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4/57

4화(13,353자)

의정부 전투 — 서울로 열린 길

1950 · 네오

의정부 전투, 1950년 6월 25일~28일 — 38선과 의정부로 모이는 두 길(전곡–동두천–의정부 3번 도로, 양문리–포천–의정부 43번 도로). 국군 제7사단 제1연대(동두천·소요산)·제9연대(만세교·포천),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송우리), 북한군 제4사단·제107전차연대와 제3사단·제109전차연대의 진격, 26일 국군 반격(제1연대 동두천 재진입, 제2사단 제5연대 축석령), 북한군 제4사단의 봉암리–덕정 우회, 금오리 김풍익 포진, 26일 오후 의정부 함락, 백석천·창동·미아리 방어선, 28일 새벽 미아리 돌파. 개략도,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저녁,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금오리(현 의정부시 금오동), 제9연대 본부.

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그날 오후 사단에서 내려온 통보를 책상 위에 펴 둔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1. 재량에 따라 주말 외출을 실시하라. 몇 주째 비상이 이어지는 동안 병사들은 막사와 진지 사이만 오갔다. 이번 주말에는 내보내 줄 만했다. 윤춘근은 감기 기운으로 이마가 미지근했고, 서울 청량리(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숙소의 이부자리가 자꾸 생각났다.

그런데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일주일 전부터 철원(현 철원군)에 기갑부대가 나타났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38선 건너편 경비대가 정규군과 자리를 바꿨다는 소문도 돌았다. 전날 밤에는 포천의 제2대대장이 전화로 영북면 운천리(현 포천시 영북면)에서 차량 대열이 유정리(현 철원군) 쪽으로 움직인다고 알렸고, 곧이어 영평천 부근에 전차가 보였다고 다시 알려 왔다1.

대대장 둘이 들어와 섰다. 제1·3대대 병사들이 외출 준비를 마쳤다는 보고였다. 윤춘근은 고개를 들었다.

“중지한다. 아무 일 없으면 내일 낮에 내보내자.”

대대장들은 아무 말 없이 경례하고 나갔다. 그들도 자기 외박을 접었다. 윤춘근은 청량리 숙소에 전화를 걸어 오늘은 못 들어간다고만 이르고, 연대 본부 야전침대에 몸을 눕혔다. 같은 밤 서울과 의정부에서는 다른 부대 병사들이 휴가증을 쥐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사단 전체에서 그날 밤 부대에 남은 사람은 4,500명 남짓이었다2.

*

6월 25일 새벽 네 시 반, 같은 곳.

전화벨에 윤춘근은 단번에 일어났다. 포천 읍내 제2대대 본부의 전순기 소령이었다. 세 시 사십 분께부터 북한군 포탄이 경계진지에만 골라서 떨어지고, 양문리(현 포천시 영중면) 앞에는 전차 세 대가 다리를 넘어왔다고 했다1. 수화기 너머로 포성이 섞여 들어왔다.

윤춘근은 그것이 늘 있던 국경 충돌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사단에 보고하고 연대에 비상을 걸었다1. 금오리 연병장에 잠들어 있던 두 대대가 일어났다. 외박을 접은 병사들이었다.

“1대대, 3대대는 천계산과 가랑산 주진지로. 대전차포 중대는 만세교로 바로 간다. 로켓포도 있는 대로 모아서 뒤따르게 해.”

2.36인치 로켓포는 어깨에 메고 쏘는 쇠 대롱이었다. 연대가 긁어모은 것이 열두 문이었다1. 트럭이 금오리를 빠져나가 43번 도로로 올라섰다. 운전병이 전조등을 켤지 물었다. 하늘은 벌써 희끄무레했다.

*

25일 아침, 포천 북쪽 만세교(현 포천시 영중면 만세교리).

허현 대위의 57밀리 대전차포 중대가 다리 남쪽에 포를 벌렸을 때, 앞쪽 208고지 기슭에서는 제5중대 기관총이 벌써 길을 긁고 있었다. 북한군은 진지를 하나하나 치러 오지 않았다. 전차를 줄줄이 앞세우고 길만 따라 내려왔다. 둥근 포탑에 긴 포신을 얹은 전차가 다리 300미터 앞에서 멈추더니 포탑을 돌려 기관총 진지를 쏘았다.

