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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13,909자)

네바다 전초 전투 — 마지막 전초들

1950 · 네오

네바다 전초 전투, 1953년 5월 28일~29일 — 임진강 나루 고랑포 북서쪽, 미 제1군단 주저항선 앞의 카슨·리노·베가스·엘코 전초와 동쪽의 베를린·동베를린 전초. 3월에 중공군에 넘어간 리노, 28일 저녁 중공군 제120사단의 네 갈래 공격, 29일 아침 카슨 상실, 미 제14연대 1대대 B중대의 엘코 진입과 카슨 공격 실패, 29일 밤 베가스·엘코 철수.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3년 5월 초, 경기도 장단군 임진강 북쪽의 나루 마을 고랑포(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북서쪽, 미 제1군단의 주저항선.

터키 여단 제3대대 제9중대 제2소대장 울루에르 엔긴 중위는 분대장들을 데리고 먼저 올라왔다. 그는 일주일 동안 진지를 넘겨줄 미 해병대 지휘관 곁에 붙어 지냈다. 함께 정찰을 나가 적이 어느 골짜기로 오는지, 박격포가 어느 능선 뒤에 숨어 있는지 들었다1.

주저항선 앞 들판에는 낮은 고지들이 섬처럼 솟아 있었다. 미군은 그 고지마다 고향 땅 이름을 붙여 놓았다. 서쪽부터 카슨, 리노, 베가스, 그리고 카슨과 베가스 사이 아래쪽의 엘코. 모두 미국 서부 네바다주의 도시 이름이라, 미군은 이 고지들을 묶어 네바다 전초(현 군사분계선 북쪽)라고 불렀다.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베를린과 동베를린 전초가 있었다2.

“베가스는 무얼 하는 도시입니까?”

엔긴의 분대장 하나가 손가락으로 북쪽 고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해병 하사가 웃었다.

“돈 걸고 노는 데지. 카드하고 주사위.”

“그럼 여기하고 똑같네요. 여기선 거는 게 목숨이라는 것만 다르고.”

해병은 더 웃지 않았다. 한 달 남짓 전인 3월 26일 밤, 중공군이 이 세 전초를 한꺼번에 쳤다. 해병대는 리노를 잃었고, 베가스는 사흘을 싸워 겨우 되찾았다3. 그 3월 한 달 동안 제1해병사단은 전사 백마흔한 명, 상처로 죽은 사람 스물아홉 명, 실종 백네 명을 냈다3. 중국 쪽 기록은 베가스를 마타리 서산, 058고지라고 부른다. 3월의 공격을 맡았던 부대는 중공군 제120사단 제358연대였고, 이 사단은 지난겨울 제40군에서 떨어져 나와 제46군 밑으로 들어와 있었다4.

해병은 싸움 이야기를 하다가 말 이야기를 꺼냈다. 해병대의 한 무반동총 소대가 서울 경마장에서 이백오십 달러를 주고 사 온 밤색 암말이 있었다. 말을 판 마구간 소년은 다리를 잃은 누나에게 의족을 사 주려고 말을 내놓았다. 레클리스라는 이름을 얻은 그 말이 3월 베가스 싸움 때 하루에 쉰한 번, 무반동총 포탄을 등에 지고 혼자서 능선을 오르내렸다5.

“처음 무반동총이 터질 때는 네 발이 다 땅에서 떴다더군. 그날 일이 끝날 무렵엔 누가 버린 철모 안감을 씹고 있었고.”

해병이 들은 이야기는 소대 사람들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5.

“그 말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해병대랑 같이 간다. 우리 해병이니까.”

5월 5일, 미 제25사단장 새뮤얼 윌리엄스(53) 소장은 네바다 전초와 베를린·동베를린의 방어를 사단에 배속된 터키 여단에 맡겼다. 여단장은 스르 아자르 준장이었다2. 아자르는 제1대대를 왼쪽에, 제2대대를 베가스·카슨·엘코에, 제3대대를 베를린 쪽에 두었다1. 떠나는 해병들은 엔긴의 소대에 기관총 한 정을 남겨 두고 갔다. 엔긴은 훗날까지 그 기관총을 남긴 미군들을 고마워했다1.

*

1953년 5월 하순, 임진강 북쪽 중국인민지원군 제46군 사령부.

