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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13,932자)

펀치볼 전투 — 분지를 내려다보는 자

1950 · 네오

펀치볼 전투, 1951년 8월 31일~9월 20일 — 양구 해안분지(펀치볼)와 그 둘레, 남쪽 테두리의 도솔산과 대암산, 서남쪽 983고지(피의 능선, 42화), 서쪽 단장의 능선(44화), 북쪽 테두리의 924고지·1026고지(요크 능선), 동쪽 소양강 골짜기의 서화리와 702·602고지, 그 북쪽 673·749·812·980·1052고지(칸무봉 능선). 8월 31일~9월 3일 국군 해병 제1연대의 924·1026고지 공격과 미 제7해병연대의 702·602고지 공격, 9월 11일~20일 미 제7·1·5해병연대의 북쪽 능선 공격,

1951년 8월 27일 월요일 밤, 강원도 인제군 서화리(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 — 소양강 상류 골짜기, 미 제1해병사단 제7해병연대 지휘소 앞길.

트럭은 아침 일찍 온다고 했다. 미 제7해병연대 제3대대 병사들은 아침에 천막을 걷어 버렸고, 취사반이 들고 갈 수 없는 음식을 몽땅 점심으로 먹었다. 트럭은 저녁에도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빗속에서 깡통 전투식량으로 저녁을 때웠다1.

밤 아홉 시에 온 트럭은 진흙길을 기어서 이튿날 새벽 세 시 반에야 서화리에 닿았다. 대대에 정해 준 야영지는 물이 한 자나 차 있었다. 대대장 버나드 켈리 중령이 말했다.

“트럭에서 자라. 오늘 밤 침대는 그거다.”

켈리와 참모들은 잠들지 못했다. 장교들은 밤새 진흙에 빠진 줄을 따라 걸으며 덜 급한 짐을 실은 트럭을 하나씩 골라 줄에서 빼냈다. 차를 돌릴 자리가 좁아 트럭들은 뒷걸음으로 빈터에 들어가 병사와 짐을 부리고, 바퀴 자국으로 곤죽이 된 외길을 되짚어 나갔다1.

강 건너 집결지로 가는 여울은 허리까지 찼다. 한 중대가 걸어서 건넜고, 나머지 두 중대는 물에 뜨는 수륙양용 트럭을 불러 타고 건넜다1. 8월 내내 이어진 장맛비로 길은 무너지고 다리는 떠내려갔다2.

그 강의 서쪽에서는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진지를 넘겨받고 있었다. 제2대대가 교대해 줄 부대는 미 제2사단에 딸린 프랑스 대대였다. 한국 해병은 한국말을, 프랑스 병사는 프랑스말을, 둘 사이에 선 통역들은 영어로 옮겼다1. 녹초가 된 통역 하나가 기관총 진지를 가리키며 세 나라 말을 한 문장에 섞었다.

“여기, 이거, 위 바뀝니다, 오케이?”

프랑스 상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한국 해병 분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무엇을 알아들었는지는 끝내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

1951년 8월 30일 오후, 755고지 — 양구군 해안면(현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해안면)의 산골 분지 동쪽, 소양강 서쪽 능선의 봉우리.

해병 제1연대장 김동하(30)는 북쪽을 보았다3. 둘레가 해발 팔백 미터 넘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는 가로 칠 킬로미터, 세로 십 킬로미터쯤이었다. 미군은 그 모양이 화채를 담는 큰 그릇 같다고 펀치볼이라 불렀다4. 석 달 전 6월, 연대는 분지 남쪽의 도솔산을 놓고 북한군과 보름 넘게 싸웠다4. 그 산이 지금 연대 등 뒤에 있었다.

분지 북쪽 테두리는 지도에서 보면 악어 한 마리처럼 생겼다. 930고지가 주둥이, 1000고지가 머리, 동쪽으로 1026고지와 924고지가 몸통이었다1. 미군은 그 능선을 요크라고 불렀다. 북한군은 924고지를 김일성고지,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라고 불렀다5.

“이름을 그렇게 붙였으면 쉽게는 안 내놓겠지.”

김동하의 말에 참모 하나가 대답했다.

“우리가 이름을 바꿔 주면 됩니다.”

