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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13,163자)

700·602고지 전투 — 카그뉴, 낯선 산의 이름

1950 · 네오

700·602고지 전투, 1951년 9월 21일~22일 — 강원도 화천 북쪽, 적근산 동쪽 주저항선의 에티오피아 강뉴(카그뉴) 대대와 미 제7사단 제32보병연대, 북쪽 금성 방향 중공군 제67군 제200사단 제599연대의 전초 700고지·602고지. 21일 700고지 점령과 602고지 1차 공격 실패, 22일 602고지 재공격과 복귀. 남쪽 노동리·마현리·화천, 서쪽 대성산. 개략도, 고지 위치는 추정, 거리 비례 아님.

1951년 9월 20일 밤, 강원도 화천(현 화천군 화천읍) 북쪽, 적근산(현 화천군 상서면 북쪽 휴전선 가까이의 산) 동쪽 주저항선 — 에티오피아 강뉴 대대 지휘 천막.

대대장 케베데 게브레 중령은 미 제32보병연대에서 내려온 명령서를 등잔 밑에 펼쳤다. 작전 이름은 클리버, 푸줏간에서 뼈를 자르는 큰 칼이었다. 미 제9군단은 21일과 22일 이틀 동안 중공군의 전초와 수색 기지를 부수어 아군 주저항선을 단단히 하고, 북쪽 금성(현 북한 강원도 김화군 일대)으로 나아갈 발판을 얻으려 했다1. 대대가 맡은 일은 두 줄이었다. 먼저 700고지를 잡는다. 그다음 602고지를 친다2.

미군 연락장교가 지도 위 두 숫자를 연필로 두드렸다. 통역이 그 말을 암하라어로 옮겼다.

“칠백이 산 이름입니까?”

1중대의 젊은 장교가 물었다.

“이름이 아니라 높이요. 미터. 이 나라 산은 우리가 이름을 몰라서 키로 부릅니다.”

“칠백 미터면 언덕이지요. 아디스아바바는 길바닥이 해발 이천 미터가 넘습니다.”

“그럼 내려가면서 싸우시오. 숨은 덜 찰 테니까.”

천막 안에 웃음이 짧게 돌았다. 천막 밖에서는 미군 포병의 조명탄이 북쪽 하늘에 떴다가 졌고, 그때마다 적근산 능선이 흰 선으로 드러났다. 케베데는 웃지 않고 지도에서 700과 602 사이의 능선을 손가락으로 이었다. 그 능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대대는 아직 몰랐다.

“왜 칠백이 먼저입니까? 육백이가 더 낮은데.”

2중대장이 물었다. 케베데는 700고지에서 602고지로 흘러내리는 능선을 다시 짚었다.

“높은 데를 먼저 쥐어야 낮은 데가 보인다. 봉당덕리에서 배운 대로다.”

춘천의 참전기념관 기록은 대대가 그동안의 싸움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700고지를 먼저 잡고 602고지를 치기로 정했다고 적었다2. 중대장들은 각자 맡은 비탈을 지도에서 손톱으로 눌러 자국을 냈다. 등잔 심지가 타들어 가는 냄새 속에서, 누군가 암하라어로 짧은 기도를 웅얼거렸다.

그들은 황제의 근위대였다. 1950년 8월, 하일레 셀라시에(58) 황제는 황실 근위대에서 천이백 명을 골라 대대 하나를 꾸렸다2. 이듬해 4월 13일 출국 신고식에서 황제는 대대에 강뉴라는 이름을 내렸다. 옛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아끼던 말의 이름이었다1. 그날 황제는 장병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1.

“우리 에티오피아가 늘 추구해 온, 세계 평화를 위한 집단안보라는 신성한 정책을 실현하고 지키기 위해 그대들은 오늘 먼 길에 오른다.”

