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14,430자)
폭찹고지(Pork Chop Hill) 전투(1953) — 마지막 교대
1950 · 네오
1953년 1월 20일, 미국 워싱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휴전 회담이 시작된 지 한 해 반이 넘은 때였다. 한국의 전선은 고지 몇 개를 두고 두 해째 밀고 밀리는 중이었다11.
*
1953년 4월 16일 목요일 저녁, 경기도 연천 북쪽의 작은 산 폭찹고지(현 경기도 연천군 북쪽, 비무장지대 안 군사분계선 북쪽) —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돼지갈비 한 대 같다 해서 미군이 그렇게 부른 255고지.
저녁 바람을 타고 노랫소리가 내려왔다. 북쪽 중공군 능선 하삭골(현 군사분계선 북쪽)에서 여럿이 함께 부르는 소리였다. 높고 가늘게 떨리다가 바람이 바뀌면 끊겼다. 미 제7사단 제31보병연대 E중대 병사들은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초콜릿 아이스크림으로 저녁을 먹다가 숟가락을 멈췄다1.
“굴속에 모이는 소리 같은데.”
“거기 계속 있어 주기만 하면 되지.”
중대장 토머스 해럴드 중위가 통역에게 무슨 노래냐고 물었다. 통역이 대답했다.
“가사는 안 들립니다. 곡조는 압니다. 기도하는 노래입니다. 죽을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도 뭘 좀 불러야 하나?”
일주일 넘게 사단에는 소문이 돌았다. 중공군이 16일 밤 열한 시에 크게 친다는 소문이었다. 적진 뒤에서 일하던 첩자가 중공군 병사 여럿과 가까운 한국 여자에게서 들었다고 했다1. 해럴드는 그 말을 소대장들에게 전했다. 말은 병사들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싸움 뒤 살아남은 사람에게 물었더니 미리 안 사람은 셋뿐이었다1.
폭찹고지는 정상이 해발 이백삼십사 미터, 큰 골짜기의 적 쪽으로 튀어나온 산이었다1. 지난해 11월에는 태국 대대가 이 참호에서 중공군을 두 번 물리쳤다2. 한 달 전에는 서쪽 이웃 불모고지가 중공군 손에 넘어갔고, 미군은 그 산을 되찾지 않기로 했다2. 폭찹고지는 남았다. 그날은 교대하는 날이어서 해럴드의 중대는 반만 올라와 있었다. 포병 관측반과 의무병, 공병까지 아흔여섯 명이었고, 소총 소대원은 일흔여섯이었다1. 그 가운데 스물이 저녁 일곱 시 반 남짓 비탈 아래 청음초 열 곳으로 내려갔다. 한국인 병사 하나와 미군 병사 하나를 한 짝으로 묶었고, 전화는 미군만 쓰게 했다1.
*
같은 날 밤 열한 시 무렵, 폭찹고지 아랫비탈의 43번 청음초.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병사, 곧 카투사인 고갑진 이등병은 퓨겟 일병과 바위 뒤에 엎드려 있었다. 골짜기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가 그쳤다. 전화가 울렸다. “공격이 온다.” 곧 일흔 명 넘는 중공군 중대가 소대 셋으로 줄지어 비탈을 걸어 올라왔다1.
“따라와, 난 뛴다!”
퓨겟은 경기관총을 안고 뛰었다. 총이 무거워 자꾸 뒤처졌다. 그가 참호에 떨어지자마자 중공군 하나가 총을 붙잡았고, 흉벽 위에 선 다른 하나가 기관단총을 쏘아 두 사람을 한꺼번에 쓰러뜨렸다1. 고갑진은 오르막에서 소총을 버린 채였다. 그는 참호를 따라 취사 벙커로 갔다. 거기에는 중공군 넷이 기다리고 있었고, 먼저 붙잡힌 조성만 이등병이 손을 들고 서 있었다. 중공군 하나가 또렷한 영어로 손을 들라고 말했다1.
포로들은 하삭골 쪽으로 끌려 내려갔다. 이백 야드쯤 내려갔을 때 포탄이 일행 한가운데 떨어졌다. 감시병도 포로도 땅에 엎어졌다. 중공군 하나와 이름이 남지 않은 한국인 포로 하나가 죽었다. 고갑진은 엎드린 감시병에게 덤벼 기관단총을 빼앗았고, 남은 둘을 쏘았다1. 그는 조성만과 함께 참호로 뛰어 올라갔다.
