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14,577자)
현리 전투 — 군단이 무너지다
1950 · 네오
1951년 5월 16일 수요일 오후 네 시, 강원도 인제군 현리(현 인제군 기린면 현리) 북쪽 능선, 국군 제3사단 제18연대 진지.
정병석(15)은 그해 학도병으로 와서 제3대대 제12중대에 배속되어 있었다1. 중대에서 그보다 어린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소총은 그의 키에 비해 길었고, 고참들은 그를 이름 대신 「학생」이라고 불렀다.
포격은 서쪽 하늘부터 울렸다. 중공군의 포탄이 능선 너머 국군 제7사단 진지에 먼저 떨어졌고, 연기 기둥이 줄지어 올라왔다. 제7사단은 이웃 미 제10군단에 속한 부대였다. 중공군은 사단 세 개를 그 한 곳에 몰아 넣었고, 저녁 여덟 시 무렵 제7사단 앞쪽 연대들은 진지도 통신도 잃었다2.
“학생, 고개 숙여. 그 머리가 우리 중대에서 제일 높은 깃발이야.”
“제 머리가 제일 높으면 분대장님 머리는 어디 있습니까?”
“나는 진작 땅에 묻었지. 너도 묻어.”
정병석은 웃으며 참호 바닥에 턱을 붙였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참 하나가 서쪽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저쪽이 뚫리면 우리 뒤가 비는데.”
그날 밤 제18연대 앞으로 온 적은 중공군이 아니라 북한군이었다. 북쪽 능선에서 북한군 제5군단의 제6사단과 제12사단이 내려왔다. 동쪽 바닷가 쪽의 국군 제1군단 앞에도 북한군 제2군단이 붙었다. 두 국군 군단은 그 밤 진지를 내주지 않았다3. 정병석은 어둠 속에서 총구가 번쩍이는 쪽으로 방아쇠를 당겼고, 탄창을 갈 때마다 손이 떨렸다. 날이 밝을 무렵 북쪽 비탈의 총소리가 잦아들었다.
“버텼다.”
분대장이 철모를 벗고 머리를 긁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대에 전령이 올라왔다. 진지를 버리고 뒤쪽 방어선으로 물러나라는 명령이었다. 서쪽의 제7사단이 무너져 군단 옆구리가 열렸다는 말이 함께 왔다3.
“밤새 지켰는데 왜 내줍니까?”
“옆집 담이 무너졌으니 우리 집 마당이 길바닥이 된 거지.”
정병석은 참호에서 나와 남쪽으로 걸었다. 길에는 트럭과 포와 짐을 진 병사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제3군단의 사단 둘, 제3사단과 제9사단은 인제 동쪽 산골에 들어와 있었다. 뒤로 나가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현리에서 남서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상남리(현 인제군 상남면 상남리)로 빠지는 흙길이었고, 그 고개의 이름이 오마치였다. 오미자가 많이 자란다고 붙은 이름으로, 지금은 오미재라 부른다. 31번 국도가 지나는 그 고개는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이자 퇴로였다1.
*
같은 날 저녁, 소양강 남쪽 기슭, 중국인민지원군 제20군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
중공군의 공격은 저녁 여섯 시에 시작되었다4. 제178연대의 제3대대와 제2대대는 그보다 앞선 오후 네 시 반 무렵, 소양강 남쪽으로 건너 국군 제7사단의 진지 사이로 들어갔다5. 소양강에서 남쪽 미산리(현 인제군 상남면 미산리)까지만 육십 리 길이었다5. 대대 당위원회 서기 겸 대리 교도원 뤄징량은 대열 가운데를 걸었다5. 대대장은 타오먀오건이었다. 그들의 일은 싸움이 아니라 걷는 것이었다. 국군 진지 사이를 빠져나가 남쪽 깊숙한 고개 하나를 먼저 차지하는 일이었다.
대대는 밤사이 국군 진지 두 곳을 깨뜨리고 지나갔다. 그런데 군용 지도가 모자랐다. 앞장선 제6중대가 첫 진지를 깨뜨린 뒤 길을 잘못 들었고, 다음 진지를 깨뜨린 제4중대도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다5.
“육중대는 어디 있나?”