5월 25일, 판문점(현 파주시 진서면) 천막에서 유엔군은 마지막 휴전안을 내놓았다. 바로 그날부터 중공군 포가 네바다 전초를 겨누기 시작했고, 사흘 동안 포성은 점점 잦아졌다2. 터키 여단의 기록으로는 그보다 앞선 5월 15일부터 하루 백열 발에서 육백삼십 발의 포탄과 박격포탄이 여단 참호에 떨어지고 있었다1.

제46군 군장 샤오취안푸(34)는 지원군에서 가장 젊은 군장 가운데 하나였다6. 그의 원래 계획은 제133사단을 써서 동쪽 영연방 제1사단 앞의 핑춘 남산 다섯 진지를 크게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격을 앞두고 제399연대 6중대의 전투조장 하나가 진지를 버리고 적 쪽으로 넘어갔다7. 넘어간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전부 뜯어고친다.”

계획은 줄었다. 핑춘 남산에는 보강된 중대 하나만 보내 진지 하나를 떠보고, 군에 배속된 제120사단이 마타리 서산과 매현리 동남산을 치기로 했다7. 시간이 모자랐다. 제120사단은 3월 28일 전투 때 쓴 방안을 조금 고쳐서 그대로 쓰기로 했다7. 3월의 방안은 이랬다. 공격하는 날 새벽에 병사들을 적 진지 코앞에 파 둔 굴 속으로 몰래 들여보내 하루를 숨어 지내게 한다. 군과 사단, 연대의 포를 한데 모아 해 질 무렵 한꺼번에 퍼붓고, 포격이 뒤로 넘어가는 순간 굴에서 뛰쳐나간다4. 3월에는 그 방안으로 리노를 빼앗았다.

“3월에 쓴 걸 또 씁니까? 저쪽도 3월을 기억할 텐데요.”

“저쪽 사람이 바뀌었소. 미국 해병이 나가고 터키 군대가 들어왔소.”

핑춘 남산, 영연방 사람들이 후크라고 부르는 고지에서 같은 밤 벌어진 싸움은 그 고지를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로 따로 남았다.

*

1953년 5월 28일 오전 일곱 시 반, 네바다 전초 가운데 가장 높은 베가스.

터키 여단 제3중대의 하사 야샤르 에켄은 첫 포탄이 떨어진 시각을 기억했다. 박격포탄과 포탄이 전초 위로 쏟아졌다. 주저항선에서 전초까지 이어진 일 킬로미터 반의 보급로와 진입로에도 하루 종일 포탄이 떨어졌다1. 베가스에는 백마흔 명이 있었다. 카슨에 마흔네 명, 엘코에 서른세 명, 베를린에 스물일곱 명, 동베를린에 열여섯 명이었다2. 철조망과 조명지뢰, 지뢰가 깔려 있었고, 기관총은 적이 올 길을 겨누고 있었다2. 세 전초 가운데 가장 높은 베가스에서는 남쪽 주저항선과 동쪽 베를린까지 내려다보였다3.

중국 쪽 기록에 따르면 제358연대는 1대대와 2대대에서 중대 하나씩을 뽑아 공격조로 세웠고, 박격포 이상의 포 아흔한 문이 그 뒤를 받쳤다7.

저녁 일곱 시 오십 분, 연막탄이 베가스를 덮었다. 터키 병사들은 흰 연기 너머를 향해 먼저 쏘았다. 오 분 뒤 북쪽에서 대대 하나와 그보다 큰 무리가 고지를 동서 양쪽에서 에워싸며 올라왔다1. 미군 기록은 그날 밤 제120사단이 대대 넷을 내보냈다고 적었다. 둘은 베가스로, 하나는 카슨과 엘코로, 하나는 베를린 쪽으로 견제 공격을 갔다2.

참호 안에서 총검과 수류탄 싸움이 붙었다. 터키 병사들은 꼭대기의 대베가스에서 밀려 조금 낮은 소베가스로 내려갔다. 여덟 시 오십 분, 소베가스에서 버티는 사람들 앞에서 중공군이 공격을 멈췄다1. 중공군은 고지의 작은 손가락 같은 지릉 하나를 차지하고 기관총과 포탄이 쏟아져도 놓지 않았다. 마침 올라온 터키 증원 소대가 세 갈래로 오르던 적의 공격을 함께 밀어냈다2. 에켄은 공격이 잠깐 멎을 때마다 다친 사람들을 끌어다 붕대를 감았다. 밀려 내려갔다가 다시 꼭대기를 찾고, 또 밀려 내려가는 사이 다친 사람은 자꾸 늘었다1.

