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15,905자)
지평리 전투 — 원 안에서 버티다
1950 · 네오
1951년 2월 12일 저녁, 남한강 북쪽 산골 마을 방곡 —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덩화(40)가 이끄는 동부전선 지휘부, 이른바 ‘덩 집단’ 지휘소.
전날 밤 횡성(현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북쪽에서 시작한 반격은 국군 제8사단을 무너뜨리고 미 제2사단 일부를 남쪽으로 밀어냈다1. 동쪽 전선에서 물러나지 않은 유엔군은 이제 한 곳뿐이었다. 횡성에서 서쪽으로 서른 킬로미터 남짓, 철길과 신작로가 엇갈리는 마을 지평리(현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였다.
덩화는 횡성 싸움에 들지 않은 사단의 사단장들을 불러 모았다2. 지휘부의 셈은 가벼웠다. 지평리에 남은 적은 대대 하나나 둘이고, 앞뒤가 끊겼으니 곧 남쪽으로 빠져나가리라는 판단이었다2. 횡성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평리를 치기로 했다.
회의 자리에 제42군 제125사단 제375연대의 부연대장 리원칭이 있었다. 그는 방금 지평리 앞에서 내려왔다고 했다2.
“거기 있는 건 미군 제2사단 제23연대하고 프랑스 대대입니다. 참호를 깊게 팠고, 물러날 낌새는 보이지 않습니다.”
방 안의 누구도 그 말로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 지평리를 칠 부대는 제39군, 제40군, 제42군에서 한두 연대씩 떼어 왔다. 군이 셋이니 지휘 계통도 셋이었다.
*
1951년 2월 13일 정오, 지평리 — 남한강 지류가 흐르는 작은 골짜기 아래쪽, 단선 철길 위의 네거리 마을.
헬리콥터가 눈 덮인 논에 내려앉았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58) 소장이 내려 제23연대장 폴 프리먼(43) 대령의 지휘소로 걸어갔다3. 열흘 전 프리먼은 마을 남동쪽 오 킬로미터, 철길 굴 두 개가 나란히 뚫린 쌍굴 고개의 싸움을 끝내고 이 마을에 들어왔다3. 그사이 동쪽의 횡성이 무너졌고, 지평리는 군단 전선에서 홀로 북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혹이 되어 있었다.
“여주로 내려가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프리먼은 남쪽 이십사 킬로미터 고을 여주(현 여주시)로 물러나자고 말했다. 알몬드도, 사단장도 그 철수에 동의했다3. 알몬드가 돌아간 지 한 시간 반쯤 뒤, 남쪽 보급로를 살피던 사단 수색중대가 길에서 중공군에 막혀 되돌아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프리먼은 마음을 바꿨다. 내일 아침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나가야 했다3.
그 시각 수원 비행장에는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70) 원수가 내려 있었다.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55) 중장은 그 자리에서 맥아더에게 한강 선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4. 지평리를 비우면 횡성 쪽 중공군이 서쪽 한강 골짜기로 쏟아져 들어올 길이 열렸다. 리지웨이는 지평리를 지키라고 알몬드에게 명령했다. 고립되면 군단이 북쪽으로 쳐 올라가 구하라는 명령도 붙였다4.
지평리는 지름 1.6킬로미터의 원이 되었다. 마을을 둘러싼 여덟 개의 산은 높이가 이백육십 미터 안팎이었다. 그 산들을 다 차지하면 전선이 능선을 따라 십구 킬로미터로 늘어났다. 프리먼은 산을 버리고 그 안쪽의 낮은 언덕에 병사들을 붙였다3. 북쪽에 제1대대, 동쪽에 제3대대, 남쪽에 제2대대, 서쪽에 프랑스대대가 섰다4.
프랑스대대를 이끄는 사람은 몽클라르(58) 중령이었다. 본국에서 그는 별 셋을 단 중장이었다. 대대 하나를 장군이 지휘할 수는 없다며 스스로 계급을 내리고 왔다5. 그의 지휘소는 마을의 양조장 건물에 있었다5. 1925년에 지은 그 술도가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 서 있다6. 대대 안에는 한국인 병사들로 꾸린 중대가 하나 있었다. 지휘관은 프랑스군 구필 대위였고, 지평리 싸움에 든 한국군은 백사십 명쯤으로 확인된다7. 그들은 짐꾼이나 들것꾼이 아니라 총을 든 소총수였다7.
저녁 무렵, 프리먼은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우린 여기 남아서 끝까지 싸운다.”
그날 오후 내내 연대의 연락기는 북쪽과 동쪽에서 다가오는 중공군 행렬을 보았다. 포병은 사거리 안의 행렬을 쏘았고, 사거리 밖으로는 전투기 마흔 편대가 날아갔다3.
