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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17,822자)

1·4후퇴 — 서울을 두 번 떠나다

1950 · 네오

중공군 제3차 공세와 1·4후퇴, 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8일 — 임진강, 고랑포리·적성·봉일천·벽제·덕정·의정부·동두천, 서울과 한강, 영등포·김포·인천·수원·오산·평택·안성. 12월 31일 저녁 중공군 제39군 제116사단의 고랑포 부근 임진강 돌파, 제38군·제40군의 국군 제6사단 공격, 1월 1일 유엔군 서울 교두보선, 1월 3일 영국 제29여단 후위의 고양 피습, 1월 3일~4일 한강 다리 셋과 얼음 위 피란길, 1월 4일 중공군 제39군·제50군과 북한군 제1군단의 서울 진입, 1월 8일 무렵 유엔군

1950년 12월 31일 오후 네 시 반, 경기도 북쪽 임진강 가의 나루 마을 고랑포리(현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건너편 눈 덮인 산비탈.

중공군 제39군 제116사단 제347연대 제5중대 병사들은 눈 속에 엎드린 채 해를 보내고 있었다. 큰 눈이 진지를 덮었고, 강 건너 남쪽 기슭은 십 미터가 넘는 벼랑이었다1. 강폭은 백오십 미터쯤, 물 깊이는 한 길이 안 되었고, 강 위에 언 얼음은 손 한 뼘 두께였다1. 그해 겨울 기온은 영하 이십 도까지 내려갔고, 임진강과 그 지류 한탄강의 여울은 대부분 얼어붙어 있었다2.

병사들은 출발 전에 비옷을 잘라 버선과 바지를 지어 입었다. 다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헝겊 신발은 마대 자루로 싸맸다1. 포병은 대포를 흰 천으로 덮고 바퀴에 볏짚을 감아 끌고 왔다. 벼랑을 오를 갈고리 사다리와 지뢰를 더듬을 장대도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1.

“부중대장 동지, 바지에 기름 바르니까 꼭 만두 빚기 전 손바닥 같습니다.”

“그럼 물에 들어가서 익혀 봐라. 강 건너가 시장이다.”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52)는 이달 초 베이징에 전보를 쳤다. 병사들을 채우고 먹이고 입히려면 적어도 석 달은 쉬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2. 12월 13일, 마오쩌둥(57)의 전보가 왔다. 38선 북쪽에서 멈추면 정치적으로 크게 불리하니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38선을 넘으라는 전보였다3. 펑더화이는 여섯 개 군을 모았다3. 임진강을 깨뜨리는 일은 군장 우신취안(38)의 제39군에 떨어졌다. 펑더화이의 명령은 짧게 전해졌다1.

“용이 되어서라도 임진강을 날아서 건너라.”

사단장 왕양은 몸소 강가를 돌아보고, 벼랑에 난 골짜기 넷을 골라 돌격로로 정했다. 그 길마다 중대 하나씩, 네 개 중대가 맨 앞에 섰다1.

네 시 사십 분, 산 뒤에서 대포 여든여섯 문이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1. 강 건너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진지 위로 흙과 눈이 솟았다4. 다섯 시 삼 분, 포성이 멎었다1. 부중대장 후더건이 맨 먼저 강으로 내려섰다. 얼음은 군화 밑에서 버티다가 강 가운데 여울에 이르러 꺼졌다. 물이 가슴까지 찼다1. 제7중대 소대장 왕펑장은 물에 쓰러진 병사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소리쳤다.

“올라가기만 하면 이긴다!”

기관총 사수 리후이는 물속에 떨어뜨린 기관총을 더듬어 건져 올렸고, 벼랑 위 국군 중기관총을 그것으로 잠재웠다1.

오른쪽 골짜기에서는 제346연대 제4중대가 벼랑 밑의 지뢰밭에 걸렸다. 지뢰 제거조장 장차이수는 장대로 땅을 더듬다 지뢰를 터뜨려 크게 다쳤다. 머리에 파편을 맞은 선중쉐는 피를 흘리며 벼랑을 기어올라 폭약 꾸러미로 국군 토치카 하나를 날렸다1. 제1중대의 분대장 웨이지셴은 수류탄만으로 토치카 일곱 개를 차례로 부쉈다1. 갈고리 사다리가 얼어붙은 벼랑에 걸리고, 그 위로 사람이 줄지어 올라갔다.

강가에 엎드린 병사들의 젖은 바지가 바람에 순식간에 굳었다. 해는 이미 졌다. 미 육군 전사는 그 시각을 ‘완전히 어두워진 직후’로 적었다4.

*

1951년 1월 1일 새벽, 서울 북쪽 의정부(현 의정부시)로 가는 길.

미 제8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55) 중장은 지프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군복 왼쪽 멜빵에는 구급낭을, 오른쪽 멜빵에는 수류탄 한 발을 걸었다4. 그가 한국에 온 지 엿새째였다. 열흘 전 전임 사령관 워커(61) 중장이 바로 이 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민간인 트럭과 부딪쳐 지프째 뒤집혔고, 근처 미 제24사단 구호소에서 숨졌다4. 리지웨이는 워싱턴에서 날아와 크리스마스 자정 무렵 도쿄에 내렸다. 맥아더(70)는 그에게 말했다4.

“제8군은 자네 것이야, 매트. 자네가 최선이라 생각하는 대로 하게.”