“하사님, 지금 우리 꼭대기에 있는 겁니까, 아래에 있는 겁니까?”

“총 쏘는 쪽이 위다. 쏴.”

제7중대장은 소대 하나를 올려 보냈고, 그 소대와 제3중대의 남은 병력이 아홉 시 이십삼 분에 대베가스를 되찾았다1.

아홉 시 오십이 분, 다시 연막이 덮였다. 열한 시 육 분, 중공군이 대베가스를 세 번째로 차지했다1. 탄약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제2대대장은 또 한 소대를 올려 보내면서 한국인 노무단원들에게 탄약 상자를 지워 함께 보냈다2. 노무단원들은 총을 들지 않고 상자를 등에 진 채 포탄이 떨어지는 보급로를 올라갔다.

그 무렵 베가스를 구하러 올라간 부대에 하사 메흐메트 에르긴이 있었다. 도착해 보니 아군은 줄어 있었고, 고지 한쪽은 적이 쥐고 있었다. 에르긴은 남은 사람들을 모아 포탄과 총탄 속으로 앞장섰고, 적을 수백 미터 밀어냈다. 적이 되밀어 오자 그는 그 자리를 지켰다8.

*

1953년 5월 28일 밤, 베가스 서쪽의 카슨 전초.

중위 뤼슈튀 위레르의 소대가 카슨을 지키고 있었다. 대대 규모로 보이는 적이 몰려왔다. 위레르는 포탄 속에서 이 구덩이 저 구덩이를 옮겨 다니며 사격을 지휘하다 다쳤다9.

“중위님, 내려가셔야 합니다.”

“내려가면 여기는 누가 맡나.”

그는 후송을 거절했다. 그러고는 소대를 이끌고 참호 안의 적에게 되돌격했다. 그들이 마주친 중공군 열일곱 명 가운데 열여섯 명이 쓰러졌다9. 미군 기록으로는 중공군이 카슨과 엘코에 두 번째 대대를 더 보탰다. 대대장은 공병 소대를, 이어 공병중대 전체를 카슨 쪽으로 보냈다2. 자정이 지나 세 번째 대대가 모이는 것이 보였다. 터키 제1대대와 미 제35보병연대의 사격이 그 무리를 흩었다2.

카슨은 에워싸인 채 두 시간 넘게 버텼다9. 밤이 깊어 갈수록 카슨의 터키 병사들은 하나씩 죽어 갔다. 몇 사람만 어둠을 틈타 엘코로 건너갔고, 대부분은 참호와 엄체호 안에서 숨졌다2. 위레르는 마지막까지 엄체호에서 쏘다가 수류탄 파편을 맞고 숨졌다9. 아침이 되었을 때 카슨은 중공군 손에 있었다2.

제358연대 쪽 기록은 공격조가 십 분 만에 진지를 차지하고 곧바로 방어로 돌아섰다고 적었다7.

*

1953년 5월 28일 밤 아홉 시, 카슨 동쪽 아래의 엘코 전초.

중공군은 엘코와 카슨 남쪽 기슭까지 다가와 있었다. 언덕 아래에서 몸이 부딪는 소리와 어둠 속 그림자들이 다시 공격이 왔다는 것을 알렸다1.

여단에 남은 예비대는 공병중대 하나뿐이었다. 중대장 쉬나쉬 쉬칸 대위는 카슨으로 가는 소대에 스스로 따라붙었다가, 카슨과 엘코가 둘 다 에워싸였다는 말을 들었다10. 그는 방향을 엘코로 틀어 적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아래에서 버티던 병사들까지 합세해 총검 싸움이 붙었고, 엘코를 되찾았다10.

“여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쉬칸은 카빈 소총 한 자루와 수류탄을 새로 챙겨 가장 드러난 자리로 나갔다10.

한국인 통역 이재영도 그날 밤 공병중대로 보내졌다. 그는 군우리 싸움 뒤부터 터키 여단 작전본부에서 일했다1.

“통역관, 저쪽이 뭐라고 소리치는 거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말 대신 수류탄만 던집니다.”

“그럼 당신도 오늘은 쉬는 날이군.”

