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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15,920자)

춘천 전투 — 사흘을 버티다

1950 · 네오

춘천 전투, 1950년 6월 25일~27일 — 38선 경계진지(인람리·지암리·상송암), 5번 도로, 옥산포·가래모기 보리밭, 우두산·164고지, 우두동 제16포병대대 포진지, 소양교·범바위·근화동 제방, 봉의산 관측소, 원창고개. 북한군 제2사단 주공(제6연대)·조공(제4연대)·제17연대 도하 시도, 제2군단이 제7사단 일부를 홍천 축선에서 춘천으로 돌린 방향.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춘천 죽림동.

비가 오는 일요일이었다. 이대용(25) 중위는 카키색 여름 군복에 긴 검정 고무장화를 신고, 비닐 덮개를 씌운 정모 위로 군용 우의를 걸친 채 하숙집을 나섰다1. 약속 없는 일요일이면 그는 봉의산 기슭의 춘천도서관에서 책을 빌렸고, 그날은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루아가 조국의 패망을 지켜보며 쓴 기록을 다시 읽을 참이었다2. 그때 북쪽 하늘에서 포성이 울렸다. 한 번, 다시 한 번. 소리는 소양강 건너 산에 부딪혀 시내까지 넘어왔고, 그 뒤를 기관총 소리가 따라왔다.

처마 밑에서 비를 긋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가 담배를 마저 빨았다.

“또 쏘는구먼.”

이대용도 그렇게 생각했다. 제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은 춘천에서 소문난 훈련광이었고, 일요일에도 포를 쏠 사람이었다2. 육군사관학교 7기, 제7연대 제1중대장. 이대용은 휴일까지 반납한 포병들을 속으로 대견해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회당 앞에 이르렀을 때 철모를 쓴 군인 하나가 빗속을 뛰어왔다. 제1중대 전령 안기수 하사였다1. 춘천의 여염집에는 전화가 한 대도 없었고, 중대장의 하숙방도 다르지 않았다. 안기수는 거수경례를 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중대장님, 인민군이 38선을 넘었습니다. 비상입니다. 연대본부로 집합하시랍니다.”

“넘어왔다가 또 돌아간 것 아니고?”

“아닙니다.”

그런 비상은 전에도 여러 번 있었고, 그때마다 적이 도로 물러갔다는 연락이 와서 다들 싱겁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대용이 연대 정문에 닿았을 때, 확성기를 단 군용 트럭 한 대가 소양로 쪽에서 달려오며 외쳤다. “외출이나 외박을 나온 사병들은 속히 소속 부대로 돌아가라.” 그 소리를 듣고서야 이번에는 싱겁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포성이 울린 지 네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1.

군복과 군화는 하숙방에 있었고, 다녀올 시간은 없었다. 중대 보급계 박래영 중사가 창고에서 전투복과 철모, 군화 다섯 켤레를 안고 왔다. 다섯 켤레가 다 작았다2. 박래영이 다시 창고에 다녀와서 머뭇거리며 내밀었다.

“중대장님 발에 맞는 게… 이것뿐입니다.”

털 안감이 덥수룩한 겨울 방한화였다1. 이대용은 그것을 내려다보았고, 박래영은 이대용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밖에서는 6월 장맛비가 양철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거라도 주게.”

끈을 조이는 동안 발등이 금세 후끈해졌다. 인원을 점검하게 하니 외출과 외박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 휴가 간 병사가 합쳐서 마흔 명쯤이었다2. 이대용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에게 돌아오는 병사는 오는 대로 전선으로 보내라고 일렀다2.

*

같은 날 새벽, 38선 경계진지, 모진교(현 춘천시 사북면 원평리, 춘천호에 잠김) 남쪽.

제9중대 진지에는 비보다 포탄이 먼저 왔다. 엄폐호 천장의 통나무가 들썩일 때마다 흙이 병사들 목덜미로 쏟아졌다. 포격이 그치자 병사들은 귀가 멍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자갈을 짓이기며 다가오는 궤도 소리가 들렸다.

“전차다!”

전차가 아니었다. 돌아가는 포탑도 없이 네모난 철판 상자 위로 포신만 내민 SU-76 자주포였다. 국군 병사 하나가 엎드려 쏘았지만 탄알은 철판에 맞고 튀었다. 자주포 뒤로 북한군 제2사단 제6연대의 보병이 산비탈을 메우며 올라왔다3. 연대 하나가 중대 하나를 밀고 있었다.

중대장 이내흥 중위는 첫 포격 때 이미 쓰러져 있었다1. 선임장교가 기관총 옆으로 기어가 사수의 어깨를 잡고 비탈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 저 골짜기! 저기로 올라온다!”

