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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14,723자)

화천댐 전투 — 물길을 막아라

1950 · 네오

화천댐 전투, 1951년 4월 8일~5월 1일 — 화천저수지와 북한강, 북쪽부터 화천댐·화천 읍내·구만리 발전소, 아래로 원천리·지촌리·춘천, 동쪽 끝 양구. 4월 8일 자정 수문 개방과 북한강 범람, 9~10일 미 제7기병연대 제2대대의 서쪽 능선 공격, 11일 새벽 제4레인저중대의 저수지 도하와 동쪽 반도 상륙, 22일 한국 해병대 제1연대의 댐 점령과 그날 밤 중공군 제39군의 공격, 24일 철수, 5월 1일 동해의 항공모함 프린스턴에서 날아온 스카이레이더 여덟 대의 어뢰 공격.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1년 4월 8일 일요일 자정, 강원도 화천 동쪽 — 북한강 상류를 가로막은 콘크리트 댐 화천댐(현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간동면) 꼭대기의 수문 기계실.

댐 아래 발전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기술자는 손잡이를 잡기 전에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일본 회사가 1939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해 1944년에 첫 발전기를 돌린 댐이었다. 전쟁이 난 뒤로 댐의 주인은 벌써 여러 번 바뀌었다1. 발전소는 멈춰 있었고, 수문을 끌어 올릴 전동기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2.

기계실에는 중공군 병사 스무 명과 기술자 다섯이 있었다3. 수문 하나는 너비 육 미터, 높이 십팔 미터 남짓한 강철판이었다. 사람 손으로 하나를 끝까지 열려면 열 시간이 걸렸다3.

“전기만 들어오면 이거 십 분이면 끝나오.”

기술자가 말하자 통역을 맡은 병사가 중국말로 옮겼고, 분대장이 짧게 대꾸했다. 통역병이 다시 옮겼다.

“전기는 미국 비행기한테 달라고 하랍니다. 그 사람들이 다 가져갔으니까.”

저수지는 절반쯤 차 있었다. 그들은 밤새 손잡이를 돌려 수문 넷을 끝까지 열고, 여섯을 조금씩 들어 올렸다2. 열린 틈으로 물이 하얗게 쏟아져 북쪽 협곡으로 떨어졌다. 물길은 댐 아래에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다시 남쪽으로 말굽처럼 휘어 춘천(현 춘천시)으로 내려갔다2. 미군 쪽은 뒤에 중공군이 미 기병대를 저수지에서 떼어 놓은 채 물이 차오를 시간을 벌고 있었다고 판단했다2.

*

1951년 4월 9일 월요일 아침, 춘천 북쪽 — 북한강 가의 미 제9군단 공병 부교.

강물은 아침부터 불었다. 미 제9군단장 윌리엄 호그(56) 소장은 며칠 전 미리 부대들을 강가 낮은 땅에서 물려 두었다. 그래서 물에 쓸려 간 사람도 보급품도 없었다2. 공병들은 춘천 위아래에 띄워 둔 부교를 강둑으로 끌어냈다. 더 아래쪽의 부교 하나는 강가로 돌리기 전에 물살에 부서졌다2. 물은 낮이 되기 전에 이 미터 남짓 올라 있었다2.

그날 미국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한 미군 공병은 이렇게 말했다4.

“중공군이 강의 피를 조금씩 빼 주니 오히려 고맙지요. 그렇게 빼 두면 나중에 수문을 다 열어도 물이 그만큼 없을 테니까. 댐을 아예 날려 버리지 않는 한, 저쪽도 이보다 더 나쁘게는 못 합니다.”

호그는 그 말을 그렇게 가볍게 듣지 않았다. 3월 초,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55) 중장은 미리 댐을 폭격해 물을 빼 버릴 생각을 했다. 그때 제8군 공병참모 패스컬 스트롱 대령은 보통 폭탄으로는 그 댐을 무너뜨릴 수 없고, 적도 수문을 여는 것 말고는 별수가 없으니 홍수는 작을 것이라고 보고했다2. 리지웨이는 그 일을 접었다. 4월 초 제9군단 공병은 다르게 셈했다. 저수지가 가득 찼을 때 수문과 발전소 수로를 한꺼번에 열면 북한강이 삼 미터에서 삼 미터 반까지 불어나 춘천 분지 대부분이 잠기고, 군단의 주 보급로가 끊긴다. 댐이 적의 손에 있는 한 그 일은 몇 번이고 되풀이될 수 있었다2. 리지웨이는 군단 경계선을 옮겨 댐을 제9군단 몫으로 넘겼다2.