“모르겠습니다. 사중대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타오먀오건은 지도 대신 산줄기를 올려다보았다. 대대 예비로 남겨 둔 제5중대가 있었다. 그는 제5중대를 맨 앞 칼끝 중대로 돌려세웠다. 오마치로 곧장 꽂으라는 명령이었다5. 중대장 마오장먀오는 저장성 펑화 사람이었고, 지도원 후헝은 저장성 원저우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대열을 다시 세우고 남쪽으로 뛰었다.
17일 새벽, 제5중대는 오마치에 닿았다. 고갯마루의 국군은 뒤에서 나타난 적을 예상하지 못했다. 제5중대는 쉬지 않고 바로 덮쳤다. 그들은 포로를 잡았고, 그 가운데에는 국군에 붙어 있던 미군 고문관 셋이 있었다. 고개 아래 길에서는 군용 트럭 예순 대 남짓과 곡사포를 거두었다5. 날이 밝자 대대의 다른 중대들이 하나씩 고개로 올라와 참호를 팠다.
한국 쪽 기록은 오마치를 차지한 것을 새벽 네 시의 중공군 한 개 중대와 일곱 시의 한 개 대대로 적었다2. 중국 쪽 기록은 제178연대가 그날 아침 일곱 시까지 이십오 킬로미터를 뚫고 들어가 고개 일대를 차지했다고 적었다4.
*
1951년 5월 17일 목요일 오전, 오마치 고갯길.
국군 제9사단 제30포병대대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위에 있었다. 국군 육군 전방 지휘소가 제3군단과 제1군단을 뒤쪽 방어선으로 물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포병이 먼저 움직였다3. 그 뒤로 제3사단 제11포병대대가 따라왔다.
길은 가파른 산비탈 사이에서 몇 번이나 꺾였다. 중공군은 포병대대가 그 좁은 굽잇길에 다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사방에서 쏘았다. 트럭의 앞유리가 깨졌고, 포를 끌던 차가 길을 막은 채 멈췄다. 운전병이 문을 열고 도랑으로 뛰어내렸고, 포수들은 포를 버리고 비탈 아래 덤불로 엎드렸다. 앞차가 서자 뒤차들도 설 수밖에 없었다. 길이 좁아 돌릴 자리도 없었다.
“뒤로! 뒤로 빼!”
맨 뒤의 포대 하나만 포와 차량을 돌려 빠져나갔다3. 제30포병대대는 그 굽잇길에서 포대 대부분을 잃었다. 뒤따르던 제11포병대대는 앞에서 터지는 총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저녁에 두 포병대대는 현리로 돌아와 다시 포를 걸었다. 제3군단장 유재흥(30) 소장은 군단 예비로 둔 제9사단의 연대 하나를 남쪽으로 내려보내 길을 열게 했다. 그러나 고개를 막은 중공군이 더 셌다3. 북쪽에서는 북한군 제5군단의 제6사단과 제12사단이 군단의 뒷꽁무니를 바짝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3.
*
1951년 5월 17일 오후, 현리 마을.
정오 무렵 군단 대부분이 현리로 몰려들었다. 여러 사단의 트럭과 포와 병사가 한 마을에 뒤섞였다2. 무전기는 서로 끼어들어 알아들을 수 없었고, 전화선은 끊겨 있었다6.
마을 길에는 포가 줄지어 섰다. 포병들은 포구를 북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남쪽 고개 쪽으로 돌렸다. 적은 앞에도 있었고 뒤에도 있었다. 제9사단 군수참모 김재춘은 트럭에 실린 쌀가마와 탄약 상자를 세었다. 뒤로 보낼 길이 없는 짐이었다. 아침에 오마치에서 돌아온 포병들은 고개 위의 적이 몇 명인지 말하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비탈에서 번쩍이던 총구와 길을 막고 선 자기네 트럭뿐이었다.
군단 작전회의는 오후에야 열렸다7. 유재흥, 제9사단장 최석 준장, 제3사단장 김종오(29) 준장이 지도 앞에 섰다. 결론은 사단마다 연대 하나씩을 뽑아 오마치를 뚫는 것이었다. 제9사단에서는 제30연대, 제3사단에서는 제18연대가 나섰다6.
“고개 하나입니다. 연대 둘이면 넘습니다.”
“넘은 다음엔?”
“하진부리(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로 갑니다. 거기서 다시 섭니다.”
