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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15,026자)

폭찹고지(Pork Chop Hill) 전투(1952) — 철원의 작은 호랑이들

1950 · 네오

폭찹고지 전투, 1952년 10월 22일~11월 11일 — 철원 서쪽, 연천 북쪽의 폭찹고지(미군 번호 255고지, 중국 이름 스셴둥 북산)와 서남쪽 불모고지(266고지), 북동쪽 티본고지, 동쪽의 백마고지·철원, 남쪽의 연천. 미 제2사단 제9연대에 배속된 태국 제21혼성연대 제1대대의 진지, 11월 1일 밤 중공군 두 중대의 두 갈래 공격, 11월 10일 밤 일곱 시 오른쪽 대대를 향한 기만 포격과 왼쪽 대대 공격, 같은 밤 한 대대의 폭찹고지 공격과 「강철 고리」 포격, 11일 새벽 한 시 반 중공군 철수. 개략도, 거리 비례

1952년 10월 22일 수요일 오후, 철원(현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서쪽 전선 — 연천(현 경기도 연천군)에서 철원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북쪽, 태국 대대 지휘소.

미 제9보병연대에서 온 명령서는 짧았다. 끄리앙삭 차마난(33) 소령은 그것을 두 번 읽고 참모들 앞에 펴 놓았다.

“태국 대대는 폭찹 진지를 반드시 지킨다. 적에게 공격당해 빼앗기면 즉시 역습하여 되찾는다1.”

이달 초순, 동쪽으로 십삼 킬로미터쯤 떨어진 395고지(백마고지, 현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에서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이 열흘 동안 주인을 바꿔 가며 싸웠다. 그 싸움이 끝난 지 일주일 만에 태국 대대가 철원 서쪽의 주저항선으로 들어갔다2. 태국에서 온 보병 대대는 정식 이름이 제21혼성연대 제1대대였다. 1950년 11월 부산에 처음 내린 뒤 두 번 사람이 바뀌었고, 지금의 대대는 세 번째로 건너온 병력이었다1.

석 달 전 칠월, 이 대대는 철원 들판 가장자리의 마을로 옮겨, 미군이 티본이라 부른 능선 앞 진지를 넘겨받았다. 교대하는 사이 포탄이 쏟아져 다섯이 전사했다. 팔월 십일, 대대장 엉 포티까닛 중령이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고, 부대는 끄리앙삭에게 넘어왔다1.

지휘소 창 대신 뚫어 놓은 틈으로 티본고지의 능선이 보였다. 태국 병사들은 그 능선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1950년 7월, 유엔이 태국에 지상군을 청했을 때 태국은 사천 명 규모의 여단을 내겠다고 했다가 한 대대로 줄였다2. 그달 말 방콕의 국방부는 한국으로 갈 지원병을 모았다1. 첫 대대는 한국에서 훈련을 받고 무기를 받은 지 세 주 만에 미 제187공수연대에 붙어 평양까지 올라갔고, 첫겨울을 이를 악물고 났다. 그 겨울 그들이 지나간 마을 사람들은 태국 병사를 보면 한목소리로 외쳤다1.

“타일랜드 넘버원!”

이듬해 11월 13일, 두 번째로 건너온 대대가 바로 저 티본고지 앞에 청음초 소대 하나를 내보냈다. 밤 열 시에 포탄이 쏟아졌고, 한 시간쯤 뒤 잠잠해졌다. 동이 틀 무렵 중공군이 소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소대장 다롱 유포 중위는 끝까지 싸우라고 명령했고, 그와 소대원 절반쯤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1. 끄리앙삭이 받은 고지는 그 능선 서남쪽에 있었다.

참모 하나가 지도 위의 작은 등고선 뭉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미군이 붙인 이름은 폭찹, 돼지갈비였다. 지도 위 등고선이 뼈 붙은 갈비 한 대처럼 생겼다고 그렇게 불렀다3. 남북으로 뻗은 주저항선 앞에 혼자 튀어나온 전초였다. 높이는 미군 지도에 이백오십오 미터였다4.

“전초 하나에 대대 전체를 걸라는 겁니까?”

“전초가 아니라 문이다. 저기를 내주면 적은 우리 주저항선을 위에서 내려다보게 된다1.”

끄리앙삭은 진지 쪽으로 보낼 명령을 직접 불러 주었다.

“철수는 대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만 한다1.”

다른 전초의 지휘관들은 형편을 보아 물러날 수 있었다. 폭찹에는 그 재량이 없었다. 포로가 되지 말라는 말도 함께 내려갔다4.

