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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15,322자)

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 — 세 나라의 전쟁

1950 · 네오

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 1952년 10월 14일~11월 25일 — 김화 북쪽, 위쪽 오성산과 상감령 마을, 그 아래 V자 모양의 삼각고지(중국 이름 597.9고지)와 왼쪽 팔의 파이크스 피크, 오른쪽 팔의 제인 러셀 고지·샌디 능선, 동쪽 저격능선(중국 이름 537.7고지 북산). 10월 14일 미 제7사단 제31연대의 삼각고지 공격과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의 저격능선 공격, 19일 밤 중공군 제45사단의 역습, 25일 국군 제2사단 인수, 30일 중공군 반격, 11월 18일 국군의 A고지 확보. 서쪽 멀리 백마고지. 개략도,

1952년 10월 14일 화요일 새벽 네 시, 강원도 김화(현 철원군 김화읍) 북쪽 — 미 제7사단 제31연대 제3대대 공격 대기 진지.

대대장 뉴베리 소령의 지도에는 산이 V자로 그려져 있었다. 꼭짓점이 남쪽을 향했고, 그 꼭짓점이 598고지였다. 왼쪽 팔 끝에는 파이크스 피크, 오른쪽 팔에는 제인 러셀 고지와 샌디 능선이 붙어 있었다. 모양이 세모라서 다들 삼각고지라고 불렀다1.

“제인 러셀이 누굽니까?”

“영화배우다. 산봉우리 둘이 나란히 솟았지. 누가 붙였는지는 묻지 마라.”

“그럼 저 산에 올라가면 사인이라도 받습니까?”

“올라가기만 하면 내가 사인해 주마.”

웃음은 짧았다. 계획서의 숫자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미 제7사단에서 한 대대, 국군 제2사단에서 한 대대가 나가 닷새 동안 싸우고, 사상자는 이백 명쯤으로 본다는 계획이었다. 포병 열여섯 개 대대가 대포 이백팔십 문을 걸었고, 전폭기 출격은 이백 회가 넘게 잡혀 있었다. 작전 이름은 노름판에서 마지막 패를 까 보이는 순간을 가리키는 쇼다운이었다1.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은 열흘 전 극동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에게, 적의 주도권에 끌려 다니며 지난해 가을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다고 편지를 썼다1. 서쪽 철원 들판의 백마고지에서는 일주일째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이 같은 봉우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사전 폭격 닷새는 그 싸움에 비행기를 내주느라 이틀로 줄었다1.

연대장 모지스 대령은 계획서를 받자마자 한 대대를 두 대대로 늘렸다. 한 대대장이 산 전체를 다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1.

포격이 끝나자 제3대대 L중대가 나갔다. 중대장 브룩스 중위는 삼십 분도 안 되어 소대장들과 함께 쓰러졌다. 598고지 거점에서 수류탄과 성형작약, 파이프 폭약이 굴러 내려왔고, 그다음에는 돌이 날아왔다1. 남은 병사들은 거점 아래 작은 웅덩이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돌이요! 저놈들 돌까지 던집니다!”

“돌이 떨어졌다는 건 수류탄도 떨어졌다는 소리다. 엎드려 있어!”

뒤따르던 K중대장 마틴 중위가 전차를 불렀다. 전차포가 거점을 부순 뒤 마틴은 엎드린 L중대 병사들을 일으켜 다시 산을 오르게 했다. 몇 명이 598고지 바깥 참호까지 기어들었지만, 꼭대기의 중공군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수류탄이 끝없이 날아왔다1. 대대장 뉴베리는 마지막 남은 I중대를 넣었다. 중대장 스토버 대위는 동쪽 팔의 샌디 능선으로 돌아 올라가, 구덩이와 참호에 박힌 중공군을 하나씩 끌어내며 598고지 쪽으로 기어갔다1.

그러나 해 질 무렵 중공군 제135연대의 두 중대가 미군 포탄이 떨어지는 자리를 그대로 뚫고 내려왔다. 밤 아홉 시, 제3대대는 출발한 진지로 돌아와 있었다1.

오른쪽 팔에서는 제1대대가 제인 러셀 고지를 잡았다. A중대장 쇼월터 중위는 공격 초반에 다쳐 실려 내려갔고, 대대장 매클루어 중령은 B중대와 C중대를 차례로 밀어 넣었다. 오후 이른 시각 두 중대가 꼭대기에 올라가 호를 팠다. 중공군은 그 봉우리를 되찾으려고 네 번 역습했고, 매번 그 앞에 포탄과 박격포탄을 먼저 쏟았다1.

