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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15,505자)

율동 전투 — 고립된 밤을 뚫다

1950 · 네오

율동 전투와 글로스터 구출 시도, 1951년 4월 22일~24일 — 연천 북쪽 33번 도로를 가로지른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 진지(율동, 위치 추정), 왼쪽 미 제65보병연대와 오른쪽 터키 여단, 북쪽에서 내려온 중공군 제12군 제34사단·제15군 제29사단(중국 측 기록은 제44사단), 한탄강과 캔자스선, 23일 대대의 철수와 영국 제29여단 합류, 24일 아침 일곱 시 반 출발한 구출 부대가 설마리 235고지 남쪽 고갯길에서 멈춘 자리.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1년 4월 22일 일요일 저녁, 경기도 연천(현 연천군 연천읍) 북쪽 율동(현 연천군) — 연천에서 철원으로 올라가는 33번 도로(현 3번 국도)를 가로지른 산줄기,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의 진지.

밤 아홉 시가 되자 진지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 시각 뒤로는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이 대대의 규칙이었고, 꼭 나가야 하는 사람은 암구호를 대야 했다1. 대대가 고른 암구호에는 엘(L) 소리가 잔뜩 들어 있었다.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그 소리를 제대로 굴리지 못했다1.

“엘라, 랄리아.”

참호 끝에서 누가 작게 연습하자 옆의 병사가 킥킥 웃었다.

“그거 하다가 혀 꼬이면 우리 편 총에 맞는 거야.”

“중공군이 이걸 제대로 발음하면 그날로 필리핀 사람으로 쳐 주자고.”

전차 소대를 맡은 상사 막시모 영(28)은 앞쪽 기관총 자리 가까이에 있었다. 제10대대전투단은 필리핀 육군에 하나뿐인 전차 대대로 꾸려진 부대였다2. 대대가 마닐라를 떠난 것은 지난해 9월 15일이었다. 미군 수송선은 나흘 뒤 부산에 닿았고, 대대는 미군과 영국군 다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세 번째 외국 지상군이 되었다3. 처음 1,367명이던 대대는 겨울을 지나며 900명 남짓으로 줄어 있었다4.

영이 군복을 처음 입은 것은 진주만 공습 이튿날인 1941년 12월 8일이었다. 마닐라만 입구의 요새 섬 코레히도르에서 그는 배에서 내리는 화물을 장부에 적고 짐을 부리는 사환 노릇부터 했다5. 전쟁이 끝난 뒤 미국 켄터키주 포트녹스에서 전차를 배웠고, 돌아와서는 한국으로 갈 대대를 꾸리는 일을 거들었다5.

부산에 내린 필리핀 병사들을 맞은 것은 한국의 겨울이었다. 영은 따뜻한 나라에서 온 자기들이 그렇게 매서운 추위를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했다2. 추위를 피한 뱀들이 천막 안으로 기어 들어와 병사들의 따뜻한 몸 옆에 똬리를 틀었다2.

“뱀도 필리핀 사람 옆이 따뜻한 줄은 아는 모양이야.”

지난해 11월 11일, 황해도 신계(현 북한 황해북도 신계군) 근처에서 대대가 매복에 걸렸을 때, 영은 전차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가 포탑의 기관총으로 산비탈의 북한군을 쏘았다2. 필리핀 병사들이 나라 밖에서 처음 거둔 승리로 꼽는 싸움이었고, 영은 그 일로 필리핀 정부의 금십자훈장을 받았다2. 율동의 산줄기 앞에서 그는 그 기관총을 다시 앞에 두고 있었다.

대대가 지킬 앞은 영의 기억으로 5마일, 8킬로미터쯤이었다1. 왼쪽에는 미 제3사단 제65보병연대, 카리브해의 섬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병사들이 서쪽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었고, 필리핀 대대는 그 연대의 바깥 끝에서 33번 도로를 막고 있었다6. 오른쪽에는 터키 여단이 있었다1. 영은 푸에르토리코 병사들과 잘 어울렸다. 그들은 농담을 좋아했고 묻지 않아도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터키 병사들은 좀처럼 웃지 않았고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1.

“터키 친구들은 오늘도 안 웃던데요.”

“오늘 밤엔 우리도 웃을 일 없을 거다.”

미 제3사단장 로버트 솔(50) 소장은 바로 이 정면을 걱정하고 있었다. 임진강을 따라 늘어선 사단의 선은 길고 얇았고, 진지 사이마다 빈틈이 있었으며, 사단의 생명줄인 33번 도로가 그 선에서 멀지 않았다6. 북쪽에서는 중공군 제3병단의 세 군이 33번 도로를 축으로 내려올 참이었다. 그 계획표에는 제12군과 제60군이 필리핀 대대가 선 땅을 뚫고 지나가도록 그어져 있었다6.

