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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14,388자)

마량산 전투 — 고지를 차지한 사람들

1950 · 네오

마량산 전투, 1951년 10월 3일~8일 — 임진강 서쪽, 남쪽의 355고지(고왕산)와 북쪽의 317고지(마량산), 그 서쪽 능선의 힌지와 217고지, 동쪽 임진강 가의 199고지. 3일 호주 왕립연대 3대대의 199고지 점령, 4일 영국 보더러스 대대의 355고지 점령, 5일 새벽 안개 속 B·D중대의 동쪽 능선 공격과 A중대의 남동쪽 지릉 공격, 7일 아침 힌지 점령과 그날 밤 중공군의 역습 세 차례, 8일 중공군 제191사단의 철수. 11월 4일~5일 중공군의 반격으로 317고지 상실.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1년 10월 3일 수요일 새벽 세 시, 경기도 연천 북서쪽 임진강 가(현 연천군 왕징면 일대), 호주 왕립연대 3대대 B중대.

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골짜기를 메워 앞사람의 등도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앞사람 허리에 매달린 대검 칼집을 한 손으로 붙잡고 걸었다1. 4소대장 짐 휴스 중위는 그 줄의 앞쪽에 있었다. 소대를 맡은 지 며칠 되지 않았고, 총알이 날아오는 자리에 서는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1. 군화 밑에서 강자갈이 밀렸고, 소총 멜빵 고리가 철모에 부딪혀 딸깍거렸다. 앞사람이 멈추면 칼집을 쥔 손이 먼저 알았다. 줄 전체가 숨을 죽인 채 서고, 다시 칼집이 당겨지면 걸었다.

뒤에서 누가 낮게 물었다.

“소대장님, 칼집 놓치면 어떻게 합니까?”

“놓치지 마. 놓치면 혼자 중국까지 걸어가게 될 거다.”

휴전 회담은 여름에 열렸다가 8월 말에 끊겨 있었다. 유엔군은 그 사이에 임진강 서쪽 산줄기를 몇 킬로미터 더 밀어 올리기로 했다. 미 제1군단의 제한 공세였고, 영연방 제1사단이 맡은 몫에는 ‘코만도 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2. 표적은 임진강이 굽이도는 자리 위의 산, 중국군이 마량산이라 부르는 317고지(현 군사분계선 북쪽 북한 지역)였다. 그 산을 쥔 쪽은 남쪽 골짜기와 임진강 굽이를 다 내려다보았다3.

대대장 프랭크 해싯(32) 중령은 가평 전투 뒤 브루스 퍼거슨 중령에게서 대대를 넘겨받았다. 가평에서 싸운 사람들 상당수는 이미 떠난 뒤였다2. 9월 한 달 동안 보충병이 103명 들어오고 128명이 다른 부대로 나갔다. 정원이 120명인 소총중대는 80명 남짓이었다2. 해싯은 그 무렵을 두고, 전투 중인 중계 보충대를 지휘하는 기분이었다고 적었다2.

9월 27일, 해싯은 중대장들과 남쪽 238고지에 올라 317고지를 오래 보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 피라미드가 골짜기 위로 이백 미터쯤 솟아 있었다2. 미군은 그 골짜기를 건너 정면으로 두 번 올랐다가 두 번 다 물러났다4. 해싯은 낮에 골짜기를 건너는 길을 지웠다. 그는 동쪽과 남동쪽 능선을 타고 옆구리로 들어가기로 했다2. 2차 대전 때 뉴기니 밀림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쓰던 방식, 호주 병사들이 ‘능선 달리기’라 부르던 방식이었다3.

대대는 밤에 한 줄로 오십 야드씩 떨어져 집결지로 들어갔다. 중국군은 그 움직임을 정찰대가 오가는 것으로 여긴 듯했다2. 안개는 양날이었다. 적의 눈은 가렸지만 아군의 길도 지웠다. B중대는 어둠 속에서 3킬로미터를 걸어 임진강 가의 199고지에 닿았고, 아침 열 시 십오 분께 고지를 손에 넣었다. 아군 부상 셋, 중국군 사살 다섯, 포로 하나였다2.

오후에는 영국 제8 왕립 아일랜드 후사르 연대의 센추리온 전차 세 대가 A중대와 함께 199고지로 올라왔다. 전차들은 서쪽 355고지로 붙은 보더러스 대대를 포로 거들었지만, 보더러스 대대는 그날 꼭대기에 닿지 못하고 내려왔다2. 밤이 되자 해싯의 전술 지휘소와 박격포소대, 기관총소대, 돌격공병소대가 199고지 둘레에 모여 참호를 팠다2.

