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15,312자)
원산 봉쇄작전 — 포구에는 출구가 없었다
1950 · 네오
1951년 2월 19일 월요일, 함경남도 원산(현 북한 강원도 원산시) 앞바다, 미 해군 구축함 오즈번호의 함교.
사흘 전부터 원산항 앞에는 미 해군 배들이 들어와 나가지 않았다. 2월 16일에 봉쇄가 시작되었고, 이튿날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처음으로 항구를 두들겼다1. 넉 달 전 이 바다에서 소해함 두 척이 기뢰에 가라앉았고, 두 달 전에는 같은 부두에서 피란민 칠천 명과 장병 삼천여 명이 배에 올라 남쪽으로 떠났다1. 이제 원산은 북한의 동해안 철도와 도로가 모이는 매듭이었고, 유엔군은 그 매듭을 바다에서 조이기로 했다.
닷새 앞서 2월 14일, 미 해병과 한국 해병대가 원산항 입구의 작은 섬 여도(현 원산시 려도)에 올랐다2. 섬에는 북한 주민 백 명쯤이 살고 있었다2. 열흘 뒤 한국 해병대는 미 구축함 두 척과 프리깃함 두 척의 엄호를 받아 지키는 사람이 없던 항구 안 섬 신도(현 북한 원산만)에도 올랐다1. 3월 4일까지 원산만의 섬들 대부분이 유엔군 손에 들어갔다2.
3월 31일에는 한국 육군 정보부대가 여도에 초소를 열었다. 이 초소에서 항구의 움직임을 지켜보았고, 밤이면 공작원을 작은 배에 태워 북쪽 해안으로 들여보냈다2. 미 해군도 섬 꼭대기에 관측소를 두고 원산항을 드나드는 모든 것을 적었다. 항구 안에 떨어진 조종사를 건지러 오는 구조 헬리콥터들도 이 섬을 발판으로 썼다2.
그날 오즈번호 함장 찰스 에이커스 중령은 항구를 둘러싼 해안을 쌍안경으로 훑고 있었다. 원산항 남쪽에서 동쪽으로 뻗은 갈마반도(현 원산시 갈마반도)와 북쪽의 호도반도(현 북한 함경남도 금야군)가 항구를 양팔로 감싸고 있었고, 그 산기슭마다 북한군 해안포가 숨어 있었다.
“섬광, 우현 해안!”
견시병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물기둥이 배 옆에 섰다. 두 발째는 갑판에 떨어졌다. 그날 오즈번호는 해안포탄 두 발을 직접 맞았고 몇 발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1. 포술장은 오 인치 포를 해안으로 돌렸고, 함교에서는 속력을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같은 날 무전실에 다른 소식이 들어왔다. 항공모함 밸리포지호에서 뜬 조종사 한 명이 원산 앞바다에 떨어져 구명보트에 매달려 있었다. 그가 떠 있는 곳은 기뢰밭 한가운데였다1.
“구축함으로는 못 들어갑니다. 배 밑바닥이 기뢰를 건드립니다.”
“그럼 모터보트를 내려. 보트는 바닥이 얕다.”
에이커스는 모터보트를 내려 보냈다. 보트의 수병들은 뱃전에 엎드려 물속을 살피며 천천히 기뢰밭으로 들어갔고, 조종사를 건져 돌아왔다1. 흠뻑 젖은 조종사가 담요를 두르고 갑판에 올라오자 수병 하나가 말했다.
“기뢰밭에서 낚시하신 분은 처음 봅니다. 뭐 좀 잡으셨습니까?”
“감기.”
*
1951년 5월 20일 일요일, 원산 앞바다, 미 해군 전함 뉴저지호.
뉴저지호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안을 향해 십육 인치 주포를 쏜 날이었다1. 전함이 원산만 바깥에서 포탑을 돌릴 때마다 갑판의 수병들은 귀를 막았고, 주포가 터질 때마다 함교 유리창이 떨었다.
해안포는 그 큰 배를 놓치지 않았다. 북한군 포탄 한 발이 제1포탑에 맞았다. 한 사람이 전사하고 둘이 크게 다쳤다3. 미국 전쟁기념물위원회 명부에는 수병 로버트 허먼 외스터빈트가 다음 날인 5월 21일 왼쪽 가슴에 파편을 맞고 숨졌다고 적혀 있다4. 뉴저지호가 한국전쟁에서 입은 전투 사상자는 이날의 사상자가 전부였다3.