저녁 여덟 시, 오른쪽 터키 여단의 진지 위로 중공군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4.

*

같은 날 밤 열한 시, 율동 마을을 내려다보는 고지 — 필리핀 대대 B중대 진지.

B중대장 호세 아르티아가 중위의 병사들은 대대 진지에서 가장 중요한 고지를 붙들고 있었다4. 열한 시부터 중공군이 비탈 아래에서 한 줄, 또 한 줄 올라왔다. 앞줄이 쓰러지면 뒷줄이 그 자리를 밟고 올라왔고, 참호 앞 몇 걸음에서 소총과 수류탄으로 맞붙는 싸움이 이어졌다4. 자정이 넘자 포탄과 박격포탄, 기관총탄이 제3사단 전선 전체에 쏟아졌다4. 미 육군 전사는 중공군 제12군 제34사단과 제15군 제29사단의 선봉이 자정 무렵 제65연대 정면을 치고 들어왔고, 필리핀 대대의 한 중대가 거의 곧바로 진지에서 밀려났다고 적었다6.

포탄에 끊긴 제65연대와의 전화선은 열두 시 반에야 다시 이어졌다4. 그 무렵 오른쪽의 터키 여단은 한탄강 남쪽 캔자스선으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았다4. 대대장 디오니시오 오헤다 중령은 대대에 있는 손을 모두 총 앞으로 불러냈다. 운전병과 타자수, 서기, 위생병, 취사병이 소총을 들었고, 대대의 군종 신부도 참호로 들어갔다4. 중대들은 서로 연락이 닿지 않은 채 각자의 비탈에서 싸웠다4.

영의 기관총 앞으로도 그림자가 몰려왔다. 총을 든 사람 하나가 보이면 그 뒤에 일곱이 바로 따라붙었다1.

“쏴! 서 있는 건 다 쏴!”

영은 훗날 그 밤을 시끄러운 혼란이라고만 불렀다. 앞에 서 있던 것은 모두 쓰러졌고, 날이 밝은 뒤 그는 자기 앞에서만 오백 명이 넘게 죽었다고 헤아렸다. 옆 중대의 비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볼 수 없었다1. 어둠이 너무 짙어서, 자기 얼굴에 손을 대 보고서야 아직 멀쩡한 줄 알 수 있었다. 옆의 사람이 아군인지 가리는 길은 하나였다. 타갈로그어로 말을 하면 필리핀 사람이었다1.

새벽 세 시, B중대 왼쪽 소대가 고지에서 밀려났다4. 네 시간 가까운 싸움 끝에 중공군은 예비로 뒤에 있던 C중대 자리까지 파고들었다4. 아르티아가 중위는 그 싸움에서 쓰러졌다4.

*

같은 밤, 율동 고지 아래 — 필리핀 대대 중화기중대.

중화기중대장 콘라도 얍(29) 대위는 밤 열한 시에 경보를 받았다7. 그는 루손섬 서쪽 바닷가 삼발레스주의 칸델라리아에서 태어나 1943년 필리핀 사관학교를 나왔고, 1949년에는 미국 켄터키주 포트녹스의 기갑학교를 마쳤다7. 그의 중대는 원래 대대의 전차중대였다. 한국에서 쓸 전차가 모자라자 중대는 기관총을 든 중화기중대로 이름을 바꾸었다7.

자정을 앞두고 중공군이 중대 진지 둘레를 뚫고 들어왔다. 얍은 기관총탄과 박격포탄이 날아드는 비탈에서 이 참호에서 저 참호로 기어 다니며 병사들을 붙잡아 앉혔다8. 필리핀 용맹훈장 공적문은 그와 병사들이 무슨 값을 치르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고 적었다7. 중대의 기관총들은 밤새 식을 틈이 없었다.

“자리 지켜. 여기서 물러나면 B중대 길이 끊긴다.”

대대장 오헤다가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대들은 모두 명령을 따랐는데, 얍의 중대만 움직이지 않았다4. 고지 위에는 B중대의 소대 하나가 갇혀 있었다.

전령이 숨을 몰아쉬며 참호로 뛰어들었다.

“대대장님 명령입니다. 철수하랍니다.”

“저 위에 아직 사람이 있어.”

“중공군이 고지를 다 덮었습니다, 대위님.”

“그러니까 가는 거다. 산 사람은 데려오고, 죽은 사람도 데려온다.”

