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41/57

41화(13,244자)

용문산 전투 — 무너진 사단이 돌아오다

1950 · 네오

용문산 전투, 1951년 5월 17일~22일 — 아래쪽 용문산(1157고지)과 설악, 위쪽 북한강·청평호와 청평·상천리·가평. 사단 주저항선(제7·19연대)보다 한참 북쪽 강가에 나간 제2연대, 왼쪽 화야산과 오른쪽 두릉산에서 물러난 이웃 연대, 18~19일 북한강을 건넌 중공군 제63군 제187·188사단과 19일 밤 투입된 예비 제189사단, 20일 새벽 제7·19연대의 반격, 20~21일 밤 북한강 북쪽으로 물러나는 중공군, 22일까지의 추격.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1년 5월 초, 경기도 가평군 남쪽 —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집결지.

연병장 흙바닥에 소총과 배낭이 줄지어 놓였다. 군장검사였다. 사단장 장도영(27) 준장이 대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새 연대장 송대후 중령이 반걸음 뒤에서 따랐다. 한 달 전 4월 22일 밤, 화천 북쪽 사창리에서 이 연대는 진지를 버리고 흩어졌다. 그 일로 연대장과 참모들이 물러났고 송대후가 왔다1. 사단장은 정보주임과 작전주임을 갈았고, 세 대대장도 모두 후송하거나 군법회의에 넘겼다2.

장도영이 대열 앞에 섰다2.

“청성부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그걸 너희가 사창리에서 망쳐 놓았다. 이제 후퇴는 없다. 전초진지를 지켜라. 진지를 지키고 있는 한, 사단장은 무엇이든 다 대 주겠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해산한 뒤 제2대대 병사들은 철모와 머리띠에 먹으로 두 글자를 썼다. 결사(決死)였다2.

“야, ‘결’ 자 어떻게 쓰냐? 물 수 변에 뭐였더라?”

“그냥 한글로 써. 중공군이 한문 읽는다고 겁먹겠냐?”

“중공군은 한문 읽잖아.”

“그러니까 한글로 쓰라고. 읽고 겁먹으면 우리만 손해지.”

*

1951년 5월 중순, 용문산(현 경기도 양평군) 북쪽 — 국군 제6사단 지휘소.

사단 지휘소 뒤로 용문산 꼭대기가 보였다. 지도에는 1157고지라고 적힌 산이었다1. 그 앞으로 낮은 산줄기가 겹겹이 북쪽으로 흘러내려 강가에서 끝났다. 사단이 맡은 땅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북한강이었다. 그러나 미 제9군단은 강가가 아니라 그 남쪽 용문산 일대의 높은 고지에 주저항선을 긋게 했다. 강가에 서면 강 건너 높은 산에서 사단의 움직임이 다 내려다보였다2. 장도영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었다. 제2연대를 주저항선보다 한참 북쪽, 청평호(현 가평군 청평호) 남쪽 강가로 내보내 강을 건너는 적을 먼저 치게 한 것이다. 밀리면 나산(현 가평군 설악면 일대)과 427고지로 물러나고, 마지막에는 연대 전체가 427고지에 원을 그리고 버틴다2.

미군 고문관이 지도 위의 돌출된 연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연대는 혼자 너무 나가 있습니다. 주저항선 안으로 다 거둬들이십시오.”

“거둬들이면 사창리 때와 똑같아집니다. 저 연대는 저기서 이름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고문관의 권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이웃 부대들도 연대 하나씩을 경계부대로 앞에 내보내 두고 있었으니 그 배치만으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른 점은 장도영이 그 연대에게 물러나지 말라고 한 데 있었다2.