그날 미군 공중 관측병 하나가 북쪽에서 해병 쪽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사단 규모의 행렬을 보고 급히 다수 전폭기 공격을 요청했다. 포가 닿지 않는 거리였고, 병력은 한데 뭉쳐 있었다. 전폭기 네 대가 그 자리에 온 것은 세 시간도 더 지나서였다1. 해병 비행대마저 미 제5공군의 지휘 아래 북쪽 보급로를 끊는 작전에 묶여 있었다1. 행렬은 이미 능선의 엄폐호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 엄폐호를 쌓아 온 쪽은 북한군 제1사단이었고, 그 무렵 제2사단이 그 자리로 들어오는 중이었다2.

*

1951년 8월 31일 금요일 아침 여섯 시, 755고지에서 924고지로 오르는 비탈.

해병 제1연대 제3대대가 앞장섰다6. 처음 그들을 막은 것은 북한군의 기관총이 아니라 지뢰였다. 앞사람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라는 말이 줄을 따라 뒤로 전해졌다. 북한군이 묻은 지뢰 사이에는 앞서 이곳을 지킨 아군이 묻어 놓고 잊어버린 지뢰도 섞여 있었다1. 오후 두 시 사십오 분, 제1대대가 제3대대를 앞질러 나갔다1.

강 쪽 오른편, 미 제7해병연대 제3대대 H중대의 프레더릭 브라워 소위는 석 달 동안 소대를 이끌었지만 아직 적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702고지 비탈에서 박격포탄이 쏟아진 지 몇 분 만에 그는 왼쪽 다리에 파편을 여러 개 맞고 쓰러졌다2. 그를 들것에 실어 내려간 사람은 미군이 아니었다. 나무 지게를 지고 탄약과 물을 나르던 한국인 짐꾼들이었다. 미군은 그들을 지게라는 말을 따서 ‘치기 베어러’라고 불렀다. 계약서에는 하루 이십삼 킬로그램까지 지고 십육 킬로미터까지 걷는다고 적혀 있었고, 담배 열 개비가 하루치 배급에 들어 있었다2. 군대에 가기에 몸이 성치 않거나 서른여덟 살이 넘은 사람만 짐꾼이 될 수 있었다. 들것을 멘 사내의 머리는 반쯤 희었다.

날이 저물 때 한국 해병은 924고지 밑자락까지 갔다2.

이튿날 9월 1일, 702고지 언저리의 미 제7해병연대 제3대대에게 북동쪽 602고지에서 북한군 오백 명 넘는 병력이 네 번 연거푸 밀려 내려왔다. 몇은 참호 안까지 뛰어들었다. 강 건너 제1대대의 정찰대가 무전으로 전폭기를 불렀고, 미 제11해병포병연대가 포탄을 쏟았다1. 9월 2일 아침 켈리는 대대의 중기관총을 한 줄로 늘어세워 공격하는 중대 머리 위로 쏘게 했다. 두 시간이 채 안 되어 G중대가 602고지 꼭대기에 섰다1.

*

1951년 9월 1일 토요일, 924고지.

그날 미 공군 수송기 스무 대가 일본에서 날아와 해병 제1연대 머리 위에 탄약과 식량을 떨어뜨렸다. 낙하산 짐의 십 분의 아홉을 찾아 거두었다1. 그날 제3대대는 북동쪽에서, 제1대대는 남동쪽에서 고지를 조여 올라갔다. 숨겨진 엄폐호에서 기관총과 자동화기가 불을 뿜었다1.

제3대대 제11중대는 적진 백 미터 앞까지 나아갔다. 마지막 돌격을 앞두고 중대장 육동욱 중위가 목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7. 중대 선임장교 강길영 소위가 엎드린 병사들 사이로 기어 나왔다. 그는 1949년 4월에 해병대에 들어와 인천과 서울에서 소총병으로 싸웠고, 그해 소위 계급장을 단 사람이었다7. 공격 전에 그는 “김일성 고지는 우리가 꼭 점령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7.

“중대장님은 내려 보내. 나머지는 나를 따라온다.”

강길영은 맨 앞에서 뛰었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7.

