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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16,829자)

흥남 철수작전 — 마지막 배에 타다

1950 · 네오

흥남 철수작전, 1950년 12월 9일~25일 — 함흥·흥남·서호진·연포 비행장·오로리·지경·정평, 성천강. 12월 11일 미 제10군단 교두보 선과 세 겹 축소선, 피란민이 몰려든 함흥–흥남 도로, 서호진 피란민 집결지, 연포 비행장 공수(12월 14일~17일 아침 아홉 시), 12월 17일 국군 제1군단 출항, 12월 23일 메러디스 빅토리호 출항, 12월 24일 오후 두 시 삼십육 분 마지막 철수와 부두 폭파, 25일 아침 중공군 제27군 진입, 부산·거제도로 가는 뱃길.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0년 12월 9일 토요일 아침, 함경남도 흥남(현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 — 동해 바닷가의 공업 항구, 미 제10군단 부두 통제소.

부두 창고 벽에 붙은 종이에는 배 이름이 한 줄씩 늘어났다. 미 해병대 대령 에드워드 H. 포니는 장갑을 벗고 연필 끝을 입김으로 녹였다. 그날 아침 미 제10군단장 알몬드(58) 소장이 작전지시 27호를 냈다. 군단 전체가 흥남에서 바다와 하늘로 빠져 남쪽 부산–포항 지역으로 간다는 명령이었고, 포니는 배에 싣는 일 전부를 맡는 통제반의 반장이 되었다1. 들어오는 배는 모두 그의 목록에 올랐다. 어느 부대를 어느 배에 태울지, 어느 화물을 먼저 올릴지가 그 목록에서 정해졌다1.

“대령님, 실을 것이 얼마나 됩니까?”

부두 운영을 맡은 제2공병특수여단의 장교가 물었다. 포니는 종이 맨 위의 숫자를 짚었다. 병력 십만 오천 명, 차량 만 팔천사백이십이 대, 화물 삼십오만 톤2. 원산과 성진(현 북한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먼저 실어 낸 몫까지 합친 숫자였다.

“흥남 부두는 작습니다. 배를 대는 자리가 다 합쳐 일곱 개입니다.”

“그러니 배를 두 겹으로 댄다. 안쪽 배 위에 판자 다리를 걸쳐서 바깥 배까지 건너가게.”

공병들은 상륙함이 뱃머리를 대는 해변 뒤에 천막 마을을 세웠다. 화물선을 댈 자리 여섯 곳을 비우고, 다른 부두 옆에 가라앉아 있던 바지선과 잔해를 끌어냈다1. 짐 싣는 일손은 모자랐다. 일본에서 데려온 화물창 인부들이 부두 옆에 묶어 둔 숙소선 시나노마루에서 먹고 자며 일했고1, 한국인 민간인 약 오천 명이 하역 인부로 부두에 섰다2.

도시의 불은 이틀 전에 꺼졌다. 흥남에 전기를 대던 발전소가 교두보 바깥에 있었고, 12월 7일 중공군이 그 선을 끊었다1. 통제반은 이 일을 미리 셈해 두었다. 항구 앞에 묶인 호위구축함 포스호가 배의 발전기로 부두에 전기를 보냈다1. 기중기의 전등이 다시 켜지자 부두 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군함이 전기세를 받겠답니까?”

“받으면 중공군한테 청구서를 보내라. 끊은 놈이 내야지.”

포니는 웃지 않고 목록에 배 한 척을 더 적었다. 그날 그의 종이에는 아직 피란민이라는 낱말이 없었다.

*

1950년 12월 초, 함경남도 함흥(현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 흥남에서 북서쪽으로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도청 소재지, 미 제10군단 민사처.

현봉학(28)은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의과대학에서 병리학을 배운 의사였다. 알몬드가 함흥에 군단 사령부를 차렸을 때 그는 국군 해병대 지휘관의 통역이었고, 그 뒤 알몬드 곁에서 민간 일을 거드는 민사 고문이 되었다3. 함흥에는 공산 정권을 피해 숨죽여 온 기독교인이 많았다3. 그의 아버지 현원국도 목사였다4. 현봉학은 그들을 데려가 달라고 몇 번이고 민사처를 찾았다3.

민사처장 제임스 A. 무어 중령은 규정대로만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결국 언성을 높였다3.

“닥터, 이건 전쟁이오. 전쟁에서는 군대가 먼저요. 흥남 항구는 지독하게 작소. 군인들이나 다 빠져나갈 수 있을지 우리도 모르오. 불가능한 걸 청하지 마시오.”

현봉학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33) 소장과 함께 알몬드에게 갔다. 두 사람은 피란민을 배에 태워 달라고 미군을 설득했다5. 알몬드는 처음에는 고개를 젓던 사람이었다5. 이번에는 통역을 거치지 않고 현봉학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소. 피란민 문제에 대해서는 닥터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하오.”