5월 17일, 강 쪽에서 정찰대가 돌아왔다. 북한강 가의 골짜기 방하리(현 경기도 가평군)에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이미 강을 건너와 모여 있었다. 정찰대는 그들을 쳐서 물리쳤다. 그러나 해가 지자 강 여러 곳에서 큰 무리가 건너오기 시작했고, 정찰대는 연대로 돌아왔다1. 같은 무렵 왼쪽 화야산(현 가평군 청평면·설악면)에 있던 국군 제2사단 제31연대와 오른쪽 두능산(현 홍천군 두릉산으로 추정)에 있던 미 제7사단 제31연대가 주저항선으로 물러났다1. 청평호 남쪽에는 제2연대만 남았다.

송대후가 무전기를 들었다.

“좌우가 다 빠졌다. 우리만 남았다. 그대로 있는다.”

*

1951년 5월 18일, 북한강 북쪽 —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 지휘부.

사흘 앞서 5월 16일 해 질 녘, 지원군과 북한군은 5차 공세의 두 번째 단계를 열었다. 주력은 동쪽 산악에서 국군 사단들을 치고 있었다3. 서쪽의 제19병단이 받은 일은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동쪽 싸움터로 미군이 옮겨 가지 못하게 이쪽에서 소리를 크게 내는 일이었다3. 병단 사령관 양더즈(39)는 제63군을 북한강과 홍천강이 만나는 삼각지에 넣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유엔군 증원을 끊으라는 뜻이었다4.

군장 푸충비(34)는 그 명령을 소리 나게 실행했다. 제63군은 청평(현 가평군 청평면) 일대를 치고 상천리(현 가평군 청평면 상천리)까지 다가갔다. 청평 남쪽의 다리목 진지를 빼앗았다. 그리고 한강 남쪽 땅의 길과 고개를 ‘대놓고’ 조사했다. 서울을 돌아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갈 듯한 자세를 보여 주라는 주문이었다3.

“정찰대가 너무 눈에 띕니다.”

“띄라고 보낸 거다. 놈들이 우리 걸음 소리를 서울 쪽에서 듣게 해.”

18일, 푸충비는 주력을 이끌고 북한강을 건넜다. 중국 쪽 글은 그날 퉁팡산, 뤄산(나산), 펑웨이산과 580.7고지를 차지했다고 적었다4. 뤄산을 우리말로 읽으면 나산이다. 강 남쪽에서 제2연대 제1대대가 지키던 산과 같은 이름이었다.

강을 건넌 것은 밤이었다. 병사들은 소총과 탄띠를 머리 위로 들고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걸었다. 오월의 북한강은 아직 차가웠다. 강 남쪽 둔덕에서 기관총이 울리기 시작하자 앞줄이 물속에 엎드렸고, 뒷줄은 앞사람의 등을 밀며 그대로 나아갔다. 물가에 닿은 병사들은 젖은 솜옷을 입은 채 비탈을 기어올랐다. 날이 밝으면 하늘에서 비행기가 내려온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해가 뜨기 전에 산 하나라도 더 올라가야 했다.

“저 앞 산에 있는 놈들은 몇이나 되냐?”

“모른다. 많이 쏘는 걸 보니 많겠지.”

그 대답이 이튿날 제63군 전체의 계산이 되었다.

*

1951년 5월 19일, 가평군 설악면 북쪽 — 국군 제2연대 진지.

18일 낮에는 중대 규모의 중공군이 몇 번 강을 건너오다 되돌아갔다1. 19일 새벽부터는 사정이 달랐다. 중공군 제187사단과 제188사단의 주력이 한꺼번에 덤볐다1. 강가의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밤새 강을 건너는 무리를 때리고, 날이 밝자 포병과 미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뒤로 물러났다. 계획대로였다2.

계획에 없던 것은 그다음이었다. 물러난 대대들은 주저항선 안으로 빠지지 않았다. 나산과 427고지에 들어앉아 버텼다2. 사단 뒤에 있던 포병대대 일곱, 국군 둘과 미군 다섯이 그날 하루에 3만 발 가까운 포탄을 연대 앞에 쏟았다2.

연대 지휘소의 송대후는 하루 종일 수화기를 귀에서 떼지 못했다. 대대에서 좌표가 올라오면 그대로 포병 연락장교에게 넘겼다. 산 너머에서 포성이 울리고, 몇 초 뒤 앞 능선 위로 흙기둥이 줄지어 섰다. 오후에 한 대대에서 무전이 왔다.