호그가 떠올린 것은 이틀 전 공수연대에서 떨어져 나와 군단에 붙은 제4레인저중대였다. 특수 훈련을 받은 그 중대가 저수지 쪽으로 몰래 들어가 수문 기계를 못 쓰게 만들고 두세 시간 안에 빠져나오는 기습이었다2. 중대장 도시 앤더슨 대위는 전날 경비행기를 타고 댐 위를 한 바퀴 돌았다3.

“땅이 생각보다 훨씬 험합니다. 배로 건너면 댐에서 한 마일쯤 못 미쳐 내려야 하고요. 그래도 댐을 지키는 진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 제1기병사단장 찰스 파머(48) 준장은 그 일을 레인저중대에만 맡기지 않았다. 댐 바로 아래 험한 땅을 헤치며 올라가던 해리스 대령의 제7기병연대에 넘기고, 레인저중대를 그 연대에 붙였다2. 호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4월 9일, 그는 파머에게 당장 작전을 열라고 명령했다2.

*

같은 날 오후, 화천저수지 서남쪽 — 북한강이 말굽처럼 감싼 서쪽 반도, 댐으로 오르는 유일한 능선 아래.

제7기병연대 제2대대장 존 캘러웨이 중령은 계획을 짤 시간이 없었다. 연대로 들어오는 길은 이웃 미 제2사단 구역에서 갈라져 나온 산길 하나였다. 바위가 튀어나온 곳에서는 지프가 겨우 비집고 지나갔다2. 사단 포병의 105밀리 곡사포는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포병들은 155밀리 곡사포 한 문을 겨우 끌어올려 최대 사거리로 댐을 겨누었다2.

“저 포로 맞힐 수 있겠나?”

“맞히진 못해도 겁은 줄 겁니다. 저쪽도 우리도요.”

F중대가 앞장서서 댐을 내려다보는 454고지까지 능선을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그 고지를 잡으면 레인저중대가 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댐으로 들어가 수문을 닫고 묶어 둘 차례였다2. F중대는 골짜기 길을 건너자마자 남쪽 끝 364고지와 북한강 너머 북서쪽 고지의 토치카에서 날아오는 박격포와 기관총에 묶였다2. 캘러웨이가 부른 공습은 한 번뿐이었고, 불길을 크게 줄이지 못했다2.

첫 교전에서 F중대장 해럴드 그레이 대위가 쓰러졌다3. 그는 다친 병사를 끌어내다가 총에 맞았다5. 중대는 바위 뒤에 엎드려 어두워질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골짜기 남쪽으로 물러났다2.

*

1951년 4월 10일 화요일, 같은 능선.

이튿날 아침 사단의 나머지는 군단 구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제7기병연대만 남아, 제2대대가 같은 능선을 다시 올랐다. 이번에는 G중대가 앞장섰다가 같은 자리에서 북쪽과 북서쪽의 사격에 묶였다2. 안개와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비행기도 뜨지 못했다2. 레인저 쪽 기록은 이날도 F중대가 다시 나섰다가 전사 여섯, 부상 스물일곱을 냈다고 적었다3.

그날 아침 파머의 사단 사령부에 들른 호그는 레인저중대가 공격 앞에 서 있지 않은 것을 알고 화를 냈다3. 그는 두 번의 공격을 성의 없는 시늉으로 보았다2.

“이번에는 진짜로 하라고 해. 시늉 말고, 진짜 공격.”

연대장 해리스는 이미 제3대대를 후방으로 빼려고 모아 두고 있었다. 병사들은 쉴 생각에 짐을 꾸리던 참이었다3. 오후 다섯 시, 호그는 마음을 바꿔 세 번째 공격을 명령했다. 이번에는 레인저중대가 배로 저수지를 건너기로 했다3.

배를 구하는 일이 먼저였다. 사단 공병은 북한강 도하에 쓰려고 상륙 장비를 모아 두었지만, 일부는 이미 춘천 창고로 돌려보냈고 나머지는 사단과 교대하러 들어오는 해병들에게 넘겨준 뒤였다2. 찾아낸 배 스무 척 가운데 열 척은 강 건너편에 있었고, 부교가 걷힌 탓에 트럭은 먼 길을 돌아야 했다3. 출발 시각까지 닿은 것은 합판으로 만든 돌격정 아홉 척과 선외 모터 넷이었다2. 배를 몰 사람도 없었다. 해리스는 연대 안에서 모터보트를 몰아 본 사람을 찾았다2.

