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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14,367자)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 — 철조망 안의 전쟁

1950 · 네오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판문점, 1952년 4월~6월 — 거제도 북쪽 해안 고현·수양 골짜기의 유엔군 제1포로수용소(제76수용동 위치 추정), 4월 심사 뒤 송환 거부 포로가 옮겨 간 부산·마산·영천·광주·논산의 본토 수용소, 북쪽 끝 개성·판문점의 휴전회담장, 5월 9일 밤 거제도에 닿은 전차 중대, 6월 10일 제187공수연대전투단의 제76수용동 진압.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2년 4월 7일 밤, 경상남도 거제도(현 경남 거제시) 북쪽 해안 골짜기, 유엔군 제1포로수용소의 중국인 포로 수용동.

천막 위 확성기가 같은 글을 또 읽었다. 북한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함께 이름을 올린 성명이었다. 포로가 갇혀 있는 동안 팔에 글자를 새겼든 무슨 문서를 썼든 그것은 본인의 뜻이 아니었음을 안다, 조국은 모두를 환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 쪽은 이틀 동안 그 성명을 중국어와 조선말로 되풀이해 틀었다. 어느 천막에서는 깡통과 식기를 두들기며 노래를 불러 방송을 덮었다1.

칭화대학에서 공부하다 지원군에 들어온 장쩌스(21)는 그 소리를 누워서 들었다. 그는 1951년 5월 27일, 제180사단이 북한강 남쪽에서 무너질 때 사로잡혔다2. 영어를 할 줄 알아서 포로들의 통역이 되었다. 미 제8군 사령부에서 문관 통역으로 일하면 전쟁이 끝난 뒤 미국 대학에 보내 주겠다는 제안도 받았다. 그는 거절했다3.

이틀 전 수용소 당국은 4월 8일부터 모든 중국인 포로에게 송환 의사를 묻는 심사를 한다고 알렸다2. 심사관은 한 사람씩 불러 일곱 가지를 묻기로 되어 있었다. 스스로 원해서 돌아가려 하는가? 어떤 경우에도 돌아가기를 거부하는가?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이 겪을 일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래도 강제로 돌려보내려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일곱째 물음은 그것이었다1.

장쩌스 옆자리 포로가 소매를 걷었다. 팔뚝에 푸르게 새긴 한자가 보였다. 공산당을 죽이자는 구호였다.

“이거 지우는 데 얼마나 걸릴까?”

“칼이면 오 분이고, 마음이면 평생이겠지.”

“칼 말고 다른 방법은?”

“긴팔 입어.”

웃음은 짧았다. 이 섬의 중국인 포로는 이만 명 남짓이었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국민당 군대에 있다가 공산군에 넘어온 병사들이었다. 돌아갈지 말지를 두고 벌어진 싸움은 수용소 안의 국공내전이 되었다. 반공 포로 조직이 수용동의 경비대를 쥐었고, 대만으로 가자는 쪽이 돌아가겠다는 쪽을 때렸다2. 1951년 6월부터 국민당 출신 포로들이 국민당 지부를 꾸렸고, 그 사람들이 차츰 수용동의 자리와 경비대를 차지했다는 것이 중국 쪽 연구의 서술이다1. 1951년 10월 제86수용동에서는 국민당 깃발을 올리려는 쪽과 끌어내리려는 쪽이 부딪쳤고, 중국 측 기록은 그때 스무 살 포로 왕사오치가 맞아 죽었다고 적는다4. 장쩌스는 훗날 심사 무렵 쓰촨대학 외국어과에서 입대한 포로 린쉐부가 사람들 앞에서 배를 갈려 죽었다고 썼다2. 중국 측 기록은 그가 제72수용동에서 동료들에게 돌아가자고 부추기다 반공 포로들에게 죽었다고 적는다4. 미군 쪽 기록에서는 이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제72수용동의 포로 칠천칠백 명 가운데 돌아가겠다고 한 사람은 칠백 명이었다. 수용동 우두머리들은 떠나는 사람에게 몸에 새긴 구호를 칼로 도려내고 가라고 했다1.

*

1952년 4월 29일 오후, 거제도 고현(현 거제시 고현동)과 수양(현 거제시 수양동) 일대, 제76수용동.