리지웨이는 나흘 동안 전선의 군단과 사단을 거의 다 돌았다. 그가 지휘소마다 본 것은 대답하기 싫어하는 얼굴들이었다4. 정보참모부는 그에게 커다란 빨간 타원 하나가 그려진 지도를 내밀었다. 타원 한가운데에는 ‘174,000’이라는 숫자만 적혀 있었다. 적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그 병력도 위치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4. 리지웨이는 지휘관들에게 적과 맞닿을 때까지 정찰을 내보내라고 다그쳤다. 오솔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물었을 때 모른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4. 사단장은 맨 앞 대대 곁에, 군단장은 가장 뜨거운 싸움을 하는 연대 곁에 있으라는 명령도 내렸다4.

12월 27일 서울에서 그는 이승만(75) 대통령을 만나 서울 위아래에 진지를 팔 민간인 인부 삼만 명을 청했다. 이튿날 새벽까지 첫 일만 명이 삽을 들고 나왔다4.

밤사이 보고가 쌓였다. 중공군이 국군 제1사단의 제12연대를 밀어냈고, 그 뒤를 받치던 미 제9야전포병대대의 C포대가 임진강 남쪽 십삼 킬로미터 지점에서 매복에 걸려 155밀리 곡사포 네 문을 잃었다4. 리지웨이는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맞닿은 곳으로 차를 몰았다.

몇 킬로미터 못 가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트럭들이 보였다. 짐칸마다 국군 병사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소총 몇 자루 말고는 무기가 보이지 않았다4. 리지웨이는 지프에서 뛰어내려 길 한가운데 서서 두 팔을 휘저었다. 트럭은 서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차라리 한강의 흐름을 막으려 드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4.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낙오병을 붙잡아 다시 모을 지점을 길목마다 세우라고 명령하는 것뿐이었다.

군단 사령부에 닿고서야 그는 사정이 길 위에서 본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30) 준장은 제11연대와 제15연대를 중공군이 쐐기처럼 박혀 든 자리의 서쪽 어깨 능선에 다시 세우고 있었다. 제6사단장 장도영(27) 준장은 예비 제2연대를 의정부로 내려가는 길에 돌려세워 열린 왼쪽 옆구리를 막고 있었다4. 그러나 동쪽 춘천 방면의 국군 제3군단도 새벽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정오, 리지웨이는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에 서울 북쪽 교두보선으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4. 사령관이 된 지 엿새 만의 철수 명령이었다.

그날 밤 제6사단은 산길로 물러나다 흩어졌다. 해가 졌을 때 장도영은 사단을 손에 쥐고 있지 못했다. 이틀 뒤 아침, 다시 모인 병력은 원래의 절반쯤인 육천 명이었다4.

*

1951년 1월 3일 오후, 서울 남쪽 한강 백사장 — 끊어진 옛 다리들 대신 미군 공병이 놓은 다리 둘이 강을 건너는 자리.

미 제1군단 부참모장 웅거 대령의 교통통제소는 전날 아침부터 그 모래밭에 천막을 쳤다4. 한강에 남은 다리는 셋이었다. 서울 바로 아래에 배를 이어 놓은 부교 하나와 철도 침목을 깔아 만든 다리 하나, 서울 동쪽으로 육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부교 하나였다. 피란민이 건널 수 있는 것은 사람만 다니는 부교 다섯 줄이 전부였다4. 그 다리들이 강 위의 얼음에 부딪혀 언제 떠내려갈지 몰라 공병들은 밤낮으로 얼음을 깼다4.

전날 공병들이 보고를 올렸다. 강이 걸어서 건널 만큼 단단히 얼었다. 서울 사람들이 벌써 얼음 위로 건너가고 있었다4. 그 얼음은 군대에게도 걱정거리였다. 중공군이 교두보 양옆의 언 강을 걸어 건너오면 서울 북쪽의 군대는 등 뒤를 잘릴 수 있었다.

리지웨이는 오후 세 시까지만 민간인에게 다리를 열어 주라고 정했다. 그 뒤로는 군대만 건넌다. 헌병들에게 내려온 지침은 이랬다. 큰길에서 비키지 않는 피란민에게는 먼저 머리 위로 쏘고, 마지막 수단으로는 사람을 향해 쏜다4. 정부 관리들이 다 건너지 못해 마감은 저녁 여섯 시로 늦춰졌다4.

미 제1군단의 기록에는 지난 두 주 동안 서울에서 빼낸 것들이 적혀 있었다. 감옥과 유치장의 죄수 전원, 병원 한 곳을 뺀 모든 병원의 의사와 환자, 고아원 대부분의 아이들, 한국은행의 지폐와 지폐 원판, 박물관과 미술관의 소장품이었다4. 전날 리지웨이는 철수할 때의 폭파 원칙도 글로 내려보냈다. 적에게는 가장 큰 타격을, 민간인에게는 가장 작은 피해를 준다. 땅을 모조리 불태우는 초토 작전은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4.

모래밭 앞에서 헌병 하나가 소총을 가로로 들고 섰다. 그 앞에 보따리를 인 여자들, 지게에 노인을 얹은 남자들, 이불 보퉁이를 끄는 아이들이 밀려들었다.

“여기는 군대 길이오! 얼음으로 가시오!”

“얼음이 깨지면 어떡합니까!”