말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고개 너머에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 몰랐다. 회의가 끝나자 유재흥은 연락기를 타고 하진부리의 군단 사령부로 돌아갔다7. 그는 뒷날 작전회의에 가야 했다고 말했다. 백선엽은 저서에 이렇게 적었다8.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현리 마을의 병사들이 본 것은 회의가 아니라 하늘로 떠오르는 작은 비행기였다. 정병석의 중대에도 소문이 내려왔다. 지휘부가 연락기를 타고 빠져나갔다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병사들의 어깨가 내려앉았다1.
“비행기 한 대에 몇 명 탑니까?”
“둘.”
“그럼 우린 걸어가야겠네요.”
아무도 웃지 않았다.
*
1951년 5월 17일 밤 아홉 시, 현리 남쪽.
제30연대와 제18연대의 공격 시각은 밤 아홉 시였다6. 그러나 두 연대는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병력이 빠져나갔다. 뒷날 제18연대 병사들은 제30연대가 먼저 달아났다고 말했고, 제30연대 병사들은 돌파 명령을 받은 적이 없고 연대 본부가 사라졌다고 말했다6. 서로 다른 두 말 사이에 오마치는 그대로 중공군 손에 있었다.
제9사단 군수참모 김재춘은 그 밤을 이렇게 기억했다. 장교와 병사들이 계급장을 떼거나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7. 최석은 오마치를 다시 찾는 일을 포기했다. 중화기와 운송 장비를 부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7.
포병들은 포신에 수류탄을 넣었다. 운전병들은 트럭 엔진에 총을 쏘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8일 아침, 제9사단은 고개를 막은 중공군 제81사단의 진지에 다시 부딪혔고, 북한군은 현리의 제3사단을 북쪽에서 조였다3. 두 사단은 길 동쪽 산으로 흩어졌다. 길 위에는 남은 포 전부와 차량 삼백 대 넘게가 서 있었다3.
길을 버리고 방태산을 넘어 남쪽으로 가자는 결정은 제3사단장 김종오가 내렸다6. 군단 본부 자리에는 떠나는 병사들을 위해 주먹밥이 쌓여 있었다6. 병사들은 지나가며 한두 덩이씩 집어 품에 넣었다. 뒤에 온 사람들 앞에는 빈 거적만 남았다.
“밥은요?”
“앞사람 배 속에 있다. 따라가면 냄새는 맡을 거다.”
*
1951년 5월 18일 금요일, 오마치 고갯마루, 중공군 제178연대 제2대대 진지.
남쪽으로 빠지려던 국군 두 사단이 고개 앞으로 몰려왔다. 미군 비행기가 고갯마루를 때렸고, 국군은 번갈아 비탈을 올라왔다. 제2대대는 참호에서 버텼다5.
뤄징량은 그 싸움에서 두 번 다쳤다. 두 번째는 머리였다. 포탄 파편을 맞고 쓰러진 그를 동료들은 죽은 사람으로 여겼다. 뒤따라 올라온 부대가 전사자를 그 자리에 묻으려고 구덩이를 팠다. 사람들이 그를 들어 구덩이에 눕혔을 때였다5.
뤄징량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삽을 들고 있던 병사가 뒤로 넘어졌다. 구덩이 가에 둘러선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누군가 겨우 입을 열었다.
“교도원 동지, 아직 차례가 아닙니다.”
그는 그 뒤 일흔 해를 더 살았다. 1955년 이후 군을 떠나 상하이로 갔고, 아흔아홉 살에 세상을 떴다5.
중국 쪽 기록은 제20군과 제27군의 앞선 부대들이 17일 아침까지 이십오에서 이십팔 킬로미터를 뚫고 들어가 국군 제3사단과 제9사단의 남쪽 퇴로를 끊었다고 적었다9. 같은 날 중공군 제20군 본대가 북한군 제5군단과 함께 현리 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중국 쪽은 이틀 싸움 끝에 국군 두 사단의 대부분을 없애고 중장비를 모두 거두었다고 적었다9. 하루 전 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52)는 동부를 맡은 쑹스룬(43)과 북한군 김웅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번 단계는 남조선군을 많이 없애는 데 힘을 모으라는 지시였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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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방태산(인제와 홍천 사이의 해발 1,436미터 산)과 오대산.