오후 다섯 시, 제3대대의 한 중대가 꼭대기 이백 미터 아래까지 닿았다. 꼭대기를 잡는 데 네 시간이 더 걸렸다1. 자정, 북한군이 기습 역습으로 해병을 꼭대기에서 밀어냈다. 날이 밝자 해병은 다시 올라갔고, 정오가 되기 조금 전에 북한군을 몰아냈다1. 그 하루 동안 미 제11해병포병연대 제1대대는 한국 해병을 위해 105밀리 포탄 천육백팔십두 발을 쏘았다1. 붙여 준 육군 포병대대까지 합하면 스물네 시간에 팔천사백 발이었다.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가 정한 하루 사격량을 포병들은 ‘밴 플리트 하루치’라 불렀다. 다섯 대대 몫이 육천 발이었으니, 그 하루는 정해진 양보다 이천사백 발을 더 쏜 셈이었다2.

하늘은 그만큼 도와주지 않았다. 사단은 9월 1일의 공격을 위해 마흔 시간 전에 전폭기 스물여섯 대를 요청했고, 열두 대를 받았다. 전투 중에 부른 비행기는 한 시간이 넘어서야 왔다. 제7해병연대가 북한군의 큰 역습을 막으려 부른 공습 하나는 미 제10군단 정보참모가 그 역습을 믿지 않아 취소했다2. 그 무렵 전선을 둘러보던 태평양 함대 해병군 사령관 셰퍼드 중장 앞에서 사단의 화력 조정관이 보고했다2.

“제5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은 모자랐고, 제때 온 적도 드뭅니다.”

*

1951년 9월 3일 월요일 아침, 1026고지.

924고지를 넘겨받은 제2대대가 서쪽 1026고지로 나아갔다. 전날 저녁 대대는 꼭대기에서 칠백 미터 남짓 떨어진 데서 멈췄다1. 밤새 북한군의 작은 공격이 이어졌고, 다섯 마일 뒤 캔자스선을 지키던 미 제5해병연대도 공격을 받았다1. 앞도 뒤도 없었다.

3일 아침 제2대대의 공격은 마주 내려오는 북한군의 큰 역습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세 시간 반 동안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전 중에 북한군이 무너졌고 한국 해병이 꼭대기를 차지했다. 열두 시 반 북한군이 다시 올라왔고 두 시간을 싸운 뒤 물러갔다1. 저녁 여섯 시, 미 제1해병사단은 펀치볼 북쪽 테두리 전체를 손에 넣었다1.

이승만 대통령은 승전 소식을 듣고 “신이 경탄할 공훈”이라고 했다3. 연대가 싸운 상대는 북한군 제1사단 제3연대였다고 전쟁기념관의 기록은 적었다3.

그 무렵 분지 서남쪽 983고지에서는 미 제2사단이 피의 능선이라 불리게 된 능선을 아직 다 잡지 못하고 있었다. 8월 18일부터 미군과 배속 국군 이천칠백칠십두 명을 잃은 뒤였다2.

*

1951년 9월 4일부터 10일까지, 홍천(현 홍천군 홍천읍)에서 펀치볼로 오는 소양강 골짜기 길.

사단은 엿새를 멈췄다. 나흘 동안 포탄을 너무 많이 쏘았다1. 탄약 집적소에서 남쪽 홍천까지는 칠십칠 킬로미터였는데, 비에 무너진 길을 트럭이 한 번 오가는 데 스물다섯 시간이 걸렸다1. 산 위 진지까지는 사람이 져 날랐다. 짐꾼 하나가 대대 보급소에서 진지까지 갔다 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고, 대대마다 짐꾼 백오십에서 이백오십 명이 붙었다1.

분지 서쪽에서는 미 제2사단이 피의 능선 너머 다음 능선으로 향할 채비를 했다. 그 능선은 곧 단장의 능선이라는 이름을 얻는다2.

능선 건너편에서도 셈은 했다. 중국 쪽 기록은 8월 18일부터 9월 18일까지의 동부전선 싸움을 인민군의 ‘여름 방어 작전’이라고 불렀다. 미 해병 제1사단이 9월 첫머리에 앞줄에 나섰고, 인민군은 유엔군 사만 육천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거나 사로잡았으며 땅은 백칠십구 제곱킬로미터를 잃었다고 적었다8. 그동안 북한군 제2사단이 빠지고 제3군단의 제1사단이 다시 들어왔다1.