거제도의 수용소는 1951년 1월부터 지었다. 바위투성이 골짜기 두 곳에 구역 넷을 세우고 구역마다 수용동 여덟 개를 칸막이처럼 넣었다. 한 수용동에 팔백에서 천이백 명을 넣을 생각이었는데, 곧 다섯 배가 들어찼다. 수용동과 수용동 사이에는 철조망 한 겹뿐이었다5. 섬에 들어온 포로는 많을 때 십칠만 삼천 명이었다6.

1951년 9월에는 포로들이 스스로 세운 인민재판에서 열다섯 명이 죽었다. 19일에는 제78수용동에서 폭동이 나 셋이 더 죽었고, 병력이 들어가 목숨이 위태로운 포로 이백 명을 빼냈다. 수용소가 문을 연 1월부터 9월 중순까지 소장이 여덟 번 바뀌었다. 9월에 온 모리스 피츠제럴드 대령은 뒷날 거제도를 「지휘관들의 무덤」이라고 불렀다5. 미군은 밤에 수용동에 들어가지 않았다. 밤마다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가 서로를 재판했고, 맞은 사람들은 낮에 입을 열지 않았다. 직업 교육 시간에 쇠붙이 다루는 법을 배운 포로들은 난로와 위생 도구 대신 칼과 창을 만들었다5. 4월부터는 곡물 배급이 쌀 반, 잡곡 반에서 쌀·보리·밀 삼분의 일씩으로 바뀌어 불평이 쏟아졌다5.

4월 19일까지 심사를 받은 포로와 민간인 억류자는 십만 육천삼백칠십육 명이었다. 공산 측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사람은 삼만 천이백사십사 명,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 사람은 칠만 오천백삼십이 명이었다7. 북한군 장교와 하사관이 모인 제76수용동을 비롯한 일곱 수용동은 심사관을 아예 들이지 않았다. 그 안에 북한군 포로 삼만 칠천 명이 있었다5. 심사 결과는 유엔군 사령부마저 놀라게 했다. 군인과 민간인 포로 십칠만 명 가운데 스스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칠만 명 남짓이었다. 판문점의 공산 측 대표들은 처음엔 말을 잃었고, 곧 심사 자체를 공격했다. 회담은 다시 멈추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포로들이 본토로 옮겨지자, 섬에 남은 수용동은 친공 지도부 손에 더 단단히 쥐어졌다5.

헌병 제94대대장 윌버 레이븐 중령이 담배 배급을 끊자 제76수용동의 북한군 장교들이 그를 불렀다. 레이븐은 한국인 통역 하나만 데리고 철조망 바로 안쪽 막사에 들어갔다. 요구가 쏟아졌고, 문이 열리더니 포로 백여 명이 몰려 들어왔다. 누군가 콩국 그릇을 그의 입에 들이밀었다7.

“드시오. 우리가 먹는 걸 수용소장도 좀 알아야지.”

“나는 수용소장이 아니오.”

“그럼 수용소장한테 전화하시오.”

포로들은 야전 전화기를 꺼내 놓았다. 레이븐이 전화로 요구를 전했고, 프랜시스 도드(51) 준장은 거절했다. 포로들은 레이븐을 내보냈다. 미 육군의 뒷날 조사는 그날을 예행연습으로 보았다7.

*

1952년 5월 7일 오후 두 시 몇 분, 제76수용동 정문.

도드는 지프에서 내렸다. 그는 2월에 수용소장으로 왔다. 2월 18일 민간인 억류자의 제62수용동에 들어간 보병 대대와 억류자들이 부딪쳐 일흔일곱 명이 죽은 뒤였다5. 그는 총을 차지 않고 수용동 문 앞에 와서 포로 대표들과 이야기하곤 했다. 수용동 문에는 자물쇠가 없었다. 작업반이 수시로 드나드는 문이었다. 경비병은 약실에 탄을 넣고 있을 수 없었다5.

문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가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7. 포로들은 쌀과 옷 이야기로 시작해 판문점(현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의 휴전회담으로 넘어갔다. 몇 번이나 들어와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레이븐은 딱 잘랐다. 그는 이미 한 번 붙잡혀 본 사람이었다5.