기관총이 골짜기를 긁자 북한군은 골짜기를 버리고 옆 능선으로 돌았다. 산마다 몇 명씩 흩어 놓은 중대로는 돌아오는 적을 다 막을 수 없었다. 진지가 하나씩 꺼졌다. 선임장교는 남은 병사들을 모아 우두산 쪽으로 내려갔다. 소양강 남쪽 마을 지내리(현 춘천시)에 닿아 머릿수를 세었을 때, 열 명 가운데 넷이 남아 있었다2.

*

같은 시각, 화천(현 화천군) 남쪽, 북한군 제2사단 지휘소.

“경계진지 돌파. 선두, 5번 도로로 진출 중입니다.”

참모가 시계를 보며 보고를 읽었다.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제6연대는 강을 끼고 도는 길로, 제4연대는 시내 북쪽 산을 타고 넘어가는 중이었다4. 지도 위에는 이틀 치 길이 그어져 있었다. 오늘 안에 춘천, 저녁에는 가평. 내일은 서울과 춘천을 잇는 큰길 경춘가도를 따라 내려가 덕소(현 남양주시 와부읍) 나루에서 한강을 건넌다. 서울을 치는 제1군단의 옆구리를 지키고, 남쪽에서 올라올 국군 예비대를 끊는 것이 사단의 일이었다3.

“춘천까지는?”

“13킬로미터입니다.”

이청송은 연필 끝으로 춘천을 짚었다가 가평으로, 덕소로 그었다. 두 달 전 검열에서 최우수 부대로 뽑힌 사단이었다3. 연필은 춘천에서 멈추지 않았다.

*

25일 오전, 춘천역 부근, 제7연대 제1대대.

연병장에 반쯤 찬 대열 앞에 대대장 김용배(29) 소령이 서 있었다. 김용배는 연대의 비상 발령이 떨어지기 전에 대대 연락망부터 돌렸다. 새벽 포성의 박자가 평소와 달랐고, 그 판단 하나로 대대는 연대보다 한 걸음 먼저 움직였다. 여덟 시 이십 분, 제1대대의 앞선 중대들은 소양강을 건너 128고지에서 164고지까지 진지를 잡았다3.

아홉 시 반, 이대용의 제1중대가 트럭 네 대에 올랐다2. 소양로 길가에 사람들이 줄지어 나와 있었다. 우산을 든 여학생도, 장바구니를 든 아낙도 있었다. “국군 만세!” “7연대 만세!” 외침이 트럭 짐칸을 따라왔다. 우두동을 지날 때 길옆 포진지에서 105밀리 곡사포가 연달아 불을 뿜었다. 포 앞을 막아 줄 보병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2. 짐칸의 병사들이 말없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짐칸 구석에 앉은 일병 하나가 중대장의 발을 오래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중대장님, 그거 겨울 신발 아닙니까?”

“맞는 게 이것뿐이었다.”

“북한군이 보면 우리가 겨울까지 버틸 작정인 줄 알겠습니다.”

짐칸에 웃음이 터졌다. 트럭이 웅덩이를 밟아 흙탕물이 튀자 웃음은 욕으로 바뀌었고, 욕은 다시 웃음이 되었다. 이대용은 웃지 않았다. 방한화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북쪽 산을 보았다. 산 너머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열 시, 무전병이 고개를 들었다.

“적 선두, 한계울까지 내려왔답니다.”

한계울(현 춘천시 신북읍)은 시내에서 북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이었다2. 열 시 반, 제1중대가 5번 도로에서 동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능선 진지에 뛰어들었다. 그해 봄 대대 장병들이 춘천의 고등학생들과 함께 파 놓은 진지였다2. 중대원들이 총을 거치하기도 전에 첫 총탄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

25일 낮, 원주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

제6사단에 붙은 미국 군사고문단 고문관 토머스 D. 맥페일 중령은 아침에 원주에서 북한군이 38선을 넘었다는 연락을 받자 곧장 지프에 올랐다4. 춘천에 가까워질수록 포성이 또렷해졌다. 시내 바로 북쪽 능선에는 철근 콘크리트로 다져 묻은 토치카들이 이어져 있었다4.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뒷날 춘천을 지킨 중요한 까닭 하나를 이렇게 적었다4. “6사단 장병에게는 외출증이 한 장도 발급되지 않았고, 공격이 닥쳤을 때 진지에는 병력이 빠짐없이 들어차 있었다.” 같은 아침, 제1중대에서는 마흔 개의 이름이 대답 없이 비어 있었다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자는 1대대의 많은 병사가 상부 지시로 외박을 나가 있었다고 적었고, 다른 기록은 제7연대장 임부택(31) 중령이 외출·외박을 막자고 건의해 사단장이 허가했다고 전한다5.

*

25일 정오, 춘천 북쪽 마을 옥산포(현 춘천시 사농동 일대).