“여기서 마량산이 보입니까?”

“안개가 걷히면 보인다더라. 걷힐 때까지는 믿음으로 봐.”

*

1951년 10월 4일 목요일 아침, 199고지 서쪽 능선, C중대.

C중대장 잭 거크(34) 소령은 다섯 시에 중대를 출발시켰다. 앞장은 모리 피어스 중위의 7소대였다2. 피어스는 지난달 대대를 찾아온 호주 가수 글래디스 몬크리프의 공연을 떠올리곤 했다. 그는 그날 밤을 이렇게 기억했다3.

“마법 같은 밤이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해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이날 아침의 능선은 고요하지 않았다. 7소대는 안개를 뚫고 올라가다 첫 진지 삼십 미터 아래에서 중국군과 맞닥뜨렸다. 놀란 쪽은 중국군이었다. 첫 봉우리는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빼앗았고, 둘째 봉우리는 열한 시까지 떨어졌다2. 오후 두 시 무렵 C중대가 355고지, 영국군이 ‘작은 지브롤터’라 부르던 고왕산(현 연천군 왕징면) 꼭대기 동쪽에 올라섰을 때, 서쪽 사면에서 백파이프 소리가 올라왔다2. 영국 킹스 오운 스코티시 보더러스 대대가 백파이프 연주자를 앞세우고 서쪽 사면을 오르고 있었다5. 그 대대는 전날 같은 산에 붙었다가 밀려난 터였다2.

“저 사람들은 꼭 피리를 불면서 와.”

“우리가 먼저 와 있었다고 누가 저 피리쟁이한테 좀 일러 줘.”

중국군은 그날 고왕산을 내주고 물러났다5.

C중대의 중대 선임부사관 아서 스탠리 준위는 그날의 공을 한 사람에게 돌렸다. 작전이 성공한 공은 거크 소령에게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2. 첫 봉우리에서 브렌 경기관총을 쥐고 앞장선 J. 버넷 일병은 그 싸움으로 수훈 메달을 받았다2.

*

1951년 10월 5일 금요일 새벽 네 시 사십오 분, 199고지 서쪽 골짜기.

B중대가 먼저 떠났고 삼십 분 뒤 D중대가 따랐다. 대전차소대가 소총을 들고 전차 한 개 분대와 함께 오른쪽을 막았다2. 기관총소대장 레그 손더스(30) 대위는 비커스 기관총 사수들과 함께 골짜기 너머의 산을 올려다보았다. 곁에 선 장교 하나가 중얼거렸다6.

“백인이 올 땅은 아니군.”

손더스는 호주 원주민이었다. 그가 대꾸했다6.

“흑인이 올 땅도 아니오.”

안개는 이날도 산을 덮었다. 안개 속에서 B중대는 길을 북쪽으로 틀어 버렸고, 작전 지도에 ‘위스키’라 적은 봉우리에서 먼저 싸움을 만났다2. B중대와 D중대는 서로를 놓쳤다. 대대의 공격은 중대마다 따로 치르는 싸움으로 쪼개졌다5.

D중대가 ‘빅터’라 적은 봉우리의 비탈 중턱에 붙었을 때였다. 아침 열 시 반 무렵, 안개가 한꺼번에 걷혔다2. 비탈에 몸을 드러낸 호주 병사들과 꼭대기 참호의 중국군이 서로를 보았다. 중국군은 잠깐 머뭇거렸다4. 중대장 배질 하디먼 소령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올라간다. 엎드려 있으면 다 죽는다.”

하디먼이 앞장섰고, 10소대장 제프 리어리 중위와 함께 쓰러졌다. 짐 영 중위가 중대를 넘겨받았다. 빅터는 열한 시 사십 분에 떨어졌다. 부상자는 일곱이었다2. 영은 자기가 지도 위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대대장의 통신병이 꾀를 냈다. 하늘의 관측기에 보이도록 표지판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표지판 덕분에 위치가 잡혔다. 영은 무전기를 들었다2.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십 분만 세게 두들겨 주시오.”

