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22,372자)
핵무기 사용 검토 — 핵의 그늘
1950 · 네오
1950년 11월 30일 목요일 오전 열 시 반, 미국 워싱턴 백악관 옆 행정동(현 아이젠하워 행정동) 4층 474호, 기자들이 ‘인디언 조약실’이라고 부르는 방.
해리 트루먼(66) 대통령은 자리에 앉은 기자들에게 손짓부터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앉으세요.”
그날 회견은 그가 대통령이 된 뒤 이백마흔여섯 번째였다1. 그는 성명서를 들고 있었다. 사본은 나갈 때 받아 가라고 하고, 되도록 천천히 읽겠다고 했다. 중국 공산군이 만주에서 내려와 북한의 유엔군을 쳤고, 유엔군의 큰 부분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전장의 형편은 지금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원자력위원회에 들어갈 큰 예산을 의회에 따로 청구하겠다는 줄도 있었다1. 이틀 전 도쿄의 맥아더가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라고 적은 그 싸움이었다.
질문이 쏟아졌다. 의회 지도자 회의에 공화당 의원도 부르느냐고 한 기자가 물었다. 트루먼이 그런 회의를 아홉 번인가 열 번 했으니 지난 기사를 찾아보라고 하자, 기자가 대꾸했다.
“우리 편집장이 아무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고 해서요.”
방 안에 웃음이 터졌다1. 트루먼도 입꼬리를 올렸다가, 그게 이 나라의 병이라고 받아쳤다.
웃음이 가라앉고 질문이 북쪽으로 올라갔다. 유엔군 비행기가 만주 국경 너머를 폭격해도 되느냐는 물음에는 오늘 아침에는 답할 수 없다고 했다. 만주 공격은 유엔의 결정에 달렸느냐는 물음에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군사 상황에 맞서는 데 필요한 조치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덧붙였다. 앞줄의 기자 하나가 곧장 물었다1.
“원자폭탄도 포함됩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무기가 포함됩니다.”
“모든 무기라고 하셨는데, 원자폭탄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트루먼은 고개를 들었다1.
“그 사용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검토되어 왔습니다. 나는 그것이 쓰이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끔찍한 무기입니다. 이 군사 침략과 아무 상관도 없는 죄 없는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에게 써서는 안 됩니다. 그 무기를 쓰면 그런 일이 생깁니다.”
연필 긁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몇 질문 뒤 다른 기자가 그 대목으로 되돌아왔다. 군사 목표에 쓰는지 민간에 쓰는지를 묻자 트루먼은 군인들이 정할 문제라고 했다. 유엔의 승인이 없으면 쓰지 않는다는 뜻이냐는 물음에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1.
“현지 군사령관이 늘 그래 왔듯이 무기의 사용을 맡게 될 겁니다.”
기자 몇이 수첩을 덮기도 전에 방을 빠져나갔다. 전신 기계가 있는 기자실까지는 복도 하나였다.
그날 오후 백악관은 보도문을 냈다. 대통령의 답변이 잘못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법에 따라 원자폭탄 사용은 대통령만 승인할 수 있고, 그런 승인은 내려진 적이 없다. 승인이 내려진다면 현지 군사령관은 무기의 전술적 운반을 맡을 뿐이다. 오늘의 답변은 이 사정을 하나도 바꾸지 않는다1.
해명은 기사보다 늦게 달렸다.
*
같은 날 저녁 일곱 시 오십사 분, 영국 런던 하원 본회의장.
외교 문제 토론은 이틀째였다. 자유당 의원 에드거 그랜빌이 일어섰을 때, 그의 손에는 연설 원고 대신 쪽지가 들려 있었다. 의사당 복도의 전신 기계가 막 워싱턴 소식을 뱉어 낸 참이었다2.
“그 보도 때문에 오늘 하려던 외교 연설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총리께 몇 가지 묻겠습니다.”
그랜빌은 쪽지를 읽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한국에서의 원자폭탄 사용이 적극 검토 중이라고 했고, 무기의 선택은 현지 군사령관의 일이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영국 정부가 이 일을 기자회견으로 처음 들었느냐고 물었다2. 의석 곳곳에서 고개가 돌아갔다.
밤 아홉 시 반, 클레멘트 애틀리(67) 총리가 토론을 마무리하러 일어섰다. 그는 먼저 맞은편 야당석을 보았다. 그날은 야당 대표 윈스턴 처칠(76)의 생일이었고, 처칠은 낮에 연설을 했다.
“처칠 의원의 생일 연설을 특별히 환영한다는 말을 해 두겠습니다.”
양쪽 의석에서 웃음이 번졌다2. 애틀리는 곧 쪽지 이야기로 넘어갔다. 워싱턴 주재 대사에게서 들으니 정정 발표가 이미 나왔고 지금쯤 전신에 올라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원자폭탄 사용을 군인 혼자 정할 일은 없어 보인다고 말하고, 정부의 입장을 덧붙였다2.
“이토록 무거운 결정은 한국의 국제 치안 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회원국들과 가장 충실하게 미리 협의하지 않고는 유엔의 이름으로 내려질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입니다.”
그러고는 트루먼에게 직접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의석에서 “옳소, 옳소” 소리가 터졌다. 답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동의를 얻으면 지체 없이 미국으로 건너가겠다고 했다2.
*
같은 날, 일본 도쿄 — 미 극동공군 사령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60) 중장은 워싱턴의 공군 참모총장 호이트 밴던버그(51) 대장에게서 온 전문을 받았다. 원자폭탄 사용에 대비하고 알맞은 목표를 추천하라는 내용이었다3. 극동공군은 폭격기 두 개 전대를 더 달라고 요청한 터였고, 스트레이트마이어는 그 전대들이 원자무기를 갖추고 와야 한다고 적어 보냈었다. 그는 일본까지 공격받을까 걱정하고 있었다3.