이튿날 밤부터는 납작한 상륙함 둘이 항구 앞으로 다가왔다. 갑판에 로켓 발사대를 빼곡히 세운 로켓 상륙함이었다. 5월 21일과 22일, 두 배는 삼십오 분 동안 로켓 사천구백세 발을 해안에 쏟아부었다. 미군은 이 작전을 ‘불덩이 작전’이라 불렀고, 6월부터 9월까지 같은 배들이 쏜 로켓은 만 이천구백스물네 발이었다1. 그래도 해안포는 다음 날 다시 쏘았다.
원산의 바다는 포탄만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6월 12일, 동해안에서 항공모함을 호위하던 미 구축함 워크호가 어뢰인지, 기뢰밭에서 떨어져 나와 떠다니던 기뢰인지 모를 것에 왼쪽 뱃전을 맞았다. 스물여섯 명이 전사하고 마흔 명이 다쳤다. 이 전쟁에서 미 해군 배 한 척이 한 번에 입은 가장 큰 인명 피해였다1.
두 달 뒤 7월 17일, 원산 앞바다에서는 미 해군 수병들이 ‘톱날 전투’라고 부른 싸움이 벌어졌다. 미 구축함들이 날마다 항구를 쏘아 대자 북한군이 유난히 거센 포격으로 대답한 날이었다. 구축함 오브라이언호, 블루호, 앨프리드 A. 커닝햄호는 네 시간 반 동안 이천삼백삼십육 발을 쏘며 반도의 포대들과 맞섰다1.
“포대 하나 잠잠해졌습니다!”
“다른 데서 또 쏜다. 저놈들은 굴 속에 포를 넣어 두고 쏠 때만 끌어낸다.”
그해 여름 원산만 섬들에는 영국 해병대도 들어왔다. 영국 해병 제41독립특공대의 선발대, 피어스 대위의 ‘찰리 부대’가 7월 1일 길을 떠났다. 천막 열여섯 동, 상륙정 두 척, 카누 두 척, 열나흘 치 식량이 그들 짐의 전부였다5. 여도는 북한군 전선에서 백 킬로미터쯤 뒤, 적의 항구 안에 박힌 섬이었다5. 8월 4일 영국 해병들은 항구 남쪽 황토도(현 원산시 황토도)에 박격포를 걸었다1.
관측병들은 사람이 사는 섬과 비어 있는 섬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 함포를 불렀다. 그 가운데 항구 안 작은 섬 우미도(현 북한 원산만)는 칠십육 밀리미터 대전차포 포대에서 삼백 야드, 이백칠십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그 포대가 유엔 함정에 불을 뿜으면 구축함들은 속력을 올려 내달리며 되쏘았다. 영국 해병들은 그 춤 같은 맞대응을 ‘전쟁 춤 작전’이라 불렀다5. 미 해군 배에는 공식으로 술이 없었다. 그래도 습격이 잘 끝난 밤이면 군의관 약장에서 ‘의료용 브랜디’가 나왔다5.
“의료용이라니, 어디가 아프다고 적습니까?”
“살아 돌아온 병. 그거 아주 위험한 병이야.”
대원들은 카누를 저어 여러 차례 호도반도로 건너갔다. 8월 30일, 그곳에 오른 순찰대가 북한군과 맞부딪쳐 하우드 중위와 반스 하사가 전사했다5. 비슷한 무렵 B분대의 상륙정은 항구 안 섬 모도(현 북한 원산만) 앞에서 기관이 멎고 바람에 밀려 갈마반도 끝 갈마각 해안에 얹혔다. 데이 중사와 대원 넷이 포로가 되었다5. 북한군은 한국 해병대가 지키던 황토도를 기습해 수비대를 밀어냈고, 영국 해병 월터 중위가 대원들을 이끌고 섬을 다시 찾았다5.
그해 8월 원산 봉쇄선에는 네덜란드 구축함 판할런호도 미 순양함 톨레도호, 구축함 호프웰호·울먼호와 나란히 서서 항구의 군사 목표를 쏘았다6. 대열이 바뀌어도 원산 앞바다에는 늘 구축함 전대가 있었다. 전대를 이끄는 사령은 교대할 때마다 앞 사람에게서 열쇠 하나를 물려받았다. 열쇠에는 ‘영원한 번영의 만’과 ‘원산 시장’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6. 영흥만이라는 이름의 한자를 그대로 옮긴 글귀였다.
“축하하네. 오늘부터 자네가 원산 시장이야.”
“시민들이 저를 반기겠습니까?”
“반기지. 날마다 대포로 인사를 보내 주지 않나.”
*
1952년 6월 13일 금요일 저녁, 여도.
