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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14,801자)

임진강 전투 — 마지막 무전

1950 · 네오

임진강 전투, 1951년 4월 22일~25일 — 임진강과 한탄강, 서쪽부터 고랑포리·두지리·구읍리(칠중성, 148고지)·설마리·235고지·감악산(675고지)·전곡. 영국 제29여단의 배치(글로스터 대대·노섬벌랜드 퓨질리어 대대·로열 얼스터 소총대대·벨기에 대대), 22일 밤 중공군 제63군의 도하, 23일 저녁 벨기에 대대의 강 남쪽 철수, 24일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과 영국 전차의 구출 시도가 멈춘 골짜기, 25일 오전 글로스터 대대의 남서쪽 돌파 시도와 하비 대위 무리의 북쪽 우회로.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1년 4월 22일 일요일 밤 열 시, 경기도 적성(현 파주시 적성면) 북쪽 임진강 — 영국군이 ‘글로스터 여울’이라 부르던 얕은 물목.

보름달이 떠 있었다. 강 건너 북쪽 기슭의 자갈밭까지 하얗게 보였다1.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 곧 글로스터 대대 C중대의 병사 열여섯 명이 강 남쪽 끝의 무너진 집터에 엎드려 있었다. 대대장 제임스 칸(44) 중령이 해 질 녘에 내려보낸 매복조였다. 대대 공병들이 며칠 전 이 여울의 물길에 부표를 띄워 표시해 두었으니, 중공군도 이 길을 알아냈으리라고 칸은 보았다1.

영국 제29여단은 임진강 남쪽 열아홉 킬로미터의 전선을 세 대대와 벨기에 대대로 나누어 맡고 있었다. 여단장 톰 브로디(47) 준장은 대대마다 큰 산을 하나씩 쥐여 주었고, 대대와 대대 사이는 몇 킬로미터씩 비어 있었다. 지뢰밭도 철조망도 없었다2.

칸의 대대는 여울에서 이 킬로미터쯤 남쪽, 큰길 양쪽 산 위에 중대를 하나씩 올려놓았다. 길 서쪽 148고지에 A중대, 길 동쪽 182고지와 144고지에 D중대와 B중대가 강 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을 내려다보았다. C중대는 그 뒤 314고지, 여단 전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감악산(675고지, 현 파주시·양주시·연천군 경계) 아래에 있었다. 대대 본부와 박격포는 골짜기 안쪽, 작은 마을 설마리(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바로 위의 길가에 자리 잡았다1. 그날 낮 강 북쪽 기슭에 중공군 정찰병들이 어른거렸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칸은 해 질 녘에 매복조를 내보냈다1.

밤 열 시 무렵, 강 건너에서 일곱 사람이 물에 발을 들였다. 매복조는 그들이 남쪽 기슭에 다 올라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짧게 한 번 쏘았다. 일곱이 모두 물가에 쓰러졌다1.

“다음 놈들 온다.”

“탄창 몇 개 남았어?”

“셋. 아니, 둘 반.”

매복조는 세 번을 더 막았다. 미 육군 전사는 그 밤 여울에서 쓰러진 중공군을 일흔 명쯤으로 적었고, 열여섯 명 가운데 다친 사람은 없었다1. 탄약이 떨어지자 매복조는 중대 진지로 물러났다. 그 뒤를 따라 중공군 제63군 제187사단 제559연대의 한 대대가 여울을 건넜고, 서쪽으로 이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물밑 다리로도 다른 무리가 건너왔다. 글로스터 대대의 정찰이 한 번도 찾아내지 못한 다리였다1.

*

같은 밤, 강 북쪽 — 중국인민지원군 제19병단 제63군.

군장 푸충비(34)가 제63군을 맡은 지 두 달이었다3. 그의 군 세 사단은 사단마다 세 연대, 연대마다 세 대대였다. 영국 쪽 연구는 그 밤 제29여단 정면으로 스물일곱 개 대대, 이만 칠천 명쯤이 차례로 밀려들었다고 적었다2. 중국 중앙텔레비전의 기록 영화는 그 밤의 제63군이 ‘한 시간 만에 임진강을 돌파했다’고 말했다4. 중국 쪽 전역사는 이 싸움을 설마리 전투라고 부르고, 제63군이 강 남쪽의 높은 산 감악산을 차지해 영국 제29여단의 일부를 없앴다고 적었다5.