웃은 사람은 둘뿐이었다. 터키 기록은 그 밤 중공군 가운데 총 없이 수류탄 자루만 든 병사들이 있었고, 항복하는 척 다가와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고 적었다1. 공병중대에서는 그 하룻밤에 열다섯 명이 전사했다. 이재영은 그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기억했다1.

새벽 두 시 오십삼 분, 중공군이 엘코를 다시 쳤다. 제6중대는 소대 하나 크기로 줄었다. 세 시 사십이 분에 공격이 멎었지만 참호 안의 싸움은 네 시 반까지 이어졌다. 아침 여덟 시 십오 분, 적은 엘코를 세 방향에서 동시에 올라왔다. 아홉 시 반에는 엘코와 카슨 일대가 연막에 덮였고, 미군 포병대대 둘과 영국군 포병대대 하나가 그 연막 속으로 포탄을 퍼부었다. 열한 시 사십사 분, 중공군 일부가 참호 안까지 들어왔다가 백병전 끝에 밀려났다1.

그 아침, 윌리엄스는 미 제14보병연대 1대대를 아자르에게 붙여 주었다2. 아자르는 대대장 칼 만 중령에게 중대 하나로 엘코를 보강하고 카슨을 되찾으라고 명령했다. B중대는 남동쪽에서 엘코로 다가가 이십오 분 싸움 끝에 엘코 둘레의 중공군을 쓸어냈다. 이어 두 소대를 앞세우고 두 소대로 뒤를 받치며 서쪽 카슨으로 나아가던 B중대는 두 전초의 한가운데에서 포탄과 기관총에 막혀 멈췄다. 엘코로 물러났다가 두 번 더 나섰지만 두 번 다 되돌아왔다. 아군 포와 박격포가 카슨을 두들겨도 카슨의 중공군 기관총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러자 중공군이 여섯 번 카슨에서 엘코로 건너왔다. 몇 번은 수류탄이 닿을 거리까지 왔고, 여섯 번 다 물러갔다2.

쉬칸은 열여섯 시간을 쉬지 않고 싸운 끝에 다쳤고, 그래도 후송을 거절했다10. 터키 쪽 기록은 그가 폭발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고지에는 공병 열 명과 보병 열 명만 살아남았다고 적었다1. 미군 훈장 증서는 그가 혼자 적병 일흔다섯 명쯤을 쓰러뜨렸다고 적었다10.

*

1953년 5월 29일 아침 여덟 시, 베가스.

밤새 끝내지 못한 공격을 중공군은 낮에도 이어 갔다. 아자르에게는 더 보낼 사람이 없었다. 여단 사령부의 당번병과 서기, 운전병들로 소대 하나를 만들어 전선으로 올렸다. 여단의 마지막 예비대였다1.

열한 시, 터키 병사 네 개 소대가 포병과 박격포, 전투기의 지원을 받으며 대베가스로 올라갔다1. 미군 전사는 그들이 ‘차가운 쇠’, 총검으로 베가스를 쓸어냈다고 적었다2. 쫓겨난 중공군은 북쪽 150고지 쪽으로 달아났다1. 오후 두 시 반 무렵의 작은 공격은 막아 냈다. 그러나 연막이 다시 고지를 덮은 뒤의 큰 공격은 막지 못했다. 네 시 십팔 분, 대베가스는 또 넘어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소베가스로 내려가 기다렸다1.

동쪽 베를린 참호에서 엔긴의 소대는 왼쪽을 돌아 들어오는 중공군을 막고 있었다. 해병들이 남긴 기관총은 너무 오래 쏘아 총신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수들은 손이 데는데도 맨손으로 총신을 갈아 끼웠다1. 다친 사람을 실으러 온 구급 헬리콥터 한 대는 땅에 닿자마자 포탄을 맞았고, 타고 있던 미군 위생병 하나가 전사했다. 십 분 뒤 두 번째 헬리콥터가 같은 자리에 내려와 부상자들을 싣고 떠났다1.

*

1953년 5월 29일 오후, 미 제25사단 사령부.

윌리엄스와 미 제1군단장 브루스 클라크(49) 중장은 지도를 놓고 마주 앉았다. 베가스에 남은 사람은 마흔 명 남짓이었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다쳐 있었다. 엘코에는 스무 명 남짓이 남았다. 네바다 전초를 지키다 죽은 사람이 백오십 명을 넘었고, 다친 사람은 이백마흔다섯 명이었다. 미군은 중공군 사상자를 어림잡아 삼천 명으로 보았다2.