현봉학 쪽에서 훗날 전한 알몬드의 대답이었다4. 알몬드는 정찰기를 타고 흥남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행렬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땅에 내린 그는 부관 알렉산더 헤이그(26) 대위에게 짧게 일렀다3.

“저 사람들을 두고 갈 수는 없다. 헤이그, 자네가 챙겨.”

12월 15일 오후, 알몬드가 발표했다. 함흥에서 민간인 사오천 명을 기차로 빼낸다. 함흥역에는 육만 명 가까운 사람이 몰렸다3. 민사처 사람들과 국군 헌병이 개찰구를 붙들고 버텼고, 기차는 새벽 두 시에 떠났다3.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철길을 따라 걸었다. 기차가 남긴 연기 냄새를 쫓아 흥남 쪽으로, 철수하는 군인들의 등 뒤로3.

*

1950년 12월 11일 월요일, 연포 비행장(현 북한 함경남도 함주군 련포리) — 흥남 남서쪽 바닷가 들판의 활주로.

맥아더(70) 원수의 비행기가 언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장진호에서 내려온 미 해병 제1사단과 육군 부대들이 그날 밤까지 모두 흥남 교두보 안으로 들어올 참이었다2. 교두보는 흥남에서 이삼십 킬로미터 바깥의 고개와 길목마다 대대와 연대를 박아 놓은 선이었다. 미 제3사단이 연포 남쪽에서 장진호 길목의 오로리(현 북한 함경남도 함주군)까지, 미 제7사단이 흥남 북쪽 부전호 길을, 국군 제1군단이 북동쪽 바닷가를 지켰다2.

알몬드는 지도 앞에서 맥아더에게 철수 계획을 설명했다. 해병 사단이 먼저 배에 타고, 다음이 제7사단, 마지막이 제3사단이었다. 교두보는 그 순서에 맞춰 세 겹으로 줄어든다. 두 번째 선으로 물러나는 날 연포 비행장은 버린다2. 알몬드는 자신 있게 말했다2.

“철수는 질서 있게 끝날 것입니다. 보급품도 장비도 부수거나 버리는 것이 없을 겁니다. 적은 크게 방해하지 못할 겁니다. 12월 27일이면 남쪽으로 다 옮깁니다.”

맥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문 뒤 그는 한 가지를 바꾸었다. 교두보에 있는 국군 제1군단은 부산이 아니라 동해안 삼척 쪽으로 실어 가라는 지시였다2. 비행기가 다시 떠오르자 활주로의 정비병 하나가 모자를 벗어 털었다.

“원수님 비행기는 벌써 뜨는데, 우리 비행기는 언제 뜹니까?”

“우리 차례는 맨 마지막이다. 불 끄고 나가는 사람이 늘 있어야지.”

*

1950년 12월 16일 새벽, 연포 비행장.

오 분마다 수송기 한 대가 떴다. 미 극동공군 전투화물사령부는 나흘째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행기를 돌렸다6. 알몬드는 배로 군단을 실어 내는 데 열흘이 걸리는 동안 중공군이 기다려 주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비행기로 빼낼 수 있는 만큼 빼내라고 했고, 비행장이 뚫릴 때를 대비해 흥남 바닷가 모래밭에 비상 활주로를 하나 더 닦았다6. 그 공수는 12월 14일에 시작되었다6.

정비병들은 언 손으로 엔진 덮개를 열었다. 쌍발 수송기 C-119 네 대가 고장으로 서 있었다. 비행장이 닫히기 전에 날지 못하면 제 손으로 불태워야 하는 비행기들이었다6. 첫째는 부러진 승강타를 갈아 끼웠다. 둘째는 연료 펌프가 고장 난 채로 일본 규슈의 아시야 기지까지 날아갔다6.

“펌프 없이 바다를 건너간다고?”

“기도로 가는 거지. 우리 대신 조종사가 기도해 줄 거다.”

셋째를 살리려고 아시야에 서 있던 다른 비행기에서 엔진 두 개를 통째로 뜯어 연포로 실어 왔다6. 엔진을 실은 비행기가 내려앉자 정비병 하나가 혀를 찼다.

“비행기가 비행기 다리를 업고 왔네.”

넷째는 마지막 순간 윤활유를 빨아올리는 펌프가 터졌다. 정비병들은 그 기체에 폭약을 감았다6.

활주로 끝에는 그리스 공군의 C-47 수송기들도 있었다. 이 작은 수송대는 12월 4일부터 연포에 와 있었다7. 국군 해병대 제1연대 대부분도 이곳에서 비행기로 빠져나갔다2. 승무원들은 쉴 틈이 없었다. 짐을 빨리 싣느라 조종사가 직접 화물칸에서 상자를 날랐고, 피로에 지친 조종사 몇은 끝내 병원에 실려 갔다6.

