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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17,026자)

횡성 전투 — 명령은 사라졌다

1950 · 네오

횡성 전투, 1951년 2월 11일~13일 — 북쪽 홍천과 삼마치 고개, 오음산, 창봉리, 학곡리, 횡성과 횡성교, 남쪽 원주, 서쪽 용두리와 지평리. 2월 11일 밤 국군 제8사단 세 연대의 위치와 그 사이 빈틈, 중공군 제66군 제198사단의 큰길 남하, 제40군의 서북쪽 돌파, 제39군 제117사단의 학곡리 우회, 제197사단의 동쪽 공격, 12일 새벽부터 밤까지 미군 지원부대의 창봉리–갈림목–횡성–원주 철수로, 12일 밤 횡성 북쪽 끝 네덜란드 대대의 엄호선.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1년 2월 11일 일요일 오후, 강원도 횡성(현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횡성읍) — 원주 북쪽 섬강 가의 고을, 국군 제8사단 사령부.

통신병 정위철은 열아홉 살에 입대했다1. 무선 차량 옆에서 그가 받아 적는 지명은 대부분 어릴 때 걸어 다니던 이름이었다. 횡성이 그의 고향이었다. 석 달 전 제8사단 사령부는 압록강이 멀지 않은 평안북도 희천(현 북한 자강도 희천시)까지 올라갔다. 중공군에 밀려 내려오다 보니 고향에 와 있었다. 마을은 다 타 버리고 없었다1.

“고향 왔으니 집에 한번 들렀다 가지그래.”

“집이 있어야 들르지. 굴뚝은 남았더라. 굴뚝한테 인사는 했어.”

엿새 전인 2월 5일, 국군 제5사단과 제8사단은 북쪽 홍천(현 홍천군 홍천읍)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그 작전을 ‘라운드업’, 곧 몰이사냥이라고 불렀다2. 국군 보병이 산줄기를 타고 앞으로 나가면, 미 제2사단의 포병과 전차와 보병이 ‘지원부대’라는 이름으로 그 뒤에 붙었다. 지원부대는 국군을 돕되 명령은 미 제10군단 사령부에서만 받았다3. 미군 포대장은 국군 연대장의 말을 들을 까닭이 없었고, 국군 사단장 최영희(29) 준장에게는 미군 포대를 움직일 권한이 없었다.

그날 저녁 제8사단의 세 연대는 모두 전선에 나가 있었다. 사단에 남은 예비대는 없었다2. 제21연대는 큰길을 따라 횡성에서 북쪽으로 십사 킬로미터쯤 올라간 곳에 있었다. 홍천과 횡성 사이의 높은 고개 삼마치(현 홍천군과 횡성군 경계의 삼마치 고개) 남쪽이었다. 제10연대와 제16연대는 그 서북쪽, 횡성과 서쪽 큰길 사이의 산마루에 붙어 있었다. 제21연대와 제10연대 사이에는 오 킬로미터 가까운 빈틈이, 제10연대와 제16연대 사이에는 일 킬로미터 넘는 빈 땅이 있었다3.

그날 늦게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55) 중장은 제10군단장 알몬드(58) 소장에게 더는 앞으로 나가지 말고 정찰만 하라는 무전을 쳤다3. 다른 무전에는 걱정을 하나 적었다. 군단과 국군 공격 부대, 미군 지원부대, 그 지원부대의 원래 부대가 서로 얽힌 지휘 줄로는, 적이 치고 들어올 때 부대들이 뒤섞이는 것을 막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었다3. 그 무전이 오갈 무렵, 북쪽과 서쪽 산속에서는 이미 중공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

같은 날 오후 다섯 시, 경기도 양평 용두리(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 — 횡성 서쪽, 산길로 사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중공군 제39군 제117사단 집결지.

이틀 전 2월 9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는 반격 지시를 내렸다4. 사령관 펑더화이(52)는 서쪽 한강 쪽에서는 버티고, 동쪽에서 깊이 들어온 적을 먼저 치기로 했다. 동쪽의 제39·40·42·66군 네 군은 부사령관 덩화(40)가 맡았다5. 중국 쪽 기록은 이 반격에 아홉 개 사단 약 십만 명이 나섰고, 국군 제8사단이 지키던 구 킬로미터 남짓한 돌파 구간에 여섯 개 사단을 모아 병력을 1대 7.3으로 만들었다고 적었다4.

제117사단장 장제청(33)이 받은 명령은 이튿날 아침 일곱 시까지 횡성 서북쪽 마을 학곡리(현 횡성군 횡성읍 학곡리)로 가서 다리목 양쪽 길을 막으라는 것이었다6. 북쪽에서 쫓겨 내려올 국군 제8사단의 길과, 횡성에서 구하러 올라올 미군의 길이 그 다리에서 만났다. 장제청은 전화로 세 연대장에게 순서를 불렀다. 제351연대가 앞장서고, 제350연대가 옆을 받치고, 제349연대는 두 번째 줄로 따른다6.

제349연대장 쉐푸리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우물거렸다. 서른을 갓 넘긴 그는 두 번째 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6. 사단장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나왔다.

