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15,510자)
백마고지 전투 — 산이 사라진 열흘
1950 · 네오
1952년 10월 3일 금요일, 강원도 철원(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일대) 서쪽, 국군 제9사단 사령부.
천막 안으로 끌려온 중국 군인은 군복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 있었다. 통역이 이름을 묻자 그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구중자오(谷中蛟), 중국인민지원군 제38군 제114사단 제340연대 제7중대의 문화교원이었다1. 병사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중대에서는 부소대장쯤으로 쳤다2. 그는 제114사단이 두 연대로 395고지를 친다고 했다. 날짜는 10월 5일이라고 했다1.
“왜 넘어왔나?”
통역이 묻자 구중자오는 잠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중국 쪽 글 하나는 그가 싸움터에 나가겠다는 청원서를 여러 번 썼다가 정말 첫 돌격 중대에 뽑히자 마음이 바뀌었다고 전한다3.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미 제8군은 그날 심문 결과를 받았고, 다른 정보도 그 말과 맞았다4. 395고지는 철원 읍내에서 서북쪽으로 팔 킬로미터쯤, 숲 덮인 산줄기가 삼 킬로미터 남짓 이어지다 솟은 꼭대기였다. 고지 남쪽 발치로 역곡천이 흘렀고, 그 너머로 철원평야와 서울로 가는 길이 펼쳐졌다. 그 고지를 내주면 미 제9군단은 역곡천 남쪽 높은 땅으로 물러나야 했고, 철원의 길도 함께 내줘야 했다4.
사단장 김종오(29) 소장은 지도 위의 395라는 숫자에 손가락을 얹었다. 열하루 전인 9월 22일, 그는 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연대를, 오른쪽 철원평야에 김봉철 대령의 제29연대를 세우고 이주일(32) 대령의 제28연대를 예비로 뒤에 두었다5. 이제 고지 위에 두 대대를 올렸고, 한 연대와 한 대대를 언제든 뛰어갈 수 있게 묶어 두었다. 미 제9군단이 보낸 전차와 고사포가 고지 양옆 골짜기 어귀를 겨누었다. 밤에 켤 탐조등과 조명탄이 나뉘었고, 부르면 하늘에서 조명탄을 떨어뜨려 줄 비행기도 한 대 붙었다. 미 제5공군은 고지 북쪽 중공군 포진지에 폭탄을 더 떨어뜨렸다4.
“우리 포는 얼마나 됩니까?”
포병 참모가 손가락을 꼽았다. 사단 포병은 유탄포 세 대대와 중박격포 한 중대, 전차 한 중대뿐이었다. 미 제9군단이 유탄포 세 대대와 미 제73전차대대의 C중대를 더 붙였고, 국군 포병 대대들도 고지 뒤로 들어왔다1.
“그래도 모자라면?”
“그때는 비행기를 부릅니다. 하늘은 우리 편이니까요.”
고지 위의 병사들은 밤새 삽질을 했다. 엄폐호 백오십 개를 하룻밤에 팠고, 교통호를 사람 키보다 깊이 팠다. 진지 앞 철조망은 세 겹에서 일곱 겹이 되었고, 대대와 중대, 소대를 잇는 전화선은 모두 땅에 묻었다1.
참모 하나가 포로가 앉았던 빈 의자를 보며 말했다.
“저 사람 말대로 오면 우리는 잔칫상 차려 놓고 손님 기다리는 셈입니다.”
“거짓말이면?”
“그럼 잔칫상은 우리가 먹지요. 사단장님은 그냥 한 끼 잘 드신 걸로 치시면 됩니다.”
김종오는 웃지 않았다. 열일곱 달 전 강원도 인제 현리에서 제9사단은 길이 끊긴 채 산을 넘어 흩어졌고, 그때 이웃 제3사단을 이끌던 사람이 김종오였다. 그 뒤 제9사단은 1951년 8월부터 여덟 주 동안 미 제1군단이 맡은 야전 훈련을 받았다6. 다시 무너지면 사단 이름을 지울 수도 있는 자리였다.
*
1952년 10월 5일 일요일 밤, 395고지 북쪽, 중국인민지원군 제38군 지휘소.
군장 장융후이(江擁輝·33)는 석 달 전 군장 자리에 앉았다7. 제114사단은 이 공격을 위해 한 달 넘게 훈련했다. 낮에는 땅에 엎드려 꼼짝하지 않는 법을 익혔고, 밤에는 소리 없이 비탈을 기어오르는 법을 익혔다3. 그런데 그 훈련을 다 아는 사람이 저쪽으로 넘어갔다.