12월 17일 아침 아홉 시, 비행장이 닫혔다6. 미 제3사단의 왼쪽 부대들이 비행장 뒤 성천강 아래로 물러날 차례였다2. 나흘 동안 비행기는 393번 떴다. 환자 228명, 승객 3,891명, 화물 2,088.6톤이 하늘로 나갔다6. 마지막으로 떠난 것은 해병 전투기와 수송기를 돌보던 미 제5공군의 비행장 운영 부대였다2.

*

1950년 12월 19일, 흥남 남동쪽 바닷가 마을 서호진(현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서호동 일대) — 피란민 집결지.

함흥 거리에는 소문이 돌았다. 미 제10군단이 북쪽을 떠나고 싶은 민간인을 모두 실어 간다는 소문이었다. 군단 정보부는 공산 쪽이 일부러 퍼뜨린 말로 보았다. 사람들을 한꺼번에 움직이게 하고 그 틈에 공작원을 섞어 보내려는 수였다2. 헌병과 교두보의 병사들이 함흥–흥남 길을 막았다. 다 막지는 못했다2. 흥남에 닿은 사람들은 검문을 거쳐 서호진으로 옮겨졌다2.

민사처 요원들은 피란민을 백 명씩 묶고 한 사람을 조장으로 세웠다. 조마다 헌병과 방첩대 통역관 앞에서 질문을 받았고, 그다음에야 밥과 물을 받았다3. 어선과 한국 해군의 작은 배들이 큰 배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3.

미 제3사단의 전투 후 보고서는 그 해변의 사람들을 이렇게 적었다3.

“그들은 무리 지어 서 있었다. 세간을 등에 동여매고,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붙들었다. 굶주림과 두려움과 절망이 모든 얼굴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도일은 원산에서 철수한 숫자를 보고 흥남에서도 피란민 이만 오천 명이 탈 배를 셈해 두었다. 그런데 장진호에서 내려오는 해병들을 따라 그만큼이 먼저 왔고, 원산에서 배를 놓친 사람들이 다시 흥남에 나타났다. 하룻밤 새 오만 명이 모였고, 그 수는 곧 두 배가 되었다3.

그 줄 어딘가에 흥남시청 농업계장 문용형이 있었다. 유엔군이 흥남에 들어와 있던 10월부터 12월까지 그는 농업과장 일을 보았다8. 아내 강한옥이 어린 딸 재월을 업고 그 곁에 섰다8. 조장이 명단을 들고 조원들의 이름을 불렀다.

“문용형.”

“여기 있소.”

“직업은?”

“시청에서 농사 일을 봤소.”

“그럼 배에 타서도 농사짓겠소?”

“바다에 밭이 있으면 갈겠소.”

뒷줄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은 바닷바람에 곧 묻혔다. 영하의 날이 이어졌다. 미 해군 상륙부대 사령관 도일(53) 소장은 훗날 그 해변을 이렇게 적었다3.

“포니 대령이 바닷가에 불을 피워 두었고, 나는 배 창고의 쌀을 날라 오게 했다. 겨우 목숨을 붙일 만큼이었다.”

12월 17일 정오, 국군 제1군단이 배를 타고 남쪽 삼척으로 떠났다2. 20일, 알몬드는 흥남의 지휘소를 닫고 항구에 떠 있는 도일의 기함 마운트 매킨리호로 옮겼다2. 21일에는 초속 십사 미터 가까운 돌풍이 부두를 때렸다. 자정 직전 통제반의 무선 전신실에 불이 나 통신 장비가 거의 다 탔다3.

*

1950년 12월 20일 저녁, 흥남 앞바다 —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교.

배는 기뢰밭 사이로 들어왔다. 소해정 한 척이 앞장섰는데, 짐칸의 항공유를 꺼리는지 한참 앞서서 갔다9.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일본에서 드럼통에 담은 제트기 연료 만 톤을 싣고 연포의 해병 항공단에 대러 온 화물선이었다9. 해병들이 연포를 비우게 되자 배는 부산에 연료를 부리라는 명령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19일에 다시 흥남으로 돌아가라는 긴급 명령이 왔다9. 아래 짐칸에는 항공유 삼백 톤이 아직 남아 있었다9.

선장 레너드 라루(36)는 선교 창밖으로 부두를 보았다. 이 배는 승객 열두 명을 태우도록 만든 배였다10. 부두에는 그 몇천 배의 사람들이 짐을 지고 서 있었다.

육군 장교들이 배에 올라왔다. 그들은 명령서를 내밀지 않았다. 마지막 방어선이 좁혀지고 있다고 알리고, 피란민을 실어 낼 뜻이 있느냐고 물었다9. 라루는 항해사들과 의논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태우겠다고 대답했다9.

“선장님, 짐칸에 항공유가 있습니다.”

“알고 있네.”

“불 한 점이면 배가 통째로 날아갑니다.”