천막을 반납하러 가는 작업반이 지나가느라 바깥문이 열렸고, 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 포로들이 한꺼번에 뛰어나왔다. 레이븐은 문기둥을 끌어안고 발로 차며 버텼고, 경비병들이 대검으로 포로들을 밀어냈다. 도드는 끌려가면서 쏘지 말라고 외쳤다. 아무도 쏘지 않았다7. 그는 안쪽 철조망에 죽 걸어 둔 담요 뒤로 끌려 들어가, 미리 준비해 둔 천막에 갇혔다. 포로들은 그에게 이 일은 계획된 것이고, 기회만 있었다면 다른 수용동들도 그를 잡으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5.

몇 분 뒤 수용동 안에 큰 글씨판이 섰다. 영어였다.

“우리는 도드를 잡았다. 우리 요구가 풀리는 한 그의 안전은 보장된다. 총을 쏘는 따위의 잔인한 짓이 생기면 그의 목숨이 위험하다.”

곧 도드가 쓴 쪽지가 나왔다. 자기는 무사하니 저녁 여섯 시 전에는 병력을 들여보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5. 중국 측 기록은 그 글씨판의 뜻을 「요구를 들어주면 안전을 보장한다, 무력으로 누르면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로 옮겼다4.

*

같은 날 밤, 부산의 제2군수사령부와 거제도 사이의 전화.

사령관 폴 야운트(42) 준장은 참모장 윌리엄 크레이그 대령을 비행기로 섬에 보냈다5.

“말로 끌어내. 떼로 뚫고 나오면 당연히 막아야지. 그게 아니면 어떤 경우에도 총으로 끌어내지 마. 기다려. 무엇보다 침착하게. 저쪽을 흥분시키면 무슨 일이 날지 하느님만 아신다.”

야운트가 크레이그에게 한 말이었다. 밴 플리트는 미리 일러 두었다. 제8군의 승인 없이는 힘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5.

크레이그는 북한군 고위 장교 포로 이학구 총좌를 불렀다. 낙동강 전선에서 제13사단 참모장으로 있다가 미군 쪽으로 넘어온 사람이었다7. 크레이그는 그에게 수용동에 들어가 도드를 내보내라고 설득하게 했다. 이학구는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포로들의 대변인이 되었다5.

크레이그는 숙련된 기관총 사수와 수류탄, 방독면을 불러들였다. 부산에서 제9보병연대 제3대대가 전차상륙함에 올랐고, 국군 해군 경비정들이 섬을 둘러쌌다. 미 제3사단의 제64전차대대 B중대는 부산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5. 이튿날 포로 대표들은 도드 앞에 첫 요구를 내놓았다. 포로 협회를 인정하고, 수용동끼리 전화를 놓고, 오갈 차 두 대를 달라는 것이었다. 도드는 그럴 권한이 없었는데도 대부분 들어주겠다고 했다5.

수용동 안에 전화가 놓였다. 도드의 권유로 다른 수용동 대표들이 제76수용동으로 불려 왔다. 포로들은 도드의 위궤양 약을 들여오게 했고 그의 몸에는 손대지 않았다. 다만 구출하러 들어오면 그가 첫 사상자가 된다는 말은 숨기지 않았다5. 미군 쪽 기록은 섬의 공산 포로 조직을 움직인 사람을 따로 꼽았다. 제62수용동의 박상현이었다. 소련에서 나고 자란 노동당 간부로, 1950년 10월 북한군 사병 군복을 입고 미군 순찰대에 항복한 민간인이었다. 이학구와 정보장교 출신 홍철 총좌가 그를 도왔다7. 미 육군 공식 전사는 그 뒤에 판문점 회담장의 북한 대표 남일(35) 중장과 이상조 소장이 있었다고 적었다5. 미군이 붙잡은 문서와 포로 심문을 근거로 든 서술이었다.

*

1952년 5월 9일, 거제도 수용소 사령부.

미 제1군단 참모장 찰스 콜슨 준장이 새 수용소장으로 왔다. 섬 사정도 판문점 사정도 거의 모르는 전투 지휘관이었다5. 그는 아침과 낮에 두 번 도드를 내보내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학구의 답장은 도드가 이미 포로들에게 「비인간적 학살과 살인적 만행」을 저질렀음을 시인했다는 것이었다5.

그날 오후 수용동 안에서는 재판이 열렸다. 포로들은 스스로 인민재판부가 되어 포로가 죽거나 다친 일 열아홉 건을 도드 앞에 늘어놓았고, 도드는 한 건씩 답했다. 통역이 느려서 재판은 해 질 녘까지 끝나지 않았다5.