지원군 총부는 공격을 할지 말지 제38군이 정하라고 했다2. 장융후이는 계획을 고치자고 위로 올렸다. 제3병단을 맡은 왕진산(王近山·35)이 그것을 물리쳤다1. 제114사단의 한 대대장은 그날 병단 사령관이 했다는 말을 훗날 집안 조카손자에게 전했다8.
“소 잡는 큰 칼을 들고 닭 한 마리 잡으면서 왜 떨어? 앞잡이 하나 달아난 게 무슨 대수라고! 쳐!”
그 대대장도 이길 줄 알았다. 그가 겪은 한국군은 한 중대가 쫓으면 천 명이 산을 뛰어 흩어지는 군대였다. 그는 제38군이 가진 대포를 거의 다 제114사단 뒤에 모았다고 들었다8. 이백오십 문 가까운 대포 가운데에는 트럭 위에 레일을 줄줄이 얹은 카추샤 로켓포도 열다섯 문이 있다고 했다. 보병의 총도 모두 소련제로 바뀌었고, 먹을 것도 넉넉했다8. 그의 대대와 이웃 대대, 여섯 중대 팔백여 명이 앞장설 돌격대였다8. 대대에는 후난성에서 온 열여덟 살 통신원이 있었다. 대대장이 어디를 가든 그 통신원이 전화선을 끌고 뒤따랐다.
돌격대는 그날 한밤중 고지 앞 골짜기로 기어 들어가 엎드렸다1. 다음 날 해가 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명령이었다. 첫 돌격 중대가 엎드린 골짜기에는 낮 동안 기관총 탄이 쏟아졌고, 포탄과 소이탄이 떨어져 몇이 화상을 입었다2.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불붙은 소매를 흙에 문질러 끄는 소리만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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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6일 월요일 저녁 일곱 시 십오 분, 395고지 북쪽 전초진지 화랑고지, 국군 제30연대 제3대대 제11중대.
소대장 이성덕(21) 소위는 그해 1월 갑종간부후보생 제9기로 임관했다9. 산 너머 북쪽에서 포성이 한꺼번에 울렸고, 곧 꽹과리 소리가 비탈을 타고 올라왔다10. 중공군은 그 밤 산포·야포·유탄포 백열여섯 문과 자주포 네 대, 전차 여덟 대를 뒤에 두고 네 중대를 395고지로 밀어 올렸다1. 제340연대의 두 대대였다4.
“소대장님, 저 꽹과리는 왜 칩니까?”
“우리 겁주라고 치는 거다. 겁나면 너도 소리 질러. 저쪽이 더 크게 치면 우리가 더 크게 지르면 된다.”
중공군 제340연대의 분대장 리화윈(李華雲)은 무너진 국군 참호를 넘어 주봉 쪽으로 내달렸다. 그는 주봉 삼백 미터 앞의 낮은 봉우리까지 갔다. 거기서 기관총 여덟 정이 한꺼번에 불을 뿜었고, 그의 돌격 중대는 그 자리에 엎드려 국군과 마주 보았다2. 중공군은 세 번 철조망 앞까지 올라왔다가 세 번 굴러 내려갔다4. 산 아래에서 꼭대기 진지까지 오르는 동안 그 대대장의 대대에서만 일흔두 명이 쓰러졌다. 후난에서 온 열여덟 살 통신원도 그 안에 있었다8. 대대장은 전화선 끝을 잡고 한동안 누구를 부를지 몰랐다.
같은 저녁 북쪽 십일 킬로미터쯤의 봉래호(현 북한 강원도 평강군 봉래리) 둑에서 수문이 열렸다. 역곡천 물이 몇 피트 불었지만 국군 증원 부대의 발을 묶을 만큼은 아니었다4. 골짜기 건너 281고지(화살머리고지, 현 철원군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 한 대대의 공격을 받았다4. 중공군 제113사단은 포병 열다섯 중대의 엄호를 받으며 그 고지로 세 중대와 한 소대를 올려 보냈다1. 밤이 끝나기 전에 여섯 중대가 더 붙었지만 프랑스 대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9일과 12일의 공격도 같은 꼴로 끝났다4. 미 제2사단의 손발을 묶어 두려던 견제 공격은 제 몫을 했지만 값이 비쌌다.
이튿날 7일 중공군이 다시 왔다. 제11중대는 탄약도 물도 바닥난 채 둘러싸였다. 이성덕은 소대원들 사이를 오가며 고함을 질렀고, 그러다 날아든 포탄 파편에 머리를 맞았다9. 제30연대는 그날까지 네 번의 공격을 막았다9. 그 밤 중공군 예비 제342연대가 들어와 제30연대를 주봉에서 밀어냈고, 제28연대가 두 시간 싸워 고지를 되찾았다1. 소위 이성덕은 중위로 한 계급 올려졌고, 그해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일흔두 해 뒤인 2024년 겨울, 국가보훈부는 그를 1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골랐다9.