“재주가 늘었나 보지? 앞이니 뒤니 고르기까지 하고. 두 번째 줄을 준 건 너를 믿어서야!”

정치위원 리사오위안은 무거운 것을 다 버리게 했다. 병사들은 닷새치 마른 식량과 탄약, 약품만 졌다. 다섯 시, 칠천 명 넘는 사단이 왼팔에 흰 수건을 감고 산으로 들어갔다6.

*

같은 날 밤 여덟 시 반, 삼마치 고개 남쪽 큰길 —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 진지.

중공군 제66군 제198사단이 홍천 쪽에서 큰길을 따라 내려와 연대 정면을 쳤다3. 정면의 총소리가 커지는 동안 다른 무리가 연대 옆구리로 돌았다. 서쪽의 오 킬로미터 빈틈이 그 길이었다. 서북쪽 산마루에서는 제40군 제120사단이 제10연대의 줄을 뚫었고, 제39군의 다른 사단은 제16연대 왼쪽을 파고들었다3. 세 연대가 저마다 정면을 보고 있을 때, 중공군은 연대와 연대 사이로 흘러 남쪽으로 내려갔다.

사단장 최영희는 제21연대에 조금만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연대에 붙어 있던 미군 전차와 보병, ‘지원팀 B’에는 큰길을 따라 남쪽 마을 창봉리(현 횡성군 공근면 창봉리)의 미군 포병 진지로 내려가라고 했다. 전차들은 밤 열 시쯤 창봉리에 닿았다. 그사이 제21연대를 돌아 내려간 중공군이 창봉리를 비켜 지나, 거기서 남쪽으로 오 킬로미터 아래 다리 근처에서 큰길을 막았다3.

자정 무렵 서쪽 산길에서는 중공군이 제10연대와 제16연대의 지휘소를 덮쳤다3. 새벽 한 시, 제8사단 사령부와 세 연대 사이의 통신이 모두 끊겼다. 연대와 그 아래 대대 사이도 끊겼다3. 횡성의 무선 차량 안에서 정위철은 연대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다른 주파수로 다시 불렀다. 잡음만 돌아왔다.

“제10연대, 여기는 사단. 들리면 응답하라. 제10연대….”

제10연대장 권태순(28) 대령은 그 무렵 산속에서 포위되어 있었다. 사단과 연결이 끊긴 그는 살아남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고 전한다7.

“각 대별로 횡성으로 탈출하라!”

연대장과 참모들은 돌아오지 않았다7. 큰길과 좋은 산길은 이미 막혀 있었다. 세 연대는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줄이 끊기자 대대가 중대로, 중대가 몇 사람씩의 무리로 갈라졌다. 대부분은 산속에서 둘러싸였다.

*

1951년 2월 12일 월요일 새벽 한 시 십오 분, 창봉리 — 큰길가 마을, 미 제2사단 지원부대 21 진지.

제21연대 병사들이 무리를 지어 미군 진지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지원부대장 존 키스 중령은 무전기를 잡았다3. 그가 청한 것은 단순했다. 남쪽으로 오 킬로미터 남짓, 횡성 북쪽에서 큰길과 서쪽 산길이 갈리는 갈림목까지 물러나겠다. 그곳에는 미 제38보병연대 제3대대가 지키고 있었다. 키스를 지키는 보병인 제38보병연대 제1대대장 켈러허 중령은 그사이 국군 병사들을 붙잡아 미군 진지에 세우려 했으나 거의 소용이 없었다3.

키스의 청은 사단 포병사령관 헤인스 준장에게 갔다. 헤인스는 국군 제8사단장 최영희에게 제21연대를 멈춰 달라고 부탁했다. 최영희는 그 연대와 연락이 끊겨 있었고, 제21연대가 자기가 명령한 대로 조금만 물러나는 줄로 알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3. 헤인스는 자기 손으로 철수를 허락하지 않고 제2사단장 러프너(47) 소장에게 물었다. 러프너는 군단 포병사령관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군단 포병사령관 엔니스 대령은 군단 참모 매캐프리 대령에게, 매캐프리는 알몬드에게 물었다3. 알몬드가 허락했고, 그 말은 같은 길을 거꾸로 되짚어 키스에게 닿았다. 두 시 사십오 분, 키스가 청한 지 한 시간 반 만이었다3. 여러 손을 거치는 동안 알몬드는 지원부대가 횡성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키스가 청한 것은 갈림목까지였다3.

그사이 두 시 반, 동쪽에서 내려온 중공군 삼백 명쯤이 진지 북동쪽의 제38보병연대 A중대를 쳤다3. 세 시, 키스의 행렬이 움직였다. 앞장선 전차 두 대 가운데 두 번째 전차 밑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소대장 윌리엄 메이스 소위가 포탑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기관총탄이 그를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했고, 길가 도랑에서 날아온 수류탄 폭풍이 그를 전차 위에서 떨어뜨렸다. 다치지는 않았다3. 전차 두 대는 소대장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두 대 모두 일 킬로미터 남짓 더 가서 로켓탄과 박격포에 맞아 길 밖으로 뒤집혔다3.