“그러니 불을 못 피우게 지키게. 사람을 못 태우게 지킬 생각은 말고.”

배에 있는 무기라고는 선장의 권총 한 자루뿐이었다10. 사무장 격인 업무 담당 항해사 로버트 러니가 그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

“권총으로는 중공군 한 개 분대도 못 막지만, 승객 만 명 줄 세우는 데는 쓸 만하겠군요.”

중공군은 부두에서 사오천 야드, 사 킬로미터 남짓한 곳까지 와 있었다11. 22일 저녁, 다른 화물선 옆에 두 겹으로 붙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사람을 싣기 시작했다9. 피란민 열여섯 명이 나무 깔판 위에 어깨를 붙이고 섰다. 기중기가 깔판을 들어 올려 드럼통이 쌓인 짐칸 바닥까지 내렸다3. 한 층이 차면 덮개 판자를 덮고 그 위층을 채웠다3. 보일러는 이십육 시간 내내 증기를 올린 채였다3.

그동안 부두에서는 해군 수중폭파대가 폭약을 설치하고 있었다9. 짐칸에는 불도 난방도 없었다. 추위를 못 이긴 사람들이 드럼통 위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지었고, 선원들이 뛰어 내려가 불을 껐다9. 배에는 통역이 한 명도 없었다9. 선원들은 손짓으로 불을 끄라고 했고, 피란민들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

1950년 12월 23일 토요일 낮, 흥남 앞바다에서 부산으로 가는 뱃길.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부두를 떠났다9. 사람을 태운 배로는 마지막 배였다9. 배에는 만 사천 명이 탔다. 그 가운데 사천 명이 아이였고, 다친 사람이 열일곱이었다9. 호위함은 없었다10. 라루는 그 항해를 이렇게 회고했다3.

“우리는 이 영혼의 짐을 싣고 넓은 바다로 나가 부산으로 향했다. 사백오십 해리, 스물여덟 시간쯤 걸리는 길이었다.”

갑판 위의 사람들은 대부분 서서 갔다10. 짐칸에는 변소가 없었다. 칸마다 오물이 쌓였고, 사람들은 그 곁에 몸을 붙이고 잤다12. 바닷물 물보라가 난간에 닿자마자 얼었다3.

선장실 옆의 작은 의무실에서 첫 아기가 울었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 부부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배에 오른 뒤 너무 긴장해 진통이 오는 것도 잊었다가, 배가 움직이고 마음이 풀리자 아이를 낳았다13. 응급처치만 배운 일등항해사 사바스티오가 아기를 받았다10. 미군 선원들은 아이에게 「김치 1」이라는 이름을 붙였다13. 아이의 이름은 손양영이었다13.

“김치라니, 사람 이름에 반찬 이름을 붙입니까?”

“이 배에서 제일 맵게 버틴 사람이니까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배는 부산에 닿았다. 부산은 이미 피란민으로 넘쳐 있었다. 배는 사람을 내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9. 다친 사람 몇만 내렸다10. 러니는 그날의 부산을 이렇게 떠올렸다9.

“여관에 방이 없었다.”

배는 다시 닻을 올렸다.

*

1950년 12월 24일 일요일 오후, 흥남 앞바다 — 기함 마운트 매킨리호.

교두보는 아침부터 조용했다. 전날 오후 박격포와 포탄 몇 발이 떨어진 것이 적의 마지막 공격이었다2. 미 제3사단장 솔(50) 소장의 연대들은 대대 하나씩만 방어선에 남기고 차례로 배에 올랐다2. 도일의 군함들이 해안에서 이 킬로미터 남짓 안쪽에 넓게 포탄을 퍼부었고, 그 포화 아래서 마지막 엄호 소대들이 물러났다2. 알몬드는 마지막으로 뭍에 내려 해변을 둘러보았다. 일곱 개 소대가 해변 가까이에 거점을 잡고, 엄호 대대들의 남은 병사와 제10공병전투대대가 배에 오르는 동안 등을 지켰다2. 마지막 출발을 앞두고 해변에는 상륙함 일곱 척과 수륙양용 궤도차 여러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1.

오후 두 시 오 분, 모든 해변이 비었다. 두 시 십 분, 도일이 수중폭파대에 부두 시설과 방파제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1. 공병들과 수중폭파대가 수륙양용차와 상륙정에 뛰어올랐다. 두 시 삼십육 분, 흥남 땅에 남은 미군은 한 사람도 없었다1.

부두가 하늘로 솟았다. 미처 싣지 못한 탄약 이백 톤과 얼어붙은 다이너마이트 이백 톤, 천 파운드짜리 항공 폭탄 오백 발, 기름과 휘발유 드럼통 이백여 개가 함께 터졌다2. 포니는 보고서에 그 폭음이 그만큼 더 컸다고 적었다2.