옥산포 앞은 온통 보리밭이었다. 6월 말의 보리가 누렇게 익어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고, 비에 젖은 이삭들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둑도 도랑도 없는 그 평지로 북한군이 걸어 나왔다.

“아직이다. 아직.”

이대용이 엎드린 채 중대원들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북한군 대열은 보리를 헤치며 다가왔다. 백 미터, 칠십 미터. 이삭을 스치는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

“쏴!”

대대의 소총과 기관총이 한꺼번에 터졌고, 우두동의 포탄이 같은 보리밭에 떨어졌다. 누런 보리밭이 흙과 연기로 뒤집혔다. 북한군은 숨을 데가 없었다. 엎드리면 보리 이삭밖에 가려 주는 것이 없었다. 살아남은 북한군은 북쪽으로 달아났고, 보리밭에는 달아나지 못한 사람들이 남았다.

북한군은 오래지 않아 다시 왔다. 이번에는 자주포가 앞장섰다.

연대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일(27) 소위는 그 자주포가 반갑지 않았다. 그날 아침 중대는 도로가 S자로 꺾이는 곳에서 57밀리 포로 저 자주포를 정통으로 맞혔다3. 자주포는 잠깐 멈칫하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기어 왔다. 앞 철판이 포탄을 튕겨 냈다. 중대는 포를 끌고 옥산포까지 물러났다6.

“멀리서 쏘면 튕긴다.”

심일이 포수에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안 튕길 때까지 기다린다.”

포수는 대답 대신 침을 삼켰다. 자주포는 보리밭 가장자리를 따라 다가왔고, 궤도가 흙을 퍼 올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심일은 포 옆에 엎드려 자주포의 앞 철판 이음매를 노려보았다. 포수의 손이 발사끈을 쥔 채 떨렸다.

“지금!”

포가 뒤로 튀었다. 자주포 앞머리에서 불꽃이 튀었고, 이번에는 자주포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 자주포가 포신을 이쪽으로 돌리는 사이 다음 탄이 들어갔다.

포로 잡을 수 없는 자리의 자주포에는 사람이 갔다. 김기만 중사, 박태갑·홍일영·조군칠 하사, 심규호 일병이 휘발유를 채운 병과 수류탄을 품고 보리 이삭 사이로 기어 나갔다6. 궤도 소리가 귀 옆까지 왔을 때 병이 날았다. 철판 위에서 불이 번졌다.

북한군은 마을 서원(현 춘천시 신북읍) 쪽으로 물러났다. 개전 첫날, 국군이 북한군 자주포를 멈춰 세운 첫 기록이 이 보리밭에서 나왔다3.

*

25일 오후, 소양강 나루.

“탄약이 강 건너에 있습니다.”

보고를 받은 김성은 소양강 쪽을 돌아보았다. 대대 탄약보급소는 강 북쪽에 있었고, 북한군은 바로 그쪽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5. 보급소가 넘어가면 우두동의 곡사포들은 해가 지기 전에 입을 다물 판이었다.

“트럭은?”

“다 앞으로 나갔습니다.”

트럭도 소달구지도 없었다. 그때 강둑 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교복 차림의 학생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낙들, 지게를 진 사내들. 한 달 전 연대의 대전차진지에 철근을 나르고 콘크리트를 비볐던 그 사람들이었다3.

학생 둘이 탄약 상자 양쪽 손잡이를 하나씩 잡았다. 상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둘은 서로 눈을 맞추고 하나 둘 셋에 들어 올렸다. 젖은 강둑에서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상자가 기울었고, 그럴 때마다 뒤에 오던 사내가 한 손으로 상자 귀퉁이를 받쳤다. 진흙이 신발을 빨아들였다가 놓아줄 때마다 철벅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줄을 지어 강을 건넜다. 아무도 구령을 붙이지 않았다. 우두동의 명주실 뽑는 공장 동방제사에서 고치를 삶던 여공들은 주먹밥을 뭉쳐 군인과 학생들 손에 쥐여 주었다5.

그렇게 강을 건너온 포탄이 5,000발쯤이었다5. 포가 강 남쪽 춘천사범학교 앞으로 물러나 앉은 뒤에도 탄약고에서 포진지까지 포탄을 나른 것은 학생들이었다5. 춘천사범학교 3학년이던 박기병은 뒷날 이렇게 돌아보았다. “포탄을 하나만 들어도 벅차서 낑낑댔지만,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고 날랐다.”

김성의 회고도 같았다5.

“학생과 시민들이 도와준 덕분에 탄약은 거의 다 옮겼다. 탄약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았다.”

*

25일 저녁, 소양강 가 보리밭 가래모기(현 춘천시).