“고향에서 보트 몰아 본 사람 손 들어.”

“호수에서 낚싯배 몰아 봤습니다.”

“그럼 오늘 밤엔 네가 함장이다.”

그날 늦게, 중공군은 열어 두었던 수문 몇 개를 닫았다2. 북한강의 물은 천천히 빠지기 시작했다.

*

1951년 4월 11일 수요일 새벽 세 시 사십오 분, 화천저수지 남쪽 기슭의 작은 만.

앤더슨은 레인저 두 소대와 포병·박격포 관측병, 제7기병연대 M중대의 기관총·박격포 사수 스물을 아홉 척에 나눠 태웠다3. 맨 앞 세 척에는 마이클 힐리 중위의 제1소대가, 가운데 세 척에는 앤더슨과 관측병들이, 뒤의 세 척에는 조지프 워터베리 중위의 제2소대가 탔다3.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모터를 켜지 않고 노를 저었다. 사십오 분 뒤, 날이 밝아 올 무렵 배들은 들키지 않고 동쪽 반도에 닿았다3.

힐리는 다섯 명을 데리고 먼저 능선으로 올라갔다. 짙은 안개 속에서 앞쪽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산을 넘어온 제7기병연대 병사들인지 중공군인지 알 수 없었다. 꼭대기에 올라선 순간 솜 넣은 누빈 군복이 보였고, 곧 기관총이 길게 울렸다3. 뒤따라온 무반동총 사수가 기관총 하나를 날렸고, 힐리의 분대는 수류탄으로 또 하나를 없앴다. 중공군은 고지 뒤편으로 내려갔다. 여섯 시 십오 분, 레인저중대는 아직 댐에서 팔백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3.

빈 배 세 척이 돌아가 제임스 존슨 중위의 소대에서 두 분대를 실어 왔다. 이번에는 모터가 걸리지 않아 다시 노를 저어야 했다. 두 분대는 일곱 시에 닿았다3. 부중대장 존 워런 중위는 남은 레인저들과 조선인 노무자 다섯을 탄약과 함께 네 척에 태워 따라 나섰다. 이번에는 모터가 걸렸지만, 상륙 지점 앞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워런은 배를 돌렸다3. 날이 밝은 뒤로 저수지 위에서는 숨을 데가 없었다2.

존슨의 소대가 옆구리의 작은 봉우리로 나아가다 사격에 막혔다. 중공군 쉰에서 예순 명이 달려들었고, 레인저들은 수류탄으로 겨우 밀어냈다. 곧 오른쪽 높은 땅에서 나팔이 울리고 수백 명이 비탈을 내려왔다. 총검과 개머리판이 오가는 싸움 끝에 공격이 멈췄다3. 서쪽 반도에 있던 중공군이 댐 위를 건너 동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2.

앤더슨은 무전기를 잡았다.

“댐까지는 못 갑니다. 철수 허가를 요청합니다.”

“그대로 버텨. 제3대대에서 소총중대 하나가 건너간다.”

I중대는 열한 시쯤 건너기 시작했다2. 배가 모자라 몇 번에 나눠 건넜고, 몇 안 되는 모터마저 대부분 멈춰 노를 저었다2. I중대와 탄약을 진 조선인 노무자들이 오후 한 시 반부터 반도에 닿기 시작했다3. 레인저 위생병 윌리엄 굴스비 하사가 부상병 하나를 업고 상륙 지점으로 내려왔다가, 새로 온 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고지로 올라갔다3. 고지 위의 병력은 삼백 명을 넘었다. 앤더슨은 이번에는 댐까지 갈 수 있다고 믿었다3.

같은 시각, 서쪽 반도의 제2대대는 이번에도 E중대를 앞세웠다가 능선 밑에서 토치카 사격에 멈췄다. 북한강 너머 북서쪽으로 건널 곳을 찾던 A중대 정찰대도 아직 불어난 강물과 사격에 막혔다2. 배가 모자라 제3대대 나머지가 해 지기 전에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해리스는 밤에 중공군이 반도의 두 중대를 덮칠 것을 걱정했다2. 해리스가 앤더슨을 불렀다.

“모두 빼라. 레인저가 먼저 나온다.”

