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51/57

51화(19,711자)

불모고지 전투 — 돌아오지 않는 중대

1950 · 네오

불모고지 전투, 1953년 3월 23일~26일 — 연천과 철원 사이, 미 제7사단 제31연대 전선. 서쪽부터 제2대대, 가운데 콜롬비아 대대(데일 전초의 A중대, 불모고지의 B중대와 교대하러 오른 C중대, 뒤쪽 웨스트뷰), 동쪽 폭찹고지의 제3대대. 북쪽 중공군 제47군 제141사단 제423연대 제1대대의 23일 밤 여덟 시 공격, 같은 밤 폭찹고지로 간 중공군 제67사단. 24일 새벽 미 제31연대 B중대, 24~25일 미 제32연대 제1대대의 반격과 25~26일 밤 철수. 개략도, 전초 위치 일부 추정, 거리 비례 아님.

1953년 3월 23일 월요일 오전,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사이 도연리(현 경기도 연천군 중면 도연리) 북쪽 — 미 제7사단 제31연대에 붙은 콜롬비아 대대 지휘소.

대대장 알베르토 루이스 노보아(33) 중령은 전화기를 귀에서 조금 떼고 들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연대장 윌리엄 컨 대령이었다. 명령은 짧았다. 불모고지의 B중대를 오늘 C중대로 바꾼다1.

불모고지는 대대 앞에 솟은 266고지였다. 미군은 포탄에 나무와 풀이 다 깎여 나간 꼭대기를 보고 ‘늙은 대머리’, 올드 볼디라고 불렀다. 콜롬비아 병사들은 스페인어로 ‘비에호 칼보’라고 했다1. 중국 쪽 지도에는 상포방 동산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2. 서울로 내려가는 큰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고지여서, 지난여름부터 양쪽이 몇 번이나 뺏고 뺏겼다1.

“연대장님, B중대는 열하루째 저 위에 있습니다. 어제 하루에만 포탄과 박격포탄이 천구백칠십두 발 떨어졌습니다.”

대대 작전과가 적어 둔 숫자였다1.

“그러니까 바꿔 주라는 거요.”

“지금 바꾸면 두 중대가 한 참호에 엉킵니다. C중대는 열사흘 전 180고지 공격에서 사람을 많이 잃고 아직 다 채우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미뤄 주십시오.”

교대를 미뤄 달라는 대대장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

3월 10일, 대대는 바르불라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이 쥔 180고지를 쳤다. C중대 두 소대가 양옆으로 올라갔고, 공격한 병사의 육 할 넘게가 죽거나 다쳤다3. 대대장이 훗날 적은 숫자는 전사 열하나, 부상 마흔넷, 실종 열이었다4. 그 뒤 대대는 빈자리를 메우지 못한 채 다시 주저항선에 올라왔고, 지나치게 넓은 정면에 병력을 한 줄로 늘어세웠다. 대대장 손에 남은 예비대는 미군 제31연대 제1대대에서 빌려 온 A중대 하나뿐이었다3.

수화기 너머에서는 같은 말이 되풀이되었다. 루이스 노보아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지도를 보았다. 그날 오전 열한 시, B중대 지휘소 둘레 한 곳에만 82밀리 박격포탄이 삼십 분 동안 이백 발 떨어졌다4. 전령이 그 보고를 들고 들어왔다.

“교대는 몇 시로 잡습니까?”

“오후 세 시. 해 있을 때 올라간다.”

루이스 노보아는 콜롬비아 북동부 부카라망가 사람이었다5. 그는 이 대대의 세 번째 대대장이었다6. 사흘 전인 20일부터 사단 정면 전체에 떨어지는 포탄이 늘었고, 이 구역에서 중공군 탈주병 둘이 붙잡혔다. 사단은 공격이 가깝다고 보았다7. 제7사단 사람들은 이 고지 둘레에서 포탄 수가 늘면 곧 공격이 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그는 연필로 지도 위의 불모고지와 그 뒤 웨스트뷰 사이에 선을 하나 그었다. 낮에 그 선을 따라 올라가는 병사들은 북쪽 고지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다 보일 터였다.

*

같은 날 오후 세 시 무렵, 불모고지 B중대 제2소대 참호.

알프레도 포레로 파라 중위는 무너진 엄폐호의 통나무를 어깨로 받치고 있었다. 그의 제2소대는 열하루 전 밤에 이 고지의 오른쪽을 맡았다. 미군 전차 다섯 대가 소대를 받쳤다. 한 대는 고지 위에 엎드려 철갑 토치카가 되었고, 네 대는 골짜기 아래에 있었다1.

참호를 따라 C중대 병사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낮에, 맞은편 고지에서 다 보이는 비탈로 올라오는 교대였다1. 중공군 포가 그 줄을 알아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올라오던 줄이 멎었고, 멎은 줄 위로 흙이 쏟아졌다.

“중위님, 우리 고지가 늙은 대머리라는데요.”

기관총 사수 하나가 철모를 벗어 흙을 털며 말했다.

“그래서?”

“그럼 우리는 그 대머리에 남은 마지막 머리카락입니다. 하나씩 뽑히는 중이고요.”

참호 안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포레로도 웃었다. 웃음이 끝나기 전에 다음 포탄이 왔다.

C중대 제1소대장 미겔 피녜레스 그리말디 소위가 왼쪽 제3소대 자리로 갔고, C중대 제3소대장 루이스 알레한드로 베르날 바케로 소위는 가운데 제1소대장 페드로 카이세도 야쿱 중위의 엄폐호 쪽으로 갔다1. 베르날은 열사흘 전 180고지에서 부상자와 시신을 끌고 내려온 장교였다. 그는 포레로와 눈이 마주치자 턱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오늘 밤은 조용하겠지?”