같은 시각 미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58) 대장이 섬에 날아왔다. 그는 리지웨이(55) 대장, 그 후임으로 막 도쿄에 온 마크 클라크(54) 대장과 이미 말을 맞춰 두었다. 기자도 사진기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협상 시한을 5월 10일 오전 열 시로 못 박았다5. 어스름에 도드가 콜슨에게 전화해 다음 날 정오까지 미뤄 달라고 했다. 제8군은 열 시를 바꾸지 않았다. 그러자 포로들은 원래 회의를 열흘 동안 열 생각이었지만 아침 안에 끝내 보겠다고 했다5. 콜슨은 제38보병연대에 전차와 화염방사기, 최루가스를 써서 들어갈 계획을 짜게 했다. 밤사이 화염방사 전차 다섯 대를 포함한 전차 스무 대가 섬에 올랐다. 제76수용동 포로를 나누어 넣을 작은 수용동 열여섯 개도 철조망을 다 둘렀다. 해가 지자 비가 내리기 시작해 밤새 그치지 않았다5.

그날 밤 도드와 콜슨은 마지막으로 통화했다.

“내일 열 시에 들어갑니다.”

“알고 있네. 그럼 지금 인사해 두지.”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했다. 작전이 끝날 때 도드가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둘 중 아무도 없었다5.

*

1952년 5월 10일 새벽, 안개 낀 제76수용동 앞.

동틀 무렵 포로들의 마지막 요구서가 콜슨에게 왔다. 영어 번역은 서툴렀지만 요구는 넷이었다. 하나, 학대와 고문, 기관총 사격, 독가스와 세균무기, 원자탄 실험 대상 삼기를 당장 그칠 것. 둘, 이른바 자원 송환을 그칠 것. 셋, 강제 심사를 그칠 것. 넷, 북한군과 지원군 포로의 대표단을 인정할 것. 그러면 도드 준장을 넘겨주겠다고 했다5.

정보참모가 보고했다. 공격을 시작하면 다른 수용동들이 일제히 뚫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용동 가까운 마을들은 이미 비어 있었다. 도드를 포함해 양쪽에서 많은 사람이 죽을 그림을 보고 콜슨은 시한을 미루었다5. 그가 쓸 수 있는 통역은 빠르지도 정확하지도 않았다. 한 줄을 옮기고 다시 확인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5.

도쿄의 리지웨이는 애가 탔다. 그는 밴 플리트에게 전문을 쳤다. 수용소장이 포로들의 요구에 어떻게 답했는지 정확한 기록을 아직도 받지 못해 다음 지시를 내릴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밴 플리트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5.

첫 답장은 포로들이 받지 않았다. 두 번째도 받지 않았다. 정오가 지나 도드가 전화를 걸어 왔다. 옆에는 포로 대표들이 앉아 있었다. 도드는 문구만 고치면 된다며 자기가 고쳐 주겠다고 했다5. 세 번째 답장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갔다.

“나는 유엔군에 의해 많은 포로가 죽고 다친 유혈 사태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앞으로 포로는 국제법에 따라 인도적 대우를 받을 것이다. 이후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내가 책임진다.”

콜슨의 이름으로 나간 세 번째 답장의 첫 항목이었다5.

셋째 항목에는 도드가 무사히 풀려나면 이 수용소에서 더 이상 강제 심사도, 포로를 다시 무장시키는 일도 없다는 말이 들어갔다5.

저녁이 되자 포로들이 하나를 더 청했다. 도드를 하룻밤 더 묵게 하고, 아침에 꽃으로 꾸며 포로들이 늘어선 사이로 문까지 배웅하는 의식을 열겠다는 것이었다. 야운트는 이 일을 「코믹 오페라」라고 불렀다5.

“꽃이요? 장군님 목에다가요?”

“그렇답니다. 화환이랍니다.”

“오늘 밤 안에 걸어 나오라고 해. 꽃은 집에 가서 받으라고.”

콜슨은 더 내주지 않았다. 밤 아홉 시 반, 도드는 제76수용동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곧바로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는 곳으로 옮겨졌다5.

*

1952년 5월 14일, 베이징의 『인민일보』 4면, 그리고 판문점의 회담장.