중공군은 물러나는 그들을 쫓아오지 않았다3. 레인저중대는 밤 여덟 시 반에 저수지를 다시 건넜다3. I중대는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배를 오가며 자정이 넘어서야 남쪽 기슭으로 돌아왔다2. 레인저중대에서 두 사람이 전사하고, 한 사람이 이튿날 숨을 거두었으며, 열한 사람이 다쳤다. M중대에서 하나가 전사하고 하나가 다쳤으며, I중대에서 셋이 다쳤다3.

배에서 내린 앤더슨은 어둠 속에서 저수지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조선인 노무자들이 탄약 상자와 보급품을 등에 지고, 철수 명령이 내려진 줄 모른 채 여전히 앞으로 나르고 있었다3. 앤더슨이 그들을 붙잡아 세웠다. 맨 앞의 노무자는 지게를 내려놓지 않은 채 반도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아직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몸짓이었다. 앤더슨은 고개를 저었다. 노무자는 한참 서 있다가 지게를 진 채로 돌아섰다.

호그는 뒤에 실패의 첫째 까닭으로 기습을 잃은 것을 꼽았다. 서두른 계획, 모자란 상륙 장비, 닿지 않는 포병이 그 뒤를 이었다2.

*

1951년 4월 22일 일요일 밤, 화천댐 북쪽 고지 — 미 제7기병연대와 교대한 한국 해병대 제1연대의 진지.

12일 제7기병연대와 교대한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17일 무렵 댐 근처 능선에 전초를 냈다. 18일 북한강을 건너간 해병 정찰대는 화천(현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화천읍) 읍내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남아 있던 중공군 열한 명을 붙잡아 왔다2. 22일 낮, 며칠 전까지 중공군 제39군이 그토록 지키던 화천댐이 싸움 한 번 없이 한국 해병대의 손에 들어왔다2. 중국 쪽 기록은 4월 20일 무렵 지원군이 계획한 철수를 마쳤다고 적었다6.

그날 해 질 녘, 중공군은 전선 전체에서 봄 공세를 시작했다7. 서쪽 사창리(현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에서는 국군 제6사단이 무너지고 있었다. 밤사이 제39군 제115사단이 댐 위쪽의 해병 진지를 뚫고 남서쪽으로 내려가 화천 읍내를 내려다보는 고지를 차지했다2. 중국 쪽 기록은 제39군이 화천 남쪽 원천리(현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까지 나아가 미 해병 제1사단을 북한강 동쪽에 묶어 두었다고 적었다7. 새벽에 미군과 한국 해병대가 반격해 그 돌출부를 지웠다2.

참호 속의 한 해병은 저수지 쪽을 보았다. 댐은 여전히 거기 있었고, 수문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 닫혀 있었다. 24일 동이 틀 무렵 미 해병 제1사단이 남쪽으로 물러나자, 중공군이 다시 화천 읍내와 댐에 들어왔다2. 댐은 또 한 번 주인을 바꾸었다.

*

1951년 4월 30일 월요일, 동해 — 항공모함 프린스턴을 기함으로 한 미 해군 제77기동부대.

제77기동부대 사령관 랠프 오프스티(53) 소장에게 미 제8군의 급한 요청이 날아들었다. 화천댐 수문을 둘 이상 못 쓰게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었다8.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58) 중장은 한국 해병대가 댐을 쥐고 있던 며칠 동안 아무도 수문에 손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수문 두 개만 부수면 수위가 낮아져, 적이 나머지를 열어도 북한강이 크게 불어나지 않을 터였다2.

그날 오후 바로 비행기가 떴다. 제195공격비행대대의 대대장 해럴드 칼슨 소령이 AD 스카이레이더 여덟 대를 이끌었다. 날개 아래에는 2천 파운드 폭탄과 지름 이십구 센티미터의 대형 로켓 ‘타이니 팀’이 달려 있었다. 제193전투비행대대의 F4U 코르세어 다섯 대가 대공포를 누르러 따라붙었다8. 칼슨과 그의 2번기가 먼저 골짜기로 내려가 대공포의 불을 제 쪽으로 끌었고, 코르세어들이 불이 번쩍인 자리를 쳤다8. 폭탄과 로켓이 여러 발 맞았다.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F9F 팬서 제트기가 찍어 온 사진 속 수문은 거의 멀쩡했다8.