해군 수륙양용 건설대대 제1대대의 조지 분견대 일흔여섯 명은 섬을 가로질러 활주로를 깔고 있었다. 지휘관은 T. E. 로 대위였다7. 원산 상공에서 대공포에 맞은 함재기들이 연료가 떨어지거나 고장이 나서 항구 안 바다에 줄줄이 내려앉고 있었다. 미 해군은 다친 비행기가 내려앉을 비상 활주로를 적의 항구 안 섬에 깔기로 했다2. 리처드 워가 중령과 제임스 램프 중위가 활주로를 놓자고 건의했고, 브리스코 제독이 결정했다. 오백만 달러를 들여 비행기 천만 달러어치를 건진다는 셈이었다7. 분견대는 6월 3일 일본에서 상륙함 LST-692에 장비를 싣고 떠났다. 섬에 닿자 상륙함은 뱃머리로 둑길을 해변까지 밀어붙였고, 불도저와 트럭이 그 위로 곧장 굴러 내렸다7.
평평한 땅은 섬에 하나뿐이던 논이었다. 건설대원들은 그 논을 메우고 다져 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활주로를 냈다7. 바위를 깨는 착암기는 바퀴 달린 압축기에 매달려 돌았고, 열여덟 인치를 뚫는 데 네 시간이 걸렸다. 처음 열이틀 동안 그들은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했다7.
그날 저녁 여덟 시 십오 분, 육지 쪽 포대가 섬을 쏘기 시작했다. 십오 분 동안 포탄 스물한 발이 떨어졌다7. 불도저 운전병들은 참호로 뛰어들었다가 포성이 멎자 다시 기계에 올랐다.
“한 시간 늦어졌다. 오늘은 한 시간 더 한다.”
그들은 정말로 한 시간을 더 일했다7. 6월 21일에는 백오십오 밀리미터 포탄 마흔한 발이 섬 기슭에 매어 둔 작은 배들 사이에 떨어졌다. 건설대원 가운데 다친 사람은 없었다7. 6월 15일에 너비 이십사 미터, 길이 사백팔십여 미터로 절반이 깔렸던 활주로는 나중에 너비 육십 미터로 넓어졌다7. 6월 하순, 길이 칠백삼십 미터의 활주로가 끝났다2. 미 극동 해군 사령관 로버트 브리스코(53) 중장의 이름을 따서 ‘브리스코 비행장’이라 불렀다2.
얼마 뒤 비 오는 오후, 항공모함 프린스턴호의 제193전투비행대대 코세어 일곱 대가 함흥 쪽에서 실종 조종사를 찾다가 연료가 바닥나 원산 쪽으로 돌아왔다. 여도 무전소가 불렀다.
“스테이크 저녁 준비됐다.”
일곱 대는 두 시 반 무렵 차례로 섬에 내렸다. 브리스코 비행장에 처음 내린 비행기들이었다. 건설대원들은 그날 저녁 세 대에 기름을 넣어 프린스턴호로 돌려보냈고, 나머지 넷은 이튿날 아침에 보냈다7. 그 전까지 원산 상공에서 다친 조종사에게는 길이 둘뿐이었다. 적의 땅에 내리거나, 바다에 내리거나. 조종사들은 그것을 ‘중국 용과 깊고 푸른 바다’ 사이의 선택이라고 불렀다7.
원산 앞바다의 해안포는 해가 갈수록 늘었다. 1952년 8월 10일, 구축함 바턴호와 자비스호가 호도반도 앞을 지나자 이백오십 문쯤 되는 포가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바턴호에서 한 사람이 전사했다1. 10월 21일에는 호위구축함 루이스호가 칠십오 밀리미터 포탄을 맞았다. 포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보일러실의 증기관을 뚫었고, 뿜어져 나온 증기에 여섯 명이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한 명이 끝내 숨졌다1. *
1952년 10월 2일 목요일 오후 네 시 무렵, 함경북도 성진(현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 앞바다, 캐나다 해군 구축함 이로쿼이호.
원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백오십 킬로미터쯤 올라간 바다였다. 이로쿼이호는 두 시간 가까이 성진 근처 철도 굴을 쏘고 있었다. 소련에서 내려오는 보급품이 그 굴을 지나 남쪽으로 갔고, 북한군 보수대는 무너진 굴을 밤마다 다시 열었다8. 함장은 윌리엄 랜디모어(34) 중령이었다9.
사격을 멈춘 이로쿼이호가 천천히 바다 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배가 옆구리를 해안에 완전히 내준 순간, 해안포가 불을 뿜었다8. 하사관 식당에서 탄약고의 포탄을 위로 올려 주던 피터 페인은 함내 방송을 들었다.
