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13,589자)
단장의 능선 전투 — 끝나지 않는 능선
1950 · 네오
1951년 9월 13일 목요일 새벽 다섯 시 반, 강원도 양구군 사태리(현 양구군 동면 사태리) — 피의 능선 북쪽, 좁은 골짜기 입구의 미 제2사단 제23보병연대 공격 출발선.
포성이 삼십 분 동안 북쪽 능선을 두드렸다. 제3대대장 크레이븐 중령은 포탄이 멎자마자 중대들을 한 줄로 세워 골짜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뒤를 대니얼스 중령의 제2대대가 따랐다1. 목표는 골짜기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능선이었다. 남쪽 끝에 894고지, 그 북쪽 천이백 미터에 가장 높은 931고지, 다시 천구백 미터 북쪽에 바늘처럼 솟은 851고지가 있었다1. 연대는 동쪽에서 올라가 931고지와 851고지 사이를 끊고, 한 대대는 북쪽으로, 한 대대는 남쪽으로 돌 계획이었다1.
닷새 전 사단 지휘소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포병 지휘관 에드윈 워커(41) 대령은 지도 위의 능선을 손끝으로 눌렀다.
“놈들은 저기서 죽기 살기로 버팁니다. 피의 능선보다 더할 겁니다.”
참모 몇은 고개를 저었다. 북한군은 피의 능선에서 진 지 여드레밖에 안 되었고, 새 진지를 제대로 팔 시간이 없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사단장 대리 드샤조 준장도 그쪽에 섰다. 그는 연대 둘 대신 제23연대와 거기 붙은 프랑스대대만 공격에 넣었다1. 한 관측자는 그 능선을 보고 「등뼈가 수백 마디인 물고기 뼈」 같다고 적었다1.
“물고기 뼈면 발라 먹기 쉽겠네.”
“생선 가시 목에 걸려 본 적 없지? 그거 하나 빼려고 밤새 밥을 삼켜야 해.”
골짜기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능선 위에서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태리 마을 둘레 높은 땅에서도 포탄이 날아왔다. 제3대대가 능선으로 오르는 동서 방향 지맥에 닿자 덤불 속 벙커들이 한꺼번에 기관총을 쏘았다.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의 진지였다. 벙커는 서로의 앞을 엇갈려 지켜 주고 있었다1. 해가 질 무렵 대대는 지맥 발치에 개인호를 팠다. 하루 만에 능선을 끊겠다는 계획은 거기서 끝났다.
포대들은 멀리 흩어져 있었다. 연대를 바로 받치는 제37야전포병대대의 105밀리 곡사포들은 능선 남동쪽 오 킬로미터쯤에 있었고, 8인치 곡사포 한 포대는 남쪽 십팔 킬로미터 밖에서 쏘았다1. 포탄이 능선을 덮는 동안 북한군은 벙커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포격이 멎고 미군 소총수들이 정상 몇 미터 앞까지 기어오르면 그제야 총구를 다시 내밀고 기관총과 수류탄을 쏟았다1.
드샤조는 저녁 보고를 받고 북한군을 얕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728고지를 치려고 기다리던 린치 대령의 제9연대를 894고지로 돌렸다1. 14일 아침 제9연대 제2대대가 제72전차대대 B중대의 전차와 중박격포, 155밀리 곡사포 한 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894고지 남서쪽 어깨를 올랐다. 15일 오후 대대는 정상을 쓸어 냈다. 거기까지 사상자는 열한 명뿐이었다1. 그러나 북한군은 이틀 동안 몇 번이고 되돌아와 정상을 치받았고, 대대는 그 이틀에 이백 명 넘게 잃었다1. 894고지를 쥐어도 931고지의 총구는 하나도 줄지 않았다.
*
1951년 9월 17일 월요일 밤 열 시 무렵, 931고지 남쪽 지맥 — 미 제23연대 제1대대 C중대 앞쪽 소대 진지.