포탄이 다음 봉우리를 덮었고, 11소대장 앨지 클라크 중위가 ‘유니폼’을 빼앗았다2. 그 사이 남동쪽 지릉으로는 A중대가 붙었다. 1소대는 프레디 가디너 중위, 2소대는 조지 해리스 중사, 3소대는 짐 이블리 중사가 이끌었다2. A중대는 전차와 함께 정상 육백 미터 앞까지 나아가 중국군 증원 병력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가로 스무 명이 쓰러졌다2. 오후 네 시, D중대는 중국군 예순여덟을 쓰러뜨리고 서른을 사로잡았지만 남은 사람은 쉰 명이었다2. 정상까지 갈 힘은 B중대에도 D중대에도 없었다.

거크의 C중대가 그들을 지나쳐 올라갔다. 8소대가 ‘볼디’라 부른 민둥 봉우리를 쓸었고, 다섯 시께 피어스의 7소대가 317고지 꼭대기에 섰다. 포격을 견디지 못한 중국군은 이미 물러났고, 남은 열 명이 손을 들었다2. 같은 날 서쪽에서 217고지로 붙은 영국 로열 노섬벌랜드 퓨질리어스 대대는 짙은 안개 속에서 밀려 내려왔다5.

그날 밤 해싯은 해리스의 2소대와 돌격공병소대, 잭 모리슨 중사의 기관총 분대를 꼭대기의 C중대에 올려 보냈다2. 꼭대기를 쥔 사람들은 중국군이 버리고 간 참호에 몸을 밀어 넣고 밤을 새웠다.

*

1951년 10월 6일 토요일 아침 일곱 시, 317고지 서쪽 약 사백 미터, 숲이 덮인 작은 봉우리 ‘시에라’.

정원에 한참 못 미치는 C중대 9소대가 다시 내려앉은 안개를 타고 시에라에 올라섰다. 소대장은 아서 펨브룩 중위였다2. 중국군은 곧 봉우리를 되찾으러 왔다. 소대는 열세 시간 가까이 그 봉우리에서 거듭되는 역습을 받아 냈다5.

“이번이 몇 번째야?”

“네 번째인지 다섯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세다가 잊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세. 끝날 때까지.”

펨브룩은 그 봉우리를 지킨 일로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5.

그날 영연방 제28여단장 조지 테일러(45) 준장은 시에라 너머 서쪽 능선의 잘록한 봉우리, 대대가 ‘힌지’라 부른 곳을 원했다. 거기를 쥐어야 퓨질리어스 대대가 217고지를 다시 칠 수 있었다. 해싯은 받아들였다. 오후에 B중대가 시에라로 올라와 소대와 합류했다2.

*

1951년 10월 6일 무렵, 마량산 북쪽, 중국인민지원군 제64군 제191사단 사령부.

사단장 셰정룽(32)과 정치위원 뤄리빈(33)이 맡은 땅은 마량산과 고왕산이었다7. 지원군의 기록은 마량산을 개성(현 북한 개성시) 동북쪽 사십 킬로미터, 임진강 서쪽 기슭의 요충으로 적었다. 그 산이 서쪽 제47군 진지의 옆구리를 지켰다7. 사흘 사이에 고왕산이 떨어졌고 마량산 꼭대기도 넘어갔다.

뤄리빈은 훗날 이 산에서 맞선 영국군과 호주군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8.

“영국군은 미군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가까이 붙으면 총검을 들고 맞섰다. 어떤 진지는 몇 번을 되풀이해 덤벼야 겨우 빼앗았다.”

셰정룽의 참모가 지도를 짚었다.

“꼭대기는 내줬지만 서쪽 능선이 남았습니다. 저 능선을 쥐고 있으면 놈들은 꼭대기에서 잠을 못 잡니다.”

“그럼 오늘 밤부터 아무도 못 자게 해.”

*

1951년 10월 7일 일요일 아침 여덟 시, 317고지 서쪽 능선, B중대.

전술 지휘소는 동이 트자 317고지 꼭대기로 옮겼다2. 휴스의 4소대와 브라이언 폴비 중위의 6소대가 앞장섰다. 공격대가 지나간 뒤 중국군이 등 뒤 참호에서 튀어나와 중대 본부와 존 패리 중사의 5소대를 덮쳤다. 앞뒤로 엉킨 싸움 끝에 아홉 시 이십 분께 힌지가 넘어왔다2. 호주 병사 둘이 전사하고 스물이 다쳤다5.

“뒤에서 나온 놈들 다 정리됐나?”

“정리됐습니다. 그런데 앞에 판 참호보다 뒤에 판 참호가 더 깊습니다.”

“그럼 그 참호를 우리가 쓰자. 남이 판 구덩이가 제일 편하다.”