“경보, 좌현 수상, 포격!”
포탄 한 발이 B포 갑판에 떨어졌다. 존 퀸 소령과, 사 인치 포탄을 품에 안고 있던 장전수 엘번 베이키(19) 수병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8 10. 또 한 발은 장전수 월리 버든의 두 다리 사이 갑판을 뚫었다. 버든은 두 다리를 잃고 그 구멍으로 떨어졌다8. 이로쿼이호의 삼 인치 쌍열포와 보포스 대공포가 반격해 해안포를 잠재웠다. 고데와 조두앵 두 수병이 크게 다쳤고 여덟 명이 파편에 맞았다8.
버든은 다섯 시간쯤 더 살았다. 그는 함장을 찾았다8.
“함장님, 바다에 묻지 말아 주십시오.”
랜디모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쿼이호는 죽은 사람들과 중상자들을 일본으로 가는 미 해군 유조선에 옮겨 싣고, 갑판에서 짧은 추도식을 올린 뒤 다시 성진 앞바다로 돌아갔다. 이튿날 이로쿼이호는 같은 만에 다시 들어가 한 시간 반 동안 전투 배치를 서며 정찰기의 도움을 받아 북한군의 주 포대를 부쉈다8. 퀸과 베이키와 버든은 일본 요코하마 근처의 영연방 전쟁묘지에 군의 예를 갖추어 묻혔다8. 버든의 바람대로 바다가 아니라 땅이었다. 이 전쟁에서 적의 공격으로 사람을 잃은 캐나다 군함은 이로쿼이호 하나뿐이었다9.
같은 바다에서 캐나다 구축함들은 다른 싸움도 하고 있었다. 1952년 7월, 미 구축함 올렉호가 두 주일 동안 열차 둘을 부순 뒤 유엔 함정들 사이에 ‘열차 사냥꾼 클럽’이 생겼다. 규칙은 하나였다. 기관차를 부숴야 한 대로 친다9. 캐나다 구축함 수호의 포수들은 굴 다섯 개 사이에 선 화차들을 산산이 부수었다. 기관차가 살아남았고, 수호는 한 대도 인정받지 못했다9.
“화차가 몇 칸인데 영입니까?”
“기관차 머리를 가져와. 꼬리는 셈에 안 든다.”
10월 28일, 존 보비 소령의 크루세이더호가 동해안에서 화차 열세 칸을 단 열차를 기관차째 부수고 클럽에 들었다11. 밤에는 불을 끄고 해안을 따라 미끄러지듯 다니며 기적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나면 조명탄을 쏘아 해안을 밝혔고, 포수들은 열차가 굴에 닿기 전에 쏘아야 했다9. 구축함 휴런호의 대니얼 켄드릭은 그 밤들을 그렇게 기억했다9. 수호의 켄 켈보는 미리 장전해 둔 포가 수평으로 내려와 ‘쿵, 쿵’ 울리며 열차를 날려 버렸다고 말했다. 쏘고 나면 곧바로 빠져나와야 했다. 육지의 해안포가 끌려 나올 차례였다9. 1953년 4월, 크루세이더호는 스물네 시간 사이에 열차 셋을 부수었다. 둘은 서로 반대쪽으로 달리던 열차였고 한꺼번에 잡았다9. 크루세이더호는 모두 네 대를 잡아 이 전쟁에서 열차를 가장 많이 부순 배가 되었다11. 5월 26일 밤 열한 시 이십 분 무렵에는 하이다호가 두 번째 열차의 맨 앞 기관차 한가운데를 맞혔다. 배가 앞뒤로 흔들리는 가운데 맞힌 포수 짐 윌슨은 ‘솔직히 꽤 대단한 일’이었다고 했다9. 사흘 뒤 다른 열차는 화차를 떼어 놓고 기관차만 굴 속으로 달아났다9. 클럽이 공식으로 센 열차는 스물여덟 대였고, 그 가운데 여덟 대가 캐나다 구축함 세 척의 몫이었다9.
*
1953년 2월 14일 토요일, 여도.
1월 2일부터 북한군 포대는 유엔군이 차지한 섬들을 겨냥해 큰 포격을 시작했다. 주로 맞은 섬은 황토도와 여도였다1. 섬의 한국 해병들과 미 해병 연락반은 바위를 파고 지은 엄체호 안에서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셌다. 여도의 시설은 섬의 지형을 방패로 삼도록 지어져 있었다2.
“오늘은 몇 발째야?”
“세다가 잊어버렸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셀까요?”
“그만둬. 저쪽이 우리보다 셈을 잘한다.”