아자르는 참호 왼쪽에 있던 제2중대를 통째로 베가스에 올려 보내려 했다1.

“한 중대만 더 주십시오. 베가스는 우리 손으로 다시 찾습니다.”

“장군, 저쪽은 고지를 가질 때까지 올 겁니다. 판문점에서 휴전안이 오가는 동안 저 고지 하나에 사람을 얼마나 더 묻겠습니까?”

전초는 적의 공격을 미리 드러내고 늦추는 일을 이미 해냈다는 것이 지휘관들의 판단이었다2. 저녁 무렵 명령이 내려갔다. 터키군은 베가스에서, 미군은 엘코에서 물러나라2. 유엔군 쪽은 이 이틀 동안 포탄 십일만 칠천 발 넘게 쏘았고, 전투기 근접 지원은 예순일곱 번 나갔다. 중공군이 쏜 포탄과 박격포탄은 육만 오천 발로, 그때까지 이 전쟁에서 보지 못한 양이었다2.

밤 아홉 시 반, 베가스의 터키 병사들은 죽은 전우와 다친 전우를 등에 업고 방어 참호 뒤로 내려왔다. 정찰대 몇이 뒤에 남아 따라오는 적을 막았다1. 그들이 내려온 길은 이틀 내내 포탄이 떨어진 바로 그 일 킬로미터 반의 보급로였다. 에켄은 훗날 베가스의 싸움이 28일 저녁 여덟 시 오십 분에 붙어 29일 밤 아홉 시까지, 스물여섯 시간 이어졌고 그동안 주인이 셀 수 없이 바뀌었다고 말했다1.

*

1953년 5월 30일 새벽, 주저항선 뒤.

여단 포병대대의 케말 외즈튀르크(20)는 장가든 지 보름 만에 이즈미르에서 배를 탔다. 그는 훗날 그 싸움에서 군화가 피에 젖었고, 사흘을 굶었으며, 베가스에서 하룻밤에 제2대대 사람 백팔십 명이 전사했다고 기억했다11. 미 성조지 사진기자 프랭크 프레이터는 이틀 싸움을 끝내고 후방에서 쉬는 터키 보병들을 찍었다. 지친 얼굴들이 사진기를 보고 웃고 있었다12.

숫자는 쪽마다 달랐다. 한국 국가보훈부는 터키군 전사 백쉰한 명, 부상 이백서른아홉 명, 실종 두 명으로 적었다13. 터키 여단 기록은 대베가스의 주인이 아홉 번 바뀌었다고, 한국 국가보훈부는 다섯 번 잃고 다섯 번 되찾았다고 적었다1 14. 중국 쪽은 터키 여단 구백아홉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사로잡았고, 스물세 번의 반격을 물리쳤다고 기록했다7. 터키 쪽 책은 적이 사단 하나로 쳐서 겨우 카슨 하나를 얻었다고 썼다1. 같은 책은 그 이틀 동안 터키 여단이 쏜 소총·기관총 탄이 이백사십오만 발, 박격포탄이 육만 이천구백일흔 발, 던진 수류탄이 칠만 구천칠백아흔다섯 발이었다고 적었다. 여단 포병대대는 이만 칠천백일흔 발을 쏘았다1. 터키로 돌아간 여단은 이 싸움으로 미국 대통령 이름의 부대 표창을 받았다. 표창장에는 적이 수천 명을 잃고도 수천 명을 더 바칠 준비가 된 것 같았다는 구절이 들어 있다1. 그날 아침 고지 셋에는 중공군이 서 있었다.

같은 밤 동쪽 후크 고지에서도 포성이 멎었다. 그 고지는 넘어가지 않았다.

엔긴은 그 서른여섯 시간 가운데 어느 밤 하나를 오래 기억했다. 박격포탄이 옆에서 터져 왼쪽 다리와 왼손이 부서진 병사가 들것에 실려 베를린 참호로 내려왔다. 엔긴은 너덜너덜해진 손목과 발목의 살갗을 잘라 내고 피를 멎게 했다. 상처에 페니실린 가루를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생전 처음으로 그 병사의 팔에 정맥 주사를 놓았다. 미군이 두고 간 의약품이었다. 전화로 부른 구급 헬리콥터가 어둠 속에서 내려와 병사를 싣고 갔다1.

