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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14,900자)

옹진 전투 — 고립된 첫 전선

1950 · 네오

옹진 전투, 1950년 6월 25일~26일 — 옹진반도와 38선, 두락산·412고지·토끼고지, 옹진읍·강령·강령강·부포항·사곶항·냉정리 비행장, 앞바다 용호도·연평도. 북한군 제6사단 제14연대(전차 1개 중대)와 38경비 제3여단의 공격 방향, 국군 제17연대 본부 이동(옹진읍 → 강령 → 부포), 해상 철수 경로(부포 → LST-801 → 인천, 사곶 → 대성호 → 용호도 → 연평도 → 인천·군산). 개략도, 거리 비례 아님.

1950년 6월 23일 자정, 황해도 옹진반도(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강령군), 국군 제17연대 본부.

무전병이 전문을 받아 적은 종이를 연대장 앞에 내밀었다. 육군본부의 지시였다. 자정을 기해 특별경계를 해제한다. 장병들의 외출과 외박을 허락해도 좋다. 한국 사정을 지켜보러 와 있던 유엔 한국위원단이 특별경계는 필요 없다고 지적한 뒤로 육군본부는 일선 부대에 비상조치를 풀라고 다그쳐 왔다1.

제17연대장 백인엽(27) 대령은 종이를 한 번 읽고 책상 위에 엎어 놓았다. 책상 서랍에는 한 달 전에 받아 적은 진술서가 들어 있었다. 북한군 포병 참모 강창남 소령이 38선을 넘어와 귀순하면서 털어놓은 북쪽 부대의 배치와 훈련 상태였다2.

“우리는 그대로 간다.”

참모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옹진반도는 황해도 남쪽 끝에서 서해로 삐죽 나온 땅이었다. 38선이 반도의 목을 가로질렀고, 반도의 남쪽 절반은 북한 땅과 바다에 갇혀 있었다. 서울로 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 1949년부터 이 반도에서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총소리가 그친 적이 거의 없었다. 2,719명의 연대가 45킬로미터의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2.

진지 공사에는 반도 주민들도 나와 삽을 들었다. 며칠 전, 그 공사판에 북쪽에서 날아온 포탄이 떨어져 다섯 명이 죽었다1.

연대는 진지를 떠나지 않았다.

*

6월 25일 새벽 네 시, 38선 북쪽 황해도의 마을 취야(현 북한 황해남도 벽성군).

비에 젖은 능선 위로 붉은 신호탄이 올랐다. 북한군 제6사단 제14연대 병사들은 사흘 전 밤에 이 마을로 옮겨 와 공격 준비를 마쳐 두었다3. 연대 앞에는 제203전차연대에서 떼어 온 전차 한 개 중대가 엔진을 데우고 있었다3.

신호탄이 꺼지기도 전에 뒤쪽 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병사들은 젖은 풀에 엎드려 포탄이 머리 위를 지나가는 소리를 삼십 분 동안 듣다가, 포성이 멎자 일어섰다4. 아침 안개가 골짜기에 낮게 깔려 있었다. 대열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안개가 걷혔을 때 그들은 이미 38선 남쪽 2킬로미터에 와 있었다.

반도 서쪽에서는 북한 내무성에 딸린 국경 경비 부대 38경비 제3여단이 같은 시각에 움직였다. 여단장은 최현(43)이었다. 여단은 나흘 전부터 대대 셋을 마을 옥동(현 북한 황해남도) 부근으로 몰래 옮겨 두었다3. 대열 사이로 말발굽 소리가 섞였다. 기병이었다. 말을 탄 병사들은 반도 북쪽 고을 태탄(현 북한 황해남도 태탄군)에서 옹진(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따라 남쪽 바닷가로 내려갔다3.

북쪽에서 밀면 국군은 남쪽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고, 남쪽 끝은 바다였다. 제17연대가 물러날 육지는 없었다.

*

25일 새벽 네 시 사십 분, 옹진반도의 마을 마현(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 제1대대 본부.

제1대대장 김희태 소령은 포격이 멎기도 전에 보고를 받았다. 북한군 한 개 소대가 제3중대 옆 사각지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희태는 지프에 올라 1.5킬로미터 북쪽, 자동(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이라는 이름의 마을로 달렸다2. 대대가 맡은 두락산에서 마을 호동(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까지는 13.5킬로미터였다. 한 대대가 지키기엔 너무 길었다.

다섯 시 십 분, 지휘소의 전화기들이 하나씩 조용해졌다2.

“3중대 나와라. 3중대!”