“탄약이 반도 안 남았습니다. 뒤로 물리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된다. 지금 거기서 내려오면 저놈들은 뒤를 따라 용문산까지 온다. 탄약은 올려 보낸다. 그 자리에 있어라.”

송대후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지도 위의 427고지를 연필로 두 번 덧그었다. 마지막에 연대 전체가 모일 자리였다.

“이게 경계부대일 리 없다. 저게 주진지다.”

중공군 지휘부는 그렇게 읽었다2. 마치 제2연대 뒤에 사단 전체가 있는 것처럼, 예비로 쥐고 있던 제189사단까지 꺼내 들었다1. 19일 밤, 중공군은 총공격을 걸었다.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사방으로 총구를 돌렸다. 조명탄이 산등성이를 하얗게 비추면, 그 빛 아래로 중공군이 참호 안까지 들어왔다. 백병전이었다1.

이틀 싸움에 다친 사람이 줄지어 나왔다. 쌀과 탄약이 모자랐다1. 연대본부도 습격을 받았다. 제1대대장 홍재익 대위가 수류탄 파편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5 2. 대대는 나산에서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 고개 하나에서 겨우 병력을 다시 모았다2.

*

1951년 5월 19일 밤, 353고지 아래 — 국군 제2연대 통신 계통.

연대 지휘소의 전화기가 울리지 않았다. 제3대대를 부르는 선이었다. 통신병이 손잡이를 돌리고 또 돌렸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353고지는 중공군에게 세 방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유선은 고지 근처 어딘가에서 끊겼다6. 거기까지 통신병을 보낸다는 것은 사람 하나를 중공군 한가운데에 내려놓는다는 말과 같았다. 연대 참모들이 서로 얼굴만 보았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이천길과 노승호가 앞으로 나왔다6. 둘은 선 끝을 한 손에 쥐고 엎드렸다. 중공군 매복이 있을 만한 골짜기를 피해, 비탈이 가파르고 들쭉날쭉한 길을 골랐다. 머리 위로 박격포탄이 떨어지고 기관총 예광탄이 줄을 그었다6. 손바닥으로 선을 훑으며 기었다. 선이 팽팽하면 계속 이어진 것이고, 손에 끝이 덜컥 잡히면 거기서 끊어진 것이었다.

노승호가 숨을 몰아쉬었다.

“형님, 이거 우리 쪽 선 맞습니까? 중공군 것 붙들고 가는 거 아닙니까?”

“중공군 선이면 그 끝에 중공군 대대장이 앉아 있겠지. 그럼 그 사람한테 항복하라고 하면 된다.”

끊어진 끝은 바위틈에 걸려 있었다. 둘은 피복을 이로 벗기고 구리선을 꼬아 붙였다. 연대 지휘소의 전화기가 울렸다. 제3대대였다.

포병의 사격이 다시 353고지 둘레로 정확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멸 직전이던 제3대대는 빠져나왔고, 역공의 맨 앞에 서서 353고지를 다시 손에 넣었다6. 이천길과 노승호가 언제 어느 길로 돌아왔는지는 기록에 없다. 두 사람의 이름은 63년 뒤 국가보훈처가 그달의 6·25전쟁영웅을 고르면서 다시 불렸다6.

*

1951년 5월 20일 새벽, 용문산 북쪽 — 국군 제6사단 지휘소.

사단 지휘소는 밤새 제2연대의 무전을 들었다. 사단 본대도, 미 제9군단도 섣불리 반격을 명령할 수 없었다. 중공군은 사단의 주저항선에 아직 닿지도 않았고, 주저항선을 넘어 나가려면 미 제8군 전체가 반격으로 돌아선다는 지침이 내려와야 했다2. 참모 하나가 천막 밖으로 나갔다. 동쪽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2.

“날 좀 밝아라! 빨리 좀 밝아라!”