“여기서 조용한 밤은 한 번도 없었어.”

이틀 전인 21일에도 그랬다. 중공군은 180고지 비탈에 콜롬비아 병사 넷과 미군 하나의 시신을 드러나게 놓아두었다. 거두러 오는 사람을 쏘려는 미끼였다. 병사 알레한드로 마르티네스 로아와 페드로 리마스 메디나 상병이 기어 나가 다섯 시신을 끌고 돌아왔다8. 마르티네스 로아는 뒤에 그 싸움을 책으로 남겼다8. 베르날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포레로도 묻지 않았다.

해가 졌다. 교대는 반도 끝나지 않았다.

*

1953년 3월 23일 저녁 여덟 시, 불모고지 북쪽 — 중국인민지원군 제47군 제141사단 제423연대 제1대대.

산기슭에는 제1대대가 미리 파 둔 일곱 개의 병력 대기굴이 있었다. 탄약과 먹을 것은 며칠 전에 굴 안으로 날라 두었다9. 대대장 하오중윈은 전국 전투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다10. 연대 정치위원과 부연대장까지 이 대대로 내려와 공격을 거들었다2.

제1대대의 로켓포 사수 리하이칭(29)은 공격 전에 대대장 앞에 섰다. 쓰촨성 중장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열세 살에 청두로 가 베 짜는 일을 했고, 국민당군에 끌려갔다가 1949년 6월 후베이성 판청에서 부대째 넘어온 사람이었다10.

“가장 어려운 일을 주십시오.”

“다 어려운 일이야.”

“그럼 그중에 제일 어려운 걸로요.”

연대 지휘소에는 연대장 량칭산이 남아 무전을 붙들었다2. 사단 사령부의 무선 담당 참모 가오펑화는 이 공격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들은 대로 기억했다. 판문점의 휴전 회담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산 하나를 더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9. 그는 예순아홉 해 뒤에도 그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싸우는 건, 평화를 얻으려고 싸우는 거였소.”

여덟 시, 하오중윈이 포격을 불렀다. 백 문 가까운 포가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사 분 동안의 급습이었다10. 122밀리 곡사포 열다섯 문, 야포와 산포 스물한 문, T-34 전차 세 대와 자주포 네 대가 이 한 고지에 붙었다고 중국 쪽 기록은 적었다2. 포격이 북쪽 산 너머로 삼사 킬로미터 물러나자 돌격대가 일어섰다9.

제3중대 제11분대가 앞장서서 철조망을 끊었다. 폭약을 단 막대를 밀어 넣고 터뜨리기를 여섯 번 했다. 일곱 번째 철조망은 고리 모양으로 감긴 것이었다. 부분대장 텅밍궈가 그 위에 몸을 던졌다. 딩자오구이, 우얼화, 장푸샹, 그리고 한 사람이 더 뒤따라 엎드렸다. 다섯 사람의 등이 철조망 위의 다리가 되었다11.

“밟고 넘어가! 머뭇거리지 마!”

구호대에 있던 저우더탕은 그 외침을 뒤에 그렇게 적었다11. 제3중대장 리즈룽은 배에 총탄을 맞았다. 그는 흘러나온 창자를 손으로 밀어 넣고 상처를 누른 채 지휘했다. 제10분대의 쑹더칭은 기관총을 쏘아 대는 미군 측 토치카 앞까지 폭약 막대를 안고 가 그 토치카와 함께 전사했다2.

리하이칭은 17호 고지 쪽 강철판 토치카를 맡았다. 탄약수 펑싼위안이 그의 팔을 잡았다.

“사십 미터 안에서는 쏘면 안 돼!”

리하이칭은 비탈 끝에 몸을 반쯤 내민 채 쏘았고, 폭풍에 날려 도랑 바닥으로 굴렀다. 귀가 먹먹했고 흙이 그를 덮었다. 그는 기어 나와 다시 쏘았다10. 그날 밤 그가 쏜 로켓탄은 열한 발이었다고 공적 기록은 적었다10.

중국 쪽 기록은 밤 열 시 삼십사 분, 고지의 수비대를 모두 없애고 꼭대기를 다 차지했다고 적었다2.

*

같은 날 밤 여덟 시 반 무렵, 불모고지 B중대 제2소대 참호.

먼저 불이 붙은 곳은 왼쪽이었다. 콜롬비아 대대 A중대의 전초 데일이 공격받았다. 알바로 페르도모 푸요 소위의 진지였다1. 같은 무렵 동쪽 폭찹고지의 미군 제3대대도 포탄을 뒤집어썼다7. 사십 분 뒤, 불모고지 북쪽 맞은편 고지의 굴에서 중공군이 고함을 지르며 쏟아져 나왔다1.

포레로의 소대 화염방사기가 철조망 앞에 불을 뿜었다. 하늘에서는 미군 비행기와 포병이 쏜 조명탄이 수백 개 내려왔고, 그 빛 속에서 참호를 뛰어넘는 그림자들이 보였다1. 교대하던 두 중대가 한 참호 안에 뒤엉켜 있었다. 누가 B중대이고 누가 C중대인지, 누가 어느 엄폐호를 맡았는지 아무도 다 알지 못했다.

고지 위에 엎드린 미군 전차가 90밀리 포를 쏘아 맞은편 고지의 무반동총과 기관총 자리를 찾았다. 50구경 기관총 네 정을 한데 묶은 대공 기관총이 예광탄 줄을 사방으로 그었다. 중공군 쪽에서는 톰슨 기관단총의 가는 연발음이 났고, 콜롬비아 병사들의 카빈 소총이 그 소리에 맞받았다. 수류탄이 참호 안에서 터질 때마다 누군가 스페인어로 위생병을 불렀다1.

