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12,922자)
사창리 전투 — 흩어진 사단
1950 · 네오
1951년 4월 22일 일요일 오후 네 시 무렵,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현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 북쪽 — 산골 장터 마을 위로 이어진 국군 제6사단 전선.
사단장 장도영(27) 준장은 오후 내내 북쪽 능선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미 제9군단의 공중 관측병이 사단 정면에 모인 큰 적 병력을 찾아 포탄을 퍼붓고 있었다1. 오후 서너 시쯤에는 앞으로 나가던 병사들이 중공군 몇 명을 붙잡아 왔다. 포로들은 자기네가 중공군 제60사단이라고 했다. 바로 서쪽 미 제24사단도 같은 시각에 제59사단 병사들을 잡았다. 두 사단 다 막 전선에 닿은 제20군 소속이었다1. 사단에는 대규모 중공군이 앞에 모이고 있다는 첩보도 들어와 있었다2.
장도영은 북쪽으로 나가던 공격을 멈추게 했다. 왼쪽 제19연대와 오른쪽 제2연대는 그 자리에서 진지를 파고, 서로 어깨를 잇고, 바깥쪽으로는 미 제24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에 이어 붙으라는 명령이었다. 예비대 제7연대는 제2연대 바로 뒤에 붙였다. 앞에 적이 더 많이 보인 쪽이 제2연대였다1.
사단에 붙은 미국 군사고문단의 고문관은 그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예비대를 그렇게 앞에 바짝 붙이지 말라고 권했다1.
“예비대는 뒤에 두셔야 합니다. 앞이 뚫리면 같이 휩쓸립니다.”
“앞 병사들이 지금 겁을 먹고 있소. 등 뒤에 제7연대가 서 있는 걸 보여 줘야 버팁니다.”
중공군이 온다는 말이 돌면서 전선의 병사들 사이에 불안이 번지고 있었다. 장도영은 뒤에 든든한 대열을 보여 주어 그 불안을 누르려 했다1. 고문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군단은 포를 앞으로 당겼다. 사창리로 들어가는 길은 동쪽 큰길에서 갈라지는 좁은 골짜기 길 하나였다. 춘천과 화천을 잇는 도로의 마을 지촌리(현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에서 서쪽으로 굽이굽이 꺾여 들어가는 길이었다. 155밀리 자주곡사포를 가진 미 제92기갑야전포병대대는 그 길을 반쯤 들어와 해병대와 국군의 경계에 자리를 잡았다. 105밀리 곡사포를 가진 제987기갑야전포병대대와 제2로켓야전포병포대는 더 깊이 들어가 제7연대 뒤에 포를 걸었다. 그 옆에는 미군 4.2인치 박격포 중대와 국군 제27야전포병대대가 있었다1.
*
같은 날 해 질 녘, 사창리 북쪽 산중 —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제20군 제60사단.
제9병단 사령관 쑹스룬(43)은 다섯 개 군을 쥐고 있었다. 지원군 사령부의 계획은 서부전선의 가운데, 김화에서 가평까지 한 줄기로 쪼개 들어가 유엔군을 동서로 갈라놓는 것이었다. 동쪽과 서쪽이 서로 도우러 오지 못하게 하는 쐐기였다3. 그 쐐기의 끝이 국군 제6사단의 산이었다.
4월 22일 황혼, 지원군과 북한군은 전선 전체에서 반격을 시작했다3. 그날 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올랐다1. 제60사단 제179연대의 선두는 대포의 엄호도 거의 없이 능선을 내려왔다. 그들이 처음 부딪친 곳은 제2연대의 안쪽 대대였다1. 뒤따르던 부대가 제19연대와 제2연대 사이의 빈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한 무리는 서쪽으로 꺾어 제19연대 뒤로, 한 무리는 동쪽으로 꺾어 제2연대 뒤로, 나머지는 곧장 남쪽 제7연대를 향해 내려갔다1.
국군 제6사단 쪽 기록은 공격 시작을 오후 다섯 시 무렵으로 적었다2. 미군 기록은 저녁 여덟 시 무렵으로 적었다1. 어느 쪽이든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분 사이에 두 전방 연대가 통째로 뛰기 시작했다1. 장도영의 「진지를 지켜라」는 명령은 연대까지 내려갔으나 병사들의 발을 붙잡지 못했다2. 등 뒤에서 중공군이 나타났다는 소리가 앞선 연대들 사이로 번졌다. 제2연대에 떠밀린 제7연대도 같은 물결에 휩쓸렸다1.