제1중대장 쭈안 완나랏 대위가 소총 한 소대를 데리고 고지에 올랐다. 미군 포병의 관측조 하나와 중화기가 따라붙었다. 고지 동쪽으로 백 미터쯤 떨어진 작은 봉우리에는 두 분대를 경계병으로 세웠다. 고지 둘레에는 철조망을 서너 겹 둘렀다1.

끄리앙삭은 미군 포병과 대대의 중박격포에 부탁해 고지를 둥글게 감싸는 사격 구역을 미리 재 두게 했다. 공격이 오면 진지 둘레 전체에 한꺼번에 포탄을 떨어뜨려 고지를 쇠붙이로 두르는 계획이었다. 대대는 그것을 「강철 고리」라고 불렀다1.

“고리를 부르면 우리 머리 위에도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쭈안이 물었다. 끄리앙삭은 지도 위 고지 둘레에 연필로 원을 그었다.

“그래서 엄체호 지붕을 두껍게 하라는 거다. 적은 밖에 서 있고, 우리는 땅속에 있다. 같은 포탄이라도 맞는 사람이 다르다.”

“땅속에서 듣기에는 소리가 똑같을 텐데요.”

“소리는 참아라. 고지는 못 돌려받는다.”

예비로는 대대 안에서 지원자만 뽑아 만든 특수수색소대를 두었다. 소대장은 찰름 시리분 중위였고, 소대원은 모두 자동화기를 들었다1.

*

같은 무렵, 티본고지 아래 둘째 줄 진지.

중기관총 사수 놈 수파폰(21)은 칠 학년을 마치고 군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세 번째로 건너온 태국 병력에 섞여 그해 한국에 왔다5. 진지는 티본고지 아래 둘째 줄에 있었다. 당번을 서는 날이면 깡통에 든 미군 전투식량과 담배가 하루치씩 나왔다. 잠은 밖에서 잤다5.

방콕에서 시월은 비가 그치는 달이었다. 철원의 시월 밤은 철모 위로 서리가 내렸다. 분대원 하나가 깡통 뚜껑을 따다가 고지 이름을 들먹였다.

“폭찹이 돼지갈비래. 이름을 들으니 배가 더 고프네.”

“고프면 콩이나 먹어. 갈비는 중공군이 먼저 뜯으러 온다더라.”

“그럼 우리는 뼈다귀 지키는 개냐?”

“개가 아니라 호랑이지. 호랑이는 콩 통조림도 먹는다.”

놈은 웃지 않았다. 며칠 전 같은 진지의 병사 하나가 식량을 받으러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5. 밤이면 싸움이 거셌고, 아침이면 쓰러진 동료를 거두러 나갔다. 그는 무섭지 않았다고 나중에 말했다. 싸움은 적하고만 하는 일이었고, 그것만 생각했다고 했다5. 고향 생각은 지칠 때마다 났다.

전선에서 잠깐 물러나 쉬는 날이면 한국 사람들이 먹을 것을 들고 천막 근처로 왔다5. 삶은 감자와 떡이 담긴 광주리였다. 말은 통하지 않았다. 놈은 손가락으로 값을 물었고, 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값을 불렀다. 둘 다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폈다 하다가 웃었다. 어떤 날은 그 사람들이 병사들을 데리고 근처 마을 구경을 시켜 주었다5. 부서진 기와집 마당에 감나무가 서 있었다. 방콕에는 없는 나무였다.

*

같은 해 가을, 고지 북쪽 — 중국인민지원군 쪽에서 스셴둥 북산(石岘洞北山)이라 부른 산.

중국 쪽 기록에 그 산은 높이 삼백 미터, 넓이 일 제곱킬로미터가 안 되는 작은 산이었다6. 북쪽 고을 삭령(현 북한 지역)에서 북동쪽으로 십 킬로미터, 남쪽과 북쪽 어디에나 그보다 높은 봉우리가 있었다. 지원군 기록은 그런 땅을 치기는 쉽고 지키기는 어려운 곳이라고 적었다7.

그 산을 두고 지원군은 1952년 유월부터 공격을 거듭했다. 제39군 제117사단 제349연대가 열이틀 동안 세 번 쳤다. 첫 번째 밤 기습은 오십팔 분 만에 미군 한 중대를 쓸어 냈다고 중국 쪽 기록은 적었다. 치고 나서는 스스로 물러났다6. 두 번째는 미군이 다시 올라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 옆으로 파고들어 두 시간을 싸웠다. 세 번째는 미군이 야전 진지를 다 쌓은 뒤였다. 정면에서는 치는 시늉만 하고 옆구리로 진짜 주력을 넣어 한 시간 만에 또 한 중대를 쓸었다. 세 번을 합쳐 미군 삼백육십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고 중국 쪽은 적었다6. 제39군이 빠지고 그 자리에 들어온 제38군 제113사단의 제337연대가 9월 18일 한 중대로 다시 쳤다. 중국 쪽은 그 싸움에서 미군 이백구십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사로잡고, 자기 쪽 손실은 일흔한 명이었다고 적었다6. 그때도 산을 차지하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빼앗고 때리고 내려오는 것이 그 산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왜 차지하고 앉지 않습니까? 피를 흘려 빼앗은 산인데.”