천막 안의 장도영은 상황판 앞을 떠나지 않았다. 제2연대 정면에 붙은 중공군을 세면 셀수록 숫자가 커졌다. 뒷날의 계산으로 사단 전체와 맞선 적은 세 배였고, 제2연대 한 곳만 떼어 보면 아홉 배였다5. 작전참모가 다가와 물었다.

“사단장님, 2연대를 지금이라도 427고지 뒤로 빼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빼면 저 아홉 배가 그대로 우리 주저항선에 붙는다. 날이 밝을 때까지만 버티게 해.”

참모는 대답 대신 무전병 옆으로 가서 앉았다.

지침은 그 밤에 내려왔다. 동쪽 현리에서 국군 제3군단을 무너뜨린 중공군 주력은 대관령과 한계 쪽 어깨에서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미 제8군은 20일을 기해 서부와 중부에서 반격하기로 했다7 2. 새벽 두 시, 사단은 각 연대에 약식 명령을 내렸다2.

다섯 시, 주저항선에서 기다리던 제7연대(연대장 양중호 대령)와 제19연대(연대장 임익순 대령)가 고지를 내려갔다2 5. 두 연대는 제2연대를 에워싼 중공군의 옆구리와 등 뒤를 쳤다5. 유엔군과 국군 포병이 그 앞을 다시 두들겼다5. 밤새 네 차례 파도처럼 밀려오던 중공군의 공격은 그 무렵 모두 꺾여 있었다2.

제19연대 병사들은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내려갔다. 비탈마다 전날 밤 포탄에 맞은 중공군의 시신이 엎어져 있었다. 누비 솜옷을 입은 몸들이었고, 운동화처럼 생긴 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부서진 박격포 포신과 수류탄 자루가 흙더미 사이에 박혀 있었다. 살아 있는 중공군은 등을 보이며 북쪽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었다. 미군 전폭기가 그 골짜기 위를 낮게 지나갔다.

한 분대가 바위 밑에서 다리를 다친 중공군 병사 하나를 찾아냈다. 병사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분대장이 그 손에 든 것이 없는지 보고 나서 물통을 건넸다. 그날 하루 사단이 잡은 포로는 아홉 명이었다1.

“2연대, 2연대, 들리나? 여기 19연대다. 너희 앞으로 간다. 쏘지 마라.”

“알았다. 우리 앞에 오는 건 다 중공군인 줄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묻고 쏜다.”

그날 저녁 일곱 시, 427고지의 마지막 진지에 모여 있던 제2연대가 올라오는 제19연대와 손을 맞잡았다2.

427고지 위의 병사들은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다. 군복은 흙과 피로 뻣뻣했고, 탄띠는 거의 비어 있었다. 제19연대 병사 하나가 배낭에서 주먹밥을 꺼내 내밀었다. 받은 병사는 그것을 반으로 쪼개 옆 사람에게 넘겼다. 옆 사람이 다시 반으로 쪼갰다. 주먹밥은 네 번째 손에 갔을 때 엄지손톱만 해졌다.

“그거 누구 코에 붙이라고 주는 거냐?”

“코에 말고 입에 붙여. 내일은 한 덩이씩 온다.” 백과사전은 그날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의 전과를 중공군 사살 4,912명, 포로 9명, 소총과 기관총 312정으로 적었다. 같은 날 사단은 다섯 명이 전사하고 이백 명이 다쳤다1.

같은 날 미 제9군단장 호지(56) 소장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미군 공식 전사에는 그날 군단의 반격이 공격적이라기보다 조심스러웠다고 적혀 있다. 짧게 나아간 사단장들을 호지는 심하게 꾸짖었다7. 용문산 아래에서 나흘 만에 처음으로 크게 숨을 쉰 사단과, 지도 위의 짧은 화살표를 보는 군단장 사이에는 그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

1951년 5월 20일, 북한강 남쪽 — 중공군 제63군 지휘부.