*

1951년 9월 12일 수요일, 924고지 북쪽 칸무봉 능선(현 군사분계선 부근) — 소양강 지류 건너편의 긴 능선.

전날 아침, 제7해병연대 제3대대는 비와 안개 속에서 680고지를 쳤다. H중대가 남동쪽 등성이를 오르다 막히자 켈리는 I중대를 남서쪽 등성이로 돌렸다. I중대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낮 열두 시 사십오 분에 H중대가 엎드린 바로 그 등성이에 와 있었다1.

“여긴 우리 자리다. 너희 등성이는 저쪽이야.”

“저쪽에서 왔는데 여기로 나오던데요.”

두 중대는 해 질 녘까지 함께 두 번 꼭대기로 올라갔다가 두 번 밀려 내려왔다1.

조지 레이머(23) 소위는 그해 1월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루이스버그의 고등학교에서 시민 과목과 역사를 가르쳤다. 스스로 원해서 현역으로 나왔다2. 미 제7해병연대 제3대대 I중대의 소대장으로 그는 가파른 비탈을 앞장서 올랐고, 그와 소대원 대부분이 오르는 길에 다쳤다. 꼭대기의 엄폐호 하나를 수류탄과 카빈으로 부수고 남은 여덟 명과 목표를 잡았다2. 곧 북한군의 큰 역습이 올라왔다.

“내려가. 다친 사람 데리고 내려가.”

레이머는 혼자 남아 병사들이 전사자 셋을 끌고 내려갈 시간을 벌었다. 두 번째로 크게 다친 뒤에도 자리를 지키다가 북한군이 진지를 덮었을 때 쓰러졌다2. 같은 날, 같은 연대 제1대대 B중대의 분대장 프레더릭 모저트 3세(20) 병장도 머리를 다친 채 착검 돌격을 이끌다 수류탄과 기관총에 맞아 전사했다2.

*

1951년 9월 13일 목요일 오후 네 시 십 분, 749고지 남쪽 — 미 제1해병연대 제2대대의 산비탈.

짐꾼은 대대에 이백사십 명이 붙어 있었지만, 그날 필요한 탄약을 다 지고 올라올 수는 없었다1. 비탈의 병사들이 이십 분 만에 가로 육 미터, 세로 십이 미터의 빈터를 쳐내고 형광 천을 깔았다. 계곡을 따라 낮게 날아온 시코르스키 헬리콥터 한 대가 그 위에 멈춰 섰다. 동체 밑에 매단 그물이 풀리며 짐이 땅에 내려앉았다1.

그날 아침 여덟 시 반, 미 해병 수송헬리콥터 제161비행대대장 조지 헤링 중령은 사단 사령부의 마지막 회의에서 임무를 받았다. 십일 킬로미터 떨어진 대대에 하루치 보급품을 날라 주라는 것이었다. 연습할 시간은 이틀뿐이었다. 출발지에서는 오전 내내 짐을 한 대에 삼백육십 킬로그램씩 나누어 묶었고, 오후 세 시 이십 분에 싣기 시작했다. 헬리콥터는 되도록 골짜기를 따라 날았고, 제11해병포병연대가 연막을 쳐서 그 길을 가렸다1.

헤링의 헬리콥터들은 두 시간 반 동안 스물여덟 번 오갔다. 구 톤 가까운 짐을 날랐고 다친 병사 일흔네 명을 싣고 나왔다1. 한 병사는 총에 맞은 지 삼십 분 만에 이십칠 킬로미터 뒤 치료소에 누웠다1. 같은 짐을 사람이 졌다면 짐꾼 사백 명이 하루를 걸어야 했다2.

짐꾼 하나가 빈 지게를 내려놓고 날아가는 기계를 올려다보았다.

“저놈이 우리 일을 다 하면 우리는 뭘 먹고 사나.”

옆의 짐꾼이 대답했다.

“저놈은 밥 안 먹고 기름 먹는다더라. 기름 값이 더 비싸.”

*

1951년 9월 14일 금요일부터 16일 새벽까지, 749고지.