“살 수 있을까요?”

“도쿄까지만 가면 산다.”

병사는 도쿄를 거쳐 미국으로 보내졌다. 여러 해 뒤 그는 이스탄불의 엔긴 직장으로 찾아왔다. 손과 발에 보조기를 끼고 있었고, 제 손발처럼 편하다고 했다. 그는 엔긴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1. 엔긴은 그날 삶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았다고 했다1.

베가스는 지금 군사분계선 북쪽에 있다.

사료 출처

1. 알리 데니즐리 지음, 이선미 옮김, 『터키인이 본 6.25전쟁(Kore Savaşı 1950-1953)』,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근현대사 번역총서 2(2014), 제10장 「터키 제3여단의 베가스, 엘코, 카슨 전투」 83~97쪽, PDF: inpursuitofthenorthstar.anadolu.edu.tr/belge/625/indir — 엔긴 중위의 일주일 인계와 남겨진 기관총, 아자르의 대대 배치, 5월 15일부터 하루 110~630발 포격, 28일 07시 30분 포격과 1.5킬로미터 보급로(야샤르 에켄 하사 회고), 19시 50분 연막과 5분 뒤 공격, 20시 50분 정지, 21시 23분 탈환, 21시 52분 연막, 23시 06분 세 번째 상실, 21시 엘코·카슨 남쪽 접근, 쉬칸의 공병중대와 총검전, 이재영의 회고(공병중대 하룻밤 15명 전사), 수류탄 자루와 항복하는 척한 공격, 02시 53분·03시 42분·04시 30분·08시 15분·09시 30분·11시 44분의 엘코 싸움과 미 포병대대 둘·영국 포병대대 하나, 쉬칸의 오른쪽 다리와 생존자 20명, 29일 08시 마지막 예비대(엔긴: 당번병·서기·운전병), 11시 네 개 소대의 탈환과 150고지, 14시 30분·16시 18분, 제2중대 투입 결정과 철수 명령, 21시 30분 철수, 기관총 총신, 구급 헬리콥터 피격과 미 위생병 사망, 정맥 주사와 이스탄불 재회, 에켄의 「26시간」 회고와 공격 사이 부상자 치료, 탄약 소비량, 미 대통령 부대 표창 문구, 대베가스 아홉 번 주인 바뀜, 「겨우 카슨 기지만 점령」 주장. 2. 미 육군 공식 전사,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미 육군 군사사 센터, 1966), 462~465쪽, archive.org/details/cmh-pub-20-3 — 네바다 전초의 이름과 위치(판문점 북동쪽 약 10마일), 5월 5일 윌리엄스가 아자르의 터키 여단에 방어를 맡김, 제46군 제120사단 제358·359·360연대, 25일 최종안 뒤 포격, 해병 전차 34대, 전초별 병력(베가스 140·카슨 44·엘코 33·베를린 27·동베를린 16), 네 개 대대의 공격 방향, 증원 소대와 한국인 노무단(Korean Service Corps)의 탄약 수송, 카슨의 공병 투입과 미 제35연대 사격, 카슨 병사들이 하나씩 죽어 간 일, 제14연대 1대대 배속, 만 중령의 B중대가 25분 만에 엘코 확보하고 카슨 공격 세 번 실패, 중공군 여섯 번 역습, 「cleared VEGAS with cold steel」, 베가스 40여 명·엘코 20여 명, 전사 150여 명·부상 245명, 중공군 사상 약 3,000명 추정, 지휘관들의 판단과 저녁 철수 명령, 포탄 117,000발·근접 지원 67회·적 포탄 65,000발. 3. 영문 위키백과, 「Battle for Outpost Vegas」(2026년 10월 열람; Meid·Yingling 『Operations in West Korea』 1972, Nalty 『Outpost War』 2003 인용) — 1953년 3월 26~30일 해병대의 리노 상실과 베가스 탈환, 3월 해병 사상자(전사 141·부상 사망 29·실종 104). 4. 중국어 위키백과, 「马踏里西山战斗」(2026년 10월 열람; 『中国人民解放军全史』 2000 인용) — 베가스를 마타리 서산(058고지)으로 부름, 3월 공격 부대 제120사단 제358연대, 1952년 12월 제120사단이 제40군에서 제46군으로 넘어감, 3월 방안(미리 파 둔 屯兵坑道에 숨어 들어가고 군·사단·연대 포를 모아 집중 사격). 