제189사단이 무전으로 알려 왔다. 동쪽에서 적이 둘러싸 들어오고, 508.7고지를 두고 싸움이 거세다는 보고였다4. 그날 밤 포로들의 말이 지휘부에 모였다. 제189사단 동쪽으로 들어오는 것은 미 제7사단이고, 서쪽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는 국군 제2사단이 차지했으며, 국군 제6사단은 갈라져서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4. 뒤에는 북한강이 있었다. 식량과 탄약도 바닥이었다2.

병단에서는 아직 물러나라는 명령이 없었다. 참모 하나가 그 점을 짚었다. 중국 쪽 통속 기사는 푸충비가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4.

“철수한다. 사단마다 연대 하나씩 남겨 엄호하고, 주력은 북으로 간다. 나중에 지원군 사령부가 책임을 묻거든 내가 진다.”

제187사단 제559연대장 덩스쥔은 그날 5월 20일에 전사했다8. 1932년 홍군에 들어가 대장정을 걸었고, 1940년에는 중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다섯 시간 넘게 싸워 ‘특등 전투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다8. 그의 유해는 거두어지지 못했다. 선양의 열사능원에 그의 무덤은 없고, 이름만 벽에 새겨졌다. 그때 아들은 두 살이었고, 딸은 다섯 달이었다8.

제63군은 20일과 21일 밤 어둠을 타고 북한강을 다시 건넜다2. 엄호로 남은 제188사단 제563연대는 크게 다쳤다4.

어둠 속에서 물러나는 행렬은 왔던 길보다 무거웠다. 들것 하나에 네 사람이 붙었고, 걸을 수 있는 부상병은 소총을 지팡이 삼아 짚었다. 강가에 닿으면 다시 가슴까지 차는 물이었다. 뒤에서는 엄호 연대의 기관총 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 소리가 들리는 동안에는 아직 누군가 남아 있었다. 중국 쪽 기록은 이 싸움을 이렇게 맺었다. 제63군과 제64군은 ‘승리하고 군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옮겨 쉬었다3. 지원군과 북한군 연합사령부는 21일에 두 번째 단계를 끝내라고 명령했다3.

*

1951년 5월 21일~22일, 북한강 가 — 국군 제6사단 추격로.

21일 새벽, 중공군은 진지를 비우고 사라졌다. 사단은 곧바로 뒤를 쫓았다5. 강가 길에는 중공군이 버리고 간 것들이 흩어져 있었다. 소총, 탄약 상자, 반쯤 먹다 만 미숫가루 자루, 짚신이 있었다.

제2연대 병사 하나가 길가에서 철모를 하나 주웠다. 자기 대대 철모였다. 이마 쪽에 먹으로 쓴 ‘결사’ 두 글자가 빗물에 번져 있었다.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는 몰랐다. 병사는 그 철모를 배낭 끈에 매달고 걸었다.

21일에도 군단의 전진은 짧았다. 호지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22일에는 추격 방식으로 적어도 6마일, 십 킬로미터쯤을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빨리 가야 물러나는 중공군의 엄호부대를 뚫고 본대에 닿을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7.

“6마일이면 저 산을 몇 개 넘어야 합니까?”

“지도에선 손가락 한 마디다. 발로는 이틀이다.”

22일, 미 제9군단의 네 사단은 서쪽부터 미 제24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6사단, 미 제7사단 차례로 청평호와 홍천강 위쪽을 잇는 ‘조지아’ 선에 닿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7. 중공군은 쫓는 쪽보다 빨리 물러나고 있었다.

사단의 전과를 두고는 숫자가 여럿이다. 사단 전투상보는 5월 19일부터 30일까지 사살 21,550명, 포로 2,617명을 적었고, 사단의 손실은 죽거나 실종된 사람 204명, 다친 사람 494명이었다2. 같은 기간 미 제9군단 전체가 추산한 적 사상은 7만 3천 명이 넘었다7.