수화기에서는 잡음만 났다. 포탄이 전화선을 끊어 놓았다. 제2중대장 한혁 중위는 북한군과 교전 중이라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1. 토끼고지에서는 제3중대 제2소대장 김호경 소위가 거점을 지키다 전사했고, 제3중대 본부가 들어 있던, 지붕을 덮은 참호 엄체호가 포탄에 무너졌다1.

포병 쪽에서도 답답한 소식이 왔다. 포탄을 높이 띄워 산 너머로 떨어뜨리는 제7포병대대의 곡사포가 쏘려면 미 군사고문단의 허락이 필요했다. 허락은 요청보다 한참 늦게 내려왔다2.

다섯 시 삼십 분, 김희태는 마현으로 돌아와 대대 예비인 제1중대장 강은덕 대위를 불렀다.

“자동 마을로 올라가. 3중대 자리를 메워라.”

다섯 시 사십 분, 제2중대 제2소대가 밀고 온 북한군을 한 차례 물리쳤다. 숨을 돌린 소대원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제3소대가 있던 두락산 꼭대기에서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북한군 깃발이었다2.

여섯 시, 김희태는 대대 본부 밖에서 전령에게 명령을 불러 주고 있었다. 그가 타고 다니던 지프는 이미 포탄에 맞아 길가에서 연기를 내고 있었다5.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82밀리 박격포탄이었다1. 김희태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십 분 뒤 백인엽은 대대장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2. 대대장이 죽었다는 소문은 보고보다 빨리 참호를 돌았고, 제1대대는 흔들렸다5.

*

25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 자동 마을.

강은덕의 제1중대는 안개 속에서 자동 마을에 닿았다. 둘러보니 앞뒤가 다 북한군이었다. 대대 본부 지역은 이미 넘어가 있었고, 중대는 포위망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와 있었다2. 안개가 그들을 숨겨 주었다.

삼십 분쯤 지나자 해가 안개를 걷어 갔다. 좌우 능선에서 동시에 기관총이 울렸다. 병사들은 바위 뒤에서 탄창을 갈아 끼웠고, 탄창을 갈 때마다 탄띠가 가벼워졌다. 두 시간 남짓 지나자 손에 잡히는 탄이 없었다5. 한 병사가 마지막 클립을 들어 보이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이거 다 쏘고 나면 돌 던집니까?”

“돌은 아껴 둬. 그것도 모자랄 거다.”

그때 북한군의 사격이 뚝 그쳤다. 남쪽 능선 너머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국군의 함성이었다5.

*

같은 아침, 옹진반도의 고개 말재(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

여섯 시 이십 분,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연대장의 명령을 받았다. 무너진 주저항선을 되찾으라. 연대 예비였던 제2대대는 여섯 시 사십 분에 출발했고, 일곱 시에 말재에서 역습을 시작했다5.

말재 고개 아래 1.5킬로미터 지점에서 북한군 한 개 대대가 전투 대열로 남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송호림은 박격포와 곡사포를 한꺼번에 그 대열 한복판에 떨어뜨렸다. 제5중대가 자동 마을 쪽으로, 제7중대가 마을 사토(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 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제1중대를 구한 함성은 제5중대가 지른 것이었다5.

아홉 시, 연대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제3대대가 위험하니 한 개 중대를 빼서 반도 동쪽 고을 강령(현 북한 황해남도 강령군)으로 보내라는 지시였다5. 송호림은 수화기를 귀에 대고 한참 말이 없었다.

“지금은 공격 중입니다. 병력을 빼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연대장의 지시는 바뀌지 않았다. 송호림은 제8중대의 박격포 소대와 포대 하나를 강령으로 보냈다.

열 시쯤 송호림의 왼쪽 귀가 뜨거워졌다. 손을 대 보니 피가 묻어 나왔다. 총탄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위생병이 달려와 붕대를 감는 동안에도 송호림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됐어, 됐다. 귀가 하나 없어도 무전은 들린다.”

오후 두 시, 그 귀로 철수 명령이 들어왔다5.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철수하라니요?”

탄약을 가지러 간 트럭도 돌아오지 않았다. 찾으러 간 병사가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연대본부는 정오 무렵 이미 강령으로 옮겨 가 있었고, 전화선은 거기까지 이어져 있지 않았다5. 송호림은 그제야 반도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시 삼십 분, 그는 공격을 멈추고 철수를 명령했다. 제7중대가 뒤를 막고 제5중대가 앞장섰다. 북한군이 뒤를 쫓아왔고, 앞장선 제5중대장 김교섭 중위는 돌아오지 못했다5.

*

25일 아침, 냉정리(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 랭정리) 비행장.