행렬의 머리에 선 제503야전포병대대 A포대가 포를 끌 차례였다. 동쪽 산에서 중공군 한 무리가 길로 뛰어들어 포대장과 선임하사, 병사 몇을 붙잡아 산으로 데려갔다3. 네 시, 행렬은 출발도 제대로 못 한 채 멈췄다. 동이 틀 무렵 키스는 포 몇 문을 길가에 다시 세워 동쪽 능선에 곧바로 쏘았다.

맨 뒤를 맡은 A중대장 조지 가드너 중위는 날이 밝은 뒤 길 남서쪽 논에서 155밀리 곡사포 세 문을 보았다. 견인차에 매달린 채였고, 포탄을 가득 실은 트럭과 지프도 있었다. A포대는 포 한 문만 끌고 떠난 뒤였다3. 가드너의 중대에는 견인차를 몰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포를 부술 폭약도 시간도 없었다. 병사들은 포병 차량에 달린 기관총으로 탄이 떨어질 때까지 쏜 다음, 포와 포탄과 차를 그대로 두고 걸어서 떠났다3.

열 시, 행렬의 꼬리가 갈림목의 제3대대 진지 안으로 들어왔다. 지원부대의 사상자는 벌써 사백 명이 넘어 보였다. 뒤를 막은 A중대는 장교 둘과 병사 백십 명쯤을 잃었다3.

*

같은 날 새벽, 학곡리 서쪽 눈 덮인 산 — 중공군 제117사단 제349연대의 산길.

자정 무렵, 사단 지휘소는 앞장선 제351연대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 북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6. 장제청은 제351연대를 동쪽으로 돌려세우고, 뒤따르던 제349연대를 맨 앞으로 내보냈다. 두 번째 줄이 첫 줄이 되었다. 쉐푸리는 정치위원 캉잉중에게 말했다6.

“사단장이 편애할 리가 없다니까. 이제 우리 차례야.”

새벽 한 시, 연대 앞에 팔백 미터가 넘는 눈 덮인 산이 가로막았다. 돌아가면 길은 쉬워도 십 리 넘게 멀어지고 적에게 걸릴 수도 있었다6. 캉잉중이 말했다. “빨리 가는 게 제일이다. 고생을 좀 더 하더라도 지름길로 넘자.” 낮에 녹았던 눈이 밤바람에 다시 얼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단단했다. 위에서 미끄러진 사람이 아래 사람을 덮쳤고, 넘어진 사람은 나무 덩굴과 돌을 붙잡고 다시 기었다6. 산꼭대기에서 미군 경계 부대와 부딪쳤다. 새벽 네 시 싸움이 끝났을 때 연대 정찰 책임자 샤오린이 죽어 있었다6.

내려가는 길은 길이 아니었다. 편자를 박은 지 오래된 말들은 얼음판 위에서 네 다리를 막대기처럼 뻗고 버티다 쓰러졌다. 연대장과 정치위원이 앞장서 솜옷을 여미고, 길이 삼백 미터 넘는 가파른 비탈을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6. 나뭇가지가 솜옷을 찢었고, 돌이 손과 발을 찧었다. 날이 밝기 전 연대는 학곡리에 닿았다. 정해진 시각보다 삼십 분 일렀다6.

쉐푸리는 지형을 보러 혼자 작은 산등성이로 걸어갔다. 몇백 미터를 갔을 때 뒤쪽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누가 그를 불렀다. 삼사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왼팔에 붉은 천을 맨 국군 여덟 명이 꺼져 가는 모닥불을 둘러싸고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쉐푸리는 노획한 미군 장교 모자를 쓰고 국군 장교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패잔병들은 그를 국군 장교로 알았다6.

쉐푸리는 그대로 걸어가며 권총을 뽑았다. 가까이 가서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다시 당겼다. 또 철컥.

“이런 젠장!”

세 번째에 총이 울렸다. 여덟 명은 놀란 토끼처럼 튀어 숲으로 달아났다. 쉐푸리는 화가 덜 풀려 그 뒤를 쫓았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위소대가 숲을 뒤져 넷을 잡았고, 넷은 놓쳤다6. 전화로 보고를 받은 장제청이 고함을 쳤다.

“죽고 싶어? 혼자서 여덟을 상대해? 네가 다치면 연대는 누가 지휘해!”

“총만 안 걸렸으면 여덟쯤은 혼자 잡았습니다, 사단장 동지.”

날이 밝을 때 산 아래에서 전차 소리가 났다. 다리를 폭파하려던 제4중대는 폭약이 모자라 몇 번이나 실패했다. 분대장 자오훙지가 폭파조를 데리고 뛰어나가 앞장선 전차 두 대를 멈춰 세웠다. 부서진 전차가 하나뿐인 길을 막았다6.

*

같은 날 낮, 횡성 — 미 제38보병연대 지휘소.

연대장 존 코글린 대령은 북쪽 갈림목에 있는 자기 제3대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군단 명령이 그 대대를 갈림목에 묶어 두고 있었다3. 그는 지휘소를 지키던 경비소대와 전차소대를 북쪽으로 올려 보냈다. 두 소대는 횡성 북쪽 일 킬로미터 남짓에서 중공군 진지에 부딪혀, 전차 한 대와 보병 절반을 잃고 돌아왔다3. 서쪽에서 산을 넘어온 중공군이 횡성과 갈림목 사이의 큰길을 끊어 놓았다. 코글린은 원주에 있는 제2대대를 달라고 했다. 러프너는 내주지 않았다3.