얍은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고지로 올라갔다8. 중대는 고지를 다시 빼앗아 아르티아가 중위의 시신과 사병 셋의 시신을 거두었다. 얍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270미터쯤 떨어진 중공군 진지로 다시 달려들었다7. 갇혀 있던 분대 하나가 살아서 아군 쪽으로 돌아왔다4.

비탈 위에서 병사 하나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얍은 그쪽으로 몸을 일으켰다. 쓰러진 병사에게 닿기 전에 그도 총탄을 맞았다8. 4월 23일 이른 새벽이었다7.

중대는 아르티아가와 사병 셋을 데리고 비탈을 내려왔다. 갇혀 있던 분대도 함께 내려왔다. 그들을 데리러 올라간 대위는 살아서 내려오지 못했다9.

*

1951년 4월 23일 월요일 새벽, 율동 — 필리핀 대대 박격포 진지와 C중대 진지.

새벽 두 시 무렵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박격포반은 쉬지 않고 쏘았다1. 박격포 한 문에 여덟 사람이 붙었다. 하나가 총에 맞으면 다른 하나가 각도를 맞추고, 하나가 포탄을 넣고, 또 하나가 포탄을 받쳐 들었다1. 동이 트고 사격이 멎었을 때, 포 옆에 낯선 사람 넷이 서 있었다. 그들의 군복은 갈색이었다1.

박격포반원들과 그 넷이 한참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넷은 필리핀 병사들을 자기 편으로 알고 밤새 포탄을 날라다 주었고, 그 포탄은 그들의 동료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1.

“너희 누구야?”

넷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필리핀 병사들은 그들을 묶어 예비 진지로 보냈고, 정보 장교들이 그들을 심문했다1.

날이 밝자 중공군의 공격이 느슨해졌다. 대대는 C중대를 앞세우고 수색중대의 M24 경전차 두 대, 포탑에 포 하나를 얹은 미제 가벼운 전차를 붙여 B중대가 잃은 고지로 다시 올라갔다. 아군 포병이 그 길을 열었다4. 미 육군 전사도 이른 아침 필리핀 대대의 반격이 처음에 잃은 땅을 되찾자 공격이 잦아들었다고 적었다6.

C중대원들은 밤새 B중대가 지키던 참호로 다시 기어 들어갔다. 참호 가장자리에는 B중대원들이 쏘고 남긴 탄피가 수북했고, 그 앞 비탈에는 중공군의 시신이 엎어져 있었다. 중대원들은 무너진 흙을 다시 퍼 올리고, 다음 공격이 올 북쪽으로 기관총을 돌려 걸었다.

중국계 미국 역사가 리샤오빙이 중국 자료로 쓴 책에 따르면, 펑더화이의 계획은 제12군과 제15군으로 터키 여단을 치고 에워싸는 것이었다. 23일 새벽 한 시, 중공군 제29사단과 제44사단은 제65연대를 에워싸 물러날 길을 끊었다4.

중국 쪽 기록은 그 밤 율동을 친 부대를 제15군 제44사단으로 적었고, 샹서우즈(向守志)의 회고록은 제132연대의 두 대대, 육백에서 천 명이 이곳을 쳤다고 적었다4. 중국 쪽 전쟁사 서술은 제3병단이 전선을 뚫은 뒤 연천 북쪽에서 미 제3사단과 터키 여단의 저항에 막혀 느리게 나아갔고, 24일 아침에야 초성리(현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와 영평(현 포천시 영중면) 일대에 이르렀다고 적었다10.

대대의 손실은 전사 열둘, 부상 서른여덟, 실종 여섯이었다. 한국 쪽 전사는 중공군 전사자를 오백 명이 넘게, 포로를 둘로 적었다4.

아침 아홉 시, 미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서부 전선에 캔자스선으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4. 낮 열두 시 십오 분, 필리핀 대대에도 솔 소장의 명령이 닿았다. 한탄강 남쪽 안흥리로 물러나라는 명령이었다4. 제65연대의 대대들은 정오 무렵 한 대대가 다른 대대를 엄호하며 차례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맞은편 중공군은 따라오지 않았다6. 필리핀 대대가 그 대열의 맨 앞에 섰다.

오후 두 시, 솔은 대열 맨 앞의 필리핀 대대에 새 명령을 내렸다. 서쪽 임진강가의 영국 제29여단에 붙어, 영국 퓨질리어 대대와 글로스터 대대 사이에 벌어진 빈틈을 메우라는 명령이었다6. 대대가 33번 도로에서 11번 도로를 따라 여단 사령부 근처에 닿았을 때는 밤 여덟 시였다. 여단장 토머스 브로디(47) 준장은 날이 너무 저물어 그 빈틈으로 들어가기는 늦었다고 판단했다6.