2월 14일의 포격은 섬의 지휘소를 부수고 바다와 뭍을 오가는 수륙양용 트럭 한 대를 날려 보냈다. 미 해병 한 명을 포함해 두 사람이 전사하고 아홉 명이 다쳤다. 이 봉쇄 동안 북한군 포병이 섬의 유엔군 지상 병력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날이었다1. 4월 한 달 동안 북한군은 봉쇄선의 배들에 이천 발 넘게, 섬들에 천 발 넘게 쏘았다1. 7월 7일에는 호도반도의 포대가 봉쇄선에 삼백 발 넘게 쏘았고, 미 해군 배들은 팔백팔십 발로 되갚았다1.
*
1953년 7월 27일 월요일 밤, 원산 앞바다, 미 해군 중순양함 세인트폴호.
보름 전인 7월 11일, 세인트폴호는 원산에서 해안포탄 한 발을 맞았다. 이 배가 해안포에 직접 맞은 것은 그때 한 번뿐이었다. 다친 사람은 없었고 삼 인치 대공포 한 문이 부서졌다12. 7월 23일에도 백오십오 밀리미터 포탄 열두 발이 배에서 십 미터에서 오십 미터 떨어진 물에 떨어졌다1. 고참 수병들은 한 해 전 1952년 4월 21일을 기억했다. 원산과 청진을 공격하던 중 앞쪽 팔 인치 포탑에서 장약에 불이 붙어 서른 명이 죽은 날이었다12. 적의 포탄이 아니라 자기 포탑의 불이 그 배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데려갔다.
그날 정전협정이 서명되었고, 총성과 포성은 밤 열 시에 멎게 되어 있었다12. 세인트폴호의 포술장은 시계를 보며 마지막 표적을 받았다. 포탑의 장전수들은 오른 팔뚝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열 시까지 몇 분 남았나?”
“이 분입니다.”
“그럼 한 번 더.”
아홉 시 오십구 분, 세인트폴호는 마지막 사격을 했다. 이 전쟁에서 바다 위의 배가 쏜 마지막 포탄이었다12. 일 분 뒤 원산만은 조용해졌다. 갈마반도의 포대도, 호도반도의 포대도 더는 쏘지 않았다.
봉쇄는 팔백육십일 일 동안 이어졌다1. 그 사이 원산 앞바다에서 해안포에 맞은 미 해군 배는 서른 척이 넘었지만, 해안포에 가라앉은 배는 없었다3. 봉쇄선에는 미국 배만 있지 않았다. 영국 해병이 섬에 올랐고 캐나다와 네덜란드 구축함이 드나들었다. 1951년 1월 양양(현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앞바다 눈보라 속에서 좌초해 잃은 태국 프리깃함 프라새호의 이름은, 그해 10월 미국이 넘겨준 새 프리깃함이 물려받았다13.
8월 1일 저녁, 유엔군은 여도에서 마지막 병력을 빼냈다2. 브리스코 비행장의 활주로는 논이었던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한국 해병대와 유엔군이 이 년 반 지킨 원산만의 섬들은 그렇게 비었다. 마지막 상륙정이 여도를 떠날 때 원산항 쪽에서는 포탄이 한 발도 날아오지 않았다.
사료 출처
1. 영문 위키백과, 「Blockade of Wonsan」(2026년 10월 열람;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Korean War Chronology』 각 시기 편과 FAQ 82를 인용) — 2월 16일 봉쇄 개시와 팔백육십일 일, 2월 17일 첫 포격, 1950년 10월 12일 파이럿·플레지호 침몰, 12월 9일 원산 철수(피란민 7,009명·장병 3,384명), 2월 19일 오즈번호(함장 Charles O. Akers 중령) 두 발 피격과 기뢰밭 속 밸리포지호 조종사 모터보트 구조, 2월 24일 한국 해병대의 신도 점령(구축함 2·프리깃 2 엄호), 5월 20일 뉴저지호의 첫 해안 포격, 5월 21~22일 「Operation Fireball」(로켓 상륙함 두 척, 35분 4,903발, 6~9월 12,924발), 6월 12일 워크호 어뢰 또는 부유 기뢰 피격(전사 26·부상 40, 미 해군 최대 단일 피해), 7월 17일 「Battle of the Buzz Saw」(오브라이언·블루·앨프리드 A. 커닝햄, 4시간 반 2,336발), 8월 4일 영국 해병의 황토도 박격포 설치, 1952년 8월 10일 호도반도 약 250문의 바턴·자비스호 포격(바턴호 1명 사망), 10월 21일 루이스호 75밀리 불발탄과 증기 폭발(즉사 6·치명상 1), 1953년 1월 2일 황토도·여도 대포격 개시, 2월 14일 포격(미 해병 포함 2명 사망·9명 부상, 여도 지휘소 손상·수륙양용 트럭 1대 파괴, 섬의 유엔 지상군에 대한 가장 큰 피해), 4월 봉쇄선에 2,000발·섬에 1,000발 이상, 7월 7일 호도반도 300발 이상과 880발 응사, 7월 23일 세인트폴호 주변 155밀리 포탄 열두 발, 해안포 피격 함정과 봉쇄의 목적. 2. 