동쪽, 한탄강이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곳의 강 북쪽 언덕에는 벨기에 대대가 있었다. 대대 A중대에는 룩셈부르크 지원병 마흔여덟 명의 소대가 들어 있었다6. 자정 무렵 중공군 정찰대가 벨기에 대대의 청음초 옆을 지나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갔다. 대대가 강 남쪽과 이어지는 길은 강 위에 띄운 부교 두 개뿐이었다. 브로디는 예비대인 로열 얼스터 소총대대에서 차량 분견대를 떼어 다리를 지키러 보냈다. 분견대는 다리로 가는 길에서 매복에 걸려 거의 다 쓰러졌다1. 자정 무렵 중공군은 벨기에 대대의 퇴로를 끊었다7. 강 남쪽의 노섬벌랜드 퓨질리어 대대도 새벽까지 강가의 두 고지를 내주었다1.

서쪽 이웃 국군 제1사단 앞의 고랑포리(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강굽이에서는 제64군 제192사단이 동틀 무렵까지 세 군데로 강을 걸어서 건넜다. 미군 관측기가 그들을 보았고, 오전 열한 시까지 폭격과 포격이 그 물길을 막았다1. 건너온 중공군은 글로스터 대대와 국군 제12연대 사이의 빈 산으로 스며들었다.

*

1951년 4월 23일 새벽, 옛 성터가 남은 148고지(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칠중성) — 글로스터 대대 A중대 진지.

밤새 A중대는 비탈을 기어오르는 돌격을 몇 번이고 되밀었다. 길 건너 182고지의 D중대는 진지를 내주지 않았지만 사상자가 많았고, 동쪽 끝 B중대에는 정찰대 몇이 스쳤을 뿐이었다1. 영국 병사들은 이 산을 ‘성채 언덕’이라고 불렀다. 꼭대기 가까이에 돌로 쌓은 성벽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A중대에서 아직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은 쉰여덟 명이었다1. 날이 밝기 직전, 성터에 자리 잡았던 소대 진지를 중공군이 차지했다. 그 자리에서는 중대의 나머지 진지가 다 내려다보였다1.

제1소대장 필립 커티스(24) 중위가 반격을 이끌었다. 커티스는 한국으로 오기 전에 아내를 해산 중에 잃었다8. 첫 돌격은 성터 아래까지 올라갔다가 기관총과 수류탄에 막혔다. 커티스는 엄호 사격을 지시하고 혼자 기관총 진지로 뛰어올랐다. 수류탄 파편에 크게 다친 그를 부하들이 바위 뒤로 끌어 내렸다9. 의무병 파퍼스 상병이 상처를 싸매는 동안 커티스는 몸을 일으켰다.

“한 번만 더 간다.”

“중위님, 피가 아직 안 멎었습니다.”

커티스는 다시 뛰어올랐다. 수류탄을 던지며 기관총 구멍 몇 걸음 앞까지 갔고, 그곳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수류탄이 기관총 구멍 입구에서 터졌다9. 그는 성터를 되찾지 못했다. 영국 정부가 그에게 사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주며 적은 문안에 따르면, 그 반격이 중공군을 멈추게 해 중대가 물러날 틈이 남았다9.

중대장 팻 앤지어 소령은 무전으로 물러나도 되느냐고 물었다. 허락은 오지 않았고, 앤지어는 십오 분쯤 뒤에 전사했다8. 중대가 대대에 보낸 마지막 무전은 짧았다8.

“다 끝났습니다. 잘 있어요.”

칸은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격포와 포병의 엄호 아래 앞의 중대들을 거두어 설마리 쪽으로 물렸다1. 반도 남지 않은 A중대는 장교가 모두 죽거나 다친 채 대대 공병들이 지키던 길 서쪽 235고지로 올라갔고, D중대가 그 뒤를 따랐다2. 그날 오후, 감악산 쪽 빈틈으로 들어온 중공군이 길가의 대대 보급소를 덮쳤다. 그때 글로스터 대대는 사방이 막혔다1. 강 북쪽의 벨기에 대대는 날이 밝을 무렵 두 배로 불어난 중공군에 둘러싸였다. 미 제3사단이 보병 한 중대와 전차 두 소대를 다리 쪽으로 올려 보냈고, 전차 한 소대가 벨기에 대대의 언덕까지 올라가 함께 버텼다. 남쪽 강가 257고지에서 쏟아지는 박격포와 소총 사격 때문에 다리 둘레로는 걸어서도 차로도 지나가기 어려웠다1. 해가 진 뒤, 벨기에 대대는 미군 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포위를 뚫고 강을 건너 남쪽으로 빠졌다7. 차량 일곱 대를 잃었다2.