“아직 쏘지 마라. 끌어들여.”

허현이 낮게 말했다. 포수는 조준경에 눈을 붙이고 있었다. 전차가 다시 움직였다. 궤도가 자갈을 갈아 대는 소리가 조준경 속까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오십 미터가 되었을 때 포가 뒤로 튀었다.

맞았다. 포탄이 선두 전차 앞머리에서 불꽃을 튀겼고, 포진 둘레에서 함성이 터졌다. 병사 하나가 철모를 벗어 흔들었다. 함성은 길게 가지 않았다. 전차는 포탑을 이쪽으로 돌리고 포를 쏘았다. 맞은 자리에서 연기 한 줄 피어오르지 않았다. 왼쪽 포가 몇 발을 더 박아 넣었지만 전차는 목 앞까지 기어 왔다.

포수가 조준경을 뽑아 들었다. 다른 포의 병사들도 조준경만 빼서 품에 넣고 신평리(현 포천시 신북면) 쪽 논둑으로 달렸다. 포는 다리 남쪽에 남았다. 아홉 시 사십 분, 만세교의 지연전은 두 시간을 채우지 못했다1. 고지 위의 제5중대는 전차가 발밑 길을 지나 포천으로 내려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오후 두 시, 북한군 보병이 신북대교를 건넜다. 천계산의 제1대대는 그날 세 번 맞붙어 마흔두 명을 잃고 여든 명이 다쳤다1. 탄약도 바닥이 났다. 가랑산의 제3대대는 연락이 끊긴 채 밤까지 버티다 혼자 산을 넘었고, 이튿날 아침 옥정리(현 양주시 옥정동)에 모인 머릿수는 백 명 남짓이었다.

*

25일 오후, 동두천 북쪽 창말고개(현 동두천시).

서쪽 3번 도로에서는 제1연대가 같은 일을 겪고 있었다. 소요산에서는 제2대대장 이의명 소령이 아침부터 진지를 붙들고 있었고, 포탄이 쏟아지는데도 대대의 전화선은 끊어지지 않았다. 소대장이 수화기에 대고 고함을 치면 대대장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 선 하나로 대대는 열 시간을 버텼다1.

그날 오후 창말고개에서 연대 57밀리 대전차포 중대장이 북쪽 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전차의 앞머리를 노리지 않았다. 포를 길 옆 비탈에 숨기고 기다렸다가, 선두 전차 두 대가 옆구리를 내보이며 고개를 넘어올 때 쏘았다. 두 대가 다 섰다1. 뒤따르던 북한군은 초성리(현 연천군 청산면) 쪽으로 물러났다.

이 소식은 연대에서 사단으로, 육군본부와 국방부로 올라가는 사이 몸집이 불었다. 서울에 닿았을 때 그것은 「국군 반격 개시」가 되어 있었다1. 그 시각 창말고개의 포병들은 다음 탄을 기다리고 있었다. 탄약 트럭은 오지 않았다.

오후 세 시께 북한군 제107전차연대가 다시 앞장섰다. 해가 질 무렵 북한군은 동두천 시내로 들어왔다. 제2대대는 어둠 속 골목에서 한동안 더 싸우다 밤 열 시께 남쪽 마을 덕정(현 양주시 회천동)으로 내려갔다2. 덕정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제1연대는 열 사람 가운데 셋이 비어 있었다2. 마차산에 올라가 있던 제1대대에는 철수 명령조차 닿지 않았다.

*

25일 밤, 동두천, 북한군 제4사단.

제4사단장 이권무(36) 소장은 사흘 전 자기 이름으로 작전명령을 내렸다3. 전차와 자주포가 공병을 데리고 앞장선다. 38선의 방어진지를 뚫은 뒤에는 의정부–서울 지역으로 나아간다3. 첫날 해가 지기 전에 의정부에 닿아 있어야 했다. 사단은 아직 동두천에 있었다.

“16연대 손실이 큽니다. 소요산 앞에서 많이 잃었습니다.”