함장 윌리엄 갤러리(46) 대령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이 배의 탄약고 깊숙한 곳에는 마크 13형 항공 어뢰 열두 발이 다른 탄약 뒤에 쌓여 있었다8. 미 해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 어뢰를 쏜 적이 없었다8.

“댐을 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에 떠 있지 않을 뿐이지.”

“그 배는 산 사이에 숨어 있소, 함장.”

그날 밤 무장병들은 어뢰를 꺼내 스카이레이더에 달았다. 어뢰가 길어서 동체 아래 속도 제동판의 아래쪽 판을 못 쓰게 묶어야 했다9. 다뤄 본 사람이 거의 없어 손이 더뎠다8. 조종사들은 어뢰가 물에 들어가는 각도와 놓아야 할 속도를 처음부터 다시 셈했다9. 비행단장과 칼슨 말고 어뢰를 떨어뜨려 본 사람은 비행단 전체에 셋 남짓이었다8. 칼슨은 1944년 호위항공모함 너헌타 베이에서 TBM 뇌격기를 몰았다8.

*

1951년 5월 1일 화요일, 화천저수지 동쪽 하늘.

비행단장 리처드 메릭(39) 중령이 맨 앞에 섰다8. 함상에서 그는 독일제 루거 권총과 K-20 사진기, 일곱 배율 쌍안경을 들고 싸움에 나가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날도 그는 파이프를 문 채 무전기와 사진기와 쌍안경을 쉬지 않고 번갈아 잡았다9. 어뢰를 단 스카이레이더는 여덟 대였다. 다섯은 제195공격비행대대, 셋은 제35혼성비행대대 소속이었다. 제192전투비행대대의 코르세어 여덟 대와 제193전투비행대대의 네 대가 대공포를 맡았다8.

저수지 위쪽으로 들어가는 길은 해발 천이백 미터 봉우리 사이였다. 두 대씩밖에 지나갈 수 없었다8. 어뢰는 낮고 느리고 고르게 날아야 제대로 물에 들어갔다. 너무 높으면 어뢰가 물속으로 처박혔고, 너무 낮으면 물 위를 튀었다9. 산자락 사이에 걸린 철선도 조심해야 했다8. 대공포는 전날보다 훨씬 약했다. 코르세어들이 전날 이미 대공포 진지를 두들겨 놓은 덕일 수도 있었다8.

제임스 샌더슨 중위는 그 순간을 뒤에 이렇게 기억했다8.

“우리는 나무 꼭대기 높이로 줄지어 내려갔습니다. 출력을 거의 다 줄였지요.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고도계가 이십삼 미터를 가리킬 때까지 내려가는 동안 마음은 바빴습니다. 댐까지 구백 미터쯤 남았을 때 기수를 살짝 숙였고, 고도계가 십오 미터를 지날 때 투하 손잡이를 단단히 당겼습니다. 비행기가 늘 하던 대로 한 번 들썩였습니다. 짐을 내려놓아 고맙다는 듯이.”

어뢰를 놓은 비행기들은 곧장 기수를 들어 댐 위를 넘었다. 빠져나가는 골짜기 양옆에는 대공포가 늘어서 있었다10. 여덟 발 모두 제대로 떨어졌다. 한 발은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달렸고, 한 발은 터지지 않았다. 나머지 여섯 발이 수문을 때렸다8. 수문 하나가 두 발을 맞고 무너졌고, 다른 하나는 한 발을 맞아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8. 갇혀 있던 물이 그 자리로 쏟아져 협곡으로 떨어졌다. 여덟 대 모두 프린스턴으로 돌아왔다8.

그날 저녁 제195공격비행대대장은 대대 일지에 짧게 적었다8.

“교량 공격 하나, 근접 지원 하나, 무장 정찰 하나, 그리고 댐 어뢰 공격 하나를 내보냄. 어뢰 여덟 발 투하(두 발은 제35혼성비행대대).”

한 젊은 조종사는 어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10.

“그놈들은 아주 까다로운 꼬마 악마들이었어요.”

어뢰를 떨어뜨린 조종사 여덟 명은 모두 수훈비행십자훈장을 받았다. 대대는 이름을 ‘호랑이’에서 ‘댐 파괴자’로 바꾸었다8. 수문을 닫아 물을 모으는 일도, 한꺼번에 열어 강을 불리는 일도 그 뒤로는 사람 손을 떠났다8.

