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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14,170자)

피의 능선 전투 — 지도에는 없는 이름들

1950 · 네오

피의 능선 전투, 1951년 8월 18일~9월 5일 — 강원도 양구 북쪽, 서쪽 문등리 골짜기와 동쪽 사태리 골짜기 사이를 빗장처럼 가로지른 731·983·940·773고지 능선, 남쪽 월운리·비아리, 동쪽 대우산(1179고지)과 해안분지(펀치볼), 북쪽 두타연. 8월 18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의 공격로(제3대대 983고지, 제2대대 940·773고지), 20일 새벽 773고지 점령, 22일 제11중대의 983고지 뒷비탈 우회, 26일 새벽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의 역습, 27일 미 제9연대 투입, 9월 초 미 제23·38

1951년 8월 16일 목요일, 강원도 양구(현 양구군 양구읍) 북쪽 — 미 제2사단 사령부.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린 지 한 달이 넘었다. 회담장의 천막 안에서는 선을 어디에 그을지를 두고 말이 오갔고, 전선에서는 그 선을 조금이라도 북쪽으로 밀어 올리려는 싸움이 이어졌다.

미 제2사단장 러프너(47) 소장이 지도 위의 능선 하나를 짚었다. 사단 왼쪽 앞, 북쪽으로 삼 킬로미터쯤 떨어진 983고지였다. 그 봉우리는 731고지에서 983고지, 940고지, 773고지로 이어지는 팔 킬로미터 능선의 가장 높은 꼭대기였다. 능선은 서쪽 문등리(현 양구군) 골짜기와 동쪽 사태리(현 양구군) 골짜기 사이를 문빗장처럼 가로막고 있었다1. 북한군은 그 꼭대기에서 사단의 방어선을 뒤쪽까지 내려다보며 포탄을 떨어뜨렸다2. 사단 참모들은 그 고지를 목에 들이댄 비수라고 불렀다1.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58) 대장의 지침은 따로 있었다. 한국군은 자기 능력을 믿지 못하니, 싸움을 맡겨 자신감을 길러 주라는 것이었다2. 미 제10군단장 바이어스(51) 소장은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를 미 제2사단에 붙였다2.

러프너는 제36연대장 황엽 대령에게 명령을 내렸다1.

“8월 18일 여섯 시에 공격을 시작해 983, 940, 773고지를 점령하시오.”

군단과 사단의 포병이 받쳐 주고,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고, 동해에 떠 있는 미 해군 전함 미주리호도 함포를 쏘아 주겠다는 약속이 따라왔다1. 황엽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도에는 고지 번호만 적혀 있었다. 그 비탈에 북한군이 무엇을 묻어 두었는지는 지도에 없었다.

북한군 제12사단 제1연대가 983고지를, 제27사단 제14연대가 940·773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비탈에는 포탄을 맞아도 버티는 엄체호가 수백 개 있었고, 고지 뒤쪽 비탈에는 지붕을 덮은 교통호가 그 엄체호들을 잇고 있었다. 진지 앞에는 나무 상자에 든 지뢰를 사천에서 오천 개 묻었다1. 한국 쪽 기록은 북한군이 그 진지를 두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요새라고 큰소리쳤다고 적었다1.

*

1951년 8월 18일 토요일 새벽 여섯 시 반, 983고지 남쪽 비탈 — 제36연대 공격 출발선.

포성은 사흘 전부터 그치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는 일곱 개 포병대대의 대포 백스물여섯 문이 한꺼번에 능선을 때렸다1.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꼭대기의 소나무가 통째로 들렸다가 쓰러졌다. 여섯 시 반, 포성이 능선 너머로 넘어가자 제3대대는 왼쪽에서 983고지로, 제2대대는 오른쪽에서 940고지와 773고지로 올라갔다1.

일병 류홍석(19)은 그해 3월 14일에 입대했다3. 그는 충청남도 홍성(현 홍성군)에서 났다4.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한의사로 일했다3. 입대한 지 다섯 달 만에 태기산과 인제의 싸움을 거쳤다3. 분대원들은 그를 이름보다 ‘한의사’라고 불렀다.

“한의사, 이 산 오르면 무릎에 뭐가 좋소?”