B중대 지휘소에는 미군 포병 연락장교 데 라 가르사 중위가 있었다. 멕시코 출신으로 미군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무전기로 포격을 부르다가 그 밤에 포로가 되었고, 휴전 뒤 포로 교환 때 돌아왔다1.

대대 지휘소에서는 포격 소리 사이로 무전이 끊겼다 이어졌다. 고지 대대 지휘 엄폐호에 포탄이 바로 떨어져 통신이 끊겼다6.

“B중대! B중대, 들리나!”

대답은 없었다. 루이스 노보아는 예비대로 받아 둔 미군 A중대를 찾았다. 그 중대는 이미 대대장 모르게 폭찹고지 반격으로 빠져나가 있었다3. 컨 대령은 대신 미 제31연대 B중대를 콜롬비아 대대장 밑에 붙였다. 중대장 잭 패티슨 중위가 밤 아홉 시 반 웨스트뷰에서 출발했다. 웨스트뷰는 불모고지 남동쪽에 붙은 다음 고지였다7.

카이세도 중위는 가운데에서 버티다 기관단총 연사와 포탄 파편을 맞았다. 소대 부관 하이메 안드라데 토레스 하사가 그를 끌고 비탈의 주름진 골로 내려갔다. 카이세도는 끌려가지 않겠다고 버텼다1. 그 엄폐호 가까이에서 베르날 소위와 병사 몇이 보였다. 그 뒤로 베르날을 본 사람은 없다1.

자정 무렵, 왼쪽을 맡았던 B중대 제3소대장 알바로 에란 바케로 소위가 기관단총 연사를 맞은 몸으로 웨스트뷰로 물러났다. C중대 부중대장 호세 하이메 로드리게스 중위가 먼저 올라와 있었다. 두 사람은 웨스트뷰에서 병사를 모아 그쪽 길을 막았다1.

새벽 한 시 무렵, 고지 위로 양쪽 포탄이 함께 떨어졌다. 콜롬비아 쪽은 고지가 넘어갔다고 여겼고, 중공군 쪽도 같은 판단을 했다1. 포레로의 소대 곁 골짜기의 전차들은 명령 없이 물러났다고 루이스 노보아는 뒤에 보고서에 적었다3.

새벽 네 시 반, 포레로의 제2소대에 남은 사람은 여섯이었다1. 분대장 에르네스토 곤살레스 바렐라 하사, 호세 나르바에스 몬로이 하사, 소대 부관 아사엘 오소리오 살라사르 중사가 그 밤에 전사했다. 병사 스물여덟 명이 함께 전사했다1.

*

1953년 3월 24일 새벽, 웨스트뷰.

박격포반의 길베르토 디아스 벨라스코는 열아홉 살이었다. 탄약은 다 떨어졌다. 그는 비탈의 시신 사이를 기어 다녔다12.

조명탄이 꺼질 때마다 비탈은 다시 캄캄해졌다. 쓰러진 사람들은 같은 흙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콜롬비아 병사도 중공군 병사도 솜옷과 야전 상의가 똑같이 검게 젖어 있었다. 숨이 붙은 사람은 신음으로 자기 나라 말을 냈고, 숨이 끊어진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적이고 어느 쪽이 우리 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순일곱 해 뒤, 그는 영국 기자에게 그렇게 말했다12.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그 비탈 어딘가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얼굴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 무렵 콧수염을 기른 병사는 드물었다. 그의 친구는 콧수염이 있었다. 벨라스코는 콧수염이 난 입술을 찾아냈고, 친구를 업고 웨스트뷰로 내려왔다12. 친구는 이미 숨이 없었다.

고지 앞쪽에서는 여전히 총소리가 났다. 콜롬비아 병사 일부가 엄폐호 안에서 버텼다. 루이스 노보아의 보고서는 싸움이 24일 아침 일곱 시 오십 분까지 이어졌다고 적었다3. 날이 밝자 중공군은 불모고지 앞쪽에, 콜롬비아 병사들은 웨스트뷰에 자리를 잡았다. 남은 사람들은 반은 웨스트뷰를 지키고 반은 부상자와 시신을 날랐다3.

로드리게스는 뒤에 그 밤 고지 위에 있던 245명 가운데 222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돌아오지 않았다고 적었다3.

뒤에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목이 탄 병사 몇이 쓰러진 중공군의 물통을 열어 마셨다. 물인 줄 알았던 것은 위스키와 다른 술이었다1.

“그놈들은 술 마시고 올라왔고, 우리는 맨정신으로 맞았구먼.”

“맨정신이니까 여기 서 있는 거다.”

*

1953년 3월 24일 아침부터 26일까지, 불모고지 남서쪽 능선.

새벽 두 시에 첫 엄폐호로 들어갔던 미 제31연대 B중대는 고지 위의 중공군 주력 앞에서 멈췄다7. 제7사단장으로 온 지 며칠 안 된 아서 트루도(48) 소장이 연대 지휘소로 와서 지휘를 맡았다. 그는 미 제32연대 제1대대를 불렀다. 대대장은 조지 저스칼리언(36) 중령이었다7.

24일 아침 윌러드 스미스 중위의 B중대가 남서쪽에서 올라갔다가 남서쪽 손가락 능선에서 멈췄다. 오후에 저스칼리언은 B중대와 잭 콘 중위의 A중대를 다시 올려 고지의 사분의 일을 되찾았다. 저스칼리언은 앞선 부대와 함께 지뢰밭을 지나 걸었다. 그 사흘의 일로 그는 두 번째 은성훈장을 받았다13. 패티슨 중위는 턱뼈가 부러져 실려 내려갔다. 25일 새벽 네 시 반, 로버트 거트너 중위의 C중대가 북동쪽 능선으로 돌아 올라갔다가 다시 묶였다7.