이틀 전 미 제7해병연대 제2대대는 오후 다섯 시 십 분에 749고지를 잡았다고 무전을 쳤다. 그 보고는 너무 일렀다. 숲이 덮인 비탈에는 아직 북한군이 남아 있었고, 교대하러 간 제1해병연대 제2대대가 찾아낸 제7해병연대의 두 중대는 보고한 자리에서 삼백칠십 미터쯤 떨어진 고지 뒷비탈에 있었다1. 두 대대 사이의 이백칠십 미터를 메우는 데 저녁 여덟 시 이십오 분까지 걸렸다1.

북한군 엄폐호는 나무 사이에 숨어 서로를 엄호했다. 꼭대기로 오르는 능선을 다른 능선이 직각으로 가로질렀다. 대학 미식축구를 기억하는 미 해병들은 그 꼴을 ‘북한식 티 대형’이라 불렀다. 티 자의 다리를 타고 오르는 쪽은 머리 쪽 가로 능선에서 날아오는 십자 사격을 고스란히 받았다1. 해병이 엄폐호 앞까지 다가가면 북한군은 자기 엄폐호 위로 박격포를 불렀다1.

14일, 제1해병연대 제2대대 E중대의 탄약수 에드워드 고메스(18) 일등병은 분대 한가운데 떨어진 수류탄을 안고 도랑으로 몸을 던졌다9.

15일 밤 자정을 일 분 넘겨, 나팔과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북한군 한 개 연대가 고지로 몰려왔다. 76밀리부터 122밀리까지의 포와 82밀리, 120밀리 박격포가 먼저 쏟아졌다. 사단 보고서는 그 포격이 한국에서 사단이 맞은 어떤 포격보다 셌다고 적었다1. F중대의 자동소총수 조지프 비토리(21) 상병은 물러서던 소대를 거슬러 달려가 역습을 이끌었다. 밤새 이 참호에서 저 참호로 뛰어다녔고, 사수가 쓰러진 기관총을 잡았고, 탄약을 가지러 포탄 속을 몇 번이고 오갔다1. 그는 백 미터 가까운 빈틈을 혼자 지켰다9. 새벽 네 시에 북한군이 물러났다. 비토리는 공격이 끝나기 몇 분 전에 치명상을 입었다1. 날이 밝았을 때 진지 앞에는 북한군 시체 이백 구 가까이가 있었다2. 그 대가로 제1해병연대 제2대대도 이백 명 가까이를 잃었다. 해병 쪽으로 넘어온 북한군 탈영병 둘은 자기 연대가 그 고지에서 천이백 명을 잃었다고 말했다2.

*

1951년 9월 16일 일요일 오후부터 20일 새벽까지, 749고지 서쪽 812고지와 ‘바위’.

16일 오후,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 D중대는 앞서가는 F중대의 위치를 알려 달라며 백린 수류탄으로 연기 표지를 올렸다. 그 연기를 980고지 쪽 목표 표시로 잘못 본 아군 비행기가 F중대 앞 소대들 머리 위로 네이팜과 기관총을 쏟았다. 병사들이 식별용 천을 펼쳐 깔았고, 단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1.

“우리 편 비행기는 부를 땐 안 오고, 안 부를 땐 오는구먼.”

16일 밤에는 달이 밝았다. 너무 밝아 북한군은 다가오지 못했고, 앞줄의 해병들은 생각보다 많이 잤다1.

17일 아침 대대는 북한군이 아침밥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포를 불렀다1. 다시 티 대형의 머리에 걸렸고, 열한 시에 가진 것을 다 쏟아붓고 정면과 옆구리를 한꺼번에 쳤다. 삼십육 분 만에 꼭대기를 잡았다1. E중대는 그 기세로 서쪽 980고지 앞까지 내달렸다. 연대장은 돌아오라고 했다. 더 높은 1052고지를 북한군이 쥐고 있는 한 980고지는 지킬 수 없었다1.

812고지 서쪽 육백사십 미터쯤, 능선 한가운데 높이 사 미터가 못 되는 화강암 덩어리가 솟아 있었다. 해병은 그 바위의 꼭대기와 동쪽 면을, 북한군은 서쪽 면을 쥐었다.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류탄이 오갔다1. 20일 새벽 세 시 십오 분, 북한군 한 개 중대 이상이 바위 북쪽으로 돌아 나와 기관단총을 쏘며 덤볐다. 다섯 시, E중대가 정면으로, F중대 제2소대가 옆구리로 되받았다. 북한군은 바위 저편으로 돌아갔고 시체 예순 구를 남겼다1.

