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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15,549자)

가평 전투 — 계곡을 넘기지 마라

1950 · 네오

가평 전투, 1951년 4월 23일~25일 —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가평천 골짜기, 북쪽 목동리와 사창리 방향, 서쪽 677고지의 캐나다 프린세스 퍼트리샤 경보병연대 2대대, 동쪽 504고지의 호주 왕립연대 3대대, 그 사이 죽둔리 길목의 미 전차 소대, 남쪽 가평 부근의 영국 미들섹스 대대와 뉴질랜드 제16야전포병연대. 23일 밤 중공군 제118사단 제354연대의 남하, 24일 오후 호주 대대의 철수, 24일 밤~25일 새벽 677고지 공격.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1년 4월 23일 월요일 오후, 경기도 가평(현 가평군 가평읍) 북쪽 가평천 골짜기 — 화악산 쪽에서 내려온 물길이 서울과 춘천을 잇는 길로 흘러드는, 넓은 데라야 삼 킬로미터가 안 되는 골짜기1.

호주 왕립연대 3대대 A중대장 벤 오다우드(32) 소령은 길 위로 쏟아져 내려오는 사람들을 쌍안경으로 보고 있었다. 전날 밤 북쪽 사창리(현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에서 국군 제6사단의 전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이미 내려와 있었다. 이제는 그 사단의 병사들이 직접 내려오고 있었다. 저녁 여덟 시가 되자 무리의 대부분이 호주 대대의 진지 사이로 지나갔다2. 철모를 잃은 병사, 소총 없이 탄띠만 찬 병사, 부상병을 업은 병사가 섞여 있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일주일 전인 17일에 전선에서 빠져, 그 자리를 국군 제6사단에 넘기고 쉬던 부대였다2. 그 무렵 서쪽 임진강에서는 영국 제29여단이 강을 건너오는 중공군을 맞고 있었고, 임진강 가까운 율동에서는 필리핀 대대가 고립된 채 버티고 있었다. 전선 전체가 같은 밤에 흔들렸다. 그 오후, 미 제9군단장 호지 소장의 명령이 여단에 떨어졌다. 가평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으라는 명령이었다2. 무너진 국군 사단이 다시 설 때까지, 그리고 그 뒤를 쫓아오는 중공군이 서울–춘천 길에 닿지 못하도록.

여단장 브라이언 버크 준장은 골짜기 양쪽의 높은 곳을 나누었다2. 강 동쪽 죽둔리(현 가평군 북면) 위의 504고지에는 호주 대대가, 강 서쪽 내촌(현 가평군 북면 이곡리 부근) 위의 677고지에는 캐나다 프린세스 퍼트리샤 경보병연대 2대대가 올라갔다. 영국 미들섹스 대대는 남쪽 가평 부근에 예비로 남았다3. 호주 대대장 브루스 퍼거슨(33) 중령은 다시 고지를 중대별로 갈랐다. 504고지 꼭대기에는 D중대, 북서쪽 능선 끝에는 오다우드의 A중대, 강가 작은 언덕에는 B중대가 섰고, 뒤쪽 능선에 예비로 C중대가 앉았다2.

C중대장 레그 손더스(30) 대위는 빅토리아 서부의 원주민 부족 군디츠마라 사람이었다. 2차 대전 때 호주 육군에서 처음으로 장교가 된 원주민이었다4. 그가 오다우드의 참호에 들렀다.

“저 사람들이 다 지나가면 그다음에 오는 건 누구입니까?”

“우리한테 인사하러 오는 손님이겠지. 초대장은 안 보냈는데.”

A중대 참호 곁에는 뉴질랜드 포병의 관측장교가 무전병과 함께 엎드려 있었다. 뉴질랜드 제16야전포병연대의 데니스 필든 소위였다5. 그는 영국 포병과 영국 공군에서 칠 년을 복무하고 뉴질랜드의 한국 파견군인 케이포스에 들어온 사람이었다5. 젊은 소총수들 사이에서 그만큼 오래 군복을 입은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지도 위에 연필로 골짜기 길목과 개울 건널목을 짚어 두고, 포대가 쏠 곳의 번호를 하나하나 적었다. 그의 연대는 1950년 뉴질랜드에서 새로 꾸려 25파운드 야포 스물네 문을 들고 1월에 여단에 붙은 부대였다6. 그날 연대의 포는 골짜기 위쪽으로 올라가 국군을 지원하다가, 국군이 무너지자 다시 보병 뒤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포차와 포 위에는 미들섹스 보병들이 매달려 있었다6.

“택시 요금은 런던에 가서 받으쇼.”