횡성 북쪽 끝에는 연대에 붙은 네덜란드 대대가 있었다. 대대장은 덴 오우덴(41) 중령이었다. 대대는 횡성 안팎의 연대 지휘소와 포병을 지키는 유일한 경비 병력이었고, 코글린은 네덜란드 대대의 임무를 바꾸는 일도 군단만 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3.

정오 무렵 알몬드는 자기 포병사령관에게 두 지원부대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알몬드는 키스의 부대가 횡성이 아니라 갈림목에 멈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두 지원부대 모두 곧바로 횡성으로 물러나되, 필요하면 싸워서 길을 뚫으라고 명령했다3. 같은 시각 원주의 군단 사령부에 날아온 리지웨이에게 알몬드는 횡성을 내주고 원주를 지키겠다고 말했다3.

정오가 되기 조금 전, 키스의 행렬이 갈림목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켈러허의 두 중대가 길 양쪽 산으로 올라 행렬을 덮었지만, 일 킬로미터 남짓 나아가 막혔다3. 오후 두 시, 횡성 동쪽에 있던 국군 제3사단의 한 대대가 길을 열러 북쪽으로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대대는 늦게 출발해 횡성 북쪽 개울 위 첫 언덕까지 팔백 미터쯤 오르고 멈췄다3. 코글린의 작전참모 워런 호지스 소령이 그 대대장을 찾아가 더 올라가 달라고 했다.

“저 위에서 미군이 갇혀 있습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 주십시오.”

“내가 받은 명령은 이 언덕을 잡고 해가 질 때까지 지키는 것이오.”

국군 지휘관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양보한 것은 하나였다. 갈림목에서 내려오는 부대가 지나갈 때까지는 그 언덕에 남겠다는 약속이었다3. 코글린에게는 그 대대를 움직일 권한이 없었다. 오후 두 시 반에야 알몬드가 제3대대를 풀어 주었고, 그 말이 코글린에게 닿은 것은 네 시께였다3. 저녁 여섯 시, 군단 기갑참모가 지휘소로 들어와 코글린에게 횡성 일대의 미군 전부를 지휘하라는 군단의 말을 전했다. 미군만이었다. 국군 대대는 여전히 그의 손 밖에 있었다3.

*

같은 날 오후, 학곡리 다리목 — 중공군 제117사단 제349연대 진지.

중국 쪽 기록에는 오전 열 시 반 횡성 쪽에서 미군 두 대대가 비행기와 전차를 앞세우고 올라왔다고 적혀 있다6. 북쪽에서는 쫓겨 내려오는 행렬이, 남쪽에서는 구하러 오는 부대가 연대를 앞뒤로 눌렀다. 제5중대장 가오원녠의 중대는 세 시간 동안 여러 번 공격을 막아 내고 병력 절반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취사병과 위생병까지 총을 잡았다6.

오후 네 시, 하늘은 화약 연기로 어두웠다. 다리 북쪽에 갇힌 행렬에서 전차 한 대가 길을 뚫으려 내달리다 길가의 부서진 지프를 들이받았다. 튕겨 나간 지프가 기관총수 왕펑성의 사타구니 동맥을 찢었다. 전우들이 지혈하려 하자 그는 말했다6. “나는 놔두고, 도망가는 적이나 막아.” 그는 한 손으로 상처를 누르고 한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피가 다 빠질 때까지 다리목에서 기관총을 안고 있었다6.

밤이 되자 제6중대의 푸롄쩡이 마지막으로 길에 오른 미군 전차에 폭약통을 꽂았다. 전차는 서지 않았다. 다시 쫓아가려던 그의 귀를 총알이 뚫었다. 정신을 차리니 분대장 품이었다6.

“분대장님, 제가 붙인 전차 도망갔습니까?”

“저기 봐라. 논바닥에서 누룽지가 되고 있잖아. 네가 넘어지자마자 터졌다. 쫓아갔으면 너도 누룽지야. 그 총알이 너를 살렸어.”

중국 쪽 기록은 그날 밤 길 위의 차량 수백 대가 불타 하나의 불길이 되었다고, 학곡리 다리목에서만 사백여 명을 섬멸했다고 적었다6.

*

같은 날 저녁, 횡성 북쪽 큰길 — 갈림목에서 내려오는 미군 행렬.

행렬은 기어서 내려왔다. 저녁 아홉 시께 횡성에서 올라온 미군 전차와 공수부대 보병이 행렬과 맞닿았고, 앞쪽은 그때부터 제법 움직였다3.

행렬 앞머리가 횡성으로 들어간 뒤, 박격포탄 하나가 105밀리 곡사포를 끄는 이 톤 반 트럭에 떨어졌다. 트럭과 포가 꺾이며 길을 가로막았다. 타고 있던 사람들은 죽거나 흩어졌고, 중공군 기관총수 하나가 운전석에 총알을 퍼부어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3. 길을 뚫을 기회는 한 번 있었다. 메이스 소위의 전차 두 대가 뒤에 있었다. 전차는 부서진 트럭을 밀어내지 않고 옆 논으로 비켜 돌아 횡성으로 들어갔다. 높은 논둑 때문에 포를 끄는 트럭들은 그 길을 따라갈 수 없었다3.