산마루의 중대 지휘 벙커에서 해럴드는 열한 시가 지나자 포탄 몇 발이 따로따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일 분도 안 되어 포탄이 쏟아졌다. 소대로 가는 전화선이 끊겼고, 대대로 가는 선도 끊겼다. 해럴드는 문간에서 붉은 별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전면 공격을 받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어 고지 위에 조명을 달라는 붉은 별 무리 신호탄을 쏘았다. 그 신호탄이 문틀을 넘지 못하고 되튀어 벙커에 불이 붙었다1. 지휘조는 몇 분 동안 밖에 나와 불을 껐다.
벙커 문에는 중대 선임하사 하워드 미즐리가 기관단총을 들고 섰다. 그는 쓰러뜨린 중공군을 사격에 걸리지 않게 모래주머니 옆으로 끌어다 놓았다. 아침에 그 자리에는 시신 열셋이 쌓여 있었다1. 총구멍 앞에는 중대 서기 리펜호프 상병이 엎드려 있었다.
“중대장님, 저기 중국군이 하나 있습니다. 쏴도 되겠습니까?”
“허가한다.”
그 문답이 다섯 번 되풀이되었다1. 왼쪽 제1소대 서른아홉 명 가운데 총을 들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다. 해럴드는 무전으로 폭찹고지에 미군 수비대가 없는 것이나 같다고 보고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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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17일 금요일 새벽 네 시 반, 200고지 — 폭찹고지 바로 뒤의 낮은 산.
K중대장 조지프 클레먼스(22) 중위의 병력은 백서른다섯 명이었다1. 그들은 새벽 세 시 반에 트럭을 탔다. 대대장 존 데이비스 중령은 고지 위에 무엇이 남았는지 몰랐다. 클레먼스는 정상 전체가 적 손에 있다고 알아들었다.
“준비되면 말하게. 포격을 걷어 주지.”
“다 됐습니다.”
출발선에서 첫 벙커까지는 백오십 미터 남짓이었다. 비탈은 바위와 포탄 구덩이투성이였다. 병사들은 서둘러 뛰어오르다 다리가 풀렸고, 화염방사기와 탄약을 진 병사들은 철조망 아래 짐을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그 거리를 오르는 데 이십구 분이 걸렸다1. 정상에 닿자 중공군 포가 십 분 쏘고 십 분 쉬기를 되풀이했다.
지휘 벙커 문 앞에서 쿠즈믹 중사가 수류탄을 던지려고 팔을 들었다. 문 안에서도 누군가 수류탄을 든 팔을 들고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E중대 소대장 애트리지 소위였다1. 둘은 그렇게 마주 섰다. 그다음 포탄 세 발이 그 자리에 떨어졌다. 병사들은 자기 편 포가 짧게 쏜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부터 K중대의 다리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1.
오른쪽 능선으로는 L중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쏜 총알이 K중대가 막 차지한 참호로 날아들었다. K중대 병사들이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지만 사격은 그치지 않았다. 사격이 멎은 것은 L중대가 중공군 총에 다 쓰러지고 난 뒤였다. 예순둘이 출발했고, 참호에 닿은 사람은 아서 마셜 소위가 이끈 열둘이었다1. 중대장 크리텐든 중위는 다쳤고, 그 자리를 받은 벡텔 중위는 곧 수류탄에 쓰러졌다.
아침 여덟 시 십사 분, 미 제17연대 G중대가 올라왔다. 중대장이 클레먼스에게 상냥하게 물었다1.
“지금 상황을 좀 말해 주겠나?”
클레먼스가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었을 때 미국에 있던 인척 월터 러셀 중위였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러셀이 받은 명령은 소탕을 거든 뒤 되도록 빨리 내려오라는 것이었다1. 정오에 대대 참모가 서면 명령을 가지고 왔다. G중대는 오후 세 시에 철수한다. 클레먼스는 참모에게 말을 들려 보냈다. 위에서는 이 위기를 모르고 있다, 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이 내려가면 이 산을 지킬 수 없다1. 오후 두 시 사십오 분에는 사단 공보장교가 사진사 둘을 데리고 올라왔다. 이긴 싸움을 찍으러 온 길이었다. 그 무렵 고지 아래에는 탄약과 들것, 화염방사기를 진 한국인 노무단원 여덟이 서 있었다. 그들은 포탄이 쏟아지는 비탈을 올려다보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짐은 정상까지 백오십 미터를 남기고 멈추어 있었다1. 클레먼스가 쪽지를 써서 건넸다1.