참모가 보고했다. 길도 문제였다. 새벽에 사단의 포들은 삼십 분 넘게 3번 도로와 그 둘레를 두들겼다. 국군 진지는 대부분 지붕 없는 참호였고 초소마다 분대나 소대가 지키는 정도였다1. 그 길을 따라 전차가 내려가야 했다. 공병들이 자기네 포탄이 판 구덩이를 메우며 전차 앞을 걸었다.

이권무는 지도에서 동두천과 의정부 사이의 3번 도로를 짚었다가, 그 서쪽 봉암리(현 양주시 은현면)에서 덕정으로 내려가는 좁은 길로 손가락을 옮겼다. 큰길에는 국군이 버티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 좁은 길을 내일의 주공으로 골랐다.

*

25일 오후 다섯 시, 포천 남쪽 송우리(현 포천시 소흘읍).

서울을 지키는 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의 제3연대장 이상근(28) 중령은 마을 장송우(현 포천시 소흘읍) 북쪽 134고지에서 길을 내려다보았다1. 연대는 서울에서 급히 실려 왔고, 병사들은 송우교 양쪽에 한 사람씩 들어가는 구덩이인 개인호를 막 3분의 2쯤 판 참이었다. 그때 북한군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위로 굵은 소나기가 내리꽂혔다.

빗줄기 너머 2킬로미터 앞 길 위에 이상한 대열이 나타났다. 나뭇단을 높이 쌓은 소달구지들처럼 보였다. 대열이 가까워지자 나뭇단 아래로 궤도가 보였다. 위장을 두껍게 두른 전차들이었다.

제12중대장 대리 김현경 중위가 박격포 진지로 뛰어가 외쳤다.

“거리 천삼백!”

81밀리 박격포가 불을 뿜었다. 기관총 사수 이재철 하사가 장송우 부근에서 총구를 돌렸다. 연대가 가진 화기가 다 같은 길을 겨누었다. 선두 전차 두 대가 장승거리(현 포천시)에 멈춰 서더니 제3대대 관측소를 쏘았고, 여덟 대가 그 옆에 붙었다. 57밀리 포가 한 대를 맞혔고, 제11중대 화기소대장 이정선 소위의 로켓포도 철판을 정통으로 때렸다. 전차는 그대로였다1.

전차 뒤로 자주포와 트럭, 보병이 꼬리를 물고 왔다. 제3중대 소대장 김학석 소위는 그 대열의 차량을 세다가 백오십 대를 넘기고 그만두었다1. 포탑 옆에 701이라는 숫자를 단 전차도 있었다1. 여섯 시 반, 북한군 보병과 전차가 함께 덮쳐 왔다. 다음 행동을 지시하는 목소리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두 대대는 도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밤 여덟 시, 제1대대장 임백진 소령이 축석령(현 포천시 소흘읍과 의정부시 사이) 고갯마루에서 받아들인 병력은 백오십 명이었다1.

*

6월 26일 새벽 한 시, 의정부, 제7사단 사령부.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34) 소장이 그날 두 번째로 사단 사령부를 찾았다1. 방 안에는 제7사단장 유재흥(29) 준장과, 대전에서 막 올라온 제2사단장 이형근(30) 준장이 서 있었다3. 채병덕은 지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내일 아침 반격한다. 7사단은 동두천, 2사단은 포천. 의정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킨다.”

이형근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사단은 대전에서 기차로 올라오는 중이었고, 의정부에 닿은 것은 사단 사령부와 제5연대의 두 대대뿐이었다3.

“총장님, 대대 둘로는 반격이 안 됩니다. 사단이 다 올라온 뒤에 한꺼번에 치거나, 아니면 한강 남쪽에 선을 다시 치고 흩어진 병력을 모으는 게 맞습니다.”

미 군사고문단의 제임스 하우스먼 대위도 이형근 쪽에 섰다3. 유재흥도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의 사단은 하루 만에 절반을 잃었고, 남은 병사들은 산과 논둑에 흩어져 있었다. 채병덕은 고개를 저었다. 수도를 내주는 일은 없다고 했다.

“전차는 육탄으로 깬다.”