세 번째 역습이 끝났을 때 탄약이 바닥을 보였다. 탄약 상자는 산 아래까지 와 있었다. 지게에 탄약을 지고 올라와야 할 한국인 운반 노무자들은 포탄이 쏟아지는 비탈 앞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1.

“올라가야 합니다! 위에서 총알이 없어 죽어 갑니다!”

“올라가다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같다는 거요? 저 비탈을 보시오!”

통역이 말을 옮기는 사이 네 번째 역습이 시작되었다. 중공군 제135연대의 한 대대가 자기 편 포탄과 미군의 최후 저지 사격 속을 그대로 걸어 들어왔다. 지켜보던 미군 몇은 저들이 약을 먹은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참호 안에서 총검과 개머리판이 부딪쳤다. 연대장 모지스는 철수를 명령했다. 세 중대의 남은 병사들은 다친 동료를 메고 자정이 조금 지나 주저항선으로 내려왔다1.

*

같은 날 아침 다섯 시, 삼각고지에서 동쪽으로 이 킬로미터쯤 떨어진 저격능선 —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

해발 오백팔십 미터쯤 되는 돌출 능선이었다. 양쪽 진지가 서로 저격총으로 머리를 맞힐 수 있는 거리에 붙어 있어 미군이 저격능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2. 제3대대 병사들은 포탄 오만 발에 가까운 포격이 능선 꼭대기를 갈아엎는 모습을 지켜본 뒤 올라갔다. 그리고 꼭대기를 차지했다2.

“올라왔습니다! 꼭대기입니다!”

“호 파라. 저놈들은 땅 밑에 있다.”

다섯 시간 뒤, 대대는 빼앗은 능선을 다시 내주고 내려왔다2. 이튿날 낮 제17연대 제2대대가 다시 올라가 능선을 잡았고, 밤 역습에 또 내려왔다2.

이 대대를 열 달 남짓 이끈 대대장 이대용(25) 소령은 이 자리에 없었다. 9월 2일 부산항에서 미 육군 보병학교 유학생으로 군용 수송선에 올랐다3. 그가 늘 긴장 속에서 적과 주고받았다고 기억한 능선이 바로 여기였다3.

제2사단의 고참 병사 가운데 이재식(28) 일병이 있었다. 경상북도 영천의 두 형제 가운데 맏이였다. 1950년 10월 입대할 때 아내는 일곱 달 된 아이를 배고 있었고, 고향에는 1946년에 낳은 딸이 있었다4. 그는 양구의 735고지와 금화·금성 진격전을 이미 지나왔다4.

*

같은 날 새벽, 오성산 앞 597.9고지·537.7고지 북산 진지 — 중국인민지원군 박격포 진지.

아흐레 전인 10월 5일, 국군 참모 하나가 공격 계획서를 통째로 들고 넘어왔다. 지원군 지휘부는 그 말을 크게 믿지 않았다5. 그래도 산은 이미 속이 비어 있었다. 제15군은 이 일대에 갱도 9천 미터, 참호 5만 미터를 파 두었다5.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날이 밝기 전이었다. 82밀리 박격포 사수 탕장훙은 쓰촨성 중장현에서 온 병사였다. 그는 앞쪽 소총 제1중대가 불러 주는 곳으로 포탄을 이백 발 쏘았다6. 제1중대장이 그에게 외쳤다6.

“잘 쏜다! 너희 포탄은 눈이 달린 것처럼 적 한가운데로 떨어진다! 포탄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쏴!”

그다음 포탄 하나가 그의 진지를 덮었다. 흙에 묻힌 탕장훙은 이십 분쯤 뒤에 정신이 들었다. 포다리가 부서져 있었다. 그는 자기 몸을 포다리 삼아 오른손으로 포신을 끌어안고 왼손으로 포탄을 넣었다. 얼굴이 피투성이라 포탄마다 피가 묻었다6. 중국 쪽 기록은 그 박격포 한 문이 그 싸움에서 적 사백이십여 명을 죽였다고 적었다6.

*

1952년 10월 15일, 598고지 — 미 제31연대 제2대대 E중대.

E중대장 냅 중위는 꼭대기 바깥 참호를 쓸어 낸 뒤 파이크스 피크 기슭까지 밀고 나갔다. 거기서 멈췄다. 중공군은 중대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만한 깊은 굴과 갱도 안에 있었다1.

“굴 입구에 수류탄 넣어!”

“넣었습니다. 안에서 도로 나옵니다. 굴이 꺾여 있습니다.”