“사진은 잊어. 이걸 대대에 전해. 도와주지 않으면 이 산을 지킬 수 없다.”
사단은 군단에, 군단은 미 제8군에, 제8군은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 같은 것을 물었다. 폭찹고지를 정말 지키고 싶은가1? 오후 세 시, 러셀은 중대의 절반을 잃고 고지를 내려갔다. 그 틈에 노무단원 여섯이 화염방사기를 지고 취사 벙커까지 올라왔다. 쿠즈믹의 병사들은 그것을 들어 앞으로 옮기려 했으나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1. 클레먼스에게는 스물다섯이 남았다. 그는 그들을 왼쪽의 가장 높은 둔덕으로 모았다. 병사들은 숟가락과 칼, 대검으로 포탄 구덩이를 파 넓혔다. 삽을 휘두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는 시간에는 칫솔로 소총을 닦았다. 흙비가 쏟아지면 닦은 총이 다시 더러워졌고, 그러면 다시 칫솔을 들었다1. 물은 아침에 떨어졌다. 브리지스 상병은 그 오후를 한 줄로 말했다1.
“그냥 엎드려서 받아 냈습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으니까요.”
클레먼스는 무전기를 지키러 지휘 벙커로 돌아갔다. K중대는 그날 열여덟이 전사하고 일흔하나가 다쳤다1. 오후 네 시 사십 분, 클레먼스가 무전기를 잡았다. 무전을 받은 대대 지휘소에 사단장 트루도(48) 소장이 와 있었다1.
“다치지 않은 사람이 스무 명쯤 됩니다. 완전히 지쳤습니다. 교대해 주지 못하면 철수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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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18일 새벽, 폭찹고지 위의 중공군 벙커 — 중국 기록이 석현동 북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
장칭취안(22)은 중공군 제23군 제67사단 제201연대 제2대대 제5중대의 무전병이었다. 다쳤다가 쉬던 중이었는데, 중대에 내려갈 무전병이 사정이 생겨 대신 나섰다. 16일 저녁 여덟 시, 그는 대대장을 따라 산에 올랐다3. 그 공격에서 제5중대는 구 분 만에 정상을 잡았다고 중국 쪽 기록은 적었다4. 이틀이 지나자 중대에는 스무 명 남짓이 남았다. 중대장도 소대장도 전사했다. 두 밤 하루를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못했다. 대대장은 그에게 남아서 포병을 불러 대라고 했다3.
전우들이 벙커 안에서 그를 둘러쌌다. 그는 무전기에 대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를 불렀다. 사십 미터 앞, 삼십 미터, 이십 미터, 십 미터, 오 미터3. 수화기 저편에서 포병 쪽 통신원 루훙쿤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장칭취안은 암호를 버렸다5.
“벙커 지붕에 쏴! 잔말 말고, 나한테 쏴! 나한테 쏴!”
포탄은 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포병은 탄약이 모자랐다5. 루훙쿤은 곧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고, 무전병이 전사했다고 여겼다3. 장칭취안은 배와 오른쪽 눈에 파편을 맞았다. 그는 포로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만 하며 총을 더듬어 찾았다. 그때 가스탄 하나가 벙커로 날아들었다. 깨어 보니 미군 트럭 위였다5.
5월 18일, 제23군 신문 기자 훙루가 루훙쿤의 이야기를 듣고 「끈질긴 목소리」라는 글을 썼다. 곧 미군이 넘긴 포로 명단에 장칭취안의 이름이 나왔고, 위에서 선전을 멈추라는 명령이 내려왔다3. 그는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팔에 글씨를 새기라는 강요를 끝까지 거부했다. 휴전 뒤 판문점에서 포로를 맞바꿀 때 그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간 그에게는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라는 요구가 기다렸다. 문화대혁명 때는 배신자로 몰려 끌려 다녔다. 당의 처분이 취소된 것은 1981년 12월이었다5. 그사이 중국 영화 「영웅아녀」의 주인공 왕청이 고지 위에서 「나한테 쏴라!」를 외쳤다. 그 장면의 원형으로 꼽히는 사람 가운데 첫째가 장칭취안이었다5.