중공군도 산 위를 비우지 않았다. 제423연대는 제2대대의 제4중대, 제6중대, 제3대대의 제8중대를 차례로 올렸다. 한 중대가 하루씩 버텼다. 중국 쪽 기록은 미군 전차 마흔여덟 대와 비행기 172대가 반격을 받쳤다고 적었다2. 26일 하루에만 미군 포탄 2만여 발과 폭탄 800여 개가 고지에 쏟아졌고, 지원군은 꼭대기에서 몸을 빼 굴과 뒤쪽 비탈로 물러난 채 포로 오르는 길을 막았다고 같은 기록은 적었다2.

리하이칭은 그 사이 어느 날 고지 위에서 크게 다쳤다. 곁의 전우들은 대부분 전사했고, 그는 다시 흙에 묻혔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를 파냈다. 뇌진탕이 심했고, 이가 아홉 개 빠져 있었다. 그는 뒤에 자식들에게 혼자 전차 두 대를 부수고 폭발에 날려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10. 쓰촨 중장현의 이 로켓포 사수에게는 그해 5월 지원군 사령부가 특등공을 매겼다10.

25일 오후 한 시 십오 분, 저스칼리언이 연대에 보고했다.

“A중대 장교 둘에 병사 열넷. B중대와 C중대를 합쳐 장교 둘에 병사 마흔. 연막과 의무병을 보내 주십시오.”

미군 전사는 그 보고의 숫자를 남겼다7. 그날 밤, 컨 대령은 철수를 명령했다7.

고지의 주름진 골에서 카이세도 중위는 나흘을 버텼다. 위로는 중공군과 미군의 포탄이 함께 떨어졌고, 사단은 불모고지를 아무의 땅도 아닌 곳으로 만들겠다며 폭격을 퍼부었다. 미군 순찰대가 그를 찾아냈을 때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다리 하나는 괴저로 잘라 내야 했다1. 피녜레스 소위는 25일, B중대 병사 카를로스 훌리오 테예스가 끌어 준 덕에 미군 전차에 실려 나왔다1.

26일 아침, 저스칼리언의 대대가 내려온 고지에 비행기들이 폭탄을 쏟았다7. 엄폐호에 숨어 있던 콜롬비아 병사 몇이 그 틈에 기어 내려왔다6.

*

1953년 3월 28일 토요일 저녁, 일본 도쿄, 유엔군사령부.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54) 대장 앞에 한국에서 올라온 전문이 놓였다. 그날 오후 두 시 오 분, 양쪽 사령부 사이에서 편지와 날짜를 주고받는 공산 측 연락장교가 편지 한 통을 건네 왔다는 보고였다. 편지 끝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38)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52)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14.

한 달 전인 2월 22일, 클라크는 두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이라도 중병과 중상을 입은 포로부터 먼저 맞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앞서 몇 번 같은 말을 꺼냈을 때마다 공산 측은 받지 않았고, 클라크는 이번에도 거절이 오리라고 보았다15.

답장은 거절이 아니었다. 양측 대표단은 이미 정전협정 초안 제53항에서 중환자 포로를 먼저 돌려보내기로 합의해 두었고, 회담이 멈추는 바람에 그 조항을 쓸 길이 없었다고 편지는 적었다. 그쪽이 이제 제네바 협약을 적용하겠다고 하니 이쪽도 같은 뜻으로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교환은 포로 대우를 정한 1949년 제네바 협약의 제109조, 싸움 중에도 중병·중상 포로는 돌려보낸다는 조항에 따라 하자고 했다. 편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이 일을 잘 풀어 포로 문제 전체를 매끄럽게 풀고 온 세상이 바라는 정전에 이르자는 것이었다. 그러니 판문점 회담을 곧바로 다시 열고, 날짜는 연락장교끼리 만나 정하자고 했다14.

참모 하나가 전문을 한 번 더 훑고 고개를 들었다.

“거절 편지에 보낼 답장은 세 가지나 써 두었습니다. 승낙 편지에 보낼 답장은 하나도 없습니다.”

클라크는 그날 저녁 일곱 시 삼십오 분,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로 전문을 쳤다. 중환자 교환에는 곧바로 손을 대겠다고 했다. 공산 측의 문구로 보아 저쪽은 회담 재개와 상관없이 교환을 하려는 것 같다고 적었고, 회담을 다시 여는 문제는 따로 의견을 올리겠다고 했다. 마지막에 한 줄을 덧붙였다. 공산 측이 틀림없이 이 편지를 방송으로 내보낼 테고, 그러면 질문이 쏟아질 것이었다14.

클라크가 모르는 일이 있었다. 3월 5일, 소련의 최고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72)이 뇌출혈로 죽었다15. 장례에 온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52)는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소련 쪽에 정전을 서둘러 달라고 다급하게 청했다16. 3월 19일 목요일, 소련 정부가 들어 있던 모스크바의 옛 성채 크렘린에서 소련 정부의 내각인 각료회의가 결의 하나를 통과시켰다. 결의문 끝에는 스탈린의 뒤를 이은 각료회의 의장 게오르기 말렌코프(48)의 이름이 적혔다. 스탈린이 죽고 두 주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16.

결의문에는 마오쩌둥(57)과 김일성에게 보낼 편지 초안이 붙어 있었다. 소련 정부는 그 편지에서 지금까지의 노선을 기계처럼 그대로 이어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김일성과 펑더화이는 클라크의 2월 22일 제안에 긍정하는 답을 보내고, 그 답장에서 제네바 협약 제109조를 들어 회담을 다시 열자고 하며, 날짜는 양쪽 연락장교가 정하게 하라고 초안은 적었다. 답장이 공개되면 곧바로 베이징에서 중국 정부의 무게 있는 사람이, 되도록 저우언라이가 나서서 이제 포로 문제 전체를 풀어 전쟁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말하라고 했다. 마오쩌둥에게 가는 편지는 저우언라이와 소련 외교관 바실리 쿠즈네초프(49)가 들고 가고, 김일성에게 가는 편지는 곧장 평양으로 떠날 외교관 야코프 말리크(44)가 들고 가기로 했다16.