“앉아 있으면 저쪽 비행기와 대포가 우리를 녹인다. 저쪽이 올라와 앉게 두고, 때때로 올라가 사람을 잡고, 다시 빼앗으러 오는 놈들을 우리 포로 친다.”

지원군은 그것을 피를 뽑는 싸움, ‘방혈 전술’이라고 불렀다. 산이 목적이 아니라 산 위의 사람이 목적이었다6. 그 산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진 능선은 지원군 지도에 ‘정(丁)자 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군이 티본이라 부른 능선이었다6.

구월에 그 산 위에서 마주쳤던 미군 자리에, 시월 말에는 다른 나라 군대가 들어와 있었다. 한국 국가보훈부 자료는 그 무렵 태국 대대를 마주한 것이 중공군 제113사단의 두 연대였다고 적었다8. 지원군은 고지 앞에 두 대대를 세우고, 높은 땅에 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두 번, 작은 부대로 찔러 보고 물러났다1.

“태국 군대라고?”

“미군 옷을 입었는데 키가 작고, 말소리가 다르답니다.”

“작으면 철조망 밑으로 기기도 잘하겠군.”

*

1952년 10월 27일 월요일 밤, 폭찹고지 앞 골짜기.

태국 대대의 수색대가 먼저 움직였다. 국가보훈부 영문 자료에 ‘복개’라는 이름으로 적힌 근처 고지에서 수색대는 중공군과 맞붙어 스물을 죽이고 셋을 사로잡았다2. 사로잡힌 세 사람은 솜을 누빈 누런 군복을 입고 있었다. 한 사람은 고무 운동화 한 짝을 잃어 맨발이었다. 태국 병사 하나가 자기 양말 한 켤레를 벗어 그에게 던졌다. 포로는 양말을 쥐고 한참 쳐다보다가 신었다.

“왜 줬어? 적인데.”

“발 시린 건 적이나 우리나 똑같잖아. 철원 추위는 국적을 안 가려.”

국가보훈부 자료는 중공군이 그 패배에 대한 대답으로 11월 1일 밤 폭찹을 쳤다고 적었다2.

*

1952년 11월 1일 토요일 밤, 폭찹고지.

고지의 소대는 그 전에 두 번, 철조망 앞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작은 무리를 보았다. 중공군이 고지의 기관총 자리와 철조망의 틈을 재러 온 탐색 공격이었다1. 미군 포병 관측병은 그때마다 무전기에 좌표를 불렀고, 돌아가는 무리 위로 포탄이 몇 발 떨어졌다. 엄체호 안의 태국 병사들은 그 사이 모래주머니를 한 줄씩 더 쌓았다.

포탄은 저녁부터 떨어졌다. 백오십오 밀리 포탄과 온갖 박격포탄이 네 시간 넘게 그치지 않았다1. 포탄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엄체호 천장에서 흙이 쏟아져 철모를 때렸다. 무전병은 송화기를 품에 안고 엎드려 있었다. 선이 끊어지면 고지는 혼자가 되었다. 엄체호의 통나무 지붕이 내려앉았고, 교통호는 흙에 묻혔다. 쭈안 대위는 포격이 잠깐 멎을 때마다 엄체호를 돌며 다친 사람을 끌어내고 무너진 사격 구멍을 다시 팠다.

“흙 퍼내! 기관총 자리부터!”

“중대장님, 일 소대 셋째 호가 없어졌습니다.”

“없어진 데는 놔두고 옆 호로 붙어!”

진지를 다 추스르기 전에 포격이 산 너머로 옮겨 갔다. 중공군 두 중대쯤이 두 갈래로 고지를 기어올랐다1. 철조망 앞에서 수류탄이 터졌고, 몇 사람이 교통호 안으로 뛰어들었다. 태국 병사들은 총검을 꽂았다. 어둠 속 교통호에서는 소총보다 총검과 개머리판이 먼저 움직였다.

쭈안이 다쳤다. 대대 지휘소에서 끄리앙삭이 송화기를 들었다.

“찰름, 소대 데리고 올라가.”