일주일 뒤 사단은 북쪽 화천저수지(현 화천군·양구군 파로호) 서쪽 끝까지 올라갔다. 미군 공중관측은 그때 이미 저수지 아래가 거의 비어 있다고 보고했다. 중공군 주력은 빠져나간 뒤였다7. 이승만은 뒷날 그 저수지에 ‘오랑캐를 깨뜨린 호수’라는 뜻의 이름 파로호(破虜湖)를 붙였고, 1955년 그 이름을 새긴 비석이 섰다9.

그 길 위 어디쯤에서, 번진 ‘결사’ 두 글자가 쓰인 철모는 여전히 한 병사의 배낭에 매달려 흔들렸다. 한 달 전 사창리에서 그 사단은 총을 두고 왔다. 이번에는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사료 출처

1. 양영조, 「용문산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집필·2023.2.7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39489 — 사창리 뒤 연대장·참모 교체와 송대후 중령 부임, 5월 16일 공세 개시, 중공군 제19병단 제63군 제187·188·189사단, 좌인접 국군 제2사단 제31연대(화야산)·우인접 미 제7사단 제31연대(두능산)의 철수와 청평호 남쪽에 남은 제2연대, 17일 방하리 계곡 정찰대 교전과 일몰 뒤 대규모 도하, 18일 낮 중대 규모 도하 격퇴, 19일 새벽 제187·188사단 주력 투입, 예비 제189사단 투입, 19일 밤 총공격과 나산(제1대대)·353고지(제3대대)·427고지(제2대대) 전면방어와 백병전, 식량·탄약 부족, 20일 07시~18시 전과(사살 4,912·포로 9·소화기 312정)와 사단 손실(전사 5·부상 200). 참고문헌: 전사편찬위원회 『용문산전투』(1983),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9권(2012). 2. 나무위키, 「용문산 전투」(2026년 10월 열람) — 장도영의 제2연대 연대장·정보주임·작전주임 교체와 대대장 후송·군법회의 회부, 5월 1일 군장검사 발언, 제2대대의 「決死」 철모·머리띠, 군단 방침에 따른 용문산 일대 주저항선, 제2연대 전진 배치와 427고지·나산 축차진지·최후 전면방어 명령, 미 고문관의 철수 권고, 이웃 사단의 경계연대 배치, 19일 제1·2대대의 후퇴와 427고지·나산 고수, 7개 포병대대(국군 2·미군 5)의 19일 포탄 약 3만 발, 중공군의 주진지 오판, 연대본부 피습과 제1대대장 수류탄 부상·의식불명, 제1대대의 고개 집결, 반격 지침을 기다린 사단과 「동쪽 하늘」 장교, 미 제8군의 20일 반격 결정, 20일 02시 약식 명령, 05시 제7·19연대 반격, 네 차례 파상공세 실패, 20일 19시 427고지에서 제2·19연대 연결, 제63군의 20~21일 야간 북한강 철수, 사단 전투상보 5.19~30 사살 21,550·포로 2,617, 사단 손실 전사·실종 204·부상 494. 원 사료(『용문산전투』 1983 등)는 직접 보지 못했다. 3. 「傅崇碧:志愿军63军军长,铁原阻击坚守12天打出国威军威」, 腾讯新闻 2020.12.10, news.qq.com/rain/a/20201210A0534800 — 5월 16일 황혼 2단계 개시, 제19병단의 견제 임무에 따라 제63군이 청평천을 치고 상천리에 다가가 청평천 남쪽 교두보 진지를 빼앗음, 「한강 이남 병요지지를 공개적으로 조사해 서울 우회·도강 남진 자세를 보임」, 서부전선 행동이 적의 판단을 그르치게 했다는 서술, 5월 21일 2단계 종료 명령, 제63·64군 「승리하고 군사를 거두어」 북이 휴식. 4. 「铁原阻击战:傅崇碧擅自撤军,被“抛弃”的63军到底有多惨?」, 网易 계정 「明史明今」 2021.3.2, 163.com/dy/article/G43GQ4L10532BBOX.html — 양더즈가 제63군을 북한강·홍천강 삼각지에 두어 서→동 증원을 막게 함, 5월 18일 주력 도하와 퉁팡산·뤄산·펑웨이산·580.7고지 점령, 제189사단의 동쪽 포위 보고와 508.7고지 쟁탈, 포로 진술(미 제7사단·마석우리의 국군 제2사단·북진하는 국군 제6사단), 병단 지시 없는 상태의 철수 명령(원문: 撤,命令各师留下一个团掩护, 主力北撤。