*
같은 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폭찹고지.
전날 밤 자정 무렵, 미 제17연대 F중대장 킹 대위가 클레먼스의 벙커로 들어와 지휘를 넘겨받았다. 클레먼스는 남은 사람을 데리고 내려갔다1. 킹은 L중대의 덴튼 소위를 붙들었다.
“나는 이 진지를 하나도 몰라. 좀 남아서 도와주겠나?”
덴튼은 남았다. 한 시간 반 뒤 중공군이 벙커 지붕 위에서 문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기관단총을 든 중공군이 문으로 들어와 쏘았다. 덴튼과 킹이 맞았다1. 그때 미 제17연대 E중대가 산 앞쪽에서 올라왔다. 중대장 고먼 스미스 중위는 다른 중대들이 오른 뒤쪽 비탈 대신 적 쪽 앞면으로 돌아 오르기로 했다. 그 길은 하루 전에 미리 익혀 두었다.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정상에 닿았다1. 새벽 세 시 이십 분과 네 시 반 무렵 중공군이 다시 올라왔다1. 연대장 컨 대령이 대대 하나를 더 넣자고 하자 트루도가 말렸다.
“안 돼. 우리는 하루에 대대 하나씩 갈아 넣고 있어. 중대 하나만 보내.”
A중대가 올라갔다. 그날 해가 지고서야 중공군이 물러났다1. 둘째 날 미군 포병은 폭찹고지와 이웃 전초들에 칠만 칠천삼백사십구 발을 쏘았다1. 미군은 이 싸움에서 백네 명이 전사하고 삼백일흔세 명이 다쳤다6. 중국 쪽 기록은 18일 새벽 미 제17연대가 올라오자 지원군이 고지에서 물러났다고 적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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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6일 월요일 저녁, 폭찹고지 앞 비탈의 갱도 — 중공군 제67사단 제200연대 제6중대.
빗물이 갱도 입구로 흘러들었다. 이 굴은 6월 중순부터 판 것이었다. 미군 철조망에서 백이십 미터 남짓 떨어진 산허리에, 길이 백 미터가 넘고 강화 중대 하나가 숨을 수 있는 굴이었다7. 뒤에서는 천 명 가까운 사람이 진흙길에 통나무를 깔아 탱크가 다닐 길을 삼천 미터 넘게 만들었다7. 미군도 손 놓고 있지 않았다. 강화 중대 하나가 지키던 산은 이제 보병 중대 둘과 화기 중대 하나가 지켰다7.
“또 저 산입니까? 석 달 전에도 올라갔다 내려왔는데요.”
“그러니까 이번엔 조금씩 떼어 먹는 거다. 질긴 엿 쪼개 먹듯.”
중국군은 그 작은 산을 조금씩 쪼아 적을 줄이는 싸움터로 보았다7. 6월 하순부터 지원군은 여름 반격을 벌이고 있었고, 제23군은 동쪽 금성 쪽의 큰 공격에 맞추어 제67사단 전부를 이 산에 걸었다7.
포격은 삼 분 만에 그쳤다. 제6중대는 굴에서 뛰어나가 육 분 만에 미군 참호에 들어갔다7. 주봉 가까이에서 미군 암벽 벙커의 기관총이 길을 막았다. 폭약을 지고 나간 병사가 쓰러졌다. 제200연대 병사 쉬자펑(19)이 폭약 꾸러미를 안고 나섰다7. 안후이성 지시 사람으로, 출전 전에 지난해 가을 상감령에서 기관총 구멍을 몸으로 막은 황지광처럼 싸우겠다고 말했던 병사였다8. 그는 두 다리에 총을 맞고도 벙커 앞까지 기어갔다. 비에 젖은 폭약은 터지지 않았다. 그는 총구멍으로 몸을 던져 가슴으로 막았다7. 중대가 그 틈으로 주봉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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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밤부터 7월 8일까지, 폭찹고지 미군 진지 — 미 제17연대 A중대.