제17연대에는 미국 장교 다섯 명이 고문관으로 와 있었다. 국군을 가르치고 조언하라고 남겨 둔 미 군사고문단 사람들이었다. 여섯 시쯤 그들은 서울 고문단 본부에 무전을 쳤다. 연대가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고, 곧 무너질 것 같다4. 아홉 시가 되기 전 두 번째 무전이 갔다. 비행기를 보내 달라.

서울에서 로이드 스윙크 소령과 프랭크 브라운 중위가 자원해 L-5 연락기를 띄웠다. 정찰과 연락에 쓰는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 두 대였다. 열 시 삼십오 분, 두 비행기는 냉정리 비행장 활주로에 내려앉았다4.

고문관 다섯 명은 짐도 거의 없이 달려가 좁은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자 비행기는 곧 활주로를 다시 달렸다. 바퀴가 땅을 떠날 때, 활주로 북쪽 능선에서는 아직 총성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비행기는 남쪽 바다 위로 작아졌다. 능선 위의 제17연대 병사들에게는 그 비행기를 탈 자리가 없었다.

*

25일 오전, 강령 북쪽 고지.

제3대대장 오익경 소령은 새벽 안개가 걷히는 것을 보고 숨을 삼켰다. 38선 남쪽 2킬로미터까지 북한군이 들어와 있었다. 여덟 시, 그는 연대에서 보낸 작전장교 조 중위를 도로 연대본부로 보냈다. 증원을 청하라는 심부름이었다2. 그러고 나서 대대에 일렀다.

“장갑차부터 쏴라. 사람은 그다음이다.”

열 시 사십 분, 치마산 서쪽 능선의 제10중대가 장갑차 한 대를 부쉈다2. 그러나 북한군의 포가 그 자리로 쏟아졌고, 중대는 흩어져 강령으로 물러났다. 열한 시에는 제9중대장 한홍 중위가 200고지에서 북한군 연대를 기다렸다가 옆구리를 쳤다. 어깨에 메고 쏘는 원통형 로켓 발사기 바주카가 장갑차 두 대를 불태우고, 포를 얹고 제 힘으로 달리는 차 자주포 한 대를 멈춰 세웠다2. 57밀리 대전차포는 전차의 철판을 뚫지 못했다3. 정오가 지나자 한홍의 중대도 강령으로 물러났다.

오후 두 시, 북한군이 제3대대의 전선을 뚫고 강령으로 내려왔다. 연대본부는 또 짐을 쌌다. 이번에는 반도 남동쪽 끝의 작은 항구 부포(현 북한 황해남도 강령군 부포로동자구)였다. 부포 뒤에는 바다뿐이었다.

옹진읍과 강령의 주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불 보따리를 지고 남쪽 바닷가로 내려갔다. 소달구지에 할머니를 태운 사내가 있었고, 닭장을 통째로 진 소년이 있었다.

공병대장 박준희 중위는 부포로 가는 길목의 조촌교 밑에 폭약을 달았다. 전차가 개울을 돌아 건너기 어려운 다리였다. 마지막 트럭이 다리를 건너자 박준희가 손을 내렸고, 다리 한가운데가 주저앉았다3.

*

25일 오후, 강령강 둑.

대전차포중대장 노경억 대위는 강령 읍내를 흐르는 강의 동쪽 둑 뒤에 포를 숨기고 엎드려 있었다. 둑 너머로 쇳소리가 다가왔다. 북한군 자주포와 장갑차였다. 포탑 없이 상자 같은 철판에 포신을 꽂은 차가 앞에 섰다.

“아직 쏘지 마라.”

포수 하나가 노경억을 돌아보았다.

“한 번 쏘면 우리 자리가 드러난다. 드러나면 저쪽 포가 이리로 온다. 그러니까 한 번에 끝낸다.”

포수들은 젖은 둑 흙에 뺨을 붙이고 궤도 소리를 들었다. 흙에서 강물 비린내가 올라왔다. 소리가 점점 커졌다. 자주포의 포신이 둑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고, 첫 자주포가 둑 앞 맨땅으로 나섰다.

“쏴!”

강령강 둑의 포들이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자주포 한 대가 멈췄고, 뒤따르던 자주포가 방향을 틀다 옆구리를 맞았다. 연기가 걷혔을 때 둑 앞에는 SU-76 자주포 세 대와 장갑차 두 대가 서 있었다3.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

25일 오전 열한 시, 평양. 오후 한 시 삼십오 분.