신화사는 개성(현 북한 개성시)에서 5월 13일 기사를 보냈다. 거제도 제76수용동의 포로들이 수용소장 도드를 붙들었고, 새 소장이 유혈 사태와 많은 포로의 죽음을 시인했으며, 이로써 미국의 「자원 송환」은 남김없이 드러나 파산했다는 내용이었다8. 판문점의 북한·중국 대표단은 콜슨의 편지를 들어 유엔군 대표들을 몰아세웠다5.

도쿄의 클라크는 포로들의 요구와 콜슨의 답장을 함께 공개했다. 그는 이 편지가 강압 아래 쓰였다며 효력을 부정했다. 도드와 콜슨은 대령으로 강등되었고 야운트는 견책을 받았다5. 강등은 5월 20일이었다9. 야운트가 세운 조사위원회는 처음에 도드와 콜슨에게 잘못이 없다고 보았다. 밴 플리트가 그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클라크는 더 무겁게 처리했다5. 콜슨은 뒷날까지 클라크가 왜 자기 편지를 공개해 일을 키웠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5.

부산과 거제도의 진압 현장에는 국제적십자 대표들이 있었다. 그들은 포로들이 불법 행위를 많이 저지른다고 인정하면서도, 유엔군이 쓰는 폭력과 물·밥을 끊는 방식에 거세게 항의했다. 영국 의회에서는 4월 심사가 제대로 되었는지 묻는 질문이 나왔다5.

*

1952년 6월 10일 아침, 제76수용동.

엿새 전인 6월 4일, 미 제38보병연대 병사들이 전차 두 대를 앞세워 공산 깃발이 걸린 제85수용동에 들어갔다. 전차가 깃대를 쓰러뜨리는 동안 병사들은 깃발을 태우고 묶여 있던 포로 열 명을 풀어 냈다. 삼십 분 뒤 제96수용동에서는 공산 쪽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포로 일흔다섯 명을 데리고 나왔다5. 새 수용소장 헤이든 보트너(50) 준장은 수용소 둘레의 주민 육천여 명을 섬 밖으로 옮기고, 병사들을 열두 시간씩 두 교대로 돌려 더 작고 튼튼한 수용동을 지었다5.

이날 보트너는 이학구에게 명령을 보냈다. 수용동 포로를 백오십 명씩 가운데로 모아 옮길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포로들은 칼과 창과 천막 기둥을 들고 참호에 들어갔다5.

제187공수연대전투단의 공수부대원들은 총을 쏘지 않고 걸어 들어갔다. 진탕 수류탄과 최루가스, 대검과 주먹으로 포로들을 참호에서 끌어냈다. 패튼 전차 여섯 대가 끝까지 버티던 포로 삼백 명에게 포신을 돌리자 저항이 무너졌다. 이학구는 바지 엉덩이를 잡힌 채 수용동 밖으로 끌려 나왔다5.

두 시간 반 동안 포로 서른한 명이 죽고 백서른아홉 명이 다쳤다. 미군 하나가 창에 찔려 죽었고 열넷이 다쳤다5. 미 육군 조사관들은 죽은 포로의 절반쯤을 동료 포로가 죽였다고 판단했다7. 수용동에서는 창 삼천 자루, 칼 사천오백 자루, 휘발유 수류탄 천 개가 나왔다. 싸움을 지켜본 제78·77수용동 대표들은 보트너가 가라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제77수용동에서는 살해된 사람 열여섯 명의 시신이 나왔다. 6월 안에 섬의 나머지 수용동도 큰 충돌 없이 새 울타리로 옮겨졌다5.

*

1953년 정전 뒤, 판문점.

장쩌스는 돌아가는 쪽에 섰다. 대륙으로 돌아간 지원군 포로는 칠천 명이었고, 대만으로 간 사람은 만 사천 명이었다2. 미국 역사가 앨런 밀렛은 북으로 돌아간 박상현과 이학구가 반역죄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7. 돌아온 그를 기다린 것은 당적 박탈과 「무기를 갖고도 저항하지 않고 사로잡혔다」는 죄목이었다. 사로잡힐 때 그의 손에는 수류탄 한 발이 남아 있었다. 옆에서 울며 매달리는 어린 선전대원 때문에 그는 안전핀을 뽑지 못했다3.