그는 목표를 적었다. 압록강 건너 안둥(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 만주의 중심 도시 묵덴(현 중국 랴오닝성 선양), 페이핑(현 베이징), 톈진, 상하이, 난징. 그리고 미국이 ‘큰 전쟁’에 휘말리면 소련 땅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만주 지린도 치고 싶다고 덧붙였다3. 미 공군 전략공군사령부는 그 무렵 전 세계에서 최고 경계에 들어가 있었다3.
엿새 뒤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가 모든 사령관에게 경고문을 보냈다. 한국의 사태가 전면전의 가능성을 크게 높였으니, 경보 분위기를 만들지 않는 범위에서 준비 태세를 끌어올리라는 내용이었다3.
“경보 분위기는 만들지 말고 준비 태세는 올리라고?”
“사이렌은 울리지 말고 비행기는 띄워 둘 준비를 하라는 말이지요.”
참모들이 주고받은 말에 웃는 사람은 없었다.
*
1950년 12월 7일 목요일, 워싱턴 백악관 각료회의실.
애틀리는 12월 4일에 워싱턴에 닿았다4. 이튿날 백악관에서는 트루먼의 고향 친구이자 대변인인 찰스 로스(65)가 기자들을 상대한 뒤 자기 책상에서 쓰러져 숨졌다4. 트루먼은 그날 성명에 로스가 자기 자리에서, 국민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결의의 희생자로 쓰러졌다고 썼다.
다섯 번째 회의 자리에서 트루먼이 미국 측 참석자들에게 말을 꺼냈다. 그는 방금 애틀리와 단둘이 원자폭탄과 그 사용 문제를 이야기했다고 했다. 영국과 미국은 이 일에서 언제나 동반자였으니, 영국과 상의하지 않고는 사용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총리에게 말했다는 것이었다5. 애틀리가 그 약속을 문서로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트루먼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말이 쓸모없다면, 종이에 적는다고 나아지지 않습니다.”
애틀리는 고맙다고 했다5. 그 자리를 기록한 사람은 무임소 대사 필립 제섭(53)이었다. 그의 메모 맨 위에는 공식 회의록에 넣지 않는다는 말이 붙었다5.
이튿날 12월 8일 정오를 조금 넘겨, 여섯 번째 회의 도중 트루먼이 잠시 자리를 떴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딘 애치슨(57) 국무장관, 로버트 러벳(55) 국방부 부장관, 재무장관, 대통령 특별보좌관 해리먼, 국무장관의 원자력 담당 특별보좌관 고든 아니슨이 모여 있었다. 공동성명에 원자무기 문장을 어떻게 넣을지 정하는 자리였다5.
러벳이 오래된 일을 꺼냈다.
“1943년 퀘벡 협정에는 미국이 원자무기를 쓰기 전에 영국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의회 원자력 합동위원회가 그 조항을 몹시 싫어했지요. 그래서 1948년 1월 잠정 협정으로 그 약속을 없앴습니다.”
전날 대통령이 한 말이 그 없앤 조항을 되살리는 셈이었다. 아니슨이 펜을 들어 두 문장을 썼다. 트루먼이 읽고 승인했고, 애치슨이 영국 대사 올리버 프랭크스에게 가서 동의를 받아 냈다5. 회의장으로 돌아온 트루먼은 총리와 합의한 문장이 두어 개 더 있다며 그것을 읽었다. 그날 나온 공동성명의 끝에서 두 번째 문단은 이렇게 시작했다6.
“대통령은 세계의 형편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요구하는 일이 결코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두 번째 문장은 사태를 바꿀 수 있는 일이 생기면 총리에게 늘 알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상의라는 말은 빠졌다.
해가 바뀐 1월, 두 나라가 회의록을 맞춰 보다가 일이 하나 드러났다. 영국 쪽 회의록에는 7일 트루먼의 첫 발언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미국 쪽은 대통령이 이튿날 바로잡았으니 그 대목을 지워야 한다고 했다. 영국은 자기들 보관본에서는 지우지 않겠다고 했고, 미국과 맞바꾸는 사본에서만 그 문단을 뺐다5. 종이에 적지 않겠다던 말은 런던의 서류철 속에 적힌 채로 남았다.
*
1951년 4월 6일, 워싱턴 백악관.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고든 딘(45)은 위원회가 지켜 온 원칙을 들고 백악관으로 갔다. 원자폭탄의 핵심부, 곧 핵분열 물질은 민간 기관인 원자력위원회가 쥐고, 나머지 부품만 군에 넘긴다는 원칙이었다. 1950년 7월 핵심부를 뺀 원자폭탄 부품이 영국과 오키나와(현 일본 오키나와현)에 나가 있었고, 사정은 한 해 가까이 그대로였다3.
3월에 밴던버그가 대통령에게 핵심부까지 공군에 넘겨 달라고 청했다. 압록강 근처에 소련군이 모이고,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소련 잠수함이 모여 있다는 정보가 근거였다. 딘은 곧바로 반대했다3. 그날 밴던버그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선 딘은 대통령이 이미 공군 참모총장이 올린 각서에 서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알았다3.
트루먼은 까닭을 설명하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기를 실제로 쓰는 결정은 여전히 내가 합니다. 원자력위원회와 국무부도 그 결정에 몫이 있을 겁니다.”
핵심부를 갖춘 원자폭탄 아홉 발이 공군에 넘어가 오키나와로 옮겨졌다3. 원자무기의 관리권이 처음으로 민간 위원회의 손을 떠나 공군 전략공군사령부로 넘어간 날이었다. 딘은 뒷날 대통령의 결정이 전쟁 예비분 일부에 대한 위원회의 민간 책임이 끝난 순간이었다고 적었다3.
같은 무렵, 맥아더가 하원 의원에게 보낸 행정부 비판 편지가 공개되었고 트루먼은 그를 해임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3. 원자폭탄의 관리권 문제는 도쿄의 그 장군 문제와 한데 엉켰다.