같은 날 E중대 기관총 사수 포메로이(20) 일병은 소대 옆구리의 골짜기를 맡았다. 골짜기로 중공군이 올라왔다. 그는 두 번 다치고도 탄이 떨어질 때까지 쏘았고, 탄이 떨어지자 기관총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맞붙어 싸우다 전사했다. 소대는 진지를 지켰다7. E중대 뒤로 F중대장 기스만 대위가 북동쪽 팔을 따라 샌디 능선 쪽으로 나아갔고, G중대는 598고지 꼭대기로 올라와 진지를 다졌다1. 오른쪽 팔에서는 이날도 제인 러셀 고지가 먼저 무너졌다. 제32연대 제1대대 A중대장 타메스 중위의 중대가 꼭대기 가까이 갔을 때, 중공군의 증강된 한 대대가 비탈을 쓸고 내려왔다. 대대는 물러나 다시 대열을 짰다1. 이튿날 오후 제17연대 제2대대가 큰 저항 없이 그 봉우리를 잡았다1. 같은 날 해 질 무렵에는 중대장 냅 중위가 파이크스 피크 앞 역습 가운데 전사했다1.

*

1952년 10월 19일 밤, 597.9고지 서쪽 — 중국인민지원군 제15군 제45사단 제135연대 제2대대 제6중대.

중국 사람들은 이 산을 높이로 불렀다. 미군의 598고지는 597.9고지였고, 국군의 저격능선은 537.7고지 북산이었다. 두 산 뒤의 마을 이름을 따서 이 싸움 전체를 상감령이라고 불렀다8.

제2대대는 밤사이 597.9고지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지 셋을 잇따라 되찾은 뒤 기관총 거점 하나에 막혔다. 폭파조가 세 번 나갔고 세 번 다 돌아오지 못했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9.

대대 통신병 황지광(19)이 나섰다9.

“제가 가겠습니다.”

그는 전사 우싼양, 샤오덩량과 함께 기어 올라갔다10. 거점에서 오십 미터가 안 되는 곳에서 들켰다. 우싼양이 전사하고 샤오덩량이 크게 다쳤다. 황지광도 왼팔을 맞았다9.

중국 쪽 기록은 그다음을 이렇게 적었다. 황지광이 거점 사각까지 기어가 수류탄을 던졌고,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자 일어나 몸으로 총구를 막았다. 부대는 그 틈에 고지로 올라갔다9. 그날 밤의 몸짓을 신화사 통신이 상상으로 부풀렸다는 비판도 중국 안에 있다10.

같은 밤 미군 쪽 일지에는 중공군 제134연대의 두 중대가 파이크스 피크의 L중대 참호로 뛰어들어 맞붙어 싸웠고, 사로잡힌 포로들이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20일 새벽 여섯 시, 대대장 스펠먼 중령이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1.

“놈들이 빠집니다. 파이크스 피크에 있는 걸 전부 쏟아부어 주십시오!”

대대 일지에는 괄호 안에 한 마디가 붙었다. “그대로 시행함.”1

*

1952년 10월 하순, 597.9고지 아래 — 제135연대 제7중대가 든 갱도.

갱도는 반대편 비탈 속으로 뚫려 있었다. 천장은 가장 높은 데가 1.7미터였고, 좁은 데는 한 사람이 모로 서야 지나갔다11. 10월 21일부터 고지 위의 지원군은 모두 땅속으로 들어갔다11. 두께 두세 미터짜리 전투 갱도는 거의 다 무너졌고, 천장이 수십 미터 되는 병력 대기 갱도만 남았다11.

중대장 장지파는 바깥에서 날아드는 포탄 소리로 시간을 셌다. 하루 반 조각의 비스킷이 나왔고, 물은 한 방울도 없는 날이 많았다12.

“중대장님, 입술이 붙어서 안 떨어집니다.”

“오줌으로 적셔라. 아끼면서.”

갱도를 겪은 사람의 말이 훗날 이렇게 남았다. “입이 말라 움직이지 않을 때는 오줌으로 적셨지. 오줌도 귀했어.”13

물이 끊긴 지 이레째 되던 날, 탄약을 지고 포화 속을 건너온 운반병 류밍성이 품에서 사과 한 알을 꺼냈다14. 오는 길에 주운 것이었다13. 장지파는 한 입만 베어 물고 옆으로 넘겼다. 모두 먹으라는 명령이었다. 사과는 여덟 사람의 손을 세 바퀴 돈 뒤에야 없어졌다13.

“너 왜 이렇게 조금 먹어?”

“네 침 묻은 자리 피하느라고.”

갱도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가 곧 잦아들었다. 그 무렵 지원군은 평양에서 사과 4만 킬로그램을 사들이고, 갱도에 사과 한 광주리를 들여보내는 사람에게 2등공을 주겠다고 했다. 갱도까지 들어간 사과는 그 한 알뿐이었다고 중국 쪽 글은 적었다14.