곧 사단에 공격을 멈추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1052고지는 끝내 북한군의 것이었다1. 미 해병대 전사는 그 바위 앞의 싸움을 한국에서 미 해병이 치른 마지막 기동전으로 적었다1.

*

1951년 9월 하순, 924고지.

김일성고지 꼭대기에서는 분지가 한눈에 보였다. 해병 제1연대는 그 고지를 9월 2일에, 모택동고지를 3일에 차지했다. 나흘 동안 전사 백삼 명, 부상 삼백팔십팔 명을 냈다5.

제11중대의 병사 하나가 꼭대기 흙을 한 줌 쥐어 보았다. 포탄에 갈려 고운 가루가 되어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털고 등 뒤의 분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 그릇을 내려다보는 쪽은 한국 해병이었다. 북쪽으로는 1052고지가 여전히 그들보다 높이 서 있었다.

강길영은 1953년에 중위로 한 계급 올려졌고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7.

사료 출처

1. Lynn Montross·Hubard D. Kuokka·Norman W. Hicks,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ume IV: The East-Central Front』(미 해병대 역사과, 1962), 제8장 끝 절 「The Division Back in Action Again」과 제9장 「Renewal of the Attack」,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전자책 gutenberg.org/ebooks/65010 — 8월 27일 출발 지연과 마지막 점심, 밤 아홉 시 트럭과 28일 03시 30분 서화리 도착, 물에 잠긴 야영지와 트럭 속 잠, 허리 깊이 여울과 수륙양용 트럭, 해병 제2대대의 프랑스 대대 교대와 지친 통역(원문: Linguistic chaos was averted only by the best efforts of the exhausted interpreters), 요크 능선의 악어 모양(930 주둥이·1000 머리·1026과 924 몸통), 잊힌 아군 지뢰, 8월 30일 공중 관측병의 사단 규모 북한군 목격과 세 시간 넘은 전폭기 네 대, 제1해병비행단이 제5공군 지휘 아래 차단 작전에 묶임, 31일 14시 45분 제1대대 초월, 9월 1일 수송기 스무 대 공중 보급과 90퍼센트 회수, 두 대대의 수렴 공격과 숨은 엄폐호, 17시 꼭대기 200미터 앞과 네 시간 뒤 점령, 자정 역습과 이튿날 정오 직전 탈환, 제11해병연대 제1대대 105밀리 1,682발, 2일 저녁 1026고지 800야드 앞, 캔자스선 미 제5해병연대 피습(원문: The front was where you found it), 3일 세 시간 반 역습과 12시 30분 역습 두 시간, 18시 헤이스선 확보, 109명 전사·494명 부상(한국 해병 포함)과 북한군 656명 확인 사살·40명 포로, 엿새 정지, 홍천까지 48마일과 왕복 25시간, 짐꾼이 대대 보급소와 진지 왕복에 하루, 대대마다 150~250명, 북한군 제2사단에서 제3군단 제1사단으로 교대, 제2대대에 붙은 짐꾼 240명, 윈드밀 1작전(16시 10분 첫 기체, 20×40피트 착륙장 20분 정리, 형광 천, 화물 그물, 28회 비행·2시간 30분·18,848파운드·74명 후송, 30분 만에 17마일 뒤 치료소), 북한식 티 대형, 자기 진지 위로 부른 박격포, 15일 자정 1분 뒤의 공격과 사단 보고서의 포격 평가, 76·105·122밀리 포와 82·120밀리 박격포, 나팔과 호루라기, 비토리의 역습과 기관총(명예훈장 공적서 인용), 16일 04시 공세 종료, 17일 북한군 아침 식사 관측, 11시 총공격과 36분, 980고지 진출 불허(1052고지), 812고지 서쪽 700야드의 높이 12피트 화강암 「바위」, 20일 03시 15분 공격과 05시 역습, 시체 60구, 공격 중지 명령(사단 작전명령 26-51)과 기동전의 끝. 2. Allan R. Millett, 『Drive North: U.S. Marines at the Punchbowl』(미 해병대 역사센터, 한국전쟁 50주년 기념 총서, 2001), 인터넷 아카이브 전문 archive.org/details/DriveNorthUSMarinesAtThePunchbowl — 8월 내내 이어진 장마, 북한군 제2사단이 제1사단의 엄폐호로 들어가는 중이었던 31일 아침, 한국 