그 말로 회의가 끝났다. 같은 시각,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95호에 따라 포병학교에 딸린 포병 부대인 제2교도대대가 제2사단에 붙었다. 대대는 서울 용산을 떠나 의정부로 오고 있었다.

*

26일 새벽 세 시, 축석령.

제5연대 제2대대장 차갑준 소령은 고개를 오르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연대장은 일본에 나가 있었고 부연대장은 부산에 있었다4. 대전을 떠날 때 탄약도 넉넉히 받지 못했다. 축석령에 가면 그곳을 지키는 제3연대가 있을 것이고, 탄약도 거기서 받으라고 했다.

고갯마루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3연대는 전날 밤 이미 흩어진 뒤였다. 안개가 산허리를 덮어 열 걸음 앞도 흐릿했다. 그 안개 속에서 엔진 소리가 먼저 왔다. 이어 궤도 소리가 들렸고, 둥근 포탑이 안개를 헤치고 나타났다5.

병사들은 로켓포와 박격포를 쏘았다. 십 분이 지나지 않아 탄약이 떨어졌다. 차갑준은 남은 병력을 거두어 태릉(현 서울 노원구) 쪽으로 내려갔다. 아침 여덟 시, 같은 연대 제1대대가 자일동(현 의정부시) 쪽으로 달려왔다. 이정도 소령의 대대가 받은 통보는 한 줄이었다. 자일동에 가면 탄약차가 있을 것이다. 자일동에는 탄약차 대신 전차가 있었다1.

*

26일 아침 여덟 시, 동두천.

제1연대장 함준호(29) 대령의 병사들은 총 한 방 맞지 않고 동두천 읍내로 다시 들어갔다2. 전날 밤 피를 흘리며 내준 거리였다. 빈 거리에는 불탄 집과 북한군이 버린 탄약 상자가 널려 있었다. 대대는 북쪽으로 5킬로미터를 더 올라가 소요산까지 닿았다. 무전으로 동두천 탈환 소식이 올라갔다.

북한군 제4사단은 거기 없었다. 이권무의 주력은 서쪽 봉암리–덕정 길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하패리(현 양주시 은현면) 부근에서 그들과 처음 부딪친 것은 제1연대 제3대대였다. 대대라고 불렀지만 중대만도 못한 머릿수였고, 삼십 분 만에 흩어졌다4. 북한군은 덕정을 좌우에서 감쌌다. 동두천에 들어간 제1연대의 퇴로가 그렇게 닫혔다2.

서쪽으로 우회해 나가던 제18연대는 정오께 은현국민학교 근처에서 방어로 돌아서라는 명령을 받았다1. 연대장 임충식(28) 중령은 도락산 기슭에서 북한군 전차 대열이 화합로를 따라 덕정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쏘지 말라고 했다. 저 전차를 막을 것이 연대에는 없었다. 그는 진지를 숨긴 채 뒤따라올 보병을 기다렸다. 보병은 끝내 오지 않았다1.

*

26일 오전, 의정부 북동쪽 금오리.

포병학교 제2교도대대장 김풍익(29) 소령은 마을 상금오(현 의정부시 금오동)에 포를 벌리자마자 자일리 쪽 북한군에게 포탄을 퍼부었다6. 105밀리 곡사포 포탄은 산 너머로 날아가 길 위에 떨어졌다. 전차들은 포연을 뚫고 계속 내려왔다. 멀리서 떨어지는 곡사포 포탄으로는 저 철판을 세울 수 없었다.

김풍익은 제2포대 포진으로 뛰어갔다.

“기준포 끌어내. 길로 나간다.”

전포대장 최진식 중위가 포대 전체가 겨냥을 맞추는 기준포에 매달렸지만 포는 고장이 나 움직이지 않았다1. 김풍익은 옆을 돌아보았다.

“6번포.”

포대장 장세풍(28) 대위가 6번포 반원들을 불러 모았다7. 곡사포는 원래 산 뒤에 숨어서 멀리 쏘는 포였다. 그들은 그 포를 트럭에 걸고 적이 오는 쪽으로 몰았다. 자일리 서남쪽 1킬로미터,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길이 한눈에 보이는 길가에서 그들은 포를 내렸다8. 포가 다리를 벌리고 바닥에 박혔다. 포수가 포신을 거의 수평으로 내려 산모퉁이를 겨누었다.