특수수색소대가 고지 뒷비탈로 뛰어올랐다. 자동화기 소리가 한꺼번에 겹치자 교통호 안의 중공군이 밀려 나갔다1. 날이 밝을 무렵 고지 둘레에는 중공군 시신 쉰 구가 남아 있었다. 태국 대대는 여덟이 전사하고 열넷이 다쳤다. 엄체호 열한 곳이 포탄에 부서졌다1. 국가보훈부 자료는 그 밤을 두고 태국 대대가 그때까지 치른 가장 절박한 싸움이었다고 적었다2.

*

11월 초순, 폭찹고지 엄체호.

중공군은 며칠 뒤 다시 왔다. 태국 쪽 기록에 그 공격은 두 번째로 적혀 있다1. 이번에는 대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지의 관측병이 무전으로 부르자 미군 포병과 대대의 중박격포가 미리 재어 둔 자리에 한꺼번에 포탄을 쏟았다. 강철 고리였다. 고지를 기어오르던 중공군은 철조망까지 오지 못하고 물러났다1.

엄체호 안에서 병사들은 귀를 막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었다. 천장의 통나무가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한 번씩 들썩였다. 쭈안 대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는 첫 싸움에서 다쳐 후송되었고, 고지에는 남은 장교와 하사관들이 그의 몫까지 진지를 돌았다1. 포격이 그치고 관측병이 고개를 내밀었다. 철조망 바깥 비탈에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고, 더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놈은 둘째 줄 진지에서 그 불빛을 보았다. 폭찹의 능선이 한동안 대낮처럼 밝았다가 꺼졌다.

*

1952년 11월 10일 월요일 밤 일곱 시, 태국 대대 지휘소.

중공군은 나흘 동안 준비했다1. 그날 저녁 일곱 시쯤, 포탄이 오른쪽 대대 진지로 쏟아졌다. 동시에 중공군 한 대대가 왼쪽 대대를 쳤다. 그 소리를 듣는 동안 다른 한 대대가 곧장 폭찹으로 올라왔다1. 끄리앙삭은 지도 위에서 세 군데의 보고를 맞추어 보았다.

“오른쪽은 소리만 크다. 진짜는 폭찹이다.”

밤 열한 시, 중공군의 포탄이 고지 앞 가까운 데부터 지휘소 쪽 먼 데까지 모든 거리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지 앞 청음초가 맨 먼저 맞았고, 중공군은 철조망을 뚫고 사방에서 들어왔다1. 태국 쪽 기록은 그 밤 고지에 떨어진 포탄을 이천육백구십 발로 적었다4.

“강철 고리, 지금!”

미군 포병이 고지 둘레에 포탄을 떨어뜨렸고, 중공군이 올라오는 길마다 폭탄이 터졌다1. 그래도 다 막지는 못했다. 포탄 사이로 빠져나온 중공군이 꼭대기 진지에 닿았다. 수류탄이 오갔고, 교통호 안에서 총검이 맞부딪쳤다1. 어둠 속에서는 들고 있는 총과 입은 옷으로만 아군과 적을 가렸다4. 태국 병사들은 미군 철모를 썼고, 미군 소총을 들었다. 서로의 이름을 태국말로 불렀다. 대답이 태국말로 오면 같은 편이었다.

끄리앙삭은 특수수색소대를 다시 올려 보냈다1. 찰름 중위의 소대원들은 자동화기를 가슴에 안고 뒷비탈 교통호를 따라 뛰었다. 앞사람의 등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고, 조명탄이 뜰 때만 흙더미와 철조망과 엎어진 사람들이 하얗게 드러났다. 소대가 꼭대기 교통호에 들어서자 자동화기 여러 정이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오른쪽 호! 수류탄!”

“우리 편이야, 쏘지 마! 이 분대 통신병이다!”

“이 분대 통신병은 지난주에 후송됐잖아!”

“그러니까 새로 온 통신병이라고!”

교통호 안에서 누군가 짧게 웃었고, 곧 수류탄이 터졌다. 어둠 속 이름 부르기는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둘째 줄 진지의 놈은 중기관총 손잡이를 쥐고 폭찹 쪽 비탈을 내려다보았다. 고지와 둘째 줄 사이 골짜기로 중공군이 돌아 들어올 수 있었다. 조명탄 아래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이면 짧게 끊어 쏘았다. 총열이 달아올라 김이 피어올랐다.

고지의 소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대대장의 철수 명령은 끝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고지에서 그것을 청하는 무전도 올라오지 않았다.

새벽 한 시 반, 중공군이 물러나기 시작했다1. 유엔군 포병은 그들이 돌아가는 길마다 포탄을 퍼부었다1.