헌병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강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쪽 얼음 위로 검은 사람의 줄이 남쪽 기슭까지 이어져 있었다. 프랑스 종군기자들은 그 무렵 서울을 빠져나가며 얼음이 꺼져 물에 빠져 죽는 피란민을 보았다. 길가에 어린아이를 두고 혼자 남쪽으로 걸어가는 여자도 보았다5.

그날 밤 여덟 시, 남아서 수도와 전기를 돌리기로 했던 서울의 발전소와 수도국 직원들이 일을 놓고 제 발로 떠났다. 서울은 물도 불도 끊긴 채 밤을 맞았다4.

*

1951년 1월 초, 서울 — 미 제8군 사령부가 비워지던 건물.

참모들이 서류 상자를 트럭에 싣는 동안 리지웨이는 자기 가방을 뒤졌다. 그가 꺼낸 것은 닳아 빠진 줄무늬 플란넬 잠옷 바지였다. 엉덩이 쪽이 더는 꿰맬 수 없을 만큼 터져 있었다6. 리지웨이는 그 바지를 집무실 벽에 압정으로 박았다. 그리고 그 위에 종이 한 장을 붙였다6.

“중공군 사령관 귀하. 제8군 사령관이 삼가 드림.”

부관이 벽을 쳐다보았다.

“장군님, 그건 선물입니까, 선전포고입니까?”

“둘 다야. 엉덩이 쪽으로 받으라고 해.”

그 이야기는 순식간에 전선의 병사들 사이로 퍼졌다6. 쫓겨나는 군대의 사령관이 적에게 찢어진 잠옷을 남겼다는 이야기였다. 병사들은 그 바지를 본 적도 없으면서 웃었다.

*

1951년 1월 3일 밤~4일 아침, 경기도 고양 북쪽 — 서울로 내려오는 1번 국도 곁 골짜기, 영국 제29여단의 마지막 후위.

여단장 토머스 브로디 준장은 이틀 전 새해 첫날 여단에 일일 명령을 내렸다. 한국에 온 뒤 처음으로 우리와 중공군 사이에 아무도 없다. 위에서 명령하지 않는 한 이 여단은 물러서지 않는다. 적을 만나면 가진 것을 다 써서 두들겨라4. 병사들은 그 명령을 읽고 이틀 만에 남쪽으로 돌아섰다.

그날 아침 일곱 시 반, 중공군 제39군의 부대가 영국 제29여단의 오른쪽 노섬벌랜드 퓨질리어 대대를 치고, 이어 왼쪽 로열 얼스터 라이플 대대를 더 세게 쳤다4. 중대 둘이 진지를 내주었다가 오후에 전차와 함께 되찾았다4. 저녁 여섯 시 사십오 분, 여단이 서울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맨 끝은 얼스터 대대의 B중대와 중화기중대 일부, 전차 십여 대였다4.

자정 직전, 중공군이 그 후위를 에워쌌다4. 영문 기록은 상대를 중공군 제50군 제149사단 제446연대로 적었다. 길 위에서 붙잡힌 영국 병사들 대부분은 총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2.

이튿날 아침 아홉 시, 미 제27보병연대장 마이클리스(38) 대령의 지휘소에 교두보의 지휘관들이 모였다. 마이클리스는 자기 연대에서 구출 부대를 떼어 보내겠다고 했다. 브로디가 막았다4.

“병력을 더 잃을 수는 없소. 갇힌 사람들은 제 힘으로 뚫고 나와야 하오.”

후위 가운데 일부는 정말로 뚫고 나왔다. 그러나 이백오십에서 삼백 명, 전차 열 대 이상이 돌아오지 못했다4.

*

1951년 1월 4일 오후, 서울 — 국방부가 내던 군대 신문 『승리일보』의 사무실.

시인 구상(31)은 그 신문의 일을 보고 있었다. 1·4후퇴를 앞두고 그는 서울에 남은 문인과 예술가들에게 승리일보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다. 한강 다리를 지키는 헌병 앞에서 그 종이 한 장이 길을 열어 주기를 바랐다7. 소설가 김이석, 시인 양명문, 작곡가 김동진이 그 신분증을 들고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7.

구상은 오후 두 시에 국방부 정훈국 사람들과 함께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출발 직전에 미군 대위 하나가 통역장교를 데리고 사무실에 들이닥쳤다7.

“전단이 급히 필요합니다. 피란민 줄에 섞인 중공군과 인민군을 떼어 내는 내용입니다.”

“지금 말입니까? 우리도 두 시에 떠나야 합니다.”

“지금입니다.”

구상은 남았다. 그는 미군 대위가 내민 문안을 우리말로 다듬어 인쇄기로 넘겼다. 전단은 다 찍혔다. 그러나 그 종이는 한 장도 뿌려지지 못하고 버려졌다. 그날 오후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왔다7. 그날 아침 여덟 시에 미군 비행기가 한강 위에서 뿌린 다른 전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제부터 한강을 건너는 것을 금한다. 건너려는 자에게는 총을 쏜다.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이다4.

그날 밤 늦게, 다리를 모두 잃은 강 앞에서 구상은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서 건넜다7.

*

1951년 1월 4일 오후 두 시, 한강 — 서울에 남은 마지막 배다리.