막힌 자리 뒤의 병사들은 차와 포를 버리고 걸었다. 많은 사람이 끝내 닿지 못했다. 지원부대장 키스 중령도 그 안에 있었다3.

*

같은 날 밤 아홉 시, 횡성 북쪽 끝 — 네덜란드 대대 지휘소.

어두워지자 중공군이 대대 정면을 쳤고, 소총중대 하나가 밀려났다8. 지휘소 쪽으로 물러나는 국군 병사들의 무리가 다가왔다. 그 뒤에 육십 명쯤이 섞여 있었다. 네덜란드 보초가 누구냐고 외쳤다8.

“오케이! 로크스(국군)!”

대답과 함께 수류탄이 날아들었다8. 네덜란드 국방부의 기록은 그 무리를 국군 군복을 입고 미군 소총을 든 중공군으로 적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영어로 탄약을 달라고 했고, 탄약을 받은 뒤 물러서서 총에 탄을 재고 쏘았다고도 적었다9.

덴 오우덴은 지휘소 사람들을 끌어모아 둥글게 세웠다. 그는 이 자리 저 자리를 뛰어다니며 사격을 지휘했다. 박격포탄이 지휘소의 트럭에 떨어져 불이 붙었다. 불빛이 그의 몸을 비췄고, 총알이 그에게 몰렸다. 그는 맞서 쏘다가 가까이서 던진 수류탄에 쓰러졌다8. 지휘소에서 그를 포함해 열다섯 명이 전사했다10. 부대대장 에이크하우트 소령이 지휘를 넘겨받았다10. 남은 병사들은 지휘소에 들어온 무리를 몰아냈다8. 국가보훈부 기록은 이 싸움에서 대대가 전사 17명, 부상 37명을 냈다고 적었다11.

지휘소가 무너졌어도 소총중대들은 고을 끝을 지켰다. 동북쪽 골짜기에서 내려온 미 제7사단의 지원부대 7이 그 뒤로 빠져나갔고, 밤 열한 시 반에 마지막 차가 네덜란드 대대의 줄 뒤로 들어갔다3. 이튿날 새벽 한 시 조금 전, 네덜란드 대대가 맨 마지막으로 횡성을 떠났다. 중공군이 빈 고을로 들어왔지만 원주까지 쫓아오지는 않았다3.

*

1951년 2월 13일 화요일, 원주 — 미 제10군단 사령부.

리지웨이는 그날 알몬드에게 편지를 썼다3.

“사람의 목숨에 견주면 대포 한 문이 신성한 물건일 리는 없소. 그러나 오늘 아침 보고받은 제503포병대대 A포대의 155밀리 곡사포 다섯 문 같은 손실을 다시 듣고 싶지는 않소. 그것은 어느 단계에선가 심각한 지휘 잘못이 있었다는 첫 증거요.”

이튿날 알몬드는 답장을 보냈다. 작전은 계획대로 되었고, 중공군이 국군 대열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보병 두 대대와 포병 한 대대가 휩쓸렸을 뿐이라고 했다3.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주요 부대의 통제를 잃은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날 국군 제8사단은 군단 예비로 빠져 남쪽 주포리(현 충청북도 제천시)로 물러났다. 낙오병을 거둬 센 사단 병력은 장교 263명과 병사 3,000명 남짓이었고, 그 절반은 후방의 근무 부대였다3. 죽거나 사라진 사람은 장교 323명, 병사 7,142명이었다. 그 안에 제10연대장과 참모 전원, 제16연대 부연대장, 대대장 일곱, 중대장 서른이 있었다3. 미 육군 전사는 11일 밤부터 13일 새벽까지 제10군단의 손실을 국군 9,800여 명, 미군 1,900여 명, 네덜란드군 백여 명, 모두 11,800여 명으로 적었다3. 중국 쪽은 국군과 미군 1만 2천여 명을 섬멸하고 그중 7,800명을 사로잡았으며, 자기들은 4,141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적었다6.

*

같은 날, 원주 — 국군 제8사단 의무대대가 다친 병사들을 받던 병원.

위생병 김원한은 전쟁이 나기 한 해 전 횡성 옥동리(현 횡성군 횡성읍 옥동리)의 성동국민학교에 교사로 발령받았다. 고향을 지키겠다고 청년방위군에 자원했고, 위생병으로 뽑혀 원주에 있었다1. 횡성에서 실려 오는 병사들은 그가 이름을 아는 고을의 산과 개울에서 다친 사람들이었다.

그는 부상자를 들것에 실어 치료실로 날랐다. 들것을 내려놓고 다시 들것을 들었다. 병원에 와서 숨을 거두는 병사가 많았다. 겨울이었고, 눈이 많이 왔다. 땅은 얼어서 괭이가 들어가지 않았다1. 김원한과 동료들은 죽은 병사들을 눈 속에 묻었다1.