포차 위의 영국 병사가 뉴질랜드 운전병에게 소리쳤다. 운전병은 대꾸 대신 기어를 바꿨다.

*

같은 날 해 질 무렵, 가평 북쪽 산길 — 중국인민지원군 제40군 제118사단 제354연대 제3대대.

중국 쪽 기록은 그날 황혼에 제3대대가 앞장서는 칼끝 부대로 떠났다고 적었다7. 대대를 이끈 사람은 연대 참모장 류위주, 대대장 리더장, 교도원 마중지였다7. 사단장 덩웨(32)의 제118사단은 제40군에서 늘 맨 앞에 서는 사단이었다. 군장 원위청(35)이 받은 임무는 국군 제6사단을 깨뜨리고 가평 방향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이었다8. 22일 저녁 다섯 시, 제118사단과 제20군 제60사단이 국군 제6사단의 진지를 쳤고, 국군의 전선은 쉽게 뚫렸다8. 국군 사단은 그날 오후 네 시에야 진격을 멈추고 방어 준비에 들어간 참이었다. 밤 열한 시, 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예하 연대들과 연락이 끊겼다2. 사단을 받치던 포병은 새벽 네 시에 뒤로 빠졌다가 이튿날 아침 다시 올라갔고, 해 질 무렵 국군이 다시 무너지자 또 내려왔다2.

명령은 단순했다. 적과 엉겨 붙어 시간을 쓰지 말고 가평까지 곧장 내려간다. 대대는 가는 길에 다섯 번 막는 적을 쳐 내고 여덟 시간 동안 육십 킬로미터를 걸었다고 중국 쪽 기사는 적었다7. 앞에는 흩어진 국군 병사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대대는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앞에 가는 놈들이 길을 열어 주는구먼.”

한 병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소대장이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열린 길 끝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정 무렵, 대대는 가평 동북쪽 마을 목동리(현 가평군 북면 목동리) 근처까지 내려왔다7. 중국 쪽 전사는 제40군이 이 공세에서 삼십여 킬로미터를 파고들어 목동리 일대까지 나아갔다고 적었다9. 그 어둠 속 산등성이에는 영연방 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대는 앞서가는 국군 무리에 섞이다시피 해서 그 진지 사이로 들어갔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반, 죽둔리 길목 — 504고지 아래, 미 제72중전차대대 A중대의 한 소대.

미군 셔먼 전차 소대장 케네스 코크 중위의 전차들은 보병 없이 길가에 서 있었다2. 아홉 시 반, 어둠 속에서 중공군이 맨 앞 전차로 달려들었다. 한 시간 뒤에 온 두 번째 공격은 더 셌다. 전차장 둘과 소대장이 쓰러졌고, 전차들은 길을 따라 뒤로 물러났다2.

같은 시각 A중대 1소대 앞에도 중공군의 첫 정찰조가 붙었다2. 밤 열 시 무렵 제354연대가 호주 대대의 진지에 닿았다8. 사방에서 나팔이 울렸고, 수류탄이 참호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새벽 한 시 무렵, A중대의 진지가 흔들렸다. 잠에서 깬 필든 소위에게 누군가 능선 위로 올라가라고 외쳤다. 필든은 참호에서 몸을 빼다가 쓰러졌다5. 이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첫 뉴질랜드 병사였다5. 그의 무전병은 포대와의 연락을 잃었다6. 1소대의 살아남은 병사들은 뒤로 물러났고, 3소대 쪽 공격은 새벽 네 시 반까지 이어졌다2.

골짜기 아래 대대 본부도 밤 열 시께부터 중공군에게 둘러싸였다2. 본부의 통신병 호레이스 매든(26) 일병은 끊어진 전화선을 잇느라 진지 사이를 기어다녔다. 수류탄이 곁에서 터져 그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10. 강가 B중대는 밤 열두 시 오십 분에 4소대가, 세 시 반에 6소대가 공격을 받았다. 레이 패리 상병이 이끄는 네 명짜리 전초는 네 시 무렵 네 번의 공격을 받아 내었다2. 참호 넷이 서로 소리가 닿는 거리에 붙어 있었고, 수류탄이 떨어질 때마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 살아 있는지 확인했다.

“아직 넷이야?”

“넷입니다. 하나는 욕만 하고 있지만요.”

패리는 그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다2.

새벽 두 시, 포병을 뒤로 물리기로 결정이 났다. 연대마다 포대 둘이 먼저 빠지고, 하나가 남아 날이 밝을 때까지 쐈다6. 미 화학박격포대대의 한 중대는 박격포와 트럭 쉰 대가량을 버리고 걸어서 내려갔다2.

