were marvellous. In the whole of the last war I never knew anything like that bombardment. But they held the Hook…I knew they would…), 퓨질리어와 듀크의 문답. 출처를 밝히지 않은 대중 역사 글이다. 6. 중국어 위키백과, 「第一次坪村南山戰鬥」(2026년 10월 열람; 군사과학원 『中国人民解放军全史』 부록 인용) — 1952년 10월 26일 밤 지원군 제40군 제119사단 제357연대 3개 중대가 평촌 남산(후크) 점령, 위치 「京畿道长湍郡长道面项洞里坪村南山」, 제46군의 방어 인계. 7. 영문 위키백과, 「Third Battle of the Hook」(2026년 10월 열람; 영국 국립기록보관소 WO 308/53 대대 일지와 1953년 5월 29일 번버리 중령 보고서 인용) — 후크 좌표, 블랙 워치 손실(전사 12·부상 73·실종 20), 중국군 포탄 11,000발(28일 밤)과 17시 45분~18시 45분 중포탄 200발 넘게, 영국·미 제1군단 포탄 37,818발·로켓 325발, 제1왕립전차연대 C대대 20파운드 포탄 504발·기관총탄 약 22,500발, 킹스 연대 1대대의 네 번째 공격 저지, 지원 부대 손실(제20야전포병연대 전사 2, 제61경포병연대 전사 1, 카트콤 전사 1), 카트콤과 담배를 나누는 듀크스 병사 사진, 6월 2일 대관식 날 빨강·하양·파랑 연막탄, 중공군 제46군 제133사단. 8. Britain's Small Wars, 「The Hook」, britains-smallwars.com/campaigns/korea/page.php?art_url=hook (2026년 10월 열람) — 확성기 선전, C대대 센추리온 두 소대, 17일 밤 11시 움직임·02시 30분 철수·정찰대 충돌, 19일 위력 정찰과 다음 날 바르샤바 공격, 블랙 워치와 킹스 연대 교대, 동굴 속 중공군과 3~5배 병력 추정, 10~28일 포격 손실 약 50명, 26일 소대 교대·27일 포격 재개, 28일 10시 15분 포격 시작, 18시 로슨 피격과 무선 정보, 19시 53분 3분 포격 뒤 돌격·2분 만에 앞 참호, 20시 25분 포격 증가, 20시 45분 바르샤바 경유 새 병력, 121고지 두 중대(철조망까지 6명), 146고지 대대 괴멸, 00시 30분 베티 그레이블에서 약 90명 돌격과 시신 약 30구, 23시 45분 역습 계획 변경, 조명탄, 29일 새벽 구조 작업, 정오 로열 퓨질리어스 교대, 포로 16명 정전 뒤 석방. 출처를 밝히지 않은 민간 정리 글이라 시각은 다른 자료와 견주어 썼다. 9.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 「Korean War」, nam.ac.uk/explore/korean-war (2026년 10월 열람) — 영국군 약 6만 명 복무와 많은 징집병, 1952년 11월 블랙 워치와 1953년 5월 웰링턴 공작 연대의 후크 방어. 10. 영문 위키백과, 「Douglas Kendrew」(2026년 10월 열람) — 1910년 7월 22일생, 1935년 잉글랜드 럭비 대표팀 주장, 한국전쟁 때 임시 준장으로 영연방 사단 제29보병여단 지휘, 제2차 세계대전의 수훈장 셋과 1953년 12월 8일 한국전쟁으로 받은 네 번째 수훈장. 11. 중국어 위키백과, 「萧全夫」(2026년 10월 열람) — 1916년 9월 13일생, 1930년 공청단·10월 홍군 유격대 입대, 1952년 8월 지원군 제46군 군장으로 입북, 10월 29일 제42군과 방어 인계, 미 해병 제1사단·영연방 제1사단·터키 여단 등 외국 부대 아홉과 150여 차례 교전(중국 쪽 집계). 12. 중국어 위키백과, 「朝鲜战争1953年夏季战役」(2026년 10월 열람) — 4월 중순 마오쩌둥이 덩화에게 한 말(원문: 只管打,不管谈), 5월 13일 여름 반격 개시와 목표(원문: 消灭敌人,配合谈判,吸取经验,改善阵地), 첫 단계 유엔군 4,133명 손실·지원군 1,608명 손실 주장, 5월 25일 미국이 안을 대체로 받아들였다는 서술. 13. 중국어 위키백과, 「马踏里西山—梅砚里东南山战斗」(2026년 10월 열람; 『中国人民解放军第46军军史』 인용) — 제46군이 제133사단으로 평촌 남산 진지 다섯 곳을 칠 계획이었으나 제399연대 6중대 전투조장의 탈주로 강화 중대 하나의 시험 공격으로 줄이고 배속된 제120사단이 네바다 전초(마답리 서산·매현리 동남산)를 치게 함, 3월 28일 작전안을 고쳐 씀, 5월 28일 제358연대 두 중대와 화포 91문. 14. 