사단장 추이젠궁(35)은 날마다 군장 친지웨이(36)와 전화로 이야기했다. 추이젠궁이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12.

“1호, 마음 놓으십시오. 남은 게 한 중대면 제가 중대장을 하고, 한 분대면 제가 분대장을 합니다.”

친지웨이는 사령부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금 조선 전선 전체가 상감령에서 싸우고 있다, 제15군은 피는 흘려도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아무도 울지 말라12.

옆 갱도에는 위생병 왕칭전이 있었다. 1951년 초 열다섯 살에 압록강을 건넌 소녀였다. 그는 혼자서 갱도 세 곳의 중상자 스무 명 남짓을 맡아 주사를 놓고 붕대를 갈고 밥을 떠 넣었다11. 촛불이 꺼지면 손으로 더듬어 붕대 끝을 찾았다.

“누나, 물은 없어요?”

“없어. 대신 내 노래 들어. 노래는 목이 안 말라.”

“누나 노래 들으면 더 목말라요.”

갱도 안의 다친 병사 몇이 소리 없이 웃었다.

군 사령부는 경비 중대까지 갱도로 보냈고, 감춰 두었던 카츄샤 다연장 로켓을 꺼냈다12. 제12군 제31사단도 넘어와 597.9고지와 537.7고지 북산의 싸움에 들어갔다15.

10월 30일 밤, 지원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11. 31일 밤 2호 진지를 되찾으러 나간 부대에 있던 린빙위안은 이렇게 기억했다. “11월 4일 밤, 갱도 안에는 열 몇 사람밖에 남지 않았어.”11

*

1952년 10월 30일 밤, 598고지 꼭대기 — 국군 제2사단 제31연대.

닷새 전 미 제7사단은 삼각고지를 국군 제2사단에 넘기고 내려갔다. 열이틀 동안 아홉 개 보병대대 가운데 여덟을 넣었고, 사상자는 이천 명이 넘었다1. 그날 밤 중공군 세 대대가 598고지의 국군을 쓸어 냈다. 11월 1일에는 제인 러셀 고지도 넘어갔다1. 기록에 따르면 그 밤 지원군은 큰 구경 대포 백서른세 문과 로켓 발사대 스물두 대를 한꺼번에 쏘았다5.

“대대장님, 꼭대기 진지가 응답이 없습니다.”

“다시 불러. 응답할 때까지.”

제31연대의 중대들이 날이 밝자 다시 비탈을 올랐다. 무너진 참호 속에서 미군이 쓰던 모래주머니가 터져 흩어져 있었다.

“위에서 수류탄이 굴러옵니다! 미군 때랑 똑같습니다!”

“미군 때랑 똑같으면 미군이 못 한 걸 우리가 하면 된다. 올라가!”

국군의 역습은 닷새 동안 되풀이되었고 매번 꺾였다. 11월 5일, 미 제9군단장 젠킨스 소장이 삼각고지 공격을 멈추게 했다1.

저격능선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11월 11일부터 17일까지 국군은 능선의 A고지를 세 번 빼앗고 세 번 내주었다2.

“A고지 또 넘어갔답니다.”

“몇 번째냐?”

“세다가 잊어버렸습니다. 소대장님은 기억하십니까?”

“나도 잊었다. 그러니 이번엔 찾으면 다시는 안 세게 만들자.”

능선의 흙은 몇 번이고 뒤집혀 발목까지 빠졌다. 참호를 파면 그 안에서 앞서 싸운 사람들의 탄피와 찢어진 군화가 나왔다. 영천에 두고 온 딸은 여섯 살이 되었을 것이고, 그가 떠난 뒤 태어난 아들은 두 돌을 앞두고 있을 터였다4. 이재식 일병은 그 11월의 어느 날 능선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전사했다4. 날짜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18일, 국군이 A고지를 차지했다2. 미군 전사는 그날을 쇼다운이 시작된 뒤 국군이 능선 일부를 열네 번째로 차지한 날로 적었다1.

*

1952년 11월 25일 새벽, 오성산(현 북한 강원도 김화군) 속 제15군 지휘 갱도.

전화가 울렸다. 앞에서 올라온 보고였다12.

“25일 영시 일 분 이후로 적은 총 한 방, 포 한 발 쏘지 않았습니다. 비행기도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친지웨이가 대답했다12.

“저쪽이 안 싸우면 우리도 안 싸운다.”

그날로 세 나라의 전과표가 따로 쓰이기 시작했다.