필리핀 병사들은 하룻밤 잠을 자지 못한 채 다시 남의 전선 뒤에서 밤을 맞았다.

*

1951년 4월 24일 화요일 아침 일곱 시 반, 파주 적성(현 파주시 적성면) 남동쪽 — 영국 제29여단 사령부 근처에서 북쪽 설마리(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로 올라가는 산길.

글로스터 대대는 설마리 위 235고지에서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솔은 그날 이른 아침 브로디에게 전차와 보병으로 산길을 뚫고 글로스터 대대를 보강하라고 지시했다6. 브로디는 필리핀 대대의 소총중대 셋과 경전차 넷에, 영국 제8후사르 연대 C중대의 센추리언 전차 여섯 대를 붙였다. 구출 부대는 일곱 시 반 무렵 북쪽으로 떠났다6. 센추리언은 무게 52톤, 폭이 3.6미터 가까운 영국 전차였다6.

235고지에는 구출 부대가 온다는 소식이 닿았다. 그 시각 고지 위로는 밤새 흩어졌던 글로스터 B중대의 생존자 몇이 흘러들고 있었다6.

오전 중간쯤 브로디는 계획을 바꾸었다. 필리핀 대대는 235고지 남쪽 3킬로미터쯤의 고갯길에 저지 진지를 치고, 거기서부터는 전차만 글로스터 대대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6. 그러나 후사르 연대는 앞서 정찰을 해 그 너머 산길이 센추리언이 지나기에는 좁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글로스터 대대까지 갈 수 있는 것은 필리핀 대대의 경전차 넷뿐이었다6. 글로스터 대대장 칸 중령은 구출 부대가 전부 올라오리라 믿고 고지에 남기로 했다6.

그 아침 여단 사령부에는 다른 소식도 들어왔다. 전날 보급소가 습격당할 때 붙잡혀 빈틈의 감악산 675고지로 끌려갔던 글로스터 병사 아홉이, 새벽에 미군 무스탕 전투기가 네이팜을 떨어뜨리는 틈에 달아나 사령부로 돌아왔다. 그들은 675고지에만 중공군이 적어도 천 명은 있다고 했다6. 솔은 쉬고 있던 벨기에 대대를 사단의 허락 없이 싸움에 넣지 말라고 브로디에게 일렀다6. 대신 그는 이튿날 아침 여섯 시 반에 제65연대의 두 대대와 전차대대로 글로스터 대대를 구하러 가기로 했다. 필리핀 대대는 그때까지 저지 진지를 지키다가 그 공격 부대를 뒤따르게 되어 있었다6.

구출 부대는 235고지 남쪽 5킬로미터쯤에서 중공군의 저항을 뚫었다. 필리핀 경전차가 앞에, 센추리언이 그 뒤에, 걷는 보병이 맨 뒤에 섰다6. 오후 세 시 반, 앞선 경전차들이 저지 진지를 칠 고갯길로 올라섰다. 행렬이 잘 나아가는 것을 본 브로디는 원래 계획으로 돌아가 부대 전체에 글로스터 대대까지 가라고 지시했다6.

그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맨 앞 경전차가 서 버렸다. 양쪽이 깎아지른 좁은 길목에서 지뢰인지 박격포탄인지에 맞아 무한궤도가 끊어졌다6. 길 양쪽 산마루에 늘어선 중공군이 길을 쓸었고, 폭약을 든 중공군이 비탈을 타고 멈춘 전차 쪽으로 내려왔다6.

뒤의 필리핀 경전차 승무원들은 길 앞에 지뢰가 더 깔렸다고 여겼다. 그들은 서 버린 전차를 끌거나 밀어내려 하지 않았고, 갇힌 승무원을 구하러 다가가지도 않았다6.

“앞으로 붙어! 끌어내야 해!”

“길에 지뢰가 깔렸어. 들어가면 우리도 똑같이 선다고!”

맨 앞 전차 안의 승무원들은 해치를 닫은 채 쇳덩이 안에 갇혀 있었다. 비탈을 내려오는 중공군의 폭약이 그 전차에 닿기까지는 몇십 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센추리언 두 대가 필리핀 경전차 옆으로 덩치를 비집고 올라갔다. 길이 좁아져 서 버린 전차까지는 닿지 못했지만, 그 엄호 사격 덕에 갇힌 승무원들이 빠져나왔다6. 그 사이 필리핀 보병은 뒤쪽 180미터쯤의 길가 고지 두 곳에 자리 잡은 중공군과 총격을 주고받았다6.