맥아더는 그날 합동참모본부에 전보를 쳤다. 병력 십만 오천 명, 피란민 약 십만 명, 차량 만 칠천오백 대, 물자 삼십오만 톤을 빼냈고, 버리고 온 장비나 물자는 없다는 내용이었다1. 도일은 함교에서 부두 쪽을 보았다. 연기 아래에 아직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3.

“배가 충분했다면 그 두 배는 살릴 수 있었다. 마지막 배가 떠날 때, 내 눈에는 그만큼의 한국인이 배를 기다리며 남아 있었다.”

미 육군 전사는 흥남에서만 피란민 팔만 육천여 명, 원산과 성진을 합쳐 구만 팔천백 명이 북동부를 떠났다고 적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수의 사람이 배가 없어 남았다고 적었다2.

*

1950년 12월 25일 월요일 아침, 흥남 — 중국인민지원군 제27군의 진입로.

중공군 병사들은 성천강 다리 대신 얼음 위를 건넜다. 다리는 미군이 떠나며 끊어 놓았다3. 부두에서는 아직 연기가 올랐다. 제27군은 그날 오전에 흥남으로 들어갔다14.

중국 쪽 기록은 다르게 적었다. 12월 23일 오후 미 제10군이 모두 바다로 남쪽으로 달아났고, 이튿날 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이 흥남 지구와 연해의 항구들을 되찾았다는 것이다15. 다른 기사는 미군이 흥남항에 모인 항공모함 일곱 척과 비행기 오백여 대의 엄호를 받으며 빠져나갔다고 적었다16.

부두에 선 한 병사가 바다 쪽을 보았다. 수평선에 배의 그림자가 몇 남아 있었다. 등 뒤 거리에는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병사는 총을 내리고 언 손을 겨드랑이에 넣었다. 그날 흥남은 그들 손에 들어왔다. 바다는 들어오지 않았다.

*

1950년 12월 25일, 경상남도 거제도 장승포(현 경남 거제시 장승포동) 앞바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장승포항에 닿은 것은 낮 열두 시 사십이 분께였다8. 배가 섬에 다가갈 무렵 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산파가 이로 탯줄을 끊었고, 누군가 옷을 찢어 아기를 닦았다. 북쪽에서 사진관을 하던 사람의 아들이었다13. 선원들은 그 아이를 「김치 5」라고 불렀다. 이 배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아이, 이경필이었다13.

장승포에는 배를 댈 부두가 없었다. 26일, 한국 해군 상륙함 두 척이 배의 양옆에 붙었다9. 기중기가 사람 열여섯을 실은 깔판을 들어 올렸다. 갑판의 사람들이 먼저, 짐칸의 사람들이 나중이었다3. 두 배가 파도에 들썩이며 서로 부딪쳤다. 깔판이 허공에 뜰 때마다 사람들은 선원들 쪽으로 몸을 반쯤 숙여 절했다3. 상륙함으로 옮겨 탄 사람은 만 사천다섯 명이었다9.

강한옥은 딸을 업은 채 깔판에 올랐다. 문용형이 그 곁에서 보따리를 붙들었다8. 깔판이 흔들리자 아이가 울었다. 강한옥은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갑판 난간의 선원을 올려다보았다. 선원은 장갑 낀 손을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러니는 그 얼굴들을 오래 기억했다3.

“그들 얼굴에는 넘치는 기쁨이 없었다. 자유를 향한 길을 이제 막 나섰을 뿐이었으니까.”

배는 사흘 동안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13. 처음 흥남에 실려 있던 항공유 드럼통은 짐칸 바닥에 그대로 있었다. 그 위에서 만 사천 명이 사흘을 견뎠고, 다섯 아이가 태어났다9.

기네스 세계기록은 뒤에 이 항해를 배 한 척이 뭍에서 사람을 빼낸 가장 큰 철수로 올렸다17.