“안 오르는 게 제일 좋지요.”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대가 비탈의 중턱을 넘어설 무렵 북한군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앞서 가던 병사 하나가 풀숲에 발을 디뎠다. 땅에 묻힌 나무 상자가 터지며 흙기둥이 솟았다. 남은 병사들은 엎드린 채 대검으로 흙을 찔러 가며 길을 찾았다.

그 위의 엄체호에서는 기관총이 쏟아졌다. 공격은 능선의 오부에서 칠부 높이에서 멈추었다1. 대대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급히 참호를 파고, 무전기로 포병을 불렀다1.

“앞으로 백 미터, 기관총 진지. 다시 쏴 달라.”

그날 밤에는 사 킬로미터 공격 정면에 대포 이백 문이 포탄을 쏟았다. 일 킬로미터에 오십 문꼴이었다1. 미군 포병 가운데 엄체호의 통나무 지붕을 뚫을 수 있는 것은 155밀리 장거리포였는데, 그 포는 전선에 많지 않았다5. 날이 밝았을 때 소나무는 밑동만 남았고, 바위는 깨져 있었고, 산의 생김새가 달라져 있었다1.

*

1951년 8월 19일~21일, 773고지와 940고지 — 능선의 동쪽 절반.

둘째 날 새벽, 포병이 사격을 능선 너머로 옮기자 병사들은 다시 올라갔다. 그런데 포성이 멎는 순간마다 북한군은 뒷비탈 교통호에서 앞비탈 진지로 뛰어나왔다1. 미 육군 전사는 그들이 포격이 멎기를 엄체호 안에서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병사들이 마지막 몇 미터를 기어오를 때 총알과 수류탄을 퍼부었다고 적었다2.

황엽은 983고지를 한꺼번에 따내는 것을 미루었다. 오른쪽 940고지와 773고지를 먼저 치기로 하고, 연대 예비였던 제1대대를 오른쪽으로 보냈다1. 제2중대는 미 제72전차대대의 전차 한 소대와 함께 비아리(현 양구군 동면 비아리)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비득고개라는 고갯길에 발판을 잡았다1.

그날 밤 비가 내렸다. 제5중대의 특공대가 비득고개 쪽으로 돌아 773고지의 뒷비탈로 기어 올라갔다. 앞에서는 제5중대 나머지가, 옆에서는 제2중대가 함께 뛰어들었다.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빗소리를 덮었다. 자정을 넘긴 20일 새벽 두 시, 773고지가 넘어왔다1.

940고지는 쉽지 않았다. 두 대대가 남쪽과 남서쪽에서 올라갔지만 꼭대기를 코앞에 둔 구부 능선에서 기관총과 수류탄에 밀려 내려왔다1. 21일 저녁, 제2대대장은 남은 다섯 중대를 세 갈래 능선에 나누어 한꺼번에 올려 보냈다. 남쪽에서 오른 제6중대가 먼저 진지로 뛰어들었다. 저녁 여덟 시 무렵 제6중대가 꼭대기에 섰다. 그때 중대에 남은 사람은 스무 명이었다1.

*

같은 무렵, 983고지 뒷비탈 — 북한군 엄체호.

북한군 병사 하나가 통나무 지붕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 위에서 포탄이 터질 때마다 지붕의 흙이 목덜미로 쏟아졌다. 엄체호 안의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귀가 먹먹해서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자동화기와 수류탄 상자는 손 닿는 곳에 쌓여 있었다2.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포성이 멎는 순간이었다. 포탄이 능선 너머로 옮겨 가면, 그것은 남쪽 비탈의 적이 꼭대기 가까이 올라왔다는 신호였다. 병사들은 뒷비탈의 지붕 덮인 교통호를 따라 앞비탈 사격 진지로 뛰어갔다1. 아래에서는 국군 병사들이 마지막 몇 미터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 머리 위로 총알과 수류탄을 쏟았다2. 그러고는 다시 포탄이 떨어지기 전에 교통호로 돌아갔다.

엄체호 안에서 누군가 흙을 털며 중얼거렸다.

“위에서 쏘는 놈들은 하루에 몇 발을 쏘는 거야?”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날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포탄이 오면 숨고, 포탄이 멎으면 나가서 쏘았다. 그들의 진지는 남쪽을 향해 지어져 있었다. 가파른 뒷비탈 쪽으로는 누구도 총구를 돌려 두지 않았다1.