미군 사령부의 참모들은 숫자를 맞추느라 밤을 새웠다. 두 대대, 닷새, 사상자 이백 명으로 시작한 싸움이 두 개 사단 넘게 빨아들였고, 유엔군 사상자는 구천 명을 넘겼다. 그 끝에 손에 남은 것은 저격능선의 한 귀퉁이였고, 삼각고지는 한 봉우리도 남지 않았다. 중공군 손실은 일만 구천 명이 넘는다고 추정했다1. 미군 전사 365명·부상 1,174명, 국군 전사 1,906명·부상 3,496명으로 적은 집계도 있다5.

“계획서에 이백 명이라고 쓴 사람은 누굽니까?”

“그 사람도 지금 이 표를 쓰고 있다.”

제15군 사령부의 표는 달랐다. 43일 동안 지원군은 사상자 일만 일천여 명을 내고 적 이만 오천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으며, 비행기 274대를 떨어뜨리거나 망가뜨렸다고 했다11. 적이 두 산에 퍼부은 포탄은 190만여 발, 폭탄은 5천여 개였고, 산꼭대기가 2미터 깎였다고 했다8. 다른 중국 집계는 지원군 전사 4,838명·부상 6,691명, 국군 전사 1,096명으로 적었다15. 12월 15일 537.7고지 북산을 넘겨받으면서 제15군은 싸움 전의 진지를 모두 되찾았다고 발표했다15.

국군 제2사단의 표에는 저격능선을 지켜 냈다고 적혔다. 중공군은 두 개 연대를 잃고 오성산 북쪽으로 물러났고, 국군도 한 개 연대만큼의 사상자를 냈다. 김화에서 금성으로 가는 길을 내려다보는 땅을 쥐었다고 했다. 이 싸움은 백마고지와 함께 이 전쟁의 2대 격전으로 불리게 되었다2.

중국은 이 고지를 영화와 노래로 기억한다. 1956년 장춘영화제작소가 사멍 감독의 영화 《상감령》을 내놓았다. 갱도 안에서 위생병 왕란이 부상병에게 「나의 조국」을 불러 주는 장면이 나온다. 첫 줄은 「큰 강에 물결이 넓다」였다. 차오위가 노랫말을 쓰고 류츠가 곡을 붙였으며 궈란잉이 불렀다. 지금도 중국에서 불리는 노래다16.

같은 산을 두고 미국은 이기지 못했다고 적었고, 중국과 한국은 저마다 이겼다고 적었다. 세 장의 표에서 맞아떨어지는 숫자는 하나도 없었다.

*

2025년 12월 9일, 강원도 동해시 보훈복지회관 —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

2000년 9월, 주민의 제보를 받고 육군 제15사단 장병들이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의 산에서 유해 서른 구를 파냈다4.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스물다섯 해 뒤에야 나왔다. 딸 이춘예(4)는 2007년과 2015년에 유전자 시료를 냈지만, 그때의 기술로는 맞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4. 이재식 일병이었다.

아버지가 입대할 때 네 살이었던 딸은 일흔아홉이 되어 있었다. 외손자 정현종이 곁에 섰다. 딸은 마이크 앞에서 짧게 말했다4.

“제가 죽기 전에 그 꿈을 이루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능선의 이름은 저격능선이고, 중국 지도에는 537.7고지 북산이다. 그 능선에서 일흔세 해 만에 제 이름을 찾아 내려온 사람은 영천의 맏아들 이재식이었다.