사료 출처

1. Donald W. Boose Jr., 『Over the Beach: US Army Amphibious Operations in the Korean War』(17화·22화 출처와 같은 책, 자료모음 NS04) 제6장 「The Heungnam Evacuation」 239~244쪽과 241쪽 지도 33 「X Corps evacuation plan」 — 12월 9일 작전지시 27호와 부산–포항 철수, 포니 통제반과 선박 목록, 제2공병특수여단의 천막 마을·화물선 자리 여섯 곳·바지선 제거, 시나노마루의 일본 화물창 인부, 12월 7일 중공군의 전력 차단과 포스호의 발전, 마지막 출발을 앞두고 해변에 늘어선 LST 일곱 척과 LVT, 12월 24일 14시 05분 해변 정리·14시 10분 폭파 명령·14시 36분 철수 완료, 맥아더의 합참 전보(105,000명·약 100,000명·17,500대·350,000톤, 원문: There has been no abandonment of equipment or supplies). 2.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25화 출처와 같은 책) 제8장 「Redeployment South」 중 「The X Corps Evacuates Hungnam」 165~175쪽, koreanwar.org/kwp2/cmh/ebb_and_flow.pdf — 12월 11일 맥아더의 연포 방문과 알몬드의 브리핑(질서 있는 철수, 보급품·장비 파괴나 유기 없음, 적의 심각한 방해 없음, 12월 27일 완료 예상), 12월 11일 교두보 배치(제3사단 연포 아래~오로리, 제7사단 부전호 길, 국군 제1군단 북동 해안, 시내에서 12~15마일), 해병·제7사단·제3사단 순서와 세 단계 축소선, 맥아더의 국군 제1군단 삼척 수송 지시(「apparently as a result of his 11 December visit」), 알몬드의 마지막 해안 점검과 일곱 개 소대 거점, 병력 105,000·차량 18,422·화물 350,000톤, 한국인 하역 인부 약 5,000명, 국군 해병대 제1연대의 연포 공중 철수, 12월 17일 연포 비행장 폐쇄와 제3사단의 성천강 뒤 철수, 마지막으로 떠난 제5공군 비행장 운영 부대, 함흥의 소문과 공작원 침투 판단, 함흥–흥남 도로 차단과 서호진 이송, 12월 17일 정오 국군 제1군단의 삼척 방면 출항, 12월 20일 알몬드의 마운트 매킨리호 이동, 23일의 박격포·포격이 마지막 저항, 24일 대대별 엄호와 함포 탄막, 14시 30분 직후 출발, 남긴 탄약 200톤·다이너마이트 200톤·1,000파운드 폭탄 500발·드럼통 약 200개와 포니 보고서의 「폭음이 더 커졌다」, 흥남 피란민 86,000여 명·북동부 전체 98,100명·거의 같은 수가 남음. 3. Charles H. Briscoe, 「The Refugee Evacuation from Hungnam: 9–24 December 1950」, 『Veritas』 7권 1호(2011), arsof-history.org/articles/pdf/v7n1_hungnam.pdf — 현봉학의 경력(리치먼드 의과대학 병리학, 국군 해병대 지휘관 통역, 민사 고문)과 함흥의 기독교인, 무어 중령의 말(원문: Doctor, this is war, and in a war the military comes first…Don't ask for the impossible), 헤이그 회고(원문: We can't leave those people. Take care of that, Haig), 12월 15일 함흥 기차(4,000~5,000명 계획, 60,000명 가까이 몰림, 새벽 2시 출발), 백 명 단위 조와 헌병·방첩대 심문, 어선과 한국 해군 소형선, 도일 회고(원문: Colonel Forney maintained warming fires along the beach and I had rice delivered from the ships' stores. It was only enough for survival / Had there been sufficient shipping, twice that (number) could have been saved), 제3사단 전투 후 보고서 인용(원문: They stood in masses, their worldly possessions strapped to their backs, children clutching at the hands of parents, hunger, fear, and despair etched deeply in the faces of all), 도일의 피란민 예상 25,000명과 하룻밤 새 50,000명·두 배, 12월 21일 돌풍 27노트와 무선 전신실 화재,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열여섯 명 깔판·덮개 판자·26시간 적재·물보라, 라루 회고(원문: With this cargo of souls…about 28 hours journey away), 철수 때 다리 폭파, 거제도 앞바다 옮겨 태우기와 반절, 러니의 말(원문: There was no overwhelming joy on their faces because they had only begun their journey to freedom). 4. 한국어 위키백과, 「현봉학」(2026년 10월 열람) — 1922년 6월 23일 성진 출생, 아버지 현원국 목사, 국군 해병대 문관과 알몬드 통역·민사 고문, 알몬드의 말(「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는 피난민 문제와 관련한 닥터의 말에 전면적으로 찬성한다」, 국민일보 2018.12.28 등 인용). 