보름 남짓 지난 5월 18일, 메릭은 다른 출격에서 지상 사격에 맞아 돌아오지 못했다. 마흔 살 생일을 열흘 앞둔 날이었다11. 그는 죽은 뒤 해군 십자훈장을 받았다. 훈장 사유에는 화천댐의 공격이 들어 있었다8.

댐은 그 뒤로도 물을 막고 서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이 댐의 발전소는 남한 발전 설비의 열에 여덟을 넘게 맡았다12. 4월 9일 아침 춘천 북쪽에서 부교를 끌어내던 공병들은, 그 물길이 다시는 마음대로 불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료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천수력발전소」, encykorea.aks.ac.kr/Article/E0064899 — 1939년 7월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 착공, 1944년 5월 제1호기·10월 제2호기 준공, 6·25전쟁 중 다섯 차례 주인이 바뀌고 1951년 4월 완전 수복. 2. Billy C. Mossman, 『Ebb and Flow』(25화 출처와 같은 책) 제17장 「Operation Rugged」 354~362쪽, 제18장 376쪽, 제19장 383~384쪽, 제20장 398쪽, 제22장 438쪽 주 2 — 열여덟 개 수문, 저수지 절반, 발전소 정지, 4월 8일 자정 수문 넷 완전·여섯 일부 개방, 조선인 발전소 직원, 기병대를 떼어 놓고 물을 채우려 했다는 판단, 강의 말굽 굽이, 호그의 사전 경고로 피해 없음, 춘천 위아래 부교 철거와 하류 부교 파손, 7피트 상승, 스트롱의 2월 판단과 제9군단 공병의 10~12피트 계산, 경계선 이동, 호그의 레인저 기습 구상(두세 시간), 파머가 제7기병연대에 맡김, 호그의 즉시 개시 명령, 캘러웨이의 산길·105밀리 사거리 밖·155밀리 한 문, F중대·364·454고지·공습 한 번, G중대와 안개, 호그의 「bona fide」 명령, 공병 장비 반납과 배 아홉 척·모터 넷, 모터보트 경험자 모집, 10일 늦게 수문 일부 닫음, 서쪽 반도에서 댐을 건너온 중공군, I중대 열한 시 출발과 모터 고장, E중대·A중대 정찰, 해리스의 철수 판단, 자정 넘어 귀환, 호그가 꼽은 실패 원인, 한국 해병대 제1연대의 12일 교대·17일 전초·18일 포로 열한 명·22일 무혈 점령, 제115사단의 침투와 새벽 반격, 24일 중공군의 읍내·댐 재진입, 밴 플리트의 요청 사유, 30일 폭격. 3. Kenneth Finlayson, 「“That Damned Dam”: The 4th Ranger Infantry Company and the Hwachon Dam」, 『Veritas』 6권 2호(미 육군 특수작전사령부 전사실, 2010), arsof-history.org/articles/v6n2_that_dam_page_1.html — 중공군 병사 스무 명과 북한 기술자 다섯이 수문을 엶, 수문 하나 열 시간, 앤더슨의 항공 정찰과 말(원문: The ground appeared even more rugged than I anticipated … there did not appear to be any enemy positions guarding the dam), F중대장 첫 교전 전사, 10일 F중대 전사 6·부상 27, 호그가 레인저가 앞에 없음을 알고 화를 냄, 제3대대가 짐을 꾸림, 오후 다섯 시 세 번째 공격 명령, 배 스무 척 중 열 척이 강 건너편, 세 시 사십오 분 출발·사십오 분 도하, 힐리·워터베리·존슨·워런·굴스비, 안개 속 누빈 군복과 기관총, 여섯 시 십오 분 팔백 미터(반 마일), 일곱 시 두 분대 도착, 조선인 노무자 다섯과 워런의 회항, 쉰~예순 명 돌격과 나팔·백병전, 오후 한 시 반 증원과 삼백 명, 철수 명령, 여덟 시 반 재도하, 손실, 노무자들이 여전히 탄약을 앞으로 나름. 4. 『The Charlotte News』 1951년 4월 9일 자 전선 기사(올렌 클레멘츠 기사, wjcash.org/WJCash19/Charlotte.News.Articles/4-9-51.htm 편집자 요약) — 중공군의 수문 개방, 미군 공병의 말(원문: the allies were glad that the Chinese were bleeding the river in that manner … they would not have so much water should they open the gates fully … the enemy could not do any worse unless they blew up the dam). 