A중대는 일주일 동안의 전초 근무를 마치고 이튿날 아침 내려갈 참이었다9. 밤 열 시 이십오 분, 장맛비 속에 포탄과 박격포탄이 쏟아졌다. 중공군 제200연대의 강화 대대가 올라왔다9. 진지 앞 백오십 야드에 매복을 나가 있던 인먼 중위는 부하 스물한 명을 참호로 데리고 들어오다가 자정 직전 수류탄에 맞아 전사했다. 중대 선임하사 호비 상사는 지휘 벙커를 지키다 전사했다9. 자정이 지나 B중대가 200고지에서 올라왔다9.
중대장 대리 리처드 셰이(23) 중위는 가장 위험한 곳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반격을 이끌다가 참호 칼로 중공군 둘을 죽였다10. 7일에는 스무 명쯤을 모아 다시 돌격했다. 다치고도 후송을 거절했다. 그는 기관총 진지 하나를 혼자 잠재웠다10. 비는 사흘 동안 그치지 않았다. 미군은 지붕 덮인 장갑차로 탄약을 올리고 부상병을 내렸다6.
중공군도 사람을 갈아 넣었다. 제200연대는 7일 중대 셋을 더 넣었고, 8일 진지를 제199연대에 넘겼다7. 중국 쪽 기록은 그 사흘 동안 독립 전차 제4연대 제2중대의 215호 전차를 따로 적었다. 구덩이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 전차가 제자리에서 포를 돌려 미군 중전차 다섯 대를 부수고 엄폐호 스물여섯 개를 무너뜨렸다는 기록이다. 지원군 사령부는 그 전차에 「인민 영웅 전차」라는 이름을 주었다7. 8일 새벽에는 미 제7사단이 비행기 수십 대와 포를 앞세워 크게 반격했고, 제199연대가 사흘 밤낮을 버텼다고 중국 쪽은 적었다7.
8일 셰이는 또 반격을 이끌었고, 맞붙어 싸우는 모습이 그가 마지막으로 보인 모습이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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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10일 금요일 밤, 미 제7사단 사령부.
그날 판문점에서는 휴전 회담이 다시 열렸다2. 미 제8군 사령관 테일러와 제1군단장 클라크(49) 중장, 트루도가 한 탁자에 앉았다. 결론은 짧았다. 중공군은 사상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 전초를 쥐려 한다. 그 뜻이 이 산의 전술 가치보다 무겁다2. 내려오기로 했다.
테일러는 밤에 내려오자고 했다. 철수를 처음 건의한 사단 정보참모 레너드 로빈슨 대령이 고개를 저었다2.
“중공군은 날마다 낮에 장갑차가 탄약을 싣고 올라가는 걸 봅니다. 지붕이 덮여 있으니 안에 뭐가 실렸는지는 모릅니다. 낮에 그 차로 내려오면 됩니다.”
테일러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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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11일 토요일 오후, 폭찹고지에서 200고지로 내려오는 보급로.
장갑차들이 늘 다니던 길로 올라갔다. 병사들이 차에 올랐다. 차들은 아무 일 없이 내려왔다2. 중공군은 그 차들이 또 공격을 도우러 올라가는 줄 알았다. 이틀 가까이 지나서야 빈 산인 것을 알고 올라왔다. 그들을 맞은 것은 제7사단의 모든 포와 미군이 곳곳에 묻어 둔 부비트랩이었다2. 4월에 클레먼스가 도와주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고 쪽지를 썼던 산을, 석 달 뒤 사단은 스스로 내려왔다.
미군은 7월 싸움에서 이백마흔세 명이 전사하고 구백열여섯 명이 다쳤으며 아홉 명이 사로잡혔다. 죽은 사람 가운데 백예순셋은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6. 중국 쪽 의무 기록은 닷새 동안 제67사단 육천팔백 명이 싸워 오백서른세 명이 전사하고 천이백마흔두 명이 다쳤다고 적었다6. 중국 쪽은 미군 삼천오백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사로잡았다고 주장했다. 중국 쪽 기록에는 미군이 내려간 이야기가 없다. 제201연대의 제8중대와 제9중대가 주봉과 차봉을 맡아 미군의 반격을 거듭 물리쳤다고 적었다7. 10일 중국과 북한의 연합사령부는 이 싸움을 칭찬하는 통보를 돌렸다7.