평양방송이 남쪽 군대가 먼저 쳐들어왔다는 발표를 내보낸 지 두 시간 반 뒤, 김일성(38)이 직접 마이크 앞에 앉았다4. 김일성은 그날 아침 남한 군대가 옹진반도 위쪽 해주 지역을 공격했다고 말했다. 북한 내무성 보도는 한 걸음 더 나갔다. 남쪽 군대가 해주 서쪽과 황해도 금천(현 북한 황해북도 금천군), 강원도 철원(현 철원군) 지역에서 북쪽으로 1~2킬로미터를 쳐들어왔다고 했다6.

전쟁의 명분으로 평양이 처음 이름을 댄 땅이 옹진과 해주였다. 그 시각 옹진의 국군은 그 방송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이 듣고 있는 것은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와, 끊긴 전화기의 잡음이었다.

남쪽에서도 그 주장에 장작을 보태는 일이 생겼다. 연합신문 최기덕 기자가 백인엽을 만나고 간 뒤 국군이 해주로 진격했다는 기사를 썼다. 백인엽은 해주 진격을 부인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 뒤로도 제17연대가 6월 23일부터 25일 사이 먼저 포를 쏘았다고 주장했고, 전투 중 포로가 된 장병 교육을 맡은 제17연대 정훈관 한서한 중위를 증거로 세웠다1.

이튿날 6월 26일, 김일성은 다시 방송에 나왔다. 「전체 조선 인민에게」라는 연설이었다. 그는 이 전쟁을 이승만 도당이 일으킨 동족상잔이라 불렀고, 인민군이 반격에 나선 첫날 38선 남쪽 십 킬로미터에서 십오 킬로미터까지 나아가 옹진과 연안, 개성, 백천을 한꺼번에 해방했다고 말했다8. 지금 전해지는 연설문은 북한이 1981년에 펴낸 김일성 저작집에 실린 것이다8. 같은 날 소련 대사 슈티코프가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는 공격이 새벽 네 시 사십 분에 시작된 계획된 작전이었다고 적었다.

*

25일 밤, 부포.

해가 지자 백인엽은 수송관을 불러 연대에 남은 차량을 모두 모으게 했다. 여든 대 남짓이었다7.

“전조등 켜고 중기동까지 달려. 끝까지 가서 불 끄고 돌아와. 돌아오면 다시 켜고 또 가.”

트럭들이 서너 대씩 짝을 지어 불을 켜고 북쪽 갈림길 중기동(현 북한 황해남도 강령군)으로 가는 길을 달려 나갔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줄을 이었다. 불을 끄고 돌아온 트럭이 다시 불을 켜고 나갔다. 북쪽에서 보면 남쪽에서 증원 부대가 끝도 없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같은 트럭이 몇 번째 지나가는 겁니까?”

“북쪽에서 세고 있으면 벌써 한 개 사단은 올라왔을 거다.”

운전병들은 밤새 같은 길을 오갔다. 곡사포와 박격포는 해가 뜰 때까지 북쪽 능선을 두드렸다2. 그날 밤 북한군은 부포로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

밤 아홉 시, 피란민을 가득 실은 민간 배 한 척이 부포에 닿았다. 배에서 선우 중위와 병사 열 명이 내렸다2. 그들은 오후 두 시에 짐을 실은 트럭 다섯 대를 몰고 옹진의 연대본부를 빠져나왔고, 길이 막히자 배를 얻어 타고 바다로 돌아왔다.

밤 열한 시 삼십 분, 어두운 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이 부포로 들어왔다. 뱃머리를 열어 해안에 바로 사람과 차를 싣고 내리는 해군 상륙함 LST-801이었다7. 인천을 떠난 배는 두 척이었는데, 부포까지 온 것은 한 척이었다1.

불빛 없는 바다에서 큰 배를 작은 항구에 대는 일은 더듬어 가는 일이었다. 뱃머리의 수병이 추를 던져 물 깊이를 외칠 때마다 함장 김옥경은 속도를 더 줄였다. 선창 쪽에서 손전등 불빛이 몇 번 깜박였다. 연대가 보내는 신호였다.

배가 닿자 김옥경이 선창으로 내려와 백인엽에게 말했다. 물때 때문에 배는 아침 여덟 시 전에 떠나야 했다2. 두 사람은 새벽 다섯 시까지 승선을 마치기로 했다7. 기다리던 병사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누군가 배의 크기를 보고 말했다.

“저거 하나면 다 탄다.”

옆에 있던 고참이 바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물 빠지기 전에 타야 다 타지.”

*

6월 26일 새벽 다섯 시, 부포항.