그 말 뒤에는 열다섯 해 전의 기억이 있었다. 이탈리아군이 쳐들어왔을 때 에티오피아는 국제연맹에 도움을 청했고, 그 호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춘천의 참전기념관은 그 쓰라린 경험이 에티오피아로 하여금 힘 있는 공동 행동으로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느끼게 했다고 적었다2. 한국 논문은 황제가 유엔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 에리트레아를 되찾고 군대를 새로 갖추려 한 셈법도 함께 있었다고 덧붙였다1. 병사들이 그 셈법을 알았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들이 아는 것은 황제가 직접 이름을 지어 준 대대라는 사실이었다.

대대 장병 1,153명과 사령부 요원 35명이 기차로 지부티 항구까지 갔고, 미군 수송선에서 스물하루를 보냈다. 5월 6일 아침 부산에 내렸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부두에 나와 있었다2. 부산 동래(현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유엔군 훈련소에서 여덟 주 동안 미군 소총과 장비를 손에 익혔다3. 7월 6일 부산을 떠난 대대는 경기도 가평(현 가평군)에서 미 제7사단 제32연대에 붙었다1.

미군 장교들은 처음에 이 대대를 미덥지 않게 보았다. 영어를 하는 병사가 드물었고, 미군 전술에도 낯설었다. 후방 경비에나 쓰자는 말이 돌았지만 에티오피아 장교들은 전선을 고집했다4. 사단은 그들을 연대 예비로 두고 정찰부터 시켰다1. 8월 12일, 적근산 앞 797고지 서북쪽 마을 봉당덕리에서 대대는 처음으로 중공군과 총을 쏘았다. 사흘 뒤에는 진지로 스며든 중공군을 네 시간 넘게 싸워 물리쳤다. 9월 14일까지 정찰과 탐색전이 열여덟 번이었다2. 그 정찰들이 미군의 눈을 바꾸었고, 사단은 대대를 예비에서 꺼내 주저항선에 세웠다1.

중국 쪽 글은 대대의 첫 싸움을 조금 다르게 적었다. 8월 15일 2중대 1소대가 순찰 중에 박격포 사격을 받고 작은 총격전을 치렀다. 이튿날 2중대 2소대가 앙갚음하듯 매복을 나갔다가 거꾸로 중공군의 매복에 걸렸다. 소대장 아베베 중위는 케베데 중사에게 분대를 이끌고 빠져나갈 길을 열라고 명령했다. 그 분대가 소대의 뒤를 끊으러 돌아오던 중공군 넷을 막았고, 소대는 빠져나왔다5. 대대장과 같은 이름을 가진 중사였다. 그 뒤로 대대에서는 「케베데가 길을 연다」는 말이 농담처럼 돌았다.

케베데는 아흐레 전의 밤을 잊지 못했다. 9월 12일, 한 소대가 적 주방어선 가까운 고지를 치러 나갔다. 중대장 테페라가 고른 소대장 이욥이 소대를 이끌었다. 고지에 올라서자 뒷면에 숨어 있던 중공군이 쏟아져 나왔고, 소대는 포위될 뻔했다. 레마라는 병사가 혼자 퇴로를 뚫었다. 소대는 모두 돌아왔다. 레마만 돌아오지 못했다1.

*

같은 무렵, 금성 남쪽 602.2고지 — 중국인민지원군 제67군 제200사단 제599연대 진지.

제67군은 그달 초에 이 산들로 들어왔다. 금성 지구를 지키던 제27군이 뒤로 물러나 쉬고, 그 자리를 제67군이 이었다6. 교대는 깔끔하지 않았다. 8월 30일에 오기로 한 부대가 늦었고, 그사이 미 제7사단이 흑운토령을 몇 번이고 들이쳤다. 9월 3일 미군이 다시 그 고개를 차지했고, 제67군은 이튿날 고개 하나를 잃은 채로 진지를 넘겨받았다5. 흑운토령은 제27군이 조선에서 치른 마지막 큰 싸움터였다. 그 고개의 진지는 며칠 사이에 수십 번 주인이 바뀌었다고 중국 쪽 글은 적었다5. 새로 온 제67군 병사들은 남이 파 놓은 교통호에 들어가 남이 남긴 탄피를 쓸어 냈다.