클라크가 도쿄에서 읽은 편지는 아흐레 전 크렘린에서 쓴 초안의 순서를 한 줄씩 밟고 있었다.

이틀 뒤인 3월 30일, 저우언라이가 베이징에서 성명을 냈다. 돌아가기를 고집하는 포로는 싸움이 멎는 대로 곧바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포로는 중립국에 넘겨 송환 문제를 공정하게 풀자는 제안이었다. 모스크바의 편지 초안이 협상에서 내놓으라고 적어 둔 바로 그 방안이었다15·16. 저우언라이는 포로들이 상대편의 위협과 억압에 눌려 돌아가기를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도 빼지 않았다. 이튿날 김일성이 그 성명을 지지하고 나섰다. 4월 6일 양쪽 연락장교가 판문점에서 마주 앉았고, 4월 20일 중환자 포로 교환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은 그 작전을 ‘리틀 스위치’라고 불렀다15.

*

1953년 3월 30일, 미 제7사단 사령부.

제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49) 중장이 트루도의 사령부에 왔다. 제32연대 제2대대는 비슷한 지형에서 두 번이나 공격 연습을 마친 참이었다. 테일러는 불모고지가 이 구역 방어에 꼭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공격은 없었다7.

미군 전사는 그 결정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 중공군은 불모고지를 쥐려고 사람을 아끼지 않았고, 유엔군은 이 무렵 값이 분명하지 않은 고지에 목숨을 거는 것을 꺼렸다7. 루이스 노보아의 판단은 조금 달랐다. 휴전 협정에는 서명하는 순간 양쪽 군대가 서 있는 자리가 그대로 경계가 된다는 조항이 들어갈 참이었다. 중공군은 그 전에 38선 북쪽 땅을 한 뼘이라도 더 되찾으려 했고, 유엔군은 빼앗긴 곳을 되찾으려 애쓰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4.

중국군 공식 연표는 28일 싸움이 끝날 때까지 「연합군」 2,000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고 적었다17. 다른 중국 쪽 집계는 1,914명을 없애고 28명을 사로잡았다고 했고, 지원군의 사상자를 1,042명으로 적었고, 그 가운데 450명은 탄약과 사람을 실어 나르다 포격에 맞았다고 했다2. 미군 전사는 이틀 동안 제7사단의 사상자가 300명을 넘었고 중공군 손실은 600명에서 800명으로 추산된다고 적었다7.

콜롬비아 대대의 숫자는 포레로가 적은 것으로 전사 95명, 부상 100명, 포로 30명이었다1. 루이스 노보아는 서른일곱 해 뒤 연설에서 32명의 전사자와 69명의 실종자가 그 고지에 영원히 묻혔다고 말했다4. 포로 가운데 28명은 휴전 뒤 돌아왔다. 베르날 소위는 그 명단에 없었다. 그의 유해도 찾지 못했다1.

27일 오후, 트루도는 루이스 노보아에게 무공 동성훈장을 달아 주었다6. 고지는 그 뒤 다시 콜롬비아 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바로 동쪽 폭찹고지의 싸움은 4월에 다시 시작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서명되었다. 남북으로 각각 2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가 그어졌고, 불모고지는 북쪽 2킬로미터 안에 들어갔다1. 전쟁 동안 한국에 온 콜롬비아 군인은 4,314명이었고, 그 가운데 143명이 돌아가지 못했다18.

보고타의 국방부 마당에는 싸우다 죽은 군인들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포레로는 불모고지에서 아무도 보지 못한 채 끝난 용기가 많았다고 쓰면서 그 비에 새긴 한 줄을 옮겼다. 비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그들을 아신다」라고 새겨져 있다1.

웨스트뷰에서 친구를 업고 내려온 벨라스코는 2017년 한국 정부가 마련한 참전용사 방문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12. 고지 쪽으로는 갈 수 없었다. 그 비탈에는 지금도 베르날 소위와, 그날 밤 내려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사료 출처