*

1951년 8월 22일 수요일 아침, 983고지 — 수리봉이라고도 부르던 능선의 주봉.

제3대대는 사흘째 983고지 앞비탈에 붙어 있었다. 세 중대를 나란히 세워 올라갔지만 돌격할 자리에도 닿지 못했다1.

제11중대장 정창호 중위는 연대에서 돌격 잘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6. 그는 21일 밤 중대를 이끌고 이미 아군 손에 들어온 940고지 쪽으로 돌았다. 날이 밝을 무렵 중대는 940고지와 983고지 사이의 이름 없는 봉우리를 차지했다. 거기서 보니 983고지의 뒷비탈은 가팔랐고, 북한군 총구는 모두 남쪽 앞비탈을 향해 있었다1.

중대는 아군 포병이 사격을 멈추고 다시 쏘는 틈을 타 뒷비탈로 조금씩 사람을 밀어 넣었다. 두 분대가 들어갔다1. 정창호는 명령했다.

“적이 안 보이면 쏘지 마라. 소리 내지 말고 올라가라.”

한국 쪽 기록 하나는 그 뒤를 이렇게 적었다. 꼭대기 오십 미터 앞에서 중대는 멈추었다. 병사들이 일제히 “와!” 하고 고함을 질렀다. 북한군은 돌격이 오는 줄 알고 마지막 저지사격을 퍼부었다. 그 불빛으로 기관총이 어디 있는지가 다 드러났다. 그다음에 진짜 돌격이 들어갔고, 제3소대가 뒤쪽에서 들이쳤다6.

제3소대장 이찬식 소위는 뒷날 펴낸 책 『전우애』에서 정창호를 ‘살아 있는 군신’이라고 불렀다6.

꼭대기에 먼저 오른 것은 뒷비탈의 병사들이었다. 북한군은 그때까지도 앞비탈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중대는 꼭대기에서 소리쳤다1.

“대한민국 만세!”

등 뒤에서 들린 만세 소리에 북한군은 옆 비탈로 흩어졌다. 열한 시 반, 제3대대가 공격을 시작한 지 닷새 만에 983고지가 넘어왔다. 한국 쪽 기록은 제11중대가 그 꼭대기를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차지했다고 적었다1. 연대는 제3대대를 983고지에, 제2대대를 940고지에, 제1대대를 773고지에 두었다1.

그날 밤 983고지로 첫 역습이 들어왔다. 제3대대는 이튿날까지 그것을 막아 냈다1.

*

1951년 8월 26일 일요일 새벽 두 시, 983고지.

북한군 군단 예비로 있던 제6사단 제13연대가 새로 들어와 983고지를 에워쌌다1. 제3대대는 꼭대기로 몰리며 사방을 막았다. 참호 안에서 총검과 개머리판이 부딪쳤다. 물결처럼 이어지는 공격을 대대는 끝내 막지 못하고 고지를 내려왔다1. 닷새 전 만세를 부른 꼭대기였다.

황엽은 흩어진 제3대대를 940고지로 물려 제2대대와 함께 지키게 했다. 그날 오전 열한 시, 러프너는 미 제9보병연대에 제36연대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밤사이 제9연대 제2대대가 940고지로 올라왔다1.

8월 27일 월요일 새벽 네 시, 그 능선 싸움터의 700고지에서는 미 제9연대 B중대가 전날 차지한 꼭대기를 지키고 있었다7. 중대에 붙은 포병 관측장교 하텔(27) 중위는 무전기를 들고 능선의 드러난 자리로 나갔다. 그는 조명탄을 띄워 달라고 불렀다. 하얀 빛 아래 비탈을 기어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그 위로 포탄을 끌어당겼다7.

북한군이 열 야드, 구 미터 앞까지 몰려왔다. 총탄이 하텔의 손을 찢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송화기를 쥐었다7. 전초 하나가 넘어가고 적이 그의 자리로 다가왔을 때, 그는 마지막 무전을 보냈다7.

“두 포대 모두, 쉬지 말고 쏴라.”