중국어 위키백과, 「坪村南山戰鬥」(2026년 10월 열람; 군사과학원 『中国人民解放军全史』 부록 인용) — 5월 19일부터 약 9,000발 포격, 5월 28일 밤 제46군 제133사단 제399연대 2개 중대가 화포 76문 지원 아래 세 갈래로 웰링턴 공작 연대 1대대 4중대 공격, 두 시간 남짓 만에 점령·「全歼守军」, 영국군 사상 160여·포로 21 주장. 이 항목은 듀크스의 교대를 「5월 28일」로 적어 영국 기록(5월 12/13일)과 어긋난다. 15. 영문 위키백과, 「Second Battle of the Hook」(2026년 10월 열람) — 전초 바르샤바가 후크 앞 약 500야드 아래. 16. 영문 위키백과, 「Mike Campbell-Lamerton」 — 1933년 8월 1일생, 1952년 징집으로 웰링턴 공작 연대 입대, 친구 데이비드 길버트스미스와 두 소대를 이끌고 후크에서 빼앗긴 진지를 되찾음. 17. 영국 제국전쟁박물관(IWM) 구술 기록, 「Webster, Bryan Courtney (Oral History)」 소장번호 13451, iwm.org.uk/collections/item/object/80013167 (목록 설명만 확인) — 로열 퓨질리어스 1대대 A중대 장교, 저지 진지 준비, 할리퀸 다리 포격, 후크 위 영국군 포격 목격, 5월 29일 교대, 공병의 진지 복구, 30일 밤 공격에 대한 걱정, 6월 2일 대관식 날 빨강·하양·파랑 연막탄. 18. Andrew Robinson, 「Honour at last for soldier - 60 years after the ‘forgotten war’」, Yorkshire Post 2013.11.2, yorkshirepost.co.uk/news/honour-at-last-for-soldier-60-years-after-the-forgotten-war-1853431 — 결혼 1년, 네 해 뒤 재혼과 두 딸, 고향에 명판이 없었음, 크라이스트 교회 몰드그린의 명판(이름과 연대) 전몰자 추모일 제막. 19. Dave Himelfield, 「Korean War widow to unveil Huddersfield’s first ever plaque in late husband’s memory」, Huddersfield Examiner 2013.11.1, examiner.co.uk/news/west-yorkshire-news/korean-war-widow-unveil-huddersfields-6261563 — 로이 깁슨(몰드그린)이 1953년 5월 후크에서 21세로 전사, 아내가 임신 8개월에 아기 옷을 뜨던 일, 경찰관 둘이 아버지·어머니를 먼저 찾음, 「When you’re pregnant you can’t go to pieces because you’ve a baby」, 「It stays with you forever. You don’t get over it, you just learn to live with it」, 아들 로버트, 돈이 모자라 일하라는 말과 재혼하라는 말, 82세.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존 스택풀 1931년생(2번·1번 자료), 더글러스 켄드루 1910년생(10번 자료), 샤오취안푸 1916년생(11번 자료), 마이클 캠벨러머턴 1933년생(16번 자료), 마오쩌둥 1893년생·덩화 1910년생(25화 [나이]와 같은 근거). 루이스 커쇼, 워커 상병, 스미스 일병, 코너 일병, 데이비드 길버트스미스, 번버리 중령, 브라이언 웹스터, 로이 깁슨, 캐슬린 깁슨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로이 깁슨이 죽을 때 스물한 살, 캐슬린이 2013년에 여든두 살이었다는 것은 보도에 따랐다. [자료 충돌] 듀크스의 교대 날짜 — 연대협회와 영국 쪽 자료는 5월 12/13일 밤, 중국어 위키백과 「坪村南山戰鬥」는 5월 28일로 적었다. 본문은 영국 대대 일지를 인용한 쪽을 따랐다. 같은 항목은 5월 19일부터의 포격 약 9,000발을 블랙 워치 진지에 쏟은 것으로 적었으나, 그때 진지는 이미 듀크스가 지키고 있었다. [자료 충돌] 18일의 중국군 — 연대협회는 「탈주병」이 공격 정보를 가져왔다고, Britain's Small Wars와 Hemingway는 18일 새벽 「사로잡은」 병사가 알렸다고 적었다. 중국 쪽 『제46군 군사』(위키백과 인용)는 제399연대 6중대 전투조장의 탈주로 계획을 줄였다고 적었으나 날짜가 없다. 두 기록이 같은 사람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공격 규모 — 중국 쪽은 같은 군사(軍史)를 인용한 두 항목에서 「강화 중대 하나」와 「두 개 중대」로 다르게 적었다. 