산모퉁이에서 궤도 소리가 커졌다. 선두 전차가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200미터. 아무도 쏘라고 하지 않았다. 100미터. 반원 하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오십 미터까지 다가왔을 때 김풍익이 손을 내렸다9.

첫 탄이 전차에 꽂혔다. 궤도가 끊어진 전차는 길옆으로 미끄러져 논바닥에 처박혔다8. 반원들이 다음 탄을 들어 올렸다. 포탄 꼬리가 약실로 들어가는 순간, 모퉁이 뒤에서 두 번째 전차가 나타났다. 첫 탄의 섬광이 6번포의 자리를 이미 알려 준 뒤였다.

전차포 직격탄이 포진 한가운데 떨어졌다. 김풍익과 장세풍, 6번포 반원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운전병 하나였다. 그는 뒷날 대대장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고 전했다9.

한국군이 야포를 직접 겨누어 북한군 전차를 부순 첫 기록이 그 논바닥에 남았다6. 남은 대대의 포들은 대대장 없이 남쪽으로 물러났다.

*

26일 오후, 의정부 남쪽 백석천.

오후 한 시께 북한군 전차가 의정부 읍내로 들어왔다2. 거리는 물러나는 병사와 뒤늦게 짐을 진 주민, 들것에 실린 부상병으로 막혀 있었다. 제7사단과 제2사단의 지휘소는 창동(현 서울 도봉구)으로 내려갔다. 채병덕은 의정부를 내준 책임을 물어 이형근을 사단장에서 끌어내리고, 유재흥에게 의정부 지구 전체를 맡겼다4.

의정부 남쪽 백석천에는 창동에서 열차로 실려 온 제25연대가 엎드려 있었다4. 북한군은 의정부에 들어간 뒤 네 시간쯤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 전차 스무 대가 백석교 쪽으로 나왔다. 병사 하나가 겁에 질려 방아쇠를 당겼고, 그 한 발에 연대 전체가 사격을 시작했다. 사거리 밖의 전차에 퍼부은 탄약은 이삼 분 만에 바닥났다.

다리 밑에는 로켓포 분대장 하나가 숨어 있었다. 전차들이 다리를 하나씩 건넜다. 그는 네 대를 그냥 보내고 다섯 번째 전차의 옆구리를 쏘았다. 그 전차가 멈춰 섰다. 뒤따르던 전차의 포가 다리 밑을 때렸고, 분대장은 거기서 전사했다1. 전차 한 대를 잃은 북한군 대열은 의정부 읍내로 되돌아갔다. 먼저 건너간 네 대는 호원동(현 의정부시) 앞에서 제16연대 제2대대에 막혀 길 위에 멈췄다. 그날 밤 제25연대 제11중대장 문일수 중위가 특공대를 끌고 기어가 그중 두 대를 부쉈다1.

창동으로 물러나는 트럭 짐칸에서 누군가 라디오 방송을 전했다. 서울 방송이 제7사단의 반격으로 북한군 1,580명을 죽이고 전차 58대를 부쉈다고 했다는 것이었다3. 짐칸이 잠깐 조용해졌다. 맨 끝에 앉은 병사가 입을 열었다.

“쉰여덟 대면 오늘 우리가 본 걸 다 깼다는 얘긴데, 그럼 아까 다리 건너온 건 뭐랍니까?”

“그건 쉰아홉 번째겠지.”

옆 사람이 받았고, 짐칸에 처음으로 웃음이 돌았다. 트럭이 웅덩이에 빠졌다 올라오자 웃음은 신음으로 바뀌었다.

*

6월 27일 오전 열 시, 창동.

밤사이 흩어졌던 병사들이 창동으로 모여들었다. 제7사단의 제1·3·9연대, 제2사단의 제5·16·25연대, 대구에서 올라온 제3사단 제22연대의 남은 병력을 묶으니 대대 여섯 개쯤이 되었다4.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로 뚫린 넓은 골짜기에서 그들은 진지를 다 파지 못한 채 북쪽을 보았다.