석 달 전 1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밴던버그가 전략공군사령관 커티스 르메이(44) 중장을 데리고 도쿄에 가려 하자 애치슨이 막았다. 르메이는 ‘미스터 원자폭탄’이었고, 그가 한국 근처에 나타나기만 해도 사람들이 지나치게 들뜰 것이라는 이유였다3.
*
1951년 가을, 오키나와의 미 공군 비행장.
B-29 한 대가 홀로 활주로를 굴렀다. 편대도 호위기도 없었다. 북한 상공에서 원자폭격을 시험하는 비행이었다7. 폭탄창에는 원자폭탄과 모양을 맞춘 모의탄, 아니면 무거운 일반 폭탄 하나가 실려 있었다8.
기체는 북쪽으로 날아 북한 상공에 들어갔다. 원자폭탄을 실제로 떨어뜨릴 때의 순서를 하나하나 밟는 비행이었다. 폭격수는 조준기에 눈을 대고 지상의 목표를 찾았다. 조종석의 무전이 짧게 울렸다.
“목표 확인.”
“투하.”
폭탄창이 열리고 무거운 쇳덩이가 떨어졌다. 땅에서 오른 것은 일반 폭탄의 흙기둥이거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승무원들은 손목시계를 보며 원자폭탄이었다면 기체가 충격파를 피해 얼마나 멀어져 있어야 했는지를 셈했다. 미국 쪽 연구는 이 훈련을 ‘허드슨 하버 작전’이라고 불렀다. 전장에서 원자무기를 쓸 능력을 갖추려는 계획의 일부였다8.
이 무렵의 B-29는 평소에는 극동공군의 지휘를 받아 일반 폭탄을 떨어뜨리고, 전쟁이 원자전으로 바뀌는 순간 전략공군사령부의 지휘로 넘어가게 짜여 있었다. 그 연락 사무소의 암호명은 엑스레이였다3.
“이번 것도 진짜가 아니었지요?”
비행장으로 돌아온 정비병이 묻자 승무원 하나가 낙하산 끈을 풀며 대답했다.
“진짜였으면 자네가 그걸 물을 일도 없었을 거야.”
*
1953년 4월 말, 한반도 중부 전선의 산 — 중국인민지원군의 갱도.
산의 뒷면, 포탄이 잘 떨어지지 않는 비탈에 입구가 두세 개씩 뚫려 있었다. 하나는 드러나 있었고, 하나는 덤불 밑에 숨어 있었다9. 병사들은 삽과 곡괭이로 산을 팠다. 그달 말까지 지원군이 한반도에 판 갱도는 모두 천이백오십 킬로미터를 넘었고, 참호와 교통호는 육천이백사십 킬로미터였다9.
입구 위의 흙과 바위는 두께가 대개 십 미터에서 십오 미터였다. 비행기가 떨어뜨리는 무거운 폭탄도 견딜 수 있는 두께였다9. 갱도는 공습과 포격, 비, 습기, 독가스, 불, 홍수, 이 일곱 가지를 막도록 지었다. 병사들은 그것을 ‘칠방’이라고 불렀다9.
꼭대기의 전투 갱도 천장은 두세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1952년 가을 강원도 김화 북쪽 오성산 남쪽 기슭의 고지 상감령(현 북한 강원도 김화군)에서 싸운 병사 장지파는 그런 갱도가 거의 다 폭격에 무너졌고, 부대는 천장이 수십 미터 두께인 병력 대기 갱도로 물러나 버텼다고 회고했다9.
“위에서 또 쿵쿵거린다.”
“천장 두께만 믿어. 저쪽은 폭탄을 돈으로 사고 우리는 삽으로 산을 사니까.”
그해 봄 워싱턴에서는 이 산들을 두고 숫자를 따지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
1953년 5월 13일, 워싱턴 백악관 — 제144차 국가안전보장회의.
탁자 위에는 4월 2일자 문서 ‘NSC 147’, 한국에서 택할 수 있는 행동 방안의 분석이 놓여 있었다10. 방안은 여섯 가지였다. 지금처럼 버티는 첫째 방안을 빼면 어느 방안에서도 원자무기를 쓸 수 있었고, 쓸지 말지는 나중에 정하게 되어 있었다10. 문서는 원자무기를 쓸 때의 군사적 단점도 적었다. 선례가 생기면 유엔군의 시설이 대체로 적의 것보다 더 좋은 표적이 된다. 그 예로 든 것이 인천항과 부산항, 유엔군 비행장, 상륙작전을 위해 모인 병력이었다10. 원자무기를 쓰면 공산 측이 휴전에 필요한 양보를 할지는 추정할 수 없다고도 적었다10.
드와이트 아이젠하워(60) 대통령이 회의를 이끌었다. 넉 달 전 취임한 그는 군복을 벗은 지 오래지 않은 장군이었다. 합동참모본부를 대표해 나온 존 헐 대장과 J. S. 브래들리 소장이 여섯 방안의 군사적 의미를 설명했다11.
“한국 밖으로 작전을 넓히는 방안은 어느 것도 원자무기 없이는 제대로 해낼 수 없습니다. 쓴다면 상당한 수를 써야 효과가 있습니다. 다만 한국 땅 안에는 좋은 전략 목표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그 설명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비키니에서 땅을 뚫고 들어가는 원자무기를 시험한 적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중공군의 전술 목표에 그런 무기를 쓸 수는 없겠느냐는 것이었다11. 헐은 비키니의 관통탄 시험은 취소되었고 네바다 시험장에서 시험했다고 답했다. 효과는 지진 같았지만, 그만한 파괴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 있다고 했다11.
아이젠하워는 계산을 꺼냈다11.
“적이 산마다 벌집처럼 파 놓은 엄폐호에 일반 무기를 계속 퍼붓는 것보다, 원자무기를 쓰는 쪽이 돈으로는 더 쌀지도 모르겠소. 이 나라에서 전선까지 일반 탄약을 실어 나르는 비용을 셈에 넣으면 더 그렇소.”
그 벌집이 천이백오십 킬로미터였다.