해가 기울자 북한군은 길을 바꿨다. 낮에 피를 본 큰길을 버리고 가래모기 보리밭으로 소양강을 건너려 했다. 여섯 시, 강 건너에서 그때까지 예비로 두었던 북한군 제2사단 제17연대가 움직였다4.

“놈들이 먼저 오기 전에 우리가 간다.”

김용배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일곱 시였다7. 제1대대가 먼저 보리밭으로 나갔고, 포병이 같은 밭에 탄을 떨어뜨렸다. 기습을 받은 북한군 일부가 북한강으로 뛰어들었다. 장맛비에 불어난 강물이 그들을 삼켰다. 맞은편 둑까지 헤엄쳐 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날 밤, 이대용은 진지를 돌며 중대원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방한화 안감이 물을 잔뜩 먹어 한 걸음마다 발이 땅에 붙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이름 앞에서 그는 조금 오래 서 있다가 다음 이름을 불렀다. 그날 하루 다른 전선에서 육사 7기 동기생 여덟 명이 전사했다는 것을 그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1.

*

25일 밤, 마을 지촌리(현 춘천시 사북면), 북한군 제2군단 전방지휘소.

제2군단장 김광협(35) 소장은 보름 전까지 총사령부 작전국장이었고, 제2군단이 춘천에서 수원으로 돌아 들어가 국군의 퇴로를 끊는 계획을 짜는 데 손을 댔다2.

“제2사단, 아직 춘천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제6연대 손실이 큽니다.”

김광협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춘천은 개전 첫날 오후에 떨어져야 할 도시였다. 남쪽 기록은 그가 옥산포 남쪽에서 자주포를 잃었다는 보고를 받고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고 전한다5. 동쪽 인제(현 인제군)에서는 제7사단이 홍천을 향해 내려가는 중이었다4.

“제7사단 일부를 춘천으로 돌린다.”

그 명령은 무전을 타고 홍천 쪽 산길로 갔다7.

*

같은 밤, 인제–홍천 사이 산길, 북한군 제7사단.

제7사단 병사 1만 2천 명은 그해 봄까지 중국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해 2월 중국군 네 개 사단에 흩어져 있던 조선인 병사들이 중국 허난성에 모였고, 4월 초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4. 그 가운데에는 만주에서 베이징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를 쫓아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원산에서 그들은 소련제 총과 북한 군복을 받았다. 사단장은 소장 전우였다4.

대열 앞쪽에서 행군이 멈췄다. 새 명령이 앞사람 입에서 뒷사람 귀로 건너갔다. 짐을 진 어깨들이 하나씩 서쪽으로 돌아섰다. 밤새 짐을 지고 산을 넘는 일도, 포탄이 떨어질 때 어디로 엎드릴지도 그들은 몸으로 알았다. 그 밤의 명령서를 북한은 지금도 열어 보이지 않는다.

*

6월 26일, 옥산포.

아침이 되자 북한군이 옥산포에 다시 모여들었다. 원주에서 온 제19연대 제2대대가 우두산에 자리를 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임부택 중령이 무전기를 잡았다.

“1대대, 옥산포 친다.”

포탄이 먼저 날아갔고, 제19연대 제2대대가 옆에서 총으로 덮었다. 제1대대가 옥산포로 뛰어들었다. 공격을 준비하던 북한군 대대 하나가 기습을 받고 무너졌고, 살아남은 자들은 마을 역골(현 춘천시 신북읍) 쪽으로 흩어졌다7.

이대용의 중대가 들어간 자리에 자주포 다섯 대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1. 포신 위에 빗물이 고여 있었다. 중대원들이 신기한 듯 철판을 두드렸다.

“중대장님, 이거 끌고 가면 안 됩니까?”

이대용은 자주포 궤도에 손을 얹었다가 떼고 중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이거 몰 줄 아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한 일병이 조그맣게 말했다.

“소달구지는 몰 줄 압니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후 한 시, 북한군의 포탄이 1대대 진지와 우두산에 쏟아졌고, 자주포가 다시 앞장서 왔다7. 한 시간 동안 진지마다 맞붙었다.

*

6월 26일 오후, 봉의산.

제6사단장 김종오(29) 대령은 봉의산 꼭대기에서 쌍안경을 들고 있었다. 전날 아침 원주 사단사령부에서 개전 소식을 듣자마자 김종오는 예비대 제19연대를 출동시키고 자신은 춘천으로 달려왔다.

쌍안경 너머 들판 끝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새 대열이었다.

“적 증원입니다.”

참모가 말하지 않아도 김종오는 알았다. 북한군이 병력을 더 붓고 있었다. 강 북쪽 들판에 대대를 흩어 두면 하나씩 둘러싸여 잘려 나갈 것이었다. 김종오는 쌍안경을 내렸다3.

“오후 세 시. 7연대, 19연대 모두 소양강 남쪽으로 내린다. 강을 앞에 두고 싸운다.”