하와이 와이아나에 출신 일등병 허버트 필릴라아우(22)는 소대의 자동소총 사수였다. 스스로 그 무거운 총을 들겠다고 나선 사람이었다. 기독교 신앙 때문에 총을 들지 말지를 두고 한동안 망설인 적도 있었다2. 오후 내내 북한군은 몇 번씩 진지를 떠보았고, 소대는 포병과 박격포의 도움으로 그것을 막아 냈다2.
밤 열 시께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의 두 대대가 한꺼번에 몰려왔다2. 그 연대는 바로 하루 전 제1연대와 자리를 바꾸어 능선에 올라온 새 부대였다. 북한군은 문등리(현 양구군 방산면 문등리) 골짜기 쪽 완만한 서쪽 비탈로 사람과 탄약을 마음대로 올려 보낼 수 있었다1. 탄약이 바닥을 보이자 소대는 중대 본대로 물러나라는 허락을 받았다. 필릴라아우의 분대가 남아 뒤를 막았다2.
나중에는 필릴라아우와 분대장 둘만 원래 진지에 남았다. 포병 관측장교 리처드 해거 중위가 그의 바로 앞쪽으로 포탄을 불러 내렸다. 포탄이 너무 가까이 떨어지자 해거는 소리쳐 불렀다2.
“필릴라아우! 맞았나?”
“괜찮습니다! 계속 쏘세요!”
자동소총 탄약이 떨어지자 그는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도 떨어지자 돌을 던졌다. 아래쪽 새 진지의 전우들은 그가 참호용 칼을 쥐고 다른 손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둘러싸였고, 총검에 찔려 쓰러졌다2. 다음 날 소대가 진지를 되찾았을 때 그의 몸 둘레에는 북한군 시신 마흔 구가 있었다2. 그는 하와이 원주민으로는 처음으로 명예훈장을 받았다2.
그 무렵 비아리(현 양구군 동면 비아리) 쪽 좁은 골짜기 길은 차량으로 막혀 있었다. 한국인 짐꾼들은 포탄이 가까이 떨어지면 짐을 길가에 내려놓고 흩어졌다. 소총수들이 탄약 상자를 지고 올라가고 들것을 메고 내려왔다. 앞쪽 진지에서 부상자 한 사람을 골짜기까지 내리는 데 열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1.
*
1951년 9월 19일 수요일, 894고지 남쪽 — 미 제2사단 지휘소.
린치 대령이 지도 위 문등리 골짜기 건너편을 짚었다. 894고지 남서쪽 오 킬로미터의 867고지와 육 킬로미터의 1024고지였다.
“제9연대 제1대대를 골짜기 건너로 보내 저 두 산을 치게 해 주십시오. 놈들은 우리가 서쪽에서 능선을 감싸 돌려 한다고 볼 겁니다. 그러면 사람과 포를 빼서 그쪽을 막겠지요.”
드샤조는 고개를 저었다. 군단장 바이어스가 931고지를 맨 먼저 차지하라고 못 박아 두었다1.
“931고지가 먼저요. 군단 명령이오.”
이튿날 새 사단장 영 소장이 왔다. 그는 린치의 계획을 다시 읽고 옳다고 했다1. 제9연대가 1024고지를 쳤고, 서쪽에서는 국군 제7사단이 1142고지로 올라갔다. 25일 제9연대 제1대대가 1024고지 정상을 쓸었고, 이튿날 국군 제7사단이 1142고지를 차지했다1. 북한군은 867고지를 지키려고 제6사단 제3연대를 단장의 능선에서 빼내 그쪽으로 돌렸다1. 그래도 931고지의 벙커는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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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9월 26일 수요일 오후 한 시 반, 931고지 북쪽 능선 — 프랑스대대 제2중대.
프랑스대대는 제23연대 제2대대와 자리를 바꾸어 능선 북쪽에서 931고지를 향해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야 했다1. 공격 직전 대대는 57밀리와 75밀리 무반동총을 벙커 바로 앞까지 끌어올려 걸어 놓았다3. 사흘 전인 23일에는 제1대대장 윌리엄스 소령이 남쪽에서 정상에 한때 올라섰다. 새벽에 북한군의 역습이 왔고, 탄약이 떨어진 대대는 다시 내려와야 했다1.