사료 출처

1.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미 육군 군사사센터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총서, 1966) 제13장 「Stalemate」의 「Operation SHOWDOWN」 절, koreanwaronline.com/history/TruceTent/ch13.htm 게재본 — 밴 플리트의 10월 5일 편지(원문: the highest casualties since the heavy fighting of October and November 1951), 두 대대·닷새·사상자 약 200명 계획, 포병 16개 대대 약 280문과 전폭기 200회 이상, 10월 8일 승인, 백마고지 때문에 사전 폭격 닷새가 이틀로 줄어듦, V자 지형과 파이크스 피크·제인 러셀 고지·샌디 능선의 이름, 모지스가 공격 병력을 두 배로 늘림, 뉴베리의 제3대대와 브룩스 L중대(삼십 분 안에 중대장·소대장 전원 사상, 수류탄·성형작약·파이프 폭약·돌), 제135연대 두 중대의 역습과 21시 원진지 복귀, 15일 냅의 E중대가 파이크스 피크 기슭의 굴과 갱도에서 멈춤, 16일 냅 전사, 19일 저녁 제234연대 두 중대의 L중대 참호 돌입과 포로 진술, 20일 06시 스펠먼의 요청(원문: hit Pike's Peak with everything we have)과 일지의 「complied with」, 25일 국군 제2사단 인수와 미 제7사단의 9개 대대 중 8개 투입·사상자 2,000명 이상, 30일 중공군 세 대대가 598고지 탈환, 11월 1일 제인 러셀 고지 상실, 11월 5일 젠킨스의 공격 중지, 11월 18일 저격능선 일부를 열네 번째로 차지, 사상자 9,000명 이상과 중공군 손실 추정 19,000명 이상, 삼각고지는 한 곳도 갖지 못함. 원문의 「235th Regiment」「gist Infantry」는 게재본의 글자 인식 오류로 보고 제135연대·제31연대로 읽었다. 2. 양영조, 「저격능선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13년 집필·2023년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49082 — 1952년 10월 14일~11월 24일 42일간, 김화 북방 7킬로미터·해발 약 580미터의 돌출 능선, 미 제9군단 작전통제, 14일 05시 제32연대 제3대대가 5만 발에 가까운 포병 지원으로 탈취했다가 다섯 시간 만에 상실, 15일 제17연대 제2대대의 주간 탈취와 야간 철수, 25일 삼각고지 인수, 11월 11~17일 A고지 세 차례 공방, 18일 A고지 확보, 중공군 2개 연대 병력 손실과 오성산 북쪽 철수, 국군 1개 연대 병력의 사상자, 백마고지전투와 함께 「2대격전」. 3. 이대용 회고, 「내가 겪은 6·25」 하, 서울신문 1991.6.28(25화 출처와 같은 글) — 1951년 10월 27일 제32연대 제3대대장 보임, 김화 동북방 저격능선 배치와 늘 긴장 속의 공방, 미 육군 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생 선발, 1952년 9월 2일 부산항에서 군용 수송선 승선. 4. 기사(제목 확인 못 함), 파이낸셜뉴스 2025.12.9, fnnews.com/news/202512091038379917 — 1922년 11월 경북 영천 출생, 두 형제 중 맏이, 1946년 딸 출생, 1950년 10월 입대 때 아내가 임신 7개월, 국군 제2사단, 735고지 전투와 금화·금성 진격전, 1952년 11월 저격능선 전투에서 전사, 2000년 9월 주민 제보로 제15사단이 화천군 상서면에서 유해 30구 발굴, 딸 이춘예(1946년생)가 2007·2015년 시료 제출, 2025년 12월 9일 동해시 보훈복지회관 귀환 행사, 외손자 정현종, 딸의 말. 5.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Triangle Hill」(2026년 10월 열람) — 10월 5일 국군 참모 한 명이 작전 계획을 들고 넘어갔으나 지원군이 크게 믿지 않음, 제15군의 갱도 약 9,000미터·참호 50,000미터, 10월 30일 중공군 큰 구경 대포 133문·로켓 발사대 22대·120밀리 박격포 30문의 포격, 정보 상자의 미군 전사 365·부상 1,174·포로 1, 국군 전사 1,906·부상 3,496·실종 97. 6. 杨茹, 기사(제목 확인 못 함), 新华社 成都 2020.10.19발, 中国军网 게재, 中国日报网 재게재 2020.10.20, cn.chinadaily.com.cn/a/202010/20/WS5f8e8b9fa3101e7ce972a3d7.html — 쓰촨성 중장현 출신 탕장훙, 1952년 10월 14일 새벽 597.9·537.7 두 고지 앞 진지에 대한 폭격·포격, 82밀리 박격포로 이백 발을 쏨, 보병 제1중대장의 말(「打得好呀!