연대 주력이 부포항에 모였을 때 북한군도 철수를 눈치챘다. 부포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총격전이 세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7. 북한군은 무너진 조촌교 옆으로 우회로를 닦아 전차를 건너보냈다. 중기동 갈림길에는 57밀리 대전차포 한 개 소대가 숨어 있었다. 선두 전차가 200미터까지 다가왔을 때 포가 옆구리를 때렸고, 전차는 길 위에 멈춰 섰다7.

서해의 썰물은 빠르고 멀리 빠진다. 아침 여덟 시가 지나자 부포항의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LST-801은 갯벌에 얹히지 않으려고 바다 쪽으로 5킬로미터를 물러났다7.

이제 배까지는 작은 배를 타고 가야 했다. 작은 배까지는 갯벌을 걸어야 했다. 병사들은 소총을 머리 위로 들고 무릎까지 빠지는 갯벌을 헤쳐 나갔다. 들것을 든 병사 넷이 발이 빠질 때마다 들것이 기울었고, 들것 위의 부상병은 이를 악물었다. 트럭과 무거운 포는 대부분 그 자리에 버리거나 부수었다7.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작은 배가 떠날 때마다 사람 수를 셌다.

“부상병 먼저. 포병은 마지막이다.”

열 시 삼십 분, 북한군이 부두 가까이 들어왔다. 선창 끝에는 105밀리 곡사포 한 문이 남아 있었다. 백인엽은 그 포 곁에 서서 포병들과 함께 북쪽으로 포탄을 날렸다7. 포 진지를 맡은 제7포병대대 전포대장 박승옥 소위가 백인엽에게 다가왔다.

“아직 못 탄 엄호 병력이 있습니다. 그들을 기다려 주십시오.”

백인엽은 출발을 늦췄다. 엄호 병력이 마지막 작은 배에 오르자, 그는 배에 먼저 떠나라고 손짓했다. 열한 시, 마지막 배가 떠났다7. 백인엽은 배가 사거리 밖으로 나갈 때까지 포를 쏘았다. 포탄이 다 떨어지자 포병들은 포를 분해해 조각조각 바다에 던졌다7. 포신이 물에 들어간 자리에서 거품이 올라오다 잦아들었다.

선창에는 백인엽과 마흔 명 남짓한 병사만 남았다. 백인엽은 허리에서 권총을 뽑았다. 그 총구가 어디를 향하는지 본 제7포병대대장 박정호 소령이 달려들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1.

“연대장님, 연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을 누가 다시 모읍니까?”

백인엽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일행은 선창에 매여 있던 작은 배에 올랐다. 기관도 돛도 없는 배는 몇 시간 동안 물살에 떠밀려 다녔다2. 일행은 결국 지나던 배에 건져 올려졌고, 연평도(현 인천 옹진군 연평면)를 거쳐 27일 아침 여덟 시 인천에 내렸다.

LST-801도 곧장 가지 못했다. 짙은 바다 안개 속에서 배는 방향을 잃고 헤맸다. 안개 속에서 어선 한 척이 큰 배를 알아보고 길을 잡아 주었다7. 부연대장 김희준이 약 1,200명을 이끌었고, 배는 27일 새벽 네 시 인천에 닿았다7.

*

6월 25일 밤부터 26일, 옹진반도 남쪽 항구 사곶(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

부포로 가는 길은 이미 끊겨 있었다. 송호림은 철수 목적지를 사곶으로 정했다. 제7중대장 조경학 중위가 걷는 병사들을 이끌고 옹진 남쪽으로 돌아 연곤산으로 갔다. 제1대대 부대대장 박주용 대위는 2.5톤 트럭 일곱 대에 병사를 싣고 옹진 시내를 뚫고 지나갔다7. 트럭은 시내에서 몇 번이나 북한군과 총을 주고받았다. 사곶으로 내려가던 길에서 제3소대장 조유동 중위와 선임하사 고용출 중사가 전사했다1.

저녁 일곱 시 삼십 분, 연곤산 동쪽에 흩어졌던 병사들이 모였다. 낙오병과 이 중대 저 중대 병사가 섞여 700명쯤 되었다7. 여덟 시에 출발한 대열은 두 시간 뒤 사곶에 닿았다.

사곶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군인, 경찰, 피란민이 2,000명 가까이 몰려 있었고, 항구에는 배가 한 척도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밀치며 바닷가로 몰렸다. 귀에 붕대를 감은 송호림이 권총을 뽑아 허공에 한 발을 쏘았다2. 바닷가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송호림은 전화로 연평면의 경찰 김두익 경사를 찾았다7.

“병력과 피란민이 항구에 모여 있습니다. 배가 필요합니다.”