위에서 내려온 방어 지침은 짧았다. 적이 치는 진지는 하나하나 되풀이해 다투고, 쉽게 내주지 말라6. 제599연대는 주진지 앞으로 분대 크기의 전초를 몇 개 내밀어 두었다. 이실동 서쪽 고지, 491.8고지, 734고지 북쪽, 632.5고지, 그리고 602.2고지였다5. 중국 쪽은 고지의 높이를 소수점 한 자리까지 불렀다.

분대장 하나가 교통호 벽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 흙이 우리 지붕이다. 낮에는 엎드리고, 밤에 나가서 되찾는다.”

“저쪽에 새 부대가 왔답니다. 말이 영어도 아니고 조선말도 아니래요.”

“무슨 말을 하든 총알은 같은 소리를 낸다.”

*

1951년 9월 21일 아침, 적근산 동쪽 능선 — 700고지로 오르는 비탈.

공격 직전, 미군 연락장교는 주저항선의 관측호에서 쌍안경을 들었다. 700고지 꼭대기는 아침 안개 위로 드러나 있었고, 그 아래 비탈에는 에티오피아 소총수들이 바위 그늘마다 엎드려 있었다. 그는 연대에 무전을 넣었다.

“에티오피아 대대 출발선에 있음. 포병 준비 사격 요청.”

“알았다. 그 친구들 정말 올라가는 거 맞지?”

“올라갑니다. 문제는 언제 멈추느냐겠지요.”

미군 포병의 포탄이 700고지 꼭대기에 먼저 떨어졌다. 흙기둥이 솟을 때마다 비탈의 소나무 가지가 부러져 날렸다. 포격이 멎자 강뉴 대대의 소총수들이 바위 사이로 올라갔다. 미군 철모와 미군 군복을 입었지만, 소대장들이 지르는 구령은 암하라어였다.

중공군 전초의 기관총이 능선 위에서 터졌다. 맨 앞 분대가 엎드렸고, 뒤의 분대가 옆으로 돌았다. 수류탄이 교통호 안에서 터진 뒤에는 총검이 남았다. 기록은 이 싸움을 한 걸음 나아가고 한 걸음 밀리는 백병전으로 적었다. 그 끝에 대대는 700고지를 차지했다2. 700고지의 교통호 바닥에는 중공군이 두고 간 수류탄 상자와 쌀 주머니가 흩어져 있었다.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북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능선 끝에 602고지가 보였다.

같은 아침, 제599연대의 다른 전초들도 포격에 덮였다. 이실동 서쪽 고지, 491.8고지, 734고지 북쪽, 632.5고지에 들어가 있던 분대들은 한 곳씩 연락이 끊겼다. 그날과 이튿날 이 네 전초와 이웃 제595연대의 818.9고지 중대 진지가 미군 손에 넘어갔다고 중국 쪽 글은 적었다5. 602.2고지의 분대장은 무전이 하나씩 꺼지는 것을 듣고 교통호의 탄약 상자를 열었다.

그다음은 602고지였다. 첫날 그 비탈을 오른 부대는 1중대였다고 중국 쪽 기록은 적었다5. 602고지의 중공군은 700고지의 전초와 달랐다. 그들은 교통호와 엄체호 사이를 옮겨 다니며 쏘았고, 1중대가 능선 어깨에 닿을 때마다 박격포탄이 그 자리에 떨어졌다. 1중대는 사상자를 많이 내고 꼭대기에 닿지 못했다5. 비탈 중턱에서 앞 소대의 소대장이 손을 들어 엎드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손이 내려오기 전에 기관총탄이 바위를 긁었다. 뒤에서 기어 올라온 병사가 소대장의 허리띠를 잡아 바위 그늘로 끌어당겼다. 꼭대기까지는 마지막 백 미터가 남아 있었고, 그 백 미터는 해가 질 때까지 줄어들지 않았다. 한국 쪽 기념관 기록도 같은 날 602고지는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빼앗지 못했다고 적었다2.

해가 기울 무렵, 케베데의 무전기에서 연대 작전장교의 목소리가 났다.