새벽 다섯 시 무렵, 퍼거슨은 대대 본부를 떠나 뒤로 갔다2. 중대장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날이 밝았을 때 고지 위의 중대들은 뒤쪽과 길이 끊긴 채 홀로 남아 있었다2. 중대들의 지휘는 오다우드에게 넘어갔다3. 본부에 남은 잭 거크 대위는 남은 병력을 데리고 엄폐물을 따라 빠져나가 미들섹스 대대의 진지 안으로 들어갔다2. 아침 일곱 시를 넘겨, 퍼거슨은 셔먼 전차의 포탑 안에 몸을 싣고 다시 앞쪽 비탈 아래까지 올라왔다. 소총탄을 막아 줄 것은 전차의 쇠판뿐이었다2.

*

1951년 4월 24일 화요일 아침, 504고지 북서쪽 능선 A중대 진지.

여섯 시, 오다우드는 전투 정찰조를 내보냈다. 정찰조는 중공군 여섯을 죽이고 한 명을 잃었다. 일곱 시가 되자 A중대는 밤사이 빼앗긴 봉우리를 되찾았다2. 중대는 밤새 쉰 명 넘게 잃었다. 중대 병력의 절반이었다2.

무전기가 겨우 바깥과 이어졌을 때, 저쪽에서 받은 사람은 미 제1해병사단의 한 장군이었다. 장군은 호주 대대가 이미 전멸했다고 알고 있었고, 무전 속 목소리를 중공군 첩자로 의심했다2. 오다우드의 중대에 있던 패트릭 놀스 일병은 그때 중대장이 한 말을 기억했다11.

“우리는 아직 여기 있고, 여기 있을 겁니다.”

무전이 끊긴 뒤 놀스 옆의 병사가 투덜거렸다.

“첩자라니. 중공군이 이렇게 영어를 못할 리가 있나.”

강가의 B중대는 밤새 수류탄과 총검으로 맞붙어 싸웠다11. 참호 둘레에는 빈 탄약 상자와 부러진 소총 개머리판이 흩어져 있었다.

강가 B중대는 아침 아홉 시 반에 옛 진지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열 시 반에 나선 5소대는 일곱 명이 다쳐 물러났다. 그다음 레너드 몽고메리 중위의 4소대가 착검하고 언덕을 올랐다. 열두 시 반에 언덕을 차지했을 때 그 위에서 센 중공군 시신은 쉰일곱 구였다2.

열한 시 반에는 꼭대기의 D중대에 다시 공격이 붙었다. 열두 시 반, 퍼거슨은 무전으로 오다우드에게 철수를 짜서 이끌라고 명령했다2. 오후 세 시가 지나 D중대 앞의 중공군을 쓸어 내려고 미 해병대의 코르세어 전투기 두 대가 날아왔다. 정찰기가 연막으로 표시를 잘못 했고, 네이팜은 D중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둘이 전사했고 여럿이 심하게 데었다2.

B중대는 밤사이 중공군 서른아홉 명을 사로잡아 두었다. 버리고 갈 수도 없었다. 포로들은 들것을 메고 호주군 부상병을 날랐다2. 솜옷을 입은 중공군 둘이 들것 앞뒤를 메고, 그 위에 붕대를 감은 호주 병사가 누워 비탈을 내려갔다. 들것 위의 병사가 앞쪽 포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천천히, 친구. 나는 급하지 않아.”

포로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걸음을 늦췄다.

오후 두 시 반에 철수 명령이 중대들에 내려갔다. 맨 먼저 B중대가 길을 열고, C중대와 A중대가 중간 능선에 차단 진지를 펴 뒤를 막고, 꼭대기의 D중대가 가장 늦게 내려오는 순서였다2. 밤사이 A중대와 B중대 어느 쪽이든 메우러 갈 수 있게 뒤쪽 능선에 앉아 있던 손더스의 C중대가 이제 철수 길 중간의 능선을 붙잡았다11.

오후 네 시 반에 C중대가, 그다음 한 시간 동안 A중대가 능선을 따라 내려갔다. 철수를 덮을 포격은 정해진 시각에 오지 않았고, 길가의 미군 전차가 대신 쐈다2. 오후 늦게부터는 뉴질랜드 연대가 자기 포와 미군 포병을 함께 부리며 호주 보병이 빠져나오는 길을 덮었다6. 날이 저문 뒤 D중대가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밤 열한 시 반, 대대는 504고지를 다 비웠다2.

매든은 철수 길에서 소대 선임하사에게 말했다.

“저는 다 됐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그는 따라오지 못했다. 중공군은 매든과 다른 두 호주 병사를 사로잡았다. 이 싸움에서 포로가 된 대대원은 그 셋뿐이었다10.