5. 양영조, 「흥남철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013 집필, 2023.7.15 수정), encykorea.aks.ac.kr/Article/E0065977 — 김백일과 통역 현봉학의 설득, 알몬드가 처음에는 반대, 마지막까지 배를 탄 피란민 9만 1천여 명, 항공 철수 병력 3,600명·차량 196대·1,300톤, LST 한 척에 5천여 명. 6. Robert F. Futrell,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개정판(7화 출처와 같은 책, 자료모음 AS01) 258~260쪽 — 알몬드의 최대 공중 철수 요구와 흥남 해변 비상 활주로, 12월 14일 시작·17일 09시 종료, 24시간 운용·5분 간격 이륙, 393회 출격·환자 228명·승객 3,891명·화물 2,088.6톤, 승무원의 적재 거들기와 피로로 인한 입원, 고장 난 C-119 네 대(승강타 교체, 연료 펌프 고장 채 아시야행, 아시야에서 엔진 두 개 공수, 넷째는 윤활유 펌프 고장으로 파괴). 원문 260쪽의 「17 November」는 문맥상 12월의 오기다. 7. 국가보훈부(영문), 「Greece」 참전국 소개, mpva.go.kr/english/contents.do?key=1307(자료모음 U14) — 그리스 공군 제13비행대 C-47, 1950년 12월 4일 연포 기지 파견, 12월 중순 미 제10군단의 흥남 철수 지원. 8. 이상국, 「대통령 부친 문용형씨가 흥남 피란선 안탔다면, 북한에선?」, 아시아경제 2017.6.26(다음 뉴스 v.daum.net/v/20170626150012124) — 문용형의 흥남시청 농업계장·10~12월 농업과장 근무, 강한옥·딸 문재월과 빅토리호 승선, 12월 25일 낮 12시 42분께 거제도 장승포항 도착. 9. J. Robert Lunney, 2017년 4월 20일 강연 정리문, MyHometownBronxville.com 2017.7.12 게재(「Rear Admiral J. Robert Lunney of Bronxville Recounts Rescue of North Korean Refugees in 1950」) — 도쿄에서 연포 해병 항공단으로 가던 드럼통 제트 연료 만 톤, 부산 하역 명령과 12월 19일 긴급 명령, 20일 저녁 기뢰밭 통과와 앞서간 소해정, 하부 짐칸의 연료 약 300톤, 명령이 아닌 자원 요청과 라루의 즉답, 22일 저녁 적재와 두 겹 정박, 수중폭파대의 폭약 설치, 드럼통 위 불과 소화, 통역 없음, 23일 오후 출항·피란민을 태운 마지막 배, 14,000명(아이 4,000명·부상자 17명), 24일 부산 하선 불허(원문: there was no room in the inn), 26일 상륙함 두 척에 14,005명 하선, 다섯 아기 출생. 10. 영문 위키백과, 「SS Meredith Victory」(2026년 10월 열람) — 승객 정원 12명, 선장의 권총이 유일한 무기, 호위 없음, 23일 오전 11시 직후 출항, 피란민 대부분 선 채 항해, 부산에서 일부 부상자만 하선, 일등항해사 D. S. 사바스티오가 응급처치 교육만 받고 다섯 아기를 받음. 11. 심재우, 「Officer remembers the 1950 'Christmas Miracle'」, 코리아중앙데일리 2017.6.23 — 러니 인터뷰, 중공군이 4,000~5,000야드 거리에 있었다는 회고, 12월 22일 저녁 적재 시작. 12. 김승욱, 「흥남철수 때 태어난 '김치 베이비' 이젠 75세…"한미동맹 결실"」, 연합뉴스 2025.12.26(CNN 보도 인용) — 갑판 아래 전기·난방·물·식량 없음, 화장실이 없어 화물칸마다 오물이 쌓임. 13. 조유미, 「전쟁 피란선에서 태어난 기적 같은 '김치 베이비'」,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2026.7.4(다음 뉴스 v.daum.net/v/20260704003400752) — 김치 1호 손양영이 선장실 옆 의무 부속실에서 태어남, 북청 출신 부모, 어머니가 긴장해 진통을 잊었다는 증언, 김치 5호 이경필이 장승포항 도착 무렵 태어남, 산파가 이로 탯줄을 끊고 옷을 찢어 닦음, 아버지가 사진사. 14. 중국어 위키백과, 「长津湖战役」(2026년 10월 열람) 「興南撤退」 절 — 중국 제27군이 12월 25일 오전 흥남에 들어감(光亭 『冰血长津湖』 2007, 113쪽 인용), 철수에 쓰인 배 193척. 15. 「从一本日记本中描述的战斗细节,重温志愿军鏖战长津湖的壮举」, 解放军报, 신화망 재게재 2025.12.25, news.cn/milpro/20251225/98ee1c65d07a42c9a636ed4fe96fb8ff/c.html — 「12月23日下午,美军第10军全部从海上南逃。次日,志愿军和朝鲜人民军收复兴南地区及沿海各港口」(본문에 우리말로 옮김). 16. 张月辉·王红军, 「志愿军三炸水门桥」, 学习时报, 인민망 재게재 2022.3.29, dangshi.people.com.cn/n1/2022/0329/c436975-32386491.html — 흥남항에 모인 항공모함 7척과 비행기 500여 대의 엄호를 받으며 미 해병 제1사단이 빠져나갔다는 서술.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알몬드 1892년생, 헤이그 1924년생, 도일 1897년생, 솔(Robert H. Soule) 1900년생, 라루 1914년생, 맥아더 1880년생(이상 영문 위키백과 인물 항목), 현봉학 1922년생(한국어 위키백과), 김백일 1917년생(한국어 위키백과). 