김두익은 사곶에서 1킬로미터 앞바다의 섬 용호도(현 북한 황해남도 옹진군 룡호도리)에 대 놓은 대성호를 보내겠다고 했다. 대성호는 20톤짜리 기선이었고, 한 번에 90명 남짓을 태웠다7. 송호림은 순서를 정했다. 군인이 먼저, 경찰이 다음, 민간인이 마지막이었다7. 떠나기 전에 병사들은 끌고 온 차량 열다섯 대에 불을 붙였다2.

대성호가 한 번 갔다 오는 데 삼십 분이 걸렸다7. 배가 바닷가에 닿으면 사람들이 뱃전으로 몰렸다. 총을 멘 군인, 경찰, 보따리를 인 아낙, 아이를 업은 사내가 한 줄에 엉켰다. 선장이 뱃전에 서서 팔을 벌렸다.

“더는 안 돼요! 더 태우면 가라앉습니다!”

“다음 배는 언제 옵니까?”

“삼십 분이면 옵니다. 삼십 분!”

선장은 그 대답을 스무 번 가까이 했다. 대성호는 밤새 스무 번쯤 바다를 건넜다7. 바닷가의 줄은 조금씩 줄었지만, 북쪽의 포성은 그보다 빨리 가까워졌다.

26일 아침 일곱 시, 제1중대가 대성호에 올랐다2. 스무 번째 뱃길이 끝날 무렵 북한군 포탄이 사곶 부근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송호림은 수송을 멈췄다7. 사곶 바닷가에 민간인 500명쯤이 남았다2. 보따리를 깔고 앉은 사람, 물가까지 내려가 섬 쪽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 위로 마지막 대성호의 물결 자국이 지워졌다.

오후 두 시, 해군 함정 한 척이 사곶 앞바다에 나타났다. 함정에서 보이는 것은 바닷가 길을 오가는 북한군 기병뿐이었다2. 함정은 뱃머리를 인천 쪽으로 돌렸다.

*

6월 26일부터 30일, 용호도에서 대전까지.

용호도에 모인 국군은 1,400명쯤으로 불어났다7. 작은 섬에는 그 많은 사람을 먹일 쌀이 없었다. 제2대대 보급관 박건근 중위가 아침 아홉 시 대성호를 타고 배와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7. 네 시간 뒤 대성호는 20톤급 기선 하나와 큰 화물선 하나를 끌고 돌아왔다. 병사들은 전쟁이 터진 뒤 처음으로 끼니다운 끼니를 먹었다. 송호림은 화물선을 대성호와 새 기선에 줄로 묶었다7.

오후 세 시, 선단은 부포 쪽으로 키를 잡았다2. 도중에 건져 올린 제3대대 병사들이 부포는 이미 북한군 손에 넘어갔다고 알렸다. 선단은 뱃머리를 돌렸고, 27일 아침 일곱 시 연평도에 닿았다2.

송호림은 배들을 세 선단으로 나누어 한 시간 간격으로 띄웠다. 첫째 선단은 28일 새벽 인천에 들어왔다. 부두에서 들은 첫 소식은 서울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병사들 가운데 절반 넘게가 대대장을 기다리지 않고 수원 쪽으로 흩어졌다7. 둘째 선단은 제2대대 부대대장 이동호 대위가 이끌었다. 덕적도(현 인천 옹진군 덕적면) 앞바다에서 바다의 기뢰를 걷어 내는 작은 군함인 해군 소해정 YMS-513이 선단을 만났다1. 함장 박경철 대위는 인천 대신 군산으로 길을 잡게 했고, 송호림의 병사들은 29일 아침 일곱 시 군산에 내렸다1. 박주용이 이끈 셋째 선단은 같은 날 오전 열한 시 인천에 닿았다7.

연대는 대전 선화초등학교에 다시 모였다. 6월 30일, 대전에 모인 제17연대는 2,180명이었다3.

제17연대는 육지와 길 하나 닿지 않는 반도에서 이틀을 싸우고 반도를 잃었다. 피해 숫자는 자료마다 크게 다르다. 한쪽은 사망과 실종을 합쳐 1,420명으로 적고, 다른 쪽은 사망 113명, 부상 371명, 실종 64명으로 적는다. 사곶 바닷가에 남은 민간인 500명은 어느 쪽 숫자에도 들어 있지 않다.