여섯 시 반 무렵, 가슴에 총탄을 맞은 하텔은 숨을 거두었다. 중대는 그 고지를 지켰다7.

같은 날 아침, 940고지 쪽에서는 북한군의 역습이 미군의 반격보다 먼저 들이쳤다. 773고지의 제1대대가 공격을 받았고, 940고지는 두 방향에서 공격을 받았다1. 제36연대는 그 역습을 밀어냈지만, 오후에 983고지로 올라간 미 제9연대 제2대대는 몇 번 돌격하다가 940고지로 되밀려 왔다1. 밤이 되자 일부 국군 부대가 무너져 달아났고, 그 공포가 미 제9연대 병사들에게도 번졌다2. 제9연대 제2대대의 한 병사는 뒷날 증언했다. 밀려 내려오는 국군과 쫓아오는 북한군이 뒤섞여 누가 누구인지 가릴 수 없었고, 겁에 질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1.

그날 밤 940고지와 773고지도 넘어갔다. 피의 능선은 닷새 만에 다시 북한군의 것이 되었다1.

류홍석 일병은 그날 그 능선에서 전사했다. 쏟아진 포탄이 그를 덮쳤다3.

*

1951년 8월 28일~9월 3일, 같은 비탈 — 미 제9보병연대 정면.

러프너는 국군 제5사단장에게 지칠 대로 지친 제36연대를 빼 달라고 청했다. 새로 붙은 제35연대가 28일 아침 아홉 시 773고지로 올라가 꼭대기를 되찾았다가 밤 역습에 내주었고, 이튿날 낮에 다시 빼앗았다1. 미 제9연대는 940고지 앞에서 길을 열지 못했다1.

같은 날 바이어스는 방법을 바꾸었다. 한 능선에만 매달리지 않고 군단 전선 전체를 31일부터 조금씩 밀어 올리기로 했다. 북한군의 포화를 여러 곳으로 흩어 놓고, 피의 능선으로 들어오는 증원을 끊으려는 계산이었다2. 동쪽의 해안분지(현 양구군 해안면), 미군들이 그 생김새를 따라 펀치볼이라고 부르던 그릇 모양의 분지 둘레로 미 제1해병사단과 한국 해병대가 올라갔다2.

8월 31일 금요일, 미 제9연대 B중대장 크지조스키(36) 대위는 중대를 이끌고 다시 700고지로 올라갔다. 엄체호 두 곳에서 십자로 쏘아 대는 기관총과 수류탄을 뚫고 기어오른 그는 수류탄으로 엄체호 하나를 부수고, 카빈 소총으로 또 하나를 없앴다8. 이튿날 중대는 몇백 야드를 나아갔다가 밀렸다. 그는 수류탄 파편에 다시 다쳤지만 뒤로 실려 가기를 마다했다8.

중대는 그사이 종군기자들이 붙인 이름을 알게 되었다. 미군 신문 「성조지」가 그 능선을 ‘피의 능선’이라고 불렀다9. 미 육군 전사의 각주는 그 이름을 처음 들은 병사들이 대체 그 난리가 어디서 벌어지고 있느냐며 의아해했다고 적었다2.

“신문에 ‘피의 능선’이 났다는데, 그게 어디야?”

“너 지금 그 위에 엎드려 있잖아.”

“그럼 사진은 누가 찍었대? 나는 못 봤는데.”

9월 3일 월요일, 크지조스키는 다시 중대를 이끌고 올라가 북한군 진지 몇 곳을 넘었다. 중대는 또 기관총 사격에 묶였다. 그는 박격포를 어디에 떨어뜨릴지 재려고 혼자 드러난 둔덕으로 걸어 나갔다. 저격병의 총탄이 그를 그 자리에서 쓰러뜨렸다8.

*

1951년 9월 3일~5일, 피의 능선 양쪽.

능선 바깥에서 판이 바뀌고 있었다. 9월 1일 러프너는 정해진 교대 날짜에 맞추어 본국으로 떠났고, 디샤조 준장이 임시로 사단을 맡았다2. 디샤조와 바이어스는 미 제9연대가 정면을 계속 두드리는 동안, 서쪽에서 미 제23연대가, 동쪽에서 미 제38연대가 능선의 등 뒤를 감싸도록 했다2. 제38연대는 대우산 쪽에서 피의 능선 뒤쪽의 고개를 잡아 사태리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증원을 막았다. 제23연대는 983고지 북쪽, 두타연(현 양구군 방산면 두타연) 남쪽의 855고지로 올라가 문등리 쪽 길을 끊었다1. 서쪽에서는 국군 제7사단이 901고지를 차지했다1.