*
같은 날 밤 아홉 시 반 무렵, 지촌리–사창리 골짜기 길 — 미 제92기갑야전포병대대.
대대장 리언 F. 라부아 중령은 그때 지프를 타고 군단 포병 사령부로 가는 중이었다. 좁고 무너지기 쉬운 보급로를 손볼 공병을 당장 얻어 올 생각이었다. 지프 무전기에서 국군 연대 하나에 나가 있던 대대 연락장교 플로이드 C. 하인스 대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4.
“여기 누가 비상 단추를 눌러 버렸습니다.”
이어 들어온 무전들로 라부아는 중공군이 전선을 깊이 뚫었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그는 길가 첫 부대에 들러 군단 포병에 상황을 알리고 차를 돌렸다. 길을 고치는 일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그 길을 지키는 일이 먼저였다4.
대대로 돌아왔을 때 길은 차량으로 꽉 막혀 있었다. 길 양쪽으로 국군 보병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라부아는 대대 전원을 전투 위치에 세우고 참모들과 함께 낙오병을 붙잡으려 했다. 소용이 없었다. 병사들은 포병 진지 옆을 지나 계속 내려갔다4.
“멈춰! 여기서 같이 막자!”
말이 통하지 않았다. 통한다 해도 서지 않았을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 있던 포병들은 운이 나빴다. 국군 제27야전포병대대는 포를 걸어 둔 채 중공군에게 따라잡혔다. 포병들은 포를 버리고 남쪽으로 흐르는 보병 대열에 섞였다1. 미군 지원부대들은 무기와 장비를 다 끌고 나섰다. 그러나 동쪽 제92대대 쪽으로 빠지는 좁은 길에서 총탄을 맞았고, 뒤집힌 국군 트럭과 버려진 짐이 길을 막았다. 4.2인치 박격포 중대와 제2로켓포대는 주무기를 하나도 건지지 못한 채 제92대대에 닿았다. 제987대대는 장비의 절반쯤을 건졌다1. 서쪽 제19연대 뒤에 있던 뉴질랜드 포병만 포와 장비를 고스란히 끌고 가평천 골짜기로 빠져나갔다1.
사단 사령부의 무전기는 조용했다. 공황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도영은 연대장들과 무전도, 전화선도 끊겼다1. 퇴로에는 이미 후방으로 들어온 중공군이 있었다2.
“제2연대 나와라. 여기는 사단. 제2연대, 응답하라.”
통신병이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수화기에서는 잡음만 돌아왔다.
자정이 지나자 중공군의 추격이 멎었다2. 장도영과 참모들은 밤새 후방을 돌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았다. 날이 밝을 무렵 남쪽 석룡산(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 경계의 산)과 화악산(가평군 북면과 화천군 사내면 경계의 산) 쪽에 세 연대의 병사 2,500명쯤이 모였다2. 원래 전선에서 남쪽으로 십육 킬로미터쯤 내려온 자리였다1.
동쪽 해병대는 그 밤에 왼쪽 옆구리가 통째로 비었다. 해병사단은 춘천 근처 예비대에서 대대 하나를 트럭에 태워 지촌리 골짜기 길로 보냈다. 대대는 거꾸로 밀려 내려오는 국군 병사들의 물살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갔고, 새벽이 되기 직전에야 겨우 진지를 폈다1.
*
1951년 4월 23일 월요일, 화악산 북쪽 기슭 — 국군 제6사단 수습 지점.
날이 밝자 전선이 조용해졌다. 미 제9군단장 윌리엄 M. 호지(56) 소장의 명령이 내려왔다. 제6사단은 북쪽으로 다시 올라가 캔자스선에 서라는 것이었다2. 캔자스선은 유엔군이 38선 조금 위로 그어 둔 주 방어선이었고, 사단이 모인 곳에서 북쪽으로 오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1.