1. Alfredo Forero Parra(콜롬비아 대대 B중대 제2소대장), 「Old Baldy — Historias de guerra: aniversario de combate」, Revista Fuerzas Armadas(콜롬비아 군사대학) 2005년 6월호 54~59쪽, esdegrevistas.edu.co/index.php/refa/article/download/1229/1563/3562 — 3월 12일 밤 B중대(중대장 이르네르 페레아 사라스티 대위) 불모고지 인수, 제2소대에 미군 전차 다섯 대(한 대는 진지 위, 네 대는 골짜기), 22일 하루 포탄·박격포탄 1,972발(대대 작전과 기록), 컨 대령의 교대 명령과 루이스 노보아의 반대, 23일 오후 세 시께 대낮 교대, 오래된 이름의 유래와 서울로 가는 접근로, 20시 30분 데일(A중대 페르도모 푸요 소위) 공격과 40분 뒤 불모고지 공격, 화염방사기와 조명탄, 카이세도·베르날·에란·피녜레스·로드리게스·테예스의 행적, 새벽 한 시 무렵 양쪽 포격, 탱크 철수, 새벽 네 시 반 제2소대 여섯 명, 제2소대 전사자 이름과 병사 28명, 적 물통의 위스키, 전사 95·부상 100·포로 30(28명 송환), 비무장지대 안의 불모고지. 2. 中文维基百科, 「老秃山战役」(2024.9.8 판), zh.wikipedia.org/zh-cn/老秃山战役 — 상포방 동산(上浦防东山) 이름과 높이 266미터, 제423연대 정치위원·부연대장의 제1대대 파견, 화포(122밀리 곡사포 15·야포 8·75밀리 야포 3·산포 10)·T-34 3대·자주포 4대, 20시 4분 급습, 제3중대장 리즈룽의 부상, 쑹더칭의 죽음, 22시 34분 점령 주장, 제4·6·8중대가 하루씩 수비, 전차 48대·비행기 172대(연인원) 반격 주장, 지원군 사상 1,042명(450명은 수송 중). 3. José Jaime Rodríguez Rodríguez(당시 C중대 부중대장, 뒤에 준장), 「La mística del soldado colombiano en la guerra de Corea」, Revista Fuerzas Armadas 24~25쪽, esdegrevistas.edu.co/index.php/refa/article/download/1087/1374/3370 — 바르불라 작전(C중대 두 소대, 공격 병력의 68퍼센트 손실), 보충 없이 넓은 정면에 한 줄로 배치되고 미군 중대 하나를 예비로 받은 일, 대대장의 교대 연기 요청, 예비 미군 A중대가 대대장 모르게 폭찹고지 반격에 쓰인 일, 대대장의 본국 보고(전차가 명령 없이 물러남, 24일 07시 50분까지 싸움), 날이 밝은 뒤 웨스트뷰 방어와 부상자 후송, 245명 가운데 222명 손실. 4. Alberto Ruiz Novoa(당시 콜롬비아 대대장), 「불모고지 전투 37주년」 기념 연설(1990), Revista Fuerzas Armadas 107~109쪽, esdegrevistas.edu.co/index.php/refa/article/download/1795/2343/4376 — 바르불라 작전 손실(전사 11·부상 44·실종 10), 23일 오전 11시 B중대 지휘소 둘레에 30분 동안 82밀리 박격포탄 200발, 전사 32명과 실종 69명이 고지에 묻혔다는 말. 5. Wikipedia en español, 「Alberto Ruiz Novoa」, es.wikipedia.org/wiki/Alberto_Ruiz_Novoa — 1917년 1월 3일 부카라망가 출생. 6. Charles H. Briscoe, 「Barbula and Old Baldy」, 『Veritas』 2권 4호(미 육군 특수작전사령부 역사실), arsof-history.org/articles/v2n4_barbula_old_bardy_page_1.html — 루이스 노보아가 세 번째 대대장, 대대 지휘 엄폐호 직격으로 통신 두절, 숨어 있던 콜롬비아 병사들이 폭격 뒤 돌아온 일, 27일 오후 트루도가 루이스 노보아에게 무공 동성훈장을 준 일. 7.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미 육군 군사사연구소, 1966) 17장 「Cold Front」, koreanwaronline.com/history/TruceTent/ch17.htm — 제31연대 배치(제2대대·콜롬비아 대대·제3대대), 마주한 중공군 제141사단·제67사단, 23일 저녁 교대 중 공격, 패티슨 B중대의 21시 30분 웨스트뷰 출발과 02시 첫 엄폐호, 폭찹고지 L중대, 트루도의 지휘와 저스칼리언의 제32연대 제1대대, 스미스·콘·거트너 중대의 공격, 25일 13시 15분 병력 보고, 25~26일 밤 철수, 26일 아침 폭격, 30일 테일러의 결정, 사상자 300명 넘음과 중공군 손실 600~800명 추산. 8. English Wikipedia, 「Battle of Old Baldy」(Valencia Tovar 외 『En Corea por la Libertad y la Gloria』, Martínez Roa 『Sangre en Corea』(1974) 인용), en.wikipedia.org/wiki/Battle_of_Old_Baldy — 고지 좌표, 3월 21일 180고지의 미끼 시신 다섯과 마르티네스 로아·리마스 메디나의 수습, 제2소대 전사자 이름의 다른 표기. 9. 张颖, 「老秃山战役亲历者:为板门店和谈争取筹码」(제141사단 참모 가오펑화 구술), 网易号 老兵回家 2022.6.21, 163.com/dy/article/HADBBVLR051394QD.html — 제1대대가 판 일곱 개의 대기굴과 미리 날라 둔 탄약·식량, 포격이 3~5킬로미터 뒤로 연신된 일. 10. 钟力生·李梦阳, 「川人从未负国 英雄谨当铭记——记抗美援朝血战“老秃山”的神炮手特等功臣李海清」, 方志四川(쓰촨성 지방지판공실), 澎湃新闻 2023.7.27, m.thepaper.cn/newsDetail_forward_24007928 — 리하이칭의 출생(1921년 4월)과 이력, 「가장 어려운 임무」 청원, 하오중윈이 전국 전투영웅이자 주공 대대장이었던 일, 20시 백 문 가까운 포와 4분 급습, 17호 고지 토치카, 탄약수 펑싼위안의 40미터 경고, 흙에 묻힌 일, 로켓탄 11발(특등공 기록). 