你们的炮弹像长了眼睛一样」), 흙에 묻혔다가 약 이십 분 뒤 깨어남, 포다리 파손 뒤 몸을 포다리로 삼아 오른손으로 포신을 안고 왼손으로 장전, 포탄마다 피가 묻음, 상감령 전역에서 박격포 한 문으로 적 420여 명 살상(중국 쪽 주장). 7. 영문 위키백과, 「Ralph E. Pomeroy」(2026년 10월 열람)와 거기 실린 명예훈장 공적문 — 1930년 3월 26일 웨스트버지니아주 퀸우드 출생, 미 제31보병연대 E중대, 1952년 10월 15일 삼각고지 부근, 기관총 사수로 소대 옆구리의 골짜기를 지킴, 두 번 부상, 탄약이 떨어진 뒤 기관총을 몽둥이로 써서 맞붙어 싸우다 전사. 8. 기사(제목 확인 못 함), 新华网 2025.10.25(신화사 선양발, 위예퉁·훙커룬 기자), news.cn/politics/20251025/c5b65c4e6b9e4a63a7b81bf4d465d484/c.html — 상감령은 김화군 오성산 남쪽 기슭의 작은 마을로 597.9고지·537.7고지 북산과 이웃함, 190여만 발의 포탄과 5천여 개의 폭탄, 산꼭대기가 2미터 깎임. 9. 「【百位英雄模范 百年非凡历程】系列㊴ 黄继光:舍身堵枪眼的钢铁战士」, 澎湃新闻 게재(2021), m.thepaper.cn/baijiahao_14835740 — 10월 19일 밤 597.9고지 탈취 명령, 진지 셋을 되찾은 뒤 막힘, 세 번의 폭파 실패와 다가오는 새벽, 스스로 폭파 임무를 청함, 50미터 안에서 발각되어 하나는 전사·하나는 중상·자신은 왼팔 부상, 거점 사각에서 몸으로 총구를 막았다는 서술, 21세에 전사. 10. 중국어 위키백과, 「黄继光」(2026년 10월 열람) — 1931년 출생, 제45사단 제135연대 제2대대 제6중대 통신원, 597.9고지, 함께 나간 우싼양(吳三羊, 전사)·샤오덩량(肖登良, 중상), 오곡평(吳谷平)이 신화사 통신의 심리 묘사를 「합리적 상상, 전형 끌어올리기」라고 평한 비판. 11. 기사(제목 확인 못 함), 新华网 2022.11.25, news.cn/politics/2022-11/25/c_1129158087.htm — 10월 21일 수비 부대 전원 갱도전 전환, 갱도 천장 최고 1.7미터·가장 좁은 곳은 한 사람이 모로 통과, 장지파의 회고(두께 두세 미터의 전투 갱도는 거의 다 무너지고 수십 미터 두께의 대기 갱도로 물러남), 10월 30일 반격 개시, 31일 밤 린빙위안 부대의 2호 진지 탈환 출동, 린빙위안의 「11월 4일 밤 갱도에 열 몇 사람만 남았다」, 43일 동안 사상 1.1만여 명으로 적 2.5만여 명 살상·비행기 274대 격추·격상. 12. 吴东峰, 상감령 전역 회고 기사, 北京青年报 게재, 中国新闻网 재게재 2020.10.25, chinanews.com/sh/2020/10-25/9321832.shtml — 친지웨이와 추이젠궁의 매일 통화, 추이젠궁의 「一号,你放心,打剩一个连,我当连长,打剩一个班,我当班长」(본문에 우리말로 옮김), 친지웨이의 「现在整个朝鲜战场都是上甘岭在打」「十五军官兵流血不流泪,谁也不许哭」, 하루 반 조각 비스킷과 물 부족, 25일 「凌晨零时1分以后,敌方未打一枪未开一炮」 보고와 「他们不打了,我们也不打了」. 13. 「上甘岭“一个苹果”故事主人公张计发逝世」, 澎湃新闻 2021.6.15, m.thepaper.cn/newsDetail_forward_13158643 — 제15군 제45사단 제135연대 제7중대장 장지파, 운반병 류밍성이 길에서 주운 사과를 건넴, 첫 입을 베어 물고 모두 먹으라고 명령, 여덟 사람 손에서 세 바퀴, 「입이 말라 움직이지 않을 때는 오줌으로 적셨다, 오줌도 귀했다」, 2021년 6월 15일 신양에서 별세(향년 95세). 14. 기사(제목 확인 못 함), 中国新闻网 2020.10.21, chinanews.com/cul/2020/10-21/9318352.shtml — 장지파 부대의 단수 이레째, 류밍성이 가져온 사과, 「두 바퀴」 돌고 다 먹음, 지원군이 평양에서 사과 4만 킬로그램을 사고 갱도에 한 광주리를 들이면 2등공을 준다고 했으나 들어간 것은 한 알뿐. 15. 중국어 위키백과, 「上甘岭战役」(2026년 10월 열람) — 지원군 전사 4,838·부상 6,691, 국군 전사 1,096·부상 3,496·실종 96, 12월 15일 제34사단 제106연대가 537.7고지 북산을 제15군 제45사단에 넘기며 전역 종료. 16. 共产党员网(12371.cn), 2019.11.27; 人民网(cpc.people.com.cn/n1/2019/1127/c64387-31476075.html) — 1956년 영화 《상감령》(장춘영화제작소, 감독 사멍), 삽입곡 「나의 조국」(乔羽 작사·刘炽 작곡·郭兰英 노래, 첫 줄 「一条大河波浪宽」). 중국 쪽 기록이다. 본문 137~138행의 「내 노래 들어」 대화는 창작이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이대용 1925년생(3화 [나이]와 같은 근거), 이재식 1922년생(출처 4), 포메로이 1930년생(출처 7), 황지광 1931년생(출처 10. 