*
1952년 10월 8일 수요일 밤 열한 시, 395고지 남쪽 비탈, 국군 제28연대 제3대대.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중공군은 그 안개 속으로 제112사단의 제334연대를 밀어 넣었고, 제30연대는 여덟 시 십 분 고지를 내줬다1. 이제 최창용 중령의 제3대대가 밤 공격에 나설 차례였다5. 제9중대장 황외원은 대원들을 비탈 아래에 엎드리게 했다10.
통신병 용재화는 무전기를 등에 지고 중대장 뒤에 붙었다. 국군 포탄이 머리 위를 지나 고지 꼭대기에 떨어졌다. 그런데 포성이 잠깐 끊기자 그는 오히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포가 조용하면 그다음에는 사람이 왔다10.
“중대장님, 조용합니다.”
“조용한 게 더 무섭지? 나도 그래. 그러니까 지금 올라간다.”
고지 위에서 막대기 끝에 매단 수류탄이 날아왔다. 중공군은 수류탄을 멀리 던지려고 나무 막대기를 이어 붙였다10. 비탈 아래에서는 꽹과리가 다시 울렸다. 그 소리가 무섭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물러난 사람은 없었다고 참전 용사 김수진은 훗날 말했다10. 제3대대는 밤 열한 시에 공격을 시작했고, 여덟 시간 싸운 끝에 고지를 다시 잡았다1. 중공군 포로 하나는 뒤에 이틀 싸움이 지나자 많은 중대가 스무 명도 안 남았다고 말했다. 중공군 포대는 하루 사천오백 발 꼴로 고지에 포탄을 퍼부었다4.
후방 사단 수용선에는 새 얼굴들이 트럭에서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고지에서 밀려 내려온 병사들을 뒤에서 거두어 다시 반격 부대로 짜게 하고, 부산과 춘천의 훈련소에서 신병을 끌어와 제9사단에 채워 넣게 했다1. 신병 하나가 철모 끈을 매다 말고 물었다.
“어느 산으로 갑니까?”
“저기 하얀 산.”
“산이 왜 하얗습니까?”
“가 보면 안다.”
9일에는 제112사단의 다른 연대인 제335연대가 고지 북쪽 집결지에서 미 제5공군 폭격을 맞고 투입이 늦어졌다4. 그날 밤 국군 포 여든한 문이 일만칠천 발을 쏘아 올리는 동안 제28연대의 두 대대가 다시 꼭대기의 중공군을 밀어냈다1. 제30연대와 제28연대는 사흘 만에 둘 다 다시 꾸려야 할 만큼 깎여 나갔고, 김종오는 김봉철의 제29연대를 고지로 돌렸다5. 10일 새벽 네 시 반 중공군이 꼭대기를 잡았고, 여섯 시 반 제29연대가 되찾았고, 두 시간 뒤 다시 내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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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11일 토요일 오전, 395고지 정상 아래, 국군 제29연대 제2대대.
대대장 김경진(30) 소령은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1946년 군에 들어간 사람이었다11. 이대철 소령의 제1대대가 앞에서 막히자 김경진의 제2대대가 뒤를 받쳤다5.
“대대장님, 정상까지 이십 미터입니다.”
“이십 미터면 다 왔다. 내가 먼저 간다.”
박격포탄 한 발이 그 이십 미터 안에 떨어졌다11. 두 대대는 고지를 되찾았고, 김경진은 그 꼭대기를 밟지 못했다. 그는 이 싸움에서 죽은 국군 장교 가운데 계급이 가장 높았다1.
그날 밤 중공군 제113사단의 제339연대가 들어와 한밤중에 다시 고지를 가져갔다1. 산 북쪽의 제114사단 대대장은 한 번 공격을 물리친 뒤 대원들에게 쫓아가라고 명령했다가 국군에게 둘러싸였다. 총알이 떨어지자 대원들은 대검과 개머리판으로 싸웠다. 마지막 수류탄을 끌어안고 터뜨린 병사도 있었다. 포위를 뚫고 나왔을 때 사백여 명이던 대대는 백여 명이 남았고, 그 절반이 다쳐 있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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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12일 일요일 오후 한 시 무렵, 395고지 주봉 북쪽 비탈, 국군 제30연대 제1대대 제1중대.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넘어 다시 앞으로 나섰다4. 제1대대는 아침부터 다섯 시간째 비탈에 매달려 있었다1. 주봉 바로 아래 중공군의 기관총 진지가 중대의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돌격이 열 번 꺾였다.