국무장관 대리 월터 베델 스미스(55)가 동맹국의 반응을 보고했다. 전쟁을 한국 밖으로 넓히는 방안을 미국이 먼저 고르면 동맹국들이 따라오지 않고, 유엔군에서 자기 나라 부대를 빼 갈 수도 있다고 했다. 소련이 끼어들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하고, 전면전의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11. 대통령이 유럽의 방위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스미스는 나토와 유럽의 동맹 체제가 일시적으로 모두 무너질 것이라고 답했다11.
아이젠하워는 유럽의 많은 사람에게 전면전이 공산주의에 항복하는 것보다 더 끔찍하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전면전은 유럽 문명의 소멸이었다. 영국과의 관계가 지난 몇 주 사이에 2차 대전이 끝난 뒤 어느 때보다 나빠졌다고도 했다. 스미스가 받았다11.
“솔직히 지금 영국과의 관계는 ‘좋지 않다’고 해야겠습니다.”
스미스는 휴전이 되면 생길 일도 내다보았다. 처음에 의회와 국민은 피 흘림이 끝난 것을 기뻐하겠지만, 곧 두 해 동안 치른 싸움의 결과를 셈하고 그 작은 성과를 매섭게 비판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11.
“사람들이 그 결과를 보고 난리를 피우면, 그 사람들한테 계속되는 한국전쟁의 최전선에 자원해 가라고 하면 됩니다.”
회의는 합동참모본부가 다음 회의에 가장 유리한 방안을 골라 오기로 하고 끝났다. 같은 자리에서 대통령은 국군 사단을 열여섯에서 스물로 늘리는 것을 허락했다11.
*
1953년 5월 21일 오전 열한 시 반, 인도 뉴델리 — 총리 집무실.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62)는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61)와 마주 앉았다12. 네루는 인도가 안에서 갈라질 위험부터 이야기했다. 독립이 부풀린 희망을 낳았고, 굶주림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고 했다. 중국과 맞댄 국경이 이천 마일이고, 히말라야가 인도의 국경이라고 했다12.
한국 휴전 이야기는 여덟 번째 순서에 나왔다. 덜레스는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들을 인도군이 맡는 안을 내놓았고 네루는 받아들이는 기색을 보였다. 네루는 휴전을 맺지 못하면 싸움이 넓어질까 두렵다고 했다12. 덜레스가 그 말을 받았다.
“그 판단에 동의합니다. 휴전 협상이 깨지면 미국은 아마 군사적 노력을 줄이는 쪽이 아니라 더 키우는 쪽으로 갈 것이고, 그러면 분쟁 지역이 넓어질 수도 있습니다.”
덜레스는 그날 회담 기록의 그 문장 뒤에 괄호를 치고 짧게 적었다. 이 말이 전달되리라고 생각했다12. 기록에 원자폭탄이라는 낱말은 없다.
그는 말을 이었다. 미국은 진심으로 휴전을 바라고 있으며, 미국이 싸움을 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사람들뿐이라고 했다. 미국은 이미 사상자 십오만 명쯤과 백억에서 백오십억 달러를 치렀다고 했다. 네루는 미국이 전쟁을 끌려는 것이 아니라 휴전을 원한다는 말을 완전히 받아들인다고 했다12.
이튿날 다시 만났을 때 네루가 먼저 그 말을 꺼냈다. 휴전이 되지 않으면 싸움이 더 격해질 수 있다는 전날의 말을 짚고, 네루는 이렇게 말했다13.
“그렇게 되면 끝이 어디일지 알기 어렵습니다.”
대화 뒤쪽에서 네루는 그 말을 한 번 더 꺼냈다. 덜레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이야기가 저절로 가라앉게 두었다13. 엿새 뒤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대사 찰스 볼런(46)이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60)에게, 협상이 깨지면 미국 정부가 간절히 피하려는 사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몰로토프는 아주 진지하게 들었고 선전 같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13.
그 말이 뉴델리를 거쳐 베이징의 누구에게, 어떤 문장으로 닿았는지는 남은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
*
1946년 8월 6일, 중국 북서부 산시성의 공산당 근거지 옌안 — 시내 가까운 골짜기 마을 양자링의 돌탁자.
미국 기자 애나 루이즈 스트롱(65)은 공책을 펴 놓고 마오쩌둥(57)과 마주 앉았다14. 두 달 전 다섯 번째로 중국에 들어온 스트롱은 내전과,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돕는 미국을 두고 묻는 중이었다15. 마오는 미국이 이미 일본과 국민당이 다스리는 중국, 조선의 절반과 남태평양을 손에 쥐었다고 하나하나 짚었다14. 통역이 그 말을 영어로 옮기는 동안 스트롱의 연필이 공책 위를 달렸다. 산비탈을 파고 지은 토굴집들이 돌탁자 뒤로 늘어서 있었고, 8월의 볕이 누런 흙벽을 데우고 있었다.
“좋은 설명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원자폭탄을 쓰면요? 아이슬란드나 오키나와, 중국 안의 기지에서 소련을 폭격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마오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답했다15.
“원자탄은 미국 반동파가 사람을 겁주려고 세워 둔 종이호랑이입니다. 무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섭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을 한꺼번에 많이 죽이는 무기지요. 그래도 전쟁의 승패는 인민이 가릅니다. 새 무기 한두 가지가 가르지 않습니다.”
통역은 ‘종이호랑이’에 맞는 영어를 찾지 못해 ‘허수아비’라고 옮겼다. 스트롱은 무슨 말인지 잡지 못하고 연필을 멈췄다. 허수아비가 아니라 종이호랑이라는 말이 그 자리에서 바로잡혔고, 마오는 그 낱말이 마음에 들었다15. 그는 종이호랑이란 아이들이나 겁주는 물건이어서, 비 한 번 맞으면 흐물흐물해져 씻겨 나간다고 풀어 주었다15.
“허수아비면 까마귀나 겁주겠지요.”