*

26일 저녁, 소양강 북쪽 들판, 북한군 제7사단.

산길을 빠져나온 제7사단의 선두가 춘천 북쪽 들판에 닿았다4. 보리밭에는 제2사단 병사들이 엎어진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중국에서 온 노병들은 시체 사이를 지나며 엎드릴 자리부터 눈으로 쟀다.

그 뒤에서 둥근 포탑을 얹은 T-34 전차들이 쇳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제7사단이 오기 전까지 춘천 전장에는 북한군 전차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4. 제7사단은 도착하자마자 제2사단과 한데 엉켜 강 건너 시내를 겨누었다.

*

6월 27일 새벽, 소양교.

범바위는 소양교 남쪽 끝에 엎드린 커다란 바위였다. 임부택은 그 바위 둘레에 제8중대를 몰아넣었다3. 중대가 가진 기관총과 박격포가 전부 다리 하나를 겨누었다. 제2대대는 봉의산 동남쪽 마을 후평리(현 춘천시 후평동)로 가서 시내 동쪽을 막았고, 제19연대는 두 강이 만나는 근화동 제방에 엎드렸다.

다섯 시, 북한군의 포탄이 봉의산과 시내로 쏟아졌다. 한 시간 뒤 북한군이 다리로 몰려왔다. 다리 북쪽 끝에 엎드려 있던 북한군 병사들이 호루라기 소리에 일제히 일어나 뛰었다. 범바위의 기관총들이 다리 위를 쓸었다3. 다리 위에 쓰러지는 사람이 늘었고, 뒤에서 오는 사람들은 쓰러진 사람을 넘어왔다.

열 시, 제19연대에 명령이 내려왔다. 홍천으로 가라. 홍천이 뚫리면 춘천은 등을 찔린다. 임부택은 빈 근화동 제방을 제19연대에서 넘겨받은 두 개 중대와 연대본부 행정병들로 메웠다3. 서류를 만지던 손들이 소총을 쥐었다.

북한군 자주포들이 소양강 북쪽 둑에 줄지어 섰다. 포신이 낮게 내려가 봉의산 관측소와 제방 위 기관총 진지를 하나씩 겨누었다. 관측소 바로 옆에서 흙기둥이 솟았다.

열한 시쯤, 끊겨 있던 사단의 전화가 처음으로 육군본부와 이어졌다7. 김종오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한참 듣기만 했다. 서부 전선이 무너졌고 육군본부는 시흥(현 서울 금천구 일대)으로 물러난다고 했다. 육군본부는 춘천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다. 사단장의 판단에 따라 물러나며 중앙선 철도를 축으로 시간을 벌라고 했다7. 김종오는 임부택에게 춘천과 홍천 사이 원창고개(현 춘천시 동산면)에 두 번째 방어선을 치라고 일렀다3. 열한 시 반, 봉의산 관측소가 북한군 보병에게 넘어갔다7.

그리고 자주포가 다리에 올라섰다.

다리 위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자주포는 철판 앞머리로 시체를 강 쪽으로 밀어내며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3. 범바위의 기관총이 철판을 두드렸지만 자주포는 멈추지 않았다. 같은 시각 가래모기로 강을 건넌 북한군이 근화동 제방으로 들이닥쳤다.

오후 한 시, 임부택은 연대 관측소를 원창고개로 옮겼다. 시내 골목마다 세운 방어선이 하나씩 뚫렸다. 오후 여섯 시, 임부택이 철수 명령을 내렸다3.

춘천이 북한군 제2사단에 떨어졌다. 이청송의 연필이 그은 날보다 이틀 반 늦은 저녁이었다.

*

6월 27일 밤~29일, 원창고개.

춘천에서 홍천으로 넘어가는 원창고개에는, 연대 주력이 홍천으로 내려가는 동안 제7연대 제2대대가 남았다. 사흘 전 38선 경계진지에서 밀려 내려왔던 대대였다.

북한군은 여러 차례 고개를 올라왔다. 그때마다 고갯마루에서 수류탄이 굴러 내려갔고, 대열은 비탈에 엎드렸다가 물러났다. 29일 정오 무렵, 대대는 마지막 공격을 막아 낸 뒤 고개를 내주고 홍천으로 내려갔다7.

*

6월 27일~30일, 홍천 북쪽 말고개(현 홍천군 화촌면).

말고개에서는 27일 아침부터 국군 제2연대가 북한군 제7사단의 주력에 밀리고 있었다7. 김종오가 춘천에서 돌려보낸 제19연대 제3대대가 그 고개로 먼저 올라갔다. 두 부대가 따로 꾸린 대전차 특공대는 수류탄과 휘발유 병을 품고 비탈에 숨었다가 바로 옆을 지나는 자주포에 달려들었다. 그 고개에서 부서진 자주포가 열 대가 넘었다7.