제3소대장 강승우(20) 소위는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면 시흥리(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서 자랐다. 1951년 12월 부산 동래의 육군보병학교를 마치고 소위 계급장을 단 지 열 달이었다11. 제1소대 소총수 안영권(26)은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현 김제시 금산면)에서 왔고 그해 2월에 입대했다. 오규봉(22)은 충청남도 천원군 성환면(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4월에 입대했다11. 둘 다 군복을 입은 지 일 년이 안 되었다.
결사대를 뽑는다는 말에 세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티엔티 폭약과 수류탄, 박격포탄을 몸에 묶었다12.
“포탄을 몸에 묶으면 무거워서 못 뜁니다.”
“그럼 기어가. 기관총 쪽으로만 기어가면 된다.”
오규봉이 끈을 한 번 더 조였다. 안영권은 고향 쪽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비탈로 몸을 낮췄다. 강승우가 앞장섰다. 세 사람은 기관총 진지 쪽으로 올라갔고,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중공군 진지 세 곳이 무너졌고, 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13.
기관총이 멈춘 비탈로 제1중대가 일어섰다. 중대원들은 방금 세 사람이 엎드려 있던 흙을 밟고 올라갔다. 오후 한 시 이십 분 무렵 열한 번째 돌격에서 국군은 주봉을 되찾았고, 그 밤을 지켰다14. 이듬해 7월 1일 정부는 안영권과 오규봉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강승우에게는 중위 계급과 을지무공훈장, 미국의 은성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11. 1991년 고향 제주에 그의 동상이 섰다11. 2023년 6월에는 오규봉의 고향 천안시가 그를 기리는 자리를 열었다13.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안영권도 스물여덟 생일을 한 달 남겨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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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14일 화요일 밤, 395고지 북쪽, 중국인민지원군 제38군 지휘소.
그날 아침 동쪽 김화(현 철원군 김화읍) 쪽에서 미 제7사단과 국군 제2사단이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치기 시작했다. 중국 쪽이 상감령 전투라 부르는 싸움이었다1. 13일에는 국군 제28연대가 비행기 백마흔한 대의 엄호를 받으며 북쪽 능선을 쳤다가 여섯 시간 만에 주봉으로 돌아왔고, 14일 오전 열 시 이십이 분 제29연대가 고지 둘레의 중공군을 밀어냈다1.
지휘소 탁자 위에 각 연대의 보고가 쌓였다. 제38군은 열세 대대와 두 중대를 밀어 넣었고, 싸움은 이백한 시간째였다2. 미 제3사단까지 대포와 전차를 끌고 철원 남쪽으로 올라왔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장융후이는 이대로 가면 사람만 더 잃는다고 보고 물러나게 해 달라고 위에 청했다. 닷새 전 공격을 밀어붙였던 왕진산이 이번에는 그 청을 받아들였다2.
“주봉은 아직 못 잡았습니다.”
“주봉 말고 다른 고지는 우리가 쥐고 있다. 그것도 놓고 나온다.”
장융후이는 그 밤 395고지 쟁탈을 그만두라고 명령했다. 제38군은 15일 새벽 세 시까지 백마산에서 모두 빠져나갔다2. 중국 쪽 기록은 그 고지를 394.8고지, 또는 백마산이라 불렀다1.
제38군이 위로 올린 숫자는 죽은 사람 1,748명, 다친 사람 3,062명, 그 밖에 562명이었다15. 백마산과 281고지를 합치면 6,871명이었다15. 지원군 사령부의 장전(張震)이 펑더화이와 녜룽전에게 올린 보고는 여섯 연대가 사상자 때문에 싸울 힘을 잃었다고 적었다15. 장융후이는 회고록에 미군·국군·프랑스군 9,860명을 쓰러뜨렸다고 적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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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15일 수요일 새벽, 395고지 꼭대기, 국군 제28연대.
제28연대가 새벽에 주봉을 완전히 잡았고, 제29연대가 북쪽 전초진지를 되찾았다5. 정상에 올라선 병사들 발밑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흙은 몇 번이고 뒤집혀 허옇게 드러났고, 고지 높이가 일 미터쯤 낮아졌다는 말이 돌았다10.