그는 노년에 그 섬을 이렇게 돌아보았다. 조국이 무엇인지를 그는 조국에서가 아니라, 남의 나라 외딴섬 수용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처음 알았다3. 그는 대만으로 간 옛 동료들을 여러 차례 찾아갔다. 그들이 겪은 협박과 그 뒤의 멸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듣고 나서, 그는 더 이상 그들을 시련을 못 견딘 겁쟁이로 보지 않게 되었다고 썼다3.

사료 출처

1. 중국어 위키백과, 「朝鲜战争战俘遣返问题」(2026년 10월 열람) 각주를 따라 확인한 내용 — 김일성·펑더화이 연명 「4·6 성명」의 내용과 1952년 4월 7·8일 중국어·조선어 반복 방송, 포로들이 식기를 두드리고 노래로 맞선 일(于劲 『厄运』 241쪽 인용), 심사의 일곱 가지 물음(『유엔 연감 1952』 157쪽, Hermes 제8장 170쪽 인용), 1951년 6월부터 국민당 출신 포로들이 「六三支部」 등을 꾸려 수용동의 자리와 경비대를 차지함(吴金锋 「志愿军战俘在美军集中营的斗争」, 『军事历史』 2002년 2호 인용), 제72수용동 7,700명 가운데 700명 송환(大鹰 인용), 떠나는 포로에게 새긴 구호를 도려내게 함(于劲 266쪽 인용). 원 문헌은 직접 보지 못했다. 2. 张泽石, 「我对朝鲜战争的回顾与思考」, 『炎黄春秋』 2013년 2호, 爱思想 게재본을 중국수자시대가 재게재(2013.2.21), chinadigitaltimes.net/chinese/280312.html — 1951년 5월 27일 사로잡힘, 제180사단의 북한강 도하와 포위, 국민당 출신 병사가 많았던 지원군 구성, 수용소 안의 「국공내전」과 반공 포로의 경비대 장악, 1952년 4월 6일 미군 당국의 「4월 8일부터 송환 심사」 발표, 쓰촨대학 외국어과 출신 린쉐부(林学逋)가 사람들 앞에서 배를 갈려 죽었다는 증언, 1만 4천 명 대만행·7천 명 대륙 귀환. 3. 张泽石, 「八十载南柯一梦?——耄耋之年的一点人生感悟」(2009년 봄), 爱思想 2009.3.21 게재, aisixiang.com/data/25677.html, 같은 면에 실린 지인의 글 「话说张泽石」 — 1929년생 쓰촨 광안 출신, 칭화대학 재학, 미 제8군 사령부 문관 통역 제의와 미국 유학 약속을 거절함, 귀국 뒤 「무기를 갖고도 저항하지 않고 사로잡혔다」는 죄목으로 당적 박탈, 수류탄 한 발과 매달린 어린 선전대원, 「이국의 외딴섬 전쟁포로 수용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조국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회고, 대만의 옛 동료들을 찾아가 그들을 겁쟁이로 보지 않게 되었다는 대목. 4. 중국어 위키백과, 「巨济岛事件」(2026년 10월 열람) — 1951년 10월 제86수용동 깃발 다툼과 20세 포로 왕사오치(王绍其)의 죽음, 린쉐부가 제72수용동에서 귀국을 부추기다 반공 포로에게 죽었다는 서술(이상 徐宝康, 「记者探访中朝战俘营」, 『环球时报』·인민망 2005.1.14 인용), 도드 억류 때 포로들이 내건 글귀의 중국어 표현 「答应要求,保障安全;如武力镇压,后果自负」. 5.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미 육군 군사사센터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총서, 1992년 판) 제11장 「Koje-do」, koreanwaronline.com/history/TruceTent/ch11.htm 게재본(같은 사이트가 끼워 넣은 사진 설명 한 단락은 쓰지 않았다) — 수용소 건설(1951년 1월, 북쪽 해안 두 골짜기, 4개 구역×8개 수용동, 수용 정원 800~1,200명의 다섯 배), 1951년 9월 인민재판 15명·제78수용동 3명 사망과 200명 구출, 소장 여덟 번 교체와 피츠제럴드의 말(원문: Koje-do was a graveyard of commanders), 밤에 들어가지 않은 수용동, 직업 교육과 무기 제작, 4월 곡물 배급 변경, 1952년 2월 18일 제62수용동 사건(포로 77명 사망), 4월 심사(17만 명 가운데 약 7만 명 송환 희망, 일곱 수용동 3만 7천 명 거부), 반공 포로 이송과 친공 지도부 강화, 미군 측이 남일·이상조를 포로 공작의 배후로 본 서술, 레이븐이 이전에 붙잡힌 일, 5월 7일 오후 두 시 넘어 정문 회담·천막 반납 작업반·문기둥·담요·글씨판 원문(We capture