29일 아침, 북한군은 사단 주력을 다 들이부어 다시 고개를 쳤다7. 제2연대는 밀리면 물러났다가 적이 멈추면 되받아쳤고, 또 물러났다. 홍천을 지나 수원까지 내달아 국군의 퇴로를 끊기로 되어 있던 북한군 오토바이 연대의 일정도 그 고개 앞에서 멈췄다7. 북한군이 홍천에 들어간 것은 30일 저녁 여섯 시였다7.

*

1950년 6월 30일, 홍천 남쪽.

서울은 이미 28일에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덕소에서 한강을 건너 국군의 퇴로를 끊는다는 북한군 제2군단의 계획은 엿새가 밀리는 동안 쓸모를 잃었다. 북한군은 이천과 수원 쪽으로 길을 돌려야 했고, 그 사이 서울에서 밀려난 국군은 한강 남쪽에 다시 줄을 섰다.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북한군 제2사단의 사상률이 40퍼센트를 넘었고 제6연대 하나만 50퍼센트를 넘었다고 적었다4. 포로들은 손실 대부분이 국군의 포격 때문이었다고 말했다4. 사단의 자주포 열여섯 대 가운데 일곱 대가 그 사흘 동안 부서졌다4. 7월 2일께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진격이 늦었다는 이유로 제7사단장 전우를 물러나게 하고 사단 번호를 제12사단으로 바꾸었다4. 7월 10일께에는 김광협도 군단장 자리에서 물러났다4. 남쪽 기록은 이청송이 첫날 춘천을 떨어뜨리지 못한 책임으로 경질되고, 최현(43)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적는다5.

그해 12월, 압록강 가까운 마을 별오리(현 북한 자강도 만포시)까지 쫓겨 올라간 북한 지도부가 노동당 간부들이 모두 모이는 전원회의를 열었다. 김일성(38)은 그 자리에서 인민군이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흩어지거나 달아나게 두어, 적에게 부대를 추슬러 반격할 시간을 주었다고 인정했다3.

그 전원회의는 12월 21일에 열렸다고 연구자 안문석은 적었다8. 김일성의 보고 가운데에는 인민군 제2군단장 무정의 이름도 있었다. 군대에서 명령을 집행하지 않고 전투를 옳게 조직하지 않아 손실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군단장 자리에서 쫓겨났다8. 춘천에서 막힌 바로 그 군단이었다. 1953년판 『김일성선집』에는 이 대목이 실려 있고, 북한이 1981년에 펴낸 영문 저작집에는 이 문장도 무정이라는 이름도 없다8. 안문석은 평양을 지키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즉결처분 명령을 김일성이 직접 내렸으니 이 숙청은 패전의 책임을 남에게 돌린 것이라고 본다. 무정은 회의장에서 끌려 나가 갇혔고 1951년에 숨졌다고 한다8.

홍천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이대용은 처음으로 방한화를 벗었다. 엿새 동안 빗물과 강물을 번갈아 먹은 털 안감은 회색 덩어리로 뭉쳐 있었다. 그는 신발을 거꾸로 들고 흔들어 물을 쏟아 냈다. 물이 다 빠지자 다시 신고 끈을 조였다.

맞는 신발은 아직도 그것 하나였다.