제2중대장 로베르 구필(29) 대위는 맞은편 931고지 정상을 쌍안경으로 보았다. 그는 아홉 해 가까이 인도차이나에서 싸운 장교였고, 지평리에서는 대대 안 한국인 중대를 이끌었다. 인제 싸움 뒤 한국인 중대가 제2중대와 합쳐지면서 그 중대를 맡았다4. 중대에는 프랑스 병사와 한국 병사가 한 참호에 섞여 있었다.
그해 3월 대구 훈련소에서 이십 일을 배우고 프랑스대대로 온 한국인 병사 박동하도 이 능선에 있었다. 그는 단장의 능선에서 선발대로 뽑혀 프랑스군과 함께 고지를 올랐다고 훗날 회고했다5.
“프랑스 말로 ‘앞으로’가 뭐라고 했지?”
“‘앙나방’이요. 근데 저 사람들, 그 말 하기 전에 벌써 뛰어나가 있어요.”
무반동총이 벙커 입구를 겨누어 쏘았고, 동쪽 사태리 골짜기의 연대 전차들도 직사로 거들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박격포 진지와 기관총 진지는 끝내 부서지지 않았다3. 북한군 제15연대가 프랑스대대를 막아 냈다1. 구필은 박격포탄에 맞아 그날 능선에서 전사했다4. 지난해 12월 대대 안에 한국인 중대를 만들자고 앞장선 사람이었다4.
그날 저녁 연대장 애덤스 대령은 새 사단장 영(50) 소장에게 보고했다.
“지금 계획대로 계속 올라가라는 건 자살입니다.”
영은 숫자를 받아 적었다. 제23연대 사상자만 950명이 넘었고, 사단 전체로는 1,670명이 넘었다1. 애덤스는 공격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능선 둘레의 북한군을 여러 곳에서 동시에 묶어 두면, 931고지의 제15연대에 보충병을 보낼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연대가 그 부대를 갉아 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1. 군단장 바이어스(51) 소장은 이튿날 동의했다. 27일, 능선 공격이 멈추었다1.
영은 뒤에 첫 공격을 「대실패」라고 불렀다. 부대를 조금씩 나누어 넣었고, 화력지원조를 짜지 않았으며, 사단 사상자의 85퍼센트가 북한군 박격포에서 나왔다1. 그해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은 공산군 쪽이 시간을 끄는 사이 제자리를 맴돌았고, 유엔군은 판을 키우지 않는 선에서 고지를 하나씩 눌러 회담장에 압력을 넣고 있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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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0월 초, 문등리 골짜기 입구 — 미 제2공병대대.
사단 작전참모 멜런 소령이 짠 새 계획에는 「터치다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 연대가 한꺼번에 움직이고, 사단 포병 전부가 받쳐 주고, 제72전차대대가 문등리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작전이었다1.
“터치다운? 미식축구 하자는 겁니까?”
“공을 끝 구역에 들고 들어가면 점수가 나지. 우리 공은 셔먼 전차고.”
“그 공, 굴러가기는 하나요?”
공병대대장 러브 중령이 먼저 그 물음에 답해야 했다. 골짜기 길은 포탄 구덩이투성이였고 북한군이 지뢰를 묻어 두었다. 한 곳에는 높이 이 미터 가까운 바윗더미가 쌓여 있었고, 그 위에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들이 흩어져 있었다. 공병들은 폭약 오십 킬로그램을 바윗더미 둘레에 놓고 수류탄째 날려 버렸다1. 불도저는 고치는 중이었고, 굴러가더라도 그 소리가 위쪽 북한군 포를 부를 판이었다. 병사들은 삽으로 구덩이를 메웠다. 길가 양쪽에 테트릴 폭약을 사슬처럼 십오 미터마다 놓고 터뜨려 묻힌 지뢰를 함께 터지게 했다. 지뢰가 너무 촘촘한 곳에서는 길을 지뢰가 없는 개울 바닥으로 옮기고 바위를 치웠다1.