전차와 자주포 마흔 대 가까이가 몰려왔다. 뒤에서 105밀리 곡사포가 쏘았다. 전날 대대장을 잃은 포병학교 제2교도대대의 포였다4. 포탄은 전차 둘레를 뒤집었지만 전차는 서지 않았다. 방어선이 끊어졌다. 제1연대장 함준호가 그날 창동에서 북한군 총탄에 쓰러졌다4. 병사들은 미아리(현 서울 성북구·강북구)와 태릉 두 갈래로 갈라져 물러났다.

서울에서는 그날 새벽 정부가 수원으로 옮겨 간다는 발표가 나왔다4. 피란 보따리를 인 사람들이 한강 다리와 서울역으로 몰렸고, 그 사이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는 증원 트럭이 경적을 울렸다.

*

27일 밤, 미아리.

제5사단장 이응준(60) 소장은 미아리 고개에 마지막 선을 쳤다. 제15연대 제2대대, 제20연대 제1대대,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2대대에 창동에서 밀려온 병사들을 보태니 3,000명 남짓이었다4. 고개로 오르는 큰길은 하나였다. 길을 막으면 전차가 선다. 공병과 동네 사람들이 낮 동안 참호를 파고 길에 장애물을 쌓았다.

비가 내렸다. 저녁 일곱 시께 북한군 정찰대와 전차 열 대가 고개 아래에 나타났다. 공병이 길에 묻은 폭약은 터지지 않았다. 105밀리 곡사포 세 문과 중화기가 한꺼번에 쏘자 전차들이 물러났다4. 참호 안에서 누군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같은 무렵 의정부–서울 길의 한 다리에서는 공병학교장이 급히 끌어모은 병사들과 폭약과 장대 끝에 묶은 폭탄으로 전차 네 대를 부쉈다3.

자정 무렵 빗발이 굵어졌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빗속으로 전차 몇 대가 보병을 달고 다시 왔다. 참호의 병사들이 서로를 찾는 사이 전차는 장애물을 밀어젖혔다. 28일 새벽 한 시,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의 전차들이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4.

고개 위의 병사들은 그것을 몰랐다. 그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참호를 지켰다. 전차는 이미 등 뒤의 돈암동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 북한군 보병이 참호로 밀려왔고, 그제야 병사들은 고개를 내려왔다.

*

6월 28일 낮, 서울.

북한군은 그날 한낮께 서울 한복판에 들어왔다. 거리에는 흩어진 국군 소부대들이 저마다 싸우고 있었다. 남산에서는 중대 하나가 끝까지 버텼다4. 오후에는 북한군 제4사단 제16연대도 시내로 들어왔다. 소요산에서 가장 많이 피를 흘린 그 연대였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제105전차여단이 맨 먼저 서울에 들어가 정부 청사 중앙청에 깃발을 올렸다고 말한다10. 김일성(38)은 7월에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에 「서울」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11. 서울로 오는 나흘 동안 제4사단은 219명이 전사하고 761명이 다치고 132명이 사라졌다3.

6월 28일, 김일성은 축하문을 냈다. 오늘 열한 시 삼십 분, 영웅적 인민군이 서울을 완전히 해방했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12. 인민군이 서울 한복판에 들어선 시각은 기록마다 갈린다. 오전 열한 시 삼십 분이라는 자료가 있고, 이른 오후라는 기록도 있다.

7월 5일에는 최고사령관 명령 제7호 「부대 칭호 수여에 대하여」가 나왔다. 서울로 먼저 돌입한 제3사단과 제4사단에는 서울 칭호를 주었고, 제105전차여단은 사단으로 올려 제105서울전차사단이라 불렀다12. 미군 기록은 이 칭호의 날짜를 7월 10일로 적었다. 그 이름은 지금도 쓰인다. 2024년 3월 김정은은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을 찾아, 제일 먼저 서울에 돌입해 중앙청에 공화국 깃발을 띄운 역사를 치하했다13.