포성이 멎자 고지 위에서 무전이 내려왔다. 지휘소의 무전병이 받아 적은 말은 몇 마디뿐이었다.

“고지는 우리 손에 있습니다. 부상자를 내려 보낼 들것이 모자랍니다.”

끄리앙삭은 들것을 메고 올라갈 사람을 지휘소에서 뽑았다. 취사병과 통신병까지 그 줄에 섰다. 날이 밝기 전에 들것이 몇 번이고 비탈을 오르내렸다.

*

1952년 11월 11일 화요일 아침, 폭찹고지 꼭대기.

헬리콥터 한 대가 무너진 엄체호 위로 내려앉았다4. 미 제1군단장 폴 켄들(52) 중장과 미 제2사단장 제임스 프라이(53) 소장이 내렸다. 두 사람은 대대를 축하하러 왔다1. 그들은 무너진 교통호를 따라 걸으며 엄체호를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철조망에는 아직 중공군의 솜옷 조각이 걸려 있었고, 교통호 바닥에는 빈 탄피가 발목까지 쌓였다. 고지 둘레에는 중공군 시신 이백네 구가 흩어져 있었다. 태국 대대는 그 밤 열여섯이 전사하고 쉰일곱이 다쳤다1.

프라이는 장교들이 둘러선 자리에서 끄리앙삭에게 말했다1.

“나는 이제 태국 병사들의 싸우는 정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 말이 통역되는 동안 놈의 분대는 고지 아래로 내려가 시신을 거두고 있었다. 담요에 싸인 동료들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깡통을 따며 갈비 이야기를 하던 분대원 하나는 그날 아침 말이 없었다. 그는 담요 한쪽 끝을 들고 비탈을 내려가다 한 번 미끄러졌고, 손을 놓지 않았다.

열흘 남짓한 싸움에 미 제8군은 태국 대대 장병들에게 공로훈장 하나, 은성무공훈장 열둘, 동성무공훈장 스물여섯을 주었다1.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58) 대장은 그 대대를 「작은 호랑이」라고 불렀다9. 태국 쪽은 그 이름을 「파약 노이」라고 옮겼다. 몸은 작아도 이빨과 발톱이 다 있는 짐승이었다1. 태국 대사는 훗날 일곱 배가 넘는 적을 세 번 물리쳤다고 말했다9. 태국 신문은 마지막 공격이 총검으로 끝났다고 적었다10. 공로훈장은 이듬해 3월 15일 끄리앙삭의 가슴에 달렸다11. 그는 스물다섯 해 뒤 태국의 총리가 되었다11.

*

1952년 12월 말, 폭찹고지.

그해 십일월, 고지 북쪽에서는 중공군 제23군이 들어와 제38군과 교대했다6. 남쪽에서도 주인이 바뀌었다. 12월 29일부터 그 고지는 미 제7사단의 구역이 되었다3. 고지를 넘겨받으러 올라온 미 제31보병연대 병사들은 태국 병사들이 남기고 간 쪽지를 찾았다12.

“우리 폭찹을 잘 돌봐 주시오.”

쪽지를 읽은 미군 병사는 엄체호 안을 둘러보았다. 기둥에는 십일월 밤 수류탄 파편이 박힌 자국이 그대로 있었고, 모래주머니는 한 줄씩 더 높게 쌓여 있었다. 열흘 남짓한 싸움에서 스무 명 넘는 태국 병사가 이 고지에서 전사했다1.

놈 수파폰은 열 달 남짓 한국에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5. 식량을 받으러 내려갔다 돌아오지 않은 동료의 이름은 면담 기록에 남지 않았다. 폭찹고지는 이듬해 봄 다시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사료 출처