“602는 내일 다시 갑니다. 오늘 밤 안에 병력을 수습하십시오. 무리하게 시신을 거두려다 사람을 더 잃지 말고.”

케베데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1중대장에게 사람을 보냈다.

“한 사람도 그 산에 두고 오지 마라.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밤사이 1중대 병사들이 602고지 비탈을 다시 기어올랐다. 둘이 한 조가 되어 쓰러진 전우의 탄띠를 잡아끌었고, 판초 우의로 시신을 감싸 들것 대신 메었다. 중공군 조명탄이 뜨면 시신과 함께 엎드렸다가, 불빛이 꺼지면 다시 움직였다. 강뉴 대대는 다친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전장에 남겨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그 뒤로 미군 사이에 오래 돌았다4. 그 이야기는 이런 밤들이 쌓여 생겼다.

700고지 아래 구호소에서 미군 위생병이 다친 에티오피아 병사의 소매를 걷으려 하자 병사가 팔을 거두었다. 에티오피아 병사 가운데에는 서양 의사를 믿지 않는 이가 많았다4. 옆에 누운 다른 병사가 뭐라고 한마디 하자 그제야 팔을 내밀었다.

“뭐라고 한 겁니까?”

위생병이 통역에게 물었다.

“이 사람 손이 내 손보다 깨끗하니 맡겨 보라고 했답니다.”

위생병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밑에는 아침부터 묻은 피와 흙이 까맣게 끼어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수통의 물로 손을 한 번 더 씻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다친 병사는 붕대가 다 감길 때까지 고개를 돌려 북쪽 능선만 보고 있었다. 그 능선 끝에 아직 내려오지 못한 동료들이 있었다.

*

1951년 9월 22일, 602고지 남쪽 비탈 — 강뉴 대대 1중대와 3중대 두 소대.

둘째 날, 대대는 1중대에 3중대의 두 소대를 붙여 다시 602고지로 보냈다5. 이번에는 미군이 가진 화력을 거의 다 끌어다 썼다. 중국 쪽 기록은 그 공격이 최대 화력, 특히 미군의 집중 포격을 등에 업은 것이었다고 적었다5. 한국 쪽 기록은 공군의 항공 지원을 함께 적었다2. 전폭기가 능선을 따라 낮게 날며 기총을 긁었고, 포탄은 꼭대기의 엄체호를 차례로 두드렸다.

“지붕이 날아간다! 엎드려!”

“분대장님, 저쪽이 또 옵니다. 어제 그 사람들입니다.”

“어제 그 사람들이면 어제 그 길로 온다. 왼쪽 바위를 겨눠라.”

602.2고지의 교통호에서 중국 병사들이 흙을 뒤집어쓴 채 외쳤다. 포격이 그치자마자 그들은 다시 총구를 내밀었다. 되풀이해 다투고 쉽게 내주지 말라는 지침대로였다6.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전날 동료들이 쓰러진 자리를 지나 올라갔다. 탄띠 자국과 피 묻은 판초 조각이 비탈에 남아 있었다. 앞서 가던 병사가 엎드려 손짓하면 뒤의 병사들이 그 자리에 멈추었고, 박격포탄이 떨어진 구덩이마다 두세 사람씩 몸을 밀어 넣었다. 전날 쓰러진 자리를 기억하는 1중대 병사들이 3중대 소대원들에게 길을 일러 주었다. 왼쪽 바위 뒤는 기관총이 닿지 않고, 오른쪽 소나무 줄기는 벌써 총알에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꼭대기 바로 아래에서 총검과 총검이 맞부딪쳤다. 춘천의 참전기념관 기록은 이 싸움을 격렬한 백병전으로 적었고, 그 끝에 대대가 602고지를 차지해 고지 위의 방어 시설을 부수고 돌아왔다고 적었다2. 국가보훈부 기록은 21일 700고지, 22일 602고지를 점령했고 적 179명이 죽었다고 적었다3.