*
같은 날 오후 한 시, 지평리 둘레의 산 — 지평리를 치러 모여든 중국인민지원군 제119사단의 진지.
공격에 붙여 준 지원군 포병 제42연대는 끝내 오지 않았다. 산길에서 포를 끌던 말들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위치가 드러났고, 미군 비행기가 내려와 연대를 두들겼다2. 제375연대는 오후에 연락이 끊겼다2.
사단장 쉬궈푸(36)는 가진 것으로 시작했다. 오후 네 시 삼십 분, 계획대로 움직인 부대는 제119사단의 제356연대와 제357연대, 제120사단의 제359연대뿐이었다. 모두 합쳐 이천삼백여 명이었다2. 포는 연대마다 가진 박격포가 전부였다.
“포병은?”
“안 옵니다. 말이 놀라서 다 들켰답니다.”
“그럼 밤에 붙는다. 낮에는 저쪽 하늘이야.”
*
1951년 2월 13일 밤 열 시, 지평리 남쪽 — 보급로가 철길 밑을 지나 두 번째 붉은 흙 절개지를 빠져나가는 자리, 미 제23연대 제2대대 G중대 진지.
G중대가 지키는 언덕은 지도 위에 등고선 두어 줄로만 그려진 말굽 모양의 둔덕이었다. 그 오목한 안쪽에 제503야전포병대대 B포대의 155밀리 곡사포 여섯 문이 들어앉아 있었다3. 포대원 대부분은 지난 11월 군우리에서 포와 사람을 반 넘게 잃은 뒤 새로 온 보충병이었다3.
논 한가운데 참호에서 도널드 넬슨 일병과 잭 워드 이병은 누가 먼저 깨어 있을지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중대는 늘 절반이 깨어 있어야 했다. 한 구덩이에 둘이면 하나는 자고 하나는 지켰다3.
“네가 먼저 서. 난 어젯밤에 섰잖아.”
“어젯밤엔 네가 졸았잖아.”
그때 남쪽 어둠에서 삽 소리가 들렸다. 수백 미터 앞에서 언 땅을 파는 소리였다3.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포대 천막에서 편지를 쓰던 로버트 피터스 중위는 먼 총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남서쪽 큰 산에서 내려오는 오솔길을 따라 횃불 여섯 개가 움직이고 있었다3. 그는 천막 안에 대고 소리쳤다.
“일어나, 매키니. 이번엔 진짜야.”
중공군 두 분대가 G중대 한가운데를 쳤다. 397고지에서 뻗어 나온 좁은 등성이를 따라 기어 올라온 분대가 유진 오테슨 상병의 기관총에 수류탄 세 발을 던졌다. 오테슨은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3. 제3소대장 폴 맥기 중위는 중대장 토머스 히스 중위에게 전화를 걸고, 분대장들에게는 보이는 적만 쏘라고 일렀다. 탄약은 내일 밤에도 있어야 했다3.
열한 시 무렵 수류탄 한 발이 분대장 제임스 무지트 상병의 구덩이에 떨어졌다. 무지트는 “맥기 중위님, 맞았습니다!” 하고 외치며 소대 지휘소로 기어 왔다. 날아온 수류탄 하나는 그의 소총 개머리판을 뜯어 갔다. 맥기가 그를 앉히고 한참 숨을 고르게 하자, 무지트는 부서진 소총을 집어 들었다3.
“많이 다친 건 아닙니다.”
그는 자기 분대로 돌아갔다.
그 밤 지평리의 원 전체가 차례로 흔들렸다. 밤 열한 시 반 북쪽 C중대에 호루라기와 나팔, 뿔피리 소리가 먼저 울렸고, 이어 남쪽 G중대와 서쪽 프랑스대대 두 곳, 동쪽 제3대대 한가운데에 공격이 왔다4.
*
1951년 2월 14일 새벽 두 시, 지평리 서쪽 — 보급로 절개지 바로 오른쪽, 프랑스대대의 작은 언덕.
중공군 한 소대가 언덕 앞 백여 미터에서 대열을 지었다. 호루라기와 나팔이 울렸고, 총검을 꽂은 병사들이 달려 나왔다3.
프랑스 병사 하나가 손잡이를 돌렸다. 손으로 돌리는 사이렌이 앵 하고 울어 대며 중공군의 나팔 소리를 덮었다. 한 분대가 참호에서 뛰쳐나가 고함을 지르며 수류탄을 앞으로, 옆으로 멀리 던졌다3. 두 무리가 이십 미터 안으로 가까워졌을 때, 중공군이 돌아서서 왔던 쪽으로 달아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 분이 걸리지 않았다3.
해가 뜨기 전 여섯 시 반에 동쪽 제3대대를, 한 시간 뒤에 프랑스대대를 마지막으로 친 중공군은 둘레의 높은 산으로 물러났다4.