10월 3일에는 제23연대의 스터먼 소령 밑으로 연대 전차중대, 사단 수색중대, 프랑스대대 공병 한 소대, 보병 한 중대가 묶였다. 스터먼 특수임무부대는 동쪽 사태리 골짜기로 들어가 능선 동쪽 비탈의 벙커를 부수고, 북한군의 포를 자기들 쪽으로 끌어당기는 미끼 노릇을 맡았다1. 4일에는 전투폭격기 마흔아홉 대가 사단 정면을 두드렸고, 스터먼의 전차들이 사태리 골짜기를 들쑤시고 나왔다1. 5일 늦은 오후 사단 포병이 문등리 골짜기 쪽 북한군을 때리기 시작했고, 미 해병대의 콜세어 전투기들이 네이팜과 로켓을 북한군 진지에 쏟았다1. 그 무렵 능선 둘레 북한군 연대들은 어느 하나도 천 명이 되지 않았다1.
그사이 제23연대는 대대마다 마흔여덟 시간씩 줄에서 빼내 보충병을 받았다. 대대장들은 전차와 기관총과 박격포를 어디에 둘지 그린 화력 계획을 사단에 올렸다. 모래판 위에 능선 모형을 만들어 놓고 총 놓을 자리를 골랐다1. 서쪽 제38연대에는 네덜란드대대가 붙어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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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0월 5일 금요일 밤 아홉 시, 894고지에서 931고지로 오르는 능선 — 미 제23연대 제2대대.
이번에는 공격 전 포격이 없었다. 대니얼스의 제2대대가 남쪽에서 931고지를 치고, 크레이븐의 제3대대가 뒤를 받쳤다. 북쪽에서는 프랑스대대가, 851고지 쪽으로는 제1대대가 공격하는 척 북한군의 눈을 끌었다1. 대대가 움직이자 제37야전포병대대가 알려진 북한군 박격포 진지 전부에 포탄을 쏟았다. 한 달 동안 병사들을 쓰러뜨린 박격포가 처음으로 먼저 얻어맞았다1.
병사들은 화염방사기와 수류탄과 소총으로 벙커를 하나씩 비웠다. 6일 새벽 세 시, 두 대대가 931고지 남쪽 절반을 차지했다. 예상한 역습이 왔고, 대대는 그것을 물리쳤다1. 날이 밝자 프랑스대대가 북쪽에서 내려왔고 두 대대가 남쪽에서 올라가 만났다. 정오 전에 931고지는 제23연대 손에 들어왔다1. 구필이 쌍안경으로 보던 그 정상이었다.
같은 시각 서쪽 문등리 골짜기에서도 일이 풀리고 있었다. 제38연대는 4일 북한군이 728고지 남쪽 1.6킬로미터의 485고지를 버리고 간 것을 알아냈고, 6일 정오 무렵 제1대대가 가벼운 저항만 받고 728고지에 올랐다. 이틀 뒤 제2대대가 636고지를 차지했다. 두 고지가 골짜기 위를 덮어 주자 러브의 공병들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남은 전차길을 닦을 수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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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0월 10일 수요일 아침, 문등리 골짜기 북쪽 — 중국인민지원군 제68군 제204사단 제610연대 진지.
사단장 차오위칭이 이끄는 제204사단은 제610·611·612연대로 짜여 있었다7. 중국인민지원군 제68군은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그 무렵 북한강 동쪽에서 지쳐 무너져 가던 북한군 제5군단의 자리를 넘겨받는 중이었다7. 제204사단의 앞선 부대들은 북한군이 비운 진지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1. 제610연대장 상즈궁(30)은 열두 살에 지주 집 머슴으로 들어갔다가 열일곱에 팔로군이 된 사람이었다8. 그는 연대에 딸린 대전차 무기와 덧붙여 받은 무기, 공병 한 중대를 한데 묶어 대전차 대대를 꾸렸다9.
“미군 전차가 이 골짜기로 들어올 수 있습니까? 길이 저 모양인데.”
“인민군도 못 들어온다고 했지. 그런데 저 소리는 뭐냐.”