누군가 눈을 덮으며 물었다.

“이 사람 이름은 뭐라고 적습니까?”

“모르면 모른다고 적어. 봄에 다시 와서 찾게.”

2월 13일 저녁, 횡성에서 서쪽으로 서른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마을 지평리(현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에서 중공군 여섯 개 연대가 미 제23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5.

사료 출처

1. 김인나, 「치열했던 횡성전투, 그날을 기억하며」, 주간기쁜소식 2021.6.11, igood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1722 — 횡성 출신 참전용사 정위철(19세 입대, 제8사단 사령부 통신병, 희천까지 진격했다가 후퇴해 고향에 와 보니 마을이 다 탔다는 증언)과 김원한(옥동리 성동국민학교 교사 발령 이듬해 전쟁, 청년방위군 자원, 제8사단 의무대대 위생병으로 원주에 주둔, 들것으로 부상자 운반, 병원에서 죽은 군인들을 언 땅을 파지 못해 눈 속에 묻었다는 증언).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횡성전투」, encykorea.aks.ac.kr/Article/E0065617 — 라운드업 작전 2월 5일 개시(국군 제5·8사단 공격 부대), 제8사단이 예비대 없이 세 연대를 모두 투입, 2월 11일 17시 중공군 제42군 제124사단의 진격 개시와 19시 제66군 주력의 사단 정면 공격, 12일 01시경 사단 후방 차단, 네덜란드 대대의 횡성교 확보, 사단의 잔여 병력과 손실, 참고문헌 『횡성전투』(국방군사연구소 1995)·『6·25전쟁의 실패사례와 교훈』(2013). 원본 『횡성전투』는 직접 보지 못했다. 3.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25화 출처와 같은 책) 제13장 「Advance to the Han」의 Operation Roundup·The Newest Army Estimate 절(258~265쪽), 제14장 「The Battle for Hoengsong」 전체(267~281쪽, 표 4) — 2월 11일 밤 제8사단 세 연대의 위치와 3마일·1마일 간격, 지원부대·지원팀 배치, 리지웨이의 진격 중지 무전과 지휘 체계 우려, 「unity of command … vested in corps headquarters, no lower」, 제198·120·117사단의 공격(20시 30분 무렵), 최영희의 단거리 철수 명령, 지원팀 B 22시 창봉리 도착, 다리 근처 도로 차단, 자정 무렵 제10·16연대 지휘소 피습, 01시 통신 두절, 01시 15분 키스의 철수 요청과 헤인스–러프너–엔니스–매캐프리–알몬드 경로, 02시 45분 허락, 알몬드의 오해, 02시 30분 A중대 피습, 03시 출발, 메이스 소위와 전차 두 대, 제503야전포병대대 A포대장 피랍, 04시 정지, 가드너가 버려진 155밀리 곡사포를 발견, 10시 갈림목 도착과 400명 넘는 사상·A중대 장교 2·병사 약 110명 손실, 코글린의 경비소대·전차소대 실패와 제2대대 요청 거절, 네덜란드 대대의 임무, 정오 알몬드의 즉시 철수 명령, 리지웨이의 원주 방문과 횡성 포기 결정, 켈러허의 공격 정체, 14시 국군 제3사단 대대의 반 마일 전진과 호지스와의 대화(「his orders … were to take the hills he now occupied and hold them only until dark」), 14시 30분 제3대대 해제·16시께 전달, 18시 넘어 윌름 중령의 지휘권 통보, 21시 지원팀 E와 합류, 박격포탄에 맞은 트럭과 곡사포, 메이스의 전차 두 대가 논으로 비켜 감, 키스 실종, 덴 오우덴 전사와 네덜란드 중대들의 고수, 지원부대 7의 23시 30분 통과, 네덜란드 대대 01시 직전 철수, 제8사단 병력·손실·장비, 표 4 손실 11,862명(국군 9,844·미군과 유엔군 2,018), 리지웨이의 2월 13일 편지(원문: While there is nothing sacrosanct about a piece of artillery, compared to the loss of the lives of men, I don't expect to hear again of such loss as reported to me this morning of five 155 Hows of Battery A, 503rd. It is prima facie indication of faulty leadership of serious import in some echelon.), 알몬드의 2월 14일 답장(원문: There has never been any loss of control of the major units.). 4. 