해병이 31일 924고지 밑자락에서 멈춤, 프레더릭 브라워 소위의 부상과 「치기 베어러」의 들것, 짐꾼 계약(하루 50파운드·10마일)·담배 열 개비·38세 이상 또는 병역 부적격자, 피의 능선의 미군·배속 국군 손실 2,772명(8월 18일 이후), 미 제10군단의 다음 목표 「단장의 능선」, 조지 레이머 소위(1927년생, 고교 시민·역사 교사, 1951년 1월 자원 소집, 명예훈장 공적서), 프레더릭 모저트 3세 병장(1930년생, 9월 12일, 명예훈장 공적서), 윈드밀 1작전의 짐꾼 400명 하루 환산, 749고지 앞 북한군 시체 200구 가까이, 924·1026고지의 손실 비교(미 제7해병연대 전사 5·부상 75, 한국 해병 전사·실종 70·부상 274, 북한군 시체 약 600·포로 40). 3. 인천광역시, 「12월의 호국인물 김동하 해병대 중장」(전쟁기념관 선정, 2003.9.30 게시), incheon.go.kr/IC010305/1421429 — 1920년 4월 15일 함경북도 무산 출생, 해병 제1연대장으로 「김일성 및 모택동고지 전투」에서 북한군 제1사단 제3연대 격멸, 이승만의 「神이 경탄할 공훈」. 4. 김태우, 「1951년 여름 양구지역 전투」, 자유아시아방송 칼럼(2022.8.24), rfa.org/korean/commentary/ae40d0dcc6b0-ce7cb7fc/ktwcu-08242022102251.html — 해안분지의 크기(가로 7킬로미터·세로 10킬로미터)와 800미터 넘는 둘레 산, 「펀치볼」 이름의 유래, 1951년 6월 4일~19일 해병 제1연대의 도솔산 전투. 5. 박동찬, 「924고지 및 1026고지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집필·2023.5.19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05980 — 1951년 8월 31일~9월 3일, 해병 제1연대, 북한군 제1사단, 924고지 9월 2일·1026고지 9월 3일 점령, 북한군이 부른 김일성고지·모택동고지, 해병 제1연대 전사 103·부상 388, 북한군 사살 382·포로 44. 6. 양영조, 「펀치볼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3 집필·2023.7.14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59820 — 8월 31일~9월 20일, 해병 제1연대 제3대대의 793고지 출발과 924고지 공격, 749·812고지 점령으로 작전 종료. 7. 아주경제, 「‘11월의 6·25전쟁영웅’에 강길영 해병중위」(2014.10.31, 국가보훈처 선정 보도), ajunews.com/view/20141031153628800 — 1949년 4월 입대, 인천상륙·서울 탈환 소총병, 간부후보생 제3기, 1951년 소위 임관, 해병 제1연대 제11중대 선임장교, 적진 100미터 앞, 중대장 육동욱 중위의 목 관통상, 「김일성 고지는 우리가 꼭 점령하겠습니다」, 선두에서 전사, 1953년 일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 8. 「1951年夏秋季防御战役」, 新浪军事(2000.6.20), news.sina.com.cn/world/2000-06-20/99214.html — 인민군의 여름 방어 작전(8월 18일~9월 18일), 9월 1~18일 제2단계 전 「美军陆战第1师」의 제일선 투입, 인민군이 주장한 유엔군 사상·포로 4.6만여 명과 잃은 땅 179제곱킬로미터. 9. 영문 위키백과, 「Edward Gomez」「Joseph Vittori」(2026년 10월 열람, 미 해병대 명예훈장 공적서 인용) — 고메스 1932년 8월 10일 오마하 출생, 제1해병연대 제2대대 E중대 탄약수, 9월 14일 수류탄을 안고 엎드림, 비토리 1929년 8월 1일 매사추세츠주 베벌리 출생, 제1해병연대 제2대대 F중대 자동소총수, 9월 15~16일 749고지에서 100야드 빈틈을 지킴.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김동하 1920년생(인천광역시·전쟁기념관 호국인물 소개), 조지 레이머 1927년생·프레더릭 모저트 3세 1930년생(Millett 『Drive North』 명예훈장 소개 상자), 에드워드 고메스 1932년생·조지프 비토리 1929년생(영문 위키백과 인물 항목). 버나드 켈리, 프레더릭 브라워, 조지 헤링, 셰퍼드, 육동욱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거나 이 화에서 확인하지 않아 나이를 적지 않았다. 