*

1951년 4월 24일 밤, 677고지 — 가평천 서쪽, 캐나다 대대의 원형 진지.

호주 대대가 내려가자 골짜기 건너편의 캐나다 대대가 홀로 남았다1. 대대장 제임스 스톤(42) 중령은 영국 글로스터셔에서 나 캐나다로 건너가 벌목장과 광산, 목장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1939년 이등병으로 입대해 중령까지 올랐고, 이탈리아 오르토나에서 길을 막던 독일군 대전차포를 혼자 잠재워 무공십자훈장을, 산포르투나토에서 무거운 포를 가파른 산 위로 끌어올려 수훈장을 받았다12. 그의 대대는 칠백 명쯤이었다12. 그는 중대장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포위됐다. 구원이 올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킨다.”

밤 열 시, 중공군이 B중대 6소대의 오른쪽을 쳤다1. 한 시간 뒤 두 번째 공격에 오른쪽 앞 분대가 넘어갔다2. B중대의 허브 그레이 중위는 진지 남쪽 골짜기를 기어오르는 오백 명가량의 중공군을 보았다. 스톤은 그들이 사십 미터 앞까지 올 때까지 사격을 막았다가, 기관총과 박격포를 한꺼번에 퍼부었다2. 자정 무렵 6소대는 탄약이 떨어져 총검을 꽂았다2.

새벽 한 시 십 분, 큰 무리의 중공군이 D중대 10소대로 몰려왔다2. 소대장 마이클 레비(25) 중위는 봄베이(현 인도 뭄바이)에서 나서 상하이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일본군 수용소를 탈출해 인도로 건너가 2차 대전 말 영국 특수작전부대로 말레이 밀림에 낙하한 적이 있었다13. 그의 참호 가운데 일부와 비커스 기관총 진지가 넘어갔다2.

레비는 중대장 월리 밀스 대위에게 무전을 넣었다. 밀스가 그 요청을 대대에 올렸다13. 무전을 받은 스톤이 되물었다.

“자네, 지금 무엇을 요청하는지 알고 있나?”

“압니다. 10소대 진지 위로 쏴 주십시오.”

참호 속 병사들은 바닥에 엎드렸다. 뉴질랜드 포대의 공중폭발탄이 머리 위에서 터졌다. 한 번에 십오 분에서 이십 분씩, 세 번이었다. 파편은 참호에서 육 미터 안쪽에 떨어졌으나 참호를 바로 맞히지는 않았다2. 참호 밖에서 몸을 드러낸 중공군 위로 쇳조각이 쏟아졌다. 뉴질랜드 연대는 그 밤 한 교전에서만 만 발이 넘는 포탄을 쐈다14.

날이 밝을 무렵 케네스 바와이즈 일병은 총탄 속을 기어가 버려진 비커스 기관총을 끌고 돌아왔다2.

훈장은 그 뒤에 갈렸다. 무공십자훈장은 레비의 좌표를 대대로 올린 밀스에게 돌아갔다. 레비에게는 아무 훈장도 오지 않았다13. 여러 해 뒤, 그 밤 B중대에 있던 그레이가 당시 통신장교 멜 캔필드의 기록을 찾아냈다. 스톤이 「유대인에게는 훈장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기록이었다. 레비 자신은 유대인으로 자처하지 않았다13. 캐나다 총독이 레비에게 가문의 문장을 내린 것은 반세기 뒤였다. 문장 아래 새긴 글귀는 「나는 이겨 냈다」였다13.

*

1951년 4월 25일 수요일 아침, 677고지.

새벽 네 시, 스톤은 식량과 탄약과 물을 하늘로 떨어뜨려 달라고 요청했다. 오전 열 시 전에 일본에서 날아온 C-119 수송기 네 대가 낙하산을 펼쳤다. 81밀리 박격포탄도 그 안에 있었고, 중공군 쪽으로 떨어진 낙하산은 넷뿐이었다2. 캐나다 병사 제럴드 고잉은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1.

“보급품은 떨어졌지만, 우리는 정말로 포위돼 있었습니다.”

오후 두 시, B중대 정찰조가 보급로가 비었다고 알렸다2. 제118사단과 제60사단은 북쪽으로 물러간 뒤였다2. 이날 오후 미 제5기병연대가 504고지로 올라갔고, 남은 중공군은 네 시 무렵까지 버텼다2. 영연방 여단은 그날 밤 양평으로 물러났다3.