공병들은 서울 동쪽의 부교를 새벽부터 다섯 시간 동안 뜯었다. 얼어붙은 핀과 오래 써서 끼인 부품이 빠지지 않았다. 아침 일곱 시 반, 미 제24사단 부사단장 데이비슨 준장은 나머지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4. 침목 다리도 무너졌다. 남은 것은 서울 바로 아래의 부교 하나였다.

마이클리스의 제27연대가 서울 서북쪽 끝에서 철길과 큰길을 막고 있었다. 아침 일곱 시, 중공군 삼사백 명이 철길 쪽 중대를 쳤다4. 연대는 영국 제27여단이 다 건너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여단은 아침 아홉 시에 이미 강을 건넌 뒤였다. 연락장교가 엉뚱한 다리에 가 있었던 탓에, 마이클리스는 열한 시가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4. 그는 곧 접촉을 끊고 물러났다. 오후 한 시 십오 분, 연대 전원이 강 남쪽에 있었다4.

통제관 팔머 준장은 다리 위 판자를 사분의 일쯤 걷어 냈을 때 나머지를 터뜨리라고 했다. 폭약이 두 번 터졌다. 다리는 요란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공병들이 다리 둘레만 깨어 두었던 물이 다시 얼어붙으며, 다리는 천천히 가라앉았다4. 다리 북쪽 끝을 지키던 K중대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서울을 나왔다. 그들은 방금 얼기 시작한 강을 걸어서 건넜다4.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찰기가 서울 거리의 중공군 정찰대를 보았다. 국군 제1사단이 서울로 들여보낸 수색대는 시청 건물에 인공기가 오르는 것을 보았다4. 서울은 여섯 달 사이에 세 번째로 주인이 바뀌었다. 그날 서울에 들어온 군대는 중공군 제39군과 제50군, 북한군 제1군단의 부대들이었다3.

서울을 떠난 사람은 육십만 명쯤, 인구의 절반이었다. 남은 사람 대부분도 한강 북쪽의 가까운 마을로 흩어졌다4.

*

1951년 1월 어느 날, 서울 서대문 현저동(현 서대문구 현저동) — 서대문형무소 담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동네.

박완서(19)의 식구는 떠나지 못했다8. 오빠가 오발 사고로 총에 맞아 움직일 수 없었다. 집에 남은 사람은 늙은 어머니와 앓아누운 오빠, 올케, 어린 조카들, 그리고 그녀였다8. 이웃집들은 문이 잠긴 채 비어 있었다. 서울에는 노인과 아이 몇을 빼면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다8.

수도는 나오지 않았고, 쌀독은 바닥을 보였다. 박완서와 올케는 밤이 되면 집을 나섰다. 빈집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남은 양식을 찾았고, 추위를 견디려고 이불까지 들고 나왔다8.

“아가씨, 이건 도둑질이에요.”

“알아요, 언니. 주인이 돌아오면 갚아요. 살아 있어야 갚죠.”

열린 장롱 안에는 피란 짐에 못 들어간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부엌 선반에는 누가 먹다 만 김치 단지가 얼어 있었다. 문간에는 아이의 고무신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 집 식구들은 한강 얼음 위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것이었다. 박완서는 쌀자루를 끌어안고 남의 집 문턱을 넘었다.

오빠는 끝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숨졌다8. 스무 해 가까이 지나 박완서는 1·4후퇴 뒤 텅 빈 서울에 남은 스무 살 여자의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썼다. 『나목』이었다. 1970년, 그 원고로 그녀는 마흔에 작가가 되었다8.

*

1951년 1월 8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펑더화이의 지도 위에서 지원군과 북한군의 선은 북위 37도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1월 5일, 펑더화이는 제50군과 북한군 제1군단에 김포와 인천을 차지하라고 명령하고 나머지 부대는 한강 북쪽에서 쉬게 했다2. 그러나 유엔군은 흩어져 달아나지 않았다. 물러나는 걸음에 차례가 있었다. 펑더화이는 그것이 지원군을 더 깊이 끌어들인 뒤 되치려는 계획일 수 있다고 보았다. 너무 멀리 나가면 불리했다3. 그는 추격을 멈추라고 명령했다3.

서울을 되찾았다는 축하가 이어졌다. 부사령관 덩화(40)는 그 소식을 듣고 말했다2.

“지금 서울 수복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우리가 서울을 내놓게 되면 무슨 말을 하려나.”

중국 쪽 자료는 이 공세에서 지원군 약 오천팔백 명, 북한군 약 이천칠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적었다3. 임진강을 처음 깨뜨린 제116사단 한 곳에서만 칠백열두 명이 쓰러졌다1. 유엔군의 철수선은 서울 남쪽 육십 킬로미터, 서쪽 오산에서 동쪽 삼척까지 그어졌다9. 이승만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9.

여섯 달 전 여름, 서울 사람들은 끊어진 인도교 앞에서 나룻배를 기다렸다. 이번 겨울에는 다리 대신 얼음 위를 걸었다. 그 얼음은 봄이 오면 녹을 것이었고, 강을 건넌 사람들은 그 전에 돌아갈 수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서울에 들어간 것은 두 달 남짓 지난 3월 중순이었다9.