미 제9연대는 9월 3일 773고지를, 이튿날 940고지를 되찾았다. 9월 5일 수요일, 그들은 983고지 꼭대기에 올라섰다1. 꼭대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체호 입구마다 흙이 무너져 있었고, 안에는 북한군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보급품이 쌓여 있었다. 비탈 곳곳에 시체가 누워 있었다. 병사들은 총을 겨눈 채 엄체호를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총구 앞에서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북한군은 3일에서 5일 사이 밤에 진지를 비우고 물러났다1. 미 육군 전사는 그들이 보급품을 잔뜩 남기고 시체 오백 구 넘게를 두고 갔다고 적었다2.

미 제2사단과 배속 부대의 손실은 죽은 사람 326명, 다친 사람 2,052명, 실종 414명, 모두 2,772명이었다2. 그 가운데 국군 제36연대가 죽은 사람 132명, 다친 사람 816명, 실종 122명이었다1. 사단은 북한군의 손실을 15,363명으로 셈했다. 전사는 그 숫자 가운데 적이 몇 명 죽고 다쳤는지는 어림이며 실제와 크게 다를 수 있다고 덧붙였다2. 미 제2사단 포병은 하루 평균 3만여 발을 쏘았다. 105밀리 포탄이 32만여 발, 155밀리 포탄이 9만여 발이었다. 포진지 둘레에는 포탄 상자와 탄피가 산처럼 쌓였다1.

닷새 뒤 밴 플리트는 마지막 사상자 집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준비하던 더 큰 공세를 접었다. 피의 능선보다 훨씬 큰 그 작전은 치를 목숨값에 견주어 얻을 것이 없다고 보았다2. 대신 그는 9월 8일 제10군단에 피의 능선 바로 북쪽의 다음 능선을 따내라고 명령했다. 북한군은 그 능선으로 물러나 있었다2.

*

2011년 7월 19일,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 수리봉.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발굴병들이 흙을 걷어 냈다. 머리뼈와 오른쪽 정강이뼈가 나왔다. 곁에는 M1 카빈 소총의 탄피와 수류탄 안전핀이 함께 묻혀 있었다10. 이십에서 칠십 미터 떨어진 자리에서 2012년과 2016년에 넙다리뼈가 더 나왔다10. 감식단은 그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고 있었다고 보았다11.

뼈의 주인은 일병 김봉학(27)이었다. 대구 비산동에서 칠 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집안의 가내수공업을 도왔다. 1950년 8월에 동생과 함께 입대했고, 입대한 뒤 형제는 헤어졌다10. 그는 1951년 9월 5일 전사로 처리되었다11. 983고지 꼭대기에 아무도 남지 않았던 날이었다. 동생 김성학은 국군 제8사단에서 싸우다 1950년 12월 춘천 쪽에서 먼저 전사했다10.

2021년, 대구의 한 예비군 지휘관이 전사자 명부를 뒤져 막냇동생 김성환을 찾아냈다. 그의 피에서 뽑은 유전자가 수리봉의 뼈와 맞았다10. 2023년 6월 6일, 김봉학은 국립서울현충원 52묘역에서 1960년부터 거기 묻혀 있던 동생 곁에 누웠다11. 형제의 무덤에는 고향 비산동의 흙을 덮었다10.

류홍석의 뼈는 2011년 10월 같은 동면의 오상골에서 나왔다4. 오른쪽 넙다리뼈, 위팔뼈, 종아리뼈, 정강이뼈가 차례로 나왔고, 카빈 소총탄과 전투화 밑창이 함께 나왔다3. 2024년 4월 여동생 류영순의 유전자가 그 뼈와 맞았다4.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는 오빠가 돌아올지 모른다며 홍성의 옛집을 그대로 두었다3.