“이 전투는 비교적 잘 싸웠다. 특별히 통보하여 표창한다.”
열엿새 뒤인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서명되었다6. 쉬자펑에게는 10월 27일 북한의 영웅 칭호가, 이듬해 2월 15일 지원군의 특등공과 일급 영웅 칭호가 내려졌다8. 같은 여름 부산의 수용소 철망 안에서, 장칭취안은 집에 가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5.
사료 출처
1. S. L. A. Marshall, 『Pork Chop Hill: The American Fighting Man in Action, Korea, Spring, 1953』(William Morrow, 1956) 「Overture」「All of King's Men」「Love Alone」 장, archive.org/details/porkchophillthea011690mbp — 16일 저녁 하삭골의 노래와 저녁 메뉴, 통역의 말(원문: They're getting ready to die), 해럴드의 말(원문: Maybe we ought to be singing, too), 16일 23시 공격 첩보와 미리 안 사람이 셋뿐이었던 일, 해발 234미터, 교대일로 96명·소총 소대원 76명, 19시 37분 청음초 20명과 한국인·미군 짝짓기, 43번 청음초의 Koe Kop Chin과 Fugett, 영어로 손을 들라 한 중공군, Cho Sung Man, 포탄과 기관단총 탈취, 해럴드의 신호탄 두 발과 벙커 화재, 미즐리와 시신 열셋, 리펜호프의 다섯 번 문답(원문: Sir, there's a Chinaman. May I have the lieutenant's permission to shoot him? / Permission granted), 제1소대 39명, 「미군 수비대가 없다」는 보고, K중대 135명과 03시 30분 트럭, 데이비스의 말, 04시 30분 출발과 170야드 29분, 십 분 간격 포격, 애트리지와 쿠즈믹, 아군 단탄으로 여긴 포탄 세 발, 08시 14분 G중대와 인척 러셀(원문: Will you please tell me the situation? / Now what in hell are you doing here?), 정오의 15시 철수 명령, 블레이크에게 전한 말, 14시 45분 공보장교 배로스와 쪽지(원문: We must have help or we can't hold the hill), 사단·군단·제8군·극동군사령부로 올라간 물음, 러셀의 15시 철수, 25명, K중대 전사 18·부상 71, 16시 40분 무전(원문: We have here about twenty men who are still unhit…), 트루도의 대대 지휘소 도착, 자정 무렵 킹 대위와 덴튼(원문: I don't know this position at all. Could you stay awhile and help me?), 벙커 습격, 고먼 스미스의 앞면 반격, 03시 20분·04시 29분 공격, 트루도의 말(원문: No, we're chewing up one battalion a day. We can't keep it up. Send just one company), A중대 투입, 18일 해 진 뒤 중공군 퇴각, 둘째 날 77,349발. 2.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미 육군 군사사연구소, 1966), archive.org/details/cmh-pub-20-3 — 1952년 11월 태국 대대의 폭찹고지 방어 두 차례, 3월 불모고지 상실 뒤 탈환하지 않기로 한 결정(51화 출처와 같은 책), 「The Last Offensive」 장 473~474쪽의 7월 6일~10일 경과, 10일 밤 테일러·클라크·트루도의 결정, 사단 정보참모 레너드 로빈슨 대령의 낮 장갑차 철수 건의와 테일러의 동의, 11일 오후 철수, 중공군이 공격 지원으로 오인하고 이틀 가까이 지나 점령하다 포격과 부비트랩을 맞은 일, 10일 판문점 회담 재개. 3. 