옆에서 누군가 중얼거리자 돌탁자 둘레에 웃음이 돌았다. 스트롱은 공책에 그 두 낱말을 영어로 또박또박 적었다. 스트롱이 질문에서 꼽은 기지 가운데 오키나와가 있었다. 다섯 해 뒤 핵심부를 갖춘 원자폭탄 아홉 발이 옮겨 간 곳이 그 섬이었다3.
*
1953년 9월 12일, 중국 베이징 —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24차 회의.
건국 뒤 나라의 최고 권력 기관 노릇을 하던 중앙인민정부위원회의 위원들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서명되고 일곱 주 가까이 지나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먼저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52)가 올린 항미원조, 곧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는 싸움의 공작 보고를 들었다16. 이어 일어선 몇 사람이 승리를 지도부가 옳게 이끈 덕으로 돌렸다. 중앙인민정부 주석 마오쩌둥이 그 말을 받았다17.
그 연설의 첫 문장은 이러했다. 항미원조는 3년 만에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18.
“방금 여러분이 지도가 옳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도도 한 요인이지요. 그러나 주된 까닭은 우리 전쟁이 인민의 전쟁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적이 화해에 응한 까닭을 셋으로 꼽았다. 첫째는 군사였다. 미국 침략군은 얻어맞는 처지였고, 화해하지 않았다면 전선 전체가 뚫려 서울이 조선 인민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둘째는 정치로, 적 안의 풀리지 않는 모순과 화해를 바라는 세계 인민의 요구였다. 셋째는 경제로, 적이 전쟁에 돈을 너무 써서 예산의 수입과 지출이 맞지 않았다17. 그는 셋 가운데 첫째가 주된 까닭이고, 그것이 없었다면 화해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조선 전쟁에서 적은 109만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우리도 대가를 치렀지만 처음 예상보다 훨씬 적었고, 갱도를 판 뒤로는 더 줄었습니다.”
중국 쪽 숫자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17. 마오는 땅 밑 이야기를 이었다. 전선에는 지하 창고에 지하 강당까지 생겨, 적이 위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동안 병사들은 아래에서 대회를 열었다고 했다. 입대를 바라는 젊은이 백 명에 하나를 골랐더니 사람들이 사위 고르기보다 까다롭다고 하더라는 대목에서 장내에 웃음이 번졌다17.
그가 꼽은 성과의 첫째는 조선 인민과 함께 38선으로 되밀어 38선을 지킨 것이었다. 전선이 여전히 압록강과 두만강에 있었다면 만주 남부의 공업 도시 선양과 안산, 푸순의 인민이 마음 놓고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둘째는 서른세 달 동안 미군과 맞붙어 그 밑바닥을 다 더듬어 본 경험이었다17.
“미 제국주의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런 것입니다.”
연설 어디에도 원자탄이라는 낱말은 나오지 않았다17. 일곱 해 전 옌안의 돌탁자에서 그가 종이호랑이라고 부른 무기였다. 오키나와로 옮겨진 아홉 발도, 뉴델리 회담 기록의 괄호도, 그날 베이징에서 그가 꼽은 까닭에는 들지 않았다.
*
1965년 3월 4일, 워싱턴 국무부 — 장관 집무실로 가는 서류.
국무부 사무국장 벤저민 리드는 딘 러스크(41) 국무장관에게 짧은 표지와 두 쪽짜리 메모를 올렸다13. 메모의 제목은 한국전쟁 때 중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 위협이었다.
얼마 전 전직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존슨 대통령에게 말했다. 한국전쟁이 계속되면 중국에 핵무기를 쓰겠다는 전갈을 보냈고, 그 경고가 전쟁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몫을 했다는 이야기였다13. 국무부는 서류철을 뒤졌다. 리드의 메모는 그런 구체적인 전갈을 뒷받침할 문서를 찾지 못했다고 적었다. 다만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는 신호가 네루와 몰로토프에게 건너간 기록은 찾았다고 덧붙였다13. 뒷날의 역사가들도 대부분 아이젠하워의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베이징은 이미 다른 까닭으로 휴전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는 연구가 많다7.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서명되었다. 오키나와로 옮겨진 아홉 발도, 인천과 부산을 걱정하던 문서도, 뉴델리의 괄호도 그날까지 폭탄 하나 떨어뜨리지 않았다. 1950년 11월 30일 오전, 인디언 조약실에서 트루먼은 그 무기를 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무기를 검토한 사람도, 실어 나른 사람도, 연습 삼아 모의탄을 떨어뜨린 사람도 끝내 그것을 쓰지 않았다.