센추리언을 이끈 헨리 허스 소령이 여단 사령부를 불렀다.

“길이 막혔다. 센추리언은 어차피 저 길목을 못 지나간다.”

여단은 물러나도 좋다고 답했다6. 허스는 그 허락이 필리핀 대대에도 해당한다고 받아들였다. 그는 오헤다 중령을 찾았다.

“중령, 당신 보병으로 저 길목을 뚫을 수 있겠소?”

오헤다는 앞의 능선을 올려다보았다. 산마루마다 중공군이 있었다.

“소총중대 셋으로는 못 뚫습니다.”

오헤다는 앞을 막은 중공군을 대대 하나로 보았고, 소총중대 셋으로 그 사이를 지나갈 수 없다고 허스에게 말했다6.

“그럼 돌아갑시다.”

허스는 필리핀 대대에 집결지로 돌아가라고 전했다6. 그 철수를 누가 어디까지 허락했는지는 훗날 조사에서도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여단 일지에는 그 명령이 적혀 있지 않았고, 사령부의 누구도 그 범위를 기억하지 못했다6. 그날 저녁 제3사단 작전 일지에는 제10대대전투단과 전차로 된 구출 부대가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여단의 보고가 한 줄 남았다6.

솔은 그 시각 다른 연대의 전선에 가 있었다6. 그는 글로스터 대대가 다음 날 아침 제65연대가 올라갈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브로디의 말을 믿고 있었다6. 그날 밤 235고지 위의 글로스터 대대는 다시 혼자 남았다.

*

1951년 4월 24일 밤, 영국 제29여단 사령부 근처 — 필리핀 대대 집결지.

필리핀 병사들은 사흘 동안 연천 북쪽에서 한탄강을 건너, 다시 임진강 쪽 산길로 옮겨 다녔다. 일흔 해 가까이 지나 아흔일곱 살이 된 영은 한국 신문 기자 앞에서 자기 대대를 이렇게 불렀다2.

“제10대대전투단은 필리핀이 한국에 보낸 다섯 대대전투단 가운데 처음 온 부대였고, 가장 많이 피를 흘린 부대였습니다.”

솔은 나중에, 그날 글로스터 대대의 사정을 제대로 알았다면 자기가 직접 지휘를 맡아 그 산길로 병력을 밀어 올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리핀 대대와 전차면 충분히 닿으리라 믿었다고 했다6.

얍 대위의 이름은 그해 12월 14일 미군 일반명령 제107호에 올랐다. 미 육군은 그에게 수훈십자훈장을 주었다8. 필리핀은 그에게 나라에서 가장 높은 무공훈장인 용맹훈장을 주었다7. 2018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고, 2026년 6월 국가보훈부는 그를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정했다9. 필리핀은 한국에 7,420명을 보냈고, 그중 112명이 돌아가지 못했다3.

그 밤 율동 고지에서 중화기중대가 데려온 것은 중위 하나와 사병 셋의 시신, 그리고 살아 있는 분대 하나였다. 그들을 데리러 올라간 대위의 이름은 지금 필리핀 해군의 군함 한 척에 붙어 있다7.