영문 위키백과, 「Ryŏdo」(2026년 10월 열람) — 1951년 2월 14일 미 해병·한국 해병 여도 상륙, 주민 약 100명, 3월 4일까지 원산만 섬 대부분 점령, 3월 31일 한국 육군 정보부 초소(정보 수집·공작원 침투), 미 해군 관측소, 그리어 카운티호 구조 헬리콥터의 섬 이용, 지형을 방패로 삼은 시설, 동해안 도서방위사령부와 약 300명 수비대, 함재기 손실과 비상 활주로의 필요, 1952년 6월 9일 수륙양용 건설대대 제1대대 78명 도착·6월 25일 2,400피트(약 730미터) 활주로 완공과 브리스코 비행장 명명, 1953년 8월 1일 저녁 여도 철수 완료, 오늘날 원산시의 한 동. 3. 영문 위키백과, 「List of U.S. Navy ships sunk or damaged in action during the Korean War」(2026년 10월 열람) — 1951년 5월 20일 뉴저지호 원산 해안포 피격과 사상자 4명, 1951~1953년 원산·호도반도 해안포 피격 함정(서른 척 넘는 배가 여러 번 맞았고 목록에 해안포로 침몰한 배는 없음). 미 해군 『Dictionary of American Naval Fighting Ships』 「New Jersey (BB-62)」 항목(ibiblio.org/hyperwar 게재본) — 제1포탑 피격, 전사 1·중상 2, 한국전쟁 중 유일한 전투 사상자. 4. 미국 전쟁기념물위원회(ABMC) 한국전쟁 명부, 「Robert Herman Oesterwind」(abmc.gov/decedent-search/oesterwind%3Drobert) — 5월 21일 왼쪽 가슴 파편상으로 사망. 원 페이지가 열리지 않아 검색 결과에 실린 명부 내용으로만 확인했다. 5. Royal Marines History, 「Woson Forward Operating Base」(royalmarineshistory.com/post/woson-forward-operating-base) — 제41독립특공대 「Charlie Force」(Capt F R D Pearce) 1951년 7월 1일 출발과 짐, 여도가 전선에서 약 60마일 뒤, 호도반도 카누 상륙 여섯 차례와 8월 30일 Lt Harwood·Sgt Barnes 전사, B분대 상륙정이 모도 앞에서 고장 나 갈마각에 얹히고 TSM Day와 넷이 포로가 됨, 한국 해병대 황토도 수비대가 기습에 밀려나고 Lt J R H Walter가 재점령, 우미도 관측소와 300야드 떨어진 76밀리 대전차포 포대, 「Operation WAR DANCE」, 공식 금주인 미 해군의 「의료용 브랜디」(부록 B), 12월 22~23일 한국 해병대에 인계. 6. USS Hopewell(DD-681) 승조원 모임, 「Cruise History Korean War '51」(oocities.org/hopewell_1951/History51cruise.htm) — 1951년 8월 호프웰·톨레도·울먼과 네덜란드 구축함 판할런(Van Galen)의 원산 포격, 「Mayor of Wonsan」 칭호와 교대하는 구축함 전대 사령이 물려받은 도시 열쇠(원문: The Bay of Eternal Prosperity, The Mayor of Wonsan), 원본은 휴전 뒤 아나폴리스 해군사박물관으로. 비공식 승조원 기록이다. 7. Steve Karoly, 「Operation Crippled Chick」, WW2 Combat Engineers 게시판 재게재(2007.8, ww2combatengineers.com/community/korean-war/operation-crippled-chick-korea/) — ACB 1 조지 분견대(Lt T.E. Rowe, 준사관 1·상사 6·수병 69), Lt. Col. Richard G. Warga·Lt. James S. Lampe Jr.