1. 「วีรกรรมกองพันพยัคฆ์น้อยในสมรภูมิเกาหลี」(작은 호랑이 대대의 한국 전장 무공), 태국 제21보병연대(왕비 근위) 누리집 문서 21inf.org/data/phayuknioy.pdf를 kasetloongkim.com이 2010.9.20 옮겨 실은 것, kasetloongkim.com/modules.php?name=Content&pa=showpage&pid=2990 (원 PDF는 열리지 않아 옮겨 실은 글로 확인) — 1950년 7월 30일 지원병 모집, 제1진이 훈련·무기 수령 3주 만에 미 제187공수연대에 배속되어 평양까지 감, 혹한, 주민들의 「THAILAND NUMBER ONE」, 1951년 11월 13일 티본고지 앞 청음초 소대(22시 포격 약 한 시간, 새벽 백병전, 다롱 유포 중위와 소대원 절반쯤 전사), 제3진 대대의 1952년 7월 티본고지 앞 교대와 다섯 명 전사, 8월 10일 엉 포티까닛 중령의 미국 유학과 끄리앙삭 소령의 대대장 승계, 미 제9보병연대 명령과 끄리앙삭의 「대대장 명령으로만 철수」 지시(태국어 원문을 우리말로 옮김), 쭈안 완나랏 대위의 제1중대 소총 소대·포병 관측조·동쪽 100미터 봉우리의 두 분대·철조망 3~4겹, 「강철 고리(วงแหวนเหล็ก)」 사격 계획, 찰름 시리분 중위의 지원자 특수수색소대, 중공군 두 대대와 두 차례 탐색 공격, 11월 1일 밤 155밀리 포와 박격포의 네 시간 넘는 포격·두 중대 두 갈래 공격·총검전·쭈안 부상·찰름 소대 투입, 전사 8·부상 14·엄체호 11곳 파괴·적 시신 50, 두 번째 공격과 강철 고리, 나흘 준비, 11월 10일 19시 오른쪽 대대 기만 포격·왼쪽 대대 공격·폭찹 한 대대, 23시 포격과 청음초 공격·철조망 돌파, 수류탄과 총검전, 특수수색소대 재투입, 01시 30분 철수, 전사 16·부상 57·적 시신 204, 11일 아침 켄들 중장·프라이 소장 방문과 프라이의 말(원문: ข้าพเจ้าไม่มีอะไรสงสัยในจิตใจแห่งการต่อสู้ของทหารไทยอีกแล้ว), 공로훈장 1·은성 12·동성 26, 「พยัคฆ์น้อย」의 풀이(몸집은 작아도 이빨과 발톱이 다 있는 전사). 2. 국가보훈부 영문 누리집, 「Background of Participation and Activity of each Forces — Thailand」,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25 (유엔16개국 자료 U12) — 7월 14일 유엔의 지상군 요청과 약 4,000명 여단 제안을 한 대대로 줄임, 10월 27일 「Bokgae」 고지에서 적 20 사살·3 포로, 11월 1일 공격이 그 패배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서술, 1950년 11월 7일 부산 도착, 1951년 12월 15일 미 제2사단 제9연대 배속, 1952년 10월 22일 철원 서쪽 주저항선 배치, 11월 1일 공격을 「the most desperate battle fought by the Thai Battalion ever」로 적음, 적 사살 약 50·태국군 전사 8·부상 14. 3.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Pork Chop Hill」(2026년 10월 열람) — 이름이 등고선 모양에서 왔다는 설명(BattlefieldReview.com 인용), 좌표 38°14′29″N 127°1′10″E, 1952년 11월 태국 제21연대 제1대대의 방어, 12월 29일부터 미 제7사단 구역. 4. 「วีรกรรมกองพันทหารไทย ณ สมรภูมิ พ็อคช็อป ฮิลล์ ในสงครามเกาหลี」, variety.teenee.com/world/33442.html — 태국 국군최고사령부 군사교육국(กรมยุทธศึกษาทหาร) 『ประวัติการรบของทหารไทยในสงครามเกาหลี』(1998)를 바탕으로 한 글. 포로가 되지 말라는 명령, 11월 10일 밤 약 2,690발의 포격, 무기와 옷으로만 아군과 적을 가린 혼전, 11일 아침 켄들·프라이가 헬리콥터로 고지에 내림. 원서는 보지 못했다. 5. Korean War Legacy Foundation, 「Nom Supaphol」 면담 기록, koreanwarlegacy.org/interviews/nom-supaphol/ (2026년 10월 열람) — 1929년 1월 19일생, 7학년 마치고 입대, 제3진으로 1952년 한국 도착·약 열 달 복무, 중기관총 사수, 티본 부근 둘째 줄 진지, 식량을 받으러 갔다 전사한 동료, 밤의 격전과 아침의 시신 수습, 「적과만 싸운다고 생각해 두렵지 않았다」, 통조림과 담배의 하루 지급, 바깥 잠, 지칠 때의 향수, 휴식 때 한국 사람들이 음식을 팔고 마을 구경을 시켜 줌. 6. 