영국 쪽은 중공군을 약 6,500명(위키백과 정보란), 최소 한 개 대대에서 세 개 대대로 보았고, 121고지 두 중대와 146고지 한 대대의 공격까지 적었다. 본문은 각자의 주장으로 나누어 적었다. [자료 충돌] 손실 — 듀크스 손실은 연대협회·위키백과(대대 일지)가 전사 20·부상 86·실종 20, Hemingway가 전사 28·부상 121·실종 16, WarHistory.org가 「약 149명, 포로 16」으로 적었다. 지원 부대를 합친 유엔군 손실은 전사 24·부상 105·실종 20이다. 중공군 손실은 영국 쪽 추정 전사 250·부상 800, 위키백과 본문의 다른 추정 전사 1,050·부상 800, 확인 시신 167이 있고, 중국 쪽은 자기 손실을 따로 적지 않은 채 영국군 사상 160여·포로 21을 주장했다. 본문은 연대 기록을 따르고 중국 쪽 주장을 함께 적었다. 「4중대 전멸」은 중국 쪽 주장이며 영국 기록은 03시 30분 진지 회복을 적었다. [자료 충돌] 포탄 수 — 영국군 포탄은 37,818발(위키백과, 대대 일지), 38,000발 넘게(연대협회), 37,000발 넘게(Hemingway). 중국군 포탄은 28일 밤 11,000발(위키백과), 약 10,000발(Hemingway·Britain's Small Wars), 19~29일 2만 발 넘게(위키백과). [자료 충돌] 캠벨러머턴의 역할 — 영문 위키백과는 길버트스미스와 함께 「두 소대」를 이끌었다고, WarHistory.org는 「중대」를 이끌었다고 적었다. 본문은 소대를 따랐다. 스택풀의 부상 시기도 IWM 목록은 1953년 6월 서울 후송으로, 부고는 5월 13~19일 소대 지휘 뒤 부상으로만 적어 정확한 날을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로이 깁슨이 죽은 날은 보도에 「1953년 5월 후크 전투」로만 나온다. 28~29일 밤에 죽었는지, 그 전 포격에 죽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영연방 전쟁묘지위원회 기록도 찾지 못했다. 캐슬린이 소식을 들은 날짜도 기록에 없다. [위치] 후크 좌표는 영문 위키백과(북위 38도 1분 44.8초, 동경 126도 50분 33초)를 따랐고, 현재 주소는 OpenStreetMap 역지오코딩으로 가장 가까운 마을(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을 찾아 적었다. 군사분계선과의 정확한 위치 관계는 확인하지 못했다. 121고지·146고지·소시지·로슨·바르샤바·베티 그레이블·네바다 전초의 위치는 서술에 따른 추정이다. [재구성] 5월 18일 새벽 스택풀이 철조망을 친 장면(그가 철조망 공사를 회고했다는 것은 IWM 목록에 있다)과 망치 소리, 「저 친구들은 우리 대대 이름을 정확히 아네」로 시작하는 확성기 농담(확성기 선전과 주급 1.62파운드는 기록), 「오늘 밤일까요?」로 시작하는 대화, 28일 아침 영국 병사와 한국인 병사가 담배를 나누는 장면의 시각과 「서울 가서 맥주」 대화(담배를 나누는 사진은 있으나 날짜와 사람은 모른다), 로슨 병사들이 무전기에 숫자를 부른 장면과 켄드루의 「포병에 알려」 대사, 여단 지휘소의 지도, 「전원 사격 위치로!」 외침, 소대장이 「돌아갔다」는 대목, 제46군 지휘소에 보고가 올라간 장면, 커쇼 곁의 한국인 병사들이 그를 올려다본 몸짓, 굴 안에서 흙을 긁은 손과 포탄 진동, 캠벨러머턴의 「럭비랑 똑같아」로 시작하는 대화(그가 럭비 선수였고 소대를 이끌었다는 것은 기록), 병사들이 서서 졸았다는 대목, 퓨질리어와 듀크의 문답 번역(원문의 대답은 「Just seeing off a few Chinks…」로,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 들어 있어 「손님 몇 배웅했을 뿐」으로 옮겼다), 마지막 밤이 오지 않았다는 문장, 캐슬린이 뜨개바늘을 놓고 울음을 삼킨 몸짓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과 이름은 기록에서 찾지 못했다.

5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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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크 고지 전투 — 마지막 밤은 오지 않았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