*
1951년 2월 14일 아침, 지평리 연대 지휘소.
동이 텄을 때 연대의 사상자는 백 명쯤이었다. 그중 하나가 프리먼이었다. 박격포 파편이 다리에 박혔다4. 알몬드는 군단 작전참모 존 차일스 대령을 지평리로 날려 보내 지휘를 넘겨받게 했다. 프리먼은 입원해야 할 몸이었지만 당장 나가기를 거부하고 지휘를 놓지 않았다4.
센 바람과 박격포탄이 헬리콥터의 부상자 후송을 자꾸 끊었다. 오후 세 시부터 세 시간 동안, 일본에서 날아온 C-119 수송기 스물네 대가 프리먼이 전날 청한 탄약과 식량을 원 안으로 떨어뜨렸다4. 낙하산에 매달린 상자는 대부분 포탄이었다. 소총 탄약은 많지 않았다.
남쪽 십 킬로미터, 보급로 위의 마을 주암리(현 여주시)에서는 그날 아침 사단 수색중대와 제9연대 L중대가 중공군 제39군 제116사단의 한 연대에 둘러싸였다. 두 중대는 길을 뚫고 남쪽으로 빠져나왔지만, 사상자가 이백십이 명이었고 그중 백십사 명 이상이 전사했다4. 지평리로 이어지는 길은 이제 어느 쪽으로도 열려 있지 않았다.
포로들은 오늘 밤 공격이 다시 온다고 말했다4.
*
1951년 2월 14일 밤, 지평리 남쪽 G중대 진지와 B포대.
낮에는 더운밥이 나왔다. 몇몇은 중공군이 물러갔으리라고 생각했다. 해가 지자 남쪽 하늘에 조명탄이 오르고 나팔 소리가 이어졌다3. 이번에도 첫 총탄은 맥기 소대 한가운데의 기관총으로 날아왔다.
G중대 취사반은 개인호를 파 두지 않았다. 총소리가 터지자 가장 가까운 피난처는 음식 찌꺼기를 묻는 구덩이였다. 여덟 명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냄새를 두고 농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3. 몸 숨길 구덩이가 없던 포병 하나는 빈 개인호를 찾아 헤매다, 바닥에 누가 누워 있는 구덩이로 그냥 뛰어들었다3.
“이 구덩이엔 자리 없어. 아무도 못 들어와.”
“자리 없긴 뭐가 없어! 만들면 되지!”
언덕 위에서는 중공군 두 분대가 제1소대 왼쪽 끝 개인호 몇 개를 빼앗았다. 그들은 장대 끝에 매단 폭약을 구덩이 둘에 밀어 넣었고, 미군 넷이 전사했다. 빼앗은 자리에 기관총을 걸고 맥기의 소대를 옆에서 쏘기 시작했다3. 제1소대장은 언덕 아래 오두막을 떠나지 않은 채 전화로만 소대 선임하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른쪽 끝에 있던 선임하사는 왼쪽 끝이 넘어간 줄 모르고, 진지가 멀쩡하다고 보고했다3.
맥기는 소대 선임하사 빌 클루츠 중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소리쳤다.
“제1소대 거기 누구 없나?”
대답이 없었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워질 무렵 맥기의 브라우닝 자동소총은 열 발마다 걸렸다. 그는 주머니칼로 탄피를 파내다가 어둠 속에 칼을 떨어뜨렸다. 카빈으로 바꿔 들었지만 얼어붙은 기름 때문에 노리쇠가 닫히지 않았다. 삼 미터 앞에서 중공군 하나가 무릎을 세우는 순간, 맥기는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쳐서 노리쇠를 밀어 넣고 네 발을 쏘았다3.
전령 존 마틴 일병이 중대 지휘소로 달려 내려갔다. 히스는 포대에 사람을 청했고, 포병 열다섯이 언덕을 올랐다. 능선을 넘자마자 박격포탄이 하나를 죽이고 하나를 다치게 했다. 나머지는 돌아서서 뛰어 내려갔다3. 히스는 그들을 다시 세워 직접 끌고 올라갔고, 그들은 다시 흩어졌다. 히스는 달아나는 포병의 옷깃을 움켜쥐고 고함을 질렀다3.
“빌어먹을, 언덕으로 다시 올라가! 여기 있어도 어차피 죽어. 죽을 거면 저 위에서 죽어!”
2월 14일, 동쪽 제3대대 진지에서는 M중대 기관총 분대장 윌리엄 시트먼(27) 중사가 I중대 진지 안으로 떨어진 수류탄 위에 몸을 던졌다. 곁의 다섯 사람이 살았고, 시트먼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8.