颜韶, 「“王成原型”蒋庆泉,应该是英雄」, 『环球人物』, 인민일보 지면 게재 2013.8.26, paper.people.com.cn/hqrw/html/2013-08/26/content_1300581.htm — 장칭취안의 소속(제23군 제67사단 제201연대 제2대대 제5중대), 부상 뒤 대신 나선 무전병, 16일 저녁 8시 대대장과 함께 오른 일, 이틀 뒤 20여 명·중대장 소대장 전사·두 밤 하루 굶음, 대대장의 잔류 명령, 40·30·20·10·5미터 낙하점 보고, 배와 오른눈 부상, 통신원 루훙쿤이 응답을 잃은 일, 1953년 5월 18일 훙루의 「顽强的声音」과 포로 명단 뒤 선전 중단. 4. 중국어 위키백과, 「石峴洞北山戰鬥」(2026년 10월 열람) — 4월 16일 밤 제201연대 제5중대가 9분 만에 정상 점령, 18일 새벽 미 제17연대 증원 뒤 지원군 철수, 지원군 쪽 추산 미군 사상 약 3,500명. 5. 林衍, 『中国青年报』 2011.4.6 12면, 중국수자시대 재게재 chinadigitaltimes.net/chinese/?p=143880 — 장칭취안이 1953년 4월 18일 명령을 받았다는 서술, 루훙쿤의 회고(원문: 你别废话,废话,向我开炮,向我开炮!), 포병의 탄약 공급 문제, 자결하려던 일과 가스탄, 트럭에서 깨어남, 부산 수용소의 문신 거부, 귀국 뒤 반성 요구와 문화대혁명 때의 비판, 1981년 12월 처분 취소, 「영웅아녀」 왕청의 처음 원형. 6.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Pork Chop Hill」(2026년 10월 열람) — 4월 미군 전사 104명·부상 373명(Rodriguez 2010 인용), 7월 장맛비와 장갑차 보급·후송, 7월 미군 전사 243·부상 916·포로 9, 시신 미수습 163(McWilliams 2004, 435쪽 인용), 중국 의무 기록의 제67사단 6,800명 참전·전사 533·부상 1,242, 4월 제141사단의 중대 규모 공격, 휴전 협정 서명이 3주 안이었던 일. 7. 章世森, 「石岘洞北山反击战——“零敲牛皮糖”的光辉战例」, 中国军网, 인민망 재게재 2024.2.19, cpc.people.com.cn/n1/2024/0219/c443712-40179101.html — 6월 하순 여름 반격과 금성 방향 배합, 제67사단 전부 투입, 미군 수비 증강(2개 보병중대·1개 화기중대), 6월 중순부터 판 갱도(장애물 앞 120여 미터, 백여 미터, 강화 중대 1개), 천 명 가까이 깐 3,000여 미터 통나무 길, 「零敲牛皮糖」, 7월 6일 3분 포격과 제200연대 제6중대의 6분 만의 돌입, 쉬자펑의 행동, 7일 제200연대 3개 중대 추가와 8일 제199연대 인계, 제201연대 제8·9중대의 주봉·차봉 방어, 3,500여 명 전과 주장, 10일 중조연합사령부 통보 표창(원문: 此战斗打的较好,特予通报表扬). 8. 澎湃新闻, 쉬자펑(许家朋) 인물 기사(2021), thepaper.cn/newsDetail_forward_14927986 — 1931년 안후이 지시 출생, 1951년 입대·1952년 7월 참전, 출전 전 「황지광처럼」 하겠다는 말, 7월 6일 밤 빗속의 공격, 젖은 폭약, 1953년 10월 27일 북한 영웅 칭호, 1954년 2월 15일 특등공·일급 영웅. 9. Bill McWilliams, 『On Hallowed Ground: The Last Battle for Pork Chop Hill』(Naval Institute Press, 2003) 소개 페이지, west-point.org/users/usma1955/20315/HG.htm — 7월 6일 22시 25분 포격과 장맛비, 중공군 제200연대 강화 대대, 교대를 앞둔 A중대, 200고지의 B중대와 자정 뒤 증원, 인먼 중위의 21명 매복조와 전사, 호비 상사의 전사. 10. 영문 위키백과, 「Richard T. Shea」(2026년 10월 열람) — 1927년 1월 3일생, A중대 대리 중대장, 명예훈장 공적서의 7월 6일 참호 칼, 7일 약 20명을 이끈 돌격과 후송 거부, 기관총 진지 제압, 8일 마지막 반격과 실종 뒤 전사 처리. 11. Dwight D. Eisenhower Presidential Library, 1953년 1월 20일 취임(eisenhowerlibrary.gov) — 제34대 대통령 취임일. 