그때부터 하루 내내 중국군 포탄이 능선에 떨어졌다. 탄약과 물을 지고 오르던 한국인 지게 운반대가 보급로에서 포탄에 맞았다2. 대대는 그날 처음으로 크게 다친 병사 하나를 헬리콥터로 실어 내 달라고 청했고, 한참을 설득한 끝에 헬리콥터가 왔다2. 비커스 기관총 몇 정이 포격에 부서졌고, 흙에서 주워 올린 탄띠는 걸핏하면 걸렸다5.

해싯은 하루 동안 능선의 소대들을 찾아다니며 포격을 불러 대고 부상자 후송과 보급을 챙겼다. 전술 지휘소는 꼭대기 서쪽 비탈에 중국군이 파 둔 좁은 참호를 썼다. 포탄 대부분은 꼭대기를 넘어가 뒤쪽 보급로에 떨어졌다2. 대대의 기록은 그날 누구라도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고 적었다2. D중대는 그날 패디 몰로니 대위가 넘겨받았으나 그도 다쳐, 영 중위가 다시 중대를 맡았다2. 테일러 여단장은 보더러스 대대와 슈롭셔 경보병 대대의 한국인 운반대까지 돌려 호주 대대에 탄약을 올려 보내게 했다5.

밤 일곱 시 반, 포성이 뚝 그쳤다. 삼십 분 동안 아무 소리도 없었다. 여덟 시에 다시 포탄이 쏟아졌고, 삼십 분 뒤 안개 속에서 중국군 대대가 올라왔다2. 앞과 양옆에서 세 번이었다5. 휴스의 소대는 참호에서 참호로 수류탄을 주고받았다. 상대는 중국군 대대 하나였다1. 브렌 경기관총 사수가 쓰러지자 P. J. 오코넬 중사가 그 자리를 잡아 돌격 하나를 흩어 놓았다5. R. W. 스트롱 중사는 어둠 속에서 탄약을 나눠 날랐다5. 탄이 떨어진 참호에서는 발로 차고 맨손으로 목을 조르는 싸움까지 벌어졌다5. 그날 밤 B중대는 병사가 처음 지니고 나가는 탄약을 네 번 다시 채웠다. 그 탄약을 지고 포탄 속을 오른 사람들은 ‘조크’ 매코믹 중위의 돌격공병소대였다2.

“탄약 왔다! 머리 숙이고 받아!”

“머리를 숙이면 탄약을 못 받잖아!”

“그럼 손만 들어!”

새벽 다섯 시, 중국군이 물러났다. 능선 둘레에는 중국군 백이십 명이 쓰러져 있었다2.

해싯은 여단장에게 대대의 사정을 그대로 보고했다. 사상자는 백이십 명가량, 앞에 나가 싸운 사람 셋 가운데 하나꼴이었다. 소대는 열다섯에서 스무 명으로 줄어 있었다2.

“대대는 솔직히 서 있는 채로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

1951년 10월 8일 월요일 아침, 317고지.

보더러스 대대가 올라와 호주 병사들과 자리를 바꿨다. 힌지에서 밤을 새운 B중대는 빅터로 물러나 숨을 돌렸고, C중대는 199고지로 쉬러 내려갔다. 꼭대기에는 C중대 한 소대와 돌격공병소대가 남았다2. 그날 밤에도 중국군 정찰대가 꼭대기로 기어 올라왔고, 남은 병사들이 그중 넷을 쓰러뜨렸다. 마지막 호주 소대가 산을 내려온 것은 9일이었다5. 중국군 제191사단은 북쪽으로 3킬로미터쯤 물러났고 217고지도 내주었다. 퓨질리어스 대대가 빈 고지에 들어갔다5. 지원군 기록은 사단이 적에게 큰 손실을 입힌 뒤 스스로 황계산·기곡리·백석동(현 북한 지역)을 잇는 선으로 물러나 방어를 이었고, 영연방 제1사단이 2,6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마량산을 차지했다고 적었다7.

호주 대대는 닷새 동안 스무 명을 잃고 여든아홉이 다쳤다3. 대대는 중국군 시신 283구를 셌고 포로 쉰 명을 잡았다5. C중대 통신병 짐 맥패드전 일병은 그 닷새를 짧게 적었다3.

“기습과 속도와 공격성이 그날을 이겼다.”