5. 미 전쟁기념물위원회(ABMC) 한국전쟁 명예 명부, 해럴드 앨런 그레이 대위 항목, abmc.gov/korean-honor-roll/278196 — 제7기병연대 제2대대 F중대장, 1951년 4월 9일 화천 전투에서 다친 병사를 구하다 전사, 수훈 십자훈장. 6. 중국어 위키백과, 「抗美援朝第四次战役」(2026년 10월 열람) — 지원군이 4월 20일 철수를 마치고 진지를 쌓기 시작함, 전역 4월 21일 종료. 7. 중국어 위키백과, 「抗美援朝第五次战役」(2026년 10월 열람) — 4월 22일 황혼 전선 전체의 반격, 제39군이 화천 남쪽 원천리 지역으로 나아가 미 해병 제1사단을 북한강 동쪽에 묶음(第39军前出到华川以南原川里地区,将美军陆战第1师隔于北汉江以东不得西援). 8.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 H-Gram 061 「H-061-1: Korea—U.S. Navy Operations, March–July 1951」(2021), history.navy.mil/about-us/leadership/director/directors-corner/h-grams/h-gram-061/h-061-1.html(웹 기록보관소 2025.12.8 사본으로 열람)과 같은 기관 국립해군항공박물관 글 「The U.S. Navy’s “Dambusters” at Hwachon Dam」(2015.5.1) — 4월 30일 오프스티가 받은 제8군의 급한 요청, 칼슨이 이끈 스카이레이더 여덟 대와 코르세어 다섯 대, 2천 파운드 폭탄과 타이니 팀, 칼슨과 2번기가 대공포를 끎, 팬서 사진, 갤러리의 어뢰 제안, Mk 13 열두 발, 2차 대전 뒤 첫 사용, 경험자 셋 남짓, 칼슨의 너헌타 베이 경력, 5월 1일 메릭 지휘, 다섯·셋의 편성, 코르세어 여덟·넷, 봉우리 사이 두 대씩, 철선, 약해진 대공포, 샌더슨의 회고(원문: Down we streamed at tree-top level, throttled back almost to idle … The aircraft responded with its customary jump, giving thanks for the lighter load), 한 발 이탈·한 발 불발·여섯 발 명중, 수문 하나 파괴·하나 작동 불능, 전원 귀환, 대대 일지(원문: One bridge strike, one close air support, an Armed Reco, and a Dam Torpedo strike was (sic) launched. Eight torpedoes dropped (2 by VC-35)), 수훈 십자훈장, 「Tigers」에서 「Dambusters」로, 이후 수위 조절 불가, 메릭의 해군 십자훈장 사유. 9. Robert F. Dorr, 「Skyraiders Torpedo the Hwachon Dam」, Defense Media Network 2012.8.14, defensemedianetwork.com/stories/skyraiders-torpedo-the-hwachon-dam/ — 속도 제동판 아래판 처리, 투하 각도·속도 셈, 너무 높거나 낮을 때의 어뢰, 메릭의 루거·K-20 사진기·쌍안경·파이프(해군 잡지 『The Hook』 인용). 10. 「Flightdeck Friday: Torpedos and OOB Thinking」, Steeljaw Scribe(미 해군 항공 퇴역 장교의 블로그), steeljawscribe.com/?p=756 — 어뢰가 다른 탄약 뒤에 쌓여 있었음, 투하 뒤 급상승과 대공포가 늘어선 이탈 골짜기, 로버트 베넷 소위의 말(원문: The torpedoes were finicky little devils). 11. Military Times 『Hall of Valor』, 리처드 찰스 메릭 항목, valor.militarytimes.com/?p=33277 — 1951년 5월 18일 출격 중 전사, 마흔 살 생일 열흘 전, 해군 십자훈장(사후). 12. 파이낸셜뉴스, 화천댐 기획 기사 2026.6.24, fnnews.com/news/202606241814421687 — 화천댐 수문 16개와 1951년 4월 탈환 전투, 휴전 직후 화천발전소가 남한 발전 설비의 약 83퍼센트였다는 내용. 