사료 출처

1. 나무위키, 「옹진반도 전투」 — 특별경계 해제 경위(유엔 한국위원단 지적), 공사 중 포격 사망 다섯 명, 한혁 중위의 마지막 보고, 김희태 82밀리 박격포 전사, 김호경 소위, 조유동 중위와 고용출 중사 전사, 백인엽 자결 시도와 박정호 소령의 만류, LST 두 척 중 한 척 도착, YMS-513 박경철 대위와 덕적도·군산 항로, 연합신문 최기덕 기자 보도와 한서한 중위. 2. 영문 위키백과, 「Battle of Ongjin Peninsula」(en.wikipedia.org/wiki/Battle_of_Ongjin_Peninsula)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2005)를 근거로 정리한 글이며 원서 쪽수 대조는 남아 있다. 부대 배치와 중대장(제1중대 강은덕 대위, 제2중대 한혁 중위, 제5중대 김교석 중위, 제9중대 한홍 중위, 공병 박준희 중위, 대전차포 노경억 대위, 제7포병대대 박정호 소령), 강창남 소령 귀순, 김희태의 네 시 사십 분 출동과 여섯 시 십 분 전사 보고, 다섯 시 십 분 통신 두절, 고문단 사격 허가 지연, 다섯 시 사십 분 두락산 깃발, 제1중대 자동 포위, 제3대대 조 중위 파견과 「장갑차부터」 지시, 제10중대·제9중대(200고지, 바주카) 교전, 선우 중위와 병사 열 명의 민간 배 도착, 곡사포·박격포 밤샘 사격, 김옥경의 여덟 시 물때 통보, 백인엽의 마지막 곡사포 사격과 권총 자결 시도, 조각배 표류, 사곶 권총 발사, 차량 15대 소각, 26일 일곱 시 제1중대 승선과 민간인 약 500명 잔류, 박원근(박건근) 중위 출항, 오후 두 시 해군 함정과 북한군 기병, 오후 세 시 부포행과 회항, 27일 일곱 시 연평도. 3. 한국어 위키백과, 「옹진반도 전투」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2005)를 근거로 정리한 글이며 원서 쪽수 대조는 남아 있다. 6월 18일 정찰명령 제1호, 38경비 제3여단 대대 셋 옥동 이동(6월 21일), 제14연대의 제203전차연대 전차중대 배속과 취야 이동(6월 22일 밤), 붉은 신호탄, 기병의 태탄~옹진 접근로, 오익경의 57밀리 대전차포 실패, 노경억의 강령강 제방 근거리 사격, 박준희의 조촌교 폭파, 대전 선화초등학교 집결, 6월 30일 2,180명. 4.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미 육군 군사사센터, 1961), 제3장(koreanwar.org/kwp2/cmh/south_to_the_naktong.pdf) — 비에 젖은 38선과 네 시 포격, 옹진이 처음 공격받은 곳, 지상 공격은 반 시간 뒤 시작, 고문관 다섯 명의 여섯 시 무전(「곧 무너질 것 같다」)과 항공 철수, 자원한 조종사 스윙크·브라운, 평양방송 열한 시 발표와 김일성 오후 한 시 삼십오 분 방송, 제14연대가 이튿날 반도를 38경비 제3여단에 넘기고 해주·개성으로 떠난 일. 5. 변상문, 「화랑담배」 제3장 ⑳ 옹진전투1, 뉴스핌(2026.9.17), newspim.com/news/view/20260917001175 — 안개, 김희태의 지프 피격과 여섯 시 전사, 대대장 전사 소문, 제1중대 포위와 탄약 소진, 제5중대 함성, 송호림의 여섯 시 이십 분 명령·일곱 시 말재 역습, 아홉 시 중대 차출 지시와 송호림의 말, 두 시 철수 명령과 송호림의 말, 연대본부 정오 이동, 제5중대장 김교섭 전사·실종. 6. 북한 내무성, 6월 25일 보도, Wilson Center 디지털 아카이브 문서 114909 — 해주 서쪽·금천·철원 1~2킬로미터 침입 주장. 검색 요약으로 확인했고 원문은 열지 못했다. 7. 변상문, 「화랑담배」 제3장 ㉜ 옹진전투3, 뉴스핌(2026.9.28), newspim.com/news/view/20260928000007 — 조촌교 폭파 임무, 차량 80여 대 기만 행군, LST-801 23시 30분 입항과 다섯 시 승선 합의, 26일 다섯 시부터 세 시간 반 전투, 조촌교 우회로, 중기동 갈림길 57밀리 대전차포의 200미터 사격, 여덟 시 LST 5킬로미터 이동, 차량·중화기 포기, 열 시 삼십 분 부두 곡사포 사격, 박승옥 소위의 건의, 곡사포 분해 투기, 열한 시 출항, 해무와 어선 안내, 조경학 중위 도보제대와 박주용 대위 차량제대(트럭 일곱 대), 연곤산 700여 명, 김두익 경사와 송호림의 통화, 대성호(20톤·정원 90명·왕복 삼십 분·스무 번째 운항 뒤 포격으로 중단), 승선 순서, 용호도 1,400여 명과 박건근 중위의 식량 확보, 화물선 예인, 세 선단과 도착 시각, 서울 함락 소식과 병력 이탈, 이동호 대위 제2선단. 8. 