정병석과 동료들은 중화기를 바위 밑에 감추고 몸만 산으로 올랐다. 등에 지고 온 쌀은 흙에 섞여 먹을 수 없었다. 그들은 솔잎을 씹었다1. 쓴 물이 입안에 고였지만 뱉지 않았다. 뱉으면 그나마 배 속에 들어갈 것이 없었다.
산 위에는 길이 없었다. 적이 차지한 능선과 계곡을 피하려고 가파른 산 중턱으로만 걸었다8. 지쳐서, 굶어서 쓰러진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8. 정병석은 처음에는 쓰러진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같은 중대 사람인지 보려고 했다. 사흘째부터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며 걸었다. 길은 원당동 부근에서 한 번 막혔다. 작은 싸움 끝에 무리들은 동쪽 을수골(현 홍천군 내면) 쪽으로 꺾었고, 오대산과 계방산을 넘어 하진부리로 내려가는 길을 골랐다6. 오대산에 이르자 5월인데도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1.
“분대장님, 5월에 눈이 옵니까?”
“여기 산은 달력을 안 봐.”
같은 산의 다른 비탈에서 제3사단 제23연대 제1대대 제4중대의 상등병 박한진(23)은 무너지는 대열을 보았다1. 지휘부가 먼저 떠났다는 말이 돌자 중대가 소대로, 소대가 열 명 남짓한 무리로 쪼개졌다. 계급장을 떼고 달아나는 장교도 있었다1. 그러나 그의 중대장은 중대를 놓지 않았다. 대열을 세우고, 낙오자를 기다리고, 길을 골랐다. 박한진의 중대는 그 덕분에 살아 나왔다1.
하늘에서는 연락기가 종이를 떨어뜨렸다. 유재흥은 아침부터 부대와 무전이 끊겨 있었다. 정찰기가 남동쪽으로 움직이는 무리들을 알려 오자, 그는 각 무리에게 「와코 선」이라는 새 방어선 자리를 적은 명령을 공중에서 떨어뜨렸다3. 그날 밤까지 그가 다시 손에 쥔 병력은 한 개 대대가 조금 넘었다3. 19일에도 산에서 내려온 무리는 그 선에서 멈추지 않았다3.
정병석은 나흘인지 닷새인지 걸은 끝에 동쪽 강릉의 구산 집결지에 닿았다1. 집결지에서는 중대마다 이름을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보다 대답이 없는 이름이 더 길게 이어졌다. 정병석은 자기 이름이 불렸을 때 대답을 하려다 목이 잠겨 손을 들었다.
5월 20일, 하진부리에서 군단은 숫자를 셌다. 제3사단은 원래 병력의 34퍼센트, 제9사단은 40퍼센트가 모였다2. 육십 킬로미터를 물러난 뒤였다2.
*
1951년 5월 21일 월요일부터 22일, 하진부리.
적이 만든 구멍은 컸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현리에서 남쪽으로 속사리(현 평창군 용평면 속사리)와 동쪽 강릉 쪽까지 밀고 내려왔다2.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58) 중장은 18일 자정, 서울 쪽에 남아 있던 미 제3사단의 연대들까지 동쪽으로 보냈다3. 미 제3사단은 국군 군단이 비운 자리를 메우러 예비에서 끌려 나왔다2.
밴 플리트는 21일 늦게 제3군단에 명령을 내렸다. 더는 물러나지 말고 20번 도로 북쪽의 진지를 되찾으라는 것이었다3. 그러나 그날 저녁 군단은 다시 남쪽으로 밀렸다2. 22일 이른 아침에는 북한군 제2군단이 하진부리 동쪽 유천리(현 평창군)에서 20번 도로를 끊고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를 흩어 놓았다3. 22일 이른 오후, 두 사단은 또 흩어졌고 사단 지휘소가 적에게 넘어갔다3. 미 군사고문단은 두 사단장과 제9사단 참모 대부분이 사라졌다고 밴 플리트에게 알렸다3. 김종오는 한때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여겨졌다. 그는 23일 하진부리 남동쪽 이십오 킬로미터쯤에서 사단 병력 여럿과 함께 발견되었다3. 사단장의 행방이 끊긴 제9사단은 고문관의 지휘로 하진부리 남서쪽 십여 킬로미터에 모였고, 유재흥은 부군단장에게 그 사단을 맡겼다3.