6월 29일 아침, 유재흥은 한강 남쪽 둑에서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물을 건너온 제7사단 병사 1,200명이 있었다3. 사흘 전 반격을 떠난 사단에서 남은 사람이 그것이었다. 중화기를 세어 보라는 말에 부관이 둑을 따라 한 바퀴를 돌고 왔다.

기관총은 네 정이었다3.

사료 출처

1.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1권 개정판(1977), 제3장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356~370쪽 — 이를 옮겨 적은 위키백과 한국어판 「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를 따랐다. 윤춘근의 외출 중지 회고, 네 시 반 첫 보고, 허현 대위 대전차포 중대와 로켓포 열두 문, 만세교 아홉 시 사십 분, 제1대대 전사 42·부상 80, 송우리 전투(김현경·이재철·이정선·김학석·임백진, 701호 전차), 소요산 유선 통신, 창말고개 전차 두 대 파괴와 「반격」 보도, 3번 도로 공격준비사격 평가, 26일 새벽 한 시 반격 명령, 차갑준 대대와 「자일동에 가면 탄약차가 있을 것이다」 통보, 제18연대 임충식, 김풍익의 6번포(최진식 중위), 백석교 로켓 분대장과 문일수 중위. 원전 쪽수는 위키백과의 인용을 따랐고 원본과 직접 대조하지 못했다. 2. 박동찬, 「의정부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종수정 2023.5.9), encykorea.aks.ac.kr/Article/E0043386 — 북한군 4만 8천여 명, 제7사단 잔류 4,500여 명, 제3연대 예속 변경과 제25연대 미도착, 제1연대 덕정 철수(밤 열 시께, 약 70%), 제9연대 오후 다섯 시께 철수, 26일 동두천 탈환과 퇴로 차단, 26일 오후 한 시께 의정부 함락. 참고문헌은 3화 춘천 항목과 같다. 3.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미 육군 군사사센터, 1961; 1화 출처와 같은 책), 제3장 「The ROK Counterattack at Uijongbu」 「The Fall of Seoul」 — 의정부 회랑 주공(북한군 제4·3사단, 제105전차여단 제107·109전차연대 각 약 40대), 이권무의 6월 22일 작전명령, 채병덕의 반격 계획과 이형근·하우스먼의 반대, 26일 아침 제2사단의 병력(사단 사령부와 제5연대 2개 대대), 서울 방송의 전과 발표(사살 1,580, 전차 58대), 공병학교장 Oum Hong Sup 중령의 전차 네 대 파괴, 북한군 제4사단의 나흘 손실(전사 219·부상 761·실종 132), 제3사단의 서울 도심 진입 시각, 7월 10일 「서울사단」 칭호, 6월 29일 제7사단 잔여 1,200명과 기관총 네 정. 4. 위키백과 영어판, 「First Battle of Seoul」(군사편찬연구소 2000 『한국전쟁』 상권 인용) — 제5연대 지휘부 공백, 제1연대 제3대대 하패리 삼십 분, 27일 창동 열 시 전차·자주포 약 40대와 제2교도대대 포격, 미아리 방어선(이응준, 약 3,000명, 저녁 일곱 시 전차 열 대 격퇴, 28일 새벽 한 시 돌파), 정부 수원 이전 발표, 이형근 해임과 유재흥의 의정부 지구 지휘, 창동의 제25연대와 여러 연대 잔병 재편(대대 여섯 개 규모), 남산의 중대. 5. 경기일보(2026.6.27), 「적 전차 몸으로 막아선 6·25 영웅들」 — 축석령 결사대 11명, 북한군 제3사단 전차.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풍익」(encykorea.aks.ac.kr/Article/E0010907) — 김풍익 인물 항목. 7. 위키백과 한국어판, 「장세풍」 — 1922년생, 육사 5기, 제2교도대대 2포대장. 8. 동아일보(1980.6.25), 「6·25 산화 김풍익 중령 동상 건립」 — 자일리 서남쪽 1킬로미터, 궤도 파괴 후 논바닥. 9. 인천광역시, 「6월의 호국인물 김풍익 육군 중령」(전쟁기념관 발표), incheon.go.kr/IC010305/1421646 — 오십 미터, 운전병 증언 「대한민국 만세」. 