김일성, 「전체 조선 인민에게 고함」(1950.6.26 방송 연설), 『Kim Il Sung Works』 vol. 6, 8~14쪽(북한 외국문출판사, 1981; marxists.org/archive/kim-il-sung/cw/06.pdf) — 「이승만 도당」의 동족상잔, 첫날 38선 남쪽 10~15킬로미터 진출과 옹진·연안·개성·백천 「해방」 주장. 그날의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1981년 저작집에 실린 판이다. 맞서는 기록은 1화 출처 4(슈티코프 1950.6.26 보고). [나이] 괄호 안 숫자는 1950년에서 출생연도를 뺀 나이다. 백인엽 1923년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Article/E0081283), 최현 1907년생(영문 위키백과 「Choe Hyon」), 김일성 1912년생. 출생연도를 확인하지 못한 인물은 나이를 적지 않았다. [자료 충돌] 북한군 주공 연대를 한국어 위키백과·Appleman은 제6사단 제14연대로, 영문 위키백과는 38경비 제3여단에 배속된 제1보병연대(연대장 김후진)로 적는다. 본문은 제14연대를 따랐다. 철수 인원은 Appleman이 LST 세 척에 약 1,750명, 한국 자료가 LST-801 한 척에 약 1,200명이다. LST 출항 시각은 오전 열한 시(뉴스핌)와 오후 네 시(영문 위키백과)로 갈리고, 뉴스핌은 LST가 26일 저녁 일곱 시 연평도에 들렀다가 27일 아침 떠났다고 적는다. 김희태 전사는 여섯 시(뉴스핌)와 여섯 시 십 분 보고(영문 위키백과)로 적힌다. 중기동에서 멈춘 전차는 뉴스핌이 T-34, 영문 위키백과가 아홉 시 삼십 분 부포 부근의 SU-76M 두 대로 적는다. 대성호 정원은 90명(뉴스핌)과 80명(영문 위키백과). 기만 행군 차량은 80여 대(뉴스핌)와 85대(영문 위키백과). 백인엽 일행은 40명(나무위키)이고 건진 배는 해군 소해정(나무위키)과 어선(영문 위키백과)으로 갈린다. 박정호의 계급은 소령(영문 위키백과·나무위키)과 중위(뉴스핌), 보급관 이름은 박건근(뉴스핌)과 박원근(영문 위키백과), 제5중대장은 김교섭(뉴스핌)과 김교석(영문 위키백과·나무위키), 김두익 경사는 연평면 소속(뉴스핌)과 용호도 지서주임 김두의(나무위키)로 갈린다. 선우 중위의 트럭 다섯 대는 영문 위키백과가 옹진 출발 때 끌고 나온 것으로 적고, 나무위키는 의무대장에게 배정된 트럭으로 적는다. 셋째 선단의 도착지는 뉴스핌이 인천, 영문 위키백과가 YMS-513으로 군산이라 적어 둘째·셋째가 뒤바뀐다. 피해 숫자는 본문에 두 자료를 함께 적었다. [재구성] 모든 대화(백인엽과 참모, 김희태의 전화와 강은덕에게 내린 명령, 제1중대 병사들, 송호림의 전화와 부상 때의 말, 오익경의 지시, 노경억과 포수, 트럭 운전병, 선창의 병사들, 김희준, 박승옥의 건의, 박정호가 백인엽을 붙잡으며 한 말, 대성호 선장과 피란민)는 기록의 뼈대 위에 쓴 소설적 재구성이다. 송호림의 세 마디(「지금은 공격 중입니다…」「…철수하라니요?」, 김두익에게 한 말)는 뉴스핌 연재의 문장을 줄여 옮긴 것이다. 장면 속 몸짓과 감각(진술서가 든 서랍, 피에 젖은 가마니, 북한군 대열이 젖은 풀에 엎드린 모습, 지프가 연기를 내는 모습, 안개 속에 엎드린 제1중대, 피란민 행렬과 닭, 박준희가 손을 내리는 모습, 강령강 둑의 흙 냄새, LST 입항 절차, 갯벌의 군화, 포신이 가라앉는 거품, 백인엽이 권총을 뽑는 순간과 박정호가 팔을 붙잡는 동작, 사곶에 남은 사람들)도 같다. 고문관 다섯 명의 이름, 대성호 선장의 이름, 북한군 측 명령서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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