「全景式回顾抗美援朝战争(189)石砚洞北山争夺战斗」, 观察者网 风闻 user.guancha.cn/main/content?id=245360 (2026년 10월 열람) — 스셴둥 북산(석현동 북산, 미군 이름 Pork Chop) 높이 300미터, 지원군 세 군의 여덟 차례 공격과 「앞의 일곱 번은 빼앗은 뒤 곧 물러남」, 1952년 6월 제39군 제117사단 제349연대의 열이틀 사이 세 차례 공격(58분 기습, 자리 잡지 못한 적을 두 시간 포위 공격, 정면 양공·측면 주공 한 시간)과 합계 360여 명, 빼앗고 물러나 적의 역습을 포병으로 치는 「放血战术」, 미군의 티본을 「丁字山」으로 부름, 9월 18일 제38군 제113사단 제337연대 한 중대의 공격과 「毙伤俘敌290人,我方伤亡仅71人」, 1952년 11월 제23군이 제38군과 교대. 7. 章世森, 「石岘洞北山反击战:“零敲牛皮糖”的光辉战例」, 中国军网-解放军报 2024.2.22, 81.cn/js_208592/jdt_208593/16288197.html — 산의 넓이 1제곱킬로미터 미만, 삭령 북동쪽 10킬로미터, 「易攻难守」. 기사 본문은 1953년 7월 싸움을 다루므로 이 화에서는 지형 서술만 썼다. 8. 국가보훈부 영문 누리집, 「Key Battles」,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96 — 태국 대대가 미 제2사단 배속으로 중공군 제113사단 예하 두 연대와 싸움, 11월 1일 야간 공격, 백병전과 역습, 「little tiger」. 9. Esther Chung, 「[Heroes from afar] Thailand's 'Little Tigers' fought bravely in Korea」, Korea JoongAng Daily 2020.9.13, koreajoongangdaily.com/korea/heroes-from-afar-thailands-little-tigers-fought-bravely-in-korea/12388738 — 10월 31일~11월 11일, 밴 플리트가 「Little Tigers」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로훈장 1·은성 12·동성 26을 줌, 롬마니 까나누락 대사의 「seven to one」 발언, 태국군 기록의 중공군·북한군 사망 322·부상 1,000여와 태국군 전사 23·부상 76. 10. 「ซูม」, 「ตำนานสงครามเกาหลี+ตำนาน “ทหารเสือราชินี”」, 타이랏 2018.5.1, thairath.co.th/news/politic/1268906 — 세 차례 공격을 막아 냄, 마지막 공격의 총검전, 적 시신 약 204·태국군 전사 16·부상 57, 무공훈장 29명, 프라이의 말. 11. 영문 위키백과, 「Kriangsak Chamanan」(2026년 10월 열람) — 1917년 12월 17일생, 1953년 3월 15일 미국 공로훈장, 폭찹고지 방어, 뒷날 태국 제25대 총리(1977~1980). 12. James I. Marino, 「Korean War Battle on Pork Chop Hill」, Military History 2003년 4월호, historynet.com/korean-war-battle-on-pork-chop-hill/ — 1952년 가을 미 제2사단 제9연대가 폭찹·불모고지를 맡음, 10월 태국 대대가 폭찹을 차지하고 11월 중공군 제39군 일부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적음, 미 제7사단 제31연대가 찾은 태국 병사들의 쪽지(원문: Take good care of our Pork Chop).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끄리앙삭 차마난 1917년생(11번, 태국어 위키백과 「เกรียงศักดิ์ ชมะนันทน์」도 같음), 놈 수파폰 1929년생(5번), 폴 켄들 1898년생(영문 위키백과 「Paul W. Kendall」), 제임스 프라이 1897년생(영문 위키백과 「James C. Fry」), 밴 플리트 1892년생(42화 [나이]와 같은 근거). 엉 포티까닛, 쭈안 완나랏, 찰름 시리분, 다롱 유포는 출생연도를 찾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태국 사람 이름의 우리말 표기는 태국어 발음을 따랐다. [자료 충돌] 두 번째 공격의 날짜 — 태국 연대 문서(1번)는 「11월 14일」로 적었으나 세 번째 공격이 11월 10일이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가보훈부(8번)는 공격 날짜를 「11월 1일, 11월 7일, 1월 10일」로 적었다. 