새벽 두 시 가까이, F중대에서 떼어 보낸 케네스 켈리 중사의 분대가 빼앗긴 안부를 되찾으러 올라갔다. 십 분 만에 분대 전원이 죽거나 다쳤다3. 그사이 G중대 제2소대가 논에서 오른쪽 끝을 뒤로 물리면서 맥기 소대를 받치던 기관총 한 정도 함께 빠져나갔다3. 맥기의 소대에는 몇 사람 남지 않았다.
“클루츠, 이번엔 우리가 당한 것 같다.”
“그러면 당하기 전에 저 개자식들을 할 수 있는 만큼 쓰러뜨리죠.”
두 시 반에서 세 시 사이, 클루츠의 기관총이 걸렸다. 맥기는 남은 사람들을 불러 마지막 수류탄을 던지고 능선을 넘어 내려왔다. 제3소대에서 걸어 내려온 사람은 맥기를 빼고 다섯이었다3. G중대는 언덕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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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5일 새벽 세 시 사십오 분, G중대 진지 아래 오목한 땅.
대대장 제임스 에드워즈 중령에게 남은 예비대는 F중대 지원소대뿐이었다. 연대 예비대는 레인저 중대 하나였고, 프리먼은 동쪽 제3대대 쪽이 걱정되어 레인저 한 소대와 전차 한 대만 내주었다3. 레인저 중대장은 연대장 말고는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에드워즈는 대대 참모 존 램스버그 대위를 내려보내 두 소대를 맡겼다3.
레인저 서른여섯 명, F중대 스물여덟 명, 박격포병 예닐곱, 기관총 두 조, G중대에 남은 너댓 명이 출발선에 엎드렸다3. 첫 박격포탄이 백사십 미터 앞 능선 꼭대기에 정확히 떨어졌다.
“거기면 됩니까?”
“바로 거기야! 이제 양쪽으로 쓸어!”
레인저들이 고함을 지르며 앞장서 올라갔다. 그때 프랑스대대 쪽 언덕에서 기관총 두 정이 레인저 소대 옆구리를 길게 쏘았다. 누가 쏘았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아군 전차 한 대도 그 총을 우군으로, 레인저를 적으로 보고 50구경 기관총을 한 차례 휘둘렀다. 대대 참모 로버트 커티스 중위가 전차로 달려가 사격을 멈추게 했다3.
램스버그는 수류탄 파편에 발목을 맞았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기관단총 방아쇠를 너무 세게 쥐는 바람에 자기 발을 쏜 줄 알았다. 에드워즈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하나 싶었다. 총이 연발에 놓여 있었으니 그랬다면 여러 발이 나갔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치고서야, 번쩍한 불빛을 떠올렸다3. 히스가 그의 무전기를 받아 메고 꼭대기로 올라갔다. 꼭대기에서 중공군 하나와 얼굴을 마주쳤을 때, 히스의 카빈 멜빵이 무전기 줄에 엉켜 있었다. 총알이 그의 가슴을 뚫었다3.
F중대 소대 스물여덟 명 가운데 스물두 명이 다쳤고, 다치지 않은 사람은 다섯이었다3. 반격은 끝났다.
동이 트기 전, 지휘소 초가 앞에 중상자 아홉이 들것을 기다리며 누워 있었다. 나팔이 울리고, 맥기 소대가 지키던 가장 높은 언덕에서 중공군 열두엇이 내려왔다. 커티스가 그들에게 말했다3.
“지금 안 가면 영영 못 갑니다. 지킬 사람이 없어요.”
아홉은 서로 어깨를 걸고 걸어서 빠져나갔다. 길 건너 둑 뒤에 모인 포병들에게 커티스가 마지막으로 알렸다.
“이제 당신들이 최전선이오.”
포병들은 자기 포를 버리지 않았다. 37야전포병대대 연락장교 존 엘리지 대위는 도랑에 처박혔던 4연장 50구경 기관총 반궤도차를 끌어내 언덕을 쓸었다. 기관총 네 정의 총열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3. 전차장 앤드루 레이나 상사는 그 엄호를 받으며 포대 보급 천막에 남겨진 부상자 열여섯을 전차에 실어 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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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5일 새벽, 지평리 남쪽 산자락 — 중공군 제119사단의 공격 부대.
중공군은 미군을 넓이 2제곱킬로미터가 안 되는 땅으로 몰아넣었다1. 대전차 수류탄과 폭약 통은 바닥났다2. 날이 밝을 무렵, 제40군 지휘부를 거쳐 덩화 지휘부의 명령이 내려왔다. 지평리를 치는 부대는 곧바로 싸움을 그치고 물러나라는 명령이었다2.