골짜기 아래에서 셔먼 전차의 엔진 소리가 올라왔다. 우즈 중령의 제72전차대대가 제38연대 L중대와 공병 한 소대를 데리고 북쪽으로 달려 올라오고 있었다1. 지원군은 골짜기에 전차가 들어오리라고 보지 않았다1. 앞선 중공군 부대들은 아직 새 진지로 가는 길 위에 있었다. 전차들은 백 미터쯤 간격을 두고 서로를 지켜 주며 보이는 대로 쏘았고, 문등리 마을과 그 너머까지 밀고 올라가 능선 서쪽 비탈로 오르는 보급로를 끊었다1. 전차대대도 오는 길에 전차를 잃었다1.
상즈궁의 대전차 대대는 길과 그 양옆에서 76.2밀리 평사포, 무반동총, 로켓포, 대전차 수류탄으로 전차를 겹겹이 쳤다9. 지원군은 열흘 동안 싸워 전차 36대를 부수거나 망가뜨렸다고 기록했다9. 다른 중국 쪽 서술은 열흘 밤낮에 700여 명을 섬멸하고 전차 28대를 부수었다고 적었다7. 제610연대는 뒤에 「문등천을 열석 달 지켜 적 전차를 고철로 만들었다」는 글귀를 수놓은 깃발을 받았다8.
그 전날 골짜기 서쪽 605고지에서는 제38연대 L중대의 촉토족 출신 중사 토니 버리스(21)가 두 번 총에 맞고도 기관총 진지 둘을 수류탄으로 부수다 쓰러졌다10. 그 산 이름은 단장의 능선 싸움의 한 고지로 그의 훈장 문서에 남았다10.
*
1951년 10월 13일 토요일 새벽, 851고지 정상 아래 — 프랑스대대 제2중대.
10일 대니얼스의 제2대대는 능선에서 서쪽으로 내려가 문등리 마을 남쪽 일 킬로미터 반쯤의 520고지를 차지했다. 그 고지는 851고지로 이어지는 동서 지맥의 끝이었다1. 같은 날 골짜기 서쪽에서는 제9연대가 총검 돌격으로 1005고지에 올라섰다1. 851고지 뒤에는 북한군 제13사단의 제21연대가 바로 받치고 있었고, 제19연대는 사태리 골짜기를 막고 있었다1.
나흘 동안 제1대대와 프랑스대대는 벙커 하나씩 851고지로 다가갔다. 포로는 거의 없었다. 벙커 안의 북한군은 죽거나 다치기 전에는 나오지 않았다1. 851고지는 북한군 제13사단 제23연대가 지키고 있었다1. 제3대대는 520고지와 851고지를 잇는 지맥으로 옮겨 서쪽에서 눌렀다1.
해 뜰 무렵 프랑스대대가 정상으로 뛰어올랐다. 마지막 봉우리를 차지한 것은 구필이 이끌던 제2중대였다11. 서른 날 만에 능선 전체가 제23연대 손에 들어왔다1. 대대 지원중대는 그 달 이 능선에서 12.7밀리 기관총을 쏘았다12. 이 공격에서 다친 사람 가운데에는 장교 장 라르테기(30)도 있었다. 그는 뒷날 이 싸움을 소설로 썼다13.
박동하도 그 능선 어딘가에서 아침을 맞았다. 프랑스대대 안 한국인 병사 가운데 열아홉 명이 프랑스 전우들과 함께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12. 그는 일흔 해 뒤인 2021년 봄 서울 프랑스대사관에서 프랑스 군사 훈장을 받았다. 함께 받은 박문준은 말했다5.
“더 용감하게 싸운 전우들이 많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내가 이 훈장을 받는 게 미안합니다.”
10월 15일, 제38연대가 문등리 골짜기 서쪽 1220고지를 차지하면서 터치다운 작전이 끝났다1. 9월 13일부터 그날까지 미 제2사단의 사상자는 3,700명이 넘었고, 그 절반 가까이가 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에서 나왔다1. 사단은 북한군 제6·12·13사단과 중공군 제204사단의 사상자를 2만 5천 명 가까이로 어림했다1. 105밀리 곡사포탄만 401,000발이 그 능선에 떨어졌다1. 그 일대 전선은 8킬로미터 넘게 북쪽으로 올라갔다1.