아서 스탠리 준위는 그 닷새를 전문가들이 지휘하고 모두가 뛰어난 용기로 싸운, 가장 잘 짜인 작전 가운데 하나로 기억했다3. 뉴질랜드 제16야전포병연대는 그 닷새 동안 오만 발 가까이 쏘았다. 대대에는 훈장 서른여섯 개가 돌아왔다2.

해싯은 그 자리에서 무공훈장을 받았다3. 호주 전쟁의 공식 전사를 쓴 로버트 오닐은 훗날 이 싸움을 한국전쟁에서 호주 육군이 해낸 가장 큰 일로 꼽았다3.

*

1951년 10월 하순, 마량산 북쪽, 중국인민지원군 제64군 사령부.

제64군 군단장 쩡쓰위(39)는 마량산을 되찾을 방법을 놓고 지도를 오래 들여다보았다9. 그 사이 산 위의 보더러스 대대는 스무 날 넘게 엄체호 백여 개를 짓고, 깊이 사십 미터의 철조망 지대와 지뢰밭을 둘렀다. 쩡쓰위는 진지 몇 개를 찔러 보는 작은 반격을 버리고, 산 하나를 통째로 되찾는 큰 반격 하나를 골랐다. 한 연대가 밤마다 영국군 진지를 건드려 그들을 안쪽으로 몰아넣었고, 다른 부대들은 정찰과 예행연습을 거듭하며 포탄을 쌓았다. 11월 3일 밤에는 전차가 소리를 죽이고 앞으로 나왔다10.

“대낮에 칩니까?”

“영국 놈들은 우리가 밤에만 오는 줄 알아. 차 마실 시간에 가 주자.”

*

1951년 11월 4일 일요일 오후, 317고지 동쪽 골짜기와 마량산 능선.

그날 미국 희극 배우 대니 케이가 호주 대대를 찾아왔다2. 골짜기의 병사들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오후 세 시, 마량산 위로 중공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낮이었다. 지원군의 기록에 따르면 포는 먼저 삼십 분 동안 엄체호의 총안을 하나씩 겨누어 쏘았다. 이어 십 분 동안 한꺼번에 퍼붓고는 갑자기 멈췄다. 포격이 끝난 줄 안 영국 병사들이 엄체호에서 나와 참호에 자리를 잡자, 포탄이 다시 십오 분 동안 쏟아졌다10. 제191사단은 보병 3개 대대에 포 쉰일곱 문, 트럭에 얹은 소련제 다연장 로켓, 전차 열 대를 붙였다. 지원군의 기록은 그날을 보병·포병·전차·공병을 처음으로 한데 묶은 공격으로 적었다. 오후 네 시 오 분에 보병이 올라갔고, 그들은 저녁 일곱 시에 마량산을 되찾았다고 적었다10.

217고지의 보더러스 대대에서는 블랙 워치 연대에서 넘어온 빌 스피크먼(23) 일병이 주머니에 수류탄을 채우고 무너지던 분대 쪽으로 뛰어갔다. 다 던지고 돌아와 다시 채웠고, 병사 여섯이 그를 따라 거듭 돌격했다. 다리와 어깨를 다치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버틴 동안 중대는 물러날 수 있었다11. 그는 그 싸움으로 영국과 영연방에서 가장 높은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다11.

11월 5일까지 마량산은 다시 중국군의 산이 되었다. 한 달 전 그 산을 빼앗은 호주 병사들에게 그 소식은 무거웠다3. 대대는 그달 말까지 317고지 동쪽 골짜기에 머물렀다2. 스무 명이 죽어 가며 오른 꼭대기가 날마다 골짜기 위로 올려다보였다. 유엔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산에 다시 오르지 못했다3.

반세기가 지나 한 역사가가 그 싸움을 물었을 때, 노인이 된 짐 휴스가 먼저 꺼낸 것은 훈장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임진강 안개 속에서 앞사람의 칼집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주던 새벽부터 이야기했다1. 휴스는 훗날 소장까지 올랐고, 이듬해 같은 대대를 맡은 형 로널드 휴스도 소장이 되었다12.