의 건의와 브리스코의 결정, 1953년 해군 발표의 500만 달러로 1,000만 달러어치 항공기 구제, 6월 3일 LST 692 출항, 상륙함 뱃머리로 둑길을 밀어붙임, 섬에 하나뿐이던 논을 메움, 6월 15일 50% 완성(폭 80피트·길이 1,600피트)과 뒤의 폭 200피트, 섬을 가로지르는 활주로, 착암기와 18인치 4시간, 처음 12일 하루 16시간, 6월 13일 20시 15분~30분 21발과 한 시간 연장 작업, 6월 21일 155밀리 41발과 무사상, 6월 26일 완공, VF 193 코세어 일곱 대(프린스턴호)의 첫 비상 착륙·「Steak for dinner」 무전·오후 두 시 반·세 대는 그날 저녁, 넷은 이튿날 아침 귀함, 「the Chinese Dragon and the deep blue sea」. 8. Legion Magazine, 「HMCS Iroquois damaged in Korea」(legionmagazine.com/hmcs-iroquois-damaged-in-korea/) — 1952년 10월 2일 성진 부근 철도 굴 두 시간 포격, 오후 네 시 무렵 바다 쪽으로 돌 때 피격, Peter Fane과 함내 방송(원문: Alarm, surface port, gunfire), LCdr John Quinn·AB Elburne Baikie 즉사, Wally Burden이 두 다리를 잃고 다섯 시간 뒤 사망·바다에 묻지 말아 달라고 Landymore 함장에게 부탁, AB J.A. Gaudet·E.M. Jodoin 중상과 여덟 명 파편상, 미 유조선 이송과 추도식, 이튿날 정찰기 도움으로 주 포대 격파, 요코하마 근처 영연방 묘지 안장. 9. Legion Magazine, 「Trainbusting Canadians: busting records in Korea」(legionmagazine.com/trainbusting-canadians-busting-records-in-korea/) — 1952년 7월 올렉호와 클럽의 시작, 기관차 규칙, 수호의 화차 파괴 불인정, 야간 소등 항해·기적 소리·조명탄, 크루세이더호 1953년 4월 24시간 세 대(반대 방향 두 대 동시), 하이다호 5월 26일 밤 11시 20분 무렵 두 번째 열차, 사흘 뒤 화차를 떼고 굴로 달아난 열차, 공식 28대 중 캐나다 8대, 이로쿼이호가 적의 공격으로 사상자를 낸 유일한 캐나다 함정. 영문 위키백과 「William Landymore」 — 1916년생, 1951년 10월~1953년 10월 이로쿼이호 함장. 10. For Posterity's Sake(캐나다 해군 기념 사이트) 추모 면, 「Elburne Roland Baikie」(forposterityssake.ca/CTB-BIO/MEM003524.htm) — 1931년 10월 25일 해밀턴 출생, 1952년 10월 2일 이로쿼이호에서 전사, 요코하마 전쟁묘지. 원 페이지 접속이 끊겨 검색 결과에 실린 내용으로만 확인했다. 11. 캐나다 해군, 「HMCS Crusader」 함정사(canada.ca/en/navy/services/history/ships-histories/crusader.html) — 1952년 6월~1953년 6월 첫 파견, 열차 네 대로 한 척 최다. For Posterity's Sake, 「HMCS Crusader Operational Summary」 — 1952년 10월 28일 동해안 13량 열차 격파로 클럽 가입, 함장 LCdr John H. G. Bovey(1952.4~1953.7). 12. 미 해군 『Dictionary of American Naval Fighting Ships』 「Saint Paul (CA-73)」(ibiblio.org/hyperwar/USN/ships/dafs/CA/ca73.html) — 1952년 4월 21일 원산·청진 공격 중 앞쪽 8인치 포탑 장약 화재와 30명 사망, 1953년 7월 11일 원산에서 유일한 해안포 직격(무사상, 삼 인치 대공포 손상), 7월 27일 21시 59분 마지막 사격(원문: firing the last round shot at sea in the war), 정전 발효 22시. 13. 영문 위키백과, 「Thailand in the Korean War」·「HMIS Sind」(2026년 10월 열람) — 프라새호가 1951년 1월 7일 양양 부근에서 눈보라와 레이더 고장 속에 좌초, 인양 실패 뒤 파괴, 1951년 10월 미 프리깃 갤럽호(PF-47)를 넘겨받아 같은 이름을 붙임.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로버트 브리스코 1897년생(영문 위키백과 「Robert P. Briscoe」), 윌리엄 랜디모어 1916년생(영문 위키백과), 엘번 베이키 1931년생(For Posterity's Sake 추모 면, 검색 결과로만 확인). 