*

1951년 1월 11일 해 질 무렵, 평양 동쪽 평안남도 성천군의 산골 마을 군자리(현 북한 평안남도 성천군) —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북한의 김일성(38)과 박헌영(50)이 펑더화이의 사령부를 다시 찾아왔다. 세 사람은 전날에도 같은 자리에서 맞섰고, 그날의 다툼은 끝나지 않은 채 하루를 넘겼다10. 황혼 무렵 세 사람이 다시 마주 앉았을 때 방 안은 처음부터 싸늘했다10.

북한은 추격을 멈춘 1월 8일의 명령을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날 김일성은 베이징이 평양에 보낸 무관 차이청원에게 부대를 쉬게 하는 것은 한 달이면 넉넉하다고 말했다. 더 끌면 강과 논의 얼음이 풀려 부대가 움직이기 어렵고, 적에게는 장비를 채우고 숨을 돌릴 틈만 준다고 했다11. 그해 11월 슈티코프의 뒤를 이어 평양에 온 소련 대사 라주바예프(46)의 반대 의견도 북한 외무상 박헌영의 입을 거쳐 펑더화이에게 건너왔다11.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박헌영이었다. 그는 소련 쪽에서 들어온 정보를 근거로 내밀었다10.

“미군은 곧 철수합니다. 이런 때 우리가 쫓아가지 않으면 미군이 철수 계획을 거둬들일지도 모릅니다. 밀고 내려가야 미국 자산계급 안의 모순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펑더화이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넘기지 않았다.

“미군이 물러날 생각이라면 우리가 쫓지 않아도 물러나오. 그 모순을 깊게 하려면 미군 몇 개 사단이라도 없애야 하오. 지금 우리 군대는 쉬고 채워야 다시 싸움터에 설 수 있소.”

김일성이 둘 사이에 다른 안을 내놓았다10.

“당장 세 개 군만 내려보냅시다. 다른 부대는 한 달쯤 쉬게 한 다음 공격에 나서면 됩니다.”

펑더화이는 석 달 가까이 쉬지 못한 병사들을 끌고 임진강과 한강을 건너온 사람이었다11. 그 병사들 가운데 제116사단 한 곳에서만 700명 넘게 쓰러졌다1.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들의 생각은 틀렸소. 다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하고 있소. 전에는 미국이 절대 끼어들지 않는다고 했지. 끼어들면 어쩔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았소. 이제는 미군이 반드시 물러난다고 하면서, 안 물러나면 어쩔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소. 빨리 이기려고만 하고 준비는 하지 않아서 전쟁을 늘였소. 당신들은 전쟁을 요행에 걸고 있소. 국민을 판돈으로 놓고 노름을 하는 것과 같소.”

김일성도 박헌영도 그 말을 끊지 못했다. 펑더화이는 이어 갔다10.

“우리 군대는 앞으로 두 달을 쉬면서 채우겠소. 하루도 줄일 수 없소. 석 달이 될지도 모르오. 준비가 웬만큼 되지 않으면 한 개 사단도 남쪽으로 보내지 않겠소. 적을 얕보는 당신들의 잘못에 나는 동의하지 않소.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나를 심판하시오. 그리고 나를 죽이시오!”

말을 마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전보를 꺼내 들었다10. 전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천에서 동해안 양양까지 그은 선 북쪽의 해안 경계와 후방 교통은 지원군이 맡는다. 두 달 동안 쉰 인민군 네 개 군단 12만 명은 조선 쪽의 지휘에 돌린다. 미군이 정말 물러나면 조선의 해방을 축하하겠다. 물러나지 않으면 지원군은 미리 정한 계획대로 싸운다10. 남쪽으로 내려가려면 인민군 혼자 가야 했다. 인민군은 혼자 깊이 들어가지 않았고, 김일성은 끝내 부대를 쉬게 하자는 펑더화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11.

모스크바에서도 전보가 왔다. 스탈린은 중국 지원군의 지도가 옳다고 했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덧붙였다11.

“아무 의심 없이, 진리는 펑더화이 동지의 손에 있다.”

스탈린은 그 전보에서 지원군이 앞선 두 차례 공세에서 세운 공을 치켜세웠다10. 훨씬 못한 장비로 미군을 이긴 펑더화이를 당대의 천재적인 군사가라고 불렀고, 라주바예프에게는 군사를 모르면서 펑더화이의 지휘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11.

펑더화이가 지켜 낸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원군이 쉬는 사이, 서울 사령부 벽에 잠옷 바지를 박고 떠난 리지웨이가 곧바로 큰 반격에 나섰다11.