사료 출처

1. Brad Manera(안작 기념관 선임 역사가), 「The Battle for Maryang San, October 1951」, 안작 기념관(Anzac Memorial, 시드니), anzacmemorial.nsw.gov.au/our-stories/our-stories/battle-maryang-san-october-1951 — 안개 속에서 앞사람 대검 칼집을 붙잡고 걸었다는 짐 휴스의 회고, 휴스가 막 B중대 4소대를 맡았고 첫 실전이었다는 것, 힌지에서 중국군 대대 하나와 수류탄을 주고받은 공로로 무공십자훈장을 받은 일. 2. 3RAR 협회(3rd Battalion Royal Australian Regiment Association), 「Battle of Maryang San (Operation Commando) 2–8 October 1951」, 3rar.com.au/maryangsan.html — 해싯의 경력과 9월 25일 정보장교 임명, 보충병 103명·전출 128명, 중대 80명 남짓, 「transit depot」 발언, 9월 27일 238고지 정찰, 정면 공격 배제와 동쪽·남동쪽 능선 계획, 오십 야드 간격 야간 이동, 3일 B중대 03시 출발·3,000미터·10시 15분 199고지(아군 부상 3·적 사살 5·포로 1), 4일 C중대 05시 출발·7소대 피어스·30미터 아래 기습·11시·14시 355고지와 백파이프, 5일 B중대 04시 45분·D중대 30분 뒤·대전차소대와 전차, B중대 북쪽 이탈과 위스키, 10시 30분께 안개 걷힘·하디먼과 리어리 부상·영 지휘·11시 40분 빅터·부상 7, 표지판, 「give me twenty minutes of heavy supporting fire」, 클라크 11소대 유니폼, A중대 육백 미터·사상 20, D중대 사살 68·포로 30·잔여 50, C중대 8소대 볼디·7소대 17시 317고지·포로 10, 7일 08시 4소대·6소대(폴비)·5소대(패리)·09시 20분 힌지, 하루 내내 포격과 한국인 운반대 피격, 첫 헬리콥터 후송 요청, 19시 30분~20시 정적과 삼십 분 포격, 역습 세 차례, 탄약 네 번 보충, 돌격공병소대(매코믹), 05시까지 중국군 120 사살, 사상 약 120명·「out on its feet」, 11월 말까지 317고지 동쪽 주둔, 11월 4일 대니 케이 방문, 3일 제8 후사르 전차 세 대와 보더러스의 355고지 첫 공격 실패, 199고지 집결, 스탠리 준위의 거크 평가와 버넷 일병 수훈 메달, A중대 소대장(가디너·해리스·이블리), 5일 밤 2소대·돌격공병·모리슨 기관총 분대 증원, 6일 07시 9소대(펨브룩) 시에라 점령, 테일러가 퓨질리어스의 217고지 공격 발판으로 힌지를 원함, 오후 B중대 합류, 7일 전술 지휘소 이동과 중국군 참호 사용, 「miracle」 대목, 몰로니 부상, 8일 B중대 빅터·C중대 199고지·한 소대와 돌격공병 잔류, 뉴질랜드 포병 약 5만 발, 훈장 36개. 3. 호주 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Out in the Cold: Australia's involvement in the Korean War — Maryang San "Operation Commando"」, awm.gov.au/visit/exhibitions/korea/operations/maryang_san — 317고지가 골짜기 위 이백 미터, 미군 공격 실패, 해싯의 「running the ridges」와 뉴기니 경험, 글래디스 몬크리프 공연과 피어스의 회고(원문: It was a magic night, deadly quiet and calm. You could hear a pin drop), 맥패드전의 말(원문: Surprise, speed and aggression had won the day), 전사 20·부상 89, 해싯 무공훈장, 오닐의 평가(원문: probably the greatest single feat of the Australian Army during the Korean War), 11월 5일까지 중국군 탈환과 전쟁 끝까지 중국군 점유. 4. 