사료 출처

1. Maximo Young 구술, 「Interview With Major Maximo Young」(면담 Veronica Sison), Rediscovering the Korean War 아카이브, rcw-asia.com/browsearchives/interview-with-major-maximo-young (2026년 10월 열람) — 율동 전선에서 밤 아홉 시 뒤 이동 금지와 암구호(L 소리, 원문: in Japanese, our password is “ella, lalia” or something like that), 맡은 정면 약 5마일, 왼쪽 푸에르토리코 병사·오른쪽 터키 병사와 그들에 대한 인상, 4월 22일 공격의 혼란(원문: everything was in loud chaos), 총 든 사람 하나 뒤에 일곱이 따라옴, 앞쪽 기관총과 「우리 앞에서만 500명 넘게 죽었다」는 그의 추산, 다른 쪽은 보이지 않았다는 말, 얼굴을 만져 봐야 할 만큼 어두웠고 타갈로그어로 아군을 가렸다는 말, 새벽 두 시 무렵부터 동틀 때까지 쏜 박격포반(한 문에 여덟 명)과 아침에 발견한 갈색 군복의 네 사람, 그들을 예비 진지로 보내 정보 장교가 심문함. 2. 정다민, 「97-year-old Filipino war vet vividly remembers harsh days in Korea」, The Korea Times 2020.7.22, koreatimes.co.kr/www/nation/2020/08/113_293193.html — 막시모 영(1922년생)이 한국에서 상사이자 전차 소대장이었다는 것, 제10대대전투단이 당시 필리핀 육군의 하나뿐인 전차 대대였다는 것, 「다섯 대대전투단 가운데 처음 온, 가장 피를 많이 흘린 부대」라는 그의 말(원문: The 10th BCT was the first and most bloodied BCT among five BCTs sent by the Philippines to Korea), 기사 당시 97세. 그 밖에 부산에 닿은 겨울의 추위(원문: Coming from a warm country as the Philippines, it was the first time we were exposed to the harsh cold weather)와 천막으로 들어온 뱀, 1950년 11월 11일 황해북도 신계 근처 매복 때 전차에서 나와 포탑 기관총을 쏜 일과 금십자훈장, 그것이 필리핀군의 나라 밖 첫 승리로 꼽힌다는 것. 3. 국가보훈부 영문 누리집, 「Philippines」(참전국 소개),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19 — 1950년 9월 15일 마닐라 출발·9월 19일 부산 도착, 미군·영국군 다음 세 번째 지상군, 미 제3사단·영국 제29여단 배속, 율동에서 고립된 특수 중대가 적의 차단선을 뚫고 대대에 합류, 4월 24일 설마리 글로스터 구출 작전 실패, 파병 7,420명·전사 112명. 4.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Yultong」(2026년 10월 열람)과 그 각주가 인용한 자료 — 병력 1,367명에서 약 900명으로 감소(Pobre 2000·2012), 20시 터키 여단 포격, 23시부터 파상 공격과 근접전(채한국·정석균·양영조 『The Korean War』 2권 2001, 625쪽), 자정 넘어 사단 전선 전체 포격(Villahermosa 『Honor and Fidelity』 2009, 123쪽), 00시 30분 통신 복구와 터키 여단의 캔자스선 철수(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7, 6권 315쪽), 운전병·타자수·서기·위생병·취사병·군종 신부 동원(Pobre 2012, 181쪽; 전사편찬위 332쪽), 중대별 고립, 아르티아가의 B중대와 율동 고지, 03시 왼쪽 소대 후퇴와 C중대 자리까지의 침투, 아르티아가 전사(Villasanta 『Dateline Korea』 1954, 21쪽), 오헤다의 철수 명령과 중화기중대만 따르지 않음(Pobre 2000, 445쪽), 생존 분대 구출(Villasanta 22쪽; Pobre 2000, 444쪽), 새벽 C중대·수색중대 M24 두 대·포병의 반격, 09시 밴플리트의 캔자스선 철수 명령(Villahermosa 127쪽), 12시 15분 솔의 안흥리 철수 명령(채한국 외 620쪽), 손실 전사 12·부상 38·실종 6, 중공군 전사 500여·포로 2(전사편찬위 1977), 펑더화이의 제12·15군 터키 여단 포위 계획과 23일 01시 제29·44사단의 제65연대 포위(Li Xiaobing 『China's Battle for Korea』 2014, 136~137쪽), 중국 측 제44사단(군사과학원 2000, 2권 315쪽)과 제132연대 두 대대 600~1,000명(向守志 회고록, 解放军出版社 2006, 226~227쪽). 