꼭대기에 오른 병사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명령은 고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전초를 부수는 것이었다. 공병 폭약을 엄체호 입구에 밀어 넣고 도화선에 불을 붙인 뒤 모두 비탈 아래로 몸을 던졌다. 통나무로 덮은 지붕이 흙과 함께 솟았다가 내려앉았다. 분대장들은 사람 수를 세고, 들것 둘레에 네 사람씩 붙인 뒤에야 내려가자는 손짓을 했다.

중국 쪽 이야기는 다르다. 이날 미군의 공격은 제599연대의 분대급 전초 네 곳과 이웃 제595연대의 중대 진지 하나인 818.9고지를 빼앗았지만, 에티오피아 대대는 602.2고지를 끝내 빼앗지 못했다고 중국 쪽 글은 적었다. 같은 글은 미 제7사단이 이를 「스스로 물러난 것」이라 하여 승리로 셌다고 덧붙였다5.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걸 이긴 걸로 쳐야 하나?”

해 질 녘, 602고지 비탈을 다시 내려온 에티오피아 하사 하나가 담배를 말며 혼잣말을 했다. 옆의 병사가 대꾸했다.

“우리 명령서에는 꼭대기의 진지를 부수라고 적혀 있었소. 부수고 왔잖소. 그리고 다 데리고 왔소.”

그날 밤, 케베데는 중대장들의 보고를 하나씩 받았다. 중대장은 살아 돌아온 사람의 수를 먼저 말했고, 그다음 들것에 실려 온 사람의 수를 말했다. 산에 남겨 둔 사람의 수를 말한 중대장은 없었다. 케베데는 그 숫자들을 공책에 받아 적고 펜을 내려놓았다.

같은 밤, 602.2고지의 분대장은 무너진 교통호를 다시 팠다. 그는 에티오피아 병사들이 내려간 쪽 비탈을 내려다보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자기네 죽은 사람을 다 업고 갔다. 우리 쪽 시체를 셀 때도 저 사람들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쪽 기록에는 점령과 파괴 뒤의 복귀가, 다른 쪽 기록에는 빼앗지 못한 고지가 남았다. 두 기록이 모두 인정하는 것은 하나였다. 그 이틀 동안 강뉴 대대는 같은 산을 두 번 올랐다. 국방부 전사를 인용한 한국 논문은 대대가 이 작전에서 맡은 공격 과업을 격전 끝에 해내 군단과 사단으로부터 다시 한번 역량을 인정받았다고 적었다1.

*

1951년 9월 26일 이후, 적근산 남쪽 — 연대 예비로 물러난 강뉴 대대.

9월 26일, 대대는 연대 예비로 내려갔다5. 미국 대통령은 이 대대에 부대표창을 주었다. 표창장에는 「제1강뉴대대, 한국 파견 황실 원정군」이라는 이름이 적혔다7. 10월 21일, 대대는 북동쪽 양구 땅의 단장의 능선으로 옮겨 프랑스 대대와 임무를 바꾸었다2. 그들이 떠난 금성 남쪽에서는 10월 13일 유엔군의 더 큰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국 쪽 전사는 그 공세를 막는 사이 미 제7사단이 사상자가 많아 이선으로 물러났다고 주장했다6.

대대에는 군번 122번 훈데 자위 상병이 있었다. 그는 제1강뉴대대 병사로 한국에 왔고, 고국으로 돌아가 1960년 콩고의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다시 나갔다7. 제1진은 1952년 3월 28일 부산을 떠났다3. 대대는 한 개 중대 크기의 병력을 남겨 하루 뒤 부산에 내린 제2진이 현지에 익숙해지도록 도왔다1. 그 뒤로 1953년까지 대대가 두 번 더 바뀌었다. 뒤에 온 대대들은 철원과 김화, 연천의 다른 고지에서 다른 싸움을 치렀다1. 전쟁 동안 에티오피아는 전사자 121명, 부상자 536명을 냈다고 한국 정부 기록은 적었다. 다른 기록은 122명, 에티오피아 쪽 명단은 124명이다1. 에티오피아군 가운데 적의 포로가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1.