강길영은 1930년 경북 상주 출생이라는 자료가 있으나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인공지능 생성 위키뿐이라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924·1026고지의 손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해병 제1연대 전사 103·부상 388, 북한군 사살 382·포로 44로, Millett은 한국 해병 전사·실종 70·부상 274(미 제7해병연대 전사 5·부상 75), 북한군 시체 약 600·포로 40으로, Montross는 사단 전체(한국 해병 포함) 전사 109·부상 494, 북한군 확인 사살 656·포로 40으로 적었다. 본문은 백과사전의 한국 해병 수치를 따랐다. [자료 충돌] 924고지 점령 시각 — Montross는 9월 1일 17시 200미터 앞에서 「네 시간 더」 싸워 고지를 잡고 자정에 빼앗겼다가 2일 정오 직전 되찾았다고, 백과사전은 9월 2일 점령으로, Millett은 2일의 공격으로 924고지만 잡았다고 적었다. 본문은 Montross의 경과를 따르고 마지막 장면에서 백과사전의 날짜를 함께 적었다. [자료 충돌] 맞선 북한군 부대 — 백과사전은 북한군 제1사단, 전쟁기념관 소개는 제1사단 제3연대, Montross는 처음 맞선 부대를 제2군단 제2사단 제6연대로 보고 9월 4~10일에 제3군단 제1사단이 교대해 들어왔다고, Millett은 31일 아침 제2사단이 제1사단의 엄폐호로 들어가던 중이었다고 적었다. 본문은 Millett과 Montross의 서술을 장면마다 따로 썼다. [자료 충돌] 도솔산 전투 기간 — 자유아시아방송 칼럼은 6월 4일~19일, 언론 보도 일부는 6월 4일~20일로 적었다. 본문은 「보름 넘게」로만 썼다. 『Drive North』는 6월의 한국 해병 연대장을 「Colonel Kim Suk Bum」으로 적었는데, 한국 쪽 자료와 맞춰 보지 못해 본문에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강길영의 전사일 — 아주경제 기사에는 날짜가 없다. 본문은 제11중대의 924고지 돌격을 Montross가 적은 9월 1일 공격 경과 안에 두었다. 「9월 1일 전사」는 출처가 약한 위키에만 있다. [자료 충돌] 윈드밀 1작전의 짐 무게 — Montross는 18,848파운드(약 8.5톤), Millett은 「9톤」으로 적었다. 본문은 「구 톤 가까운」으로 썼다. [재구성] 미 해병대 전사가 「Soyang」으로 적은 서화리 앞 강은 지금 지도의 인북천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나 확인하지 못해 본문은 전사의 이름대로 소양강으로 썼다. 「칸무봉 능선(Kanmubong Ridge)」은 미 해병대 지도의 이름이며 지금의 정확한 위치와 한국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군사분계선 부근으로 추정). 켈리의 「트럭에서 자라」(트럭에서 자라고 지시한 일은 기록), 통역의 세 나라 말 섞인 문장과 프랑스 상사·한국 해병 분대장의 몸짓, 755고지에서 김동하가 북쪽을 본 장면과 참모와의 대화, 「앞사람의 발자국을 밟으라」는 말, 브라워를 멘 짐꾼의 흰 머리, 「중대장님은 내려 보내」라는 강길영의 말과 그가 기어 나온 몸짓(그가 선두에서 전사한 것과 「김일성 고지는…」이라는 말은 기록), I중대와 H중대 병사의 대화, 레이머의 「내려가」라는 말(철수를 명령하고 혼자 엄호한 것은 기록), 짐꾼 두 사람의 헬리콥터 대화, 「우리 편 비행기는…」이라는 해병의 말, 마지막 장면의 제11중대 병사와 흙 한 줌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셰퍼드 앞 화력 조정관의 말은 브리핑 문서의 문장을 대사로 옮긴 것이다. 북한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4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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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볼 전투 — 분지를 내려다보는 자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