「横城大捷:朝鲜战场的绝杀反击战」, 学习时报, 봉황망 재게재 2021.5.25, news.ifeng.com/c/86X5laxhK1E — 2월 9일 지원군 사령부의 반격 지시, 펑더화이의 2월 7일 의견 청취, 9개 사단(1개 연대 빠짐) 약 10만 명, 9킬로미터 주 돌파 구간에 6개 사단, 병력비 1대 7.3, 2월 11일 17시 공격 개시. 5. 「第四次战役」, 新浪军事 2000.6.20, news.sina.com.cn/world/2000-06-20/99217.html — 덩화가 제39·40·42·66군(덩 집단)을 지휘, 2월 11일 17시 공격과 각 사단의 축선(제117사단이 하룻밤 30여 킬로미터를 나아가 학곡리·하일 진출, 제118사단의 광전 진출, 제198사단의 오음산 돌파), 12일 제8사단 세 연대 섬멸 주장, 퇴로 차단 실패로 제8사단 사령부와 제3사단 주력·미 제2사단 일부가 빠져나갔다는 서술, 13일 밤 6개 연대의 지평리 공격. 6. 『百面战旗红』 창작조(집필 初见·陈卓·叶征), 「横城反击建奇功——“甲等功臣团”」, 人民周刊 2023.5.29 제8면, paper.people.com.cn/rmzk/html/2023-05/29/content_25990140.htm — 2월 12일 7시 전 학곡리 다리목 차단 명령, 장제청·리사오위안·쉐푸리·캉잉중·자오셴순·왕더위의 이름과 직책, 세 연대의 순서와 쉐푸리의 불만과 장제청의 꾸지람, 닷새치 식량, 칠천여 명이 왼팔에 흰 수건, 자정에 제351연대의 길 잃음과 제349연대의 전위 전환, 새벽 1시 800미터 넘는 설산과 캉잉중의 말, 4시 경계 부대와의 싸움(116명 사살·포로 주장)과 샤오린 전사, 300미터·60도 비탈 미끄러져 내려감, 30분 일찍 도착, 쉐푸리와 국군 패잔병 여덟 명(권총 두 번 불발, 넷 체포), 장제청과 쉐푸리의 전화, 제4중대와 자오훙지 폭파조의 전차 두 대, 10시 30분 횡성 쪽 두 대대, 가오원녠의 제5중대, 16시 왕펑성의 죽음과 그의 말(「不要管我,快快堵住逃跑的敌人」), 푸롄쩡과 분대장의 대화, 다리목 400여 명 섬멸과 불타는 차량 행렬 주장, 동부 네 군 사상 4,141명·섬멸 1만 2천여 명·포로 7,800명 주장. 선전 성격이 강한 기사여서 숫자는 모두 「중국 쪽 기록」으로 적었다. 7. 한국어 위키백과, 「권태순」(2026년 10월 열람) — 1922년 2월 5일 강릉 출생, 육사 2기, 1950년 12월 대령, 횡성 전투 때 제10연대장, 2월 12일 새벽 2시경 포위와 통신 두절, 「각 대별로 횡성으로 탈출하라!」는 명령, 연대장과 참모 전원 전사·행방불명, 1951년 2월 12일 횡성에서 사망. 위키 문서에 출처 불분명 틀이 붙어 있어 말과 사망 경위는 「전한다」로만 적었다. 연대장의 전사·실종은 머니투데이 2026.6.29 유해 안장 기사(「연대장 권태순 대령을 비롯한 지휘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로도 확인했다. 8. 미 제8군 일반명령 제106호(1951.2.28), 덴 오우덴 중령 은성훈장 공적서, valor.militarytimes.com/?p=118125 — 12일 어두워진 뒤 중공군 공격으로 소총중대 하나가 밀려남, 21시 철수하는 국군 병사들 뒤에 섞인 약 60명의 침투, 수하에 「OK! ROKs!」라고 대답하고 수류탄 투척, 지휘소 인원을 원진으로 모음, 불붙은 트럭에 몸이 드러나 집중 사격을 받음, 근거리 수류탄으로 치명상, 부하들이 적을 물리침. 9. 네덜란드 국방부, 「Helden: Den Ouden」, Landmacht 2014년 10월호, magazines.defensie.nl/landmacht/2014/10/helden-den-ouden — 약 400명의 중공군이 국군 군복에 미군 소총을 들고 다가와 우두머리가 영어로 탄약을 청한 뒤 사격, 덴 오우덴이 첫 사격 직후 쓰러짐, 에이크하우트 소령의 지휘 인수와 325고지, 사후 빌럼 군사훈장. 10. 네덜란드어 위키백과, 「Marinus den Ouden」(2026년 10월 열람) — 1909년 8월 21일 아우트엔니우가스털 출생, 1950년 10월 21일 임시 중령·네덜란드 유엔 파견대 대대장, 12월 중순부터 미 제2사단 제38연대 배속, 지휘소 피습으로 덴 오우덴 등 15명 전사, 에이크하우트 소령의 지휘 인수, 부산 유엔기념공원 안장. 11. 국가보훈부 영문 누리집, 「Background of Participation and Activity of each Forces」 네덜란드 항목,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13, 및 「Key Battles」 key=1402 — 1950년 11월 23일 부산 도착, 2월 공세 때 대대장을 잃고 혼란, 전사 17명·부상 37명, 중화기중대장이 지휘권을 넘겨받아 13일 새벽까지 원주로 철수, 중공군이 국군으로 위장해 오른쪽 뒤로 침투.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최영희 1921년생(한국어 위키백과 「최영희 (1921년)」), 권태순 1922년생(출처 7), 덴 오우덴 1909년생(출처 10), 장제청 1917년생(중국어 위키백과 「张竭诚」), 러프너 1903년생(영문 위키백과 「Clark L. Ruffner」), 리지웨이 1895년생(영문 위키백과), 알몬드 1892년생·펑더화이 1898년생·덩화 1910년생(25화 [나이]와 같은 근거). 