Dodd. As long as our demand will be solved, his safety is secured. If there happen brutal act such as shooting, his life is danger)·여섯 시 쪽지, 야운트의 지시(원문: We are to talk them out … Wait them out. One thing above all, approach it calmly), 밴 플리트의 무력 사용 승인 조건, 크레이그와 이학구, 기관총 사수·전차상륙함·경비정·제64전차대대 B중대, 8일 첫 요구, 위궤양 약, 콜슨의 경력, 9일 이학구의 답장(inhuman massacre and murderous barbarity), 19개 항의 재판, 보도 통제 합의, 10일 오전 열 시 시한과 정오 연기 요청, 열흘 회의 발언, 전차 스무 대(화염방사 다섯)·작은 수용동 열여섯·밤비, 도드와 콜슨의 작별, 네 가지 요구 원문, 집단 탈출 정보와 빈 마을, 느린 통역, 리지웨이의 전문, 세 번째 답장 원문(I do admit that there has been instances of bloodshed where many PW have been killed and wounded by UN Forces …), 꽃 의식 요청과 「comic opera」, 21시 30분 석방과 격리, 클라크의 공개·강압 주장·대령 강등과 야운트 견책, 조사위원회와 밴 플리트, 콜슨의 뒷날 발언, 판문점의 선전 활용, 국제적십자 항의와 영국 의회 질문, 6월 4일 제85·96·60수용동 깃발 철거, 보트너의 주민 6천여 명 이주와 두 교대 공사, 6월 10일 150명 단위 명령·제187공수연대전투단·패튼 전차 여섯 대·이학구가 바지 엉덩이를 잡혀 끌려 나옴·포로 31명 사망 139명 부상·미군 1명 사망 14명 부상·창 3,000·칼 4,500·휘발유 수류탄 1,000·제77수용동 시신 16구. 6. 한국어 위키백과, 「거제포로수용소」(2026년 10월 열람) — 수용소 자리(현 거제시 고현동·수양동 일대), 최대 수용 17만 3천 명(현지 안내문 인용). 7. Allan R. Millett, 「War Behind the Wire: Koje-do Prison Camp」, HistoryNet(2009.1.20 게재, 2016.6.20 갱신), historynet.com/war-behind-the-wire-koje-do-prison-camp/ 1~7쪽 — 4월 19일까지의 심사 결과(106,376명 가운데 31,244명 송환 희망·75,132명 거부), 4월 29일 레이븐이 한국인 통역과 막사에 들어갔다가 포로 백여 명에게 둘러싸여 콩국을 억지로 먹을 뻔하고 야전 전화로 도드에게 요구를 전한 「예행연습」, 5월 7일 정문 회담이 한 시간 넘게 이어짐, 끌려가던 도드가 쏘지 말라고 명령함, 이학구(제13사단 참모장,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 쪽으로 넘어옴)·홍철·박상현(소련 출신 노동당 간부, 1950년 10월 21일 사병 군복으로 항복, 제62수용동)의 경력, 6월 10일 제76수용동의 북한군 장교·하사관 6,500명, 죽은 포로의 절반쯤을 동료 포로가 죽였다는 미 육군 조사관의 판단, 박상현과 이학구가 북에서 반역죄로 총살되었다는 서술. 8. 「巨济岛我被俘人员英勇反抗行动彻底揭穿美方“自愿遣返”的骗局」, 『人民日报』 1952.5.14 4면(신화사 개성 5월 13일발), cn.govopendata.com/renminribao/1952/5/14/4/ — 제76수용동 포로들이 도드 준장을 붙든 일, 네 가지 요구, 새 소장 콜슨(柯尔生)의 유혈 시인 인용, 「자원 송환」이 「남김없이 드러나 철저히 파산했다」는 결론. 9. 「전쟁포로(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 36)」, 서울신문 1995.9.18, m.seoul.co.kr/news/1995/09/18/19950918012001 — 도드·콜슨이 1952년 5월 20일 대령으로 강등됨, 2월 18일 제62수용동 사건의 미국 문서 수치(미군 1명·포로 77명 사망, 미군 38명·포로 140명 부상).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도드 1899년생, 야운트 1908년생, 밴 플리트 1892년생, 클라크 1896년생, 리지웨이 1895년생, 보트너 1900년생(이상 영문 위키백과 인물 항목), 남일 1915년생(영문 위키백과 「Nam Il」), 장쩌스 1929년생(3번 자료). 