*

1951년 4월 23일 밤, 설마리 골짜기 — 대대 본부와 박격포가 있던 길가.

해가 지자 제559연대가 길 동쪽 비탈로 C중대와 B중대를 향해 올라왔다. 중공군은 두 중대가 어디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몰랐다. 그들은 대대 정면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돌격했고, 옆구리로 쏟아지는 글로스터의 총탄에 거듭 쓰러졌다1. 방향을 바로잡은 중공군은 끝내 C중대 진지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 자리에서는 골짜기의 대대 본부가 바로 아래로 보였다.

칸은 골짜기의 본부와 C중대를 길 서쪽 235고지로 옮기라고 했다. 탄약과 식량 상당수가 골짜기에 그대로 남았다. 동쪽 끝 144고지의 B중대는 어둠 속에서 먼 길을 오다 흩어질 것이라 보고 날이 밝으면 부르기로 했다1. 중공군은 C중대를 쫓지 않았다. 그들은 홀로 남은 B중대를 사방에서 조였다1.

*

1951년 4월 24일, 설마리 서쪽 235고지 — 대대가 모인 마지막 언덕.

B중대는 밤새 돌격을 막아 냈다. 날이 밝자 중공군은 둘레를 묶어 둔 채 북쪽의 한 소대에 힘을 모았고, 그 소대가 뚫렸다. 칸은 쏠 수 있는 무기를 다 동원해 중대가 빠져나올 길을 덮었다. 숲 비탈로 흩어져 내려온 병사 가운데 235고지까지 닿은 사람은 스무 명이었다1. 백이십 명 중 열다섯이라고 기억한 사람도 있었다8.

아침 일곱 시 반, 남쪽 큰길에서 구출대가 올라왔다.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의 세 소총중대와 경전차 네 대, 영국 제8경기병연대의 센추리온 전차 여섯 대였다1. 오후 세 시 반, 맨 앞의 경전차가 좁은 협곡에서 궤도를 잃었다. 폭이 삼 미터 반이 넘는 센추리온은 그 협곡을 지나가지 못했다. 전차대장 헨리 허스 소령은 길이 막혔다고 여단에 무전을 쳤고, 구출대는 해 질 녘에 출발점으로 돌아갔다1. 그날 오후, 정오에 도쿄에서 건너온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55)와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58)가 미 제3사단 비행장에서 사단장 소울의 계획을 들었다. 사단은 이튿날 아침 여섯 시 반에 미 제65보병연대의 두 대대와 전차대대로 글로스터를 구하러 가겠다고 했다. 왜 아침까지 기다리느냐는 물음에 소울은 부대가 아직 모이는 중이라고 답했다. 그는 글로스터가 버틸 수 있다는 브로디의 장담을 믿고 있었다1.

그날 새벽에는 반가운 얼굴도 돌아왔다. 전날 보급소에서 붙잡혀 감악산으로 끌려갔던 글로스터 병사 아홉 명이 아군 무스탕 전투기가 산에 네이팜을 쏟는 틈에 달아나 여단 본부로 내려왔다. 그들은 감악산 위에 중공군이 적어도 천 명은 있다고 말했다1.

칸은 여단장에게 상황을 말했다. 물러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줄어든 대대로는 중공군을 오래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1. 브로디는 사단장 명령대로 자리를 지키라고 했다. 그날 늦게 여단이 미 제3사단에 보낸 보고는 글로스터의 진지를 ‘꽤 안전하다’고 적었다1. 그 시각 대대에서 성한 사람은 삼백오십 명쯤이었다1. 미 제3사단의 경비행기 두 대가 해 지기 전에 보급품을 떨어뜨렸지만 상당수가 진지 밖 비탈로 굴러갔다1. 서쪽의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그날 오후까지 제64군 제192사단에 밀려 원래 자리에서 오 킬로미터쯤 물러났다. 그만큼 넓어진 국군과 글로스터 사이의 빈 땅으로 제63군 제189사단이 남쪽을 향해 줄지어 지나갔다1.

골짜기의 옛 본부 자리로 내려가 물과 무전기 전지를 지고 올라온 병사 하나가 그 말을 전해 듣고 투덜거렸다.