사료 출처

1. 董晓军·欧阳青·叶征(「百面战旗红」 집필조), 「“四猛龙”飞越临津江 — 临津江突破英雄连」, 『人民周刊』 2023.4.10, 8면, paper.people.com.cn/rmzk/html/2023-04/10/content_25975384.htm — 강폭 약 150미터·깊이 약 1미터·얼음 약 15센티미터, 남쪽 기슭 벼랑, 큰 눈, 비옷 버선·다리에 바른 기름·마대로 싼 신발, 흰 천과 볏짚으로 감춘 대포, 갈고리 사다리와 지뢰 탐침 장대, 펑더화이 명령(원문: 就是变作一条龙,也要给我飞渡临津江), 사단장 왕양의 현지 정찰과 골짜기 넷, 네 개 돌격 중대(제346연대 제1·4중대, 제347연대 제5·7중대), 16시 40분 대포 86문 사격, 17시 3분 보병 돌격, 제347연대 제5중대 부중대장 후더건(胡德根)이 먼저 물에 들어감, 제7중대 소대장 왕펑장(王凤江)의 「上岸就是胜利」, 기관총 사수 리후이(李会)가 강에서 기관총을 건짐, 제346연대 제4중대 지뢰 제거조장 장차이수(张财书)의 부상과 머리를 다친 선중쉐(沈中学)의 토치카 폭파, 제1중대 분대장 웨이지셴(韦吉先)이 수류탄으로 토치카 일곱 개를 부숨, 사단 손실 712명. 2. 영문 위키백과, 「Third Battle of Seoul」(2026년 10월 열람) 각주를 따라 확인한 내용 — 영하 20도 안팎과 임진강·한탄강 결빙(Zhang 1995, 130쪽; 채한국 외 2001, 353쪽), 영국군 후위를 친 중공군 제149사단 제446연대와 총을 들지 않은 채 붙잡힌 병사들(Appleman 『Ridgway Duels for Korea』 1990, 69~70쪽; Farrar-Hockley 1990, 391쪽), 시청에 오후 1시 무렵 인공기를 올린 북한군 소대(Appleman 1990, 79쪽), 영국군 실종 208명, 12월 7일 펑더화이의 「최소 석 달 휴식」 전보(Zhang 1995, 123쪽), 1월 5일 김포·인천 점령 명령(Zhang 1995, 131쪽), 서울 수복 축하를 두고 한 덩화의 말(Zhang 1995, 133쪽, 영역 원문: Now that [they] celebrate the recovery of Seoul, what would they have to say), 한셴추가 보고한 사상자 약 8,500명. 원서는 직접 보지 못했다. 3. 중국어 위키백과, 「第三次汉城战役」(2026년 10월 열람) — 12월 13일 마오쩌둥 전보(원문: 如到三八线以北即停止,政治上会有很大的不利), 펑더화이의 여섯 개 군 집중과 「稳进」 방침, 12월 31일 17시 공격 개시, 1월 4일 지원군 제39·50군과 북한군 제1군단 일부의 서울 진입, 1월 8일 추격 중지와 그 판단(원문: 联合国军后撤似有计划进行), 지원군 약 5,800명·북한군 약 2,700명 사상(Zhang 1995 인용). 4. Billy C. Mossman, 『Ebb and Flow』(25화 출처와 같은 책) 제9장 「The Chinese Third Phase Offensive: The Opening」(177~191쪽)·제10장 「Withdrawal From Seoul」(192~208쪽) — 12월 23일 워커의 사고와 제24사단 구호소, 리지웨이의 성탄절 자정 도쿄 도착과 맥아더의 말(원문: The Eighth Army is yours, Matt. Do what you think best), 멜빵의 수류탄과 구급낭, 지휘소의 무기력한 얼굴들, 「174,000」 빨간 타원, 12월 31일 제116사단이 고랑포리 부근에서 30분 포격 뒤 어두워진 직후 도하,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붕괴와 제9야전포병대대 C포대의 155밀리 곡사포 네 문 손실, 오솔길을 모르는 사람은 보고 싶지 않다는 말과 지휘관 전진 배치 명령, 12월 27일 이승만에게 인부 3만 명 요청과 28일 새벽 첫 1만 명, 1월 1일 새벽 트럭의 국군 병사들과 리지웨이(원문: might as well had tried to stop the flow of the Han), 백선엽의 제11·15연대 배치와 장도영의 제2연대, 정오 철수 명령, 국군 제6사단의 분산과 1월 3일 아침 9시 집계 6,000명, 1월 2일 공병의 「강이 걸어서 건널 만큼 얼었다」 보고, 웅거 대령의 백사장 통제소, 다리 셋과 보행 부교 다섯, 얼음 피해, 15시 마감과 18시 연장, 헌병의 머리 위 사격·최후 수단 지침, 20시 수도·전기 직원 이탈, 제1군단이 미리 빼낸 죄수·병원·고아원·지폐와 원판·박물관 소장품, 1월 2일 폭파 원칙(원문: maximum hurt to the enemy with minimum harm to the civilian population)과 초토 작전 금지, 1월 1일 브로디의 일일 명령(원문: knock hell out of him with everything you have got), 1월 3일 영국 제29여단 피습(07시 30분)과 반격, 18시 45분 철수와 자정 직전 후위 포위, 1월 4일 09시 마이클리스 지휘소 회의와 브로디의 구출 거부(원문: knock it out for themselves), 250~300명·전차 10대 이상 손실, 4일 08시 「한강 도하 금지, 건너는 자에게 사격」 전단, 데이비슨의 동쪽 부교 폭파(07시 30분), 제27연대 철길 중대 피습(07시)과 영국 제27여단 통과(09시)를 11시에야 앎, 13시 15분 제27연대 도하 완료, 팔머의 마지막 부교 폭파(14시 무렵, 원문: began to sink unspectacularly as the water that had been kept open around it began to freeze), K중대의 얼음 위 도하, 한 시간 안에 중공군 정찰대 관측과 국군 제1사단 수색대가 본 시청의 인공기, 서울을 떠난 약 60만 명(인구의 절반). 