11. 周德棠(당시 지원군 구호대원) 회고, 「忆军旅」, 上海市退役军人事务局 2020.11.9, tyjr.sh.gov.cn/shtyjrswj/jcdt/20201109/6c5691fc13484931876187968276b5bb.html — 제11분대의 철조망 여섯 줄 폭파, 일곱 번째 철조망에 텅밍궈 등 다섯 사람이 엎드려 만든 다리와 그 외침, 쑹더칭이 폭약 막대를 안고 토치카로 간 일. 12. Andrew Salmon, 「Capturing the Korean War in vibrant color」, Asia Times 2020.6.24, asiatimes.com/2020/06/capturing-the-korean-war-in-vibrant-color/ — 박격포반 길베르토 디아스 벨라스코(당시 19세)의 증언: 탄약이 떨어진 일, 적과 아군 시신을 가리기 어려웠다는 말(원문: it was not easy to know which body was enemy, which body was friendly), 콧수염으로 친구를 알아보고 데려온 일, 2017년 한국 방문. 13. English Wikipedia, 「George Juskalian」, en.wikipedia.org/wiki/George_Juskalian — 1914년 6월 7일 출생, 1953년 3월 24~26일 철원 근처에서 대대를 이끌고 지뢰밭을 지나 공격해 두 번째 은성훈장. 14. 미 국무부,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FRUS) 1952–1954』 vol. XV, part 1, 문서 420 — 클라크가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전문 CX 61670(도쿄, 1953.3.28 오후 일곱 시 삼십오 분),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5p1/d420 — 3월 28일 열네 시 오 분 공산 측 연락장교에게서 받은 김일성·펑더화이의 편지 전문(2월 22일 편지 수령, 초안 제53항의 기존 합의, 제네바 협약 적용에 전적 동의, 제109조, 포로 문제 전체의 순조로운 해결과 정전, 판문점 회담 즉시 재개, 연락장교가 날짜 협의), 클라크의 판단(교환에 곧바로 착수, 회담 재개와 별개로 교환할 뜻으로 읽음, 재개 문제는 따로 보고, 공산 측이 편지를 방송할 것이고 질문이 따를 것). 15.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 7번과 같은 책 18장, koreanwaronline.com/history/TruceTent/ch18.htm — 2월 22일 클라크 편지와 거절 예상, 3월 5일 스탈린의 뇌출혈 사망, 3월 28일 김일성·펑더화이의 답장, 3월 30일 저우언라이 성명(원문: “to repatriate immediately after the cessation of hostilities all those prisoners of war in their custody who insist upon repatriation and to hand over the remaining prisoners of war to a neutral state”)과 포로들이 상대편의 위협과 억압 아래 귀환을 두려워한다는 주장, 이튿날 김일성의 지지, 4월 6일 판문점 연락장교 회의, 4월 20일 리틀 스위치 시작. 16. Kathryn Weathersby 엮음·해설,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6–7호(1995/1996 겨울), 문서 112 「1953년 3월 19일 소련 각료회의 결의(제858-372cc호, 모스크바 크렘린)와 마오쩌둥·김일성에게 보내는 소련 정부 편지 초안」, 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media/documents/publication/CWIHP_Bulletin_6-7.pdf (원 소장처 러시아 대통령 문서보관소·외무부 문서보관소) — 말렌코프 서명, 편지를 저우언라이·쿠즈네초프 편에 마오쩌둥에게, 곧 평양으로 보낼 말리크 편에 김일성에게 전하기로 한 일, 「지금까지의 노선을 기계적으로 이어 가지 않는다」, 김일성·펑더화이가 클라크의 2월 22일 제안에 긍정 답을 보내고 제109조를 들어 회담 재개를 제안하며 날짜는 연락장교가 정한다, 답장 공개 직후 베이징에서 「되도록 저우언라이」가 성명, 송환을 고집하는 포로는 즉시 송환하고 나머지는 중립국에 넘긴다는 협상안. 같은 호 해설: 스탈린 장례로 모스크바에 온 저우언라이가 정전을 서둘러 달라고 「다급하게」 청했다는 1966년 소련 외무부 내부 보고, 새 지도부가 이 결정을 두 주 만에 마련했다는 평가. 17. 「抗美援朝大事记:1953年1月—1953年6月」, 中国军网 원문, 共产党员网 2014.10.23 재게재, news.12371.cn/2014/10/23/ARTI1414067806317276.shtml — 제423연대가 화포 66문·전차 7대의 지원으로 콜롬비아 대대 「2개 중대와 1개 소대」 진지를 공격해 전멸시켰다는 서술, 28일까지 「연합군」 2,000여 명 살상 주장. 18. 국가보훈부, 「Colombia」(유엔 참전국 소개),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00 — 연인원 4,314명 참전, 전사 143명, 1953년 3월 23일 중공군 기습으로 A·B중대가 물러나고 고지를 잃었으며 반격이 실패한 일.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알베르토 루이스 노보아 1917년생(스페인어 위키백과), 조지 저스칼리언 1914년생(영문 위키백과), 리하이칭 1921년생(방지쓰촨 기사), 아서 트루도 1902년생, 맥스웰 테일러 1901년생(영문 위키백과 인물 항목). 마크 클라크 1896년생, 게오르기 말렌코프 1902년생, 바실리 쿠즈네초프 1901년생, 야코프 말리크 1906년생(영문 위키백과 인물 항목), 김일성 1912년생(1화 [나이]와 같은 근거), 펑더화이 1898년생, 저우언라이 1898년생, 마오쩌둥 1893년생, 스탈린 1878년생(앞 화들의 [나이]와 같은 근거). 