호주 전쟁기념관, 「Battle for Maryang San」 백과 항목, awm.gov.au/encyclopedia/korea/maryang_san(O'Neill 『Australia in the Korean War 1950–53』 2권 1985 인용) — 미군의 두 차례 공격 실패, 10시께 안개가 걷히자 중국군이 잠깐 머뭇거린 일, 임진강 굽이를 내려다보는 고지의 가치. 5. 영문 위키백과, 「First Battle of Maryang-san」(2026년 10월 열람; O'Neill 1985, Breen 1994, Horner 2008, 중국 군사과학원 2000 등 인용) — 미 제1군단의 코만도 작전, 영연방 제1사단·제28여단, 보더러스 대대의 백파이프와 355고지, 중국군의 355고지 철수, 안개로 B중대가 길을 벗어나 공격이 중대별로 쪼개진 일, 퓨질리어스의 217고지 공격 실패, 힌지에서 아군 전사 2·부상 20, 비커스 탄띠 고장, 역습 세 차례, 오코넬·스트롱의 행적, 8일 제191사단의 약 3킬로미터 후퇴와 217고지 포기, 적 시신 283·포로 50, 펨브룩 소대의 약 13시간 방어와 무공십자훈장, 테일러가 보더러스·슈롭셔 대대의 한국인 운반대를 돌린 일, 발로 차고 목을 조른 백병전, 8~9일 밤 꼭대기 잔류 병력이 중국군 넷을 쓰러뜨리고 9일 교대. 6. 영문 위키백과, 「Reg Saunders」 — 마량산 앞에서 다른 장교와 나눈 말(원문: "No country for white men" — "It's no country for black men, either"), 비커스 기관총소대 지휘. 7. 晋蒙·丁川, 「马良山战斗:志愿军进行的一次多兵种协同作战」, 解放军报(中国军网), 红船网 재게재 2025.1.3, hongchuan.org.cn/news/history/2853.html — 10월 3일부터 영연방 제1사단의 마량산·고왕산 공격, 마량산이 개성 동북 약 40킬로미터·임진강 서안 요충으로 제47군 진지 측면을 지킴, 제191사단의 방어 임무, 8일 황계산·기곡리·백석동 선으로 주동 철수(「主动撤至黄鸡山、基谷里、白石洞一线」), 영연방 제1사단 사상 2,600여 명 주장. 8. 「关于马良山战役,志愿军老兵回忆道:英军比美军经打,也敢拼刺刀」, 网易 개인 계정 게시 2023.4.12, 163.com/dy/article/I25IRHNL05562EB4.html — 제191사단 정치위원 뤄리빈의 회고(「英军不像美军那样不经打,近距离也敢于和我们拼刺刀,有些工事要反复几次才能最终夺下」), 사단장 셰정룽·군단장 쩡쓰위. 개인 매체 글이라 회고의 원출처는 확인하지 못했다. 9. 중국어 위키백과, 「曾思玉」「谢正荣」「罗立斌」 — 쩡쓰위 1911년생, 셰정룽 1918년생·지원군 제64군 제191사단장, 뤄리빈 1917년생. 10. 王会方, 「马良山反击战:志愿军首次诸兵种协同作战」, 学习时报, 인민망 당사 채널 재게재 2024.9.23, cpc.people.com.cn/n1/2024/0923/c443712-40325744.html — 10월 영국군 점령 뒤 보더러스 대대의 방어, 군단장 쩡쓰위의 대규모 반격 결심, 11월 4일 15시 대낮 포격 개시, 보병 3개 대대·포 57문(카튜샤 포함)·전차 10대, 30분 직접 조준 사격·10분 1차 화력 급습·가짜 정지로 영국군을 엄체호 밖으로 끌어낸 뒤 15분 2차 급습, 573연대의 약 세 주 야간 교란, 11월 3일 밤 전차 은밀 전진, 영국군 엄체호 백여 개·철조망 깊이 40미터·지뢰밭, 16시 05분 보병 공격, 19시 마량산 탈환, 첫 보병·포병·전차·공병 협동 작전이라는 평가. 11. 영문 위키백과, 「Bill Speakman」 — 1927년 9월 21일생, 블랙 워치 소속으로 보더러스 1대대에 배속, 11월 4일 해 질 무렵 217고지에서 수류탄을 채워 거듭 돌격, 병사 여섯이 따름, 다리와 어깨 부상, 중대 철수를 엄호, 빅토리아 십자훈장.