미 육군 전사는 그 혼란의 까닭을 적의 공격만으로 보지 않았다. 유재흥은 상남리 길목에서 두 사단이 흩어진 뒤 군단을 끝내 다시 손에 쥐지 못했고, 하진부리에서 다시 공격을 받았을 때는 두 사단을 완전히 놓쳤다. 밴 플리트는 유재흥과 그의 참모들로는 작전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3.
그 무렵 밴 플리트와 유재흥 사이에 오갔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다11.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 장비를 잃었단 말이오?”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는 22일 늦게 제3군단 사령부를 없애라고 명령했다.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으로, 제9사단은 미 제10군단으로 넘어갔고, 국군 육군 전방 지휘소도 전선에서 빠졌다3. 제1군단은 밴 플리트가 직접 지휘하게 되었다3. 국군 제3군단은 26일에 해체되었다2. 1950년 10월 북진 길에 생긴 군단이었다1.
군단이 남긴 마지막 일은 자기 땅을 넘기는 일이었다. 군단은 21일 저녁 여섯 시에 맡은 지역을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넘겼다2. 그 무렵 서쪽 용문산에서는 지난 4월 사창리에서 무너졌던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을 막아 서 있었다.
중국 쪽은 21일까지 현리 방향에서 유엔군, 주로 국군 만 팔천 명을 없앴다고 주장했다4. 미국 쪽 자료를 따른 집계는 이 공세 전체의 국군·유엔군 손실을 8,769명으로 적었다8. 현리에 모인 제3사단과 제9사단 이만 이천 명 가운데 사천 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집계도 있다8. 중공군도 21일에 공세를 멈췄다. 가지고 들어온 탄약과 식량이 거의 바닥나 있었다9.
오마치를 지킨 제178연대는 지원군 사령부와 북한군 사령부로부터 표창 전보를 받았다5. 그러나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길었다. 대대장 타오먀오건은 그 뒤 북쪽 화천(현 화천군)의 저지전에서 전사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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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인제 오미재.
일흔다섯 살의 정병석은 3월 31일 오미재를 다시 찾았다. 그는 인제문화원장이 되어 있었다1. 고갯길에는 이제 아스팔트가 깔렸고, 차들이 31번 국도를 따라 상남 쪽으로 내려갔다.
여든세 살의 박한진은 대령으로 군을 떠난 지 삼십 년이 넘었다. 그는 기자에게 당부했다. 육십 년이 지난 지금도 방태산 일대에 많은 전사자의 유해가 남아 있으니, 끝까지 찾아 달라는 말이었다1. 그는 현리에서 배울 것은 지휘관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 중대는 중대장이 끝까지 중대를 데리고 걸어서 살아 나왔다고도 했다1.
정병석은 그날 고갯마루에서 남쪽 산줄기를 오래 바라보았다. 열다섯 살 학도병이 솔잎을 씹으며 넘은 산이었다. 그 산 어딘가에, 계급장도 이름표도 없이 쓰러진 동료들이 아직 누워 있었다.
사료 출처
1. 연합뉴스 임보연·이재현, 「6.25 60년..아! 그곳 치욕의 패전 ‘현리전투’」(2010.4.5), 다음뉴스 v.daum.net/v/20100405070309475 — 오미재(옛 오마치)의 이름 유래와 31번 국도·유일한 보급로이자 퇴로, 방태산 해발 1,436미터, 정병석(당시 75세, 인제문화원장)의 증언(15세 학도병, 제3사단 제18연대 제3대대 제12중대, 지휘부가 연락기로 빠졌다는 소문, 중화기를 바위 밑에 숨김, 흙 섞인 쌀과 솔잎, 오대산의 무릎 눈, 4~5일 만에 강릉 구산 집결지, 3월 31일 오미재 방문), 박한진(당시 83세, 1979년 대령 예편)의 증언(제3사단 제23연대 제1대대 제4중대 상등병, 중대·소대가 10명 단위로 흩어짐, 계급장을 뗀 장교, 중대장 덕분에 살아 나옴, 방태산 유해 발굴 당부).