장도영 앞에는 일이 산더미였다. 동쪽 해병대 구역과 서쪽 미 제24사단 구역으로 흩어진 병사들을 찾아와야 했고, 사단 전체를 다시 짜야 했고, 그런 다음 잔뜩 겁먹은 병사들을 적이 있는 쪽으로 걸어 올라가게 해야 했다1. 한낮에 그는 군단에 알렸다.
“오후 다섯 시까지 캔자스선에 올라가겠습니다.”
다섯 시가 다가왔다. 사단은 한 부대도 앞으로 움직이지 않았다1. 호지는 그 사이 오후에 이미 다음 수를 두었다. 남쪽 가평에 모여 있던 영연방 제27여단에 국군 뒤의 가평천 골짜기를 막으라고 명령했다1. 장도영은 결국 북쪽으로 올라가기를 접고 사단을 모인 자리 근처에 펼쳤다1.
그 무렵 서울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국군 열 개 사단을 더 무장시켜 달라고 직접 요청을 보냈다. 제6사단이 첫 번째로 무너진 뒤였고, 두 번째로 무너지기 몇 시간 전이었다1.
해가 지자 중공군 선두가 다시 국군 전선에 닿았다. 이번에는 서쪽으로 비켜 가던 제60사단이 제19연대를 스치고 지나갔고, 사단 오른쪽 절반으로는 제40군 제118사단이 내려왔다1. 남쪽 병사들은 거의 곧바로 뛰었다. 무질서한 보병 대열과 트럭이 가평천으로 모이는 두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국군을 도우러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왔던 뉴질랜드 포병과 영국 미들섹스 대대, 미 제213야전포병대대는 자리를 잡기도 전에 국군 병사들이 자기 진지를 지나쳐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1. 세 부대는 영연방 제27여단 뒤로 물러났다. 제213대대는 곡사포 한 문을 잃었다. 길 위를 우왕좌왕하는 국군 병사 무리를 치지 않으려고 포를 길 밖으로 굴려 떨어뜨렸다1.
저녁 여덟 시 무렵 국군 병사들이 영연방 제27여단 진지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1. 밤 열 시 무렵에는 국군을 뒤쫓아 북동쪽 골짜기를 내려온 제118사단 제354연대가 호주 대대 진지에 닿았다1. 제40군은 그날 밤까지 유엔군 진지 안쪽으로 삼십 킬로미터 넘게 파고들어 유엔군을 동서로 갈라놓았다고 중국 쪽 기록은 적었다5. 다른 중국 쪽 기록은 그 끝을 가평 북동쪽 마을 목동리(현 가평군 북면 목동리)로 적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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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24일 화요일 새벽 다섯 시 이십 분, 지촌리 남쪽 북한강가 — 미 제92기갑야전포병대대.
대대는 전날 오후 골짜기 길에서 빠져나와 북한강가에 포를 다시 걸었다. 강 위의 하나뿐인 다리가 가까웠다. 포병들은 서른여섯 시간 가까이 거의 자지 못했다4. 그래도 마지막 포가 자리를 잡자마자 진지 둘레부터 팠다. 라부아는 어디에 서든 포 둘레에 보병처럼 방어선을 치게 했다. 바깥에는 반궤도차를 낀 경계초소, 그 안쪽에는 수류탄이 닿지 않을 거리에 판 주 방어선, 한가운데에는 반궤도차 두세 대에 여덟에서 열 명씩 태운 예비대를 두는 식이었다. 웃는 얼굴로도 진지 이야기만 나오면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다4.
“포병이 왜 삽질을 합니까? 앞에 해병대가 있는데요.”
“보병이 포를 제일 급하게 찾을 때가 바로 적이 우리 포를 덮칠 때다.”
그날은 해가 다섯 시 사십오 분쯤 졌다. 대행 부대대장 로이 A. 터커 소령은 경계초소와 조명 지뢰선, 전화선과 무전망까지는 깔았지만 철조망과 모래주머니는 다음 날로 미루었다4. 라부아는 해가 지기 전에 진지 둘레를 돌며 앞산의 해병대 진지를 병사들에게 손으로 짚어 보였다4. 새벽 한 시 십오 분, 해병 연대가 그를 불렀다. 왼쪽 옆구리가 비어 버린 해병사단이 날이 밝으면 물러난다고 했다. 포병은 다섯 시 반에 움직일 준비를 하라는 지시였다4. 라부아는 포대장들에게 따뜻한 아침밥을 먹이라고 일렀다.