사료 출처
1. Harry S. Truman Library & Museum, 「The President’s News Conference」 1950년 11월 30일, Public Papers of the Presidents, trumanlibrary.gov/library/public-papers/295/presidents-news-conference (자료모음 NU04 저장본) — 오전 10시 30분·행정동 474호 인디언 조약실·246번째 회견, 성명 낭독(중공군 공격·유엔군 철수·원자력위원회 예산), 「My editor tells me not to take anything for granted. [Laughter]」, 문답 9·11·12·14(원문: That includes every weapon that we have / There has always been active consideration of its use. I don't want to see it used. It is a terrible weapon, and it should not be used on innocent men, women, and children who have nothing whatever to do with this military aggression. / The military commander in the field will have charge of the use of the weapons, as he always has.), 각주 2의 맥아더 「entirely new war」, 각주 3의 같은 날 백악관 보도문(only the President can authorize the use of the atom bomb, and no such authorization has been given). 2. 영국 하원 의사록(Hansard), 「Foreign Affairs」 1950년 11월 30일, Vol. 481, api.parliament.uk/historic-hansard/commons/1950/nov/30/foreign-affairs — 저녁 7시 54분 에드거 그랜빌(Eye) 발언(원문: As a result of that statement, the speech which I meant to make upon foreign affairs will not be delivered), 밤 9시 30분 애틀리 연설(처칠의 「birthday speech」 환영, 정정 발표와 맥마흔법, 「a decision of such grave import could not be taken on behalf of the United Nations without the fullest prior consultation」, 트루먼 방문 제안과 「Hear, hear」). 3. Phillip S. Meilinger, 『Bomber: The Formation and Early Years of Strategic Air Command』(Air University Press, 2012) 「Nuclear Weapons, Custody, and the Korean War」 장, 인쇄 231~238쪽(PDF 254~261쪽), 자료모음 NU01 — 11월 30일 밴던버그 전문(대비와 목표 추천), 스트레이트마이어의 원자무장 폭격기 두 전대 요청과 일본 공격 걱정, 목표 안둥·묵덴·베이징·톈진·상하이·난징과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지린, 전략공군사령부 전 세계 경계, 12월 6일 합참 경고(without creating [an] atmosphere of alarm), 1951년 1월 애치슨이 르메이 동행을 막음(「Mr. Atom Bomb」, excite people unduly), 1950년 7월 핵심부 없는 부품의 영국·오키나와 배치, 1951년 3월 밴던버그 요청과 딘의 반대, 4월 6일 백악관(트루먼이 이미 서명하기로 함, 사용 결정은 자신에게 남김), 핵심부를 갖춘 원자폭탄 9발의 공군 인계와 오키나와 배치, 딘의 뒷날 평(marked the end of the Commission's civilian responsibility over a portion of our war reserve), 맥아더 편지와의 얽힘, 극동공군·전략공군 이중 지휘와 연락 사무소 암호명 X-ray. 4. 영문 위키백과, 「Charlie Ross (journalist)」(2026년 10월 열람), 아메리칸 프레지던시 프로젝트 「Statement by the President on the Death of Charles G. Ross」 1950년 12월 5일, presidency.ucsb.edu/documents/statement-the-president-the-death-charles-g-ross, 같은 사이트 「Joint Statement Following Discussions With the Prime Minister of Great Britain」 머리글 — 애틀리 12월 4일 도착, 로스가 기자회견 뒤 백악관 책상에서 숨짐(1885년 인디펜던스 출생), 트루먼 성명(fell at his post, a casualty of his fidelity to duty and his determination that our people should know the truth). 5. FRUS 1950, Vol. VII, Korea, 문서 1003,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0v07/d1003 (자료모음 NU05) — 1950년 12월 7일 제섭 메모(공식 기록 미수록, 「if a man’s word wasn’t any good it wasn’t made any better by writing it down」), 부속 1953년 1월 16일 아니슨 메모(12월 8일 정오 무렵 집무실 협의 참석자, 러벳의 퀘벡 협정·1948년 1월 7일 잠정 협정 설명, 아니슨의 문안 작성, 애치슨–프랭크스, 「no more and no less」), 1951년 1월 9일 제섭 메모(영국 보관본에서는 첫 발언을 지우지 않고 교환본에서만 삭제). 6. 아메리칸 프레지던시 프로젝트, 「Joint Statement Following Discussions With the Prime Minister of Great Britain」 1950년 12월 8일, presidency.ucsb.edu/documents/joint-statement-following-discussions-with-the-prime-minister-great-britain — 원자폭탄 문단 첫 문장(The President stated that it was his hope that world conditions would never call for the use of the atomic bomb). 