찰스 에이커스, 로버트 허먼 외스터빈트, 피어스, 하우드, 반스, 데이, 월터, T. E. 로, 피터 페인, 존 퀸, 월리 버든, 가스데, 조댕, 존 보비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봉쇄가 끝난 날 — 위키백과와 USS 테일러호 승조원 사이트는 1953년 7월 27일, 미 해군연구소 2020년 글은 7월 28일로 적었다. 정전 발효가 27일 22시여서 날짜가 갈린다. 본문은 27일 밤을 따랐다. [자료 충돌] 여도 상륙 날짜 — 위키백과 「Ryŏdo」와 한국 해병대 관련 글은 2월 14일, 위키백과 「Blockade of Wonsan」은 2월 24일 신도 점령만 적었다. 두 섬의 날짜로 보고 둘 다 적었다. [자료 충돌] 브리스코 비행장 완공일 — 위키백과는 6월 25일, Karoly는 6월 26일(분견대는 27일 철수)로 적었다. 본문은 「6월 하순」으로만 적었다. 건설대원 수도 위키백과 78명, Karoly 76명(준사관 1·상사 6·수병 69)이다. 본문은 Karoly의 76명을 따랐다. 코세어 일곱 대가 처음 내린 날짜는 Karoly 글에 사진 설명으로 7월 15일이 나오나 본문 서술과 맞는지 확인하지 못해 「얼마 뒤」로 적었다. 브리스코는 1952년 1월 제7함대 사령관, 6월부터 극동 해군 사령관이었고, 활주로가 끝난 때의 계급은 위키백과가 「Admiral」, Karoly가 「Vice Adm.」으로 적었다. 본문은 중장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뉴저지호 피탄 위치 — 미 해군 함정사전과 뉴저지주 도서관 기록은 제1포탑, 한 함정 기념 책자는 뒤쪽 포탑 근처로 적었다. 외스터빈트의 이름도 Oesterwind(ABMC)·Osterwind(함정 소식지)로 갈린다. 본문은 함정사전과 ABMC를 따랐다. [자료 충돌] 해안포에 맞은 배의 수 — 미 해군 피격 목록에 원산 일대 피격 기록이 마흔 건 넘게 있으나 같은 배가 여러 번 맞은 경우를 빼면 서른몇 척이다. 본문은 「서른 척이 넘었다」로 적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2021년 기념 기사도 많은 배가 맞았으나 가라앉은 배는 없었다고 적었다(원 페이지 접속 실패, 검색 요약으로 확인). [자료 충돌] 크루세이더호의 열차 수 — 캐나다 해군과 Legion Magazine은 넷, 군사사 위키는 다섯. 본문은 넷을 따랐다. 버든의 이름도 캐나다 전쟁기념 명부 Wallis McBurnie Burden, Legion Magazine Wally Burden으로 갈린다. [자료 충돌] 황토도 기습의 날짜 — 영국 해병대 사료는 날짜를 적지 않았다. 본문은 1951년 여름 영국 해병대 장면 안에 두었다. [재구성] 「섬광, 우현 해안!」과 오즈번호 함교의 대화, 모터보트 수병들이 뱃전에 엎드려 물속을 살피는 모습, 두 반도가 항구를 양팔로 감싼다는 묘사과 「감기」 농담, 불덩이 작전 다음 날 해안포가 다시 쏘았다는 대목, 우미도 장면의 「의료용이라니」로 시작하는 대화(브랜디는 기록), 1953년 여도 엄체호에서 포탄을 세는 장면과 「오늘은 몇 발째야?」로 시작하는 대화, 뉴저지호 갑판에서 귀를 막는 수병들과 떨리는 유리창, 고참 수병들이 1952년 4월의 포탑 화재를 기억하는 대목(화재는 기록), 톱날 전투의 대화, 「원산 시장」 열쇠를 넘겨주는 대화(칭호와 열쇠는 기록), 여도 건설대원의 말 「오늘은 한 시간 더 한다」(한 시간 연장은 기록), 불도저 운전병들의 몸짓, 이로쿼이호의 「함장님, 바다에 묻지 말아 주십시오」(부탁의 내용은 기록, 말투는 재구성)와 랜디모어가 고개를 끄덕인 몸짓, 「화차가 몇 칸인데 영입니까?」로 시작하는 대화(규칙과 수호의 일은 기록), 세인트폴호 포술장과 장전수들의 몸짓과 「이 분입니다」 대화(21시 59분 사격은 기록, 순양함 안의 대화는 기록에 없음), 마지막 문단의 상륙정 장면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영흥만이라는 이름의 한자를 그대로 옮긴 글귀」는 열쇠 글귀와 영흥만(永興灣)의 뜻을 맞춘 서술이다. 북한군 포병의 이름과 내면은 기록에서 찾지 못해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