레이븐, 크레이그, 피츠제럴드, 이학구, 박상현, 홍철, 린쉐부, 왕사오치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콜슨은 엘리너 루스벨트 문서 색인에 1896~1970년의 같은 이름 장교가 있으나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2월 18일 제62수용동 사망자 — 미 육군 공식 전사와 서울신문(미국 문서)은 포로 77명(현장 55명·병원 22명), 밀렛은 75명으로 적었다. 부상은 미 전사 「140명 넘게」, 서울신문 140명, 밀렛 139명. 미군 부상도 38명(미 전사·서울신문)과 22명(밀렛)으로 다르다. 본문은 77명을 따랐다. [자료 충돌] 5월 7일 바깥문이 열린 까닭 — 미 육군 공식 전사는 천막을 반납하러 가는 작업반, 밀렛은 분뇨를 나르는 작업반이 지나갔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본문은 공식 전사를 따랐다. [자료 충돌] 6월 10일 포로 부상자 — 미 육군 공식 전사는 139명, 밀렛은 131명. 본문은 139명을 따랐다. 밀렛은 패튼 전차 대신 「전차 1개 소대와 공수부대 2개 대대」로, 싸움 시간을 「세 시간」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5월 9일 밴 플리트의 방문 —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밴 플리트가 리지웨이·클라크와 미리 상의하고 혼자 날아온 것으로, 밀렛은 두 사람이 함께 왔다고 적었다. 본문은 공식 전사를 따랐다. 밀렛은 전차를 22대로, 공식 전사는 20대로 적었다. [자료 충돌] 4월 심사 숫자 — 공식 전사는 「17만 명 가운데 약 7만 명 송환 희망」, 밀렛은 4월 19일까지 106,376명 심사에 31,244명 송환 희망으로 적었다. 집계 시점과 범위가 달라 둘 다 적었다. [자료 충돌] 한국어 위키백과 「거제포로수용소」는 6월 10일 보트너가 도드를 구출했다고 적었으나, 도드는 5월 10일에 풀려났다(미 육군 공식 전사·인민일보). 이 대목은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린쉐부의 죽음 — 장쩌스 회고와 중국 측 기사에만 있고 미군 측 기록에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장쩌스 글에 「林学逋」, 다른 글에 「林学甫」로도 나온다. 반공 포로 리다안(李大安)이 4월 8일 아이 하나를 찔러 죽였다는 귀국 포로들의 고발은 1958년 재판에서 본인과 증인 여섯이 부인했다(1번 자료). 이 대목은 본문에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박상현·홍철의 한글 이름은 영어 표기 Pak Sang-hyon, Hong Chol을 옮긴 것이다. 중국어 위키백과는 박상현이 「전문일(Joen Moon Il)」이라는 가명을 썼다고 적었다. 박상현과 이학구가 총살되었다는 대목은 밀렛의 서술이며 북한 측 기록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재구성] 4월 7일 밤 장쩌스가 누워서 방송을 들은 장면과 그가 있던 수용동(그의 정확한 수용동 번호는 확인하지 못했다), 옆자리 포로의 문신과 「이거 지우는 데 얼마나 걸릴까?」로 시작하는 대화(반공 포로들이 팔과 가슴에 구호를 새긴 것은 4번 자료가 인용한 귀국 포로 증언에 있다), 4월 29일 「드시오」로 시작하는 레이븐과 포로들의 대화(콩국과 전화는 기록), 도드가 지프에서 내린 몸짓, 「내일 열 시에 들어갑니다」로 시작하는 도드와 콜슨의 마지막 통화 문장(두 사람이 작별했다는 것은 기록), 「꽃이요?」로 시작하는 꽃 의식 대화와 콜슨의 대사(콜슨이 그날 밤 석방을 요구한 것은 기록), 정전 뒤 판문점 장면의 시점(장쩌스가 귀국한 날짜는 확인하지 못했다)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포로 개개인의 속마음은 기록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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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 — 철조망 안의 전쟁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