열흘 동안 미 제5공군은 낮에 669번, 밤에 76번 날아와 폭탄 2,700발과 네이팜탄 358발을 떨어뜨렸다. 미 제9군단 포병만 185,000발을 쏘았고, 중공군은 55,000발 넘게 쏘았다4. 국군 쪽 집계로는 두 편이 쏜 포탄이 27만 4,954발이었다5. 병사들 사이에서는 고지 주인이 열두 번 바뀌었다는 말이 돌았다10. 열두 번 붙어서 주인이 일곱 번 바뀌었다는 셈도 있다16.
제9사단의 손실은 3,422명이었다. 죽은 사람 505명, 다친 사람 2,562명, 실종 391명이었다1. 미 육군 전사는 3,500명이 넘는다고 적었고, 제38군의 아홉 연대 가운데 일곱 연대가 들어와 1만 명 가까이 잃었다고 보았다4.
AP 통신 기자들은 전투가 한창일 때부터 이 산을 ‘White Horse Hill’이라고 불렀고, 국내 신문도 10월 8일부터 ‘백마고지’라고 쓰기 시작했다5.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벗겨진 산등성이가 누운 흰 말 같다는 말도 함께 돌았다10. 제9사단은 그 뒤로 백마부대라 불렸다16. 밴 플리트 미 제8군 사령관은 제9사단이 포화 속에서 보여 준 것을 높이 칭찬했다4. 김종오는 싸움이 끝난 뒤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1. 트럭에서 내리며 산이 왜 하얗냐고 묻던 신병들은 그 이름이 붙기 전에 이미 답을 보았다.
같은 날 북쪽으로 물러난 제114사단의 그 대대장은 남은 백여 명을 세어 보았다. 그는 뒤에 국군이 그 고지에 구만 명 가까이를 갈아 넣었는데 자기들은 그것을 몰랐다고 들었다. 진지 앞에 쌓인 국군 시신만 칠천 구가 넘었다고도 믿었다8. 그 숫자들이 맞든 틀리든, 그의 대대에 남은 사람은 백여 명이었다. 그는 그 뒤 해마다 10월이 오면 베이징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꽃을 놓았고, 때로는 무릎을 꿇었다. 후난과 광시를 찾아다니며 대원들의 집에 들러 고개를 숙였다8.
사료 출처
1. 중국어 위키백과, 「白馬山之戰」(2026년 10월 열람) — 구중자오의 소속(제38군 제114사단 제340연대 제7중대 문화교원)과 「10월 5일, 두 연대」 진술, 10월 5일 계획 변경 건의와 왕진산의 거부, 340연대 돌격대 잠복, 10월 3~4일 엄폐호 150개·교통호·철조망 3겹에서 7겹·전화선 매설, 6일 116문·자주포 4대·전차 8대, 7일 제342연대 투입과 제28연대의 두 시간 탈환, 8일 안개와 제334연대 투입·08시 10분 실함·제28연대 23시 역습과 여덟 시간 싸움, 9일 밤 포 81문·17,000발과 제28연대 두 대대의 역습, 이승만의 수용선 설치와 부산·춘천 신병 보충, 10일 04시 30분·06시 30분·두 시간 뒤의 쟁탈, 11일 김경진이 국군 전사 장교 중 최고 계급, 11일 밤 제339연대, 12일 다섯 시간 공격, 13일 141대 근접 지원, 14일 10시 22분 제29연대와 상감령 전투 시작, 국군 전후 보고 3,422명(505·2,562·391), 394.8고지라는 중국 쪽 이름, 사단 포병 편제(유탄포 3개 대대·중박격포 1개 중대·전차 1개 중대)와 미 제9군단의 유탄포 3개 대대·미 제73전차대대 C중대 증원, 281고지에 제113사단 3개 중대 1개 소대·포병 15개 중대, 김종오의 육군사관학교 교장 전임. 이 항목의 「경과」 절은 출처 표시가 없다는 경고가 붙어 있다. 인포박스는 군사과학원 『抗美援朝战争史』(수정판, 2011) 하권과 Chae Han Kook 외 『The Korean War』 3권(2001) 464쪽을 인용한다. 2. 陈冠任, 「抗美援朝的白马山之战:一文化教员叛变,令王牌38军激战九天九夜退出」, 搜狐(2026년 10월 열람), sohu.com/a/243016171_239401 — 문화교원이 부소대장급, 총부가 공격 여부를 제38군에 맡김, 장융후이의 「还是打」, 첫 돌격 중대 잠복 중 기관총·포격·소이탄과 화상, 340연대 분대장 리화윈이 주봉 300미터 앞 봉우리까지 쫓아가 기관총 여덟 정에 막힘, 13개 대대와 2개 중대·201시간, 15일 03시 철수, 장융후이 회고록의 「9,860명」. 이 글은 사건 날짜를 11월로 잘못 적은 대목이 있다, 미 제3사단의 증원과 장융후이의 철수 요청, 왕진산의 철수 동의. 3. 