사료 출처

1. 이대용, 「내가 겪은 6·25」 상, 서울신문(1991.6.23), m.seoul.co.kr/news/1991/06/23/19910623005001 — 「그때 내 나이 25살」, 고무장화·우의 차림, 공회당 앞에서 만난 전령 안기수 하사, 포성 뒤 네 시간 반 만의 연락, 확성기 가두방송(인용문), 보급계 박 중사, 방한화, 이내흥 중위 전사, 육사 7기 동기생 첫날 여덟 명 전사, 26일 자주포 다섯 대 노획. 2. 이대용 기고, 뉴데일리(2010.6.25·6.26·6.27), newdaily.co.kr/site/data/html/2010/06/25/2010062500055.html, …/06/26/2010062600009.html, …/06/27/2010062700031.html — 죽림동 하숙, 옛 신사 자리의 춘천도서관, 앙드레 모루아의 책, 김성 소령이 훈련광이라 사격훈련으로 여김, 보급계 박래영 중사와 작은 군화 다섯 켤레, 외출·외박·휴가 미귀대 약 40명, 소대장 넷, 이한직 상사, 트럭 네 대(아홉 시 반)와 소양로 시민 환송(만세 구호), 김광협이 작전국장으로 남침 계획에 관여하고 6월 11일 군단장 보임·지촌리 전방지휘소, 제9중대 약 60퍼센트 손실(이래흥으로 표기), 한계울(열 시), 우두동 제16포병대대의 포격(보병 엄호 없이 역골·아리산·한계울·삼거리 표적), 1대대 진지(5번 도로 동쪽 1.5킬로미터 능선, 1950년 봄 학생들과 공사), 교전(열 시 반). 3. 손규석(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6·25 결정적 전투들 ① 춘천지구전투」, 국방일보(2010.6.7),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재게재(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695067) — 북한군 제2군단·제2사단 계획, 이청송 사단 4월 검열 최우수, 진지 공사의 공병·시민·학생, 귀순병 진술(전차 40대와 함께 야간 행군으로 화천 도착)과 수색대 30여 명, 1대대 병사 외박(상부 지시)과 연대 가두방송, 제9중대·제1대대·대전차포중대(자주포 2대 격파)·제19연대 3대대(오후 여덟 시 도착, 밤 열한 시 금산리 배치, 영월광업소 징발 차량), 26일 오후 세 시 철수 명령, 27일 소양교 공방, 범바위 제8중대, 근화동 혼성부대, 시체를 밀어내고 다리를 건넌 자주포, 원창고개 제2방어선, 오후 여섯 시 철수, 별오리 회의. 4.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미 육군 군사사센터, 1961; 1화 출처와 같은 책), 제2장 북한군 편성, 제3장 「Invasion Across the Parallel」 춘천 부분, 제8장 「In the Central Mountains and on the East Coast」 첫머리 — 제2사단 제6연대는 강 길로, 제4연대는 시내 북쪽 산을 넘어 공격, 첫날 예비 제17연대 투입, 미 고문관 토머스 D. 맥페일 중령이 아침에 원주에서 춘천으로 감, 외출증 미발급(원문: no passes had been issued to ROK personnel and the positions there were fully manned when the attack came), 시내 북쪽 능선의 콘크리트 토치카, 제7사단은 인제에서 홍천으로 가다 춘천으로 돌려져 26일 저녁 도착, 제7사단 도착 전 북한군 전차 없음, 28일 아침 T-34 아홉 대가 앞장서 입성, 제2사단 사상률 40퍼센트 이상·제6연대 50퍼센트 이상·포로 진술(국군 포격이 손실 대부분)·SU-76 16대 중 7대 파괴, 제7사단의 기원(1950년 2월 허난성 집결, 중국군 제138·140·141·156사단의 조선인 약 1만 2천 명, 일부는 만주에서 베이핑까지 진격에 참가, 4월 초 철도로 입북, 원산에서 제1·2·3연대로 재편, 소련제 무기와 북한 군복), 7월 2일께 제7사단장 전우 해임과 제12사단 개칭, 7월 10일께 김광협 해임(후임 김무정). 5. 강원일보 기획, 전북일보(2023.1.16) 공동 게재, jjan.kr/article/20230116580210 — 김성 소령 회고, 탄약 5,000발, 동방제사 여공의 주먹밥, 박기병 회고, 6월 19일 귀순병과 외출·외박 통제 건의, 김광협의 낯빛, 이청송 경질과 최현 후임. 회고문은 뜻을 살려 다듬었다. 6. 서울신문(2023.6.23), m.seoul.co.kr/news/2023/06/23/20230623500150 — 심일 소위와 특공조 다섯(김기만 중사, 박태갑·홍일영·조군칠 하사, 심규호 일병). 격파 대수는 자료마다 둘에서 다섯까지 다르고, 2017년 국방부 공적확인위원회와 육군 군사연구소의 판단이 갈렸다. 본문은 대수를 둘로 적었다. 7. 박동찬, 「춘천지구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종수정 2022.11.23), encykorea.aks.ac.kr/Article/E0058023 — 25일 05시 30분간 공격준비사격, 제6연대 자주포 10대, 25일 19시 반격, 26일 옥산포 1개 대대 기습, 제2군단장이 제12사단(개전 당시 제7사단) 일부를 춘천으로 돌림, 26일 13시·15시, 27일 11시 육군본부 전화(시흥 철수, 중앙선 중심 지연전), 11시 30분 봉의산 관측소 상실, 원창고개 제2대대 29일 정오까지, 말고개(27일 아침 제2연대 압박, 제19연대 제3대대 투입, 대전차 특공대 자주포 10여 대 파괴, 29일 아침 전면 공격 실패, 30일 18시 홍천 점령), 제603모터사이클연대의 수원 진출 계획. 