본문 [자료 충돌] 확인에만 썼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호그 1894년생(영문 위키백과 「William M. Hoge」), 리지웨이 1895년생(31~33화 [나이]와 같은 근거), 파머 1902년생(영문 위키백과 「Charles D. Palmer」), 밴 플리트 1892년생(영문 위키백과 「James Van Fleet」), 오프스티 1897년생(영문 위키백과 「Ralph A. Ofstie」), 갤러리 1904년생(maritimequest.com 「Rear Admiral William Onahan Gallery」), 메릭 1911년생(5월 18일 전사가 마흔 살 생일 열흘 전이라는 Military Times 기록에서 셈). 앤더슨, 캘러웨이, 해리스, 그레이, 힐리, 워터베리, 존슨, 워런, 굴스비, 칼슨, 샌더슨, 베넷, 스트롱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레인저중대가 저수지를 건넌 날 — Finlayson(3번)은 「4월 10일」로 적었으나, 같은 글이 10일 오후 다섯 시에 세 번째 공격이 명령되었다고 적고, Mossman(2번)은 9일 첫 공격·10일 두 번째·11일 새벽 세 번째로 적었다. 본문은 11일을 따랐다. [자료 충돌] 4월 10일 두 번째 공격 — Mossman은 G중대가 앞장섰다고, Finlayson은 F중대가 다시 공격해 전사 6·부상 27을 냈다고 적었다. 본문은 둘 다 적었다. Mossman은 9일 공격에서 엄폐물이 많아 큰 손실은 없었다고 적었다. [자료 충돌] 수문 수 — Mossman과 Finlayson은 수문 열여덟 개, NHHC와 Finlayson의 다른 대목, 파이낸셜뉴스는 열여섯 개(영문 위키백과도 16)로 적었다. 본문은 수를 밝히지 않았다. 4월 8일에 연 수문도 Mossman은 「넷 완전·여섯 일부」, NHHC는 「열여섯 개」로 적었다. 물이 오른 높이는 Mossman·NHHC가 7피트(약 2.1미터), 같은 날 다른 신문 보도는 7.5피트였다. [자료 충돌] 4월 30일 폭격의 결과 — NHHC H-Gram은 사진으로 수문에 큰 피해가 없음이 확인되었다고, Mossman은 수문 하나에 1.8미터(6피트) 구멍이 났다고, 영문 위키백과는 수문 하나에 구멍을 냈다고 적었다. 본문은 「거의 멀쩡했다」로 적었다. [자료 충돌] 5월 1일 어뢰의 결과 — NHHC는 한 발 이탈·한 발 불발·여섯 발 명중으로 수문 하나 파괴·하나 작동 불능, 박물관 글은 수문 둘 파괴·하나 손상, Mossman은 하나 제거·다른 하나 아래쪽 절반 파괴, Steeljaw Scribe는 클랩·잉글리시 중위의 어뢰 두 발이 빗나갔다고 적었고, 대대 사관의 기록은 「수문 2 파괴, 1 손상」이었다고 한다. 한국 쪽 기사(12번)는 「어뢰 두 발」로 적었다. 본문은 NHHC를 따랐다. [자료 충돌] 화천댐의 「완전 수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951년 4월에 완전히 되찾았다고 적었으나, 미 육군 전사는 4월 22일 한국 해병대가 점령한 댐에 24일 중공군이 다시 들어왔다고 적었다. 본문은 미 육군 전사를 따랐다. [자료 충돌] 투하 고도 — 샌더슨의 회고는 75피트에서 수평 비행, 50피트에서 투하로, Dorr는 고도 약 100피트·시속 약 160마일로 적었다. 본문은 샌더슨의 말로만 적었다. [재구성] 4월 8일 밤 기계실 장면에서 기술자가 손에 침을 뱉는 몸짓, 「전기만 들어오면」과 「미국 비행기한테 달라고」의 대화와 통역병, 물이 하얗게 쏟아지는 묘사, 호그가 공병의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는 심리, 「저 포로 맞힐 수 있겠나?」로 시작하는 대화, 호그의 「이번에는 진짜로 하라고 해」(「bona fide」 명령의 뜻을 살린 말), 「고향에서 보트 몰아 본 사람」으로 시작하는 대화, 앤더슨의 무전 문답과 해리스의 철수 명령 문구(철수 요청·대기 지시·철수 명령은 기록), 노무자와 앤더슨이 마주친 뒤의 몸짓(노무자들이 여전히 탄약을 나르고 있던 것은 기록), 한국 해병 한 사람의 시선, 갤러리와 누군가의 「댐을 배라고」 대화, 샌더슨 회고의 우리말 옮김 일부, 마지막 문단의 공병들에 대한 서술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와 북한 기술자 개개인의 이름과 내면은 기록에 없다.

3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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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댐 전투 — 물길을 막아라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