중국 쪽 백과 서술은 그날 남쪽에서 유엔군 증원군이 다가오고 원주의 적도 모였으므로 덩 집단이 그날 저녁 공격을 멈추었다고 적었다1. 397고지 남쪽 비탈의 중공군은 해가 진 뒤까지 G중대의 옛 진지를 내주지 않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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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5일 오후 세 시 사십오 분, 곡수리(현 양평군 지평면 곡수리) 남쪽 — 여주에서 지평리로 이어지는 좁은 산길, 미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
제5기병연대장 마르셀 크롬베즈 대령은 아침부터 보병으로 길을 뚫었다. 해 지기 전에 닿지 못하리라 보고, 전차 스물세 대만 따로 떼어 냈다. 장갑차가 없었으므로 L중대 백육십 명이 전차 위에 올라탔다4. 크롬베즈는 무전으로 지평리의 차일스에게 보급 차량 없이 가겠다고 알렸다4.
“오기만 해. 차량이 있든 없든.”
곡수리 어귀에서 길가 산의 기관총과 박격포가 전차 위의 보병을 쓸었다. 병사들은 약속대로 뛰어내려 길 양쪽에 엎드렸다. 크롬베즈는 전차가 멈추면 끝이라고 판단했다. 전차는 보병이 다시 올라탈 틈도 없이 움직였다4. 제5기병연대 제3대대장 에드거 트리시 중령도 그때 뒤에 남겨져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3.
지평리 남쪽 1.6킬로미터, 397고지 서쪽 비탈을 깎은 절개지에서 양쪽 벼랑 위의 중공군이 로켓포를 쏘고 폭약 가방을 던졌다. 네 번째 전차에 탄 전차중대장 조니 하이어스 대위가 포탑을 뚫은 로켓에 전사했다. 불붙은 전차를 몰던 조종수 존 캘훈 상병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도 절개지를 빠져나가 길 밖으로 차를 꺾었다. 뒤따르는 전차들이 막히지 않았다3.
절개지를 빠져나오자 앞에 전차 네 대가 보였다. 두 번째 전차의 제임스 맥스웰 중사는 사격 명령을 외치려다 그것이 제23연대 전차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전차에서 내려 걸어가 말을 걸었다3. 에드워즈가 397고지 남쪽 비탈의 중공군 뒤를 치라고 내보낸 전차들이었다. 비탈의 중공군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에드워즈는 그 광경을 이렇게 남겼다4.
“그런 광경은 처음 봤고, 다시 볼 일도 없을 겁니다. 표적이 우리 무기보다 많았습니다.”
다섯 시 십오 분, 크롬베즈의 전차가 원 안으로 들어왔다4. 전차 위에 남은 L중대원은 스물셋이었고, 그중 열셋이 다쳐 있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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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6일 오후, 곡수리에서 지평리로 가는 길.
밤새 눈이 내렸다. G중대가 잃었던 언덕 위 중공군 시신 수백 구가 눈에 덮였다3. 정오 무렵 눈이 그치자 크롬베즈는 전차를 몰고 돌아갔다. 지평리에서 곡수리까지 길가 어디에서도 중공군은 보이지 않았고, 총소리도 나지 않았다3.
곡수리에 내린 L중대장 존 배럿 대위는 지프에 다시 올랐다. 그는 전날 전차가 떠날 때 길에 남겨진 부하들에게, 따라오지 못하면 길 가까이 숨어 있으라고 일러 두었다3. 그는 왔던 길을 거꾸로 달렸다. 눈 덮인 도랑과 논둑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곡수리와 절개지 사이에서 부상병 넷을 찾아냈다4. 그 뒤를 따라온 보급 차량과 구급차가 절개지 너머에서 하나를 더 찾았다4.
넷은 하룻밤을 눈 속에 누워 있었다. 배럿이 지프 뒷자리에 그들을 눕히고 담요를 덮었다. 한 사람이 중대장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날 해 지기 전에 지평리의 부상자 전원이 구급차와 빈 보급 트럭에 실려 곡수리로 내려갔다. 제23연대 전투단의 손실은 전사 쉰둘, 부상 이백쉰아홉, 실종 마흔둘이었다4. 연대는 중공군 사상자를 세고 짐작해 사천구백사십육 명으로 보고했다4.
중국 쪽 기록은 제119사단 세 연대의 사상자를 구백삼십팔 명, 그중 전사를 삼백세 명으로 적었다2. 덩화는 쉬궈푸에게 전보를 보냈다. 싸우기 전에 적정을 잘못 알았고 그래서 판단을 그르쳤으며, 그 책임은 덩화 자신의 지휘부에 있다는 내용이었다2. 중국의 한 잡지는 훗날 제359연대 제3대대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고 썼다9.
리지웨이는 고립된 한 연대 전투단이 큰 손실 없이 훨씬 센 적을 막아 낸 이 싸움을, 미 제8군이 12월과 1월의 후퇴에서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은 전환점으로 보았다4. 그는 곧바로 다음 공세를 짜기 시작했다.