5. 영문 위키백과, 「Sergeant Reckless」(2026년 10월 열람; Geer 『Reckless: Pride of the Marines』 1955, Hoffman 1992 인용) — 1952년 10월 서울 경마장에서 250달러에 사 옴, 누나의 의족을 사려던 마구간 소년, 첫 사격 때 네 발이 다 뜬 일과 철모 안감을 먹으려 한 일, 3월 베가스 싸움에서 하루 51번 혼자 탄약 수송. 6. 중국어 위키백과, 「萧全夫」(2026년 10월 열람; 苏侠 「一代名将萧全夫」 중국공산당신문망 2016.6.23 인용) — 1916년생, 1952년 8월 지원군 제46군 군장, 지원군에서 가장 젊은 군장 가운데 하나. 7. 중국어 위키백과, 「马踏里西山—梅砚里东南山战斗」(2026년 10월 열람; 军事科学院 『抗美援朝战争史』 3권 2000, 『中国人民解放军第46军军史』 인용) — 원래 제133사단의 핑춘 남산 공격 계획, 제399연대 6중대 전투조장의 「临阵叛逃」로 계획을 줄이고 제120사단에 마타리 서산·매현리 동남산을 맡김, 3월 28일 방안을 고쳐 씀, 제358연대 1·2대대 각 1개 중대와 포 91문, 10분 만에 점령, 23차례 반격 격퇴, 터키 여단 909명 섬멸 주장. 8. Home of Heroes, 「Mehmet Ergin」, 미 육군성 일반명령 제43호(1955.6.24) 수훈십자훈장 증서, homeofheroes.com/?p=86614 — 28~29일 상고랑포에서 베가스 증원, 수백 미터 반격과 역습 저지. 9. Home of Heroes, 「Rustu Urer」, 미 육군성 일반명령 제17호(1954.3.8) 수훈십자훈장 증서(사후), homeofheroes.com/?p=86616 — 카슨 방어, 부상 뒤 후송 거부, 17명 가운데 16명 사살, 두 시간 넘게 버팀, 엄체호에서 수류탄에 전사. 10. Home of Heroes, 「Sinasi Sukan」, 미 육군성 일반명령 제43호 수훈십자훈장 증서, homeofheroes.com/?p=86617 — 29일 카슨 증원 소대에 자원, 카슨·엘코 포위 소식에 엘코 탈환, 「at all costs」, 카빈과 수류탄, 적 약 75명, 16시간 싸운 뒤 부상하고 후송 거부. 11. 「Eskişehirli 93 yaşındaki Kore Gazisi savaşa dair o günleri anlattı」, haberler.com(DHA), 2023.9.20, haberler.com/eskisehirli-93-yasindaki-kore-gazisi-savasa-dair-o-16349209-haberi/ — 1930년생 케말 외즈튀르크, 제3 교대 터키 여단 포병대대, 1952년 이즈미르 출발, 결혼 15일 만에 출정, 「Vegas muharebesinde bir gecede ikinci taburdan 180 şehit verildi」, 「çizmelerim kana bulandı」, 「Üç gün aç kaldık」. 12. Stars and Stripes, 「Turkish troops in Korea, 1953」 Archive photo of the day(2020.9.5), stripes.com/blogs/from-the-archives/turkish-troops-in-korea-1953-1.643945 — 프랭크 프레이터 사진, 이틀 싸움 뒤 후방에서 쉬며 웃는 터키 보병, 철수 명령까지 버팀. 13. 국가보훈부(영문), 「Background of Participation and Activity of each Forces」 튀르키예 항목,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27 — 5월 28일 두 개 대대의 재공격, 이튿날 전초를 내줌, 터키군 전사 151·부상 239·실종 2, 중공군 사상 약 3,000. 14. 국가보훈부(영문), 「Key Battles」 네바다 전초 전투 항목,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99 — 고랑포 북서쪽 10킬로미터, 중공군 제120사단, 베가스를 다섯 번 잃고 다섯 번 되찾음, 카슨 상실·엘코는 간신히 지킴, 사단의 철수 승인.