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리전투」, encykorea.aks.ac.kr/Article/E0063324 (2026년 10월 열람) — 5월 16일 16시 포격 개시와 국군 제7사단 정면 중공군 세 개 사단, 20시 무렵 제7사단 전방 연대의 진지·통신 상실, 17일 04시 중공군 1개 중대·07시 1개 대대(제20군 제60사단 제178연대)의 오마치 점령, 17일 13시 무렵 현리 집결과 여러 사단의 혼재, 60킬로미터 후퇴, 20일 하진부리 집결(제3사단 34.2퍼센트·제9사단 약 40퍼센트), 21일 재후퇴, 21일 18시 작전지역 이양, 적의 속사리·강릉 방면 진출과 미 제3사단의 예비 투입, 26일 군단 해체. 참고문헌으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현리전투』(1988)를 든다. 3. Billy C. Mossman, 『Ebb and Flow』(33화 출처와 같은 책) 제24장 「Battle Below the Soyang」 447·460~461·463쪽과 제25장 468쪽 — 16일 밤 국군 제3·1군단이 북한군 제5·2군단의 공격을 버팀, 국군 제7사단 붕괴로 열린 서쪽 측면, 국군 육군 전방 지휘소의 후퇴 명령, 제9사단 제30포병대대와 제3사단 제11포병대대의 상남리 쪽 매복 피습과 맨 뒤 포대만 장비를 건짐, 군단 예비 연대의 차단 공격 실패, 북한군 제5군단 제6·12사단의 추격, 중공군 제27군 제81사단의 길목 차단, 18일 두 사단이 길 동쪽 산으로 흩어지며 남은 포 전부와 차량 300대 넘게를 버림, 유재흥이 아침부터 무전이 끊긴 채 와코 선 명령을 공중 투하하고 그날 밤 한 개 대대 남짓만 수습, 19일에도 와코 선에 멈추지 않음, 18일 자정 미 제3사단 나머지 연대의 동부 이동 명령, 22일 이른 아침 북한군 제2군단의 유천리 차단과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와해, 21일 늦게 밴 플리트의 후퇴 금지·진지 회복 명령, 22일 이른 오후 두 사단 재와해와 지휘소 상실, 고문단의 사단장 실종 보고, 김종오가 23일 하진부리 남동쪽 15마일에서 발견됨, 22일 늦게 제3군단 사령부 폐지와 사단 재배속, 전방 지휘소 철수, 제1군단 직할. 4. 중국어 위키백과, 「縣里戰役」(2026년 10월 열람) — 16일 18시 공격 개시, 제178연대가 17일 7시까지 25킬로미터 돌입해 후평리·마치리 점령, 중국·북한 쪽 추산(21일까지 현리 방향에서 유엔군 주로 국군 18,000명 섬멸). 중국 군사과학원 『抗美援朝战争史』 2권(2000)을 근거로 든다. 5. 晓良, 「从长津湖到五马峙——怀念为我们浴血奋战的父辈」, 文汇报 게재, 上海党史网 재게재(2023.10.26), ccphistory.org.cn/shds/shhm/content/d434d1b0-d876-4975-99a8-c4d18cbbcbac.html — 16일 오후 4시 30분 무렵 제178연대 제3·2대대의 소양강 도하, 소양강에서 미산리까지 약 육십 리, 지은이의 아버지 뤄징량(罗敬良, 제178연대 제2대대 당위원회 서기 겸 대리 교도원), 대대장 타오먀오건(陶妙根), 제5중대장 마오장먀오(毛张苗, 저장성 펑화), 지도원 후헝(胡衡, 저장성 원저우), 16일 오후 소양강 도하, 두 진지 돌파, 지도가 없어 제6·4중대가 길을 잃음, 예비 제5중대를 칼끝 중대로 돌려 오마치(五马峙)로 보냄, 17일 새벽 도착과 기습, 미군 고문 셋을 포함한 포로, 군용차 예순여 대와 곡사포, 미군 항공 지원 아래 국군 두 사단의 번갈아 공격, 뤄징량이 두 번 다치고 매장 구덩이에서 일어나 앉음, 1955년 이후 상하이, 99세 사망, 지원군 사령부와 북한군 사령부의 제178연대 표창, 타오먀오건이 뒤에 화천 저지전에서 전사. 6. 나무위키, 「현리 전투」(2026년 10월 열람) — 17일 정오 무렵 현리 집결과 무전 간섭·유선 단절, 작전회의에서 사단마다 1개 연대(제9사단 제30연대·제3사단 제18연대)를 뽑기로 함, 21시 돌파 개시 기록, 두 연대 장병의 엇갈린 증언, 김종오의 방태산 우회 남하 결정, 군단 본부가 쌓아 둔 주먹밥, 원당동 부근의 작은 싸움과 을수골 방면 이동, 오대산·계방산을 넘어 하진부리 도착. 2차 자료라 원 사료(국방부 『현리전투』 1988 등)는 직접 보지 못했다. 7. 