“꽤 안전하다면 내려가서 물 좀 길어 오라고 해.”

“우리 대장님이 원래 말을 그렇게 해. 집에 불이 나도 ‘좀 따뜻하다’ 할 양반이야.”

리지웨이는 훗날 이 싸움을 지휘관이 부하를 알지 못한 사례로 꼽았다. 칸은 조용히 줄여 말하는 사람이었고, 브로디는 그 말 밑에 깔린 무게를 읽었어야 했다는 것이다1.

*

1951년 4월 24일 밤부터 25일 수요일 새벽까지, 235고지 꼭대기.

칸은 중공군이 보지 못하게 날이 저문 뒤에 대대를 235고지의 길고 좁은 등성이로 옮겼다. 밤 아홉 시에 자리가 잡혔다. 북서쪽과 서쪽은 A중대, 남쪽과 남동쪽은 C중대와 B중대의 남은 사람들, 북쪽과 북동쪽은 D중대였다1.

자정 무렵부터 중공군은 경사가 완만한 북서쪽과 남동쪽 비탈로 올라왔다. 공격 사이사이 산 아래에서 중공군의 나팔이 울렸다.

대대 부관 앤서니 패러호클리(26) 대위가 군악대장 필립 버스를 불렀다10. 버스는 나팔을 빌려 들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

“무슨 곡을 붑니까?”

“다 불어. 후퇴 나팔만 빼고.”

버스는 영국군의 나팔 신호를 차례로 불었다. 비탈의 영국 병사들은 마지막에 분 긴 기상나팔을 오래 기억했다10. 중공군의 나팔이 잠깐 멎었다.

동틀 무렵 북서쪽에서 올라온 공격대가 235고지 꼭대기를 차지했다. 살아남은 중공군이 많지 않아 글로스터의 작은 반격이 꼭대기를 다시 빼앗았다. 북서쪽 비탈에 다시 모이던 중공군 위로 미군 제트 전투기 F-80 편대가 내려와 거의 다 쓸어 냈다1. 그 뒤로 산 위는 한동안 조용했다.

*

같은 날 오전 아홉 시 반, 235고지.

사단의 다음 구출 계획도, 아침 일곱 시로 미룬 공중 보급도 이 언덕에는 닿지 않았다1. 아침 여덟 시, 미 제1군단은 군단 전체에 서울 쪽 새 방어선으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2. 여단의 다른 대대들이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여단장은 글로스터에게 스스로 길을 뚫고 나오든지 항복하든지 대대장이 정하라고 했다2. 그 시각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의 한 대대와 미군 전차 두 소대가 이 언덕 쪽으로 밀고 올라오고 있었지만, 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1. 칸은 중대장들을 불렀다. 남서쪽 골짜기를 타고 고개를 넘어 국군 제1사단 쪽으로 간다. A중대가 앞장서고, C중대와 대대 본부가 따르고, D중대가 맨 뒤를 맡는다1.

들것에 실려야 할 중상자가 쉰 명쯤이었다. 칸은 그들과 함께 언덕에 남겠다고 했다. 대대 군의관과 군목, 의무병 몇이 손을 들었다1. 아무도 그들에게 남으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여단 본부에서 무전이 왔다. 지원 포격을 맡은 영국 제45야전포병연대가 포화에 묶여 더는 쏘아 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낡은 대대 무전기가 잡은 마지막 무전이었다1.

D중대장 마이크 하비 대위는 남서쪽 골짜기가 덫이라고 보았다. 그는 거꾸로 중공군이 한 번도 올라오지 않은 북동쪽 가파른 비탈로 내려가 크게 돌기로 했다. 지원중대 병사 열두어 명을 합쳐 백 명쯤 되는 무리에게 그는 말했다. 쓰러지는 사람은 두고 간다1. 한 사람도 남겠다고 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베레모를 벗어 버렸다. 뛰다가 걷다가를 되풀이하며 북쪽으로 일 킬로미터 반쯤 나가 서쪽으로 꺾었다. 북쪽 길에서 마주친 중공군은 둘뿐이었고, 서쪽으로 도는 일 킬로미터 반 동안은 아무도 없었다1. 남쪽으로 돌아서는 자리에서 하비가 잠깐 쉬자고 하자 병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하비는 훗날 그들이 ‘살아서 나가든지 죽든지’ 하겠다는 얼굴이었다고 말했다1.