10. 조선중앙통신(2024.3.25) 보도, 뉴데일리(2024.3.25) 재인용 — 제105전차여단의 서울 첫 진입과 중앙청 깃발. 북한의 주장이다. 11. 위키백과 한국어판, 「류경수」 — 「서울」 칭호를 7월 5일로 적음. 애플먼은 7월 10일로 적어 본문은 「7월」로만 썼다. 12. 김일성, 서울 해방 축하문(1950.6.28) 및 최고사령관 명령 제7호 「부대 칭호 수여에 대하여」(1950.7.5), 『Kim Il Sung Works』 vol. 6, 25~27쪽(1981) — 「오늘 11시 30분 영웅적 인민군이 서울을 완전히 해방했다」, 제3·4사단 「서울」 칭호와 제105전차여단의 사단 승격. 북한 쪽 발표이며 날짜는 3·11번 출처와 갈린다. 13. 조선중앙통신 2024.3 보도 — NK News, 「Kim Jong Un lauds tank unit’s history of invading Seoul」(2024.3, nknews.org/2024/03/kim-jong-un-lauds-tank-units-history-of-invading-seoul-in-headquarters-visit/); 뉴데일리 2024.3.25 재인용. 조선중앙통신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이권무 1914(위키백과 한국어·영어판), 이상근 1922, 채병덕 1916, 유재흥 1921, 이형근 1920, 함준호 1921(위키백과 한국어판 「함준호 (군인)」), 임충식 1922, 김풍익 1921(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전쟁기념관), 장세풍 1922, 이응준 1890, 김일성 1912(위키백과 한국어판). 윤춘근·전순기·허현·이의명·차갑준·이정도·문일수·하우스먼 등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공격 시각은 포천 정면 세 시 사십 분께(1977 전사), 의정부 회랑 전체 다섯 시 삼십 분께(애플먼). 김풍익의 전사 시각은 동아일보 1980이 오전 아홉 시 사십 분, 1977 전사 서술 순서로는 정오 무렵 이후로 읽혀 본문은 「오전」으로만 적었다. 금오리 위치는 백과사전 「의정부 북방 4킬로미터」, 동아일보 1980 「25킬로미터」(오기로 보인다). 의정부 함락은 백과사전·전사 오후 한 시께, 애플먼은 「저녁까지」 두 사단이 들어왔다고 적었다. 함준호의 전사는 영어판 위키백과(군사편찬연구소 2000)가 창동 전투 중 총격, 한국어판이 우이동으로 가던 중 북한군 정찰대에 사살로 적는다. 송우리의 차량 수는 전사 인용에 「159여 대」로 남아 있어 본문은 「백오십 대 남짓」으로 적었다. 북한군이 서울 도심에 든 시각은 오전 열한 시 삼십 분(1970 자료)과 이른 오후(애플먼)로 갈린다. [확인 못 함] 공병학교장 Oum Hong Sup 중령의 한글 이름을 확인하지 못해 본문에서 이름을 적지 않았다. 다리의 위치도 애플먼은 「의정부–서울 길의 지뢰 매설 다리」로만 적었고 날짜는 27일 밤 무렵으로 읽힌다. 백석교 로켓 분대장과 6번포 운전병의 이름은 기록에서 찾지 못했다. [재구성] 모든 대화(윤춘근과 대대장, 전순기의 전화, 허현의 사격 지시, 김현경의 구령, 채병덕·이형근의 문답, 김풍익의 명령, 이권무 지휘소 보고, 트럭 짐칸의 농담)와 몸짓, 인물의 생각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윤춘근의 외출 중지는 그의 회고를 줄여 옮겼다. 채병덕의 「전차는 육탄으로 깬다」는 전사 서술(육탄 공격으로 파괴하라고 강조)을 대사로 옮긴 것이다. 김풍익 포반이 포를 트럭에 걸고 나간 방식, 포가 「200미터·100미터」를 지나는 장면, 유재흥의 부관이 기관총을 세는 장면은 기록에 없는 묘사다. 북한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

4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의정부 전투 — 서울로 열린 길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