중국 쪽 기사는 그 골짜기의 하루를 다른 쪽에서 적었다. 하루 앞선 24일 아침, 날이 밝자 제354연대 제3대대는 자기들이 골짜기 한가운데 갇혀 있고, 양쪽 높은 곳을 캐나다 대대와 호주 대대가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7. 간부들은 문서를 태웠다. 리더장이 스무 명 남짓을 데리고 동쪽으로 움직여 적의 눈을 끌었고, 류위주와 마중지가 본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리더장의 무리는 큰길을 건너지 못하고 전차 기관총에 거의 다 쓰러졌다. 류위주와 마중지는 그 길에서 전사했다7. 총에 맞아 쓰러졌던 리더장은 다시 깨어나 흩어진 병사들을 모았다. 대부분 부상병이었다. 그들은 호주 대대가 물러나며 생긴 틈으로 빠져나갔다고 중국 쪽 기사는 적었다7. 전투가 끝난 뒤 제354연대 제3대대는 집체 일등공을 받았다7.

호주 대대는 서른두 명이 전사하고 쉰아홉 명이 다쳤다2. 캐나다 대대는 열 명이 전사하고 스물세 명이 다쳤다1. 뉴질랜드 연대는 둘을 잃었다2. 중공군의 손실은 기록마다 수천에서 그 이상까지 갈리고, 중국 쪽 기록에는 이 골짜기의 사상자 수가 따로 없다2.

그날은 4월 25일, 1915년 터키 갈리폴리에 호주·뉴질랜드 군단이 상륙한 날을 기리는 안작 데이였다11. 호주 대대는 그날 골짜기 아래에서 쉬었다. 레그 손더스는 그날의 마음을 이렇게 남겼다11.

“마침내 내가 안작이 된 것 같았다. 나 같은 사람이 육백은 더 있었을 것이다.”

두 달 뒤 6월, 미국은 호주 대대와 캐나다 대대, 그리고 미 전차 중대에 대통령 부대표창을 주었다2. 미국 부대 표창이 캐나다 부대에 돌아간 일은 드물었다1. 뉴질랜드 연대는 그해 11월 한국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받았다6.

포로가 된 매든은 북쪽으로 끌려갔다. 그는 간수가 시키는 말을 따르지 않았고, 맞으면서도 간수를 욕했다. 몇 줌 안 되는 제 몫의 밥을 앓는 포로들에게 나눠 주었다. 소총 개머리판에 갈비뼈가 몇 대 부러졌고, 벌로 밥이 깎였다10. 필든의 시신은 한 달 뒤인 5월 27일에야 504고지 능선에서 수습되었다5. 매든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해 11월 6일 무렵, 그는 압록강 가까운 창성의 포로수용소에서 굶주림과 학대 끝에 죽었다. 그가 받은 조지 십자훈장의 공적서에는 그의 모습이 함께 갇힌 포로 모두에게 힘이 되었다고 적혔다10.

전화선을 이으러 기어다니던 통신병은 끝내 골짜기 밖으로 걸어 나오지 못했다. 그가 지키려던 길은 끝까지 끊기지 않았다.