5. 이상돈, 「프랑스 종군기자의 한국전쟁 목격담」(『한국전쟁통신』 서평), 주간경향 2012.9.11, weekly.khan.co.kr/article/201209111139211 — 1951년 1월 초 서울 탈출 때 얼음이 꺼져 숨진 피란민, 아이를 길가에 두고 혼자 남쪽으로 가는 여자. 6. Thomas Fleming, 「The Man Who Saved Korea」, 『MHQ』 1993년 겨울호, HistoryNet 재게재 historynet.com/man-saved-korea.htm — 서울 사령부를 비울 때 리지웨이가 터진 줄무늬 플란넬 잠옷 바지를 벽에 박고 붙인 쪽지(원문: TO THE COMMANDING GENERAL CHINESE COMMUNIST FORCES WITH THE COMPLIMENTS OF THE COMMANDING GENERAL EIGHTH ARMY), 이야기가 병사들 사이에 퍼진 일. 7. 이광훈, 「50년을 떠도는 원혼들」, 경향신문 2002.2.13, khan.co.kr/article/200202131839551 — 구상이 문화예술인들에게 승리일보 신분증을 만들어 줌, 김이석·양명문·김동진의 도강, 4일 오후 2시 정훈국과의 출발 예정, 미군 대위와 통역장교의 전단 요청, 뿌려지지 못한 전단, 그날 밤늦게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서 건넘. 8. 임기상, 「한평생 6.25전쟁의 상처를 안고 산 소설가 박완서의 토로」(임기상의 역사산책 95), CBS노컷뉴스 2015.6.15, nocutnews.co.kr/news/4428667 — 오발 사고로 총상을 입은 오빠 때문에 떠나지 못함, 현저동 집, 남은 식구, 유령도시가 된 서울, 자물쇠를 부수고 빈집의 양식과 이불을 가져옴, 오빠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숨짐, 『나목』(1970)이 1·4후퇴 뒤 텅 빈 서울의 스무 살 여성 이야기이며 마흔에 등단. 9. 김양명, 「1·4후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5 집필, 2023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47221 — 서울 남쪽 약 60킬로미터 오산~삼척 철수선, 정부의 부산 철수, 1951년 3월 중순 서울 재수복(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5권 인용). 10. 백선엽, 「백선엽의 6·25 징비록」 47 — 「"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 일으켰나?"…中 펑더화이(팽덕회), 김일성 질타」, 정리 유광종(중앙일보 계열 연재로 보임, 블로그 전재본 2020.1.11로 확인, 원 기사 주소는 확인하지 못함) — 선즈화 자료 소개: 1951년 1월 10일에 이어 11일 성천군 군자리 지원군 사령부에서 다시 열린 회의, 11일 황혼 무렵 펑더화이·김일성·박헌영 세 사람의 냉랭한 회동, 소련 쪽 정보를 근거로 한 박헌영의 「미군이 곧 철수」·「추격해야 미국 자산계급의 모순을 이용」 주장, 펑더화이의 반박(쫓지 않아도 물러난다, 미군 몇 개 사단을 없애야 한다, 휴식과 보충), 김일성의 「3개 군 즉시 진격, 나머지는 한 달 휴식 뒤 공격」, 펑더화이의 질타(요행, 국민을 건 도박, 두 달 휴식은 하루도 줄일 수 없다, 1개 사단도 남진하지 않는다, 나를 심판하고 죽여라), 마오쩌둥 전문(인천~양양 선 이북 해안 경계와 후방 교통은 지원군, 두 달 쉰 인민군 4개 군단 12만 명은 조선 측 지휘, 미군 철수 시 해방 축하, 아니면 예정 계획대로), 스탈린 전문의 「진리는 펑더화이 동지의 손에 있다」와 1·2차 공세 공로 칭찬. 11. 沈志华(선즈화), 『毛泽东、斯大林与朝鲜战争』(2003), 제3부 「中苏在战场上的协调和统一」 marxists.org/chinese/reference-books/szh-2003/23.htm, 여론 4 「朝鲜战争期间的苏联驻华军事顾问」(원재 『百年潮』 2003년 3기) marxists.org/chinese/reference-books/szh-2003/27.htm(2026년 10월 열람) — 거의 석 달 연속으로 싸운 지원군의 휴식 명령, 1월 8일 김일성이 중국 무관 차이청원(柴成文)에게 한 말(휴식은 한 달이면 족하다, 강과 논의 얼음이 풀리면 움직이기 어렵다, 적에게 보충과 숨 돌릴 틈을 준다), 소련 신임 대사 라주바예프가 외무상 박헌영을 통해 전한 반대, 인민군이 혼자 깊이 들어가지 못해 김일성이 휴식을 받아들임, 스탈린 전보(원문: 中国志愿军的领导是正确的, 毫无疑义,真理在彭德怀同志手里)와 「당대의 천재적 군사가」라는 칭찬, 소련 대사에게 펑더화이 지휘를 방해하지 말라고 한 질책, 휴식 중 리지웨이의 대규모 반격.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장면이 1951년 1월이어도 작품 전체의 기준을 따랐다). 