곽병찬,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전쟁엔 무능·권력엔 교활…」, 서울신문(2018.8.28), m.seoul.co.kr/news/2018/08/28/20180828027002 — 군단 작전회의가 17일 오후에 열려 하진부 후퇴를 정함, 유재흥이 경비행기로 하진부로 감, 제9사단 군수참모 김재춘의 회고(계급장을 떼거나 무기를 버리고 도주), 최석이 오마치 탈환을 포기하고 중화기·운송 장비를 파괴함. 8. 한국어 위키백과, 「현리 전투」(2026년 10월 열람) — 백선엽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136쪽 인용(「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유재흥의 항변, 정병석이 능선과 계곡을 피해 산 중턱으로 탈출하고 탈진·굶주림으로 죽은 전우들을 봄, 제3·9사단 22,000명 중 4,000명 사상·행방불명, 미국 쪽 자료의 8,769명. 9. 중국어 위키백과, 「抗美援朝第五次战役」(2026년 10월 열람) — 제20·27군 일부가 17일 아침까지 25~28킬로미터 돌입해 국군 제3·9사단의 퇴로를 끊었다는 서술, 18일 제20군이 북한군 제5군단과 함께 현리의 국군 제3·9사단을 공격해 이틀 만에 대부분을 섬멸하고 중장비를 모두 노획했다는 서술, 21일 휴대 탄약·식량이 거의 바닥나 공세를 멈춤. 밴 플리트·유재흥 대화의 정황은 이 서술의 시기와 겹친다. 10. 共产党员网, 「抗美援朝大事记:1951年1月—1951年6月」(2014.10.23), news.12371.cn/2014/10/23/ARTI1414066143629191.shtml — 5월 17일 펑더화이가 김웅·쑹스룬에게 보낸 전보(2단계는 남조선군을 많이 섬멸하는 데 둔다). 11. 뉴스타파 김진혁, 「전시작전통제권과 세 명의 대통령」(2014.11.19), newstapa.org/article/V_XIA — 밴 플리트와 유재흥의 대화(「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 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그런 것 같습니다.」). 대화의 날짜와 원 출처는 밝혀져 있지 않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유재흥 1921년생(25화 [나이]와 같은 근거), 김종오 1921년생(한국어 위키백과 「김종오」), 밴 플리트 1892년생(영문 위키백과), 펑더화이 1898년생(25화 [나이]와 같은 근거), 쑹스룬 1907년생(중국어 위키백과). 정병석은 연합뉴스 기사가 「1951년 15세」, 2010년 「75세」로 적어 1935년생으로 보았고, 박한진은 2010년 「83세」로 적혀 1927년생으로 보았다. 두 사람의 나이는 기사 속 나이에서 거꾸로 셈한 것이라 한 살 어긋날 수 있다. 최석, 김재춘, 김웅, 뤄징량, 타오먀오건, 마오장먀오, 후헝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뤄징량은 2022년 무렵 9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만 나온다). [자료 충돌] 오마치를 막은 중공군 — 한국 쪽(한국민족문화대백과)과 중국 쪽(縣里戰役, 晓良 회고)은 제20군 제60사단 제178연대가 오마치를 차지했다고 적고, 미 육군 전사(Mossman)는 상남리 바로 위 길목을 막은 부대를 제27군 제81사단으로 적었다. 본문은 오마치 고갯마루를 제178연대, 18일 제9사단이 부딪힌 길목을 제81사단으로 두었다. 같은 길의 서로 다른 지점이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오마치 점령 시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7일 04시(중대)·07시(대대), 서울신문 칼럼 16일 17시 30분 선발대 도착·17일 05시 대대 장악, 중국어 위키백과 「縣里戰役」 17일 7시, 중국 쪽 다른 서술은 17일 3시. 본문은 「새벽」으로 쓰고 백과사전과 중국 위키백과의 시각을 함께 적었다. [자료 충돌] 돌파 시도의 시각 — 한국 쪽은 17일 밤 아홉 시 두 연대의 돌파와 실패를, 미 육군 전사는 18일 오전 제9사단이 길목을 치다 두 사단이 흩어진 것으로 적었다. 