12. 영문 위키백과, 「Ronald Laurence Hughes」 — 1920년 9월 17일생, 1952년 7월부터 1953년 3월까지 호주 왕립연대 3대대장, 동생 짐 휴스가 이 대대 소대장으로 마량산 전투에서 무공십자훈장을 받았고 형제가 모두 소장에 오른 일.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프랭크 해싯 1918년 4월 11일생(영문 위키백과 「Frank Hassett」), 잭 거크 1916년 6월 7일생(영문 위키백과 「Jack Gerke」), 레그 손더스 1920년 8월 7일생(영문 위키백과 「Reg Saunders」, 39화 [나이]와 같음), 조지 테일러 1905년 9월 17일생(영문 위키백과 「George Taylor (British Army officer)」), 빌 스피크먼 1927년생(11번), 셰정룽 1918년생·뤄리빈 1917년생·쩡쓰위 1911년생(9번). 짐 휴스(형 로널드 휴스의 위키백과 항목에 동생으로만 나옴), 모리 피어스, 배질 하디먼, 제프 리어리, 짐 영, 앨지 클라크, 브라이언 폴비, 존 패리, P. J. 오코넬, R. W. 스트롱, 조크 매코믹, 짐 맥패드전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5일 D중대 지휘 — 3RAR 협회는 하디먼 소령이 빅터 공격에서 다쳐 영 중위가 넘겨받았다고 적었고, 영문 위키백과는 하디먼이 10월 2일 캐나다 제25여단에 따로 배속되었다고 적었다. 본문은 그날의 경과를 자세히 적은 3RAR 협회를 따랐다. 빅터 점령 시각도 11시 40분(3RAR 협회)과 11시 20분(위키백과), 안개가 걷힌 시각도 10시 30분(3RAR 협회)과 10시께(호주 전쟁기념관)로 갈린다. [자료 충돌] 3일 B중대 지휘 — 3RAR 협회는 3일 B중대를 「Lt Jim Hughes (4 Platoon)」가 이끌었다고, 위키백과는 B중대장을 헨리 니컬스 대위로 적었다. 본문은 휴스를 4소대장으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스탠리 준위 — 3RAR 협회는 C중대 선임부사관 「CSM Arther Stanley」, 호주 전쟁기념관은 「WO Arthur Stanley」로 적었다.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자료 충돌] 사상자 — 호주 대대 부상자는 89명(호주 전쟁기념관·3RAR 협회, 그 가운데 15명은 부대에 남음)과 104명(영문 위키백과)으로 갈린다. 본문은 89명을 따랐다. 해싯이 여단장에게 말한 「약 120명」은 그날 밤 그의 추산이다. 중국 쪽은 10월 싸움에서 영연방 제1사단 사상 2,600여 명을 주장했고, 같은 계열 기사는 10~11월을 합쳐 4,000여 명(해방군보)·1,740여 명(학습시보)으로 적어 숫자가 맞지 않는다. 지원군 제191사단의 10월 손실은 중국 쪽 자료에서 찾지 못했다. [자료 충돌] 글래디스 몬크리프 공연 — 호주 전쟁기념관은 「공격 전날 밤」, 3RAR 협회는 9월 13일로 적었다. 본문은 「지난달」로 적었다. 안작 기념관 글은 카셀스를 「여단장」이라 적었으나 카셀스는 영연방 제1사단장이었고, 이 글의 그 대목은 본문에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10월 초 마량산을 친 영국 쪽 부대 — 중국 쪽 학습시보 기사는 「영국군 제29여단」이 마량산을 빼앗았다고 적었으나, 영어권 자료는 모두 제28여단 소속 호주 왕립연대 3대대로 적는다. 11월 반격 시각도 중국 쪽은 4일 15시 포격·16시 05분 보병 공격, 영문 위키백과 「Second Battle of Maryang-san」은 5일 밤 포격 시작으로 적었다. 본문은 날짜가 분명한 중국 쪽 시각을 그들의 기록으로 적었다. [재구성] 칼집을 두고 나눈 휴스 소대의 대화, 백파이프를 두고 나눈 C중대 병사들의 대화, 하디먼의 「지금 올라간다」, 셰정룽 사령부의 대화, 제64군 사령부의 「대낮에 칩니까?」 대화와 쩡쓰위가 지도를 들여다보는 모습(기록에는 큰 반격을 고른 결심과 준비 과정만 있다), 탄약을 받는 병사들의 대화, 해싯의 마지막 보고를 직접 화법으로 옮긴 말, 대니 케이 방문 때 병사들이 웃은 모습, 골짜기에서 꼭대기를 올려다보는 대목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끝 대목에서 휴스가 안개 이야기부터 꺼냈다는 것은 매네라의 글(1번)에 기댔고, 「훈장 이야기가 아니었다」와 손에 힘을 주던 몸짓은 소설적 표현이다. 「믿음으로 봐」 대화, 시에라의 「몇 번째야?」 대화, 힌지의 「남이 판 구덩이」 대화, 휴스 소대가 칼집을 따라 걷는 소리와 몸짓도 소설적 재구성이다. 해싯의 「중계 보충대」, 영의 「이십 분」, 피어스·맥패드전·스탠리의 말, 손더스와 장교의 말, 뤄리빈의 말은 기록에 있는 말을 우리말로 옮겼다. 셰정룽의 사령부 위치는 기록에서 찾지 못했다.

4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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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산 전투 — 고지를 차지한 사람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