출처 9의 「21세 전사」는 세는나이), 친지웨이 1914년생·추이젠궁 1915년생(중국어 위키백과 인물 항목), 이춘예 1946년생(출처 4). 뉴베리, 모지스, 브룩스, 마틴, 스토버, 쇼월터, 매클루어, 냅, 기스만, 타메스, 스펠먼, 젠킨스, 탕장훙, 장지파, 류밍성, 왕칭전, 린빙위안, 우싼양, 샤오덩량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장지파는 2021년 향년 95세로 1926년 무렵 출생이지만 출생연도가 직접 적힌 자료를 찾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밴 플리트와 클라크는 이 화에서 이름만 나와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사상자 — 미 육군 전사는 유엔군 사상자 9,000명 이상, 중공군 손실 19,000명 이상(추정)을 적었다. 영문 위키백과는 국군 전사 1,906명, 중국어 위키백과는 국군 전사 1,096명·실종 96명으로 서로 다르다(부상 3,496명은 같다). 지원군 손실도 영문 위키백과 정보 상자는 전사 3,838명, 중국어 위키백과는 4,838명, 신화망은 사상 1.1만여 명으로 적었다. 중국이 내세운 적 손실 2.5만여 명과 미군이 추정한 중공군 손실 1.9만여 명이 서로 맞서는 꼴이다. 본문은 각 나라의 주장으로 따로 적었다. [자료 충돌] 끝난 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1월 24일, 중국은 11월 25일(정보 상자)과 12월 15일(537.7고지 북산 인계)을 함께 쓰고, 미 육군 전사는 11월 중순 이후 싸움이 잦아들었다고만 적었다. 중국 쪽의 10월 14일 포격 시작은 베이징 시각 새벽 네 시 반(중국신문망 2020.10.25), 영문 위키백과는 네 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공격 개시 다섯 시로 적었다. 한 시간 시차를 생각하면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자료 충돌] 사과 — 여덟 사람 손에서 세 바퀴(澎湃 2021), 갱도 안에서 두 바퀴(中国新闻网 2020), 팔구십 명 진지에서 세 바퀴(장지파의 다른 회고를 옮긴 검색 결과, 원문 미확인). 본문은 부고 기사의 「여덟 사람·세 바퀴」를 따랐다. 「오줌도 귀했다」는 말은 부고 기사에 말한 사람이 따로 적혀 있지 않아 장지파의 말로 단정하지 않고 「갱도를 겪은 사람의 말」로 적었다. [자료 충돌] 황지광이 죽은 날 — 중국어 위키백과 정보 상자는 10월 19일, 본문과 다른 기사들은 10월 20일 새벽. 몸으로 총구를 막았다는 서술은 중국 공식 서술이고, 미군 쪽 기록에서 이 장면을 확인하지 못했다. 미군 전사는 같은 밤 역습한 중공군을 제234연대로 적었고 중국 쪽은 제135연대 제2대대로 적어, 같은 밤 서로 다른 곳의 싸움일 수 있다. [자료 충돌] 이재식 일병의 유해 — 전사 장소는 김화의 저격능선인데 유해는 동쪽 화천군 상서면에서 발굴되었다. 기사는 그 까닭을 적지 않았다. [재구성] 「제인 러셀이 누굽니까?」로 시작하는 병사들의 대화(이름이 붙은 일은 기록), 「돌이요!」와 「올라왔습니다!」로 시작하는 대화, 미군과 한국인 운반 노무자의 대화와 통역(노무자들이 포화 속 운반을 몹시 꺼린 일은 기록), 「약을 먹은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의 자구(그런 짐작을 한 관측자가 있었다는 것은 기록), 「굴 입구에 수류탄 넣어!」 대화, 황지광의 「제가 가겠습니다」(청한 일은 기록), 장지파와 병사의 오줌 대화(오줌으로 입을 적신 일은 기록), 사과를 돌릴 때의 농담, 왕칭전이 있던 갱도의 위치와 촛불·노래 대화(혼자 세 갱도의 중상자 스무여 명을 돌본 일은 기록), 제31연대의 「미군 때랑 똑같습니다」 대화와 모래주머니, A고지의 「몇 번째냐?」 대화와 참호 속 탄피·군화, 이재식이 딸과 아들의 나이를 떠올리는 대목(딸 1946년생·입대 때 아내 임신 7개월은 기록), 미군 참모들의 「이백 명」 대화, 「꼭대기 진지가 응답이 없습니다」 무전, 제32연대 제3대대에 이재식이 있었는지(그의 연대·대대는 기록에서 확인하지 못해 「제2사단」으로만 적었다), 딸이 마이크 앞에서 말한 몸짓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추이젠궁·친지웨이의 말, 11월 25일 보고와 대답은 중국어 기사 원문을 우리말로 옮겼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4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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