사료 출처

1. 캐나다 보훈부(Veterans Affairs Canada), 「Battle of Kapyong」, veterans.gc.ca/en/remembrance/military-history/korean-war/battle-kapyong — 골짜기 폭(넓은 데 3킬로미터 미만), 3대대 504고지·캐나다 2대대 677고지·미들섹스 대대 배치, 호주군 철수 뒤 캐나다 대대가 홀로 남음, 24일 밤 열 시 공격 개시, 자기 진지 위로 포격 요청, 참전병 제럴드 고잉의 말(원문: We did get some air supplies dropped in, but we were actually surrounded.), 전사 10·부상 23, 캐나다 부대에 드문 미 대통령 부대표창. 2.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Kapyong」(2026년 10월 열람)과 그 각주가 인용한 O'Neill 『Australia in the Korean War』 2권(1985), Horner 편 『Duty First』(2008), Coulthard-Clark(2001), Breen 『The Battle of Kapyong』(1994), Hub Gray 『Beyond the Danger Close』(2003), Mossman 『Ebb and Flow』(1990) — 17일 여단의 전선 이탈과 국군 제6사단 인계, 22일 16시 국군의 진격 정지·23시 장도영의 연락 두절·04시 포병 철수와 이튿날 아침 복귀·해 질 녘 재붕괴, 여단장 버크, 23일 오후 호지의 명령, 20시 국군의 통과, 중대 배치(D 504고지 정상·A 북서 능선·B 강가 언덕·C 예비), 코크 소대 21:30과 한 시간 뒤 공격, 1소대 21:30·01:00 후퇴, 3소대 04:30까지, 06:00 정찰조·07:00 탈환, A중대 50명 넘게 손실, B중대 00:50·03:30, 패리 상병의 네 번 격퇴, 22:00 대대 본부 포위, 화학박격포 중대의 박격포·트럭 유기, 퍼거슨의 05:00 이탈과 오다우드의 지휘, 거크 대위의 본부 병력이 미들섹스 진지로 들어감, 퍼거슨이 셔먼 전차를 타고 앞으로 돌아옴, 패리 상병의 무공훈장, 14:30 철수 순서(B 선두·C와 A 차단·D 최후), 4킬로미터 고립, 미 해병사단 장군과의 무전, 09:30 재탈환 명령·10:30 5소대 7명 사상·12:30 몽고메리 4소대와 시신 57구, 11:30 D중대 재공격, 12:30 철수 명령, 15시 이후 코르세어 오폭(전사 2), 포로 39명이 부상병 운반, 16:30 C중대·A중대 철수, 포격 지연과 전차 직사, 23:30 504고지 이탈, 스톤의 말(원문: We're surrounded. We'll hold this position until we're relieved.), 23:00 우측 분대 피탈, 그레이가 본 약 500명과 40미터 사격, 자정 무렵 6소대 착검, 01:10 10소대 공격과 비커스 진지 피탈, 스톤의 되물음(원문: Do you know what you are asking?), 세 차례 15~20분 포격과 20피트 안쪽 파편, 바와이즈의 비커스 회수, 04:00 공중보급 요청, 10:00 전 C-119 네 대와 81밀리 박격포탄, 14:00 정찰, 제118·60사단 철수, 제5기병연대의 504고지 공격과 16시, 사상(3대대 전사 32·부상 59·포로 3, 뉴질랜드 연대 전사 2·부상 5), 중공군 손실 추정치, 1951년 6월 미 대통령 부대표창.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평지구 전투」, encykorea.aks.ac.kr/Article/E0000407 — 캐나다 대대는 가평천을 내려다보는 내촌 부근 677고지, 호주 대대는 가평 계곡을 통제하는 죽둔리 504고지, 미 전차 소대는 죽둔리, 예비 대대는 가평 부근, 여단이 25일 밤 양평으로 철수. 4. 영문 위키백과, 「Reg Saunders」(2026년 10월 열람) — 1920년 8월 7일 빅토리아 서부 프램링엄 원주민 보호구역 출생, 군디츠마라 사람, 1944년 11월 원주민 첫 호주 육군 장교, 가평에서 3대대 C중대장. 5. 뉴질랜드 문화유산부 NZHistory, 「First NZer killed in battle in the Korean War」(nzhistory.govt.nz/page/first-nzer-killed-battle-korean-war)와 New Zealand War Graves Project(nzwargraves.org.nz/node/60741) — 데니스 필든 소위가 3대대 A중대 관측장교로 504고지 능선에서 1951년 4월 24일 전사한 케이포스 첫 전투 사망자, 새벽 한 시께 공격 때 능선으로 올라가라는 말을 듣고 참호를 나서다 쓰러짐, 영국 포병·영국 공군 7년 복무, 시신은 1951년 5월 27일 수습. 