능선 이름은 종군 기자들이 붙였다1. 한국 사람들은 그 말을 「창자가 끊어지는 능선」으로 옮겼다. 그 북쪽에도 번호만 다른 능선이 또 있었다.
사료 출처
1.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미 육군 군사사편찬실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총서, 1966) 82~97쪽 「Heartbreak Ridge」,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Heartbreak Ridge」(2026년 10월 열람)가 쪽수를 달아 옮긴 것으로 확인 — 세 고지의 위치와 거리(894고지에서 931고지까지 1,300야드, 다시 851고지까지 2,100야드), 제37야전포병대대(능선 남동쪽 3마일)와 780야전포병대대 C포대 8인치(남쪽 11마일), 포격이 걷히면 벙커에서 나와 쏘는 북한군, 14~15일 제9연대 제2대대의 894고지 점령(제72전차대대 B중대 엄호, 사상 11명, 이후 이틀 200여 명), 19일 린치의 867·1024고지 제안과 드샤조의 거부(군단의 931고지 우선 지시), 20일 영의 승인, 25일 1024고지·26일 국군 제7사단 1142고지, 북한군 제6사단 제3연대의 867고지 이동, 10월 3일 스터먼 특수임무부대 편성과 미끼 임무, 4일 전투폭격기 49대, 5일 해병 콜세어의 네이팜·로켓, 북한군 연대 병력 천 명 미만, 4일 485고지 포기와 6일 정오 728고지·8일 636고지, 10일 제2대대의 520고지와 제9연대의 1005고지 총검 돌격, 북한군 제13사단 제21·19연대 배치, 「spinal column of a fish, with hundreds of vertebrae」 비유, 워커의 판단(원문: fight like hell)과 드샤조의 한 연대 투입, 9월 13일 05시 30분 30분 포격과 제3·2대대 종대 공격,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 벙커, 16일 제13연대 교대와 문등리 쪽 완만한 서쪽 비탈, 비아리 골짜기의 차량 정체와 짐꾼, 들것 후송 최대 10시간, 23일 윌리엄스의 제1대대 정상 일시 점령과 탄약 소진 후 철수, 프랑스대대의 북쪽 공격과 제15연대, 26일 애덤스의 「suicide」 보고, 제23연대 950명·사단 1,670명 사상, 영의 「fiasco」 평가와 박격포 85퍼센트, 멜런의 터치다운 계획, 러브의 공병(6피트 바윗더미와 핀 뽑은 수류탄, 110파운드 폭약, 삽, 50피트 간격 테트릴, 개울 바닥), 48시간 보충과 화력 계획·모래판, 네덜란드대대의 제38연대 배속, 10월 5일 21시 공격·공격 전 포격 없음·제37야전포병대대 대박격포 사격, 6일 03시 남쪽 절반·정오 전 931고지 점령, 10일 제72전차대대(우즈)·L중대·공병 소대 돌진과 중공군 제204사단의 교대 중 피습, 전차 100야드 간격, 북한군 제13사단 제23연대의 851고지, 13일 새벽 프랑스대대의 정상 점령(원문: Monclar's French troops stormed the peak), 15일 1220고지, 사상자 3,700여·적 손실 추정 25,000, 105밀리 탄 401,000발, 5마일 넘는 전진, 이름을 종군 기자가 붙임. 2. 영문 위키백과, 「Herbert K. Pililaau」(2026년 10월 열람, Millett 인용) — 1928년 10월 10일 와이아나에 출생, 자원해 맡은 자동소총 사수, 신앙에 따른 망설임, 9월 17일 C중대의 931고지 공격, 오후의 탐색 공격, 밤 10시께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 두 대대, 철수 허가와 엄호, 해거 중위의 포격 요청과 문답, 수류탄·돌·참호용 칼, 총검에 전사, 다음 날 시신 40구, 하와이 원주민 첫 명예훈장. 3. 한국어 위키백과, 「단장의 능선 전투」(2026년 10월 열람) — 9월 26일 13시 30분 프랑스대대가 57밀리·75밀리 무반동총을 근접 설치하고 공격, 제23전차중대의 엄체호 사격, 박격포·기관총 진지 파괴 실패. 4. 