훗날 한국의 여러 책은 강뉴 대대가 253번 싸워 253번 이겼다고 적었다. 2024년, 한 한국 군사학자는 그 문장을 다시 따졌다. 그는 9월 12일 이욥 소대의 밤처럼 목표를 잡지 못하고 돌아온 싸움이 기록에 남아 있다며, 「대부분의 전투에서 임무를 달성했다」고 고쳐 써야 한다고 결론지었다1. 그 논문은 레마가 뚫은 퇴로를 승리로 세지 않았다. 대신 그 밤의 이름들을 논문 본문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1968년 5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에 왔다. 춘천 공지천 가에는 사자 모양을 본뜬 높이 십육 미터의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탑이 그 방문에 맞추어 섰다2. 1983년 10월 27일, 육군 제15사단은 적근산 아래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의 전방 초소 들머리에 적근산지구 전투 전적비를 세웠다8. 비의 소개문은 그 산에서 맞선 상대를 중공군 제67군 제199사단과 제200사단으로 적었다8. 에티오피아 병사들의 이름은 그 소개문에 없다.

아디스아바바에서 온 병사들이 처음 받은 고지 번호는 높이였다. 그들은 그 높이를 두 번 올랐고, 내려올 때마다 쓰러진 사람을 등에 지고 왔다.