리지웨이 1895년생(영문 위키백과 「Matthew Ridgway」), 워커 1889년생·맥아더 1880년생·백선엽 1920년생(25화·앞 화 [나이]와 같은 근거), 장도영 1923년생(영문 위키백과 「Chang Do-yong」), 마이클리스 1912년생(영문 위키백과 「John H. Michaelis」), 마오쩌둥 1893년생·펑더화이 1898년생·덩화 1910년생(25화 [나이]와 같은 근거), 이승만 1875년생(영문 위키백과 「Syngman Rhee」), 우신취안 1912년 3월 26일생(중국어 위키백과 「吴信泉」), 구상 1919년 9월 16일생(서울신문 2004.5.12 부고 기사 등), 박완서 1931년생(한국문학번역원 작가 정보), 김일성 1912년생·박헌영 1900년생(1화 [나이]와 같은 근거), 라주바예프 1904년생(영문 위키백과 「Vladimir Razuvayev」). 차이청원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 왕양, 후더건, 장차이수, 선중쉐, 웨이지셴, 왕펑장, 리후이, 웅거, 브로디, 데이비슨, 팔머, 김이석, 양명문, 김동진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거나 이 화에서 이름만 나와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임진강 돌파 시각 — 『人民周刊』은 16시 40분 포격·17시 3분 돌격, 중국어 위키백과는 17시 공격 개시, 미 육군 전사는 30분 포격 뒤 「완전히 어두워진 직후」 도하로 적었다. 본문은 중국 쪽 시각을 쓰고 미 전사의 표현을 함께 두었다. [자료 충돌] 서울 시청의 깃발 — 영문 위키백과(Appleman 1990 인용)는 북한군 소대가 오후 1시 무렵 인공기를 올렸다고, Mossman은 마지막 부교 폭파(14시 무렵)와 K중대 철수 뒤 한 시간 안에 국군 수색대가 「중공군」이 인공기를 올리는 것을 보았다고 적었다. 본문은 깃발을 올린 군대를 밝히지 않고 Mossman의 순서를 따랐다. [자료 충돌] 영국군 후위를 친 부대 — Mossman은 제39군, 영문 위키백과(Appleman 1990 인용)는 제50군 제149사단 제446연대로 적었다. 본문은 아침 공격은 Mossman대로, 밤의 매복은 영문 기록의 부대명으로 두고 둘 다 밝혔다. [자료 충돌] 서울을 떠난 사람의 수 — Mossman은 약 60만 명(인구의 절반), 한 칼럼은 126만 7천 명이 떠나고 약 18만 명이 남았다고 적었다(뉴데일리 2017.6.25, 출처 미상의 집계). 본문은 미 육군 전사의 숫자를 따랐다. 사상자도 중국 쪽 위키백과는 지원군 약 5,800명, 영문 위키백과가 옮긴 한셴추의 보고는 약 8,500명이다. [자료 충돌] 추격 중지 날짜 — 중국어 위키백과와 중국 쪽 사전 예문은 1월 8일, 영문 위키백과(Zhang 1995 인용)는 1월 7일. 본문은 1월 8일로 두었다. 철수선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오산~삼척, 중국 쪽은 북위 37도선으로 적었다. [자료 충돌] 잠옷 바지를 남긴 날 — Fleming은 「1월 초 사령부가 서울을 비울 때」로만 적었다. 날짜를 확인하지 못해 「1월 초」로 두었다. 리지웨이 회고록 『The Korean War』(1967)의 해당 쪽은 직접 보지 못했다. [재구성] 제5중대가 눈 속에 엎드려 해를 보내는 모습과 병사들의 만두 농담, 강 가운데서 얼음이 꺼진 순간과 젖은 바지가 굳는 모습, 「용이 되어서라도」를 병사들에게 전한 방식, 리지웨이의 지프 좌석과 길 한가운데 선 몸짓(트럭을 세우려 한 일은 기록), 백사장의 헌병과 피란민의 대화, 잠옷을 박는 장면의 부관과의 대화(잠옷과 쪽지와 소문은 기록), 브로디의 말(원문 「knock it out for themselves」를 대사로 풀었다), 승리일보 사무실에서 구상과 미군 대위가 나눈 대화와 구상이 문안을 다듬은 일(전단 요청과 지연은 기록), 마지막 부교 앞의 모습, 박완서와 올케의 대화와 빈집 안의 물건들(빈집에 들어가 양식과 이불을 가져온 일은 기록), 펑더화이 사령부의 지도 장면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중공군 병사 개개인의 내면은 기록에 없다. [자료 충돌] 평양 주재 소련 대사 — 본문은 선즈화 책(11)을 따라 1950년 11월 슈티코프의 뒤를 이어 부임한 라주바예프로 적었다. 백선엽의 「6·25 징비록」 47(10)은 김일성 편에서 「더 공격해야 한다」고 하고 펑더화이의 진격 정지를 스탈린에게 보고한 대사를 슈티코프로 적었다. 슈티코프는 그 무렵 이미 대사에서 물러난 뒤라, 본문은 라주바예프를 따랐다. 스탈린 전보의 날짜는 두 자료 모두 적지 않아 본문에도 쓰지 않았다. [재구성] 군자리 장면의 대사는 회의록 원문이 아니다. 선즈화가 중국 쪽 자료에서 정리한 요지를 백선엽의 「6·25 징비록」 47이 옮긴 것을 따라 말투만 대사로 다듬었다. 방 안의 침묵, 펑더화이의 목소리가 높아진 순간, 김일성이 두 사람 사이에서 안을 내놓은 몸짓은 소설적 재구성이다. 스탈린 전보의 문장은 선즈화 책의 중국어 인용을 우리말로 옮겼다.

3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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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후퇴 — 서울을 두 번 떠나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