2024년 5월 17일,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의 그녀의 집으로 오빠의 유해가 돌아왔다. 그녀는 어린 시절 오빠가 자신을 어르며 놀아 주던 일을 또렷이 기억했다3. 여든여섯 살의 동생이 말했다4.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오빠를 이렇게 만나게 돼 감격스럽다.”

지도에는 지금도 983, 940, 77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그 비탈에 남은 사람들의 이름은 거기에 없다.

사료 출처

1. 대한민국 육군 누리집, 「피의 능선전투(1951.8.18-9.5)」, army.mil.kr/history/자료실/전투/전투/57.htm(2015.9.23 인터넷 아카이브 보존본, web.archive.org/web/20150923174142/) —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사』(1996) 발췌. 983고지(수리봉)와 731-983-940-773고지 8킬로미터 능선, 문등리·사태리 골짜기, 「목에 비수」, 북한군 제12사단 제1연대·제27사단 제14연대 배치, 엄체호·유개교통호·상자형 지뢰 4,000~5,000개와 「난공불락의 요새」 호언, 8월 16일 미 제2사단장이 황엽 대령에게 내린 명령(18일 06:00, 983-940-773 점령)과 포병·항공·미주리함 지원 약속, 18일 7개 포병대대 126문 공격준비사격과 06:30 공격, 5~7부 능선 돈좌, 그날 밤 4킬로미터 정면 200문, 수목과 산의 변모, 제1대대 투입과 제2중대·미 제72전차대대 B중대 1개 소대의 비득고개 진출, 20일 02:00 773고지 점령, 21일 20:00 제6중대(20명)의 940고지 점령, 제11중대의 940고지 쪽 우회와 22일 11:30 983고지 점령·「대한민국 만세」·무혈 점령, 26일 02:00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의 포위와 제3대대 철수, 26일 11:00 미 제9연대 지원 명령, 27일 북한군 역습과 미 제9연대 제2대대의 공격 실패, 미군 참전자 증언, 27일 밤 940·773고지 상실, 28일 09:00 제35연대의 773고지 탈환·상실·재탈환, 국군 제7사단의 901고지, 미 제38연대의 진고개 차단, 미 제23연대의 855고지, 9월 3~5일 773·940·983고지 재점령과 북한군의 사전 철수, 손실(전사 326·전상 2,032·실종 414·계 2,722, 그중 제36연대 전사 132·전상 816·실종 122·계 1,070), 포탄 소모(하루 3만여 발, 105밀리 32만여 발·155밀리 9만여 발). 2.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미 육군 군사사센터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총서, 1966, 1992 재판) 제5장 「The New War」의 「Bloody Ridge」 절과 각주 29~35, koreanwaronline.com/history/TruceTent/ch5.htm 게재본 — 밴 플리트의 지침(한국군에 자신감을 길러 주라), 바이어스의 제36연대 배속, 983고지 북한군 관측소와 캔자스선 포격, 세 봉우리 능선, 북한군의 엄체호 대기와 마지막 몇 야드의 사격, 27일 일부 국군 부대의 붕괴와 미 제9연대로 번진 공포(각주 32, 제9연대장 John M. Lynch 면담), 28일 바이어스의 군단 전면 제한 진격 결정과 31일 개시, 해병대의 펀치볼 북쪽 가장자리 진출, 러프너의 9월 1일 교대 귀국과 디샤조의 임시 지휘(각주 34), 미 제23·38연대의 양익 포위, 9월 4~5일 점령과 시체 500여 구, 손실(각주 35: 전사 326·부상 2,052·실종 414·계 2,772, 적 확인 사살 1,389·추정 사살 4,288·추정 부상 9,422·포로 264·계 15,363), 성조지가 붙인 이름과 병사들의 의아함(각주 30, 원문: they wondered where all this excitement was taking place), 밴 플리트의 탈론스 작전 철회와 9월 8일 다음 능선 공격 지시. 3. 명희진, 「6·25전쟁에 부서진 류홍석 일병…73년만에 백발 여동생 품으로」, 서울신문 2024.5.17, m.seoul.co.kr/news/2024/05/17/20240517500065 — 고등학교 졸업 뒤 한의사, 1951년 3월 14일 입대,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 태기산·인제지구 전투, 1951년 8월 27일 피의 능선 전투 전사(다량의 포탄에 의한 전사 추정), 유해 수습 경위와 카빈 소총탄·전투화 밑창, 여동생 류영순의 기억과 생가 보존. 4. 