석 달 전 청천강에서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던 제23연대는, 이번에는 원 안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사료 출처
1. 「第四次战役」, 新浪网 국내뉴스 2000.6.20, news.sina.com.cn/world/2000-06-20/99217.html(중국 군사 백과 항목 형식의 글, 원 출전 표기 없음) — 2월 11일 17시 덩 집단의 횡성 반격과 국군 제8사단 세 연대 섬멸 주장, 지평리의 미 제2사단 제23연대·프랑스대대 등 「6,000여 명」, 13일 밤 여섯 개 연대 공격과 실패 원인(적 병력·공사 과소평가, 서두른 투입, 여러 건제의 통신·협동 부족, 화포·탄약 부족), 14일 「2제곱킬로미터가 안 되는」 지역으로 압축, 15일 증원군 도착과 원주 집결로 당일 저녁 공격 중지. 2. 중국어 위키백과, 「砥平里战役」(2026년 10월 열람) — 2월 12일 방곡(放谷) 사단장 회의(제40군 군장 원위청 불참), 제375연대 부연대장 리원칭의 보고(「没有发现要撤退的迹象」), 덩 지휘부의 적정 판단(대대 하나둘), 13일 13시 지원군 포병 제42연대가 말이 놀라 노출되어 공습으로 불참, 제375연대 연락 두절, 16시 30분 제356·357·359연대 2,300여 명만 공격 개시, 대전차 수류탄·폭약 통 소진, 15일 새벽 덩 지휘부의 즉시 철수 명령(제40군 지휘부 경유), 제119사단 세 연대 사상 938명(전사 303명), 덩화가 쉬궈푸에게 보낸 총평 전보(「战前敌情不准,造成判断失误,决心有误」, 「这个责任在“邓指”」). 위키백과 본문에 각주가 없는 대목이 많아 사단·지휘부 공식 문헌은 직접 보지 못했다. 3. Russell A. Gugeler, 『Combat Actions in Korea』(미 육군 군사사국, 1954; 개정판 1970) 제8장 「Chipyong-ni」(108~133쪽)·제9장 「Task Force Crombez」(134~143쪽), 인터넷 아카이브 게재본 archive.org/details/dli.ernet.157027 — 원형 진지의 크기(지름 1마일, 둘레 여덟 산 평균 850피트, 산을 다 차지하면 능선 12마일), 쌍굴 전투 뒤 2월 3일 진입, 13일 정오 알몬드의 헬리콥터 방문과 프리먼의 철수 건의·번복, 리지웨이의 거부, 「We'll stay here and fight it out」, 13일 정찰기와 전투기 40편대, G중대 진지와 B포대(군우리에서 반 넘게 잃은 뒤의 보충병), 넬슨·워드의 당번 다툼과 삽 소리, 피터스의 「Get up, McKinney; this is it」과 횃불 여섯, 오테슨 기관총·무지트(「I'm not hit bad」), 14일 02시 프랑스대대의 손 사이렌과 수류탄 돌격, 14일 밤 조명탄·나팔, 취사반 여덟 명의 쓰레기 구덩이(「None of them made any funny remarks about the odor」)와 개인호 다툼(「There ain't no room in this hole」/「No room hell! We'll make room!」), 장대 폭약으로 넷 전사, 제1소대장의 오보, 맥기의 BAR·카빈, 포병 지원병의 도주와 히스의 고함(「You'll die down here anyway」), 켈리 분대 전멸, 제2소대의 후퇴, 맥기·클루츠의 대화, 02시 30분~03시 진지 상실과 제3소대 생존자 다섯, 램스버그의 반격(레인저 36·F중대 28명, 03시 45분~04시), 레인저 중대장과의 다툼, 프랑스대대 쪽과 아군 전차의 오인 사격, 램스버그의 발목 부상과 히스의 가슴 관통상, F중대 소대 28명 중 22명 부상, 중상자 아홉과 커티스(「If you fellows don't leave now, you'll never leave」, 「You're the front line now」), 엘리지의 4연장 반궤도차와 레이나 상사의 부상자 16명 구출, 16일 밤 눈에 덮인 시신 수백 구, 크롬베즈 부대의 「Come on, trains or no trains」, 트리시 중령의 포로, 하이어스 대위 전사와 조종수 캘훈, 맥스웰 중사와 제23연대 전차, 17시 진입, L중대 생존 23명(13명 부상), 배럿의 낙오병 지시, 귀환길에 적이 보이지 않음. 4. Billy C. Mossman, 『Ebb and Flow』(25화 출처와 같은 책) 제15장 「Defending the Wonju Line」(282~300쪽, 지도 23) — 13일 정오 맥아더의 수원 비행장 도착과 리지웨이의 한강 선 고수 