「志愿军38军兵败白马山,6700余人白白牺牲,此战发生了什么」, 网易(2026년 10월 열람), 163.com/dy/article/I8BBIV6A0553ETNP.html — 제114사단의 한 달 넘는 훈련(「隐身人」), 구중자오가 청원서를 여러 번 쓰다 첫 돌격 중대에 뽑힌 일과 심문 때 했다는 말 「我不想死」(미군이 넘겨받은 심문 보고서를 인용했다고 하나 서지는 밝히지 않음). 4.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미 육군 군사사편찬실, 1966) 제13장 「Stalemate」의 「The Battle for White Horse」 절 303~307쪽, army.mil 옛 게재본(web.archive.org/web/2007/http://www.army.mil/cmh-pg/books/korea/truce/ch13.htm) — 10월 3일 탈주병 심문, 철원 서북쪽 5마일·2마일 산줄기·역곡천, 고지 상실 시 제9군단 철수, 두 대대 배치와 예비, 전차·고사포·탐조등·조명기, 봉래호 수문(7마일 북쪽, 수위 몇 피트 상승, 장애는 되지 않음), 281고지 프랑스 대대, 제340연대 두 대대의 세 차례 공격, 「스무 명도 안 남은 중대」 포로 진술, 하루 4,500발, 9일 제335연대 피폭, 12일 제30연대의 초월 공격, 국군 손실 3,500명 이상, 일곱 연대·1만 명 가까운 손실, 출격 669·76회, 폭탄 2,700·네이팜 358, 제9군단 포탄 185,000발, 중공군 포탄 55,000발 이상, 9·12일 281고지 재공격, 견제 공격이 효과적이었으나 비쌌다는 평가, 밴 플리트의 칭찬. 5. 한국어 위키백과, 「백마고지 전투」(2026년 10월 열람, 온창일 외 『6.25전쟁 60대 전투』 2010 참고) — 9월 22일 배치(제30연대 임익순·제29연대 김봉철·제28연대 이주일), 8일 최창용 중령의 제28연대 제3대대 역습, 제29연대 투입 검토, 11일 이대철 소령의 제1대대와 김경진의 제2대대, 15일 새벽 제28연대의 주봉 장악과 제29연대의 전초진지 탈환, 포탄 합계 274,954발, AP 통신의 「White Horse Hill」과 국내 신문의 10월 8일 첫 사용. 6. 김대호(강원일보), 「[한국전쟁 정전 70년] 최후의 전쟁, 백마고지 전투」, 전북일보 2023.5.22, jjan.kr/article/20230522580339 — 1951년 8월부터 8주간 미 제1군단이 주관한 야전 훈련. 7. 중국어 위키백과, 「江拥辉」(2026년 10월 열람) — 1917년 12월 12일생, 1952년 7월 제38군 군장 취임. 8. 「一个老战士心中永远的痛:抗美援朝白马山战役」, 中华网军事 2005.12.23, web.archive.org(2006.1.16 보관)/military.china.com/zh_cn/history2/06/11027560/20051223/12973357.html — 제114사단 대대장(필자의 숙조부, 이름 밝히지 않음)의 이야기: 왕진산이 장융후이에게 했다는 말, 두 대대 여섯 중대 800여 명 돌격대, 후난 출신 18세 통신원의 전사, 추격하다 포위되어 400여 명이 100여 명으로, 해마다 인민영웅기념비 헌화와 무릎 꿇음, 후난·광시 유족 방문, 제38군 대포 250여 문과 카추샤 15문, 소련제 보병 무기와 넉넉한 보급, 국군을 얕본 일, 국군이 9만 명 가까이 투입했고 진지 앞 국군 시신이 7,000구 넘었다는 그의 믿음. 9. 류재민, 「“중공군 막다 전사”…이순신만큼 용감했던 스물셋 청년,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서울신문 2024.11.30, m.seoul.co.kr/news/2024/11/30/20241130500001 — 이성덕(1929년 1월생) 갑종간부 제9기, 1952년 1월 5일 임관, 제30연대 제3대대 제11중대 소대장, 화랑고지 방어, 7일 포위와 탄약·식수 부족, 머리에 포탄 파편, 제30연대가 다음 날까지 네 차례 공격을 막음, 중위 추서와 1952년 을지무공훈장, 국가보훈부의 2024년 12월 6·25전쟁영웅 선정. 10. 연합뉴스, 「27만발 포탄 비에 산등성이 하얗게 벗겨진 ‘백마고지’」, 서울신문 게재 2010.4.12, m.seoul.co.kr/news/2010/04/12/20100412800058 — 꽹과리, 고지가 1미터 낮아졌다는 말, 흰 말 이름의 유래, 제28연대 제9중대장 황외원, 통신병 용재화의 「포 소리가 안 들릴 때 더 불안」, 박왕서의 막대기 수류탄 증언, 참전 용사 김수진의 「꽹과리가 두려웠지만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11. 