본문에는 두 단계로 나누어 적었다. [자료 충돌] 집결 비율과 날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20일 제3사단 34.2퍼센트·제9사단 약 40퍼센트, 나무위키는 3,621명(34퍼센트)·4,582명(40퍼센트), 서울신문 칼럼과 연합뉴스는 19일로 적었다. 본문은 백과사전의 20일을 따랐다. 후퇴 거리도 60킬로미터(백과사전)와 70킬로미터(연합뉴스)로 다르다. [자료 충돌] 군단 폐지 날짜 — 미 육군 전사는 22일 늦게 밴 플리트가 사령부 폐지를 명령했다고, 뉴스타파는 25일 강릉비행장에서의 지시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연합뉴스는 26일 해체로 적었다. 본문은 명령(22일)과 해체(26일)를 나누어 적었다. [자료 충돌] 손실 — 중국 쪽 추산 18,000명(21일까지 현리 방향), 미국 쪽 자료 8,769명(공세 전체, 위키백과 인용), 한국 쪽 집계 22,000명 중 4,000명. 대상 범위가 서로 달라 셋 다 적었다. 미 육군 전사가 인용한 북한군 제6사단 포로 장교의 「국군 1,200명 포로」 주장은 본문에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유재흥의 이탈 —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가려고 떠났다고 했고, 백선엽은 그가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나무위키는 17일의 복귀와 21일 회의 불참이 섞여 도주설이 생겼다고 본다. 본문은 두 말을 함께 적었다. [자료 충돌] 晓良 회고는 제9사단을 「백마 영웅 사단」이라 불렀다고 적었으나, 백마라는 이름은 1952년 백마고지 전투 뒤에 붙은 것이어서 본문에 쓰지 않았다. 회고의 「제9사단을 거의 소멸시켰다」는 대목도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8,769명 — 한국어 위키백과는 「사망」으로, 중국어 위키백과 「縣里戰役」은 「사상자, 그 가운데 미군 1,221명」으로 적었다. 본문은 「손실」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작전지역 이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21일 18시에 군단이 지역을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넘겼다고, 미 육군 전사는 22일 오후까지 국군 제3군단의 두 사단이 하진부리에서 싸우다 흩어졌고 22일 늦게 사령부 폐지 명령이 나왔다고 적었다. 본문에는 두 기록을 함께 두었다. [자료 충돌] 오마치 고갯마루 반격의 날짜 — 晓良 회고는 날짜 없이 「남쪽으로 철수하던 국군 두 사단이 미군 항공 지원 아래 번갈아 공격했다」고만 적었다. 본문은 다른 기록에 따라 18일에 두었다. [재구성] 「학생, 고개 숙여」로 시작하는 정병석과 분대장의 대화, 「저쪽이 뚫리면 우리 뒤가 비는데」, 16일 밤 정병석이 방아쇠를 당긴 장면과 「버텼다」 「옆집 담이 무너졌으니」로 이어지는 대화(그 밤 두 군단이 버틴 것과 후퇴 명령은 기록), 포병대대 매복 때 도랑으로 뛰어내린 운전병과 「뒤로 빼!」, 현리 마을에서 포구를 돌린 포병과 김재춘이 짐을 센 장면, 주먹밥을 집어 간 병사들과 「밥은요?」 대화(주먹밥을 쌓아 둔 것은 기록), 솔잎의 쓴 물과 쓰러진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본 대목, 구산 집결지에서 이름을 부르고 정병석이 손을 든 장면, 제2대대의 「육중대는 어디 있나?」 대화, 타오먀오건이 산줄기를 올려다본 몸짓, 포병대대 매복 장면의 깨진 앞유리와 멈춘 차, 「고개 하나입니다」로 시작하는 작전회의 대사(회의의 결론은 기록), 「비행기 한 대에 몇 명 탑니까?」 대화, 포신의 수류탄과 엔진에 쏜 총, 뤄징량이 일어났을 때 넘어진 병사와 「교도원 동지, 아직 차례가 아닙니다」(구덩이에서 일어나 앉은 일은 기록), 「5월에 눈이 옵니까?」 대화, 박한진 중대장의 구체적 행동(중대장 덕분에 살았다는 것은 기록), 2010년 오미재의 아스팔트와 정병석이 산줄기를 바라본 모습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