将来志司要追究责任, 我来负责!), 엄호한 제563연대의 큰 손실. 통속 기사여서 대사는 「기사가 적었다」로만 썼다. 5. 김희철, 「〔김희철의 전쟁사〕(26) 중공군 제5차 공세 막아낸 장도영의 용문산과 파로호 전투 대승」, 뉴스투데이 2020.2.24, news2day.co.kr/148561 — 제2연대 제1대대장 홍재익 대위·제3대대장 김두일 대위, 제7연대장 양중호 대령·제19연대장 임익순 대령, 두 연대의 중공군 측후방 역습과 포병 집중사격, 병력비(사단 1:3, 제2연대 1:9), 5월 21일 새벽 중공군 퇴각과 즉시 추격. 6. 김정욱, 「2월의 6·25전쟁영웅에 이천길 상사·노승호 하사」, 뉴스1, 머니투데이 게재 2014.1.28, mt.co.kr/politics/2014/01/28/2014012814538214869 — 국가보훈처 선정, 353고지 삼면 포위와 유선 절단, 제3대대 고립, 통신병 파견의 어려움, 「저희가 그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매복을 피해 유선을 쥐고 포복, 유선 연결로 제3대대 구출과 353고지 확보. 7.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미 육군 군사사센터, 1990, 25화 출처와 같은 책) 제25장 「Battle Below the Soyang」·제26장 「The Counteroffensive」(446~480쪽 무렵) — 5월 공세에서 제19병단이 제9군단·제1군단 정면에 견제 공격을 맡음, 미 제8군의 20일 반격, 호지가 정한 조지아 선(청평호·홍천강 북쪽), 서→동 미 제24사단·국군 제2사단·국군 제6사단·미 제7사단, 20일 짧은 전진 뒤 호지가 사단장들을 꾸짖음(원문: the IX Corps attack from the outset had been more cautious than aggressive), 22일 조지아 선 도달, 28일 공중관측의 저수지 아래 공백과 국군 제6사단의 저수지 서단 도착, 5월 제9군단 추산 적 손실 7만 3천여 명(사살 44,705·부상 19,753·포로 8,749). 8. 「92岁老兵带着家乡泥土缅怀长眠战友 致敬不朽英灵」, 中华网 2026.4.6(원출처 新浪财经), news.china.com/socialgd/10000169/20260406/49389554.html — 제19병단 제63군 제187사단 제559연대장 덩스쥔(邓仕均)의 1951년 5월 20일 전사, 1932년 홍군 입대·대장정, 1940년 백단대전 모허탄 혈전(다섯 시간 남짓)과 「진찰기 변구 특등 전투영웅」, 유해 미수습·선양 항미원조 열사능원 영명벽, 당시 아들 두 살·딸 다섯 달. 전사 장소는 기사에 없다. 9. 중국어 위키백과, 「破虏湖战役」(2026년 10월 열람) — 한국 측 주장 사살 21,550·포로 2,617, 이승만의 파로호 명명과 1955년 명명기념비(경향신문 1955.11.20 기사 인용).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장도영 1923년생(31화 [나이]와 같은 근거, 중국어 위키백과 「張都暎」도 1923.1.23), 푸충비(傅崇碧) 1916년생(중국어 위키백과 「傅崇碧」는 1916.1.12, 3의 텐센트 기사는 1916.12.8로 날짜가 다르나 해는 같다), 양더즈(杨得志) 1911년생(人民政协网 2014.3.26 「杨得志(1911-1994)」), 호지(William M. Hoge) 1894년생(영문 위키백과). 