휴전 회담의 시작(1951.7.10)과의 간격은 계산값이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클레먼스 1928년 4월 30일생(영문 위키백과 「Joseph G. Clemons」), 트루도 1902년생(영문 위키백과 「Arthur Trudeau」), 클라크 1901년생(영문 위키백과 「Bruce C. Clarke」), 셰이 1927년생(10번), 쉬자펑 1931년생(8번), 장칭취안은 『中国青年报』가 2011년에 83세, 1948년에 20세라고 적은 데서 1928년생으로 셈했다(5번). 테일러는 51화 [나이]와 같은 근거(1901년생)로 앞 화에 나이를 적었으므로 이 화에서는 이름만 적었다. 해럴드, 러셀, 데이비스, 애트리지, 쿠즈믹, 미즐리, 리펜호프, 킹, 덴튼, 고먼 스미스, 컨, 인먼, 호비, 로빈슨, 퓨겟, 고갑진, 조성만, 루훙쿤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4월 공격의 주체 — 마셜과 중국어 위키백과는 제67사단 제201연대를, 영문 위키백과는 제201연대와 함께 제141사단의 중대 규모 공격을 적었다. 4월 싸움의 끝 — 마셜은 18일 해 진 뒤, 참전자 회고(VFW 잡지)는 18일 저녁 여섯 시에 중공군이 물러났다고, 중국어 위키백과는 18일 새벽 미군 증원 뒤 지원군이 철수했다고 적었다. 본문은 두 쪽을 다 적었다. [자료 충돌] 장칭취안의 날짜 — 『环球人物』는 16일 저녁 출발과 「이틀 뒤」, 『中国青年报』는 18일에 명령을 받았다고 적었다. 본문은 16일 밤 출발, 18일 새벽 무전으로 두었다. [자료 충돌] 7월 6일 공격 시각 — 중국어 자료(百度百科 요약)는 19시 30분, 다른 중국 쪽 서술은 21시 30분 포격 개시, McWilliams는 22시 25분 포격으로 적었다. 본문의 미군 장면은 McWilliams를 따랐고, 중공군 장면은 「저녁」으로만 두었다. [자료 충돌] 7월의 끝 — 미 육군 전사는 11일 낮 장갑차로 철수했고 중공군이 이틀 가까이 지나 고지에 들어왔다고 적었고, 중국 쪽 기록은 철수를 언급하지 않고 제201연대가 반격을 물리쳐 전면 승리했다고 적었다. 사상자도 미군 집계(미군 전사 243, 중공군 추산 전사 1,500·부상 4,000)와 중국 쪽 집계(지원군 전사 533·부상 1,242, 미군 3,500여 섬멸 주장)가 크게 다르다. 미 육군 전사 473쪽은 7월 6일 공격을 받은 사단을 「미 제4사단」으로 적었으나 같은 문단 뒤에서 제7사단으로 적어 오식으로 보았다. 영문 위키백과는 7월 A중대장을 앨턴 매클프레시 중위로, McWilliams와 셰이의 공적서는 셰이를 대리 중대장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이름 표기 — 카투사 병사의 한글 이름은 기록에 없고 마셜의 영문 표기(Koe Kop Chin, Cho Sung Man)만 남아 있다. 본문의 고갑진·조성만은 영문 표기를 읽은 것이다. 해럴드의 가운데 이름 머리글자는 마셜 스캔본에 V, 영문 위키백과에 U로 나온다. 러셀은 마셜이 클레먼스의 「brother-in-law」라고만 적어 처남인지 매부인지 알 수 없어 「인척」으로 썼다. [재구성] E중대 병사들의 첫 두 마디, 고갑진과 퓨겟 사이의 외침 자구, 쿠즈믹과 애트리지가 마주 선 순간의 묘사, 데이비스와 클레먼스의 짧은 문답 가운데 클레먼스의 대답, 클레먼스가 공보장교에게 한 말 앞부분(쪽지 문장은 기록), 장칭취안 장면의 벙커 안 모습(낙하점 거리·외침·부상·가스탄은 기록), 7월 6일 갱도 안 두 병사의 대화와 빗물, 「질긴 엿」 비유를 대사로 옮긴 것(중국 쪽 기사의 「零敲牛皮糖」), 로빈슨의 건의를 대사로 옮긴 자구(내용은 기록), 장갑차 철수 장면의 세부, 「4월에 클레먼스가…」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연결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그날 생각은 기록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