참고문헌: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2005), 온창일 외 『6·25전쟁 60대전투』(2010). 8. 안문석, 「무정 숙청의 정치적 원인과 무정의 대응」, 『통일정책연구』 24권 1호(2015)(repo.kinu.or.kr/bitstream/2015.oak/8864/7/1471435.pdf) — 1950.12.21 제3차 전원회의, 김일성 「현정세와 당면과업」(『김일성선집』 3권, 1953, 139~140쪽)의 무정 철직 대목, 숙청을 패전 책임 떠넘기기로 본 해석, 무정의 연행·감금과 1951년 사망. 회의 날짜는 영문 위키백과 「Mu Chong」이 「12월 4일 만포군 별오리 특별회의」로 적어 갈리고, 사망 연도도 1952년설이 있다. 1981년판 『Kim Il Sung Works』 vol. 6, 152~177쪽에는 이 대목이 없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이대용 1925년생(서울신문 2016 부고 계열 보도), 김종오 1921년생(영문 위키백과), 김용배 1921년생(뉴데일리 2010.6.25, 전쟁기념관 호국인물 설명문 「1921.4.17-1951.7.2」), 심일 1923년생(인천시 호국인물 자료), 김광협 1915년생(영문 위키백과), 임부택 1919년생(세계일보 2025.7.5, segye.com/newsView/20250705503511 — 1919~2001), 최현 1907년생(2화 [나이]와 같은 근거), 김일성 1912년생. 이대용은 1925년 11월생이라 만으로는 스물넷이고, 본인은 1991년 회고에서 「그때 내 나이 25살」이라고 적었다. 이청송, 김성, 전우, 맥페일, 안기수, 박래영, 이한직, 이내흥, 박기병, 특공조 다섯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박기병은 2023년 기사에 「91」세로 나오나 셈법이 밝혀져 있지 않다). [자료 충돌] 외출·외박 — 미 육군 공식 전사는 6사단에 외출증이 발급되지 않아 진지가 꽉 차 있었다고 적었고, 강원일보는 임부택이 외출·외박 통제를 건의해 김종오가 허가했다고 적었다. 국방일보(군사편찬연구소)는 1대대의 많은 병사가 상부 지시로 외박 중이었다고 적었고, 이대용은 제1중대에서만 외출·외박·휴가 미귀대가 약 40명이었다고 회고했다. 본문은 넷을 다 적었다. 연대 단위와 예비대대 단위의 차이일 수 있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자료 충돌] 공격 시각 — 백과사전·서울신문 2023은 05시 포격과 30분 공격준비사격, 국방일보는 약 1시간 공격준비사격, 이대용 회고와 강원일보는 새벽 4시(조금 전)로 적었다. 본문은 「새벽」으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춘천 함락 — 국군 자료는 27일 오후 여섯 시 철수 명령으로 춘천이 떨어졌다고 적고, Appleman은 6사단이 28일 명령에 따라 철수했고 북한군 본대가 28일 아침 T-34 아홉 대를 앞세워 들어왔다고 적었다. 본문은 국군 자료의 시각을 따르고 Appleman의 입성 기록은 이 줄에만 남겼다. [자료 충돌] 북한군 동쪽 사단 — Appleman은 「제7사단(7월 2일께 제12사단으로 개칭)」, 백과사전은 처음부터 「제12사단」으로 적었다. 같은 부대다. 백과사전은 사단 「일부」를 춘천으로 돌렸다고, Appleman은 사단이 춘천으로 와 제2사단과 합류했고 춘천 함락 뒤 홍천으로 내려갔다고 적었다. 본문은 「일부」로 적고 말고개의 주력은 제7사단으로 두었다. [자료 충돌] 탄약 운반 — 강원일보 기사는 강 북쪽 대대탄약보급소의 탄을 강 남쪽으로 옮겼다고, 박기병 회고는 탄약고(현 남춘천역 근처)에서 춘천사범학교 앞 포진지까지 날랐다고 적었다. 두 운반을 서로 다른 일로 보고 둘 다 적었다. 포진지가 우두동에서 사범학교 앞으로 옮겨 간 날짜는 확인하지 못했다. [재구성] 모든 대화(이대용과 노인·안기수·박래영·중대원, 심일과 포수, 김성과 부하, 김용배·임부택·김종오의 명령 문장, 이청송·김광협 지휘소의 보고), 확성기 문구를 뺀 정문 앞 장면, 제9중대 선임장교의 지휘 장면, 보리밭에서 사격을 기다리는 장면, 트럭에서 본 포병의 모습, 맥페일 중령이 차창으로 본 풍경, 시민·학생이 강을 건너는 몸짓, 제7사단 병사들이 방향을 트는 장면과 26일 저녁 들판 장면, 소양교 북쪽 북한군 병사의 돌격, 원창고개 제2대대와 말고개 특공대의 몸짓, 이대용이 동기생 전사를 뒤늦게 아는 대목, 방한화를 벗는 마지막 장면의 장소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북한군 측 내면은 기록에 없다. [수치] 제9중대 손실(열에 여섯)은 뉴데일리 기고. 「포성 뒤 네 시간 반」은 이대용 회고의 셈을 따랐다.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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