정위철·김원한은 2021년 기사에 「92세」로 나오나 만 나이인지 세는 나이인지 알 수 없어 나이를 적지 않았다. 키스, 켈러허, 헤인스, 엔니스, 매캐프리, 메이스, 가드너, 코글린, 호지스, 에이크하우트, 리사오위안, 쉐푸리(기사에 「서른 남짓」), 캉잉중, 샤오린, 가오원녠, 왕펑성, 푸롄쩡, 자오훙지는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공격 개시 시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중국 쪽 기록은 2월 11일 17시(중공군 제124사단 등), 19시(제66군 주력의 제8사단 정면), 미 육군 전사는 20시 30분 무렵(제198사단의 제21연대 정면)으로 적었다. 본문은 중국군 출발을 17시, 제21연대 정면 공격을 20시 30분으로 두었다. [자료 충돌] 손실 — 미 육군 전사 표 4는 11,862명(국군 9,844, 제8사단 7,465, 미군과 유엔군 2,018), 본문(279쪽)은 「국군 9,800·미군 1,900·네덜란드군 100, 모두 11,800여 명」. 중국 쪽은 섬멸 1만 2천여 명·포로 7,800명, 자기 손실 4,141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제8사단 전사·실종을 장교 323명·병사 7,142명으로 미 전사와 같게 적었다. 네덜란드 대대 손실은 국가보훈부 「전사 17·부상 37」, 네덜란드어 위키백과 「지휘소에서 15명 전사」, 미 전사 「약 100명」으로 다르다. 범위(지휘소만인지 대대 전체인지, 실종 포함인지)가 서로 달라 셋 다 적었다. [자료 충돌] 네덜란드 대대 지휘소 피습 — 은성훈장 공적서는 21시, 국군 병사 뒤에 섞인 약 60명, 「OK! ROKs!」라는 대답을 적었고, 네덜란드 국방부 잡지는 국군 군복 차림의 약 400명이 영어로 탄약을 청했다고 적었다. 미 육군 전사는 행렬이 횡성에 들어오기 시작한 22시 전후 대대 정면 전체가 공격받았다고 적었다. 지휘를 넘겨받은 사람도 네덜란드 자료는 부대대장 에이크하우트 소령, 국가보훈부는 중화기중대장으로 적었다. 본문은 공적서의 시각과 장면, 네덜란드 자료의 지휘 인수를 따르고 잡지의 서술은 따로 적었다. [자료 충돌] 학곡리 싸움 — 중국 쪽은 횡성 쪽 두 대대의 구원 공격과 밤의 불타는 차량 행렬, 다리목에서 400여 명 섬멸을 적었으나, 미 육군 전사는 코글린의 행렬이 큰 손실을 입으면서도 22시 전 횡성에 들어왔다고 적었다. 중국 쪽의 학곡리 다리와 미 전사의 「횡성과 갈림목 사이 차단 지점」이 같은 곳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신랑 군사 기사는 퇴로 차단이 늦어 제8사단 사령부와 제3사단 주력, 미 제2사단 일부가 빠져나갔다고도 적었다. [자료 충돌] 권태순 연대장의 최후 — 한국어 위키백과는 자결설과 적탄 전사설을 함께 적었다. 본문은 돌아오지 않았다고만 적었다. 하창규 일병의 전사일이 머니투데이 기사에 「1951년 2월 9일 횡성전투」로 나와 미 전사의 공격 날짜(11일 밤)와 맞지 않아 본문에 쓰지 않았다. [자료 충돌] 제8사단이 물러난 곳 — 미 육군 전사는 제천 서쪽 주포리(Chup'o-ri),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주간기쁜소식은 원주 남쪽 주천리로 적었다. 본문은 미 전사를 따랐다. [자료 충돌]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네덜란드 대대를 「미 제7사단 제38연대 배속」으로 적었으나, 미 육군 전사와 은성훈장 공적서는 미 제2사단 제38보병연대로 적었다. 본문은 뒤를 따랐다. [재구성] 정위철과 동료의 「굴뚝」 대화, 정위철이 무전으로 제10연대를 부르는 장면과 그 말, 최영희에게 미군 포대를 움직일 권한이 없었다는 대목의 표현(지휘 체계는 기록), 「산과 산 사이로 … 너비였다」는 서술, 장제청의 꾸지람(원문 「长本事了是不是?还挑挑拣拣,让你当二梯队是看得起你!」을 우리말로 옮김)과 쉐푸리의 말(원문 「我就知道师长不会偏心眼儿,瞧我们的了!」)·장제청과의 전화(원문 「你不想活了?1个去打他们8个,万一受伤了,全团谁去指挥?」)의 우리말 옮김과 다듬기, 「이런 젠장!」(원문 「他奶奶的!」), 호지스와 국군 대대장의 대화(미 전사의 간접 서술을 대사로 옮김), 푸롄쩡과 분대장 대화의 우리말 다듬기, 행렬과 산길의 몸짓·날씨 묘사, 김원한 장면에서 「이 사람 이름은 뭐라고 적습니까?」로 시작하는 대화와 「그가 이름을 아는 고을의 산과 개울」이라는 대목(눈 속에 묻었다는 사실은 증언)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3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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