한국어 위키백과, 「김경진 (군인)」「강승우」「안영권」「오규봉」(2026년 10월 열람) — 김경진 1920년 의성 출생·1946년 입대·제29연대 제2대대장·정상 20미터 앞 박격포탄에 전사, 강승우 1930년 성산 시흥리 출생·1951년 12월 8일 임관·제30연대 제1대대 제1중대 제3소대장, 안영권 1924년 김제 금산면 출생·1952년 2월 27일 입대, 오규봉 1928년 성환면 출생·성환중학교 중퇴·1952년 4월 11일 입대, 둘 다 제30연대 제1중대 제1소대 소총수. 안영권·오규봉 1953년 7월 1일 을지무공훈장 추서, 강승우 중위 특진과 을지무공훈장·미국 은성무공훈장 추서 강승우 동상 1991년 제주 건립. 12. 이학구, 「백마고지 육탄3용사 기념비를 찾아서」, 한교닷컴 2007.4.24, hangyo.com/mobile/article.html?no=54394 — 김제 안영권 기념비 비문: 10월 12일 최후 탈환 작전에 결사대로 자원, TNT·수류탄·박격포탄을 몸에 묶고 토치카에 뛰어듦. 13. 이진호, 「천안시, 백마고지 영웅 고(故) 오규봉 하사 추모」, 뉴스서울 2023.6.9, newsseoul.co.kr/news/view/1065576018183763 — 강승위(강승우) 소위·안영권 하사와 함께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들고 돌격, 진지 세 곳 파괴, 2023년 6월 9일 천안시의 추모. 14.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인문학 위키, 「백마고지삼용사동상」(2026년 10월 열람), dh.aks.ac.kr/Edu/wiki/index.php/백마고지삼용사동상 — 10월 12일 13시 20분경 3용사의 11차 돌격으로 주봉 탈환과 야간 방어, 제30연대 제1대대 제1중대 소속. 15. 「1952年秋季反击作战:38军2场不该败的败仗,如何拖了志愿军后腿?」, 网易(2026년 10월 열람), m.163.com/dy/article/J8FEA9J10553AKHU.html — 제38군 394.8고지 손실 5,372명(사망 1,748·부상 3,062·기타 562), 두 고지 합계 6,871명, 장전의 보고 「6개 연대가 사상으로 전투력 상실」(펑더화이·녜룽전에게, 마오쩌둥에게도 보고). 1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마고지 전투」, encykorea.aks.ac.kr/Article/E0022107 — 열흘 동안 12차례 쟁탈전과 일곱 차례 주인 바뀜, 제9사단의 백마부대 이름.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김종오 1921년생(3화 [나이]와 같은 근거), 이주일 1918년생(한국어 위키백과 「이주일 (군인)」), 장융후이 1917년생(중국어 위키백과 「江拥辉」), 왕진산 1915년생(중국어 위키백과 「王近山」), 이성덕 1929년생(서울신문 2024.11.30), 김경진 1920년생, 강승우 1930년생, 안영권 1924년생, 오규봉 1928년생(이상 한국어 위키백과 인물 항목). 구중자오, 임익순, 김봉철, 최창용, 이대철, 황외원, 용재화, 박왕서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황외원·용재화는 2010년 기사에 각각 79세·78세로 나온다. [자료 충돌] 구중자오가 넘어온 날 — 미 육군 전사와 중국어 위키백과는 10월 3일, 陈冠任의 글은 11월 2일로 적었다. 陈冠任의 글은 전투 날짜 전체를 11월로 적어 본문은 10월 3일을 따랐다. 중국어 위키백과는 그를 「사로잡았다」고, 중국 쪽 대부분의 글은 「투항했다」고 적는다. [자료 충돌] 공격 시각 — 중국어 위키백과는 6일 18시 공격 개시·19시 15분 교전, 연합뉴스는 오후 7시 15분, 전북일보는 「6일 새벽」, 미 육군 전사는 6일로만 적었다. 본문은 저녁 일곱 시 십오 분을 따랐다. [자료 충돌] 봉래호 — 미 육군 전사는 수문을 열었고 물이 몇 피트 불었으나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한국어 위키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둑(수문)을 폭파해 역곡천을 범람시켰고 제3대대 증원에 차질이 났다고 적었다. 