둘째 문장(총리에게 늘 알림)은 FRUS 1951 Vol. I 재인용 검색 결과로 뜻만 확인했다. 7. James I. Matray, 「Revisiting Korea: Exposing Myths of the Forgotten War」, 『Prologue』 2002년 여름호, archives.gov/publications/prologue/2002/summer/korean-myths-1 (자료모음 NU10) — B-29가 북한 상공에서 원자폭격 시험 비행을 함, 1953년 5월 덜레스의 막연한 위협이 네루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길 기대함, 대부분의 학자가 아이젠하워의 주장을 문서 근거 없는 신화로 봄. 8. Bruce Cumings, 『The Korean War: A History』(2010), 허드슨 하버 작전 대목, hoodedutilitarian.com/?p=53847 게재 인용문으로 확인 — 오키나와에서 B-29를 한 대씩 띄워 북한 상공에서 모의 원자폭격을 하며 모의 원자폭탄이나 무거운 TNT 폭탄을 떨어뜨림, 전장 원자무기 사용 능력 확보 계획. 원서는 직접 보지 못했다. 9. 于也童·武江民, 「揭秘上甘岭战役中坚不可摧的“地下长城”」, 新华每日电讯, 신화망 2022년 11월 25일, news.cn/politics/2022-11/25/c_1129158087.htm — 반사면의 갱도와 입구 두세 개, 입구 위 두께 10~15미터, 칠방(防空·防炮·防雨·防潮·防毒·防火·防洪), 1953년 4월 말 갱도 총연장 1,250여 킬로미터·참호와 교통호 6,240킬로미터, 장지파의 회고. 10. FRUS 1952–1954, Vol. XV, Part 1, 문서 437, 「NSC 147: Analysis of Possible Courses of Action in Korea」 1953년 4월 2일,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5p1/d437 (자료모음 NU06) — 21항(A안 밖의 모든 방안이 원자무기 사용을 허용하되 요구하지 않음), 23항 c(인천·부산항, 유엔군 비행장, 상륙작전 집결지가 더 좋은 표적), 26항(양보로 이어질지 추정 불가). 11. FRUS 1952–1954, Vol. XV, Part 1, 문서 515, 「Memorandum of Discussion at the 144th Meeting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1953년 5월 13일,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5p1/d515 (자료모음 NU07) — 헐·브래들리 보고, 비키니 관통탄 질문과 네바다 시험, 「cheaper, dollar-wise」와 「dugouts which honeycombed the hills」, 스미스의 동맹국 반응·나토 붕괴 전망, 영국과의 관계 「not good」, 휴전 뒤 비판 예상과 대통령의 「volunteer for front-line action」, 국군 사단 16→20 승인. 12. FRUS 1952–1954, Vol. IX, Part 1, 문서 39, 덜레스–네루 회담 메모, 뉴델리 1953년 5월 21일 11시 30분, 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09p1/d39 (자료모음 NU08) — 1~4항(내부 통합·굶주림·이천 마일 국경·히말라야), 8항(인도군의 포로 관리, 「stronger rather than a lesser military exertion」, 「(Note: I assumed this would be relayed.)」, 「only crazy people」, 사상자 약 15만·100억~150억 달러). 13. Benjamin H. Read → Dean Rusk, 「Threat of the Use of Nuclear Weapons Against China in Korean War」 1965년 3월 4일, National Security Archive 배포, nsarchive.gwu.edu/document/16196-01b-memo-benjamin-read-dean-rusk-subj-threat (자료모음 NU03) —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게 한 말을 뒷받침할 문서 없음, 네루·몰로토프에게 건너간 신호, 5월 22일 네루의 말(difficult to know what end might be)과 덜레스의 무대꾸(Karachi 전문), 5월 28일 볼런–몰로토프(Moscow 1650·1668). 14. 毛泽东, 「和美国记者安娜·刘易斯·斯特朗的谈话」(一九四六年八月六日), 『毛泽东选集』 4권, marxists.org/chinese/maozedong/marxist.org-chinese-mao-19460806.htm, 영문판 「Talk with the American Correspondent Anna Louise Strong」(August 1946), Selected Works Vol. IV, marxists.org/reference/archive/mao/selected-works/volume-4/mswv4_13.htm (2026-10-14 원문 확인) — 각주 1(1946년 8월 옌안 양자링 회견, 스트롱 1885년생), 미국이 일본·국민당 중국·「半个朝鲜」·남태평양을 쥐었다는 대목, 스트롱의 질문(「这是一个很好的说明。但是如果美国使用原子炸弹呢?如果美国从冰岛、冲绳岛以及中国的基地轰炸苏联呢?」), 마오의 답(「原子弹是美国反动派用来吓人的一只纸老虎,看样子可怕,实际上并不可怕。当然,原子弹是一种大规模屠杀的武器,但是决定战争胜败的是人民,而不是一两件新式武器。」 / The atom bomb is a paper tiger which the U.S. reactionaries use to scare people. It looks terrible, but in fact it isn't.). 15. 本书编写组, 『一路同行:中国共产党对外交往100个故事』 영문판, 스트롱 대목, idesk.qq.com/read/1053069170/8 — 1946년 6월 다섯 번째 방중, 양자링의 돌탁자, 원자탄 질문 뒤 마오가 잠시 말을 멈춤, 통역이 「scarecrow」로 옮겨 스트롱이 알아듣지 못함, 「paper tiger」로 바로잡히고 마오가 그 번역을 좋아함, 종이호랑이는 아이를 겁주고 비에 젖으면 씻겨 나간다는 마오의 풀이. 영문 위키백과 「Paper tiger」(2026년 10월 열람)가 인용한 Strong, 『Tomorrow's China』(1948) 38~39쪽의 통역 대목도 대조했다. 원서는 직접 보지 못했다. 16. 共产党员网, 연표 2021년 9월 9일, 12371.cn/2021/09/09/ARTI1631172036256240.shtml — 1953년 9월 12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24차 회의가 펑더화이의 「关于中国人民志愿军抗美援朝的工作报告」를 듣고 마오쩌둥이 승리의 원인과 의의를 밝힘. 펑더화이 보고 본문은 보지 못했다. 17. 毛泽东, 「抗美援朝的伟大胜利和今后的任务」(一九五三年九月十二日), 『毛泽东选集』 5권(人民出版社 1977), 101~106쪽, marxists.org/chinese/maozedong/marxist.org-chinese-mao-19530912.htm (2026-10-14 원문 확인) — 머리주(中央人民政府委员会第二十四次会议上的讲话), 「刚才各位先生说,是由于领导的正确……但主要是因为我们的战争是人民战争」, 세 까닭(「第一,军事方面……挨打状态。