남쪽 골짜기에서 서른 명 넘는 중공군이 양쪽 능선 위에서 쏘았다. 병사들은 한 뼘 깊이의 진흙 도랑으로 뛰어들어 기었다. 도랑이 끊길 때마다 다음 도랑까지 뛰었고, 뛸 때마다 누군가 쓰러졌다. 머리 위에서는 미군 정찰기 한 대가 날개를 흔들며 길을 잡아 주었다1. 골짜기 아래에 미 제73중전차대대 C중대의 전차들이 보였다. 전차는 진흙투성이에 모자도 없는 그들을 중공군으로 알고 기관총과 포를 쏘았다. 여섯 사람이 맞았다. 정찰기 조종사가 쪽지를 떨어뜨리고서야 사격이 멎었다1.

전차들이 다가와 부상병을 안에 태웠다. 나머지는 전차 뒤에 매달리거나 옆에서 뛰었다. 미 육군 전사는 하비를 포함해 장교 넷과 병사 서른여섯, 모두 마흔 명이 살아 나왔다고 적었다1. 그들이 국군 제12연대 제2대대의 진지 뒤로 들어선 것은 오후 두 시 무렵이었다1. 전차 위에 매달린 병사 하나가 흙투성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235고지는 산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

같은 날 정오 무렵, 235고지 남서쪽 고개.

미 제3사단의 관측기가 무전으로 보고했다. “제29여단 병사 이백이십오 명쯤이 있다. 길 잃은 사람들처럼 움직인다. 길 끝까지 걸어갔다가 막힌 것을 보고 돌아와 앉았다.”

관측 장교는 자기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지 못했다1. 대열의 머리가 고개에 닿았을 때 둘레의 중공군 기관총이 몇 사람을 쓰러뜨렸다. 장교들의 명령으로 글로스터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산 위에서 내려온 중공군은 그 많은 포로를 어떻게 할지 몰라 골짜기 아래로 데려가 앉으라고 손짓했다1.

중국 쪽에는 이날 한 사람이 영국군 예순세 명을 사로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187사단 제561연대의 류광쯔였다11. 중국의 한 통속 기사는 그가 새로 온 병사 둘을 데리고 능선을 뒤지다 영국군 무리를 만나, 항복하라고 소리쳤으나 말이 통하지 않자 기관단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손을 들게 했다고 적었다12. 그는 지원군 사령부에서 ‘외로운 담력의 영웅’이라는 칭호와 일등공을 받았다11.

언덕 위의 칸도 포로가 되었다13.

*

1951년 4월 27일, 서울 북쪽 제29여단 집결지.

글로스터 대대의 점호에 대답한 사람은 이백십칠 명이었다2. 싸움이 시작될 때 대대는 장교 스물여덟, 병사 육백일흔하나였다. 장교 스물하나와 병사 오백아홉이 포로가 되었고, 그 가운데 장교 여덟과 병사 백마흔다섯이 다쳐 있었다. 장교 둘과 병사 스물넷이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1. 퓨질리어 대대장 킹슬리 포스터 중령은 철수 길에 박격포에 지프가 맞아 전사했다. 허스는 그 철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이어진 매복’이라고 했다2. 여단 전체의 손실은 천구십일 명이었다14.

리지웨이가 경위를 물었다. 밴 플리트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답했다. 소울은 그날 글로스터의 진짜 형편을 알았다면 직접 군대를 끌고 그 길을 올라갔을 것이라고 했다. 브로디는 사단장에게 형편을 똑바로 알리지 못한 책임의 ‘절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했다1.

영국 쪽 연구는 중공군 사상자를 적어도 만 명으로 어림했다2. 중국 쪽 기록은 제19병단이 25일 자정까지 국군 제1사단 일부와 글로스터 대대, 전차 부대 대부분을 합쳐 사천여 명을 없앴다고 적었다. 같은 기록은 제64군이 임진강 남쪽 기슭에 막혀 다섯 사단이 좁은 땅에 몰려 큰 손실을 입었다고도 적었다5.

칸은 이 년 넘게 포로로 지내다 1953년 9월에 풀려났고,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13. 그가 들것 쉰 개 곁에 남겠다고 했던 235고지는 지금 ‘글로스터 언덕’이라고 불린다. 그 아래 설마천 가에 영국군 전적비가 서 있다15.