거리도 7마일(미 육군 전사)과 약 5킬로미터(한국민족문화대백과)로 다르다. 본문은 미 육군 전사를 따랐다. [자료 충돌] 주인이 바뀐 횟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2차례 쟁탈에 일곱 번, 연합뉴스는 열두 번, 중국어 위키백과와 다른 기사들은 24번으로 적었다. 본문에는 열두 번과 일곱 번을 함께 적었다. [자료 충돌] 사상자 — 국군 제9사단 3,422명(국군 전후 보고), 3,500명 이상(미 육군 전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 중공군은 5,372명(제38군 보고), 9,300명(『抗美援朝战争史』를 인용한 중국어 위키백과 인포박스, 같은 자리의 사망·부상·실종 합계는 5,372명), 6,700여 명(중국 쪽 회고와 기사), 1만 명 가까이(미 육군 전사), 14,332명(국군 전후 보고). 중국 쪽은 국군 손실을 9,400여 명, 장융후이 회고록은 9,860명으로 적었다. 본문에는 중국 쪽 자기 보고와 국군 자기 보고, 미 육군 전사를 적었다. [자료 충돌] 포탄 수 — 미 육군 전사는 중공군 55,000발 이상과 제9군단 포병 185,000발, 한국어 위키백과는 국군 219,954발·중공군 55,000발·합계 274,954발, 전북일보는 국군·유엔군 22만여 발·합계 28만여 발로 적었다. [자료 충돌] 3용사의 계급과 이름 — 강승우는 소위(전사 당시)와 중위(추서), 안영권·오규봉은 하사와 일병·일등병으로 자료마다 다르고, 뉴스서울은 강승우를 「강승위」로 적었다. 본문은 계급을 강승우의 소위만 쓰고 두 사람은 「소총수」로 적었다. 진지를 무너뜨린 수는 뉴스서울의 「세 곳」을 따랐다. [자료 충돌] 제114사단 대대장의 이야기(조카손자의 글)는 국군이 9만 명 가까이 들어왔고 진지 앞 국군 시신이 7,000구가 넘었다고 적었다. 국군 전후 보고의 제9사단 손실 3,422명, 투입 병력 약 18,000명(중국어 위키백과)과 크게 다르다. 본문에는 그가 들은 말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이성덕의 전초진지 — 서울신문은 「화랑고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5일 제29연대가 되찾은 곳을 「낙타능선의 전초진지」로 적었다. 두 이름이 같은 곳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재구성] 구중자오가 단추를 잠근 모습과 바닥을 내려다본 몸짓(「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는 중국 쪽 글 하나에만 있는 말이다), 고지 위 병사들의 삽질 장면, 참모의 「잔칫상」 대화와 김종오가 웃지 않은 장면, 포병 참모의 「하늘은 우리 편」 대화(포병 편제와 증원은 기록), 왕진산의 말(제114사단 대대장의 이야기를 조카손자가 2005년 인터넷에 옮긴 것으로, 다른 기록으로는 확인하지 못했다), 대대장이 이길 줄 알았다는 대목(조카손자의 글에 그가 한국군을 얕보았다고 적혀 있다)과 통신원이 전화선을 끌고 뒤따른 모습, 돌격대가 소리를 내지 않고 불붙은 소매를 흙에 문지른 대목, 리화윈이 내달린 몸짓, 통신원을 잃은 뒤 대대장이 전화선 끝을 잡은 모습(대대가 고지에 오르며 72명을 잃고 통신원이 죽은 것은 기록이나, 그것이 6일 첫 공격 때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성덕과 병사의 꽹과리 대화와 고함, 황외원과 용재화의 대화와 몸짓(두 사람이 그 연대에 있었고 용재화가 포성이 끊길 때 더 불안했다는 것은 기록), 신병과 고참의 「하얀 산」 대화(신병 보충은 기록), 김경진과 부하의 「이십 미터」 대화(정상 20미터 앞 전사는 기록), 제114사단 대대장의 포위 장면의 날짜(그가 겪은 일은 기록, 그날이 11일인지는 모른다), 3용사의 「기어가」 대화와 끈을 조인 몸짓, 강승우가 앞장선 순서, 중대원들이 세 사람이 엎드렸던 흙을 밟은 대목, 14일 밤 「주봉은 아직」 대화(장융후이의 철수 요청과 왕진산의 동의, 다른 고지에서도 물러난 것은 기록), 15일 새벽 정상의 풍경, 대대장이 남은 사람을 센 장면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