아침밥은 네 시 사십오 분에 나왔다. 대부분이 밥을 다 먹었고, 천막은 거의 걷혔다. 라부아는 식당 천막에서 커피를 받고 있었다4.
C포대 포병 하나가 화장지 두루마리를 들고 포 앞쪽의 무덤 자리로 걸어갔다. 봉분 사이로 다가가던 그는 중공군 여럿이 배를 땅에 붙이고 포대 쪽으로 기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손에 든 화장지를 가장 가까운 중공군에게 냅다 던지고 뒤돌아 달렸다. 화장지를 맞을 뻔한 중공군 병사가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4. 그 순간 진지 밖에서 누군가 조명 지뢰선을 건드렸다. C포대장 버나드 G. 래프터리 대위가 시계를 보았다. 다섯 시 이십 분이었다4.
기관총이 울렸다. 식당 줄이 흩어졌다. 작전장교 레이먼드 F. 호톱 소령은 반궤도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라부아는 식당 천막 옆구리에 총알 구멍이 뚫리는 것을 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4.
“전투 위치로! 전투 위치로!”
십 분이 안 되어 사격은 귀를 먹먹하게 하는 굉음이 되었다. 머리 위로 걸어 둔 전화선이 총탄에 끊겼다. 대대는 무전으로 버텼다4. 앞의 200고지에서 중공군 기관총 여섯 정이 예광탄을 쏟아부었다. 수류탄만 든 중공군 병사들은 무덤 자리를 지나 맨 앞의 5번 포까지 기어 왔다. C포대 부포대장 조지프 N. 히어린 중위가 반궤도차에 뛰어올라 50구경 기관총을 돌렸다. 5번 포에 붙은 중공군 병사들이 쓰러졌다. 포반장 시어럴 J. 해틀리 하사가 그 틈에 달려 나가 5번 포를 뒤로 뺐다4.
A포대의 제임스 R. 화이트 중사는 자기가 어떻게 반궤도차 위 기관총 앞에 와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탄띠가 꼬여 있었다. 손이 너무 떨려 탄띠를 펴지 못했고, 총좌 위로 몸을 내밀기도 무서웠다. 한참 뒤에야 그는 일어서서 탄띠를 펴고 쏘기 시작했다4. 본부포대의 수송 담당 윌리스 V. 러블 중사는 처음에 누가 탄약 뭉치를 모닥불에 던진 줄 알았다. 앞 들판에 때 묻은 흰 옷을 입은 사람 너덧이 보였다. 피란 나온 남쪽 사람들인 줄 알았다가, 하나가 소총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방아쇠를 당겼다4.
포병들의 첫 공포는 아무 데나 쏘아 대는 사격으로 터져 나왔다. 라부아는 진지 둘레를 돌며 반궤도차 뒷문을 하나하나 열었다. 두세 명이 차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두 번 보았다4.
“나도 무섭다. 무서운 건 잘못이 아니야. 제 몫만 하면 돼.”
병사들은 얼굴을 붉히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기관총 사수 하나는 오히려 대대장에게 소리쳤다4.
“대대장님, 엎드리십시오! 여기 위험합니다!”
래프터리는 사격을 줄이라는 대대장의 말에 버텼다. C포대 진지 안이 온통 중공군이라고 했다. 라부아가 물었다4.
“살아 있나, 죽었나?”
“둘 다입니다.”
“죽은 놈들은 신경 쓰지 말고 산 놈들만 맡아. 한 발 한 발 맞혀.”
사령부 천막으로 돌아오자 해병 연대의 무전이 들어왔다. 포병이 지나치게 쏘아 대니 사격을 멈추라는 것이었다4.
“당신들, 아군을 쏘고 있소.”
“그 아군이라는 사람들이 우리 대대 병사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라부아는 포병들이 공황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해병들에게 납득시켰다. A포대장 존 F. 제리티 대위는 155밀리 포를 직접 겨누어 천 미터 안쪽의 중공군 기관총 두 정을 날려 버렸다. 해병 전차 몇 대가 굴러와 앞쪽 들판을 훑었다4. 탄약 트럭을 맡은 존 D. 엘더 상사가 사령부 천막으로 와서 아직도 옮길 계획이냐고 물었다4.