사료 출처

1. Billy C. Mossman, 『Ebb and Flow』(25화 출처와 같은 책) 제19장 「The Opening」(386~397쪽)·제20장 「On the Western Front」(410~429쪽) — 제29여단 배치와 벨기에 대대의 강 북쪽 위치, 글로스터 대대의 148·182·144·314·235고지와 설마리 본부, 부표로 표시한 글로스터 여울과 C중대 매복조 16명(보름달, 22시 무렵 일곱 명, 세 번 더 막음, 약 70명 사살, 아군 손실 없음), 제187사단 제559연대 대대의 도하와 서쪽 물밑 다리, A중대 가용 58명과 성터 소대 진지 상실, 퓨질리어 대대 X·Z중대 고지 상실, 23일 아침 설마리로 철수, 23일 오후 보급소 피습과 포위, B중대 붕괴와 235고지 도착 20명, 24일 07시 30분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소총중대 셋·경전차 넷)과 센추리온 여섯 대 출발, 15시 30분 협곡에서 선두 M24 궤도 손상, 폭 12피트 가까운 센추리온, 허스의 무전과 철수(19시 무렵 출발점), 칸의 경고와 브로디의 고수 지시, 여단 보고의 「fairly safe」, 가용 병력 약 350명, 골짜기 옛 본부에서 식량·물·탄약·무전기 전지를 가져옴, 25일 07시로 미룬 공중 보급, 자정 무렵 북서·남동 비탈 공격과 새벽 꼭대기 상실·탈환, F-80 공습, 09시 30분 철수 명령과 순서(A–C·본부–D), 중상자 약 50명과 칸·군의관·군목·의무병의 잔류, 제45야전포병연대 지원 불가의 마지막 무전, 하비의 북동쪽 우회(지원중대 열두어 명 포함 약 100명, 베레모를 벗음, 「to come out or get bloody killed」), 모스키토 정찰기, 30여 명의 중공군 사격과 도랑, 제73중전차대대 C중대의 오인 사격(6명 피격)과 쪽지, 장교 넷·병사 서른여섯 구출, 제3사단 관측기 보고(원문: approximately 225 29th BIB soldiers are located. They act as [if] they are lost. They walked to the end of the road, found a dead end-returned to their present positions and set down), 고개에서의 투항, 대대 병력 장교 28·병사 671, 포로 장교 21·병사 509(부상 장교 8·병사 145), 수용소 사망 장교 2·병사 24, 얼스터 대대 차량 분견대의 매복 피해, 23일 벨기에 대대 지원(보병 한 중대·전차 두 소대)과 257고지의 사격, 제64군 제192사단의 고랑포 도하와 11시 차단, 24일 오후 제3사단 비행장 회의(정오에 도착한 리지웨이·밴 플리트·밀번, 25일 06시 30분 공격 계획, 브로디의 장담), 감악산에서 탈출한 글로스터 병사 아홉 명의 보고(적어도 1,000명), 경비행기 두 대의 보급품 투하, 국군 제12연대의 약 3마일 후퇴와 제189사단의 틈 통과, 24일 밤 21시 235고지 재배치, 25일 국군 제12연대 제2대대와 전차 두 소대의 접근, 하비 무리가 14시 무렵 제12연대 제2대대 뒤로 들어감, 밴 플리트의 답(원문: all reasonable and possible courses of action), 소울의 회고, 브로디의 「50% responsibility」, 리지웨이의 평가(원문: the Gloster battalion should not have been lost). 집필 도우미가 내려받은 koreanwar.org 게재본 PDF에서 확인. 2.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the Imjin River」(2026년 10월 열람) 각주를 따라 확인한 내용 — 여단 정면 12마일(19킬로미터)과 고지 중심의 분산 배치, 지뢰밭·철조망 없음(Hastings 1987, 251·253쪽), 제63군 세 사단 27개 대대 약 27,000명(Mossman 379쪽; Salmon 2010), 25일 브로디가 돌파·항복 판단을 칸에게 맡김(Hastings 268쪽), 포스터 중령 전사와 허스의 말(원문: one long bloody ambush, Hastings 264쪽), 4월 27일 점호 217명, 중공군 사상 최소 1만 명(Hastings 270쪽). 원서는 직접 보지 못했다. 3. 중국어 위키백과, 「傅崇碧」(2026년 10월 열람) — 1916년 1월 12일생,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 군장 1951년 2월~1953년 9월, 제5차 전역 참가. 4. 