두 페이지 모두 직접 열지 못하고(접속 차단) 검색 결과 요약으로 확인했다. 6. Ian McGibbon(뉴질랜드 내무부 역사과 선임 역사가), 「Gunners help turn the tide at Kap'yong」, 미 제2화학박격포대대 전우회보 『The Red Dragon』 1997년 1월, 4point2.org/mcgibbon.htm — 제16야전포병연대의 창설과 25파운드 포 24문, 1월 22일 여단 배속, 23일 골짜기 위아래로 오간 이동, 미들섹스 보병을 포차·포에 태움, A중대 관측장교 전사와 무전 두절, 새벽 두 시 포병 철수 결정(포대 둘 먼저·하나는 새벽까지), 24일 낮 뉴질랜드 연대의 사격 통제와 호주군 철수 엄호, 한국 대통령 부대표창. 7. 「志愿军加平穿插战斗」 관련 기사, 网易号 자체 매체 게재(c.m.163.com/news/a/KVMKBK9L05567B76.html), 『解放军报』 「志愿军加平穿插战斗纪实」를 참고 자료로 밝힘 — 제40군 제118사단 제354연대 제3대대가 4월 23일 황혼 칼끝 부대로 출발, 참모장 류위주(刘玉珠)·대대장 리더장(李德章)·교도원 마중지(马仲吉), 다섯 번의 저지전과 8시간 60킬로미터, 자정 무렵 목동리(沐洞里), 국군 패잔병을 따라 영연방 진지에 들어감, 날 밝은 뒤 골짜기 포위·문서 소각, 동서로 나뉜 돌파와 류위주·마중지의 전사, 리더장의 생환과 부상병 수습, 대대의 집체 일등공. 개인 매체 글이고 『解放军报』 원문은 찾지 못했다. 8. 중국어 위키백과, 「加平战役」(2026년 10월 열람) — 제40군 제118사단과 제20군 제60사단의 22일 저녁 공격(Mossman 1990, 401쪽), 오후 5시 국군 진지 돌파(Chae·Chung·Yang 2001, 630쪽), 제40군의 임무(齐德学 『抗美援朝战争史』 2000, 312쪽), 중국 측 지휘관 덩웨(같은 책 377쪽), 「急速向东北进攻山谷的118师第354团于晚上10时攻入澳大利亚部阵地」(Mossman 1990, 402쪽 인용). 9. 중국어 위키백과, 「抗美援朝第五次战役」(2026년 10월 열람) — 4월 22일 황혼 공세 개시, 제40군이 30여 킬로미터 돌입해 가평 동북 목동리 지역에 이름, 4월 29일 1단계 종료. 10. 영문 위키백과, 「Horace Madden」(2026년 10월 열람) — 1924년 2월 14일 크로눌라 출생, 대대 본부 근처에서 전화선을 깔다 수류탄에 뇌진탕, 철수 때 선임하사에게 한 말(원문: he was "stuffed" and would "catch up"), 매든·로버트 파커·키스 귀더 셋만 포로, 포로 생활의 저항과 음식 나눔, 개머리판 구타와 배급 삭감, 1951년 11월 6일 무렵 창성에서 사망, 조지 십자훈장 공적서(an inspiration to all his fellow prisoners). 11. 호주 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Out in the Cold: Australia's involvement in the Korean War — Kapyong」(2023년 7월 13일 갱신), awm.gov.au/visit/exhibitions/korea/operations/kapyong — B중대의 수류탄·총검 백병전, A·B중대 어느 쪽이든 증원할 수 있던 C중대 위치, 23일 3대대·캐나다 대대의 골짜기 양쪽 배치, 미군 전차 소대 피습, 24일 새벽 A중대(오다우드)·C중대(손더스), B중대 백병전, 24일 철수와 뉴질랜드 포병 엄호, 25일 안작 데이 휴식, 퍼거슨의 무공훈장, 두 대대의 미 대통령 부대표창, 패트릭 놀스 일병이 기억한 오다우드의 말(원문: we are still here and we are staying here), 손더스의 말(원문: At last I felt like an Anzac, and I imagine there were 600 others like me). 이 페이지는 호주군 사상을 「전사 32·부상 53」으로 적었다. 12. 영문 위키백과, 「James Riley Stone」(2026년 10월 열람) — 1908년 8월 2일 영국 글로스터셔 출생, 캐나다로 이주해 벌목·광산·목장 일, 1939년 이등병 입대 뒤 중령까지, 1943년 오르토나에서 독일군 대전차포를 혼자 제압해 무공십자훈장, 1944년 산포르투나토에서 중포를 산 위로 끌어올려 수훈장, 가평 때 대대 약 700명. 13. 영문 위키백과, 「Michael George Levy」(2026년 10월 열람) — 1925년 봄베이 출생, 상하이 성장, 일본군 수용소 탈출, 1945년 7월 영국 특수작전집행부 제136부대 연락반으로 말레이 낙하, 가평에서 자기 중대 진지 위로 포격을 요청, 월리 밀스 대위가 좌표를 전달했고 무공십자훈장은 밀스가 받음, 허브 그레이가 찾은 통신장교 멜 캔필드의 기록(스톤이 「not award a medal to a Jew」라고 말함), 레비는 유대인으로 자처하지 않음, 2004년 문장(紋章) 수여와 좌우명 「I have prevailed」. 14. 뉴질랜드 국방군(NZDF) 육군 소식, 「New Zealand Army personnel mark significant combat anniversary in Korea」(2026년 4월 25일), nzdf.mil.nz/army/army-news/new-zealand-army-personnel-mark-significant-combat-anniversary-in-korea — 제16야전포병연대가 고폭탄과 공중폭발탄을 섞어 캐나다 진지로 들어오는 적을 막으며 한 교전에서만 1만 발 넘게 쏨(현 연대장 브렌트 모리스 중령의 말), 1950년 창설, 한국 대통령 부대표창.