사료 출처

1. 장재규(영남대 군사학과), 「에티오피아의 6‧25전쟁 참전 관련 역사적 사실 검증」, 『군사(軍史)』 131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24.6), 225~266쪽, doi.org/10.29212/mh.2024..131.225 — 강뉴 이름이 메넬리크 2세의 말에서 왔다는 국방부 전사의 설명(각주 8), 1951년 4월 13일 아디스아바바 출발·4월 16일 승선, 7월 6일 부산 출발·7월 15일 미 제7사단 제32연대 배속, 연대 예비로 화천 북방 적근산 배치와 수색·정찰 우선 부여, 정찰 성공 뒤 주방어진지 투입, 클리버 작전(1951.9.21~22, 적 전초·수색기지 격멸·주저항선 보강·금성 방향 진출 목적, 각주 18), 출정식 황제 훈시(스코르딜스 『강뉴』 2010 번역본 29쪽 인용, 각주 79), 1951년 9월 12일 소부대 공격 사례(테페라 중대장·이욥 소대장·레마 병사, 스코르딜스 97쪽과 국방부 『한국전쟁사』 10권 417~418쪽 인용), 전사자 121·122·124명 기록 비교, 포로 0명, 「253전 253승」 표현의 수정 제안, 클리버 작전 뒤 군단·사단의 인정과 미 대통령 부대표창, 참전 동기에 에리트레아 통합과 군 현대화라는 현실적 이익이 함께 있었다는 분석, 제1진이 1개 중대 규모 후발대를 남겨 제2진의 적응을 도움, 제2·3진의 철원·김화·연천 임무. 2.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춘천), 「전시실 안내 — 1층 1관」, epchun.kr/web/Introduction/Introduction_2_1 — 국제연맹 호소가 무위로 끝난 경험과 집단행동의 필요성, 1950년 8월 황실 근위대로 대대 편성, 4월 13일 출국 신고식의 명명, 대대 1,153명과 사령부 35명, 지부티 승선과 21일 항해, 5월 6일 아침 부산 도착과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 8월 9일 노동리에서 사단 예비, 8월 12일 적근산 전방 797고지 서북쪽 봉당덕리의 첫 교전, 8월 15일 네 시간여 격전, 9월 14일까지 정찰·탐색전 18회, 클리버 작전에서 700고지 점령 뒤 602고지 공격 계획, 21일 백병전 끝 700고지 점령과 602고지 탈취 실패, 이튿날 항공 지원과 백병전 끝 602고지 점령·방어 시설 파괴 뒤 복귀, 미 대통령 부대표창, 10월 21일 프랑스 대대와 교대, 1968년 춘천 기념탑(사자상, 16미터, 1968년 5월 황제 방한에 맞추어 완공). 3. 국가보훈부(영문), 「Background of Participation and Activity of each Forces — Ethiopia」,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32 — 1,200명 황실 근위대 대대, 대대장 케베데 게브레 중령(원문: Lieut. Colonel Kebbede Guebre), 동래 유엔군 훈련소(원문: UN camp in Dongrae) 훈련, 9월 21일 삼현 부근 700고지 점령, 이튿날 포병·항공 지원으로 602고지 점령, 적 사망 179명, 미 대통령 표창, 1952년 3월 28일 귀국. 4. Robert Neff, 「Fearsome reputation: Ethiopian soldiers and the Korean War」, The Korea Times 2020.6.27, koreatimes.co.kr/amp/opinion/20200627/fearsome-reputation-ethiopian-soldiers-and-the-korean-war — 미군 장교들의 회의적 시선과 후방 배치론, 에티오피아 쪽의 전선 고집, 영어와 미군 전술에 낯섦, 서양 의사에 대한 불신, 다친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남겨 두지 않았다는 평판. 5. 「253战,全胜!朝鲜战争居然还有这样的军队?」, 텐센트 뉴스(腾讯新闻) 군사 자체 매체 「这才是战争」 게재, 2022.4.7, news.qq.com/rain/a/20220407A0BI6P00 — 8월 15일 2중대 1소대의 첫 교전, 8월 16일 2중대 2소대의 역매복과 소대장 「阿贝比」 중위·「凯比德」 중사의 퇴로 개척(중공군 네 명 저지), 8월 26일~9월 3일 흑운토령(黑云吐岭) 쟁탈(제27군의 조선 마지막 대규모 전투, 진지가 수십 차례 주인이 바뀜)과 9월 4일 제27군·제67군 교대, 9월 21일 「利刃行动」(클리버 작전)에서 강뉴 대대 목표 602.2고지, 제599연대 전초(이실동 서고지·491.8·734 북고지·632.5)와 제595연대 818.9고지 피탈, 강뉴 대대의 602.2고지 탈취 실패와 미 제7사단의 「주동 철수」 주장, 첫날 1중대의 큰 손실, 둘째 날 1중대와 3중대 두 소대의 재공격(「以最大火力,尤其是美军的密集炮火为后盾的」), 9월 26일 예비 전환. 개인 매체 글이고 근거 문헌을 밝히지 않았다. 6. 「1951年夏秋防御战役」, 신랑망(新浪网) 2000.6.20, news.sina.com.cn/world/2000-06-20/99214.html — 「对敌进攻的每一阵地必须与其反复争夺,不得轻易放弃」, 제67군이 제27군의 금성 지구 방어를 인수하고 제27군은 뒤로 물러나 휴식, 10월 13일 유엔군 공세와 「美军第7师因伤亡惨重撤至二线休整」. 