중국 중앙텔레비전(CCTV) 기록 영화 『抗美援朝保家卫国』 제9집 「勇挫敌锋」, 공산당원망 게재 2020.11.4, 12371.cn/2020/11/04/VIDE1604437081145462.shtml — 제63군이 「仅用一个小时就突破了临津江,并一举全歼号称英军王牌部队的格罗斯特营及其配属部队」. 5. 중국어 위키백과, 「第五次战役」(2026년 10월 열람) — 제63군의 감악산 점령과 「消滅英軍第29旅一部(雪馬里戰鬥)」, 25일 24시 전 제19병단이 국군 제1사단 일부와 글로스터 대대·전차 부대 대부분 「共4,000餘人」을 없앴다는 서술, 제64군이 임진강 남쪽에 막혀 다섯 사단이 약 20제곱킬로미터에 몰려 손실이 컸다는 서술. 6. 국가보훈부, 「Luxembourg」 영문 소개(U09),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296 — 룩셈부르크 지원병 48명 소대의 벨기에 대대 A중대 편입. 벨기에 페이지와 본문이 거의 같아 별개 사료로 세지 않았다. 7. 국가보훈부, 「Belgium」 영문 소개(U08),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294 — 4월 19일 임진강 북쪽 배치, 22일 자정 퇴로 차단, 23일 낮 구출 시도 실패, 그날 저녁 항공 엄호 아래 차단선을 뚫고 철수. 8. Andrew Salmon, 「Recalling a field of honor, bravery and impossible odds」, Korea JoongAng Daily 2007.12.26, koreajoongangdaily.com/lifestyle/recalling-a-field-of-honor-bravery-and-impossible-odds/11096374 — 커티스가 파병 전 아내를 해산 중에 잃음, A중대장 앤지어가 철수 요청이 거부된 뒤 약 15분 만에 전사, 중대의 마지막 무전(원문: It's all over. Cheerio.), B중대 120명 중 15명 귀환. 9. 영문 위키백과, 「Philip Curtis」(2026년 10월 열람) — 1926년 7월 7일생, 4월 23일 148고지(Castle Hill) 반격, 첫 부상 뒤 재돌격과 전사, 패러호클리 회고의 기관총 구멍과 마지막 수류탄, 의무 상병 파퍼스, 사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 문안(반격이 적의 확대를 막아 중대 철수를 가능하게 했다는 내용). 10. Spink 경매 도록, 글로스터셔 연대 W. R. P. 시모어 이병 훈장 해설, spink.com/lot/25001000093 — 25일 새벽 중공군 총공격 때 부관이 군악대장 버스에게 나팔을 불게 함, 「후퇴 나팔만 빼고 전부」, 긴 기상나팔(Long Reveille)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김. 부관이 패러호클리라는 것은 Mossman 각주 31(「Captain Farrar-Hockley was the adjutant」)로 확인. 11. 巴彦淖尔发布, 「孤胆英雄——刘光子」, 澎湃新闻 정무호 2020.10.22, thepaper.cn/newsDetail_forward_9676195 — 제63군 제187사단 제561연대 제1대대 소대장, 제5차 전역에서 「格洛斯特营」 63명을 혼자 사로잡음, 지원군 총부의 「孤胆英雄」 칭호와 일등공, 북한의 전사훈장. 12. 「抗美援朝中的“孤胆英雄”一人活捉63名敌军」, 凤凰网 대풍호(개인 계정 小熊历史) 2018.11.30, news.ifeng.com/c/7iFmCG6UOAZ — 신병 둘과 능선 수색, 투항 권고가 통하지 않아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씀. 출처 표기가 없는 통속 글이라 「통속 기사」로 밝혀 적었다. 13. 영문 위키백과, 「James Power Carne」(2026년 10월 열람) — 1906년 4월 11일생, 포로가 됨, 1953년 9월 석방, 빅토리아 십자 훈장(문안은 1951년 4월 22·23일의 행동). 14. National Army Museum, 「Battle of the Imjin River」, nam.ac.uk/explore/battle-imjin — 여단 손실 1,091명(글로스터 622명 포함), 브로디 1903~1993년, 칸 1906~1986년. 15. 