각주의 원 문헌은 직접 보지 못했다. 5. Korean War Legacy Project, 「Maximo Young」 면담 소개, koreanwarlegacy.org/interviews/maximo-young/ (2026년 10월 열람) — 1941년 12월 8일 징집, 코레히도르 요새에서 화물을 기록하고 부리는 사환, 포트녹스 훈련, 1950년 9월 15일 출발한 부대 편성을 거듦, 직책 수색. 6. Mossman 『Ebb and Flow』(25화 출처와 같은 책) 제21장 「The Chinese Spring Offensive: The Opening」·제23장 「The Chinese Spring Offensive: On the Western Front」 — 중공군 제3병단 계획에서 제12군·제60군이 필리핀 대대 땅을 지나도록 함(379쪽), 솔이 본 제3사단 전선의 약점과 필리핀 대대가 33번 도로를 가로질러 제65연대 바깥 끝을 맡은 배치(385쪽), 자정 무렵 제34사단·제29사단 선봉의 공격과 한 중대의 후퇴, 이른 아침 필리핀 반격으로 땅을 되찾음, 52톤 센추리언(386쪽), 23일 정오 제65연대의 차례 철수와 14시 필리핀 대대에 제29여단 합류·퓨질리어와 글로스터 사이 빈틈 점령 명령(394쪽), 20시 여단 사령부 도착과 브로디의 「너무 늦었다」 판단(396쪽), 24일 아침 솔의 지시, 소총중대 셋·경전차 넷·제8후사르 C중대 센추리언 여섯, 07시 30분 출발, 글로스터 B중대 생존자, 오전 중 계획 변경(235고지 남쪽 2마일 고갯길 저지 진지), 센추리언 폭 약 12피트와 좁은 길, 칸이 고지에 남기로 함, 감악산 675고지에서 탈출한 글로스터 병사 아홉과 「적어도 천 명」 보고, 벨기에 대대 투입 금지(412쪽), 25일 06시 30분 제65연대 공격 계획과 필리핀 대대의 저지 진지 대기(413쪽), 235고지 남쪽 3마일 저항 돌파와 행렬 순서, 15시 30분 고갯길, 브로디의 원래 계획 복귀, 맨 앞 M24의 궤도 손상, 양쪽 산마루의 중공군과 폭약, M24 승무원들이 지뢰를 의심함, 센추리언 두 대의 엄호, 뒤쪽 200야드 고지 두 곳의 총격, 허스의 무전과 철수 허락, 오헤다가 소총중대 셋으로 중공군 한 대대를 뚫을 수 없다고 말함, 철수 명령의 범위가 끝내 밝혀지지 않음과 제3사단 작전 일지 129번(원문: relief force of 10th BCT and Tks have been ordered back), 솔이 다음 날 제65연대 공격까지 버티라고 함(414쪽), 솔의 뒷날 진술과 그가 제7연대 쪽에 가 있었다는 것(428쪽). 7. 영문 위키백과, 「Conrado Yap」(2026년 10월 열람) — 1921년 1월 22일 삼발레스주 칸델라리아 출생, 1943년 필리핀 사관학교 졸업, 1949년 포트녹스 기갑학교 수료, 전차중대가 중화기중대로 바뀐 사정, 필리핀 용맹훈장 공적문(Defenders of Bataan and Corregidor 게재본 인용)의 22일 23시 경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지를 지키기로」(원문: determined to hold their position at all costs), 아르티아가와 사병 셋의 시신 회수, 약 300야드 떨어진 적 진지 공격, 23일 이른 새벽 전사, 필리핀 해군 군함 BRP Conrado Yap(PS-39). 8. Home of Heroes, 「Conrado D. Yap」, 미 수훈십자훈장 공적문(미 극동군 일반명령 제107호, 1951.12.14), homeofheroes.com/?p=86606 — 22일 자정 직전 중대 진지 둘레 돌파, 참호에서 참호로 기어 다니며 병사들을 다독임(원문: Captain Yap crawled from foxhole to foxhole, steadying his men and encouraging them to hold firm), 철수 명령에도 고립된 소대를 향해 돌격, 쓰러진 병사에게 가다가 치명상. 9. 연합뉴스 영문, The Korea Times 재게재, 「Late Filipino captain designated Korean War hero of July」(2026.6.30), koreatimes.co.kr/foreignaffairs/20260630/late-filipino-captain-designated-korean-war-hero-of-july — 국가보훈부가 얍을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 특수 중대장으로서 중공군이 차지한 고지를 되찾고 생존자를 구하고 전우의 시신을 거두다 전사, 2018년 태극무공훈장 추서. 10. 중국어 위키백과, 「第五次战役」(2026년 10월 열람) — 제3병단 부사령원 왕진산이 제12·15·60군을 지휘, 돌파 뒤 연천 북쪽에서 미 제3사단·터키 여단의 저항으로 진전이 느렸고 24일 새벽 초성리·영평 지역에 이름(원문: 突破后在涟川以北遭到美军第3师、土耳其旅抵抗,进展较慢,24日晨进至哨城里、永平地区).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막시모 영 1922년 7월 30일생(영문 위키백과 「Maximo P. Young」, The Korea Times 2020), 콘라도 얍 1921년 1월 22일생(영문 위키백과 「Conrado Yap」), 로버트 솔 1900년 2월 10일생(영문 위키백과 「Robert H. Soule」), 토머스 브로디 1903년생(영문 위키백과 인물 목록 「Thomas Brodie (1903–1993), British Army soldier」). 