“옮기려고 했지. 이 자리부터 다 정리하고 옮긴다.”
기관총 담당 오스틴 E. 로버츠 하사는 열 명을 이끌고 길 건너 들판으로 나갔다. 몇 걸음 만에 중공군 하나가 앞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버츠의 병사 하나가 쏜 총알이 그 중공군이 든 미제 톰슨 기관단총에 맞았다. 중공군은 총을 떨어뜨리고 손을 들었다. 로버츠가 소리쳤다4.
“쏘지 마! 쏘지 마!”
포로는 포병 둘에게 이끌려 대대 본부로 갔다4. 일곱 시 반, 대대는 진지를 옮길 수 있었다. 대대는 네 명이 전사하고 열한 명이 다쳤으며, 장비는 하나도 잃지 않았다. 해병대는 나중에 대대 둘레에서 중공군 시체 백일흔아홉 구를 셌다4.
“포병도 마음만 먹으면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다.”
라부아가 남긴 말이었다4. 이틀 전 밤, 같은 군단의 다른 포병들은 그 골짜기 길 위에 105밀리 곡사포 열다섯 문을 두고 나왔다1.
*
1951년 4월 24일~28일, 가평 남서쪽 — 국군 제6사단 재편성 지점.
24일 아침 장도영은 호지에게 알렸다. 가평 남서쪽 큰길 근처에서 병사 4,000~5,000명을 모아 다시 짜고 있다는 보고였다. 사단 병력의 절반쯤이었다1. 사단은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를 받으며 그 자리에서 대오를 다시 세웠다2.
그다음 날부터 병사들이 돌아왔다. 산으로 흩어졌던 병사들, 이웃 사단 구역으로 밀려갔던 병사들이 하나둘, 몇 명씩 줄지어 내려왔다. 4월 25일, 다시 모인 병사는 6,313명이 되었다2. 그러나 총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를 잃었다2. 사단을 돕던 미군 포병은 105밀리 곡사포 15문, 4.2인치 박격포 13문, 무전기 242대, 차량 73대를 잃었다2.
인사계 탁자 앞에 선 병사 하나가 이름과 군번을 대자 하사관이 장부를 넘겼다.
“총은?”
“두고 왔습니다.”
“너는?”
“저는 왔습니다.”
하사관은 장부의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
4월 28일, 호지는 장도영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단의 행동은 「모든 면에서 수치스러웠다」고 적었다1. 그러면서도 호지는 장도영을 국군 사단장 가운데 나은 편으로 보았고, 그를 갈아치우라고 하지 않았다. 사단이 무너진 까닭은 장교와 부사관 모든 계급의 지휘와 통제가 무너진 데 있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1.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58) 중장 앞에서 국군 참모총장 정일권(33) 소장은 훈련이 모자랐다고 설명했다. 밴 플리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6사단은 전에는 잘 싸웠고, 장교는 기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책임감과 용기, 집과 가족을 위해 싸우려는 의지가 먼저라고 했다1. 이승만이 요청한 열 개 사단의 무장도 거절했다. 지도자 없이 사단만 늘리면 「급히 필요한 장비를 죄스럽게 낭비하는 일」이 된다는 이유였다1.
사창리의 결과로 제2연대장과 참모 몇이 물러났고, 송대후 중령이 새 연대장으로 왔다6. 4월 22일부터 사흘 밤 동안 서쪽 임진강가에서는 영국 글로스터 대대가, 율동에서는 필리핀 대대가, 가평에서는 호주와 캐나다 대대가 각자의 산을 붙들고 있었다. 사단은 그 산들 남쪽에서 장부의 동그라미를 하나씩 늘리며 다음 싸움을 기다렸다.