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벤 오다우드 1918년 6월 2일생(호주 전쟁기념관 소장 구술 기록 F04842 「Reflections on training and leadership: an interview with Lieutenant-Colonel Ben O'Dowd」 설명), 브루스 퍼거슨 1917년 4월 13일생(영문 위키백과 「Bruce Ferguson (Australian Army officer)」), 레그 손더스 1920년생(4번), 호레이스 매든 1924년생(10번), 제임스 스톤 1908년생(12번), 마이클 레비 1925년생(13번), 덩웨 1918년생(중국어 위키백과 「邓岳」), 원위청 1915년생(중국어 위키백과 「温玉成」). 데니스 필든, 케네스 코크, 레이 패리, 레너드 몽고메리, 패트릭 놀스, 허브 그레이, 월리 밀스, 케네스 바와이즈, 제럴드 고잉, 호지, 브라이언 버크, 장도영(이 화에서는 이름만 나온다), 잭 거크, 멜 캔필드, 류위주, 리더장, 마중지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호주 대대 사상자 — 영문 위키백과·호주 보훈부 검색 결과는 전사 32·부상 59·포로 3, 호주 전쟁기념관 전시 페이지와 호주 육군 기사는 부상 53. 본문은 59를 따랐다. 캐나다 대대도 캐나다 보훈부는 전사 10·부상 23, 영문 위키백과는 이틀을 합쳐 전사 12~18로 갈린다. 본문은 정부 자료의 10을 따랐다. [자료 충돌] 뉴질랜드 포병의 사격량 — 뉴질랜드 국방군 기사(2026년 4월 25일)는 「한 교전에서만 1만 발 넘게」, 영문 위키백과는 D중대 지원에 약 1만 발, 캐나다 쪽 민간 백과는 「한 시간이 안 되어 2,300발」로 적었다. 본문은 정부 기사의 「한 교전 1만 발 넘게」를 따랐다. 3대대 B중대 정면에 뉴질랜드 포가 방어 사격을 했는지도 McGibbon은 호주 참전병들이 낮춰 본다고 적었다. [자료 충돌] 호주 대대에 붙은 중공군 — 영문 위키백과는 제354연대, O'Neill은 제60사단으로 보았으나 Mossman은 제60사단이 국군 제19연대를 깨뜨린 뒤 남서쪽으로 갔다고 적었다(중국어 위키백과 각주 a). 본문은 제354연대로 적었다. 중국 쪽 기사는 옛 중국 전사가 상대를 「캐나다 제25여단」으로 잘못 적었고 실제는 영연방 제27여단이었다고 밝혔다. [자료 충돌] 필든의 전사 날짜 — NZHistory는 4월 24일, 뉴질랜드 전쟁묘지 기록은 「안작 데이 전야」. 같은 공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24일 새벽에 두었다. 영문 위키백과는 A중대와 함께 있던 뉴질랜드 관측장교 둘이 죽었다고 적었으나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중공군 손실 — 영문 위키백과 개요는 약 6,000명, 본문은 3대대와 미군 전차가 죽인 수를 500명 넘게로, 한국 언론 기사는 1천 명에서 1만 명 넘게까지 적었다. 중국 쪽 자료에서는 이 골짜기만의 사상자 수를 찾지 못했다. 본문에는 숫자를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오다우드의 무전 — 호주 전쟁기념관은 놀스 일병의 회고로 24일 아침에 두었고, 영문 위키백과는 「이튿날 아침」으로 적었다. 본문은 기념관을 따라 24일 아침에 두었다. [자료 충돌] 레비에게 문장이 내려진 해 — 영문 위키백과 「Michael George Levy」는 2004년, 같은 내용을 옮긴 다른 요약은 2003년으로 적었다. 본문은 「반세기 뒤」로만 적었다. 스톤의 말은 캔필드의 기록을 그레이가 전한 것이고, 스톤 본인의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재구성] 오다우드와 손더스의 대화(「인사하러 오는 손님」), 미들섹스 병사와 뉴질랜드 운전병의 「택시 요금」 대화, 제354연대 병사와 소대장의 대화, 놀스 옆 병사의 「첩자라니」 투덜거림, 스톤의 되물음에 대한 밀스·레비 쪽의 대답, 국군 패잔병의 차림새, 참호 속 병사들의 몸짓, 필든이 지도에 번호를 적는 모습, 패리 전초의 「아직 넷이야?」 대화, 들것을 멘 포로와 호주 부상병의 「천천히, 친구」, B중대 참호 둘레의 탄약 상자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스톤의 「포위됐다…」와 「무엇을 요청하는지 알고 있나?」, 오다우드의 「아직 여기 있고」, 고잉과 손더스의 말, 매든이 선임하사에게 한 말은 기록에 있는 말을 우리말로 옮겼다(매든의 말은 기록의 간접 화법을 직접 화법으로 바꾸었다). 중국 대대의 장면은 개인 매체 기사 하나에 기댄 것이고, 마지막 두 문장의 대비는 소설적 마무리다.

3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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