프랑스어 위키백과, 「Robert Goupil (capitaine)」(2026년 10월 열람) — 1921년 8월 18일 파리 출생, 인도차이나 근무 약 9년, 1950년 12월 한국인 중대 창설을 지지하고 지휘, 인제 전투 뒤 제2중대와 합병해 지휘, 1951년 9월 26일 931고지를 향한 공격 중 전사. 5. 정충신, 「佛 최고 군사훈장 받은 두 老兵」, 문화일보 2021.3.11, munhwa.com/article/11230876 — 박동하·박문준이 1951년 3월 13일 프랑스대대에 배치, 대구 훈련소 약 20일, 단장의 능선에서 박동하가 선발대로 고지 점령, 박문준의 「미안하다」는 말,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군사훈장 수여. 6. 김양명, 「단장의 능선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Article/E0013650 — 휴전회담 중 유엔군의 군사적 압력과 제한 목표 공세, 9월 13일~10월 13일, 국군 제7사단의 문등리 계곡 건너편 협동 공격. 7. 중국어 위키백과, 「中国人民志愿军」·「中国人民解放军第六十八军」·「伤心岭战役」(2026년 10월 열람) — 제204사단장 차오위칭(曹玉清)과 제610·611·612연대 편성, 제610연대장 상즈궁, 제68군의 1951년 6월 9일 입조, 북한군 제5군단 진지 인수, 10월 8일 미 제2사단·국군 제8사단이 전차 40여 대로 문등리에 「坦克劈入战」, 열흘 밤낮 700여 명 섬멸·전차 28대 격파. 8. 중국어 위키백과, 「尚志功」(2026년 10월 열람) — 1920년생, 12세 머슴, 1937년 팔로군, 1951년 초 제204사단 제610연대장, 「坚守文登川十三个月,变敌坦克为废铁」 깃발과 삼등공신단 칭호. 9. 「志愿军反坦克战」, 新浪新闻 2000.6.20, news.sina.com.cn/world/2000-06-20/99195.html — 제610연대가 건제·증강 대전차 무기와 공병 1개 중대로 대전차 대대를 편성, 76.2밀리 가농포·무좌력포·로켓포·대전차 수류탄으로 층층이 타격, 열흘 동안 전차 36대 격파·격상. 10. 영문 위키백과, 「Tony K. Burris」(명예훈장 공적서 전문 수록, 2026년 10월 열람) — 1929년 5월 30일생, 촉토족, 제38연대 L중대, 10월 8~9일 문등리 부근, 두 차례 부상, 57밀리 무반동총 호출, 기관총 진지 둘 파괴 뒤 전사, 605고지 확보. 11. 프랑스어 위키백과, 「Bataillon français de l'ONU」(2026년 10월 열람) — 10월 13일 새벽 마지막 봉우리를 프랑스대대 제2중대가 차지, 제2중대장 구필 대위의 9월 말 전사, 대대장 명단. 12. 프랑스 군사부, 「추모의 길」 한국어판 소책자(2023), cheminsdememoire.gouv.fr/sites/default/files/2023-07/202303.0028_LDCM_282_20pages_COREEN.pdf 및 같은 경로 「Cahier_Central_282_COREEN.pdf」 — 단장의 능선에서 지원중대가 쓴 12.7밀리 기관총 사진(1951년 10월), 프랑스대대 안 한국인 병사 19명 전사, 몽클라르가 1950년 9월~1951년 9월 대대가 아니라 프랑스 지상군 참모부를 지휘했다는 서술, 올리비에 르 미르의 일지 『L'assaut de Crèvecœur』. 13. 프랑스어 위키백과, 「Jean Lartéguy」(2026년 10월 열람) — 1920년 9월 5일생, 단장의 능선(Crève-Cœur) 공격에서 부상, 소설 『Les mercenaires』의 바탕.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에드윈 워커 1909년 11월 10일생(영문 위키백과 「Edwin Walker」), 허버트 필릴라아우 1928년 10월 10일생(출처 2), 로베르 구필 1921년 8월 18일생(출처 4), 로버트 N. 