본문은 날짜를 박지 않고 「11월 초순」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손실 — 11월 10~11일 밤만 보면 태국 연대 문서와 타이랏은 전사 16·부상 57·적 시신 204, 군사교육국 책을 옮긴 글(4번)은 열흘 동안 전사 25, 적 시신 160여·추정 사망 약 264·포로 5, 태국어 위키백과는 전사 25·부상 76, 코리아중앙데일리(9번)는 태국군 기록으로 전사 23·부상 76·적 사망 322로 적었다. 국가보훈부는 11월 1일 밤만 적 50·태국군 전사 8·부상 14로 적었다. 본문은 태국 연대 문서의 밤별 숫자를 따랐다. [자료 충돌] 훈장 — 태국 연대 문서·코리아중앙데일리·영문 위키백과는 공로훈장 1·은성 12·동성 26(합 39), 4번 글은 은성 9·동성 19, 타이랏은 무공훈장 29명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이름을 붙인 사람 — 태국 쪽 글과 코리아중앙데일리는 밴 플리트 대장, 국가보훈부(2번)는 「미 제8군단(US 8th Corps)」으로 적었다. 본문은 밴 플리트로 적었다. [자료 충돌] 대대장 — 코리아중앙데일리는 보리분 출라짜릿 대령을 「제21연대 제1대대장」으로 적었으나, 태국 연대 문서는 그를 1950년 8월 제21혼성연대장으로 임명된 사람으로, 1952년 폭찹고지의 대대장을 끄리앙삭 소령으로 적었다. 영문 위키백과 「Kriangsak Chamanan」은 그를 「제3대대장」이라 적고 계급도 소령과 중위로 엇갈린다. 본문은 태국 연대 문서를 따랐다. 4번 글과 타이랏은 계급을 중령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상대한 중공군 — 국가보훈부는 제113사단 두 연대, 미 군사잡지(12번)는 제39군 일부로 적었다. 중국 쪽 글(6번)은 1952년 6월은 제39군, 9월부터는 제38군, 11월 교대 뒤는 제23군으로 적었다. 중국 쪽이 셈한 여덟 차례 공격에는 1952년 11월의 공격이 들어 있지 않고, 이 화의 세 차례 공격을 다룬 중국 쪽 기록은 찾지 못했다. 본문은 국가보훈부를 따르되 그 출처를 밝혀 적었다. [자료 충돌] 11월 10일 밤 왼쪽 공격 — 태국 연대 문서의 원문(กองพันฝ่ายเรา ทางด้านซ้าย)은 「우리 쪽 왼편의 대대」로도, 「태국 대대의 왼쪽」으로도 읽힌다. 본문은 「왼쪽 대대」로 적었다. [자료 충돌] 고지의 높이와 이름 — 미군 번호는 255고지, 중국 쪽은 300미터, 국가보훈부(8번)는 「234고지, 연천 북서쪽 20킬로미터」로 적었다. 지금 그 고지가 어느 쪽 땅인지도 중국어 위키백과는 연천군, 중국 쪽 글(6번)은 「지금은 북한 땅」으로 적었다. 본문에는 현재 지명 괄호를 달지 않았다. [재구성] 참모와 끄리앙삭의 「전초 하나에 대대 전체를」 대화(폭찹이 주저항선을 지키는 요지라는 판단은 1번 문서), 쭈안과 끄리앙삭의 「강철 고리」 대화, 지휘소에서 티본 능선이 보였다는 대목, 놈 수파폰의 분대가 나눈 갈비·호랑이 대화와 방콕의 시월 대목, 감자·떡 광주리와 손가락 흥정, 감나무(한국 사람들이 음식을 팔고 마을 구경을 시켜 준 일은 5번 기록), 지원군 쪽 「왜 차지하고 앉지 않습니까」와 「태국 군대라고?」 대화(방혈 전술은 6번 기록), 10월 27일 포로의 맨발과 양말을 건넨 병사의 대화(교전과 포로 셋은 2번 기록), 탐색 공격 때 관측병이 좌표를 부르고 병사들이 모래주머니를 쌓은 모습, 「흙 퍼내!」로 시작하는 쭈안 대위의 진지 대화, 「찰름, 소대 데리고 올라가」(소대 투입은 기록), 쭈안이 후송되었다는 대목(부상은 기록), 끄리앙삭이 「진짜는 폭찹이다」라고 판단한 말(기만 포격은 기록), 「강철 고리, 지금!」, 태국말로 이름을 불러 편을 가렸다는 대목과 「이 분대 통신병」 대화, 놈이 11월 10일 밤 중기관총을 쏜 장면, 들것이 모자란다는 무전과 취사병·통신병의 들것 운반, 두 장군이 교통호를 걸은 모습과 솜옷 조각·탄피, 시신을 담요에 싸 내린 장면과 분대원의 몸짓, 쪽지를 읽은 미군 병사의 모습과 기둥의 파편 자국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놈 수파폰이 폭찹 싸움에 들었다는 것은 면담 기록에 있으나, 같은 기록의 영상 꼬리표는 그 싸움을 1953년으로 적고 복무 기간도 1949~1951년으로 적어 서로 맞지 않는다. 그가 11월 1일·10일 밤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이름과 내면은 기록에서 찾지 못했다. 1953년 이 고지의 싸움은 52화에서 다룬다.

5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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