사료 출처
1. Billy C. Mossman, 『Ebb and Flow』(25화 출처와 같은 책) 376~391쪽(절 「Panic at the IX Corps Left」 등)·401~408쪽(절 「Repeat Performance」) — 22일 오후 제60·59사단 포로, 16시 무렵 공격 중지와 제19·2연대 진지 명령, 제7연대를 제2연대 바로 뒤에 둔 배치와 군사고문단의 반대, 지촌리에서 갈라지는 골짜기 길과 제92·987기갑야전포병대대·제2로켓포병포대·제2화학박격포대대 C중대·국군 제27야전포병대대·뉴질랜드 포병의 위치, 보름달, 20시 무렵 제179연대의 제2연대 안쪽 대대 공격과 빈틈 돌파, 몇 분 사이 두 전방 연대의 패주, 제27야전포병대대의 포 유기, 미 지원부대의 손실, 뉴질랜드 포병의 무사 철수, 무선·유선 두절, 열 마일 남쪽 2,500명 수습, 해병 제1연대 제1대대의 야간 투입, 23일 호지의 캔자스선 명령(3마일 북쪽), 「17시까지」 보고와 미이행, 영연방 제27여단의 가평천 봉쇄 명령, 23일 이승만의 열 개 사단 요청, 23일 밤 제60·118사단, 미들섹스 대대·제213야전포병대대의 철수와 곡사포 한 문, 20시 무렵 제27여단 진지 유입, 22시 무렵 제118사단 제354연대의 호주 대대 접촉, 24일 아침 4,000~5,000명 보고, 장비 손실(소총류 2,363정 등)과 무전기 242대, 4월 28일 호지가 장도영에게 보낸 편지(원문: disgraceful in all its aspects), 지휘 통제 붕괴 판단, 정일권의 훈련 부족 설명과 밴 플리트의 반박, 열 개 사단 거절(원문: a criminal waste of badly needed equipment). 2. 양영조, 「사창리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집필·2023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25992 — 22일 대규모 중공군 집결 첩보와 공격 중지·방어 전환, 17:00경 제9병단 공격 개시, 사단장의 진지 고수 명령과 후방 중공군 출현에 따른 무질서한 후퇴, 퇴로 차단과 통신 두절, 제19연대 고립과 제2·7연대의 분산 철수, 자정 무렵 추격 중지, 23일 새벽 석룡산~화악산 후방 2,500여 명 집결, 미 제9군단장의 캔자스선 저지 명령, 24일 영연방 제27여단 엄호 아래 가평 남서쪽 재편성, 25일 6,313명 집결, 사단과 미 포병부대의 장비 손실 목록. 3. 「第五次战役」, 『舰船知识』 인터넷판, 신랑망 2003.7.26, mil.news.sina.com.cn/2003-07-26/139654.html — 김화에서 가평까지 「전역 돌파구(战役缺口)」를 열어 유엔군을 동서로 갈라놓는다는 계획, 4월 22일 황혼 전선 전체의 반격, 제9병단 사령관 겸 정치위원 쑹스룬이 다섯 개 군을 지휘, 23일 밤까지 제20·27·26군의 15~20킬로미터 전진, 제40군의 30여 킬로미터 돌입과 가평 북동쪽 목동리(沐洞里) 진출. 4. Russell A. Gugeler, 『Combat Actions in Korea』(33화 출처와 같은 책) 제12장 「Artillery in Perimeter Defense」(154~165쪽) — 하인스 대위의 무전(원문: Someone's pushed the panic button up here), 라부아가 공병을 구하러 가다 돌아온 일, 21시 30분 막힌 길과 낙오병, 23일 오후 북한강가 진지, 서른여섯 시간 못 잔 포병, 라부아의 표준 방어 진지(경계초소·주 방어선·반궤도차 예비대)와 그의 성품, 17시 45분 일몰과 터커 소령이 미룬 철조망·모래주머니, 해 지기 전 순시, 01시 15분 해병 연대의 호출과 05시 30분 이동 준비, 04시 45분 아침밥, 화장지를 던진 C포대 병사, 05시 20분 래프터리가 본 시계, 호톱 소령, 식당 천막의 총알 구멍과 「Man battle stations!」, 끊긴 전화선, 200고지의 기관총 여섯 정, 히어린 중위와 5번 포, 해틀리 하사, 탄띠를 펴지 못한 화이트 중사, 흰 옷의 중공군을 피란민으로 본 러블 중사, 반궤도차 안의 병사들에게 한 말(원문: I'm scared too. There's nothing wrong with being scared as long as you do your part), 「It's dangerous up here」, 래프터리와의 문답(원문: Are they dead or alive? / Both / don't worry about the dead ones; just take care of the live ones and make every bullet count), 해병 연대와의 무전(원문: You're firing on friendly troops / Those friendly troops are inflicting casualties on my battalion), 제리티의 직접 사격, 해병 전차, 엘더 상사의 물음과 라부아의 대답(원문: We were going to move, but now we'll wait until we secure this position), 로버츠 하사와 미제 톰슨 기관단총을 든 포로(원문: Don't shoot! Don't shoot!), 07시 30분 이동, 전사 4·부상 11·장비 손실 없음, 중공군 시체 179구, 라부아의 마지막 말(원문: Artillery, if it makes up its mind, will set itself up so that it can defend itself from enemy infantry action). 