디오니시오 오헤다, 호세 아르티아가, 헨리 허스, 제임스 칸, 밴플리트는 이 화에서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않았거나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율동을 친 중공군 — 미 육군 전사와 한국 측 영문 전사는 제12군 제34사단(과 제15군 제29사단)으로, 중국 군사과학원 전사는 제15군 제44사단으로 적었다. 병력도 필리핀 쪽 서술은 「4만」, 샹서우즈 회고록은 제132연대 두 대대 600~1,000명으로 크게 다르다. 본문은 「4만」을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손실 — 영문 위키백과(전사편찬위 1977 등)는 전사 12·부상 38·실종 6, 「Philippine Expeditionary Forces to Korea」 항목은 전사 10·실종 14·부상 26에 구출 작전 전사 5, 필리핀 퇴역 대령 로베르토 로시오의 블로그 댓글(cbholganza.com 2023.4.13)은 전사 12·부상 28·실종 15, 연천군 관광 누리집은 전사 125명을 적었다. 중공군 전사자도 500여(전사편찬위)와 90(한국어 위키백과 정보란)으로 다르다. 본문은 앞의 수치를 따랐다. 필리핀 전체 전사자도 국가보훈부 112명, 파이낸셜뉴스 2026.9.8 기사 468명, cbholganza.com 116명으로 다르다. 본문은 국가보훈부를 따랐다. [자료 충돌] 얍의 마지막 순간 — 미 수훈십자훈장 공적문은 쓰러진 병사에게 가다가 치명상을 입었다고, 필리핀 블로그 서술(cbholganza.com, historyisnowmagazine.com 2020.11.29)은 철수를 지휘하다 기관총에 맞았다고, 피델 라모스의 1993년 율동 42주년 연설(historyisnowmagazine.com 인용)은 「임무를 마친 얍이 이제 철수를 명령했다」고 전한다. 본문은 공적문을 따랐다. 얍의 중대도 자료에 따라 「전차중대」 「중화기중대」 「특수 중대」로 불린다. [자료 충돌] 경보와 공격 시각 — 용맹훈장 공적문은 22일 23시 경보, 수훈십자훈장 공적문은 「자정 직전」 돌파, 한국 측 영문 전사는 23시 파상 공격, 미 육군 전사는 자정 무렵 공격, 한국어 위키백과는 22시 무렵 포위로 적었다. [자료 충돌] 박격포반의 네 사람 — 막시모 영은 그들을 「북한군」이라 했으나 그날 밤 율동 정면의 적은 중공군이었다. 그의 구술은 이 일을 4월 22일 공격 이야기 바로 뒤에 놓으면서도 「전에 우리 중대 하나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해, 율동의 밤인지 그 앞의 다른 밤인지 분명하지 않다. 본문은 구술 순서를 따라 율동의 새벽에 두었고 네 사람의 소속은 적지 않았다. 「앞에서만 500명 넘게 죽었다」는 영의 추산이며, 같은 구술은 공격 날짜를 「1950년 4월 22일」로 잘못 말했다. [자료 충돌] 23일 철수 명령 — 한국 측 영문 전사(채한국 외)는 12시 15분 솔의 명령, 미 육군 전사는 정오 무렵 제65연대의 철수 시작으로 적었다. 같은 일의 다른 시점으로 보고 둘 다 적었다. 「안흥리」의 오늘 지명은 확인하지 못했다. [재구성] 율동이 오늘 어느 리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본문 「(현 연천군)」과 전황도의 율동 자리는 「연천 북쪽, 33번 도로를 가로지른 제65연대 오른쪽 끝」이라는 기록 서술에 따른 추정이다. 암구호를 연습하는 병사들의 대화와 「엘라, 랄리아」를 직접 말하는 장면(암구호는 영의 구술, 그도 「그런 것」이라고만 기억함), 「터키 친구들은 오늘도 안 웃던데요」로 시작하는 대화, 영이 기관총 옆에서 외친 「쏴! 서 있는 건 다 쏴!」, 얍이 병사들에게 한 말과 전령과의 대화(철수 명령과 중화기중대의 불복, 고립 소대를 향한 돌격은 기록), 박격포반의 「너희 누구야?」, 허스와 오헤다의 대화 말투(무전 내용과 오헤다의 판단은 기록), 영이 앞쪽 기관총 자리 가까이 있었다는 위치(구술은 「우리 기관총이 앞에 있었다」고만 함), 23일 아침 C중대가 되찾은 참호의 모습(탄피·시신·기관총), 맨 앞 M24를 두고 필리핀 전차병들이 주고받은 말과 갇힌 승무원의 모습(승무원들이 지뢰를 의심해 다가가지 않았다는 것은 기록), 중화기중대 기관총이 밤새 식지 않았다는 대목, 필리핀 병사들이 잠을 자지 못했다는 대목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37화의 글로스터 대대 장면과 겹치지 않도록 235고지 위의 일은 두어 줄로만 적었다.

3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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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동 전투 — 고립된 밤을 뚫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