如果不和,它的整个战线就要被打破,汉城就可能落入朝鲜人民之手」 「第二,政治方面……」 「第三,经济方面……它的预算收支不平衡」 「第一个原因是主要的原因」), 「敌人伤亡了一百零九万人」 「比原来预料的要少得多,有了坑道以后,伤亡就更少了」, 「地下礼堂也修起来了,敌人在上面丢炸弹,我们在下面开大会」, 「百里挑一,人们说比挑女婿还严」, 「打回到三八线,守住了三八线」과 선양·안산·푸순, 「跟它打了三十三个月」 「美帝国主义并不可怕,就是那么一回事」. 전문에 「原子」라는 글자가 없음을 원문 검색으로 확인했다. 18. 마오쩌둥, 「抗美援朝的伟大胜利和今后的任务」(1953.9.12), 『毛泽东选集』 5권, 101~106쪽(1977; marxists.org/chinese/maozedong/marxist.org-chinese-mao-19530912.htm, 원문 확인) — 연설 첫 문장. 중국 쪽 발표다.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1953년·1965년 장면의 인물도 1950년 기준으로 적었다. 트루먼 1884년생(1화 [나이]와 같은 근거), 애틀리 1883년생, 처칠 1874년생(1950년 11월 30일이 76번째 생일), 스트레이트마이어 1890년생, 밴던버그 1899년생, 로스 1885년생(영문 위키백과 「Charlie Ross」), 제섭 1897년생, 애치슨 1893년생, 러벳 1895년생, 고든 딘 1905년생(영문 위키백과 「Gordon Dean (lawyer)」), 르메이 1906년생, 아이젠하워 1890년생, 월터 베델 스미스 1895년생, 덜레스 1888년생, 네루 1889년생, 볼런 1904년생, 몰로토프 1890년생, 러스크 1909년생(이상 따로 적지 않은 것은 영문 위키백과 인물 항목). 그랜빌, 해리먼, 아니슨, 프랭크스, 헐, J. S. 브래들리, 리드, 장지파는 이 화에서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했거나 이름만 나와 나이를 적지 않았다. 1946년 옌안 장면의 인물도 1950년 기준으로 적었다. 마오쩌둥 1893년생(영문 위키백과 「Mao Zedong」), 애나 루이즈 스트롱 1885년생(『毛泽东选集』 4권 대담 각주 1), 펑더화이 1898년생(영문 위키백과 「Peng Dehuai」). 옌안 장면의 통역은 자료마다 이름이 달라 이름과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1951년 4월 인계된 원자폭탄 아홉 발의 배치지 — Meilinger는 오키나와로 적었고, 다른 사후 연구와 기사에는 괌으로 적은 것이 있다(자료모음 연표는 괌·오키나와 이동 맥락을 확정하지 않음). 본문은 자료모음에 저장된 Meilinger를 따랐다. Meilinger는 1953년 말 극동공군 핵폭탄이 괌에 있었다고도 적었다. [자료 충돌] 허드슨 하버 작전의 시기와 일별 임무 — 자료모음 연표는 「1951년 가을」, 영문 위키백과는 1951년 10월 시작으로 적었다. 일별 임무 원기록과 합참 공식 전사(NU13)는 확보하지 못해 본문은 「1951년 가을」로만 적었다. [자료 충돌] 공동성명 문장 — 12월 7일 제섭 메모의 「영국과 상의하지 않고는 사용을 생각하지 않겠다」는 말과 12월 8일 공동성명의 「늘 알리겠다」는 문장이 다르다. 영국 회의록에는 첫 발언이 남았다. 이 기록으로 영국이 법적 거부권을 얻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자료 충돌] 덜레스의 말이 베이징에 전달되었는지 — 덜레스는 전달을 기대했고(NU08), 1965년 국무부 메모는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는 신호」만 찾았다(NU03). 인도 외교부의 전달 전문과 중국 지도부의 수신 기록은 이번에 찾지 못했다. 핵 위협이 휴전을 낳았다는 주장은 Matray 등 연구에서 다투어지고 있다. [자료 충돌] 트루먼 회견의 시각 — 공문서 머리글은 오전 10시 30분. 영국 하원에서는 같은 날 저녁에 전신 보도를 읽었다(런던과 워싱턴의 시차 다섯 시간). [자료 충돌] 옌안 대담의 날짜 — 『毛泽东选集』 중국어판은 1946년 8월 6일, 영문판은 「August 1946」으로만 적었다. 『一路同行』은 스트롱의 6월 방중 이야기에 이어 적고 날을 밝히지 않았다. 본문은 선집 중국어판을 따랐다. [자료 충돌] 「종이호랑이」 통역 — 스트롱의 1948년 회고 『Tomorrow's China』는 통역을 루딩이(陆定一)로 적었고, 다른 중국 자료는 위광성(余光生)으로 적었다(영문 위키백과 「Paper tiger」 재인용). 바로잡은 사람도 다르다. 『一路同行』은 미국인 의사 조지 하템(마하이더)이 「scarecrow가 아니라 paper tiger」라고 바로잡았다고 적고, 위키백과가 옮긴 스트롱 회고는 마오가 허수아비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고 적는다. 본문은 통역의 이름과 바로잡은 사람을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정전과 핵 위협, 중국 쪽 기록 — 마오의 1953년 9월 12일 연설은 정전의 까닭을 군사·정치·경제 셋으로 들고 원자탄을 말하지 않는다. 핵 위협이 휴전을 이끌었다는 아이젠하워·덜레스 쪽 주장과 엇갈린다. 2020년 10월 23일 시진핑의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연설(court.gov.cn/xinshidai/xiangqing/265561.html)에도 「核」이라는 글자가 없다(자료모음 영상자료/중공군_대본재료/중국발표_사료.md 8절의 원문 확인). 이것은 이 화의 시기 밖이라 본문에 넣지 않았다. 「적 사상 109만」은 마오의 주장이며, 이 화에서는 다른 집계와 맞대 보지 않았다. [재구성] 인디언 조약실의 손짓·연필 소리·기자들이 빠져나가는 장면과 「해명은 기사보다 늦게 달렸다」, 그랜빌의 손에 들린 쪽지와 의석의 몸짓(발언 내용과 「Hear, hear」는 기록), 도쿄 사령부 참모들의 대화, 12월 8일 러벳의 말을 대사로 옮긴 것(내용은 아니슨 메모), 애틀리의 「고맙다」를 뺀 각료회의실의 몸짓, 4월 6일 트루먼의 말을 대사로 옮긴 것(내용은 Meilinger), 르메이를 두고 「이름 하나가 폭탄보다 먼저 터지는 사람」이라는 말(기록에 없다고 본문에 밝힘), 허드슨 하버 B-29의 무전·정비병과 승무원의 대화·손목시계 셈, 중공군 갱도의 병사 대화, 헐의 설명과 아이젠하워·스미스의 말을 대사로 옮긴 것(내용은 토의록, 토의록은 3인칭 요약), 덜레스·네루의 말을 대사로 옮긴 것(내용은 회담 메모와 1965년 메모가 인용한 전문), 마지막 문단의 정리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실제 핵폭발 장면은 없고, 허드슨 하버 장면의 폭탄은 모의탄이나 일반 폭탄이다. [재구성] 옌안 장면의 공책과 연필, 토굴집과 흙벽을 데우는 8월의 볕, 스트롱이 연필을 멈추고 두 낱말을 적는 몸짓, 「허수아비면 까마귀나 겁주겠지요」라는 중얼거림과 웃음(기록에 없음), 스트롱의 질문과 마오의 답을 대사로 옮긴 것(내용은 『毛泽东选集』 4권), 베이징 회의장의 웃음과 마오의 연설 대목을 대사로 옮긴 것(내용은 『毛泽东选集』 5권), 앞 발언자들이 「지도가 옳았다」고 말한 장면(연설 첫머리의 「刚才各位先生说」에 기댐), 마지막 문단의 정리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