5. 중국쌍옹잡지사, 「规模最大的第五次战役」, 『中国双拥』, 펑파이신문 재게재 2020.10.9, m.thepaper.cn/baijiahao_9507428 — 제9병단의 편성(제20·26·27·39·40군), 좌익 제40군이 30여 킬로미터를 파고들어 미 제24사단·국군 제6사단 일부를 섬멸하고 가평 북쪽에 이르러 동서 분할을 이루었다는 서술. 6. 양영조, 「용문산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Article/E0039489 — 사창리 전투의 결과로 연대장과 일부 참모가 해임되고 송대후 중령이 신임 연대장으로 부임.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장도영 1923년 1월 23일생(한국어 위키백과 「장도영」), 윌리엄 M. 호지 1894년 1월 13일생(영문 위키백과 「William M. Hoge」), 밴 플리트 1892년 3월 19일생(영문 위키백과 「James Van Fleet」), 정일권 1917년 11월 21일생(한국어 위키백과 「정일권」), 쑹스룬 1907년 9월 10일생(중국어 위키백과 「宋时轮」). 라부아, 하인스, 래프터리, 호톱, 터커, 히어린, 해틀리, 화이트, 러블, 엘더, 로버츠, 제리티, 송대후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제6사단의 연대장들과 미국 군사고문단 고문관은 이름이 자료마다 확인되지 않아 역할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공격 시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22일 17시경 제9병단이 공격을 시작했다고, Mossman은 20시 무렵 제60사단이 국군 전선을 쳤다고, Gugeler는 20시에 이미 중공군이 아군 후방 수천 야드에 들어와 있었다고 적었다. 본문에 두 기록을 함께 적었다. [자료 충돌] 소총 손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소총 2,263정, Mossman은 소화기 2,363정으로 적었다. 본문은 백과사전 수치를 따랐다. 나머지 손실 수치는 두 자료가 같다. [자료 충돌] 22일 밤 국군을 친 중공군 — Mossman은 제20군 제60사단(제179연대 선두)으로, 중국 쪽 서술(『中国双拥』)은 국군 제6사단 일부를 섬멸한 부대를 제40군으로, 한국어 위키백과는 제20군과 제40군 제120사단으로 적었다. Mossman은 제40군 제120사단이 22일 밤 해병대 정면만 쳤고, 제118사단은 23일 밤 국군 오른쪽 절반으로 내려왔다고 적었다. 본문은 날짜별로 Mossman을 따르고 중국 쪽 서술은 그들의 주장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수습 병력 — 23일 새벽 2,500명(두 자료 같음), 24일 아침 4,000~5,000명(Mossman, 장도영의 보고), 25일 6,313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시점이 다른 수치로 보고 셋 다 적었다. [재구성] 장도영과 군사고문단 고문관의 대사(배치를 둘러싼 의견 차이는 기록), 제60사단 병사들이 능선을 내려오는 모습, 라부아가 낙오병에게 외친 「멈춰! 여기서 같이 막자!」, 「포병이 왜 삽질을 합니까?」로 시작하는 문답(라부아의 생각은 기록), 사단 통신병의 호출 대사(무선·유선 두절은 기록), 23일 장도영이 군단에 보낸 보고의 문장(「17시까지」라는 내용은 기록), 라부아가 해 지기 전 앞산을 손으로 짚어 보인 몸짓 외의 세부, 「대대장님, 엎드리십시오」의 우리말 표현(원문의 뜻은 기록), 인사계 탁자 앞 병사와 하사관의 대화와 장부의 동그라미, 마지막 문단의 사단 모습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장도영이 그 밤 무엇을 느꼈는지,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같은 날 시작된 임진강·율동·가평의 싸움은 37·38·39화에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