송대후, 홍재익, 김두일, 양중호, 임익순, 이천길, 노승호, 덩스쥔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시작 날짜 — 백과사전은 중공군 5월 공세 개시를 16일, 정찰대 교전을 17일로 적고, 지역 언론과 전적비 위령제 기사는 「5월 18일 제63군의 선제공격」으로 적는다. 반격 시각 — 나무위키는 20일 05시, 백과사전 전과 집계는 07시~18시. 제189사단이 처음 친 곳 — 백과사전은 19일 「좌전방 제2대대의 울업산」, 나무위키는 울럽산을 제2대대의 첫 진지로 적어 이름 표기도 다르다(본문에서는 장소를 쓰지 않았다). 제1대대 위치 — 백과사전은 나산, 나무위키는 처음 미사리였다가 나산으로 물러났다고 적는다. 전과 — 하루(20일) 4,912명, 제2연대만 5.19~21 사살·포로 4,959명(나무위키), 사단 5.18~22 육본 추정 1만 5,930명(나무위키), 5일간 사살 17,177·포로 2,183(뉴스투데이), 5.19~30 사살 21,550·포로 2,617(사단 전투상보, 나무위키·중국어 위키)로 범위와 숫자가 모두 다르다. 중국 쪽은 「승리하고 군사를 거두었다」고만 적었다. 제63군이 물러난 까닭 — 한국 쪽 서술은 제6사단의 반격에 무너졌다고 하고, 중국 쪽 글과 나무위키의 다른 해석은 미군의 전면 반격과 포위 위험을 알아챈 제63군장의 결단으로 본다. 미군 전사는 제9군단의 20~22일 반격을 「조심스러웠다」고 적어 한국 쪽의 「즉시 추격」 서술과 결이 다르고, 18일 무렵까지 서부·중부의 적 공격을 「따로 떨어진 공격일 뿐 짜인 견제 작전이 아니었다」(원문: isolated affairs, not coordinated actions in a concerted holding operation)고 적어 「3개 사단 총공격」이라는 한국 쪽 서술과도 다르다. 중공군 세 사단이 정말 제2연대 하나에 모두 들어왔는지는 중국 쪽 정식 전사로 확인하지 못했다. 미군 전사는 또 5월 20~23일 서쪽 미 제1군단 정면에서 「북한군 제1군단과 제63군」이, 23일 제9군단 정면에서 「제64군과 제63군」이 물러났다고 적어, 제63군 일부가 용문산 서쪽에도 있었던 것으로 읽힌다. 덩스쥔이 국군 제6사단과 싸우다 죽었는지, 미군과 싸우다 죽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재구성] 군장검사 장면의 연병장과 침묵, 「결」 자 농담, 고문관과 장도영의 대화 문장(권고와 거절은 기록), 송대후의 무전 문장, 제63군 지휘부의 「정찰대가 너무 눈에 띕니다」 대화, 중공군 지휘부의 「저게 주진지다」 문장(오판 자체는 기록), 전화기 손잡이를 돌리는 통신병, 이천길과 노승호가 선을 훑고 이로 피복을 벗기는 손놀림과 둘의 농담(포복과 유선 연결은 기록), 참모가 동쪽 하늘에 외친 문장의 자구(외침 자체는 기록), 제2연대와 제19연대의 무전 문장, 길가의 버려진 물건과 「결사」 철모를 주운 병사, 중공군 병사들의 야간 도하와 「몇이나 되냐」 대화, 송대후와 대대의 탄약 무전, 장도영과 참모의 427고지 대화, 제19연대 병사들이 본 비탈과 부상 포로에게 건넨 물통, 427고지의 주먹밥, 중공군 철수 행렬의 들것, 「6마일」 대화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푸충비의 철수 명령 문장은 통속 기사(4)를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원 사료를 보지 못했다. 장도영의 군장검사 발언은 나무위키에 실린 문장을 줄여 옮긴 것으로 원 문헌을 확인하지 못했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41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용문산 전투 — 무너진 사단이 돌아오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