결의문의 「쿠즈네초프 V.V.」는 영문 위키백과의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쿠즈네초프로 보았다. 길베르토 디아스 벨라스코는 2020년 기사에 86세, 1953년 전투 때 19세로 나와 출생연도가 1933년인지 1934년인지 갈려 괄호 나이를 적지 않고 본문에 「열아홉 살」로만 적었다. 윌리엄 컨, 포레로 파라, 로드리게스 로드리게스, 카이세도, 베르날, 피녜레스, 에란, 하오중윈, 량칭산, 가오펑화(1927년생이나 이 화에는 괄호 없이 나옴), 저우더탕, 텅밍궈, 리즈룽, 쑹더칭, 펑싼위안, 패티슨, 스미스, 콘, 거트너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거나 이 화에서 괄호를 달지 않았다. [자료 충돌] 공격 시각 — 중국 쪽은 23일 20시 포격 개시(위키백과·방지쓰촨), 루이스 노보아 연설은 20시 23분 A중대 공격, 포레로와 로드리게스는 20시 30분 데일 공격과 그 40분 뒤(로드리게스는 「21시께」) 불모고지 공격, 브리스코는 날짜를 22일로 적고 21시 05분 동시 공격이라 했다. 본문은 중국 쪽 20시 포격, 콜롬비아 쪽 20시 30분 데일, 40분 뒤 불모고지로 적었다. 저우더탕의 회고는 공격을 3월 22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콜롬비아 대대 손실 — 포레로 전사 95·부상 100·포로 30, 브리스코 전사 95·부상 97·실종 30(바르불라 포함 열흘 합계 전사 114·부상 141·실종 38), 루이스 노보아 연설 전사 32·실종 69가 고지에 묻힘·부상 백여 명, 로드리게스 245명 가운데 222명 손실·데일 포함 대대 손실 258명, 영문 위키백과 정보란 사망 97·부상 33. 본문은 포레로와 연설과 로드리게스를 각각 그들의 숫자로 적었다. 바르불라 작전 손실도 연설(전사 11·부상 44·실종 10)과 브리스코(전사 19·부상 44·실종 8)가 다르다. [자료 충돌] 중공군 손실과 전과 — 미 육군 전사는 중공군 손실 600~800명 추산, 브리스코는 500명 넘음, 포레로는 전사 500·부상 200 넘음. 중국 쪽은 연표 「2,000여 명」, 위키백과·방지쓰촨 1,914명 섬멸·28명 포로. 지원군 사상자 1,042명은 중국어 위키백과만 적었다. 중국 쪽 화포 수도 「66문·전차 7대」(연표), 「약 백 문」(방지쓰촨), 화포 36문·전차 3·자주포 4(위키백과)로 다르다. 싸움이 끝난 날도 26일(위키백과)과 28일(연표)로 갈린다. [자료 충돌] 철조망 위의 다섯 사람 — 중국어 위키백과는 텅밍궈(腾明国)·리가오뱌오·딩자오구이·우얼화·장푸샹, 저우더탕 회고는 텅밍궈(滕明国)·딩자오구이·리스뱌오·우얼화·장푸샹. 본문은 두 자료에 같이 나오는 네 사람만 이름으로 적었다. 제3중대장 이름도 리즈룽(李志荣, 위키백과)과 리즈탕(李志棠, 저우더탕)으로 다르다. 쑹더칭이 수류탄으로 토치카를 부쉈는지(위키백과) 폭약 막대를 안고 갔는지(저우더탕)도 다르며 본문은 저우더탕을 따랐다. [자료 충돌] 이름 표기 — 미 제31연대 B중대장은 미 육군 전사에 Patteson, 브리스코에 Patterson. 제2소대 전사자는 포레로가 Azael Osorio Salazar·José Narváez Monroy, 영문 위키백과가 Azael Salazar Osorio·Jose Narvaez Moncayo로 적었다. 본문은 소대장이었던 포레로의 표기를 따랐다. B중대장 이름도 포레로 Irner Perea Sarasty, 브리스코 Irmer Perea. [자료 충돌] 루이스 노보아의 동성훈장 — 브리스코는 3월 27일 트루도가 무공 동성훈장을 주었다고, 스페인어 위키백과는 그 훈장이 1953년 1월 24일 순찰대 구출 공으로 3월에 주어졌다고 적었다. 그가 몇 번째 대대장인지도 스페인어 위키백과(1951년 6월 폴라니아 푸요 후임)와 브리스코(세 번째)가 달라 본문은 브리스코를 따랐다. [자료 충돌] 미 제32연대 제1대대의 병력 보고 — 미 육군 전사는 25일 13시 15분 세 중대 합쳐 장교 넷·병사 쉰넷, 중국어 위키백과는 같은 날 12시 15분 「장교 4명, 병사 54명」 보고로 적었다. 숫자는 같고 시각만 다르다. 본문은 미 육군 전사를 따랐다. [재구성] 루이스 노보아와 컨의 전화 대화 자구(교대 명령과 연기 요청, 1,972발·C중대 손실이라는 근거는 기록), 전령과의 문답, 지도에 선을 긋는 몸짓, 「늙은 대머리」와 「마지막 머리카락」 농담, 베르날과 포레로의 대화와 눈짓, 리하이칭의 청원 뒤 두 줄의 문답(청원 자체는 기록), 연대장 량칭산이 무전을 붙든 모습, 가오펑화의 말을 대사로 옮긴 자구(원문: 打,是为了和), 「밟고 넘어가! 머뭇거리지 마!」(저우더탕이 적은 외침을 줄인 것), 펑싼위안의 외침 자구(40미터 경고는 기록), 데 라 가르사가 무전으로 포격을 부르던 모습, 「B중대! B중대, 들리나!」, 벨라스코가 손으로 얼굴을 더듬은 몸짓과 비탈의 묘사(콧수염으로 알아본 일은 기록), 위스키 이야기 뒤 병사들의 대화, 저스칼리언의 보고를 대사로 옮긴 자구(숫자와 연막·의료 지원 요청은 기록), 마지막 두 문장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과 콜롬비아 병사 개개인의 그날 생각은 기록에 없다. 폭찹고지의 같은 밤 싸움과 4월·7월 싸움은 52화에서 다룬다. [재구성] 3월 28일 도쿄 장면에서 클라크 앞에 전문이 놓이는 모습과 참모의 「답장 세 가지」 대사는 소설적 재구성이다. 공산 측 연락장교가 편지를 건넨 자리는 전문에 적혀 있지 않아 쓰지 않았다. 김일성·펑더화이의 편지, 클라크의 전문, 소련 각료회의의 편지 초안, 저우언라이의 성명은 모두 문서의 뜻을 풀어 간접 인용으로 옮겼다. 클라크가 모스크바의 결의를 몰랐다는 대목은 결의가 비밀 문서였다는 데서 쓴 것이다.

5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