김용래, 「“73년 만의 전역” … 태안군서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 개최」, 뉴스서울 2024.5.17, newsseoul.co.kr/news/view/1065580242828202 — 1931년 5월 1일 충남 홍성 출생, 2011년 10월 17일 양구군 동면 오상골 발굴, 여동생 류영순(86)과의 유전자 대조, 5월 17일 태안군 안면읍 귀환 행사, 류영순의 말(「20세의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오빠를 이렇게 만나게 돼 감격스럽다」). 5. Bevin Alexander, 『Korea: The First War We Lost』(1986) 「Bloody Ridge」 발췌, bevinalexander.com/excerpts/korean-war/bloody-ridge-korean-war.htm — 엄체호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155밀리 롱톰이었으나 수가 적었음. 6. 대한민국 육군 누리집, 「창의의 원칙 — 피의 능선 983고지전투」, army.mil.kr/history/과목개요/case1/창3.htm(2011.12.7 인터넷 아카이브 보존본) — 제11중대장 정창호 중위의 기만 돌격(정상 50미터 앞에서 「와」 함성으로 최후저지사격 유도 뒤 실제 돌격), 제3소대의 후방 협격, 「용명 높은 돌격 중대장」, 제3소대장 이찬식 소위의 책 『전우애』와 「살아 있는 군신」. 7. 미 육군 명예훈장 공적서, 「Lee R. Hartell」(일반명령 제16호, 1952.2.1), 미 육군 군사사센터 명예훈장 수훈자 목록(영문 위키백과 「Lee R. Hartell」 게재 전문, 2026년 10월 열람) — 미 제15야전포병대대 A포대, 미 제9연대 B중대 배속 관측장교, 고방산리 부근, 1951년 8월 27일 새벽, 조명탄 요청, 10야드 앞까지 온 적, 손의 중상과 다른 손으로 쥔 송화기, 전초 상실 뒤 마지막 무전(원문: urged the friendly elements to fire both batteries continuously). 700고지와 04:00·06:30 시각은 위키백과 본문. 8. 미 육군 명예훈장 공적서, 「Edward C. Krzyzowski」(일반명령 제56호, 1952.6.12)(영문 위키백과 「Edward C. Krzyzowski」 게재 전문, 2026년 10월 열람) — 미 제9연대 B중대장, 톤둘 부근 700고지, 1951년 8월 31일~9월 3일, 엄체호 둘 파괴, 이튿날의 전진과 철수, 파편 부상과 후송 거부, 9월 3일 박격포 사격 위치를 재려 혼자 나간 둔덕에서 저격으로 전사. 9. 박재광, 「피의 능선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23.5.16 개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60488 — 성조지(Stars and Stripes)가 붙인 이름, 983·940·773고지, 북한군 제12·24사단, 기간을 8월 17일~9월 3일로 적음, 1980년 11월 11일 전적비 건립. 10. 뉴데일리 2023.3.10 김봉학 일병 신원 확인 기사(제목은 옮겨 적지 못함), newdaily.co.kr/site/data/html/2023/03/10/2023031000160.amp.html — 1923년 9월 10일 대구 서구 출생, 칠 남매의 맏이, 1950년 8월 동생과 함께 입대, 2011년 7월 19일 수리봉 첫 발굴, 2012.11.15·2016.10.12 추가 발굴(20~70미터 거리), M1 카빈 탄피와 수류탄 안전핀, 2021년 예비군 지휘관의 유가족 찾기와 동생 김성환, 동생 김성학(국군 제8사단, 춘천지구 전사), 고향 비산동의 흙. 11. 조시승, 「‘피의 능선’ 전투 끝, 73년 만에 다시 만난 ‘호국의 형제’」, 내 손안에 서울 2023.6.7, mediahub.seoul.go.kr/archives/2008132 — 1951년 9월 5일 전사 처리, 감식단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전투에 임하던 중」, 2023년 6월 6일 국립서울현충원 52묘역 합동 안장, 동생은 1960년 안장.