다짐, 지평리 고수 명령과 고립 시 구출 지시, 대대 배치(북 제1대대·동 제3대대·남 제2대대·서 프랑스대대), 13일 23시 30분 C중대 앞 호루라기·뿔피리·나팔과 사방 공격, 14일 06시 30분·07시 30분 공격, 동틀 녘 사상자 약 100명과 프리먼의 다리 부상, 차일스 대령 투입과 프리먼의 후송 거부, 바람과 박격포로 끊긴 헬리콥터 후송, 14일 15시부터 C-119 24대 공중 보급, 포로 진술, 14일 주암리의 수색중대·제9연대 L중대 피습(사상 212명, 사망 114명 이상), 15일 G중대 진지에 남은 중공군과 16시 30분 B중대 탈환, 에드워즈의 말(원문: a sight like that and never expect to see another like it. There were more targets than we had weapons), 크롬베즈의 전차 23대와 L중대 160명, 차일스와의 무전, 보병을 남기고 전진, 397고지 서쪽 절개지, 17시 15분 진입, 16일 정오 귀환과 길가에 적 없음, 배럿이 곡수리와 절개지 사이에서 부상병 넷을 찾고 스튜어트 대위가 하나를 더 찾음, 제23연대 전투단 손실(전사 52·부상 259·실종 42), 중공군 사상 4,946명(집계와 추정), 리지웨이의 「전환점」 판단. 5. Choe Chong-dae, 「French General Monclar in the Battle of Chipyong-ni」, The Korea Times 기고 2018.1.18, koreatimes.co.kr/amp/opinion/20180118/french-general-monclar-in-the-battle-of-chipyong-ni — 중장이던 몽클라르가 대대 지휘를 위해 중령으로 계급을 낮춘 일(「no general could be in command of such a small unit as a battalion」), 프랑스대대 지휘소가 지평 양조장에 있었다는 서술. 6. 조남대, 「지평리의 오래된 숨결」(조남대의 은퇴일기 102), 데일리안 2026.6.30, dailian.co.kr/news/view/1661372 — 1925년에 세운 지평양조장(국가등록문화재 제594호)이 몽클라르가 지평리 전투를 지휘한 자리라는 서술. 7. 뉴시스, 「UN 프랑스대대 소속 한국군 참전기념비」 제막 기사, 2025.11.30, newsis.com/view/NISX20251130_0003422263 — 지평리 전투에 프랑스대대 소속 한국군 중대가 참전, 지휘관 구필 대위, 한국군 약 140명, 보급·들것 인력이 아닌 전투병 편입이었다는 양평군 설명. 8. 미 육군 명예훈장 수훈 문안, 「William S. Sitman」(영문 위키백과 게재 문안, 2026년 10월 열람; 미 육군 일반명령 1952년 제20호) — 1951년 2월 14일 지평리 부근, M중대 기관총 분대장으로 I중대에 배속, 수류탄 위에 몸을 던져 다섯 명을 구하고 전사. 9. 「血战砥平里」(图说历史 19), 『中国双拥』 잡지 원작, 澎湃新闻 게재 2020.10.18, m.thepaper.cn/baijiahao_9614090 — 「359团3营仅有数人生还」, 제40군 세 연대 사상 1,830명이라는 서술.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덩화 1910년생·프리먼 1907년생·알몬드 1892년생·맥아더 1880년생(25화 [나이]와 같은 근거), 리지웨이 1895년생(영문 위키백과 「Matthew Ridgway」), 몽클라르 1892년 2월 7일생(영문 위키백과 「Raoul Magrin-Vernerey」), 쉬궈푸 1914년 12월생(중국어 위키백과 「徐国夫」), 시트먼 1923년 8월 9일생(영문 위키백과 「William S. Sitman」). 리원칭, 맥기, 히스, 클루츠, 오테슨, 무지트, 넬슨, 워드, 피터스, 매키니, 마틴, 켈리, 에드워즈, 램스버그, 커티스, 엘리지, 레이나, 차일스, 크롬베즈, 트리시, 하이어스, 캘훈, 맥스웰, 배럿, 구필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공격 시작 — 중국어 위키백과는 13일 16시 30분에 세 연대가 움직였다고, Gugeler는 G중대 앞 첫 총격을 22시 무렵, Mossman은 C중대 앞 공격을 23시 30분 무렵으로 적었다. 출발과 접적의 차이로 보고 셋 다 적었다. [자료 충돌] 병력 — 지평리 수비 병력은 미군 자료가 약 4,500명(전방 보병 2,500명 미만), 중국 쪽 백과 서술이 「6,000여 명」. 