영 1900년 1월 14일생(영문 위키백과 「Robert Nicholas Young」), 클로비스 바이어스 1899년 11월 5일생(영문 위키백과 「Clovis E. Byers」), 상즈궁 1920년생(출처 8), 토니 버리스 1929년 5월 30일생(출처 10), 장 라르테기 1920년 9월 5일생(출처 13). 크레이븐, 대니얼스, 드샤조, 애덤스, 해거, 윌리엄스, 멜런, 러브, 우즈, 박동하, 박문준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박동하는 2021년 기사에 93세, 박문준은 90세로 나오나 생일을 알 수 없어 1950년 나이를 계산하지 않았다. [자료 충돌] 프랑스대대를 누가 지휘했나 — 미 육군 전사(Hermes)는 851고지 공격을 「몽클라르의 프랑스군」으로 적었으나, 프랑스 군사부 소책자는 몽클라르가 1951년 9월까지 대대가 아니라 프랑스 지상군 참모부를 맡았다고 적었고, 프랑스어 위키백과의 대대장 명단에는 보레이 중령과 드 제르미니 중령이 따로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지휘관을 「르 미르」로 적었다. 확인이 안 되어 본문에 대대장 이름을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문등리 대전차전의 숫자 — 신랑 2000년 기사는 열흘 동안 전차 36대 격파·격상, 중국어 위키백과는 열흘 밤낮 700여 명 섬멸·전차 28대 격파, 시작을 10월 8일·전차 40여 대로 적었다. 미 육군 전사는 제72전차대대가 10일에 출발해 「손실을 입으며」 문등리 너머까지 갔다고만 적고 대수를 밝히지 않았다. 본문에 중국 쪽 두 숫자를 그들의 기록으로 함께 적었다. [자료 충돌] 적 사상자 — 미 제2사단 추정 25,000명(Hermes,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어 위키백과 정보란은 21,000명. 본문은 미 육군 전사의 추정을 따랐다. 전투가 끝난 날도 10월 13일(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어 위키백과, 851고지 점령)과 10월 15일(Hermes, 1220고지 점령)로 갈린다. [자료 충돌] 박동하·박문준의 소속 — 문화일보 기사는 프랑스대대가 「미 제2사단 13연대」에 배속되었다고 적었으나 다른 모든 자료는 제23연대다. 기사의 오기로 보았다. [자료 충돌] 이름의 유래 — 한국어 위키백과는 AP 특파원 스탠 카터가 구호소에서 부상병의 외침을 듣고 붙였다고 적었으나 다른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본문은 Hermes의 「종군 기자들이 뒤에 붙였다」만 따랐다. [재구성] 워커가 지도를 누르며 한 말의 자구(판단 자체는 기록), 「물고기 뼈」를 두고 한 병사들의 농담, 필릴라아우와 해거의 문답 자구(부르고 대답한 일은 기록), 프랑스대대 참호의 「앙나방」 대화, 구필이 쌍안경으로 정상을 본 몸짓, 애덤스 보고의 정확한 문장(「suicide」라는 말은 기록), 「터치다운」을 두고 한 대화, 제610연대 진지의 대화, 박동하가 능선에서 아침을 맞았다는 대목, 마지막 두 문장의 서술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구필이 맡은 제2중대가 9월 26일 공격에 함께 나섰다는 대목은 위키백과 서술(구필의 중대가 931고지를 맡음)에 따랐고 원 일지는 보지 못했다. 박동하가 851고지 정상에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다(그는 「고지를 점령했다」고만 회고했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과 상즈궁의 그날 말은 기록에 없다. 피의 능선과 펀치볼 싸움은 42·43화에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