영문 위키백과, 「Gloucester Hill Battle Monument」(2026년 10월 열람) — 파주시 적성면 설마천 가의 전적비, 235고지를 「Gloster Hill」로 기억함, 1957년 6월 29일 제막.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칸 1906년생(영문 위키백과 「James Power Carne」, National Army Museum), 브로디 1903년생(National Army Museum), 커티스 1926년생(영문 위키백과 「Philip Curtis」), 패러호클리 1924년생(영문 위키백과 「Anthony Farrar-Hockley」), 푸충비 1916년생(중국어 위키백과 「傅崇碧」), 리지웨이 1895년생(33화 [나이]와 같은 근거), 밴 플리트 1892년생(영문 위키백과 「James Van Fleet」). 앤지어, 파퍼스, 허스, 버스, 하비, 포스터, 소울, 류광쯔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여울 매복 — Mossman은 첫 일곱 명 뒤에 세 번을 더 막았다고(모두 네 번), 영문 위키백과가 인용한 Salmon은 매복조를 이끈 템플 중위의 말로 세 번이라고 적었다. 매복조 인원도 Mossman 16명, 위키백과 17명이다. 본문은 Mossman을 따랐다. [자료 충돌] 여울을 건넌 중공군 연대 — Mossman은 제187사단 제559연대, 중국 쪽 통속 글과 정무 계정 글은 류광쯔가 속한 제561연대가 포위를 맡고 다른 사단의 제560연대가 주공을 맡았다고 적었다. 본문은 도하 부대에 Mossman을, 류광쯔의 소속에 중국 쪽 글을 따랐다. [자료 충돌] 하비 무리의 생존자 — Mossman은 장교 넷·병사 서른여섯, 모두 마흔 명, 영문 위키백과(Hastings 인용)는 장교 다섯·병사 마흔하나, 영문 위키백과 「James Power Carne」은 「63명만 돌파」로 적었다. 본문은 Mossman을 따랐다. [자료 충돌] 글로스터 대대의 손실 — Mossman은 포로 장교 21·병사 509(대대 소속만), 영문 위키백과는 포로 522명(영국 대사관 526명), 전사 59명, 수용소 사망 34명(Hastings 30명), Mossman은 수용소 사망 26명이다. 여단 본부의 첫 집계는 배속 포병을 합쳐 622명, National Army Museum도 622명을 적었다. 4월 27일 점호 인원도 217명(위키백과)과 169명(Hastings)이 다르다. 본문은 Mossman의 대대 수치와 위키백과의 217명을 적었다. [자료 충돌] 중공군 손실과 전과 — 영국 쪽은 최소 1만 명(Hastings는 이 숫자를 「임의적」이라 했다), National Army Museum은 공세 전체에서 7만 명, 중국 쪽은 제19병단의 전과만 「4,000여 명」으로 적고 자기 손실은 적지 않았다. CCTV는 글로스터 대대의 「전멸」을, 영국 쪽은 하비 무리의 탈출과 점호 인원을 적었다. [자료 충돌] 버스의 나팔 — 경매 도록은 부관의 지시로, 다른 대중 글은 칸의 명령으로 적었다. 시각도 「25일 새벽」(경매 도록)으로만 확인되었다. 본문은 부관의 지시를 따랐다. [자료 충돌] 류광쯔의 직책 — 정무 계정 글은 제561연대 제1대대 소대장, 천룽왕 글은 제187사단 제2중대 분대장으로 적었다. 통속 글의 스탈린 문답 일화는 1953년 스탈린 사후의 행사로 적혀 있어 쓰지 않았다. [재구성] 매복조의 「다음 놈들 온다」로 시작하는 대화, 커티스와 의무병의 대화(파퍼스가 부상자를 돌본 일은 기록), 앤지어 중대의 마지막 무전을 우리말로 옮긴 문장(원문 「It's all over. Cheerio.」), 「꽤 안전하다면」으로 시작하는 병사들의 대화와 물을 지고 올라온 병사, 패러호클리와 버스의 대화(「후퇴 나팔만 빼고」는 버스의 대답으로 기록), 중공군 나팔이 잠깐 멎었다는 대목, 칸이 중대장들을 부른 장면의 말투, 「한 사람도 남겠다고 하지 않았다」(약 백 명 전원이 탈출을 골랐다는 기록에서), 류광쯔 장면의 세부(통속 글에 따름), 마지막 문단의 연결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의 율동 전투, 국군 제6사단의 사창리, 가평 전투는 다른 화에서 다룬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3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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