공격 병력은 Mossman이 다섯 개 사단(제115·116·119·120·126사단)에서 나온 여섯 개 연대, 新浪网 백과 서술이 이틀 밤 모두 「6개 연대」, 중국어 위키백과는 13일에 실제로 공격한 것이 세 연대 2,300여 명뿐이라고 적었다. [자료 충돌] 중공군 손실 — 미 제23연대 전투단 보고 4,946명(센 것과 추정 합계), 중국어 위키백과의 제119사단 세 연대 938명(전사 303명), 『中国双拥』의 제40군 세 연대 1,830명, 같은 위키백과 정보란의 마핑(马平) 추정 3,000~4,000명이 모두 다르다. 본문에는 미군 보고와 제119사단 수치를 각각 그 자료의 숫자로 적었다. 유엔군 손실도 Mossman 전사 52·부상 259·실종 42와 Ryan의 답사 자료(영문 위키백과 인용) 전사 51·부상 250·실종 42가 조금 다르다. 본문은 Mossman을 따랐다. [자료 충돌] 중공군의 철수 — 중국어 위키백과는 15일 새벽 철수 명령이 내려왔다고, 新浪网 백과 서술은 15일 저녁 공격을 멈추었다고, Mossman은 G중대 옛 진지의 중공군이 15일 오후 네 시 반 무렵까지 버티다 크롬베즈 부대가 나타나자 달아났다고 적었다. 본문에는 명령과 실제 철수를 따로 적었다. [자료 충돌] 크롬베즈 부대의 진입 시각 — Gugeler 17시, Mossman 17시 15분 무렵. 본문은 Mossman을 따랐다. [자료 충돌] 쉬궈푸의 직책 — 중국어 위키백과 「砥平里战役」은 「第119师师长」, 같은 위키백과의 인물 항목은 제40군 부군장 겸 참모장으로 적었다. 본문은 전투 항목을 따랐다. 같은 전투 항목은 15일 정오 이전의 총지휘를 다른 사람들로 적어, 13일 밤 쉬궈푸가 전체를 지휘했다고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몽클라르의 나이 — The Korea Times 기고는 자원할 때 「59세」라고 적었으나, 1892년 2월 7일생이면 1950년 8월 자원 당시 58세다. 본문은 출생연도에 따른 나이를 적었다. [자료 충돌] 시트먼의 날짜 — 훈장 문안은 「1951년 2월 14일」만 적었다. 13일 밤에서 이어진 14일 새벽인지 14일 밤인지는 확인하지 못해 본문에 날짜만 적었다. 한 보조 자료(victoriacrossonline)는 소속을 A중대로 적었으나 훈장 문안의 M중대를 따랐다. [자료 충돌] 프랑스대대의 백병전 — 프랑스 쪽 대중 기사(Theatrum Belli 2026.2.15)는 15일 새벽 345고지에서 몽클라르의 명령으로 사이렌과 나팔을 울리고 총검 돌격을 했다고 적었으나, 345고지는 Mossman이 진지 북서쪽 1~2마일 밖의 산으로 적은 곳이고 원 사료가 밝혀져 있지 않아 쓰지 않았다. 본문의 사이렌 장면은 Gugeler가 적은 14일 02시의 일이다. [자료 충돌] 방곡의 위치 — 중국어 위키백과는 「汉江之北的放谷」라고만 적어 지금 어느 마을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재구성] 방곡 회의에서 리원칭의 말을 뺀 장면의 분위기와 덩 지휘부가 적이 곧 물러나리라 보았다는 대목(위키백과의 「대대 하나둘」 판단과 리원칭 보고의 문맥에서 읽은 것), 13일 정오 알몬드와 프리먼의 대화 문장(철수 건의와 번복은 기록), 중공군 진지의 「포병은?」으로 시작하는 대화, 넬슨과 워드의 당번 다툼 대사(다툼 자체는 기록), 쓰레기 구덩이와 개인호 장면의 몸짓(대사는 기록), 「클루츠, 이번엔 우리가 당한 것 같다」로 시작하는 두 사람의 말(Gugeler 원문 「It looks like they've got us, Kluttz」 「let's kill as many of these sons of bitches as we can before they get us」를 우리말로 옮김), 아홉 부상자가 어깨를 걸고 걸어간 모습, 엘리지 장면의 세부, 크롬베즈와 차일스의 무전 문장(원문 「trains or no trains」), 맥스웰이 말을 건 대목, 배럿이 도랑과 논둑을 하나하나 들여다본 모습과 지프 뒷자리·담요·소매를 붙잡은 부상병, 네 사람이 하룻밤을 눈 속에서 보냈다는 대목(15일 오후 낙오, 16일 오후 발견, 16일 새벽 눈은 기록)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구필 대위의 한국군 중대가 13~15일 밤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싸웠는지는 확인하지 못해 장면으로 만들지 않았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