7. Korean War Legacy Project, 「Ethiopia」 참전국 페이지와 훈데 자위 상병 약력, koreanwarlegacy.org/?p=20884 — 미 대통령 부대표창의 이름(원문: First Kagnew Battalion, Imperial Expeditionary Force to Korea), 군번 122번 훈데 자위 상병, 1960년 콩고 평화유지 파견, 2006년 1월 17일 81세로 사망. 8. UN평화기념관, 「적근산지구 전투전적비」 소개, unpm.or.kr/un2022/sub.php?MenuID=126&bCode=X8&mode=view&bo_no=40 — 1983년 10월 27일 육군 제15사단 건립,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 99-14 전방 초소 입구, 높이 2.3미터, 미 제7사단 제32연대에 배속된 에티오피아 대대, 상대는 중공군 제67군 제199·200사단.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하일레 셀라시에 1892년생(영문 위키백과 「Haile Selassie」). 케베데 게브레, 테페라, 이욥, 레마, 훈데 자위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훈데 자위는 2006년 1월 17일 81세로 죽었다는 기록(7번)으로 보아 1924년이나 1925년생으로 짐작되지만 확정할 수 없다. [자료 충돌] 602고지의 결과 — 한국 쪽 기록(국가보훈부, 춘천 참전기념관, 장재규 논문이 인용한 국방부 전사)은 22일 재공격으로 602고지를 점령하고 방어 시설을 부순 뒤 복귀했다고 적고, 중국 쪽 개인 매체 글은 끝내 빼앗지 못했고 미 제7사단이 이를 「주동 철수」로 불러 승리로 셌다고 적었다. 국가보훈부 영문은 21일 700고지·22일 602고지 점령으로, 참전기념관은 21일 602고지 1차 공격 실패를 함께 적었다. 본문은 두 쪽 주장을 모두 적었다. 중국 쪽 글은 근거 문헌을 밝히지 않아 공식 전사로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대대장 — 국가보훈부와 영문 위키백과는 제1진 지휘관을 케베데 게브레 중령으로, 중국 쪽 글은 대대장을 「伊尔格图中校」(테쇼메 이르게투)로 적었다. 1952년 3월 유엔 사진 설명에는 이르게투 중령이 에티오피아 대대장으로 나온다. 본문은 국가보훈부를 따라 케베데 게브레로 적었다. [자료 충돌] 첫 교전 — 춘천 참전기념관과 국가보훈부는 8월 12일 봉당덕리를 첫 교전으로, 중국 쪽 글은 8월 15일 2중대 1소대가 매복을 당한 일을 첫 전투로 적었다. 적근산 전적비 소개문(8번)은 8월 12일~24일 적근산 동북 고지 전투로 적었다. 본문은 8월 12일을 따랐다. [자료 충돌] 인원 — 출국 인원은 1,153명(참전기념관·장재규 논문), 1,158명(에티오피아 언론), 1,165명(중국 쪽 글), 약 1,200명(국가보훈부)으로 갈린다. 도착 뒤 훈련 기간도 여덟 주(국가보훈부·논문)와 여섯 주(SBS 보도)로 다르다. [자료 충돌] 적 손실 — 국가보훈부는 이 전투의 적 사망을 179명, 적근산 전적비 소개문은 8월 전투의 적 사살을 약 130명으로 적었다. 중국 쪽 자료에서는 602.2고지의 손실 수를 찾지 못했다. 에티오피아 대대의 이 전투 사상자 수는 어느 자료에서도 찾지 못했다. [자료 충돌] 8월 16일의 두 이름 — 중국 쪽 글의 「阿贝比」 중위와 「凯比德」 중사를 아베베·케베데로 되옮겼다. 원래 에티오피아 이름의 철자는 확인하지 못했고, 같은 이름의 대대장 케베데 게브레와는 다른 사람이다. [재구성] 지휘 천막의 미군 연락장교·통역·1중대 장교의 대화(「칠백이 산 이름입니까?」), 2중대장과 케베데의 대화(「높은 데를 먼저 쥐어야」), 천막의 기도와 조명탄, 「케베데가 길을 연다」는 농담, 공격 직전 연락장교의 무전, 700고지 교통호에 남은 물자, 602고지 비탈 중턱의 소대장 장면, 22일 중국 분대장과 병사의 대화, 고지 위 폭약 장면, 케베데가 보고를 받아 적는 밤, 602.2고지 분대장이 한 말, 위생병이 손을 씻는 장면, 케베데가 9월 12일 밤을 떠올리는 장면, 제599연대 분대장과 병사의 대화, 700고지 비탈의 포격과 구령 묘사, 케베데와 연대 작전장교의 무전, 「한 사람도 그 산에 두고 오지 마라」는 명령과 밤의 시신 수습 장면(남겨 두지 않았다는 평판은 4번 기록), 구호소의 위생병과 부상병 대화, 22일 중국 병사들의 외침, 에티오피아 하사와 병사의 대화, 전폭기 기총 묘사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훈데 자위가 이 두 고지 공격에 직접 나섰는지는 기록에 없어 본문에서 전투 장면에 넣지 않았다. 황제의 훈시는 장재규 논문이 인용한 스코르딜스 번역본 문장을 조금 다듬어 옮겼다. 강뉴는 영어 표기 Kagnew를 한국 기록이 적는 이름이고, 제목의 카그뉴는 영어 읽기를 따랐다.

4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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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602고지 전투 — 카그뉴, 낯선 산의 이름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