포니, 무어, 러니, 사바스티오, 문용형, 강한옥은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해 나이를 적지 않았다(러니는 2017년 6월 인터뷰에 90세로 나와 1926~1927년생으로 보이나 확정하지 못했다). 손양영과 이경필은 1950년 12월 배 위에서 태어난 갓난아기라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피란민 수 — 미 육군 전사(Mossman)는 흥남 86,000여 명·북동부 전체 98,100명, Briscoe는 98,100명, 맥아더 전보는 「약 10만 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9만 1천여 명(요약에는 9만 명)으로 적었다. 남겨진 사람도 Mossman과 도일은 「거의 같은 수」, 백과사전은 「30만 명이 승선하지 못했다」로 다르다. 본문은 Mossman의 숫자를 썼다. [자료 충돌] 연포 공수 — Futrell은 12월 14일~17일 09시에 승객 3,891명·화물 2,088.6톤·393회, Mossman과 백과사전은 문을 닫을 때까지 병력 3,600명·차량 196대·화물 1,300톤, Boose는 12월 10~15일에 병력 3,000명·차량 200대·폭탄 500톤으로 적었다. 본문은 기간과 횟수가 함께 남은 Futrell을 따랐다. [자료 충돌] 메러디스 빅토리호 — 피란민은 러니 14,000명(하선 14,005명), Briscoe 표 14,500명. 출항은 러니 강연 「23일 오후」, 영문 위키백과 「23일 오전 11시 직후」, 코리아중앙데일리 「23일 19시 50분 적재 완료」로 갈려 본문은 「23일 낮」으로만 적었다. 거제도 도착은 아시아경제 「25일 낮 12시 42분께 장승포항」, 러니 강연 「25일 거제도로 가라는 명령, 26일 하선」으로 다르다. 본문은 25일 도착·26일 하선으로 두 기록을 함께 놓았다. 러니의 직책은 업무 담당 항해사(Staff Officer, Briscoe·러니 강연)로 적었고, 조선일보는 그를 「일등항해사」로 적었다. 아기를 받은 사람도 영문 위키백과는 일등항해사 사바스티오, 조선일보는 김치 5호의 경우 피란민 산파로 적었다. 라루의 나이는 러니 강연이 「당시 37세」, 출생일(1914년 1월 14일) 기준으로는 36세다. [자료 충돌] 흥남 함락 날짜 — 미 쪽 기록은 12월 24일 14시 36분에 마지막 미군이 떠났다고, 해방군보 2025년 기사는 미 제10군이 23일 오후 모두 떠났고 24일 흥남을 되찾았다고, 중국어 위키백과(光亭 2007 인용)는 제27군이 25일 오전에 들어갔다고 적었다. 본문은 셋을 모두 적었다. [자료 충돌] 철수 작전 기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2월 15일(출항 기준)부터 23일까지」, 미 육군·해군 기록은 12월 9일(또는 11일)부터 24일까지로 적었다. 맥아더 전보는 「버리고 온 장비나 물자는 없다」고 했으나 Mossman은 탄약·폭탄 등을 남겨 폭파했다고 적었다. [재구성] 포니와 공병 장교의 대화, 「군함이 전기세를 받겠답니까?」로 시작하는 부두의 농담, 포니가 연필을 입김으로 녹인 몸짓, 알몬드가 통역 없이 현봉학을 보고 말했다는 정황(말 자체는 위키백과 인용), 철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묘사, 연포 정비병들의 대화(「기도로 가는 거지」「비행기가 비행기 다리를 업고 왔네」), 조종사가 직접 상자를 날랐다는 장면(승무원이 적재를 거들었다는 기록에 따름), 서호진에서 문용형 가족이 조에 섞여 심문을 받은 장면과 조장과의 문답(문용형 가족이 빅토리호를 탄 것은 기록, 서호진을 거쳤는지는 확인하지 못함), 라루와 선원의 항공유 대화, 러니의 권총 농담, 맥아더가 떠난 뒤 연포 정비병들의 대화, 알몬드가 맥아더에게 한 말의 말투(내용은 Mossman의 서술), 선원들이 손짓으로 불을 끄라 하고 피란민이 고개 숙인 장면, 「김치라니」로 시작하는 대화, 성천강 얼음을 건넌 중공군과 부두의 병사 장면(제27군 진입은 기록, 병사 개인은 기록에 없음), 강한옥이 깔판에 오른 장면과 선원의 손짓, 마지막 문단의 드럼통 위 사흘이라는 연결은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바람 「27노트」는 초속 약 14미터로 옮겼다. 17. 기네스 세계기록, 「Largest evacuation from land by a single ship」, 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largest-evacuation-from-land-by-a-single-ship — SS 메러디스 빅토리호, 1950.12.22~25, 약 14,000명. [10-18 덧붙임] 소유자가 준 장진호 영상 자막과 대조해 덧붙였다. 기존 줄은 그대로 두었다.

3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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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작전 — 마지막 배에 타다 · 1950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