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러프너 1903년생(영문 위키백과 「Clark L. Ruffner」), 밴 플리트 1892년생(영문 위키백과 「James Van Fleet」), 바이어스 1899년생(영문 위키백과 「Clovis E. Byers」), 류홍석 1931년생(4번), 하텔 1923년생(7번 위키백과 문서), 크지조스키 1914년생(8번 위키백과 문서), 김봉학 1923년생(10번). 황엽 대령, 정창호 중위, 이찬식 소위, 디샤조 준장, 제9연대장 린치 대령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류영순의 나이는 2024년 기사의 나이를 풀어 썼다. [자료 충돌] 기간 — 미 육군 전사와 육군 누리집은 8월 18일~9월 5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8월 17일~9월 3일로 적었다. 본문은 앞의 것을 따랐다. [자료 충돌] 손실 — 미 육군 전사 각주는 부상 2,052·계 2,772, 육군 누리집은 전상 2,032·계 2,722로 적었다. 본문은 미 육군 전사를 따랐다. 같은 누리집의 다른 문단은 제36연대 손실을 「전사 및 실종 307, 부상 899」로, 미군 손실을 「전사 및 실종 740, 부상 2,000여」로 적어 같은 문서 안에서도 숫자가 다르다. 김태우의 자유아시아방송 칼럼(2022.8.24)은 한국군 약 2,800명, 북한군 약 1만 5천 명으로 적었다. 월운리 전적비 안내문(관광 안내 누리집 재인용)은 제36연대가 적 1,480여 명을 사살하고 70명을 사로잡았다고 적었다. [자료 충돌] 북한군 부대 — 육군 누리집은 제12사단 제1연대·제27사단 제14연대와 역습 부대 제6사단 제13연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제12·24사단, 「창의의 원칙」 문서는 제2군단 제2사단과 제12·6사단을 적었다. 본문은 육군 누리집을 따랐다. [자료 충돌] 983고지 점령 방식 — 육군 누리집은 제11중대가 뒷비탈로 은밀히 들어가 「총 한 발 쏘지 않고」 정상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고, 「창의의 원칙」 문서는 정상 50미터 앞의 기만 함성과 실제 돌격, 제3소대의 후방 협격을 적었다. 두 서술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확인하지 못해 본문에 둘 다 적었다. [자료 충돌] 하텔 중위가 맞선 군대 — 영문 위키백과 본문은 「중공군」의 역습이라고 적었으나, 미 육군 전사는 피의 능선을 지킨 군대를 북한군으로 적었다. 본문은 북한군으로 썼다. 700고지가 983고지 능선의 어디에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해 「그 능선 싸움터의 700고지」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류홍석의 나이 — 서울신문은 「22세」, 뉴스서울은 류영순의 말로 「20세」라고 적었다. 1931년 5월 1일생이면 전사 때 만 스무 살이다. [재구성] 러프너가 지도를 짚은 몸짓과 황엽이 지도를 본 대목, 「한의사, 이 산 오르면 무릎에 뭐가 좋소?」로 시작하는 분대원의 대화와 류홍석을 「한의사」라고 부른 일, 지뢰를 밟는 병사와 대검으로 흙을 찔러 길을 찾는 모습(상자형 지뢰와 지뢰지대 통로 개척은 기록), 「앞으로 백 미터, 기관총 진지」 무전, 773고지의 빗소리와 수류탄 소리, 정창호의 명령 문장(내용은 기록), 26일 새벽 참호 안의 백병전 세부(육박전은 기록), 하텔의 마지막 무전의 우리말 문장(뜻은 공적서), 「신문에 ‘피의 능선’이 났다는데」로 시작하는 병사들의 대화(병사들의 의아함은 기록), 김봉학의 전사 처리일과 983고지 재점령일을 잇는 문장, 마지막 두 문장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류홍석이 8월 27일 정확히 어느 고지에서 쓰러졌는지, 김봉학이 어느 연대에 있었는지는 기록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북한군 병사 개개인의 이름과 내면, 북한 쪽 공식 서술은 찾지 못했다. 펀치볼 싸움은 43화, 피의 능선 북쪽 다음 능선의 싸움은 44화에서 다룬다.

4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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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능선 전투 — 지도에는 없는 이름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