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새뮤얼 윌리엄스 1897년 8월 25일생(영문 위키백과 「Samuel Tankersley Williams」), 브루스 클라크 1901년 4월 29일생(영문 위키백과 「Bruce C. Clarke」), 샤오취안푸 1916년생(6번), 케말 외즈튀르크 1930년생(11번). 스르 아자르, 울루에르 엔긴, 야샤르 에켄, 메흐메트 에르긴, 뤼슈튀 위레르, 쉬나쉬 쉬칸, 칼 만, 이재영, 프랭크 프레이터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사상자 — 터키군 전사는 151명(국가보훈부·데니즐리), 150명(데니즐리가 인용한 미국 작가 패닝), 「150명 넘게」(미 육군 전사)로 거의 같지만 부상은 239명(국가보훈부), 245명(미 육군 전사), 450명(데니즐리), 140명(패닝)으로 크게 갈린다. 외즈튀르크의 「하룻밤 제2대대 180명」과 같은 기사의 185명은 회고의 숫자다. 중국 쪽 「909명 섬멸」은 터키 쪽 전사·부상을 합친 수의 두 배를 넘고, 미군의 「중공군 사상 약 3,000명」은 중국 쪽 기록이 내세운 투입 병력(2개 중대, 다른 곳은 7개 소대)보다 훨씬 많다. 영문 위키백과의 「1,156명」은 6월 23일까지 제46군 전체 손실이라 이 싸움의 숫자로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베가스 주인이 바뀐 횟수 — 아홉 번(데니즐리), 다섯 번 잃고 다섯 번 되찾음(국가보훈부). 철수 시각도 29일 저녁 명령(미 육군 전사), 21시 30분 철수(데니즐리), 23시 윌리엄스 명령·30일 해 질 녘 완료(패닝)로 갈린다. 엘코는 미 육군 전사가 B중대가 25분 싸움 끝에 확보했다고, 데니즐리는 29일 12시에 미 제14연대 한 중대에게 넘겼다고 적었다. [자료 충돌] 중국 쪽 이름 — 한 중국어 위키 항목은 엘코를 매현리 동남산이라 하고, 다른 항목은 리노를 매현리 동남산(057고지)이라 한다. 중국 쪽은 공격 부대를 제358연대만으로, 미군 전사는 제120사단 네 개 대대로 적는다. 위치도 고랑포 북서쪽 4킬로미터(중국어 위키)와 10킬로미터(국가보훈부)로 다르다. 데니즐리는 쉬칸의 부상을 「1951년 5월 29일」로 적었는데 1953년의 오기로 보았다. [자료 충돌] 레클리스 — 「철모 안감」 일화는 레클리스의 첫 실전(헤들리스 크로치) 때 일이며 3월 베가스 싸움 때 일이 아니다. 본문은 해병이 「처음 무반동총이 터질 때」 이야기로 옮겼다. [재구성] 「베가스는 무얼 하는 도시입니까?」 대화와 해병 하사, 레클리스를 두고 나눈 대화, 제46군 사령부의 「전부 뜯어고친다」와 참모들의 대화(기록에는 계획 변경과 그 까닭만 있다), 노무단원들이 보급로를 오르는 모습, 위레르와 병사의 대화, 「여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훈장 증서의 「at all costs」를 대사로 옮김), 이재영과 터키 병사의 대화, 에켄과 병사의 「꼭대기」 대화, 아자르와 윌리엄스·클라크가 나눈 말(기록에는 아자르가 제2중대 투입을 정했고 사단장이 철수를 명령했다는 것만 있다), 엔긴과 부상병의 대화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해병들이 남긴 기관총이 베를린 참호의 그 기관총이라는 연결, 정맥 주사를 놓은 병사가 베를린 참호로 내려왔다는 장소는 엔긴의 회고를 이어 붙인 것이다. 야샤르 에켄을 데니즐리 번역본은 「제3중대장 … 하사」로 적어 본문은 「제3중대의 하사」로 적었다. 네바다 전초의 현재 위치는 영문 위키백과 좌표(북위 38.005도, 동경 126.798도)가 북한 개성시 땅으로 나오는 것에 기대어 「군사분계선 북쪽」으로만 적었다. 제46군 사령부의 위치는 기록에서 찾지 못해 「임진강 북쪽」으로만 적었다.

5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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